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나의 마음에 예수를 모시겠노라
한종호
2023. 12. 17. 16:11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39
나의 마음에 예수를 모시겠노라
마태수난곡 2부 73b~75번 마태복음 27:55~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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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듣기 : https://youtu.be/lt2ZAfNP4Yw?si=r8tBoGKdvUaAlDv4 | |||
73b(64)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55.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 55. Und es waren viel Weiber da, die von ferne zusahen, die da waren nachgefolget aus Galiläa, und hatten ihm gedienet; 56. unter welchen war MARIE Magdalena, und MARIE, die Mutter Jacobi und Joses, und die Mutter der Kinder Zebedäi. 57. Am Abend aber kam ein reicher Mann von Arimathia, der hieß Joseph, welcher auch ein Jünger Jesu war. 58. Der ging zu Pilato, und bat ihn um den Leichnam Jesu. Da befahl Pilatus, man sollte ihm ihn geben. |
74(65) 코멘트 |
베이스 서창 |
저녁이 되고 싸늘한 기운이 감돌자 아담의 파멸이 드러났도다 이 저녁에 구주께서 그를 굴복시키셨도다 이 저녁에 올리브 잎을 하나 물고 비둘기가 돌아왔도다 오 이 아름다운 순간이여! 오 아름다운 저녁이여! 이제 하나님과의 화목의 약속이 이루어지는구나 예수께서 그의 십자가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니 그의 시신은 이제 휴식에 드셨도다. 아, 사랑하는 영혼아! 부탁하여라 가서 예수의 죽으신 몸을 내어 달라고 오 신성하고 보배로운 그의 흔적을! |
Am Abend da es kühle war, Ward Adams Fallen offenbar. Am Abend drücket ihn der Heiland nieder. Am Abend kam die Taube wieder, Und trug ein Ölblatt in dem Munde. O schöne Zeit! O Abendstunde! Der Friedensschluß ist nun mit Gott gemacht, Denn Jesus hat sein Kreuz vollbracht. Sein Leichnam kommt zur Ruh. Ach! liebe Seele, bitte du, Geh, lasse dir den toten Jesum schenken, O heilsames, o köstlich's Angedenken! |
75(66) 코멘트 |
베이스 아리아 | 나의 마음아, 정결케 하여라 예수를 네 안에 장사지내 모시겠노라 그가 이제부터 영원히 내 안에 거하시며 편히 안식하시리니 세상이여 이제 떠나거라! 예수를 맞아들여야 하기에! |
Mache dich mein Herze, rein, ich will Jesum selbst begraben. Denn er soll nunmehr in mir Für und für Seine süße Ruhe haben. Welt, geh aus, laß Jesum ein! |
그의 곁에 머물렀던 사람들
실로 엄청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위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큰 파장일수록 여운이 크게 남듯 위대한 이야기 후에는 에필로그가 있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 전에 에반겔리스트는 지금까지 예수와 십자가에 집중되었던 시선을 골고다 언덕 주변으로 환기시킵니다. 저 멀리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들이 보입니다. 여자라서 가로막혔는지, 무엇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의 모습을 차마 그 발치 아래에서 볼 수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들은 멀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 곁에 머물렀던 여인들은 일찌감치 예수 곁을 떠났던 사내들을 떠오르게 합니다. 예수가 붙잡혔을 때, 예수의 꿈이 끝났다고 생각해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그 여인들은 십자가를 진 예수를 따라 갈보리 언덕을 함께 올랐습니다. 사형 집행이 끝나고 십자가를 구경거리 삼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마저 모두 떠났지만, 그 여인들은 십자가 위에 달려 고개를 꺾은 예수의 시신 곁에 끝까지 머물렀습니다. 예수를 장사 지내고 무덤을 아리마대 요셉마저 떠났지만 여인들은 무덤을 바라보며 끝까지 그 곁에 머물렀습니다.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마태복음 27:60~61)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기독교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 소중한 사람들은 끝까지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나무 그루터기와도 같은 ‘남은자(Remnant)’들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듯이 끝까지 그의 곁에 머물러 준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의 꿈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의 아침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가장 먼저 예수를 찾은 이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요한복음 20:1). 빈 무덤을 확인한 마리아는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립니다(요한복음 20:2). 무덤으로 달음질해 도착한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확인하고는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갑니다(요한복음 20:10). 반면 마리아는 다시 무덤으로 돌아와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20:11). 사태만 파악하고 용건만 챙겨 집으로 돌아간 두 제자와 달리 울면서도 마리아는 그의 곁에 남아 머물렀던 것입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막막해도 마리아는 그의 무덤, 그의 마지막 자취가 남아 있는 그 곁에 남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녀를 만나 주십니다. 