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은 날고 싶다
김기석의 톺아보기(9)
영혼은 날고 싶다
-파커 J. 파머의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
“온전함은 완전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온전함의 의미를 깨닫게 된 후 나는 우리가 참화를 새로운 생명의 온상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인간의—나의, 당신의, 우리의—온전성이 헛된 꿈은 아니라는 희망을 간직하게 되었다.” (파커 J. 파머)
“무대 위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하는 동안 내 참자아는 내 안의 가장 깊은 가치와 믿음, 그 부서지기 쉬운 희망과 열망을 세상이 부숴버릴까 두려워 무대 뒤에 숨어 있었다.”(파커 J. 파머)
분리된 삶
구름이 짙게 드리운 도시의 뒷골목을 걷노라면 영화 <책 읽어주는 여자>의 주인공인 꽁스땅스의 씩씩한 걸음걸이가 떠오를 때가 있다. 내면의 리듬에 맞추듯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경쾌하고 시원하다. 마치 세상의 중력을 거부하는 것 같은 그의 걸음걸이는 기쁨을 환기시킨다. 꽁스땅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뭐가 그리 심각하냐고, 울 때는 울더라도 생은 경축할만한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듯하다. 생활의 편의를 위한 도구는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지만, 가슴의 헛헛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무덤덤할 뿐 좀처럼 경탄할 줄 모르는 정신의 혼수상태에 빠진 이들이 의외로 많다. 도로테 죌레는 이런 이들을 가리켜 ‘고장난 존재’라 했다. 그들은 근원적인 신뢰와 선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다른 사람들과의 결속감정이 없을뿐더러, 피조세계를 보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물을 사소하게 만드는 그의 능력은 놀라는 능력보다 훨씬 크다.”
지향조차 분명치 않은 길 위에서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간다. 사과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내달리는 토끼 뒤를 따르는 우화 속의 동물들처럼. 삶이 우화라면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나 긁적이면 그만이지만, 그런 내달리기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에 트라우마를 남긴다. 열정 뒤에 가려졌던 비애와 상실감 그리고 공허함이 모습을 드러낼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낯선 존재를 발견한다. 존재의 불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울증과 자살이 급증하고 있다. 사람들이 ‘푸른색의 악마’라고 일컫는 우울증이 이 화려한 도시 상공을 구름처럼 뒤덮고 있다. 유명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온다. 그들은 대개 우울증에 시달리던 이들이다. 종교인들은 자살은 죄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자살에 이르는 이들의 절망감은 헤아리지 않는다. 유전적인 원인이나 뇌의 불균형한 화학 작용에서 비롯된 우울증은 약물로 치료해야 하지만, 다른 요인에서 비롯된 우울증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산사 체험에 동참하려는 이들이 늘고, 선(禪)이나 명상을 가르치는 모임에 사람들이 몰리는 까닭은 더 이상 자기와의 불화를 간과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존경받는 지도자이자 사회운동가인 파커 J. 파머는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통해 파편화된 삶에 지친 우리를 온전한 삶의 길로 초대하고 있다. 《가르칠 수 있는 용기》와 《삶이 내게 말 걸어올 때》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이미 친숙한 저자는 1997년 전미 교육관계자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퀘이커 신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파머는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통해 그의 필생의 네 가지 주제라 할 수 있는, 온전한 삶의 형태, 커뮤니티의 의미, 삶의 변모를 위한 가르침과 배움, 비폭력적인 사회변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파커는 현대인의 실상을 ‘분리된 삶’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사람들은 안팎으로 다가오는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공적인 ‘역할’의 세계와 감춰진 ‘영혼’의 세계를 분리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고 또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사람들은 일쑤 영혼과의 접촉을 끊고 역할의 세계에 침잠한다. 중심부에 접속하려는 욕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갑옷을 입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이때 자기 소외는 저절로 깊어간다. 분리된 삶은 실은 상처 입은 삶이다. 파커는 “영혼의 소리를 무시하면 술과 약물, 일과 쇼핑, 분별없는 대중매체 같은 마취제에 중독되어 고통을 마비시키고 있는 자신을 보게”(36쪽)된다고 말한다. 파커는 우리를 분리된 삶으로 이끄는 경우를 다양하게 예시한다.
․ 맡은 일에 온힘을 다하지 않고, 그 일로 도움을 받게 될 사람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지 않을 때
․ 꼭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기본적인 가치를 거스르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영위할 때
․ 영혼을 파괴하는 상황 ․ 관계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
․ 진실을 감추고서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이득을 얻으려 할 때
․ 갈등 ․ 도전 ․ 변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숨길 때
․ 비판받고, 따돌림 당하고, 공격받을까 두려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감추려 할 때(19쪽)
커뮤니티의 필요성
‘분리된 삶’, ‘상처 입은 삶’은 치유될 수 있는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고 또 될 수 있다. 파커는 치유된 삶의 내용을 ‘온전함’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가 말하는 온전함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짐을 삶의 불가피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이다. 이것은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하는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틸리히는 실존의 모호함과 참혹함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는 존재에의 용기를 믿음이라 했다. 존재에의 용기를 가지고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을 떠날 때 우리를 인도해줄 안내자는 누구인가?
