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하지 말라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5)
살인하지 말라
-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
살인의 정의
사람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은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마태복음 16:26)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공감할 거다. 그런데 십계명 중 가장 까다로운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라면 믿을 수 있겠나? 그건 다른 어떤 계명보다 이 계명에 ‘합법적’ 예외가 많기 때문이다.
‘살인’(殺人)은 사람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 계명은 히브리어로 ‘살인하다’(to kill)와 ‘말라’(not)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누가 누구의 생명을 어떻게 빼앗느냐는 방식과 상관없이 모든 형태의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용된 ‘라짜’는 구약성서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됐다. 예언자 엘리야가 나봇을 죽인 아합 왕을 꾸짖는 대목에서 이 동사는 의도적인 살인을 의미하지만(열왕기상 21:19), 도피성을 지정하는 대목에서는 실수로 저질러진 살인을 가리키며(신명기 4:42)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사람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죽여야 한다.”라는 민수기 35장 30절에서는 사법적인 살인 곧 ‘사형’을 가리킨다. 이렇듯 ‘라짜’는 전쟁터에서의 살인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살인을 의미하므로 문맥을 잘 살펴서 해석해야 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계명은 본래 ‘피의 복수’로 행해지는 살인을 금지하는 의도였는데 훗날 악의를 품고 의도적으로 저질러진 모든 살인을 금지하는 뜻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곧 어떤 상황에서든 무슨 방법으로든 증오나 분노, 악의, 속임수, 이득을 취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모든 행위를 ‘살인’으로 규정하고 금했다는 거다. 더 후대에는 계명이 목숨을 빼앗는 소극적 의미를 넘어서 사람의 생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것으로 더 확장됐다고 한다.
이 계명을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성서에 다양한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계명들에도 예외가 있지만 이처럼 다양하고 복잡하진 않다. 우선 의도적인 살인과 의도적하지 않고 과실로 저질러진 살인이 구별됐다. 의도적인 살인은 대부분 최고형인 사형으로 다스렸지만 의도적이지 않은 과실로서의 살인은 사형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도피성 제도였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몇 개의 성읍을 지정해서 “실수로 살인한 사람이 피신할 수 있는”(민수기 35:11) 도피성으로 삼아서 “살인자가 회중 앞에서 재판도 받아보지 못하고 보복자의 손에 죽는 일이 없도록”(12절) 하라고 명했다. 그리로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수로’ 살인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외국인이나 거류자로 포함됐다(15절). 이런 사람들이 피살자 가족 등에게 피의 복수를 당하기 전에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마련된 것이 도피성 제도였다. 재판 결과 고의적 살인이 아니라고 판명되더라도 피살자의 피붙이에게 보복당할 수 있으므로 살인자는 당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서 살 수 있었다(25절).
성서는 모든 살인을 똑같이 평가하지 않는다. ‘고의로’ 저지른 살인과 ‘실수로’ 저지른 살인, ‘피의 보복’에 의한 살인과 ‘사법 살인’을 성서는 구별한다. 의외로 성서는 ‘피의 보복’을 금하지 않는다. 갑이 악의를 품고 을을 죽였다면 을의 피를 보복할 사람이 갑을 죽일 수 있었다(16-21절). 또한 이스라엘에는 사형제도가 엄연히 존재했었다. 지파나 국가가 죄인을 사형에 처한 것은 계명을 어긴 게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도 금지되지 않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정당화할 수 없는 살인, 곧 처벌받아야 하는 살인이 있는 반면 정당화되는 살인이 있었다. 또한 그 중간에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의도적이지는 않기에 정상이 참작되는 살인이 있었다. 이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무엇이 어떤 살인은 정당화하고 어떤 살인은 정당화하지 않는가 말이다. 자살은 정당화됐을까? 낙태와 안락사는 어떻게 봐야 할까? 오늘날 전쟁은 대량살상무기로 치러지므로 거기서 파생되는 윤리 문제들은 과거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는 이 중에서도 사형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젊고 이상주의적인 피오트르가 변호사 면접시험 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법이 자연을 모사(模寫)해서는 안 되고 그걸 개선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법은 인간관계를 규정하고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아가는가를 결정한다고 믿었던 거다.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서 법을 준수하기도, 어기기도 하는데 이런 자유는 오직 타인의 자유에 의해서만 제한된다고 그는 믿었다. 법에 의한 형벌은 해를 가하려고 행해지는 보복일 뿐이고 그걸로 범죄를 예방할 수는 없다는 거다. 그는 면접에서 합격해 변호사가 된다.
