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베끼기, 위선의 깊이만 더해가고
좋은 설교가 널리 알려지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면 그것은 귀중한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설교의 표절이나 복제가 행해지는 것은 하등 이상한 게 아니다. 설교자가 말씀의 증언자이며, 전도자라는 점을 떠올린다면 ‘표절과 복제’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조차 하다. 애초부터 우리의 복음은 우리 자신의 창작물이거나 우리 자신의 특허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성서와 그에 얽힌 말씀의 내용을 여기저기서 포착하여 말씀 증언의 구성 요소에 포함시켜야 하고, 그로써 자신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자이다. 따라서, 표절이나 복제가 이미 있는 것을 따로 따내거나 본떠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근본에 있어서 설교의 표절과 복제를 문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도리어, 좋은 것이 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표절하고, 즉 설교에 등장시키고”, “복제, 즉 이런 저런 이상한 것을 섞지 말고 고스란히 그대로 전하는 것”이 어설프게 설교라고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의 증언보다 설교자의 영적 권위를 높여서야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교회의 현실에서 설교의 표절과 복제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 왜 그런가? 그 답은 자명하다. 설교의 표절과 복제가 말씀의 증언에 본질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전하는 자의 권위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어서이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표절과 복제란, 부족한 자신의 설교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즉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 그럴 듯하게 자신의 설교를 포장하고 마치 그 표절과 복제한 내용이 자신의 치열한 고뇌와 영적 쟁투의 과정에서 획득한 듯이 청중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동기와 목적을 가진 표절과 복제의 과정에서는, 본래 그러한 내용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제대로 밝힐 이유를 갖지 못하게 된다. 성서의 인용은 절수까지 철저하게 밝히면서도 설교의 표절과 복제에 있어서는 혹여 누가 그 출처를 알세라 전전긍긍하면서 은폐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자신의 영광과 권위가 그 표절과 복제의 뿌리에 있기 때문이다. 인용의 근거를 공개하면서 설교를 하게 되면, 청중들이 설교자 당사자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근거가 된 증언자에게 더 관심이 쏠릴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의 증언이 보다 핵심적인 관심이라고 한다면, 설교자는 그러한 좋은 내용이 어디에 있는 것이었는지 청중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 그럼으로써 청중들이 자신들 스스로 그 근거에 접하여 말씀의 묵상으로 인도하고 신앙적 깨우침과 변화의 길로 이끄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생각해봐도 좋은 내용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내세워 설교 속에 포함시킨다면 그것은 말씀의 증언이라는 순수한 동기가 있다기보다는 그로써 자신의 영적 권위를 높이는 것에 더 마음이 쏠려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위선이고 절도행위이다. 이것은 자신의 영적 고뇌와 쟁투 속에서 걸러진 말씀의 깨우침에 자신의 존재 전체를 걸어 증언해야 하는 전도자의 본질적 자세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사기행각이기 조차하다. 마치 자신이 그만한 영적 고투를 치르면서 대단한 것을 얻어낸 수준의 사람인 것처럼 내세우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가지 경험과 독서가 쌓이다 보면 인용의 근거를 제대로 기억할 수 없기조차 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표절이나 복제의 과정에 들어서게 될 수 있다. 이런 것까지 문제 삼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면 그 인용 내지는 복제의 근거에 대하여 ‘정확한 기억을 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하는 단서를 붙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아예 표절이나 복제인 줄도 모르고 자신이 생각해온 바라는 착각을 할 수도 있다. 그거야 어쩌겠는가? 이미 자신의 피와 살처럼 되어버린 생각이나 표현이나 구절이라면 그것은 표절이나 복제라기보다는 그 인용의 근거가 된 내용처럼 사고하고 살아오고 자신의 자산으로 여기는 영적 성장의 과정이 있었다고 인정해줄 만도 한 것이다.
표절과 복제의 명확한 기준은?
자, 여기서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 표절, 복제와 그럴 수 없는 것의 경계를 정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기준은 명확하다. 내용을 따오거나 베낀 출처를 명확히 하면 된다. 그래서 그런 말씀의 증언, 그런 영적 열매를 자신에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대상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그 안에 기본적으로 스며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설교자는 겸손해질 수 있으며, 청중의 인기를 모으는 방식으로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역사가 이토록 사방에서 심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증언을 자신의 설교에 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으며 자신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영적 차원의 경지에 대하여 이렇게 접하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그 출처를 소개하고 알리는 일은 설교자로서의 마땅한 본분인 것이다. 좋은 증언자, 좋은 고백, 좋은 깨우침의 근거를 청중들이 알게 되면, 그것은 좋은 신앙인을 길러내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 훈련시켜 내는 일에 본질적인 관심이 있다면,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등장시킨 타자의 깨우침이나 말씀, 설교 내용의 근거를 밝히는 일에 주저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권위에 상처가 생기게 된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청중들은 도리어 그러한 설교자의 솔직함과 진지함과 사방을 찾아다니면서 좋은 열매가 어디 없는가 노력하는 모습에 경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나중에 그 표절과 복제의 진실을 알게 되면, 설교자에 대한 존경과 권위는 배신감과 멸시로 바뀌게 될 것이다.