파커는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교사, 즉 영혼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성의 중심으로 문화나 전통에 따라 참 자아, 본성, 대아, 신성의 불꽃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지만, 역할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침묵을 강요당해왔다. 파커는 영혼의 무관심에 기여한 우리 문화의 두 흐름을 예시한다. 하나는 자아를 어떤 창조적 핵심도 없는 사회적 구조로 여기는 세속주의(Secularism)이고, 다른 하나는 자아의 모든 관심을 ‘이기적’이라고 여기는 도덕주의(Moralism)이다(54쪽). 세속주의에 의해 납작해지고, 도덕주의에 의해 주눅이 든 영혼의 소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가면과 갑옷 속에 갇혀 숨죽이고 있는 영혼과 접속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을 지배해왔던 ‘역할’의 주도권에 저항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세상은 사람들에게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주입함으로써 영혼의 소리가 그들의 가슴에까지 들려오지 않도록 만든다. 영혼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서로 돕고 지지해주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파커는 커뮤니티의 필요성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내면의 진실로 향하는 길은 혼자서 가기에는 너무 험해서 만약 동반자가 없다면 여행 자체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길은 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여럿이 대화를 나누며 통찰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어려운 난관 앞에서 주저할 때 내면의 교사가 속삭이는 낯선 땅으로 과감히 나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이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43쪽). 파커는 이런 모임을 가리켜 ‘신뢰의 서클’이라 명명한다. 한국인들은 일상적인 불안과 삶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설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동창회, 향우회, 전우회, 동호회 등 많은 모임에 참여한다. 하지만 그런 모임들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듣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위계질서를 내면화하도록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학교나 종교 단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신뢰의 서클’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홀로 그리고 함께
어떤 모임에 자발적으로든 타의에 의해서든 동참하려는 이들은 어떠한 형태이든 실존의 위기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하는 ‘어둔 밤’의 체험이든,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하는 ‘한계상황’의 체험이든, 틸리히가 말하는 ‘터전이 흔들리는 체험’이든, 그들은 자기 삶이 재구성될 필요가 있음에 공감한다. 파커는 공립학교 교사들을 돕기 위해 만든 신뢰의 서클 경험을 바탕으로 아주 실제적인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는 ‘함께 홀로되기’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더 큰 세상에서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아는 참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홀로됨에서 생기는 내적인 친밀성과 커뮤니티에서 생기는 다름에 대한 인식이 모두 필요하다.”(79쪽)
‘홀로’와 ‘함께’는 양자택일(either or)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함께’(both and)의 문제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홀로됨’은 다른 이들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한 현존과 관련된 것이다. ‘함께’는 다른 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놓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80-81쪽). 함께 홀로되기를 지향하고 실천하는 모임에서 한사코 피해야 할 것은 설교하고 가르치고, 주장하고 설득하고, 요구하고 선언하고, 훈계하고 충고하려는 태도이다. 간섭하고 대결하고 밀어붙이려는 순간 영혼은 뒷걸음질 쳐 달아나기 때문이다. 파커는 신뢰의 서클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결하게 정리한다. “고치지 않고, 구하려 하지 않고, 충고하지 않고, 서로 바로잡으려 하지 않기”(156쪽)가 그것이다. 인간관계에 도덕주의가 끼어들게 될 때 그 관계는 파탄에 이르기 쉽다. 고쳐주고 싶어하는 욕구에 저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구성원들이 그런 욕구에 저항할 때 신뢰의 서클은 형성되기 시작한다.
신뢰의 서클 규칙
파커는 신뢰의 서클에 꼭 필요한 요소 다섯 가지를 꼽고 있다.
첫째는 정해진 기간이다.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모임은 구성원 사이의 긴장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 종료 시점이 정해져야 참여자들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의미가 없다고 느끼면 죄책감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한다. 지속에 대한 강박이 굴레가 되는 순간 내면의 소리는 잦아들게 마련이다.
