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 젊은이들
김기석의 톺아보기(18)
힘내라, 젊은이들
입동이 지난 후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뒤쳐지지 않으려고 재바르게 살다가 마음이 묵정밭으로 변해버린 이들일수록 영문모를 영혼의 헛헛함으로 인해 울적해지는 때이다. 그래서인가? 노란 은행잎이 소복히 쌓인 거리를 걷노라면 그 따스한 노란빛이 마치 위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쌀쌀한 초겨울 풍경에 눈길을 주다가 이상하게 거리가 살짝 들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 활기가 수능시험을 치른 이들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다.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것 같은 홀가분함으로 거리를 채우고 있는 젊은이들. 옅게 화장한 얼굴이 쑥스러운지 서로 바라보며 까르르 웃는 여학생들, 어른들의 세계에 틈입하기 위한 절차인지 염색과 퍼머로 멋을 낸 남학생들, 그들은 비로소 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들의 숨이 거리를 들뜨게 만들었던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정규직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그 절박함에 가슴이 얼얼해진다. 그러는 한편 가슴 가득 분노가 인다. 젊은이들의 관심이 온통 먹고 사는 일에 집중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신적 왜소증에 시달리게 만드는 세상은 미래가 없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그리스인들은 앎 그 자체를 위해 배웠고 히브리인들은 경외하기 위해 배웠지만 현대인들은 써먹기 위해 배운다고 말했다. 소위 실용적 지식이 대세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럴수록 인간다움에 대한 관심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잔다리를 밟아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인간다운 품격을 갖추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실패다.
들릴라의 무릎을 벤 채 달콤한 꿈에 취했던 삼손이 떠오른다. 나른하고 포근한 행복감에 젖어들던 바로 그 때 그는 머리카락을 잘리웠고 산을 뽑을 듯하던 기운도 잃어버렸다. 적들을 향해 불이라도 쏟아낼 것 같았던 눈도 뽑히고, 조롱하는 적들 앞에서 맷돌을 돌려야 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망각한 자의 비극이다. 들릴라는 오늘도 성공 혹은 행복이라는 환상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자기 무릎 위에 눕히려 한다. 저항하기 힘든 유혹이다. 들릴라의 손짓을 오연하게 뿌리칠 수는 없을까? 자기 삶의 주체로 바로 설 때 가능하다.
시카고 대학교의 석좌교수인 마사 누스바움은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라는 책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지역적 차원의 열정을 뛰어넘어 '세계 시민'으로서 세계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곤경에 공감하는 태도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 교육의 과제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실용적인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자본주의 경제질서에 편입된 교육체제가 소홀히 하고 있는 부분을 강조하는 것이다. 공감의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 교육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우리 삶이 각박해진 까닭은 돈과 성공을 신처럼 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익이 삶의 중심 가치가 될 때 사람은 교체 가능한 부품이나 쓰고 버릴 수 있는 소비재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런 세상은 사람을 제물로 받는 몰록신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익지 못한 채 떨어진 감 열매를 소금물이나 쌀독에 묻어 두었다가 떫은 기가 가시면 간식거리로 주셨다. 여름이 끝날 무렵 참외 덩굴을 걷다가 채 익지 않은 열매를 보면 그것조차 거두어들여 된장에 박아놓았다가 겨울 반찬으로 삼곤 했다. 도사리까지도 여퉈두던 그 마음, 배추 꼬리 하나까지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그 살뜰함, 오래 사용해 사그랑이가 되어버린 도구들도 버리지 않고 기어코 다른 쓸모를 찾아주던 그 살림의 손길이 그립다. 거리를 들뜨게 만들던 젊은이들이 세파에 떠밀려 허든거리지 않고 자기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