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오테스(idiotes)
이디오테스(idiotes)
평안하신지요?
가장 빛나는 계절인 봄을 우리는 늘 고통의 기억과 더불어 지내게 됩니다. 접동새 우는 4월에는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간 세월호 참사자들이 떠오르고, 5월이면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넋들을 떠올리게 되고, 6월에는 이 한반도를 피로 물들인 전쟁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뜬금없이 유치환의 ‘깃발’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아마도 저 광장과 길가에서 나부끼고 있는 노란 리본과 배너 때문일 것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형용 모순의 표현 때문에 어떤 절절한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옵니다. 언제쯤 되면 우리는 이 봄을 한껏 경축할 수 있을까요? 노루처럼, 사슴처럼 날래게 달려와 창살 틈으로 연인을 엿보다가 “나의 사랑 그대, 일어나오. 나의 어여쁜 그대, 어서 나오오” 하며 술람미 여인을 유혹하는 그 멋진 젊은이를 생각하며 덩달아 설렐 수 있을까요?
“겨울은 지나고, 비도 그치고, 비구름도 걷혔소. 꽃 피고 새들 노래하는 계절이 이 땅에 돌아왔소. 비둘기 우는 소리, 우리 땅에 들리오.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무화과가 열려 있고, 포도나무에는 활짝 핀 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소. 일어나 나오오, 사랑하는 임이여! 나의 귀여운 그대, 어서 나오오”(아가 2:11-13).
이런 상상조차 죄스럽게 느껴지는 세상이기에 삶의 무게는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함께 지내는 교회 청년들에게 역사의식이 부족한 것 같아 속상하다고 하셨지요? 가벼운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활기를 띠지만 사회와 역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입을 다물어 버리는 청년들의 의식을 어떻게 흔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신 그 마음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청년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사람이 그들의 실존적 고민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자기기만일 겁니다. 그러나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회자되는 걸 보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절망의 깊이는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 이런 세상에 이르게 되었는지 면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세대 사람들은 ‘의미’를 삶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일단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면 고난도 회피하지 않았고, 금지의 선을 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비사회가 도래하면서 의미 물음은 ‘재미 추구’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의미가 진지한 사고와 실존적 결단을 요구한다면 재미는 감각적인 새로움과 재치를 요구합니다. 디지털 시대의 분절된 시간 경험과 이런 태도는 상호 연관되고 있습니다. 진득하게 앉아서 텍스트를 읽는 대신 두 시간 안에 이야기가 완결되는 영화에 집중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SNS를 통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발신음을 보내고 반응을 기다립니다. 자기 노출증과 관음증이 뒤섞인 묘한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전체의 뜻’을 조회하는 일은 점점 낯선 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별이 총총한 밤에도 하늘을 보지 않습니다. 땅의 현실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꽃이나 복숭아꽃에 어린 달빛에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럴 여유도 없습니다.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마음은 늘 들떠 있습니다. 자기 삶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나 역사에 대한 면밀한 분석 혹은 허위에 맞서 싸우는 용기는 언감생심입니다.
경쟁을 내면화 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가 언제든 탈락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공포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엄기호 선생의 분석은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경쟁은 사람들의 목을 조르는 보이지 않는 손입니다. 보이지 않기에 떨쳐 버릴 수도 없는데 숨은 여전히 막힙니다.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조바심 칠 수밖에 없습니다. 엄기호 선생은 “탈락의 공포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고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외면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늘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타자들의 요구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구성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이들의 고통을 외면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세상은 악한 세상이고 타락한 세상입니다.
공포가 내면화 된 세상에 사는 이들일수록 공공의 문제에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강자들과 합일화함으로써 자기 속의 공포를 이겨내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와 시민 사회의 과제가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공공의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공공성의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기원전 431년경에 벌어진 스파르타와의 첫 전투에서 많은 아테네의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아테네는 그 전몰자들을 국장(國葬)의 예로 추모합니다. 천막을 치고, 죽은 자의 뼈를 3일간 안치하고, 친지들은 제물을 가져와 묘지로 행진했습니다. 정중하게 뼈를 매장한 후 아테네시의 지명을 받은 페리클레스가 국장 연설을 합니다. 그는 전몰자들에게 어울리는 찬사를 바치는 한편 아테네라는 도시 국가에 대한 긍지 높은 연설을 합니다. 그 가운데 한 대목을 들어보시지요.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전사(戰士)도 정치에 소홀하지 않으며, 이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입니다.”(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범우사, 박광순 역, p.175)
아테네는 아름다움과 지혜로움을 추구하는 국가이지만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자기가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정치적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자를 공명심이 없다고 보기보다는 쓸모없는 자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바보’ 혹은 ‘백치’를 뜻하는 이디엇(idiot)은 헬라어 이디오테스(idiotes)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공공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사로운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뜻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자기가 살아가야 할 세상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시민의 덕성이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 이런 시민적 덕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들이라면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만 가져도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고통 받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듣고는 역사에 개입하여 불의한 세상을 바로 잡으려 하셨습니다. 출애굽 정신을 빼면 성경에 무엇이 남을까요? 스스로 자기 삶의 존엄을 누릴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들을 돕기 위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이야말로 성서를 관통하는 정신 아닙니까?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나아가는 광야 공동체야말로 억압과 압제를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는 인류의 은유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 왕정이 억압적으로 변할 때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출애굽을 이끄신 하나님의 마음에 비추어 역사를 바라보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신적 분노에 사로잡혀 포효하기도 했고, 신적 연민에 사로잡혀 울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런 예언 정신에 사로잡힌 이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습니다. 한때 ‘교회 오빠’라는 말이 통용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반듯해 보이는 젊은이를 이르는 말이지만, 실은 일탈을 감행할 용기가 없는 좀 답답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 아닐까요? 나는 교회에 속해 있는 청년들이 욕망의 전장으로 변한 세상을 향해 오연한 목소리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울울한 심사에 사로잡혀 그만 이야기가 설교조가 되었네요. 어쩔 수 없는 목사의 버릇이려니 생각하고 양해해 주십시오. 시절은 수상해도 5월의 햇살은 정말 싱그럽습니다. 가야 할 길이 멀고 또 머니 지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너무 심려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일에서 눈을 돌려 이것저것 해찰하는 사소한 기쁨도 누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두루두루 평안하기시를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