마리아는 인간의 운명을 뒤바꾼 가장 위대한 역사,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마태수난곡이 기록하고 있는 십자가 사건이 청중들에게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예수 곁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먼저, 마태수난곡에서 예수의 첫 대사는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마태복음 26:2)” 였습니다. 유월절 식탁을 함께 할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더라도 놀라지 말고 끝까지 함께 머물러 달라는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가 향유를 그의 머리에 부었을 때에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이들이 당신과 함께해 줄 것을 원하셨고 유월절 식탁을 제자들과 함께하신 것은 십자가 이야기에서 ‘예수와 함께 머무르는 것’의 가장 충만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열 번째 시간에 만났던 소프라노의 서창 ‘Wiewohl mein Herz in Tränen schwimmt, Daß Jesus von uns Abschied nimmt/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다니 내 마음 눈물 속을 헤엄치는 듯합니다’는 예수의 곁을 떠나는 것이 마음과 영에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노래하고 있으며 열세 번째 시간에 만났던 22번 곡 코랄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Ich will hier bei dir stehen,
Verachte mich doch nicht!
Von dir will ich nicht gehen,
Wenn dir dein Herze bricht.
Wann dein Herz wird erblassen
Im letzten Todesstoß,
Als dann will ich dich fassen
In meinen Arm und Schoß.
나 여기 당신 곁에 서 있습니다.
주여 나를 비웃지 마소서.
당신 곁을 결코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산산이 부수어질 때,
마지막 죽음의 고통이 당신을 엄습할 때,
나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내 팔에, 내 품에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또한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세 명의 제자들에게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 bleibet hie, und wachet mit mir./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라고 부탁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비록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마음을 대신하는 테너의 레치타타보와 아리아는 ‘Wie gerne blieb' ich hier!/나는 기꺼이 여기에 머무르겠나이다.’, ‘Ich will bei meinem Jesu wachen/나의 예수 곁에 깨어 있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 장면에서, 그리고 오늘 장면의 여인들에게 이르기까지 마태수난곡은 우리에게 십자가 예수 곁에 머물러야 한다는 메시지를 지속하여 남기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이렇게 세속화된 것도,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버린 것도, 참된 신앙의 능력과 품격을 잃어버리고 상대화되어 버린 것도 모두 십자가의 예수 곁에 끝내 머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예수
예수 곁에 머무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저는 마태수난곡을 통해 십자가 예수의 사랑과 고통과 외로움을 새롭게 만나는 가운데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곁에 머무른다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것이 영적인 것이 되었든 삶의 실재에 관한 것이 되었건 간에, 어떤 효용성과 연관 지어서만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만 그의 곁에 머물러 달라 요청한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우리 곁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은 상호적입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도, 받기만 하는 사랑도 절반의 사랑일 뿐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는 그가 사랑하신 사람들로부터 똑같이 사랑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성찬을 나누셨고 함께 해달라고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신 것도 그와 같이 생각할 때 새로운 해석의 지평이 열립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 물음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키고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한 것, 혹은 제자들을 목자들로 세워 주시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우리 입장에서, 효용의 측면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사랑은 ‘서로사랑’이며 어떠한 효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로 고귀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랑하냐고 물은 것은 당연히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기 때문임에도 왜 우리는 이 예수의 질문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일까요? 