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의 '종횡서해'

목사와 기자의 러브레터, 가슴 시린 이유는?

한종호 2016. 2. 11. 10:31

꽃자리의 종횡서해(21)

 

목사와 기자의 러브레터, 가슴 시린 이유는?

 

칼 바르트의 권고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신학 하는 동네에서는 유명한 말이다. 스위스 출신 신학자 칼 바르트가 한 이 발언은 신학이 추상과 관념의 세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살아 있는 생생한 현실과 만나라는 권고였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신문’이 현실을 바로 보여주는 걸 전제로 한 이야기렷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세상과 맨몸으로 만나서 그 세상에 역동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보다는 교회주의에 안주해서 자신을 살찌우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그 종교는 예수가 오래 전 말했듯이 ‘맛을 잃은 소금’이리라.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대부분 바로 이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그걸로 신도를 모으고 자본의 성채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요즘 신도들은 소금의 짠맛을 싫어한다나 어쩐다나, 하는 핑계를 대면서.

 

부당한 현실과 긴장관계를 가지면서 예언자적 소명을 가진다든가, 십자가로 압축되는 기존 질서에 대한 죽음을 불사하는 격렬한 도전과 소유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가난한 이웃과 함께 지내려는 의지는 이런 교회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현실에 대해 거론하면, 복음을 세상의 그림자로 가리려 든다고 비난하고 정의를 외치면 그건 교회가 할 일이 아니라고 쌍심지를 세우고 배척한다.

 

강도의 소굴이 된 한국교회

 

하지만 이런 교회일수록 기회만 생기면 정치적 욕심을 드러내고 물질에 대한 탐욕을 부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복음의 순결을 가장한 저열한 장사를 하는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교회를 향한 예수의 일갈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에 집약된다. 한국교회에는 간판만 교회이고 그 속은 강도의 소굴이 허다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성서와 신문이 하나가 되어 현실을 말하는 기독교가 되라고 촉구했지만, 그러자면 우선 성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바로 서야 한다. 하지만 강도의 소굴에서 성서는 시장에서 영업 활동의 도구로 전락했다. 적지 않은 수의 목사들의 설교는 현실의 기만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이른바 성공주의의 마술을 전파한다. 예수는 이런 종교와 하등 상관이 없다.

 

그런 한국 교회의 한복판에서, 당대의 기자와 당대의 목회자가 만났다. 신문장이와 성서 해설자의 조우이자, 두 ‘진지남’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담아낸 고준담론이다. 성품이 진지한 것에 고준담론까지라니 너무 진지해서 숨 막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예술적 영혼의 여유를 가진 이들이다. 둘 다 한때의 문학청년이고(안 그런 사람이 또 어디 있겠냐만은) 지금껏 그 문학의 숨결을 여전히 섬세하게 지니고 있는 문장가들이니 당연하다.

 

 

 

김인국 신부의 감탄사

 

여전히 청년 같기만 한 60대의 기자와 목사가 서로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 나이는 목사가 조금 위다. 서로에 대한 한없는 존경과 애정이 듬뿍 담기면서도 오늘의 시대와 교회를 깊이 성찰하는 이 두 사나이의 편지는 살갑기 짝이 없다. 닭살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음성이 낮으면서도 준엄하고 높으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 책의 마무리에 글을 올린 김인국 신부는 기자와 목사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을 읽고 이렇게 감격해한다.

 

편지를 읽는 내내 두 분의 말씀을 숫돌로 삼아서 제 무디고 무디어진 영혼을 새롭게 벼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대화는 판소리 명창과 고수의 호흡처럼 그 노래와 추임새가 척척 감기며 어우러지다가도 어느 대목에서는 ‘어째서 교회가 죄 경영을 일삼는가?’ ‘믿는다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치 시퍼런 칼날이 내 뺨을 스칠 때의 서늘한 감촉처럼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 자체가 한여름의 폭포소리처럼 시원하고 통쾌하였습니다. 어째서 이리도 당연한 물음을 피해가면서 그렇게 어리고 모질게 살았는지 원통할 지경입니다. 번번이 공손하되 단호한 물음이었고 답변 또한 그에 못지않게 선명하고 뚜렷하였습니다. 결코 얼버무리지 않았고 애매모호한 변증으로 봉합하거나 슬쩍 덮어버리는 재주 따위는 두 분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맨살로 예리한 창끝을 맞받겠다는 듯 성경의 본뜻과 오늘 교회의 삶이 얼마나 지독하게 어긋나 있는지 하나도 감추지 않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자신 온 몸으로 못된 세력이 쥐고 있는 현실에 돌진하면서 살아온 김인국 신부의 이 글은 손석춘과 김기석이 나눈 이야기들이 얼마나 이 시대에 절실한 울림을 주고 있는지를 증언해준다. 그에 더해 김인국 신부의 글 솜씨가 이 정도일 줄이야, 새삼 놀랐다. 다음에는 기자, 목사, 신부, 스님 다 나오라고 하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자본의 성채가 된 교회

 

오늘의 교회가 보여주는 실상에 대한 손석춘의 질타는 맵다.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야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교회가 다수입니다. 김 목사님이 지적했듯이 “목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교회를 성장시키려”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당을 짓고, 많은 땅을 사서 기도원을 짓고, 묘지를 조성하고, 큰 차를 타고 다니고, 기득권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적지 않지요.”

