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15. 11. 5. 15:41

김기석의 톺아보기(17)

 

오랜 외로움을 넘어

- 도로시 데이의 《고백》-

 

 

“우리는 모두 숙명적으로 외로움을 느낀다. 이 외로움 앞에 내놓는 이번 삶의 유일한 답은 공동체다. 함께 살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는 그 형제와 공동체를 이루어 가까이 살아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425쪽).

 

불안의 시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한 활동가이자 명상가’, ‘지난 100년 동안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자’, ‘미국의 마더 테레사’라고 일컬어지는 도로시 데이, 월간 잡지 <가톨릭 일꾼>을 창간했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환대의 집>을 열었던 이 전사적 인물의 자서전이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그런데 자서전의 원제는 《오랜 외로움》(The Long Lonliness)이다. 이 뜻밖의 제목이야말로 도로시 데이의 영성과 실천이라는 비밀의 화원을 여는 열쇳말이다. ‘오랜 외로움’은 모든 사람이 겪을 수밖에 없는 실존의 한계 상황이다. 살라는 명령을 받고 이 세상에 왔지만 어떻게 살라는 지침은 받은 바 없기에 우리는 암중모색과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한 세월을 살아간다. 생명의 기본 조건은 모호함과 불확실성이다. 슬픔과 기쁨이 갈마드는 인생길에서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을 때, 근원을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찾아온다. 불청객처럼.

 

대공황 시기, 끝없는 불안의 시대를 통과해야 했던 도로시 데이는 “이 삶을 어떻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15쪽)를 진지하게 자문했다. 그리고 실제적이고 지역적이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살기로 작정했다. 물론 인생의 길을 찾아가는 그의 여정에 이정표로 선 이들이 있었다.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오웰, 실로네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들이 그려 보인 도덕적 이상과 나중에 입문하게 된 가톨릭교회의 영성이야말로 도로시 데이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두 질료라 할만하다. 도로시 데이라는 심지에 영혼의 불꽃을 점화했던 피터 모린도 빼놓을 수 없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궤적을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그가 굳이 자기의 생의 내밀한 골방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자신에 대해 써도 결국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에 닿는다”(23쪽)는 겸허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11월 8일 브루클린 배스비치에서 태어난 데이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1906년에 일어난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경험 때문인지 무에 대한 두려움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지진의 참상을 겪는 이들을 돕기 위해 헌신하는 이웃들의 모습은 어린 소녀의 가슴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새겨졌다. 성인들의 삶에 감흥을 느끼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이웃집 아주머니의 모습에 감동하고, ‘베네디시테Benedicite’와 ‘테 데움Te Deum’ 등의 찬송가를 듣는 것도 기쁨이었다.

 

온갖 난관 속에서도 지향을 바꾸지 않았던 데이의 검질김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자질인지도 모르겠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처럼 데이의 어머니는 강인하고 낙관적이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다른 날에 비해 유독 걱정거리가 많았다거나 하루 일이 특별히 더 힘들었을 경우, 어머니는 늘 어디 저녁모임에라도 나가는 듯 신경을 써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갖추어 입었다. 그리고 여왕처럼 앉아서 저녁 식탁을 주재하며 우리 네 자식을 모임에 참석한 같은 어른들인 양 정성으로 대접했다”(50-51쪽). 시련과 절망에 맞서는 법을 어머니는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정은 데이에게 위로와 안전, 평화와 공동체를 제공해주었다.

 

 

 

나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삶은 오빠들의 영향으로 접하게 된 신문과 책들로 말미암아 깨지고 말았다. 잭 런던, 업튼 싱클레어의 책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다. 아나키스트인 크로포트킨과 베라 피그네르의 글과 접하면서 데이는 자신의 삶이 도시 빈민들의 삶과 연루되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힌다.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의 행복”(71쪽)이라고 생각했던지라 도처에 널린 극빈의 현실은 당혹감을 안겨 주었고, 세상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부유한 기독교 신자들에 대한 반감은 더욱 깊어졌다.

