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 또 그렇게 눈물이 쏟아진다
김남주, 또 그렇게 눈물이 쏟아진다
- 시인과 나 -
1.
김남주(金南柱, 1946년 10월 16일~1994년 2월 13일) 시인의 시와 생애를 담은 《김남주 평전》(김삼웅 저, 꽃자리, 2016) 출판기념회에 갔다. 서울의 초입(初入)이 늘 그렇듯 정체가 심했다. 전화가 왔다. 함께 가기로 약속한 친구 J전도사였다. 각자 길이 막혀 전화로 수다를 떨기로 했다.
“형님, 그런데 전 사실 김남주 시인 선생님이 누군지 몰라요.”
허걱!
“......”
“전 사실 교회 안에서 신학공부에만 매달려 왔잖아요. 성서신학 외에는 아는 게 없으니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다시 허걱! 난감했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 대답해 주어야할까? 80년대 군사독재의 학살과 억압에 온몸으로 시로 저항한 불멸의 시인? 남민전 사건의 해방 전사? 15년형을 받은 감옥살이 13년? 그의 영화 같은 결혼에 얽힌 이야기?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은 노동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지었다는 그의 아들의 이름 김토일(金土日)?
J전도사의 솔직 담백한 고백에 우선 생각나는 얘기 한토막이 떠올랐다. 언젠가 송경동 시인의 강연에서 들은 얘기다. 그가 상경해 공장생활을 할 때 노동자 문예 창작 교실이 열렸다. 강사가 유명한 시인인데 김남주라 했다. 송시인은 그 김남주라는 시인이 여성시인 김남조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거기가면 그 유명하다는 김남조 시인을 볼 수 있겠구나’하며 따라갔다. 그리고 거기서 김남조가 아닌 김남주를 만나게 됐다고.
구글 검색에 김남주를 치면 우선 무수히 나오는 웹페이지들은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여배우 김남주다. 신동엽을 검색하면 맨 먼저 개그맨이 나오는 것과 같다. 나는 우선 김남조 얘기부터 해주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허걱! 그는 김남조도 몰랐다!
“아니, ‘겨울바다에 갔었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하는 김남조를 모른다구요?”
“몰라요. 형님.”
그랬다. 허허허. 나는 그가 김남주를 모를 뿐 아니라 김남조도 모른다니까 일종의 쎔쎔이다는 다행스런 통쾌함까지 느껴졌다. 시인의 생애에 관한 기본적인 얘기를 들려주고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 떠오르는 대로 읊어주었다. 그 첫 번째 시가 <종과 주인>이었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성서신학에 몰두해온 순수한(?) 그에게 이보다 임팩트 있는 성서 신학적 시가 있을까? 과연 J전도사는 잠시 할 말을 잃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이렇게 한숨을 지었다.
“형님, 지금 뭔가 신구약성서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신학적 영감이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인이 계셨다니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새로 발견하는 사람들에 의해 시인이 새로 발견되는 것도 의미가 깊겠지요.”
2.
내가 알기로 김남주는 압도하는 직관과 통찰의 시인이었다. “몸매가 작아 내 누이 같고/허리가 길어 내 여인 같은 나라여”(<학살1>)할 때 벌써 전 역사가 두 줄에 압축된다. 이 서정미가 격렬한 말들에 앞서 그 자체로 무엇보다 격렬하다. <진혼가>,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다>, <솔직히 말하자>, <사상의 거처>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유약하게 늘어져 유약한 척으로 사는 의식생활을 일깨우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핵직구를 먹였다. 상대를 봐가며 살살 잽으로 간부터 보는 게 아니라 연달아 훅 원투 스트레이트 어퍼컷을 면상에 작렬시킨다.
그러면 또 그의 시를 읽는 방식도 있다. 즉 그 한방에 즉각 나가 떨어져야지 그걸 맞고도 안 맞은 척 맞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고상하게 버텨서는 말이 안 된다. 이런 경우 나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 굳게 믿는다. 차라리 말을 말지 뭐 점잖은 척 사려 깊은 척 뒤로 빼고서 하는 말이나 투는 맘에 맞지 않는다. 콩깍지가 씌워 연애에 빠지듯 나에겐 이런 건 이래야만 할 것 같다. 김남주 같은 시인은 그렇게 대해줘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얘기가 되지 않는다. 가령 톨스토이가 가장 경멸해 마지않던 지적 허위의식으로 톨스토이를 모독하듯이. 시인은 그의 시 앞에 누구나 기냐 아니냐를 선택할 것을 비타협적으로 제시한다. 변명할 필요는 없다. 아니면 벌써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음성과 닮아있다. J전도사가 내가 들려준 몇 편의 시에서 선지자의 서정을 직감했던 것은 순전히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한편 그러한 강렬한 직관과 통찰의 절대언어는 당장 거기 굴복하기에 유약한 사람에겐 불편한 압력일 수도 있다. 체질상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고. 더구나 아예 반대로 부자청년처럼 가진 게 너무 많아 버리기 싫고 버릴 수도 없는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면, 시인의 시적 독재에 더욱 반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미적지근 찬동한 사안을 끝까지 몰아붙이는 것처럼. ‘시적 독재’라고 쓰고 보니 더욱 그럴 듯하다. 선지자들과 예수가 배척받으신 이유도 바로 그 ‘시적 독재’(영감적 독재)에 있었으니까.
