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재 목사의 생명과 역사신학, 그 시대적 육성의 소중함
요즘, 오래전에 읽었던 책들을 뒤적이면서 새로운 감흥에 젖는다. 정대위 선생님의 <하늘과 바다 그리고 먼 길>을 읽으면서도 그렇고 유경재 목사님의 <높은 산에 오르라>도 참 드문 설교집이다. 30여 년 전에 <그말씀>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유 목사님을 인터뷰할 때의 기억도 아스라하다. 아래의 글은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고 나름 정리한 내용이다.
안동교회에서 30년 가까이 목회에 헌신했던 유경재 목사, 그의 설교는 한마디로 이 시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사명에 철저하게 충실하다. 기독교를 제도적으로 이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복주의적 선교가 아닌, 이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다가가 푸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설교는 이 땅의 고뇌를 있는 그대로 껴안고 사랑과 생명의 길을 열어가는 예언자적 육성이 가득 차 있으며,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으로 열어나가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꿈과 희망의 열정이 결코 식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설교는 오늘날 시대적 현실을 외면한 채 개인 심리 치료의 범주로 전락해가는 말씀의 자리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며, 한국교회의 강단이 처한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중심을 잃고 헤매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좌표에 유경재 목사의 메시지는 실로 소중하기 짝이 없으며, 그의 낮은 자들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한 목회적 일생과 하나님의 육성을 이 시대에 투영시키려는 신학적 고투, 그리고 그에 따른 말씀 선포의 용기와 성찰의 깊이는 놀랍기만 하다.
하나님의 육성을 이 시대에 투영시키려는 신학적 고투
말씀이 교리화하거나 또는 생활 충고용 상담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이때에, 유경재 목사의 신학과 말씀 고백은 복음이 어디에 근본적인 뿌리를 두고 출발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겨냥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해주고 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읽는 것은, 이 시대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고민하고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 해답의 발견과 일치한다.
유경재 목사가 생명과 관련한 설교를 집중적으로 전한 대목과 함께, 그가 지난 1992년 펴낸, 1981년부터 약 10년 간의 설교를 모은 <높은 산에 오르라>를 주목해보기로 한다. 그가 안동교회에 부임한 것이 30대 말인 1976년이니까, 이 설교는 그가 안동교회에 안착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좌표를 명확하게 해나가는, 40대 중반 즈음의 무르익어가는 열매로부터 내놓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살펴보면 그의 설교가 하나의 큰 주제를 줄거리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음을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제목이 된 설교 “높은 산에 오르라”에서 우리는 그가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차원을 뛰어넘는 우주적 지경에 이르고자 하는 원대한 신학적 지평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점을 먼저 주시하는 것은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즉 그가 시대적 과제에 대한 복음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 노력하지만, 그의 신학이 결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경재 목사는 현실의 복음적 변화를 꿈꾸면서도 우주 전체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하려는, 보다 근원적 생명의 지점으로 이동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는 인간만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생명을 사랑하고 이것이 신음하고 있는 현실을 타파하는 하나님의 구원사 전체에 대한 깊고 넓은 안목을 드러내준다. 그리하여 그가 풀 한 포기, 바람소리, 흐르는 시냇물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을 응시하고 그로써 인간이 진정 인간다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지향하는 아름다운 꿈을 가진 존재임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며, 우리가 끊임없이 닮아가야 하는 존재적 표상이기도 하다.
그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기쁨, 우주의 빛과 어둠 등에 대하여 성찰하고 그것을 몸으로 느끼려는 뉴멕시코 프에블로 인디언의 경우를 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현대 크리스천들은 불행하게도 이런 거대한 우주적인 신화를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현실적인 삶에만 붙잡혀 헤어나지를 못하고 근심 걱정하며 매일매일 스트레스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세상의 탐욕적 문명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간소하고 검박하며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삶이 갖는 가치를 주시한다. 실로 세상에 존재하나, 그와 동시에 초월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차원 높은 경지를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적 순수성을 가지고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첩경으로서,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삶의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삶이 그렇게 변화하면, 그것은 곧 세상의 사슬을 풀고 하나님 나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실존적 기초가 만들어진다고 하겠다. 유경재 목사의 설교는 그러한 점에서, 역사를 품으면서도 역사를 넘어선 자리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실상을 우리에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했음을 알게 된다.