 

일리노이 대학에 입학한 후, 일부 신자들이 누리는 안온한 행복은 세상의 고통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데이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관련된 욕설을 내뱉음으로써 교회 다니는 친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바로 그때 데이에게 천둥처럼 다가온 소리는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는 마르크스의 구호였다. 산업사회의 포로가 되어 최소한의 인간적 삶의 기회마저 박탈당한 사람들, 그 기나긴 절망의 행렬은 데이에게 이렇게 외쳤다. “노예들을 도와줄 것이 아니라 노예제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그렇게 해서 사회질서를 뒤바꾸려고 노력하는 성인들은 어디에 있는가?”(82-83족) 아직은 방향을 잡지 못한 거룩한 분노가 데이의 가슴에 사무쳤다.

 

가족을 따라 뉴욕으로 이주한 데이는 사회주의 계열의 일간지인 <콜Call>에 기고하면서 비로소 공적인 직무를 시작한다. 이때 아나키스트들의 대의에 깊이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대중운동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데이는 “모든 종류의 파업, 시위, 평화 촉구 집회 등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달려갔다”(102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는 자기를 성찰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감옥에 가고, 글을 써서 남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이 자기 속에 있음(107쪽)을 알아차린다. 이때 그의 마음에 충격을 준 것은 교황 레오 13세의 ‘노동헌장Rerum Novarum’과 ‘40주년Quadragessimo Anno’이었다. 이 문건들은 당대의 산업주의 질서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적, 사회적 의무를 제시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충격이었을 뿐, 신앙으로의 귀향의 계기가 되지는 못했다.

 

데이는 워싱톤의 여성참정권론자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가 생애 최초의 감옥생활을 체험한다. 정치범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동안 데이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어떠한 대의도 자각도 상실한 채 벌거벗은 고통과 공포만을 응시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삶이 이토록 추하고 하찮다는 통한의 확신(136족) 때문에 데이는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개인적인 한계 경험이 있었기에 데이는 이제 인류의 고통 앞에서 자신이 결코 자유롭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한다.

 

“나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창살 뒤에 수많은 사람들과 나이 어린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저지른 범죄로 인해 구속과 징벌과 고립과 시련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결단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었다”(136쪽).

 

절망을 피하는 길은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게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헤셀)임을 데이는 본능적으로 이해했던 것일까? 데이는 세상의 고통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음으로써 자기 초월의 길로 접어든다. 예수는 그 길이 좁고 험하여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 했다. 세상의 고통에 민감한 사람은 고통의 연대를 피할 수 없다. 그 참담한 시간 그가 성경을 찾은 것은 계시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시편을 읽으며 데이는 잊고 있었던 기쁨과 감사와 희망을 되찾는다. 석방과 더불어 다시금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기는 하지만, 그의 가슴에 뿌려진 씨가 발아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앙으로의 귀의

 

어느 날 데이는 유진 오닐이 낭송하는 프랜시스 톰슨의 시 ‘하늘의 사냥개’를 들으면서 미친 듯한 삶의 질주를 멈추고 자기 삶의 시종을 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날 이후 데이는 새벽에 나가기 시작했다.

 

“불빛과 침묵, 무릎 꿇은 신자들과 예배의 분위기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지고 위로가 되었다. 사람에게는 어떤 대상을 공경하고 예배하고 흠모해야 할 크나큰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심리적 필요이다”(147-148쪽).

 

데이는 의지의 행위로서 기도의 분위기에 자신을 맡겼다. 자발적 가난에 대한 지향이 생긴 것도 그때이다. 킹스 카운티에서 간호실습생으로 일한 것도 인류의 고통 속에 더욱 깊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호사의 직무도 데이의 내적인 허기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날마다 벌어지는 비극을 오래 붙들고 괴로워할 수도 없었고, 비극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거리를 두고 성찰할 수도 없었고, 비극이 끝도 없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는 본능적으로 성찰적 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병원을 떠난 데이는 유럽 여행도 하고, 온갖 신산스런 일들에 연루되기도 하면서 자기의 또 다른 운명인 글쓰기에 매달렸다.