둘째는 유능한 리더십이다. 신뢰의 서클을 이끄는 사람은 그 서클의 참여자여야 한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모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과, “모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영혼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하고 보호하는”(109쪽) 것이다. 권위를 뜻하는 헬라어 엑수시아(exousia)는 권위의 뿌리가 ‘본질’(ousia)에 잇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유능한 리더는 내면의 소리를 듣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는 강요하지 않는 초대이다. ‘역할’의 세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듣거나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낀다. 하이데거는 비본래적 존재로 전락한 ‘세인’(世人, das Man)의 특징으로 잡담과 호기심을 들고 있다. 잡담이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 대화에 자기의 인격이나 존재를 투입하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잡담은 천박함을 낳게 된다. 호기심은 어떤 대상에 대한 진정한 관심도 경탄할 능력도 없으면서 그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정신의 경향성이다. 이처럼 ‘세인’으로서의 삶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임이 낯설 수밖에 없다. 리더는 참여자들이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하지만, 가끔은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던져야 한다. 파커는 솔직하고 열린 질문을 위한 지침으로 “한 걸음이라도 말하는 이의 말보다 앞서 나아가지”(180-182쪽) 말라고 권한다.
넷째는 공동의 근거이다. 신뢰의 서클은 다양한 견해가 개진될 수 있는 열린 모임이어야 하지만, 그 지향점 혹은 초점은 영혼의 문제이어야야 한다. 커뮤니티 속에서 각자의 내면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근거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공동체 앞에 제시된 어떤 이야기는 참여자들의 마음속에 어떤 사건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이야기 속에 내재한 사건적 요소들(행위, 사건)과 사물적 요소들(등장인물, 배경)을 살피는 동안,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이야기 속에 자기의 경험과 문제를 투사한다. 이야기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각자가 그 이야기와 자신의 인생이 만나는 지점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자신의 진실이기도 한 어떤 진실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대화를 통해 사람들은 자기 확장과 소통의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다섯째는 정중한 분위기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모임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너무 넓거나 협소해서도 안 되고, 장식이 지나쳐서도 안 되고, 조명이 너무 어둡거나 차가워도 안 된다.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파커는 영혼이 야생동물처럼 재빠르고, 직감적이라고 말한다. 야생동물과 만나기 위해서는 주위 풍경 속으로 녹아들어야 하듯이, 영혼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이드거니 앉아서 내면을 살필 수 있는 분위기가 필요하다.
비폭력적 삶을 향하여
파커는 신뢰의 서클에서 고양된 정신이 일상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곤두박질칠 수 있음에 주목한다.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다양한 요구에 직면했을 때 찾았다고 생각했던 참자아는 희미해지게 마련이다. 현실 세계는 영혼에 대한 폭력이 무차별하게 자행되는 현장이다. 아이들을 모욕하는 부모, 학생들을 무시하는 교사, 노동자들을 경제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다루는 사업자, 환자들을 의료 행위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의사, 교인들을 영적인 미성숙아인양 취급하는 목사….
“영적인 폭력은 자아감의 상실이라는 죽음, 다른 이들에 대한 신뢰감의 죽음, 창조성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모험심의 죽음, 공동선을 이루는 데 필요한 헌신의 죽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223족)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흔히 폭력에 맞서 싸우거나, 달아난다. 하지만 파커가 제시하는 제3의 길은 비폭력의 길이다. 그가 말하는 비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든 영혼을 존중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것”(225쪽)을 일컫는다. 비폭력적인 삶을 실천하려는 이들은 폭력적인 현실과 역사의 꿈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켜버리지 않으면서 그 사이에 설 수 있어야 한다.
영적, 정신적 폭력은 그것을 허용하고 부추기는 제도적인 질서에 의해 힘을 얻는다. 폭력의 문화에 협력하기를 거절할 때, 또한 굴복하기를 거부할 때 폭력의 지배력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거대한 문화적, 정신적, 영적, 물리적 폭력이 행사되는 현장에서 침묵하는 것은 곧 폭력의 공범이 되는 것이다. 파커는 뫼비우스의 띠를 예로 들어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가 세상을 이루고, 바깥의 것이 안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 삶을 형성한다고 말한다(70쪽). 인간의 삶에 있어서 안과 밖은 구별될 수 없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경험한 사람들, 내면에 있는 신성한 불꽃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비폭력적 삶을 실천할 수 있다. 사티아그라하(진리 꼭 붙들기)라는 개념을 인류에게 선사한 마하트마 간디는 “사티아그라하 사전에 적이란 없다. 사티아그라하는 ‘적’이라 불리는 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가 온 세상을 시장으로 바꾸고 있다. 문명의 불빛이 휘황할수록 내면의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동굴에 갇혀 벽면만을 바라보던 수인들은 벽에 비치는 영상만이 현실인 줄 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림자일 뿐임을 자각하는 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그들의 창조적인 연대와 소통이야말로 평화 세상을 여는 열쇠가 아닐까?
《온전한 삶으로의 여행》은 교사들의 교사로 살아왔던 저자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하고 있기에 매우 구체적이다. 구체적 사례를 적시하는 과정에서 논의의 초점이 분산되는 경향이 다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목마른 영혼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 자신이 겪었던 우울증과 자살 충동까지 숨기지 않는 것은 상처 입은 영혼들, 분리된 영혼들에 대한 애태움이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 크기와 자신의 존재를 동일시하는 희떠운 직업적 종교인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