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 출간 책 서평

질문이라는 열쇠

한종호 2026. 6. 1. 20:42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가진 이들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합니다. 많은 것들이 마음과 감정을 담은 것들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성탄 카드입니다. 직접 카드를 만들고 손으로 글씨를 써서 인사를 나누던 시간이 까마득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도 지난 성탄절 이런저런 카드를 받았으니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해가 바뀌면서 받은 카드를 모두 정리했지만, 책상 옆 창가에 한 장 남겨둔 것이 있습니다. 서 전도사님이 보낸 카드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던 자신을 다시 사역의 길로 이끌어주어 고맙다며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말씀의 맑은 샘을 준비하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며 말이지요.

 

목사가 되기 전 단계인 수련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잊을 수도 있었던 당부를 조심스럽게 실천하는 전도사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봅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정성을 담아 준비를 하니 모를 리가 없고, 카톡의 대문에 있는 본인 이름 아래에 말씀의 맑은 샘이라 적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목회 여건이 달라도 한 가지 변할 수 없는 것은 말씀의 소중함일 것입니다. 오래 전에 찾았던 태백의 검용소가 산 중턱 찾는 이 없을 때에도 맑은 샘 끊임없이 솟아 마침내 큰 강 한강을 이루는 것처럼, 말씀의 발원지를 지닌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이 메마를수록 더욱 소중한 일이 되었습니다.

 

며칠 전 아침 기도회 시간에 교역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책 요나서가 묻는 질문 17을 가지고, 서 전도사님과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책의 저자는 미국의 뉴욕 우리교회를 담임하는 조원태 목사님인데, 7개월 동안 주일낮예배 시간에 교우들과 나눈 말씀을 책에 담았습니다. 요나서를 질문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방식이 특이하고 신선했는데, 조목사님이 요나서 앞에서 떠올린 17개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 피하는가?” “왜 막으시나?” “왜 자려느냐?” “왜 그것이 우선인가?” “왜 그것이 딜레마인가?” “왜 나는 희생해야 하나?” “왜 바닥인가?” “왜 은혜인가?” “왜 사는가?” “왜 변화되어야 하는가?” “왜 다시 제자리인가?” “왜 나는 정당해야만 하나?” “왜 성내는가?” “왜 구경만 하는가?” “왜 기대하지 않는가?” “왜 흔들리는가?” “왜 아끼는가?”

 

17개의 질문을 대하면 몇 가지 점에서 당혹스럽습니다. 불과 4장에 불과한 본문 앞에서 이렇게도 다양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요나서>는 어릴 적 교회학교 시절 성경 동화에 등장하던 단골 내용, 큰 물고기가 사람을 삼켰다가 도로 뱉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내용인데, 그런 본문에서 이토록 실존적인 질문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의아해집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게 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분명히 17개의 질문은 저자에게서 나왔을 텐데, 저자는 그 질문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있자면 각각의 질문 앞에서 발가벗고 서서 대답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보다 더 엄중한 질문과 이보다 더 진솔한 대답이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무엇이 질문과 대답을 이토록 진지하게 만든 것일까요?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살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한 편의 설교가 갖는 무게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어찌 설교를 무게로 환산할 수가 있겠습니까만, 무게를 떠올린 것은 우리의 설교가 너무나도 가벼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초점을 잃어버린, 상투화된 표현과 생각을 나열하는, 어딘가 허공을 맴돌다가 가슴에 닿지 못한 채 사라지는, 눈물겨운 삶과는 상관이 없어 체온을 느낄 수 없는, 이어질 다음 말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도식화된, 목마름을 해갈하기보다는 더 큰 목마름을 주는, 특별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돌아서는, 그렇게 어떤 지점을 맴도는, 그러기가 쉬운 설교 한 편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그런 한계를 알기에 책 속에 담긴 무엇이 질문과 대답을 이토록 진지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더욱 눈여겨보게 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몇 가지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서는 생각은, 질문도 대답도 삶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렸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을 고아원에서 보냈습니다. 매일같이 매를 맞아야 했던 악몽 같은 시간은 말이 사라지고 숨도 납작해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그를 찾아오는 한 청년이 있었는데, 어느 날 청년은 그의 손을 잡고 목욕탕으로 데리고 갑니다. 등을 밀어주는 청년의 손은 때가 아니라 오래된 두려움을 씻어주는 손이었습니다. 목욕을 마치고는 국밥집으로 가서 국밥을 먹었고, 그다음으로 향한 곳이 좁은 골목에 있던 청년의 작은 방, 청년은 기타를 꺼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라는 노래였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절망 속에 갇혀 있던 한 아이의 마음속에도 샘 하나가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을 찾아온 청년의 이름이 민대근이라는 것과, 그때 찾아갔던 목욕탕이 갑을탕이라는 것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혼에 새겨진 이름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지워질 수가 없을 테니까요.