왜 우리는 십자가에서 사랑하는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완전히 홀로되었던 예수께서 그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두 번, 세 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 물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십자가 예수의 사랑을 피상적으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예수의 사랑을 이기적인 우리들을 위한 효용성의 측면에서만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랑하기에 사랑받고 싶었던 그의 당연한 마음을 알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야말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신 그의 사랑을 우리 것으로 받으려고만 했기에 그의 완전한 사랑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완전한 사랑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받은 사랑만큼 우리도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이셨던 예수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버림받으셨습니다. 버림받음 때문만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한 사랑이셨으며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과 완전한 사랑 속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그 사실은 예수께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울부짖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이후에 예수는 갈릴리 바닷가의 제자들을 찾아 완전한 사랑을 다시금 회복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아는 만큼 우리는 예수와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태수난곡은 저에게 그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마태수난곡은 예수 곁에 머무르며 그와 그의 십자가를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Am Abend
이제 마태수난곡의 이야기는 에필로그로 넘어갑니다. 고요한 저녁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성경은 ‘저물었을 때에(57절)’라는 표현으로 십자가 이후의 이야기의 시작을 알립니다. 하지만 루터는 이 부분을 ‘저물었을 때’로 번역하지 않고 ‘저녁에’라는 의미의 독일어 ‘Am Abend’를 선택했습니다. 헬라어 성경의 원문이 ‘οψιας δε γενομενης/옵시아스 데 게노메데스/저녁이 다가왔을 때’이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살려 번역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또 다른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독일인들에게 저녁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독일인들은 ‘아벤트(Abend, 저녁)’라는 단어를 여러 곳에서 매우 자주 사용합니다. 특히 중요한 행사를 주로 저녁 시간에 많이 하기 때문에 아벤트를 ‘모임’이나 ‘행사’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쉽게 다가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가곡 음악회’를 독일 사람들은 ‘Liederabent’라 부르며 그들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크리스마스이브’를 ‘Heiligabend(거룩한 저녁)’이라 부릅니다. 실재로 성 금요일 오후 2시 경에 시작했던 예배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던 시간은 저녁이 내려앉을 즈음이었습니다.
또한 독일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는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 1740~1815)의 ‘Der Mond ist aufgegangen/달이 떠올랐습니다’인데 이 시는 요한 아브라함 페터 슐츠(1747~1800)의 곡조에 얹혀 ‘Abendlied(저녁노래)’라고 불리며 세대를 막론하고 모든 독일인에게 자장가로부터 장례식 음악에 이르기까지 두루 애창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독일 가곡 베토벤의 ‘Ich liebe dich’에는 저녁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모두 한 번쯤 음악 시간에 불러 봤을 첫 번째 소절입니다. ‘Ich liebe dich so wie du mich, am Abend und am Morgen’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듯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녁에도 아침에도’입니다. 저녁이 아침보다 먼저 언급되는 것이 우리로서는 참 어색합니다. 실재로 이 노래가 실린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는 이 부분을 ‘사랑이여 우리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독일인들에게는 아침보다 저녁이 더 중요합니다. 반면,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아침 식사가 매우 중요해서 ‘아침 밥 저녁 죽’이란 말이 있지만, 독일어로 아침 식사는 ‘Frühstück/프뤼슈틱’입니다. ‘프뤼’는 ‘이른’이란 뜻이고 ‘슈틱’은 ‘조각’을 의미하므로 이른 시간에 빵 몇 조각 대충 먹는 것이 독일의 ‘아침 식사’입니다. 반면 점심과 저녁 식사는 ‘(제대로)먹다’라는 의미의 ‘~essen/에쎈’이 쓰입니다.
아침은 생기발랄한 밝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독일은 위도상으로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습니다. 저녁이 길고 한여름을 제외하고는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시간임에도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사랑 노래는 ‘세레나데(小夜曲)’이고 남쪽 이탈리아의 사랑 노래는 ‘마티나타(아침의 노래)’가 더욱 사랑받고 있습니다.
어둡고 긴 저녁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독일인들은 사색과 성찰을 즐겼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학자와 철학자와 사상가와 문호들이 독일어권에서 배출되었지요. 앞서 언급한 ‘Abendlied(저녁노래)’의 3절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토록 깊이 있는 가사를 자장가로 불러 주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온 세대의 독일인들이 사랑하며 애창한다는 것은 독일인들이 얼마나 저녁을 사랑하고 있으며 깊이 있는 성찰의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게 해줍니다.
Seht ihr den Mond dort stehen?
Er ist nur halb zu sehen
und ist doch rund und schön.
So sind wohl manche Sachen,
die wir getrost belachen, weil unsre Augen sie nicht sehn.
너희는 저기 있는 달이 보이는가?