고난, 하나님의 구원사
이러한 그의 신학적 지향은 우선 그가 이 땅이 겪는 ‘고난’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는 고난을 그저 한 개인의 고난으로 축약해서 접근하지 않고 그 고난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하나님의 구원사라는 총체적 틀에서 파악해 들어간다.
“이 약소민족인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은 결코 우리만의 고난일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무언가 세계의 고질적인 병들을 치유하는 대속적인 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것을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통곡은 전 세계가 당해야 하는 아픔을 대신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난을 통해 창조된 민중의 빛이 온 세계를 비추는 영광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고난의 의미를 알자’).
민족 분단의 고난을 세계사적 의미로 응시하면서, 이것이 단지 ‘고통스럽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과제의 정체와 그 의미를 인류적 범주로까지 확대하여 성찰하게 한다. 그리하여 약소민족의 고난이 도리어 구원의 열쇠가 되는 사건임을 맹렬히 일깨우는 것이다. 하여 그는 고난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역설한다.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민족이 겪는 시련을 강 건너 불 보듯 하지 말고, 그 속에 내 죄가, 우리 탐욕이 들어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함이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고난을 통한 깨달음’).
이것은 이후, ‘피조물의 신음소리’라는 차원까지 그 고난이 존재하는 영역을 확대하여 주시하고, 우주적 화해에 이르는 생명신학의 체계를 완성해 나간다. 그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자연관에 주목하면서, “땅을 어머니로, 아름다운 꽃을 자매로, 사슴, 말, 큰 독수리를 형제들로 생각하며, 바위산 꼭대기, 풀의 수액, 조랑말 등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아니겠습니까?”(‘피조물의 신음소리’)라고 우리의 생명적 무지를 환기한다. 그러고는 이렇게 결론지어 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고, 동시에 만물과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환경운동은 하나님 나라 건설 운동이기도 합니다. …이 운동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미물까지도 사랑하고 그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대 문명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취하여 거기에 안주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박차고 나와 하나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씀, 그 중심에는 이렇게 매우 분명하게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역사를 향한 우리의 존재적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고난에 대한 대안이 명확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현실을 꿰뚫어보고 하나님의 꿈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영적 분별력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분별력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더 나아가 그 역사에 동참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것이 바로 영적 분별력입니다”(‘영적 분별력을 기르자’).
그러고는 이러한 영적 분별력 대신 성령운동을 빙자한 각종 사기행위나 허무한 교회 성장론에 매달리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이렇게 일갈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바로 파악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분별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영적 분별력을 갖지 못한 예언자는 모두 거짓 예언자들이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영적 분별력을 지니지 못한 지도자들이나 교회들은 다 거짓 예언자들이요 이단입니다. 입으로는 성경 말씀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성경이 나타내는 구원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무시해버리고 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수없는 방언을 하고 수없이 많은 병자를 고친다 해도 성령이 이룩하여 오셨고 또 이룩하여 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영이라고 모두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유경재 목사는 하나님의 구원사와 관련이 없는 영적 행위를 가짜라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많으나 정작 하나님의 구원사,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려는 분별력과 의지, 용기가 없는 한국교회에 대한 그의 일갈은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복음에 대한 역사적 해석
그렇다면 그가 파악하는 구원사적 역사관은 어떻게 정리되어 있는가?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해 진행됩니다. 역사란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가 정하신 목표를 향해 이끌어가시는 과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도 그 목표를 향해 굴러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이 역사의 굴러가는 바퀴를 멈추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 역사의 바퀴에 깔려 희생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향해 나가는 히브리인들을 뒤쫓던 애굽 군대가 홍해에 빠져 모두 죽는 것은, 진행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멈추어 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보여준 성경의 교훈입니다(‘역사는 발전한다’).