한편 발데마르는 중년의 택시 운전사로 자기 직업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그는 먹고 살만큼은 벌고 승객이 맘에 들지 않으면 태우지 않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는 임신부의 탑승을 거부할 정도로 질이 좋지 않다. 젊은 여인에게 추파를 보내는 속물이기도 하다.
스물한 살 청년 야섹은 가출해서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건달이다. 그는 빈둥거리며 못된 짓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 자길 보고 웃는 사람을 쥐어박아 변기에 처박기도 하고 다리 위에서 지나가는 자동차에 돌을 던져 사고를 일으키기도 한다. 로프와 막대기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그는 당장이라도 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
야섹이 어느 날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손에 감던 로프를 칼로 자르고 뛰어나가 발데마르의 택시를 잡아타고 교외로 간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당도하자 그는 갖고 있던 로프로 발데마르의 목을 조르는데 그가 죽지 않자 막대기로 마구 때린다.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그는 바윗돌로 발데마르를 때려죽이고 시신을 강가에 내버린다. 그 후 야섹은 라디오를 켜는데 여자아이들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그는 견디지 못하고 라디오를 꺼버린다. 그에게 여자아이와 관련된 모종의 사연이 있음이 암시된다.
야섹은 발데마르 살인용의자로 재판을 받는데 신참 변호사 피오트르가 그를 변호한다. 이 사건이 첫 사건인 열정적인 변호사 피오트르는 사형제도에 반대한다. 변호사는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직업이라고 믿는 그는 사형제도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두려움뿐으로 범죄 예방의 효과는 없다고 본다. 더욱이 판결의 오류로 일단 사형이 집행되면 그걸 바로잡을 수 없으니 사형제도는 없애야 한다는 거다.
판사는 사석에서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그의 변론은 최고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야섹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가 처형되는 날 피오트르는 그를 면회한다. 피오트르가 야섹의 어머니를 만났다고 말하자 그는 한 번 더 어머니를 만나달라고 부탁한다. 야섹은 여동생 마리가 열두 살 때 죽은 얘기를 피오트르에게 털어놓는다. 그가 친구와 술을 마셨고 친구가 트럭을 운전했는데 마리가 그 트럭에 치어 죽었다는 거였다. 그 일만 없었다면 그는 가출하지 않았고 모든 게 달라졌을 거라는 얘기였다. 그는 자기가 죽으면 아버지 곁에 묻어 줄 것과 사진관에 맡긴 마리의 영성체 사진을 찾아 줄 걸 부탁한다.
집행을 서두르는 관리의 성화에 면회는 끝났고 교도관은 야섹을 집행 장소로 끌고 간다. 처형은 그가 저지른 살인만큼 냉정하게 실행된다. 마지막으로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야섹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지만 교도관들이 그를 붙잡아 억지로 사형을 집행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형 집행 후 피오트르는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구역질난다!”고 되뇐다.
살인만 살인이 아니다
‘살인’의 의미는 세월과 함께 확대됐지만 생물학적 의미를 넘지 않았다. 개신교에선 외경으로, 가톨릭에서는 제2경전으로 분류되는 집회서에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빵 한 조각이 생명이며 그것을 빼앗는 것은 살인이다.”(34:21)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도 생명은 생물학적 의미로 사용됐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살인’을 물리적으로 생명을 뺐는 행위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을 것이다.’ 한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를 모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회에 불려 갈 것이요 자기 형제나 자매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던짐을 받을 것이다.”(마태 5:21-22)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살인’을 분노와 모욕, 언어폭력까지 포함하는 걸로 의미가 ‘확대’됐다고 이해하는 게 하나이고, 분노와 모욕과 언어폭력을 살인의 ‘동기’로 봤다고 보는 게 다른 하나다.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 대개의 경우 살인은 불현듯 저질러지는 범죄가 아니다. 어느 영화에서처럼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살인은 증오와 분노의 최종적인 결과다.