반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둥글고 아름답구나
이처럼 제대로 보지 못하고서도
마음대로 비웃는 우리의 모습도 그러하구나
다음으로, 루터가 ‘Am Abend’를 선택했던 또 다른 이유는 희망이 움트는 새로운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6장부터 9장에는 노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창세기 8장 11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창세기 8:11)
바흐와 피칸더는 루터가 사용한 ‘Am Abend’라는 표현을 통해 이 구절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피칸더에 의해 추가된 베이스의 레치타티보 가사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저녁’과 홍수 이후에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온 ‘저녁’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바흐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살려냅니다. 현악기들로만 구성된 부드러운 반주부를 처음부터 끝까지 여리게(sempre p) 깔아줍니다. 현악기들은 숨을 죽이며 그 저녁의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제1 바이올린은 두음씩 묶여서 동일한 패턴으로 움직이는데, 이는 서서히 어두움이 깔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커다란 서사가 끝나고 새로운 분위기가 열리는 에필로그가 그렇게 시작됩니다.
Am Abend da es kühle war,
Ward Adams Fallen offenbar.
Am Abend drücket ihn der Heiland nieder.
Am Abend kam die Taube wieder,
Und trug ein Ölblatt in dem Munde.
저녁이 되고 싸늘한 기운이 감돌자
아담의 파멸이 드러났도다
이 저녁에 구주께서 그를 굴복시키셨도다
이 저녁에 올리브 잎을 하나 물고
비둘기가 돌아왔도다
오 아름다운 이 순간이여! O schöne Zeit!
그러나 점점, 레치타티보가 진행되는 동안, 잔혹한 십자가와 여전히 메아리치고 있는 듯한 예수의 마지막 절규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울부짖는 여인들의 신음으로 인해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골고다 주변의 대기가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어둠이 임하고 있지만, 어둠이 짙어지는 만큼 골고다 언덕 서편의 노을빛은 더 밝게 타오릅니다. 다음 가사가 이어집니다.
베이스 레치타티보는 여전히 숨을 죽인 채로 경탄하며 ‘O schöne Zeit! O Abendstunde!/오! 아름다운 이 순간이여! 오 아름다운 저녁이여!’라고 노래합니다.
싸늘한 기운이 감돌고 조금씩 어둠이 깔려오는 저녁 시간이었지만 폭풍 후에 잔잔한 바다 위로 시원한 공기의 맑은 하늘이 펼쳐진 느낌이 듭니다. 아름다운 시간, 아름다운 저녁입니다! 그 순간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담의 원죄로 인해 파멸로 귀결될 인간의 운명을 되돌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여명이 되었고 십자가의 형벌이 속죄의 은혜가 되었으며 십자가의 최후가 영생의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작가와 한 사람의 음악가가 이와 같은 연결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성서적 감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갈보리 언덕의 저녁을 그리고 있는 마태수난곡의 회화적 표현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보았습니다. 음악과 문학, 회화 그리고 이제는 신학적으로도 마태수난곡은 매우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레치타티보의 가사를 보겠습니다.
O schöne Zeit! O Abendstunde!
Der Friedensschluß ist nun mit Gott gemacht,
Denn Jesus hat sein Kreuz vollbracht.
Sein Leichnam kommt zur Ruh.
Ach! liebe Seele, bitte du,
Geh, lasse dir den toten Jesum schenken,
O heilsames, o köstlich's Angedenken!
오! 아름다운 이 순간이여! 오 아름다운 저녁이여!
이제 하나님과의 화목의 약속이 이루어지는구나
예수께서 그의 십자가를 완성하셨기 때문이니
그의 시신은 이제 휴식에 드셨도다.