 

첫 번째 책이 출간되고, 그 소설의 영화 판권도 팔리면서 데이는 처음으로 풍족한 삶을 맛보게 된다. 스태튼 아일랜드 해변에 작은 집 한 채를 산 데이는 아나키스트인 생물학자 포스터와 살림을 시작한다. 이때의 경험이 《고백》의 제2부 <자연스러운 행복>에 오롯이 담겨 있다. 데이에게 있어서 이 기간은 인생에서 누려야 할 행복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성찰한 시간이었고, 또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데이는 신앙으로 귀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기 다말이 태어나면서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은 위기를 맞게 된다. 데이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딸아이의 인생에 질서를 부여하리라는 생각에 다말로 하여금 세례를 받게 한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 경멸했던 포스터는 그 일을 계기로 데이 곁을 떠났다.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데이의 내면에 어떤 뿌리가 내리던 시기였다.

 

가톨릭 신자가 된 데이를 또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 것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이었다. 아나키스트로서 구두 제조공과 생선 행상이었던 그들은 급여 강탈사건에 가담했다가 경비원 둘을 죽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인류의 양심을 뒤흔든 이 사건은 데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을 위해 절규하는 가톨릭교회의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은 더욱 큰 충격이었다. 데이는 자선은 베풀지만 정의를 위한 투쟁에는 가담하지 않는 교회, 인권을 유린당하는 이들을 품지 못하는 교회, 산업-자본주의 체제에 동의하는 교회에 절망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기어이 찾아내 상처를 싸매 줄 사제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다시 신앙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교회를 떠날 수는 없었다. 로마노 과르디니의 말대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였고, 누구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분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외로움에 이어 우울증이 찾아왔고, 그는 캘리포니아로, 멕시코로, 그리고 뉴욕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다녔다.

 

인류의 고통 속으로

 

데이는 워싱톤을 향해 행진하며 실업 대책을 촉구하고, 구호물자를 요청하고, 강제 퇴거에 저항할 목적으로 구성된 굶주림의 행진에 <커먼윌>의 취재 기자로 동행한다. 데이는 자신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 여름 뙤약볕을 견디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 감동한다.

 

“그들은 그분의 친구였고 동지였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마음이야말로 주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 아니던가”(290쪽).

 

시위가 끝나고 기사를 탈고한 후 데이는 워싱턴 국립성당으로 갔다. 그곳에서 특별한 기도를 바쳤다. “보잘것없는 재주이오나 우리 노동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길을 열어 달라는 기도”(291쪽)였다.

 

기도의 응답은 즉각적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피터 모린이었다. 피터 모린과의 만남이야말로 사건이 되는 만남이라 할만하다. 그는 데이의 내면에서 부대끼고 있던 사회 변혁의 열망과 가톨릭 신앙을 잘 버무려준 최고의 요리사라 할 수 있다. 그가 품었던 “사람들이 더 쉽게 선해질 수 있는 사회”의 꿈은 고스란히 데이에게로 옮겨왔다. 형제들이야말로 하나님과 선을 발견하는 가장 확실한 도구로 여겼던 그는 ‘종교, 문화, 경작’을 종합하는 삶을 제시했다. 어디에나 둘러앉아 원탁토론을 즐겼던 피터는 국가가 독점한 일체의 원조와 지원 활동에 맞서기 위해 환대의 집을 세울 것을 제안했고, 실업자들에게 땅과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농업경영대학을 설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신문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데이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가톨릭 노동자Catholic Worker>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신문의 제목을 가톨릭 노동자로 정한 까닭은 당시의 가톨릭교인들 대부분이 가난했기에, 그들에게 열정을 심어줘 영혼의 무기를 들고 싸울 수 있게 하고 싶었기 때문(371쪽)이다.