한편 요한일서 3장 15절은 “자기의 형제나 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을 하는 사람입니다. 살인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미움은 곧 살인이고 살인자에게는 영생이 없으므로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가치인 ‘영생’의 소유 여부가 형제자매를 사랑하느냐 미워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전후맥락을 보면 요한일서에서 죽음, 살인, 생명, 영생 등은 단순히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님을 볼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요한일서 3:11).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을 들며 가인이 한 일은 악했고 아벨이 한 일은 의로웠으므로 가인이 그렇게 했다고도 말한다(12절). 창세기 4장의 얘기만으론 이런 해석은 무리다. 가인과 아벨 얘기에 대한 오랜 해석의 역사를 감안하지 않으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는데 우리 얘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니 그 얘긴 여기서 멈추겠다.
다음으로 요한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한다. 세상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인데 그 까닭은 세상이 사랑을 모르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걸 어떻게 알까? 그들이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렇듯 모든 것의 중심에 ‘사랑’이 있다. 그래서 요한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있습니다.”라고 마무리한다(14절).
요한은 사랑, 생명, 영생이 그리스도인들만 누리는 특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배웠고 그분을 통해 경험했는데 그 사랑은 자기 목숨을 우릴 위해서 버리 데서 드러났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됐고 따라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거다(16절). 요한에게 가인의 아벨 살해는 영적 살해, 영적 생명의 메타포다. 모든 비극은 사랑의 결핍에서 오고 참된 신앙의 표는 사랑이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2).
이 계명은 의도된 살인과 의도되지 않은 살인을 구별해서 보복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 신약성서는 증오나 분노, 언어폭력 같이 살인을 초래하는 원인을 규명해내고 궁극적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데까지 계명의 의미를 확대한다. 이젠 이런 흐름을 감안해서 오늘날 이 계명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차례다. 오늘날에는 성서가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는 다양한 종류의 살인이 있다. 자살, 낙태, 안락사 등이 대표적인 예다. 사형제도와 전쟁에서의 살인은 성서가 수없이 언급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으므로 근본에서부터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쟁에서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구약성서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고대 이스라엘이나 초대교회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였다. 구약성서에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살인에 대한 특별한 지침 같은 건 없다. 지침이 있다면 전쟁터에선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그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과 전쟁했을 때 사람, 짐승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전리품도 태워야 했다(신명기 20:10-18). 그걸 ‘헤렘의 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가나안 정복 후엔 이 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은 패배한 군인과 가족을 노예로 삼았고 전리품도 공신들에게 분배됐다. 로마제국 시대였던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터에서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다. 요한계시록에 우주적인 종말론적 전쟁 얘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현실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과는 구별해야 한다. 그것 말고는 신약성서에 전쟁에 대한 얘기가 없다.
이스라엘의 전통적 전쟁 이념은 ‘거룩한 전쟁’(Holy War)이란 신학이다. 이스라엘에서 전쟁은 야훼가 자기 명예를 위해 직접 치르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은 전쟁터엔 나가지만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됐다. 이 이념은 여호수아 6장의 여리고 성의 경우처럼 초기엔 지켜졌지만 후대엔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신아시리아제국이 고대 중동 대부분 지역을 지배한 후로는 이스라엘이 주변 족속들과 별로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상황이 이렇게 달라지자 전쟁에 대한 이념도 달라졌다. 거룩한 전쟁 이념의 퇴색은 자연스런 과정이었다.
거룩한 전쟁 이념을 갖고 있었다 해도 그들 역시 무기를 들고 전쟁터에 나가 피 흘리고 목숨 걸고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야훼의 거룩한 전쟁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전쟁의 정당성 및 거기서 벌어지는 살인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효과도 있었다. 훗날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이 내세운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의 뿌리도 여기에 있다.
‘정당한 전쟁’ 이론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전제 위에 서있다. 이것은 전쟁의 ‘윤리’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걸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거룩한 전쟁’ 이념과는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평화주의자로 살아야 하지만 무고한 사람을 방어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전쟁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물론 이 전쟁은 평화를 확보하기 위한 방어전쟁을 가리킨다. 이것이 어거스틴의 정당한 전쟁이다. 한편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근거해서 정당한 전쟁의 요건 몇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로 전쟁이 이득을 취하거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한 목적을 갖고 치러져야 하고, 둘째로 국가와 같은 정당한 권위기구에 의해 치러져야 하며, 셋째로 폭력이 행해지는 중에라도 평화가 전쟁의 중심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한 전쟁’ 이론은 오늘날에도 가톨릭교회가 내세우는 전쟁 윤리이다. 개신교는 교단 숫자도 많고 성향도 다양해서 전쟁윤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 형편이다.