여기엔 또 하나의 순진할지 모를 오해가 있다. 너무 그렇게 즉각적 전적으로 일체화될 수 없다고 일단 뒤로 빼기 거부부터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도무지 그럴 필요가 없다. 이럴 때 전적으로 그래야만 된다고 지나치게 압박을 받는 것도 오해다. 인간적이지 않다. 그저 함께 느끼고 인정해주면 된다. 느끼고 인정하는 가운데 그 서정적 변화도 함께 올 것이고, 비유의 원관념도 밝혀져 나갈 테니까. 이데올로기적 철저함과 엄밀함이 사람을 질식시키는 건 이런 오해로부터 기인한 미친 정신 때문이 아니던가.
어찌하랴. 이렇게 과학을 넘어섰기 때문에 더욱 고도로 과학적인 기묘한 부분은 설명이 전혀 안 된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3:14). 안 들리는 사람에게 소리를 설명해봐야 헛일이고 안 보이는 사람에게 색깔을 설명해봐야 헛일이다. 더구나 이 태초 아담의 자기분열로부터 전 인류의 역사를 통해 분열되고 분화돼온 정신의 꽉막힌 일방성일까. 오죽하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까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라고 하셨을까. 그러니 시인이든 예언자든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그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싫어할 소리를 해야만 하는 운명은 일반이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시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3.
교회의 예배당에서 밤에 열린 참으로 소박한 기념회였다. 저자이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 김남주 시인의 부인이신 박광숙 선생님을 직접 뵙고 책에 공동 사인도 받았다. 김남주 시인의 평전 출판 기념이라면 의당 동료문인들이 대거 참가했어야 했을 텐데. 패널로 참가하신 분들이 생전의 시인을 직접 만나본 분들도 아니었다. 시인의 불멸의 명성을 생각할 때 송구스럽고 아쉬운 일이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의 시인을 향한 뜨거운 애정과 독자들의 존경이,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성서신학자인 J전도사가 김남주의 삶과 시편에서 성서적, 신학적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이 기쁘고 흐뭇했다. (이렇게 좀 즉각적으로 통하는 게 있어야지.)
끝나고 뒤풀이를 갔다. 내 차로 조수석에 사모님을 모시고 갔다. 옛날 책에서 읽었던 분을 직접 뵈니 감격이라고 우스갯소리 좀 섞어 말해볼까? 얼마 전 뉴스에 나왔던 아드님의 소식을 물어볼까? 내가 김남주라는 시인에게서 받았던 위로와 용기에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릴까? 그러나 왠지 송구스러워 숙맥처럼 머뭇대다 기회를 놓쳤다. 사람들이 간혹 시인이 오늘날의 한심한 꼴을 보지 않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게 도리어 다행이라 말들을 하기도 한다는데… 이해할만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모님은 다행히 얼굴빛이 따뜻하여 짐작에 삶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뭔가 나도 드리고 싶었던 마음 한 조각 결국 못 전한 게 아쉽다. ‘김남주와 나’라고 하고픈 기억의 한 토막.
4.
모스크바에 유학할 때 일이다. 겨울이었다. 한국 책이 읽고 싶어지면 한국 공보원 도서관에 가 새로 온 읽을 만한 책이 있나 뒤지곤 했다. 그 때 나는 교회에 다시 다니며 오래 방황했던 마음의 상처에 개인적 위로를 삼고 있었다. 그 신앙 덕분에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신경정신과 약도 끊었고 아내도 만났다. 고골 공부를 하려던 애초 계획을 수정해 톨스토이로 주제를 바꾸었다. 무엇보다 건강하고 싶었다. 신앙은 내게 용서와 사랑, 평화와 안전에 대한 개인적 신뢰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날, 눈이 엄청 쌓인 날인데, 책을 빌리러 공보처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우연찮게도 김남주 시인의 특집이 실린 문학잡지를 발견했다. 근간에 나온 거였는지 좀 묵은 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공보처 도서관 구석에서 어느 페이지를 펼쳐 놓고 얼마나 흐느껴 울었던 지. 근무하던 고려인 여자가 와서 왜 그러느냐, 어디 아프냐고 놀라서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 페이지에 실렸던 시는 그의 시비(詩碑)에도 새겨졌다는 <노래>다.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錄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시인의 부인께 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때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를 읽을 때 왜 갑자기 그렇게 설움이 쏟아졌는지. 나는 그가 지금의 세월을 보지 않고 죽어서 다행인지 어쩐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왜 그렇게 살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고 있다. 괜찮다. 꼭 그렇게 살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 시는 내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신동엽, <산에 언덕에>
이런 생각을 하려니 지금도 눈물이 쏟아진다. 그래, 꼭 그렇게 살진 못해도 괜찮다. 돌아와 《김남주 평전》을 읽는 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