 

그러면서 이렇게 묻는다.

 

김 목사님은 자본의 논리를 비판하는 게 ‘주님의 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주님은 자본이 자본을 낳는 구조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원하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세계 교회협의회는 부자나라에게 가난한 나라의 빚을 탕감해주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어 간단하지만 명토 박아 쓰셨더군요. “기독교인은 자본의 논리를 내세우는 사회체제에 저항할 책임이 있다.”

 

솔직히 말씀드려 참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목사님도 지적했듯이 문제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자본에 종속돼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 사회에서 언론과 종교는 빛과 소금으로 존재해야 함에도 언론에 이어 종교마저 빛을 잃고 소금은커녕 되레 썩어가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싸움꾼 예수

 

김기석은 뭐라고 답하는가?

 

기존 질서에 순응할 수 없었다는 측면에서 예수는 타고난 싸움꾼입니다. 모름지기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라면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교리 속에 박제화 된 예수가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을 온몸으로 살아가신,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삶 속에 끝없이 화육해 들어오는 예수를 믿는다면 말입니다. 예수는 점잖은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늘 고통의 한 복판에 서 계셨습니다. 불의한 성전 체제와 싸우고, 비인간화된 삶을 강요하는 현실과 싸웠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런 삶의 결실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히 구원을 가리키는 기표가 아닙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통해 예수라는 젊은이의 선연한 핏방울이 아로새겨진 십자가에 던져진 장미꽃들을 걷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싸움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효율적인 싸움을 위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는 한사코 그런 유혹을 뿌리칩니다. 미운 놈은 미워하는 게 정의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게 우리의 도덕 감정에도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렇게 해서는 정의가 수립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응대해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강자들이 약자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힘이기도 하고, 약자들이 두려움 때문에 선택하게 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기대고 있는 힘은 물리적 힘(force)이 아니라, 내면의 힘(power)이었습니다. 답답하게 여겨질지라도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고독한 두 남자, 그러나 의기투합의 힘

 

긴 인용이 되었지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때로 동의, 때로 반론, 그리고 때로 공분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도 편지글을 읽다보면 기자와 목사가 아니라 두 문학청년, 또는 두 수도자가 서로 나누는 정담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김기석의 어느 날 쓸쓸함에 대한 단상이다.

 

흰 이슬로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손 선생님께 이렇게 목사다운 인사를 드리는 게 합당한 일인지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넵니다. 지난 달 잠시 만나 뵙고 돌아오는 길에 효창공원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비가 내린 후 맑게 갠 하늘빛이 아름다웠고, 나뭇잎 사이로 내려앉는 햇살이 싱그러웠습니다. 물기를 머금고 번지는 흙내음도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쓸쓸함이 몰려왔습니다. 왜 착하고 온유한 사람들이 이토록 어렵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손 선생님의 모습과 음성에 담긴 쓸쓸함과 따뜻함, 그리고 세상의 어둠을 헤쳐 나가느라 겪어낸 시간의 갈피를 언뜻 본 듯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손석춘은 또 어떤가?

 

편지를 쓰는 지금 창밖에선 번개가 번쩍이고 곰비임비 천둥이 칩니다. 제가 글을 쓰는 공간에 지난해 느닷없이 벼락이 때려서일까요. 우르릉 소리가 다가오면 그날 마치 대포알처럼 굉음으로 터졌던 순간이 엄습하며 몸이 저절로 움찔해집니다. 목사님은 편지에서 “어쩌면 지금 하염없이 전국을 적시는 장맛비는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인지도 모르겠다”고 쓰셨지요.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비를 좋아해 창가에 의자를 바투 놓고 차창에 부서지는 빗발을 자주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민중의 눈물로 특정지은 경험은 없었습니다. 다만 “세상은 여전히 아프고, 눈물의 강은 우리네 삶을 관통하며 유유히 흘러간다”는 말씀에서 우리 시대를 올곧게 걸어가는 목회자의 고독한 심경을 읽을 수 있었지요.

 

도처에 잠언 같은 문장들과 생각들이 번뜩인다. 생각은 핵심을 날카롭게 뚫고 나가는 칼이나, 말은 우리의 심성을 감싸는 체온이 있다. 이게 바로 오늘의 예수가 보여주는 복음이다. 이게 바로 오늘의 언론이 깨우쳐야 할 철학이다.

 

기자와 목사, 두 바보가 아니라 사실은 두 ‘지혜자’가 들려주는 기쁜 소식이 이 시대에 희망을 길어 올리게 할 것이다. 부디 그 자신이 길 잃은 양이 된 교회가 이로써 일상의 세계에서 복음을 발견하는 길에 눈 뜨기를.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