오늘날 전쟁의 양상을 보면 ‘정당한 전쟁’을 포함해서 어떤 전쟁윤리도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 관련 국제협약들도 지켜지지 않는다. 민간인에 대한 빈번한 살상(殺傷)도 빈번하고 대규모로 자행되고 있다. 911 사태 이후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름으로 자행한 수많은 인권유린 범죄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결론은 전쟁은 일단 벌어지면 쓰고 있던 윤리라는 가면을 금방 벗어버린다는 사실이다. 구약성서의 ‘거룩한 전쟁’ 이념이 현대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이념이듯 ‘정당한 전쟁’ 이론도 허울뿐인 명분에 불과하다. 그래서 전쟁은 무슨 수를 쓰든 막아야 하고 그 길만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길이다.
국가에게 사람 목숨을 빼앗을 권한이 있는가?
오늘날 문명국가에서 살인면허를 갖고 있는 유일한 기관은 국가다. 국가는 사형제도를 통해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 이 제도에 문제가 많다고 해서 많은 개인, 단체가 폐지운동을 벌여왔다. 덕분에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2007년도 통계에 의하면 64개 국가에서는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반면 133개 국가에는 이 제도가 없거나 있어도 십년 동안 형을 집행한 적이 없다고 한다.
사형제도에 대한 여론은 오락가락한다. 평소에는 폐지의견이 많다가도 연쇄살인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존속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진단다. 제도의 존속과 폐지 쪽 논리에 나름 타당성이 있다. 존속 편의 의견에 따르면 사형제도에 범죄억제 효과가 크고 범죄에 대해 징벌을 가하는 것은 사회정의라고 한다. 경제적인 면을 고려해도 이 제도가 비용이 적다고 한다. 반면 폐지 편은 생명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므로 인도주의 입장에서나 헌법의 입장에서나 사형제도는 폐지돼야 한다는 거다. 재판은 사람이 하기 때문에 오판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는 점도 폐지 주장을 뒷받침한다.
<어느 살인에 관한 이야기>도 결국은 사형제도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세 사람의 죽음 얘기다. 술 취한 친구의 트럭에 치어 죽은 야섹의 동생 마리의 죽음, 알지도 못하는 야섹에게 죽은 택시 운전사 발데마르의 죽음, 사형제도에 의해 죽은 야섹의 죽음이 그것이다. 마리의 죽음은 실수에 의한 죽음이고 발데마르의 죽음은 목적 없는 무의미한 죽음이다. 이 죽음을 야기한 사람은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했다. 두 살인에 대해서는 국가가 살인자에게 책임을 물렸지만 국가가 저지른 살인(사형)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래도 괜찮은가?
왜 세 죽음을 나란히 얘기했을까? 마리의 죽음은 이 가운데 가장 억울하다. 야섹은 단번에 죽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는 발데마르를 잔인하게 돌로 쳐 죽였다. 치밀하게 준비한 국가 관리들에 의해 실수 없이 조용히 죽게 되어 있던 야섹은 잠시 소란을 피우지만 간단히 제압당한 후 숨을 거둔다. 마리는 잘못 없이 죽음으로써 관객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발데마르는 고상한 도덕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 만큼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마리처럼 동정을 살 이유도 없지만 죽어 마땅하지도 않다. 한편 야섹에겐 동정 받을 구석이 없어 보인다. 마리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야섹이 살인해도 되는 건 아니다. 그에게 동정 받을 구석이 없다는 사실이, 그가 의미도 목적도 없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국가 권력에 의한 처형을 정당화할까? 그의 처형을 정의의 실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늘날 국가는 유일한 살인면허를 가진 존재다. 전쟁을 선포하고 실행하는 유일한 기관도 국가이고 ‘테러와의 전쟁’ 같이 그럴듯한 명분을 세워 사람을 죽이는 유일한 기관도 국가다. ‘정의로운 전쟁’ 이론에 따르면 생명을 취하는 권한을 가진 국가는 세상의 폭력을 관리하고 제한할 수 있는 도덕적, 윤리적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국가에 그런 정당성이 있는가? 제도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죽일 권한을 주어도 될 만큼 국가는 정의로운가?
