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보라, 예수께서 팔을 벌리셨도다
한종호
2023. 10. 13. 23:02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36 보라, 예수께서 팔을 벌리셨도다
마태수난곡 2부 70번 | |||
음악듣기 : https://youtu.be/89iwDH_P1H4?si=UhYH7MibvJAcBy4S | |||
70(60) 코멘트 |
알토 아리아 | 솔로 보라, 예수께서 팔을 펼치셨도다. 우리를 끌어안기 위해서: 오라! 합창 어디로? 솔로 예수의 팔 안으로. 구원을 간구하라, 자비를 받아들이라. 구하라! 합창 어디에서? 솔로 예수의 팔 안에서 그안에서 살고 그안에서 죽으며 그안에서 안식하라 너희 집 떠난 어린 병아리들아 머무르라! 합창 어디에? 솔로 예수의 팔 안에 |
SOLO Sehet, Jesus hat die Hand Uns zu fassen ausgespannt; Kommt! CHOR Wohin? SOLO In Jesu Armen sucht Erlösung, nehmt Erbarmen, Suchet! CHOR Wo? SOLO In Jesu Armen. Lebet, sterbet, ruhet hier, Ihr verlaßnen Küchlein ihr, Bleibet! CHOR Wo? SOLO In Jesu Armen. |
골고다에서 피어난 생명의 소리
알토의 레치타티보 ‘아, 골고다! 그곳이 나의 영혼 가까이 다가오고 있구나’에 이어 알토의 아리아가 시작됩니다. 죽음의 언덕 골고다에 불어오는 황량하고 음습한 바람 소리와 같았던 오보에 다 캇치아(우리가 듣고 있는 리히터 지휘의 음반과 같은 현대 오케스트라 연주에서는 잉글리시 호른이 쓰입니다) 소리가 계속 이어지며 아리아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분명 같은 악기와 비슷한 분위기의 소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전주는 점점 다르게 변합니다. 오보에 소리가 작은 부점의 리듬을 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어 ‘쫑쫑쫑’ 여기저기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작은 병아리들(das Küchlein)이 십자가로 모여듭니다. 죽음의 언덕 골고다에서 생기가 움트고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의 죽음이 생명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예수는 여전히 십자가에 못이 박힌 채로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매달려 있는데 철없는 병아리들이 예수의 품, 생명의 품을 찾아 십자가 아래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죽음을 앞둔 고통 속에서도 피와 땀과 눈물에 젖은 얼굴로 예수는 그들을 자비롭게 내려 봅니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다가 여기서 또다시, 저는 울어버리고 맙니다. 바흐의 음악에는 이와 같은 ‘뜬금없는 은혜’가 종종 있습니다. 여기에서 ‘은혜’라 함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자주 쓰는 것으로서 설교나 찬송이 마음 깊이 닿았을 때 소위 ‘은혜 받았다!’라는 표현 가운데 쓰이는 용어입니다. 바흐의 음악을 듣노라면, 바로크 음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300년 뒤에 그 음악을 듣는 이에게도 너무나 생생한 ‘은혜’가 겨를 없이 갑작스레 찾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에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감동이 언제 어디서 찾아와 단단해져 버린 우리 마음과 영의 외벽을 한꺼번에 녹여버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리아의 전주를 담당하고 있는 두 대의 ‘오보에 다 캇치아’는 새끼를 모으고 있는 암탉의 울음 소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번째 마디의 16분음표의 묶음과 트레몰로가 암탉의 소리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암탉의 소리와 철없는 병아리들이 몰려드는 속도와 이 모습을 내려다 보고 계시는 예수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느린 템포가 요청됩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리히터의 1958년 음반은 3분 52초 동안 이 곡을 연주합니다. 반면 최근의 연주들은 이 곡을 굉장히 빠르게 연주합니다. 빠르게 연주해야 감각적이고 유려하게 부를 수 있고 노래하기도 편하기 때문입니다. 점점 감상용 음악으로 되어갈 뿐, 현대인들에게 마태수난곡의 신앙적인 깊은 의미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한 1988년 음반은 3분 15초, 2007년 발매된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와 카운터테너 안드레에스 숄의 연주는 2분 55초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2분 50초 이내로 템포를 잡습니다.