 

책의 표지가 저자가 서 있는 곳을 잘 드러내줍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엉긴 천 같기도 하고 구겨진 깡통처럼도 보이는 한 사람이 중심을 잃은 채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가 요나라는 것이 대뜸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서 표지를 다시 보면, 그가 저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아래 ‘17’이라는 숫자가 요나보다도 크게, 견고한 구조물처럼 서 있습니다. 숫자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는 바로 그 자리가 밑바닥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저자는 성경을 읽는 자신이 삶의 밑바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언어가 공허한 것이 되지 않도록, 삶과 유리되지 않도록 현실과 자신을 비끄러매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에 서 있는지를 살피고 또 살핍니다. 그런 마음으로 요나를 만나니 요나가 선 자리가 저자가 선 자리가 되고, 저자가 들려주는 요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됩니다. 요나의 고민과 선택은 먼 과거의 것이 아니라, 생생한 오늘의 것이 됩니다.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서 전도사님, 오늘 우리들의 설교가 가볍고 공허하게 여겨지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발이 땅에 닿지 않은, 삶의 근저에 머물지 않는, 질문도 대답도 근원에서 벗어나 있는, 바로 그것에 말이지요. 예수님이 걸어가신 모든 걸음에 묻어 있는 흙내 속에는 척박한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땀과 눈물이 흠뻑 배어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는 안간힘은 요나서를 읽을 때만이 아니어서, 읽은 뒤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향하게 합니다. 저자가 애정과 책임을 가지고 참여하는 국경선평화학교가 그렇고,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가 그렇습니다.

 

수년 전 열하루 동안 DMZ를 홀로 걸으며 기도를 한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저보다도 더 국경선의 의미를 마음에 품은 이가 있다는 것이 더없이 반가웠습니다. 교회는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대응하여 미국 내 한국계 교회들이 신앙적 시민연대를 시작하고, 서류 미비 이민자들에게 법률적 보호와 영적 돌봄을 동시에 제공하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일이 떠날 수 없는 곳을 향한 깊은 애정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중심에도 이 머뭇거림이 있다는 문장 또한 이런 마음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질문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대답하는 것만큼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질문과 대답을 이토록 진지하게 만드는 것 중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저자가 지켜가는 언어에 대한 태도입니다. 저는 이 책을 여러 날에 걸쳐 읽었습니다. 장례와 심방 등 목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쉽게 읽을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짤막한 한 문장을 읽고는 한참 멈춰서야 했던 순간들이 적지 않습니다. 설교자가 쓴 한 문장이 마치 하나의 조각처럼 다가오고는 했습니다. 마음에 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불필요한 모든 부분을 깎아내는, 그 일을 위해 시간을 잊은 조각가를 대면하는 듯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에 대한 천착, 다양한 인문학적인 관심과 지식은 우리의 공부가 끝이 없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잔잔한 잔치’ ‘돌이킬 여백’ ‘고요한 이정표’ ‘생각의 뜀틀’ ‘파편 같은 결단’ ‘익숙한 죄의 리듬’ ‘어두운 거울등 우리말의 단어 하나가 다른 단어와 어울려 어떻게 울림과 화음을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의미를 확장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도 많았습니다.

 

저자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시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의 사원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침묵을 지향하지요. 시를 닮은 문장들로 이어지던 설교는 마침내 한 편의 시로 마감이 됩니다. 그 시는 나직한 기도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의 강단이 상상력을 잃어버린 데에는 시가 사라진 것도 한몫한다고 생각하는 저에게는 특별히 눈길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말씀의 맑은 샘을 꿈꾸며 목회의 길을 걸어가는 서 전도사님,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미덕은 질문의 의미를 일깨우는 데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은 질문 하나는 엄청난 보고를 여는 열쇠가 됩니다. 보물창고를 열기위해 필요한 것은 망치나 해머, 혹은 다이너마이트가 아니었습니다. 의미 있는 질문 하나가 온갖 무의미를, 무감각함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전해준 익숙한 대답보다는 정직한 질문을 가지고 말씀 앞으로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질문이 좋은 열쇠라는 것을 깨달을 때, 말씀을 전하는 전도사님이나 말씀을 듣는 이들 모두는 조용한 성찬을 누릴 수 있을 테니 말이지요.

 

*<기독교사상> 20266월호*

 

한희철/정릉감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