아, 사랑하는 영혼아! 부탁 하여라
가서 예수의 죽으신 몸을 내어 달라 하여라
오 거룩하고 보배로운 그의 흔적을!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와 마태수난곡
이제는 예수의 몸을 모셔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예수 곁에 끝까지 남았던 사람들은 안식일이 오기 전에 예수를 모실 무덤을 준비하고 깨끗한 세마포를 준비하여 예수의 시체를 정성스레 모시고자 했습니다. 이어지는 베이스 아리아는 그 여인들의 지극한 마음과 아리마대 요셉의 용기 있고 정성 어린 행동을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십자가에서 부활로 건너뛰곤 하지만 예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시신을 내리고 깨끗이 닦고 세마포로 감싸서 장사지내는 과정이 너무나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서양 미술의 역사 속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Deposition)’와 내려진 아들 예수의 시신을 안고 탄식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표현한 ‘피에타(Pieta)’라는 제목의 걸작들이 즐비합니다. 그중에서 마태수난곡과 가장 잘 어울리는 피에타는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1867~1945)의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작품의 원본은 독일 쾰른의 ‘케테 콜비츠 박물관(Käthe Kollwitz Museum Köln)’에 있으며 4배 크기의 모조품이 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베를린의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전쟁의 참화가 더이상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설치했던 ‘기억의 불’이 있던 자리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해가 뜨면 빛을 발하고, 비가 오면 비에 젖고, 눈이 오면 눈을 옷 삼아 입고, 매일 밤 어둠에 잠깁니다. 변덕스런 우리 마음과 롤러코스터처럼 변하는 인생을 십자가처럼 등에 지고 찾아가도 언제나 우리를 받아 주며 예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마태수난곡처럼,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는 그 앞에 선 우리를 다 품어 주고 있습니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는 전쟁 중에 아들을 잃은 작가 자신의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슬픔이 과장되거나 얼굴이 미화되지 않은 채로 표현되어 있고 그래서 더욱 깊은 애잔함을 불러일으킵니다. 무릎과 발 그리고 목, 모든 관절이 힘없이 꺾인 채로 어머니의 다리 사이에 안겨 있는 아들의 시신은 여전히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잠들어 있는 아기처럼 보입니다. 과장이나 미화 없이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지만 다른 어떤 작품과도 비할 수 없는 가슴 먹먹한 큰 감동을 준다는 면에서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콜비츠의 피에타는 닮아있습니다.
마음을 정결히 하여 그곳에 예수를 모시자
한편,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앞에 나선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부자였기 때문에 잃을 것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태복음 27:57)
레치타티보에 이어지는 베이스 아리아는 거룩한 마음으로 예수를 장사지내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마태수난곡에 실린 이 마지막 아리아는 여러 가지 느낌을 담고 있습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당시의 내 마음에 따라 그 여러 가지 느낌이 다르게 들려옵니다.
Mache dich mein Herze, rein,
ich will Jesum selbst begraben.
Denn er soll nunmehr in mir für und für
Seine süße Ruhe haben.
Welt, geh aus, laß Jesum ein!
나의 마음아, 정결케 하여라
예수를 네 안에 장사지내 모시겠노라
그가 이제부터 영원히 내 마음에 거하시며
편히 안식하시리니
세상이여 이제 떠나거라!
예수를 맞아들여야 하기에!
먼저, 정성껏 예수의 장사를 준비하는 마음입니다. 이 아리아를 듣노라면 새 아침에 마당을 쓸듯이 부드럽고 정성스럽게 그리고 적당히 분주하게 비질을 하고 가장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마음이 들려 옵니다.
또한 이 노래는 예수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할 수 있었던 용기는 그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질 마태복음 27장 59~60절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습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마태복음 27:59~60)
아리마대 요셉은 깨끗한 세마포로 정성스럽게 예수의 시신을 싸서 무덤에 모십니다. 부자로서 남는 돈으로 예수를 위한 무덤을 마련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파 두었던 새 무덤을 예수께 내어드립니다.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베이스 아리아는 오늘날의 우리 또한 아리마대 요셉이 그의 무덤에 예수를 모셨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를 모셔야 하며 그러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먼저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비록 예수의 시신을 모셨던 무덤은 며칠 뒤에 빈 무덤이 될 것이지만, 우리의 마음에 모신 예수는 모신 순간부터 영원토록(nunmehr für und für) 내 안에서(in mir) 달콤한 안식(süße Ruhe)을 누리실 것입니다.
Ich will Jesum selbst begraben.
예수를 네(내 마음) 안에 장사지내 모시겠노라
Denn er soll nunmehr in mir für und für seine süße Ruhe haben.
그가 이제부터 영원히 내 안에 거하시며 편히 안식하시리니
또한 이 노래는 확신에 찬 결단의 노래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처럼 용기 있고 정성 어린 마음으로 예수를 얻어 마음속에 장사지내 모시겠노라는 아름다운 결단이며 예수를 모시기 위해 마음을 정결케 하고 더 나아가 나의 마음에 가득한 세상 것들을 버리려는(Welt, geh aus!)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Welt, geh aus, laß Jesum ein!
세상이여 이제 떠나거라! 예수를 맞아들여야 하기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는 아름다운 자장가처럼 들립니다. 이제는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편안한 안식 속에서 아기처럼 누워 계시는 예수의 몸을 자신의 마음에 장사지내 모시겠다는 고백이기 때문에 자장가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슬픈 자장가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전농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