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고독의 문지방
꽃자리의 종횡서해(11)
진정한 고독의 문지방
“우리에게 고독은 원죄로 분열된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욕정과 죽음으로 꾸며낸 존재의 인위적․가식적 단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408쪽)
“내 자녀 요나여, 나를 본 적이 있는가? 자비, 깊고 깊은 자비, 나는 우주를 끝없이 용서해 왔다. 나는 죄를 모르기 때문이다.”(546쪽)
역시귀본逆時歸本의 실천
큰물에 떠 밀려 오는 부유물처럼 일상이 추레하고 번잡할 때 사람은 누구나 고요함을 희구한다. 침묵의 무게가 부족할 때 영혼은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치곤 한다. 이드거니 앉아 삶을 관상하기에는 현대인의 삶은 너무 분주하다. 달리고 또 달리느라 숨은 턱에 차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는 눈길조차 줄 수 없다. 벚꽃잎이 난분분하여도 그 앞에 멈춰 서서 피고 지는 꽃잎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여백조차 없는 나날이다.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는 바로 그런 때 내 앞에 왔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도사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그의 내면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유력 일간지에 서평을 쓸 정도로 촉망받던 문학도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세속을 떠나, 청빈․정결․순명․정주․행동 양식의 변화를 서원하는 은수자가 되도록 한 그 강렬한 내적 끌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고독에의 갈망이었다. 이런 갈망을 부추긴 것은 내적인 목마름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그는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파괴의 강렬한 힘을 자발적인 자기 포기의 길로 접어들라는 초대로 이해했다. 그를 시토회에 속한 트라피스트 수도회로 이끌었던 것은 자기 확장을 꾀하기 위해 남을 파괴하는 그 무분별한 욕망에 등을 돌리고 평화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근본으로 돌아간다는 역시귀본(逆時歸本)의 실천인 셈이다.
그는 27살의 젊은 나이에 켄터키 산간에 있는 겟세마니 수도원에 입회한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26년을 오직 그곳에 머물며 관상생활에 정진했다. 그가 수도원 밖 출입을 한 것은 불과 몇 차례 되지 않는다. 세속으로부터 절연된 수도원에 머물면서도 그는 고독의 부족을 절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홀로 살고 싶은 열망(고독), 하느님 안에 잠적하는 것, 하느님의 평화 속에 잠기는 것, 하느님 앞에서 남모르게 사라지는 것이다.”(35쪽)
침묵에 대한 갈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수도회에는 다양한 전문가가 필요하니, 문학적인 훈련을 받은 그도 재능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수도원장과 총장 신부의 권고는 참으로 사려 깊은 것이었다. 글쓰기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수도원장의 권고대로 영적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1946년부터 1952년 사이의 일기는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원제는 《요나의 표징》)라는 제목으로, 1956년부터 1965년 사이의 일기는 《죄 많은 방관자의 억측》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두 책은 20세기의 한 위대한 영성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자료이다.
공동체적 삶과 고독에의 갈망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그의 영혼의 지평이 어떻게 확장되어 갔는지는 두 책의 소주제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첫 번째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6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데 각각의 제목은 ‘종신서원’, ‘원장 신부님의 죽음’, ‘대품’, ‘하느님의 제단으로’, ‘고래와 아주까리’, ‘요나의 표징’이다. 헨리 나우웬은 이 책을 영적인 정체성 위기를 극복해야만 했던 “한 관상가의 청소년기”의 기록으로 이해한다. 이 책에서 그의 시선을 철저히 자기 내면을 향하고 있다. 그에 비해 《죄 많은 방관자의 억측》은 그의 시선이 세상을 향하여 확장 혹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경향은 ‘바르트의 꿈’, ‘진리와 폭력: 흥미로운 시대’, ‘광인이 동쪽으로 달리다’ 등의 제목만 보아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전례, 순명, 글쓰기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에서 우리는 현실과 갈망 사이에서 서성이는 한 불안한 영혼을 만나게 된다. 고독에 대한 그의 동경은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소음으로 말미암아 좌절되곤 한다. 불어나는 식구들을 수용할 건물을 짓느라 수도원은 늘 시끄러웠다. 트랙터와 불도저 소리는 그의 관상을 방해하곤 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은 까닭은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시대 정조가 되어버린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에는 의미가 있는가?’ 머튼 자신이 이 물음에 이끌려 수도원에 왔지만, 같은 질문을 가지고 찾아온 이들이 오히려 관상을 방해하는 역설 속에서 그는 번민한다. “하느님이 내 수도회이며 내 독방”이고 “내 수도 생활이며 규칙”(42쪽)이라고 아무리 되뇌어도 마음은 고요해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종신 서원을 하고 자신을 삶을 하느님께 봉헌한다. 사업, 야망, 명예, 쾌락, 이 세상의 모든 활동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가 얻고자 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일상의 소음뿐만 아니라 공동체에서 그가 감당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도 관상에의 몰입을 방해했다. 피정 온 사람들이 식사하는 동안 책을 읽어주고, 성가대와 함께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가끔 그는 자신이 과연 관상적 삶으로 부름 받은 것인지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도 안다. 외부를 차단하고 성령께서 들어오시도록 내면의 문을 열어야 하지만, 조바심 때문에 관상에 대한 읽을거리를 찾고, 영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를 찾느라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 그를 진정한 고독의 길로 이끈 것은 셋이었다. 첫째는 수도원적 삶의 리듬이었고, 둘째는 장상들에 대한 순명이었으며, 셋째는 글쓰기였다.