그러면서 복음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를 그는 이렇게 밝힌다.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면서 그 죄가 둘러쳐 놓은 자리를 넘는 결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철저하게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제까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이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사람, 멸시하던 사람, 천히 여기던 사람이 나와 평등한 자리에 선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될 때, 철저하게 죄를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유리하게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들이 있다면 없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런 것을 자랑하거나 나타내려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걸림돌이 되는 것들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모든 전제 조건들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평등하게 새로 탄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를 구별 짓는 인간들의 겉치레를 훨훨 벗어버리게 하고 믿음으로 새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위선과 가식과 자랑들을 모두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자 되어, 오늘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 차별을 향해 도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죄와 신앙과 평등’).
이 복음에 대한 역사적 해석 역시 중요해지는데, 유경재 목사는 역사의 변화 속에서 말씀을 읽어나가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 시대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노력과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일깨움이다.
“성경을 우리가 한 번만 읽지 않고 매일같이 읽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매일 새롭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이라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그 시간과 더불어 성경을 읽을 때 새로운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바뀐 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시간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어제 읽던 성경과 오늘 읽는 성경이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시간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간과 상관없이 성경을 읽으려 할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오늘 이 역사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측량 못할 하나님의 지혜’).
즉 그는 역사의 흐름을 앞에 놓고 복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듣게 하는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복음의 이해와 해석은 우리 인간의 운명과 관련이 없는 독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성서가 획일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을 보이는 한국교회와 신학 교육의 맹점을 고스란히 질타하고 있는 동시에, 시대적으로 살아 있는 복음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말씀 선포자로서의 당연한 책무인 것이다.
생명의 역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서 그의 관심은 이 땅의 역사에서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고통을 주는 전쟁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평화의 문제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구원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현장을 그는 이렇게 다가간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의 분단에 교회가 선교적 사명의 중심을 올바로 잡아나가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하여 그는 권세가 지배하는 로마의 평화를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면에 내세운다.
“‘팍스로마나’라는 말은 거짓 평화, 제국주의적 지배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부와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을 위한 불의한 평화였습니다. 그것은 피억압자의 입장에서 볼 때 억압과 착취의 현상을 정당화하는 지배 이념일 따름입니다. …로마인들이 내세우는 로마의 평화 대신,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메시아가 탄생했다고 초대 기독교인들은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로마의 평화가 거짓 평화임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를 대안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라고 용감하게 고백을 하였습니다(‘교회와 평화의 문제’).
그리고 그로써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밝힌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요,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로 구성되는 나라입니다. 거기에는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자면 권력을 가지고 남을 지배하는 자, 남을 착취하여 자기 부를 쌓는 자, 많은 재물을 가지고도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는 자, 불의를 행하는 자, 마음이 깨끗지 못한 자들은 발붙일 곳이 없는 나라입니다. 평화란 무엇입니까? 바로 모든 억압과 착취가 사라지고 평등과 사랑이 실현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평화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그야말로 유경재 목사의 고백 속에는 의와 평강이 하나가 되어 모두가 평등하고 가진 것이 없다고 멸시받지 않으며, 존엄한 생명체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신앙적 열망이 그득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아닌 것, 그리스도의 평화가 아닌 것에 대한 분명한 거부가 존재한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가인의 살인적 문화에 도전”(‘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하고 거대한 것들을 숭상하는 체제를 부정하는 신앙적 자세를 촉구한다.
“인간은 지금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무한한 능력을 추구하다 보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필요가 없고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고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찬양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바벨탑 이야기’).