자신의 깨우침과 말씀 증언의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다고 여긴다면, 좋은 설교자의 모델을 선정해서 그의 설교를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설교 안에 소화하여 증언하는 것은 설교자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에 필수적인 절차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부끄럽거나 감출 일이거나 아닌 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내용을 밝히는 것은 도리어, 그 설교자의 정신세계와 그 뿌리를 알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며 설교를 듣는 이들에게 설교자의 정신세계와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함께 성장해나가는 감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준비한 자신의 설교보다는 표절 내지는 복제의 마음이 일어나는 다른 설교자의 설교가 신도들의 삶에서 보다 큰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정말 뜨겁게 확신한다면, 그 설교 한편 전체를 자신의 정직하고 진지한 육성을 통해서 그대로 전하는 것도 은혜로울 수 있다.
그것은 그 설교자의 신앙적 솔직함과 인간적 용기, 그리고 영적 감동의 깊이를 청중들이 느끼도록 함으로써 본래 그 설교의 작성자가 영적으로 고투하면서 도달한 경지를 모두가 함께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름 있는 이들의 말은 인용하기를 즐겨하고 그것을 자신의 설교의 수준으로 자랑까지 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동역자의 설교는 따오고 베끼면서 그 사실을 감추는 것은 명백한 이중인격 아닌가? 그런 인격적 자세로 하는 설교는 위선의 깊이만 깊게 하고 말 것이며, 그 말씀에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거는 무게를 상실하게 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와 말만 그럴 듯 하게 앞세우는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설교자가 되고 말 것이다.
설교 베끼기, 위선의 깊이만 더해가고
자신의 설교에 귀중한 내용을 공급해주거나 보완해준 설교자의 증언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 영적 고투를 청중들과 함께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인용과 복제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신 현실에 충실한 설교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스며 있지 않고 자신의 설교 역량을 과시하거나 내세우기 위해, 또는 부족한 설교 역량을 감추느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하면서 표절, 복제를 하는 행위는 타인의 영적 고투를 통한 신앙의 열매를 별 수고 하지 않고 자신의 것처럼 만든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할 것이다. 설교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할 영적 순수와 정직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지 못한 이가 어찌 사람들 앞에서 설교자로 나설 수 있겠는가?
나아가 설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에 대한 현실과 역사에 대해서 아파하는 심사가 절절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마음이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구체적인 현실을 알아야 한다. 구체적인 현실을 만나야만 가능하다. 예수님이 갈릴리라고 하는 현장에서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않은가? 거기에서 매일 매일의 수고로 지쳐있는 농부들을 만났고, 또 새벽부터 밤까지 바다를 향하여 그물을 던져야 하는 어부들의 고단함을 보았고, 과부와 고아들의 슬픔을 봤고, 유랑하는 걸인들을 봤고, 병에 걸려서 그 공동체에서 추출 당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예수님은 그러한 이들을 절절한 심정으로 품어 주고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보다 진지한 영적 고뇌를
이렇듯 설교자는 아주 구체적인 현실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만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만나면 그 마음의 깊이가 엄청나게 변화된다. 스스로 그것을 만나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그것과 관련된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을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사회가 무슨 고통을 겪고 있는지, 무슨 아픔으로 시달리고 있는지, 어떤 정책 때문에 무슨 문제를 실존적으로 겪어내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속속들이 알아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게 없으면 정말 이 사회에 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의 아픔의 무게를 가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비로소 성서를 읽는 눈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성서는 그렇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성서는 고난의 깊이에서 절망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아픈 아우성을 하늘을 향해 쏟을 수밖에 없었고, 하늘에 쏟은 그 절규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귀를 열고, 눈을 열고, 손을 내고, 아픔의 자리에 갈 수 있어야 한다. 이 아픔의 자리에 가서 그 아픔을 내 몸처럼 껴안아야 한다. 이건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다. 그 아픔의 자리에 깊이 들어가서, 그 아픔의 자리를 자기의 아픔처럼 깊이 절감하는 이 과정이 설교자를 성숙하게 만든다. 이 과정이 없이 무슨 성서에 대한 참고 자료라든가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있는 그대로 표절하고 복제하는 것 등을 통해서 성서의 메시지를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건 큰 착각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인간의 아픔에 절절하게 다가가는 마음이 기본이다. 그래야만 설교를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절박한 심사가 있고 거기서 생명이 태어난다. 이런 절절한 심사를 가진 설교자가 과연 표절에 생각이 미칠수 있을까?
표절한 설교 메시지에 사랑의 온기나 생명의 뜨거움이 나올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다 자기의 실존을 거쳐서 나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신적 깨달음만 가지고는 절대 되지 않는다. 듣는 사람들이 안다. 교인들은 훨씬 민감하게 안다. 왜? “저 사람이 내 마음을 아는구나. 내 아픔을 알고 있구나. 그냥 그런 것을 그저 넘기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안다. 그럴 때에 비로소 얘기가 된다. 그러기에 “설교라고 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걸어야 된다.” 말을 거는 게 아니라 존재 전체를 걸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설교의 표절과 복제가 횡행하고 논란이 되는 까닭은 한국교회의 영적 성장이 정체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다 진지한 영적 고뇌와 신앙 성장의 고투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자신을 온통 거는 노력을 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노력에 설교자들이 자신을 바치며 헌신하지 않을 때, 설교의 표절과 복제는 끊임없이 제기될 것이며 한국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좀 먹게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