 

<가톨릭 노동자> 1933년 5월에 창간호를 냈는데, 발행부수는 2천5백 부였다. 그리고 3년이 지날 즈음에는 15만 부까지 발행하게 되었다. 비전을 공유하는 조력자들도 늘어났다. 늘 성찰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던 데이는 신문의 성공에 도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신문을 만들고 발송하는 일은 쉽지만, 말을 듣고 길거리로 나가야 생명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신문을 팔면서 데이와 동료들은 길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사귈 수 있었다. 낯섦에 대한 두려움이 해소되면서 우애는 형제애로 발전했고, 그 사랑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힘이 되었다. 길거리에 나서면서 데이가 깨달은 것은 매스 미디어가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근본적이고 단순한 종교적 진리에 공감한다는”(359쪽) 사실이었다.

 

데이의 사회 변혁 운동이 짙은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택한 전략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계의 노동자들의 현실을 언급한 교황들의 글에서 구호 문구를 뽑아냄으로써 급진적이라는 비난에서 비켜섰고,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회사의 물품을 사지 말라고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실천의 길을 제시했다. 우리 사회에서 ‘진보는 죽었다’는 선고가 들여오는 오늘의 현실 가운데서 데이의 유연한 지혜는 귀감이 된다.

 

초창기 직원들의 생활을 위해 마련한 공간은 자연스럽게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공동체인 ‘환대의 집’으로 발전하였다. 데이와 피터는 신앙적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형제’라고 생각했고, 말 그대로 벌거벗은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환대의 집은 그저 구호품을 내놓는 공동체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고통을 같이 짊어지기 위해 육신의 안락은 물론이고 정신과 영혼의 위안조차 포기해야 하는 공동체였다. 환대의 집은 “실직자들, 병들고 아픈 사람들, 고용 부적격자들”(380쪽)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데이는 극빈자들을 대접하기 위해 값을 무시하고 좋은 밀가루와 커피를 구입했고, 이런 호기 어린 씀씀이를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거룩한 낭비인 셈이다. 아주 소박하게 시작된 ‘환대의 집’은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 “공동체, 그것은 오랜 외로움 앞에 내놓는 사회적 해답”(395쪽)이었다.

 

또 다시 출발선상에

 

데이가 또한 소중히 여긴 것은 피정이었다. 농장에서 시작된 정례 피정은 영원에 비추어 오늘을 조율하는 일이었고, 처리해야 할 많은 일로 비어버린 가슴에 하늘을 채우는 일이었다. 데이는 피정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 역시 굶주리고 목말라서 기운 차릴 음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맡은 일을 하자면 나 역시 먹어야 한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마른 샘이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이처럼 달디단 샘물을 마셔야 한다”(461쪽).

 

데이의 <가톨릭 노동자>가 순탄한 경로로만 움직인 것은 아니다. 국가가 전시 동원체제로 재편되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애국주의적 열정을 심어주려 할 때, <가톨릭 노동자>는 단호하게 평화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징병제의 부도덕성을 강조하고, 양심적 징병거부를 부추긴다. 그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떨어져 나간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으며 데이는 폭력의 정치에 영적인 무기로 맞설 만큼 자신에게 영적인 능력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을 느낀다. 동료이자 사부였던 피터 몰린의 죽음도 데이에게는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고백》은 1952년 이후의 데이의 삶은 기록하고 있지 않다. 이 책의 말미에 숭실대학교의 김회권 교수가 덧붙인 해설은 이후 30년 가까운 데이의 반전평화운동, 인종차별철폐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사회변혁운동에 철저한 투사이면서도 오랜 외로움을 직시하는 영성가였던 데이의 삶은, 이웃들의 아픔에 반응할 줄 모르고, 예언자적 소리를 잠재워버린 한국교회를 향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종소리에 화들짝 깨어나는 이가 많아지기를.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서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빵을 갈라 먹으며 그 분을 알고, 서로를 안다.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천국이 잔치일진대, 우애만 있으면 빵 한 조각을 놓고도 인생 또한 잔치 아닐런가”(502쪽).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