수도원 전통이 만들어낸 전례의 리듬은 수도사들을 지켜주는 울타리인 동시에, 그들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형성해가는 틀이기도 하다. 그는 “성덕에 이르는 가장 간단하고 효과 있는 방법은 반복되는 일상생활 뒤로 사라지는 것”(61쪽)이라고 말한다. 은수자로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는 “규칙과 공동생활은 제멋대로 살 때 머리에 몰려드는 걱정과 문제, 혼란과 매듭을 풀어준다”(215쪽)고 고백한다. 오랜 전통이 만들어낸 전례의 리듬 속에서 수도사들은 그저 그곳에 묵새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고독 속에 계신 하느님을 향해 늘 길을 떠난다. 전례의 리듬은 자유를 옥죄는 권위가 아니라 영적 투쟁의 성가퀴일 뿐이다. “전통의 샘은 지금 여기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착될 때만 샘 솟는다”는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옳다. 전통이라는 뿌리가 가지를 살리는 것이다.
머튼은 갈림길에 설 때마다 장상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성덕은 순명을 통해 자기를 만들어가는 것(63쪽)이라 믿기 때문이다. 순명이라는 말은 자칫 주체성의 포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순종 혹은 순명을 뜻하는 ‘obedience’는 라틴어 ‘ob-audire’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그 뜻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순종은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 앞에서 취하는 자유의 제한이 아니라는 말이다.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아니고는 남을 지도할 수 없다. 장상들이야말로 순명하는 자, 곧 잘 듣는 자이다. 순명이란 타인의 의지를 수행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맡기는 자유이다. 만해 한용운의 시 <복종>은 이 경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순명이란 공동의 의무 속에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이다. 사제수품을 앞두고 번민하던 그는 순명에서 번민을 벗어날 길을 찾는다.
“나는 순명하면서 정진한다. 장상이 내가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건 적어도 안전하다. 하느님께서 이 일을 원하시면 모든 것이 잘되게 해주실 것이다. 비록 상상할 수 없는 죽음을 안고 있더라도.”(165쪽)
이런 신뢰야말로 든든함과 당당함의 근원이 아닌가? 마음으로 순명할 수 있는 이를 모시고 사는 이의 든든함이여!
글쓰기 역시 머튼의 영성생활을 정초시켜준 소중한 매개였다. 장상들의 권유로 시작한 글쓰기는 자기 성찰과 깊은 관상에 이르는 통로였다. 머튼은 늘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 회의할 때가 많았다. 생기 없는 문장도 문제지만, 깊은 내용을 담지 못한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그는 예리하고 명확한 글을 쓰는 엘리엇을 부러워하고, 깊이 있는 글을 쓴 십자가의 성 요한을 늘 바라본다.
그런 고뇌 속에서 쓴 자전적 수기 《칠층산》이 예기치 않은 성공을 거두자 그는 양가적 감정에 시달린다. 한편으로는 뿌듯함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느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만일 그 책이 영화화 된다면 ‘게리 쿠퍼가 주인공이 될까?’를 거듭 생각한다. 그러다가 도리질을 하듯 마치 그 책을 쓴 일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자신을 타이른다(142쪽). 책을 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명성을 오히려 영적 가난에 이르는 길로 삼지 않는 한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임을 그는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그는 명성에 초연하려 애를 썼다. 애독자들의 편지가 또 다른 번민거리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진정한 고독의 문지방
전례와 순명과 글쓰기는 그를 진정한 고독의 오솔길로 안내했다. 점차 고독은 장소의 부재가 아닌 형이상학적 초월임이 분명해졌다. 글을 쓰는 것이 완덕으로 나가는 데 장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완덕이 의존하는 조건 중의 하나임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새로운 삶의 지평이 열렸다. 이전에는 고독에 방해가 된다고 느꼈던 수도원의 일상적인 일조차 관상의 수단이 되게 된 것이다. 성인 같았던 그레고리오 수사를 보면서 원장 신부에게 무엇이 수사님을 그토록 거룩하게 만들었냐고 물으면서 머튼은 “깊고도 소박한 기도 정신, 예기치 않은 믿음의 절정 같은 어떤 것, 순수한 마음, 내적 침묵, 고독, 하나님께 대한 사랑”(136쪽)이라는 대답을 기대했다. 하지만 원장 신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수사님은 늘 일하고 있었네.”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시간이야말로 하느님의 현존을 가장 깊이 체험하는 기도의 시간일 수 있음을 그는 차츰 이해하게 되었다.