“…우리는 끊임없이 거인이 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악마는 쉬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와 함께 손잡고 일을 하자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커지려고 합니다. 커지면 거기에 힘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그 힘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이 선하게 사용되기보다는 자기의 유익과 악함을 위해 사용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의 큰 교회가 받는 시험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여 거인이 되고자 하는 세계 속에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죄악임을 깨닫고 지극히 작은 자가 되라고 요청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결코 그 영은 우리를 거인 되게 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결코 거인이 아닙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철저하게 거인 근성을 장사지내고 지극히 작은 자로서 새로 태어나서 봉사와 섬김과 희생의 삶을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거인과 지극히 작은 자’).
모두가 큰 것을 숭상하는 이 시대에 유경재 목사의 이러한 신학은 작은 자의 소중함과, 그로써 이루어내는 생명의 역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그는 종국적으로 생명 공동체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의지를 고백한다. 그의 생명 공동체에 대한 이해는 매우 유기적이다.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은 서로 따로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생명체가 아니라 유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생명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이 인간도 자연도 그 생명을 올바로 지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 공동체에서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결국 그 생명 공동체가 파괴되면서 함께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생명 공동체’).
그래서 이 세상 도처의 아픔은 모두 내 아픔이 되고 그 아픔을 이겨나가는 과정은 나와 모두를 살리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그 지구촌적 생명 공동체를 파괴하는 힘에 대한 이해도 사뭇 구체적이며 오늘의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모순에 대하여서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한 이기주의의 발로가 오늘의 세계를 20 대 80이라는 불공평한 세계로 만들었습니다. 이 세계의 80퍼센트가 빈곤하게 된 까닭은 20퍼센트가 너무 많이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무차별하게 세계 여러 나라를 먹어 들어가지만, 그것은 분명한 죄악입니다. 그런 탐욕은 하느님이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들은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셔서 이 탐욕적인 행위를 지켜보고 계시며, 여기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통찰력과 복음적 혜안
지구촌의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있는 거대 자본의 탐욕과 횡포에 신음하는 생명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고 있는 그의 이러한 세계적 현실에 대한 이해는, 복음적 선포와 맞물려서 오늘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얼마나 진지하고 힘차게 나서야 하는지 직시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유기적 공동체관에 근거하여, 자신이 속한 생명 공동체 전체의 문제를 언제나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신앙적 결단과 행동을 해 나가야 함을 역설한다. 참으로 세상의 구원에 대한 책임과 사명이 뜨겁게 녹아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 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능력에 그의 부활 신학이 존재한다. 그의 부활 신학은 매우 중요한 대목으로서, 부활이 나사렛 예수 한 존재의 부활로 그치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이 곧 모든 만물의 부활을 선도하는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부활은 어떤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아래 갇혀 있던 만물이 생명으로 나가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죽음 아래 지배받는 세계는 그대로 놔두고 거기서 한 사람 한 사람 구원하여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과 만물 앞에서 생명의 세계가 활짝 열리게 하신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일이기 전에 전체 세계의 변화를 뜻합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큰 변화 속에서 개인적인 부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으로 막혀 있던 세계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큰길을 열어놓으신 사건입니다”(‘영생의 시작인 부활’).
이렇게 유경재 목사는 그의 신학적 귀결점을 만물의 소생과, 죽음을 이겨낸 생명의 승리로 짚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이 개인적 안정제로 전락하고, 시대적 과제에는 눈감은 마취제로 변질해 가고 있는 때에 유경재 목사의 이러한 역사와 생명신학은 오늘의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데 너무나도 소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돌파해 나가야 하는 도전 앞에서 신학적 고갈 상태가 극에 이르고 있는 이때에, 유경재 목사의 이러한 영적 통찰력과 복음적 혜안은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동시대에 살면서, 그의 선포된 말씀을 듣고 읽는 것만으로도 이미 깊은 은혜이다. 이 은혜가 이 시대의 우리 민족 모두에게 널리 나누어지는 그런 하늘의 섭리를 누리는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