알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것을 우리를 끌어안아 주시기 위해서 팔을 벌리고 계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기 위해서 집을 나갔던 철없는 병아리들이 한 마리 두 마리 십자가 아래로, 그 품속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알토는 ‘보라, 예수가 팔을 펼치셨도다. 우리를 끌어안기 위해서’라고 노래하다가 '오라/kommt!' ‘구하라/suchet!', '머무르라/bleibet!'라고 더 적극적으로 초대합니다. 그 노래에 병아리들은 ‘어디로/wohin?’, ‘어디에서/wo?’, ‘어디에/wo?’라고 조심스럽게 되물으며 십자가 예수의 발아래로 이끌리고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의 자비로운 시선은 그 모습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태복음 23장 37절, 십자가에 달리시기 얼마 전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린 것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루살렘 감람산 정상에서 겟세마네로 내려오는 중간지점에는 ‘주님의 눈물교회(Dominus Flevit Church)’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제단 너머에는 아치형의 창문이 있는데 그 창문의 창틀에는 십자가와 가시관 문양이 있고 그 너머로는 예루살렘 성이 보입니다. 예수의 시선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제단 아래에는 타일 모자이크 문양이 있는데 암탉이 날개 품 안에 병아리들을 모으고 있고 그 둘레에는 마태복음 23장 37절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바흐 음악의 해석
메트로놈이 발명되기 전이기 때문에 바흐의 음악에서는 지휘자나 연주자 별로 템포가 매우 다양합니다. 그리고 결정 되어진 템포는 음악 전반에 매우 중요한 차이를 결정짓습니다. 그러나 저는 리히터의 템포를 지지합니다. 작곡가인 바흐의 의도에 가장 가깝기 때문입니다.
대중음악과는 달리 클래식 음악은 연주하는 사람 개개인의 개성보다는 절대적인 이상향을 추구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 절대적인 이상향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작곡가’입니다. 대중음악에서는 작곡가가 누구인지는 저작권료와 관계된 이슈 외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래를 부른 사람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클래식 음악은 그 해석과 연주와 감상에 있어서 작곡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작곡가가 곡을 써 내려가면서 상상했던 소리를 재연해 내는 것이 클래식 음악가들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클래식 음악가들은 작곡가의 삶과 환경, 사상, 성격, 심지어 작은 버릇까지도 섬세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바흐는 마태수난곡의 이 부분을 쓰면서 분명히 마태복음 23장 37절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므로 바흐가 생각했던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리히터의 템포가 가장 적절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이유로 저는 리히터의 음반을 마태수난곡의 가장 명반으로 꼽는 것이고 그 음반과 함께 이 여정을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연재의 여덟 번째 시간, ‘이 향유는 나의 눈물입니다’에서 소개했던 알토 아리아 ‘Buß und Reu(참회와 후회의 마음이)’도 마찬가지의 경우입니다. 그 아리아의 반주 파트에 있는 플루트의 스타카토가 표현하는 것은 바로 ‘참회의 눈물이 향유가 되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바흐가 의도한 그 표현을 살리기 위해서는 역시 템포를 여유 있게 설정해야 합니다.
예수의 품 안으로
바흐의 교회음악은 회화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 보시기 바랍니다. 암탉이 새끼를 모으기 위해 날개를 펴듯 예수는 팔을 벌려 십자가에 달려있습니다. 몇 번이나 그들을 품어주며 가르치고 타일렀지만, 그들은 그 품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또다시, 이제는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으면서까지 예수는 그들을 품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듣고 있는 리히터의 음반에서 ‘어디로/wohin?’, ‘어디에서/wo?’, ‘어디에/wo?’라고 묻는 합창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뮌헨 소년합창단(Münchener Chorknaben)이 부드러운 울림이 있는 올림박에 맞추어 순수하고 티 없이 맑은 병아리들의 목소리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해맑아 안쓰러울 정도입니다. 그렇게 맑고 정성스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 품 안에 안겨야 합니다.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서 죽으며, 그 안에서 안식해야 합니다.
In Jesu Armen
Lebet, sterbet, ruhet hier,
예수의 품 안에서
그곳에서 살고 죽으며, 안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