“수사들이 들에서 비를 맞으며, 햇볕에서, 진흙에서, 그리고 바람을 맞으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영성 지도자요 수련장들로 우리를 명상하게 한다. 우리를 덕행으로 정제해 준다.”(486쪽)
노동이야말로 수도사들의 영성 지도자요 수련장이라는 자각은 그의 내면에 질서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사제수품 후 이런 깨달음은 더욱 깊어진다. 고독한 은둔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수도원 동료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는 점차 인류의 한 구성원이 되어간다. 삶의 의미를 찾아 등지고 떠나왔던 세상은 더 이상 외면해야 할 암흑의 땅이 아니었다.
세상을 등지고 떠난 그의 여정은 수도원을 거쳐 마침내 세상에 이르고 있다. 강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이르듯 그는 마침내 슬픔의 바다에서 살고 있는 인류의 마음에 이르렀다. 고독과 침묵은 타자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더욱 옹골차게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생들을 돌보는 체험을 통해 그는 요나의 뱃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머튼 자신이 요나의 표징이었다. 요나처럼 그도 역설의 뱃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은둔 생활은 미래에 거는 희망이 아니라, 현재를 심화하는 것”(397쪽)이었다. 이제 일상 속에서 대면하는 모든 사람들은 더 이상 낯선 타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그들’로 뭉뚱그릴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 저마다의 아픔과 꿈을 가진 구체적 존재였다.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빌어주는 것, 바로 그것이 거룩한 삶의 입구요, 진정한 고독의 문지방임을 그는 절감했다.
“나의 새로운 사막은 무엇인가? 그것은 연민compassion이다. 연민 또는 동정同情의 황무지만큼 지독하고 아름답고 무미건조하고 결실이 풍부한 사막은 없다. 연민은 백합처럼 번성하는 유일한 사막이다. 연민은 작은 못이 될 것이다. 이고에서 싹이 돋아나 꽃을 피우고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바로 이 사막에서 메마른 땅이 샘으로 변하고 가난한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505쪽)
고독이 자비로 바뀌는 순간 그의 귀에는 자기 의지의 수인이 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거기 누구 없소?’ 죽음에 삼켜진 생명을 구하는 것, 당신을 등진 이들을 ‘내 자녀 요나여’라고 부르는 이에게로 돌려드리는 것, 그것이 진리의 길을 찾는 이들이 할 일이다.
양심 성찰
수도원 생활에 대해 마치 스케치를 하듯 보여주고, 고독으로 부름 받은 수도사들의 내면 풍경을 얼핏 암시한 ‘프롤로그’는 ‘니네베 여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수도사들의 영적 여정이 니네베(니느웨)를 향한 순례임을 암시하려는 것이리라. 그 후 이어진 여섯 가지 이야기는 수도자들이 겪는 고래 뱃속 같은 어둔 밤의 체험과 더불어 은총처럼 찾아온 깨달음에 대해 들려준다. 마지막 장인 ‘에필로그’의 제목은 ‘화재 감시’이다. 머튼은 한 밤중에 화재를 감시하기 위해 수도원 곳곳을 살피는 과정을 보여준다. 모두가 잠든 밤, 고래 뱃속 같이 컴컴한 수도원을 천천히 돌아보는 동안 그는 양심 성찰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화재 감시는 “어두움의 심연에서 등불을 켜고 의문을 가지고 자기 영혼을 성찰할 구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는 수도원의 역사와 수사들에 대한 애정에 찬 어루만짐으로 느껴진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지극한 애정, 당연한 듯싶지만 부러운 현실이다. 이 책은 전통이야말로 한 사람의 수도자를 만드는 못자리임을 보여준다. 신앙은 또한 한 순간의 깨달음이 아니라 전례의 리듬을 타고 고래 뱃속을 통과해 마침내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사제가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며,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292쪽)이라는 그의 말은 오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고독을 회피하도록 하는 오늘의 문화는 하느님을 등지도록 사람들을 유인한다. 버스에서건 지하철에서건 거리에서건 손에 든 T.V에 얼굴을 박고 혼자서 히죽거리고 있는 이들에게 《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늘 감성과잉의 흥분상태가 유지되어야 은혜 충만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고독이란 대체 무슨 뜻일까? 토머스 머튼을 내적으로 이끌어주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다시금 되뇌어 본다.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라.
너 있지 않은 것에 다다르려면
너 있지 않은 데를 거쳐서 가라.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