그 누구에게도 사람의 생명을 취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사람 목숨을 빼앗을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국가를 감시하고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있는가 여부에 있다. 우리 경험에 따르면 그런 장치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국가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한다. 안 그런가? 국가는 ‘모든’ 국민의 복지를 위해 정책을 정하진 않는다. 심지어 전쟁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도 ‘모든’ 국민의 이해가 아니라 소수 지배자의 이해에 따라 결정되지 않던가. 우리는 지난 십여 년 동안 이런 현실을 신물 날 정도로 봐오지 않았나 말이다. 그래서 전쟁에 의한 살인이나 사형제도 문제도 결국 국가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계명은 적극적인 생명가치의 바탕 위에서 이해해야
자살이나 안락사나 낙태 문제 역시 계명과 관련된 중요한 사회문제다. 그 동안 낙태와 안락사 문제가 사회문제로 인식되어온 것과는 달리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왔다. 이를 사회문제로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개인의 문제로 본다. 특히 해결책에 있어서 그렇다. 자살의 최종적인 책임은 대부분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에 돌려졌다. 또한 안락사와 낙태문제에 대해서도 교회는 설득력 있는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이에 대해서 일관된 입장을 보여 왔지만 일반대중에게 크게 설득력이 있지는 않은 형편이다.
교회는 안락사와 낙태와 자살을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죄’라고 규정한다. 셋 모두 성서에 등장하지 않거나(낙태와 안락사) 등장해도 문제시하지 않으므로(자살) 거기 근거해서 입장을 정할 수는 없다. 결국 성서의 기본입장이 뭔지 물어야 한다. 하지만 성서의 기본입장은 말 그대로 기본입장일 뿐, 구체적인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적용하는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개신교는 안락사와 낙태와 자살에 대해 통일된 입장이 없고 가톨릭교회는 셋 모두 반대한다. 아무리 상황에 어렵다고 해도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사람 맘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 이유다. 여기서도 생명가치가 가장 중요하게 인정돼야 한다. 그런데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안락사, 낙태, 자살의 문제를 전쟁에서의 살인 및 사형제도와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생명가치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최고의 가치라면 전쟁과 사형제도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그 문제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예외를 인정하는 모순을 교회가 저지르고 있다. 그래서 안락사, 낙태, 자살에 관련된 교회의 입장이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안락사와 낙태와 자살을 허용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생명이 최고의 가치라면 그걸 적용하는 데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계명을 제대로 지키려면 현재 상황에 맞춰서 계명을 기술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는 생명가치를 최고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권력과 부(富)처럼 폭력과 살인을 용인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자리에 올려놓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계명을 제대로 지킬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가 그 동안 해온 걸 반성해야 한다. 안 그런가?
교회는 형제자매에게 성을 내거나 모욕하거나 바보라고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살인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가르쳤지만 놀라울 정도로 쉽게 폭력을 용인하고 생명가치를 깎아내렸다. 권력을 가진 집단의 횡포를 견제하고 꾸짖기는커녕 그들의 가치관에 동화되어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벌였을 때도 침묵하거나 불의한 권력의 손을 들어줬다. 이런 행태를 보여 온 교회가 안락사, 낙태, 자살을 생명경시 풍조라고 꾸짖는다면 누가 교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나.
교회는 부에 대한 욕망과 폭력이 뗄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그것의 필연적인 귀결은 ‘살인’임도 깨달아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는 온유하고 자비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서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드높이는 공동체가 됐으면 좋겠다.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에 그 일을 하고 있는 여타 공동체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단체들,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터에 나가서 어느 편이든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단체들, 생명의 가치와 신비를 고양하는 데 힘쓰는 단체들, 굶는 아이들과 치료 못 받는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단체들, 그 종류를 열거하기도 힘든 여러 단체들과 손잡고 참된 생명과 평화의 질서를 세우는 데 온몸을 던져야 하겠다. 안 그런가?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여러 번 말씀했다. 교회는 입을 열어 자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귀를 열고 세상의 소리를 들어야 하겠다.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한다. 교회가 말을 들어주지 않고 곁을 내주지 않아서 외롭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는 “살인을 용인하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