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톺아보기

세월호 유가족 못지않게 외로우신 하나님

한종호 2016. 4. 14. 15:49

세월호 유가족 못지않게 외로우신 하나님

 

• 라헬의 울음

 

주님의 은총과 위로가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4월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우리는 봄을 봄답게 맞이할 수 없습니다. 피어나는 꽃들과 함께 누군가의 신음소리 또한 피어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예레미야 선지자는 패망한 조국의 현실을 보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예레미야 31:15).

 

이 땅의 라헬들도 위로받기를 거절하며 지금 울고 있습니다.

 

295명의 희생자들, 그리고 아홉 분의 미수습자들의 가족들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은 비통의 시간을 견디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두 번이나 지나고 있습니다. 꽃이 피어도 눈물겹고, 초목이 무성해져도 눈물겹고, 단풍이 들어도 눈물겹고, 흰 눈이 내려도 눈물겨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회색빛 시간을 지나는 동안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동정 피로를 호소하며 ‘이제 그만 하면 되지 않았냐’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한 번도 누군가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해 자기들의 일상의 자리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강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 권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보수 언론과 정부는 세월호 참사 유족들과 그들과 연대하려는 이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겨 불온시하고 있습니다.

 

가련한 나라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는 실종된 상태였습니다.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국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기울어져 가는 뱃전을 붙들고, 다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결국 누군가가 와서 구해줄 거라는 희망을 끈을 놓지 않았던 이들이 서서히 밀려오는 물을 보며 느꼈을 공포의 시간을 떠올릴라치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채 살아보지도 못한 채 스러져야 했던 이들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배가 절망의 심연으로 가라앉고 가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가 팽목항을 뒤흔들고 있을 때도 정부는 실종 상태였습니다. 그 후에도 이 참사의 책임을 지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진상조차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저들은 태평합니다.

 

 

인문학자들은 공적인 역사에서 배제되고 사라짐으로 그 누구도 ‘대변’해 줄 수 없는 희생자들을 일러 ‘서벌턴’(subaltern)이라 칭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역사의 이면에는 주류 세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착취당하고, 침묵을 강요당해 온 이들의 피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현상을 유지함으로 이익을 보는 이들은 한사코 그 현실을 외면하려 합니다. 억눌린 이들의 혀를 잘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느님

우리 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하느님.”

 

우리는 그러한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피라미드 세계로 상징되는 애굽에서 온 몸으로 체제의 무게를 받아내던 하층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천대받고 착취당하고 폭행당하는 것을 숙명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밤 되어 누추한 자리에 고단한 몸을 뉘였을 때 그들은 끙끙 신음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소리에 예민하게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누군가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신다”고 말입니다.

 

사람은 잊어도 하나님의 기억하십니다. 때가 되면 이 불의한 역사는 시정되고야 말 것입니다. 아무리 서발턴들의 억눌린 신음소리를 막거나 은폐하려 해도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날이 다가옵니다. 불의한 자들이 심판받고, 억눌렸던 자들의 한이 신원되는 날 말입니다. 많은 교회가 세월호 참사를 모른 체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이 아픔의 자리에 성육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몸과 마음은 힘 있는 이들을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저는 지금 세월호 유가족 못지않게 외로운 분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은 많지만 당신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이들은 적기 때문입니다.

 

• 피에타

 

로마의 바티칸 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보신 분들은 누구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앞에 발길을 멈춥니다. ‘피에타’는 슬픔 혹은 비탄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그런데 많은 예술가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를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 '피에타'는 그런 형태의 그림이나 조각을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건장한 아들을 무릎 위에 눕힌 마리아의 벌어진 두 다리가 터무니없이 크고 어깨는 넓습니다. 게다가 마리아의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젊고 고요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의 얼굴이 젊게 표현된 것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그 평온한 얼굴은 ‘피에타’라는 이름이 생소할 정도로 낯설기만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 작품을 제작한 때는 1499년 경이라고 합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온 유럽의 교회가 혼돈에 빠져들던 상황이었습니다. 교황청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미켈란젤로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하는 역할과 비슷합니다.

 

 

 

‘피에타’ 하면 맥락은 다르지만 저는 성경에 나오는 다른 한 어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리스바입니다. 리스바는 사울의 첩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사울과 그 일가족들은 그늘진 곳에 유폐되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숨어 있다고는 해도 그들은 늘 감시의 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스바가 역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삼년 가뭄이 닥쳐왔을 때입니다.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다윗은 그 가뭄의 재앙이 누구 때문에 빚어진 일인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권력 주변에 있는 이들은 사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데 대한 벌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가서 어떻게 해야 그들이 화를 풀고 자기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사울의 일족 일곱 사람을 내주면 그들을 나무에 달아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대로 하도록 허락합니다. 죽임을 당한 일곱 명은 리스바의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의 아들들 다섯 도합 일곱 명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제거하는 노련한 정치술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이 불쾌한 사건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리스바는 차마 그들을 그렇게 떠나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보리 수확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리스바는 상복을 가져다가 바윗돌 위에 펴고 시신을 그곳에 수습하여 두었습니다. 낮에는 새가 내려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주검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리스바는 피눈물을 삼키며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것은 억눌린 함성이었습니다. 그 광경은 그 비열한 사건을 추문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리스바의 존재는 다윗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마침내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 희생자들의 뼈를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도록 명령합니다. 그러자 가뭄이 그쳤습니다.

 

• 오늘 우리의 소명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합리적 이해를 벗어난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당황합니다. 많은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그런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로 현실의 쓰라림을 은폐하곤 합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으로 남겨두어야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그들의 질문에는 그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누군가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이 구절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너희가 물어야 될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신학적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를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왜 그 무고하고 예쁜 아이들이, 그리고 평범한 행복을 꿈꾸던 사람들이 그렇게 속절없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물론 구조책임을 방기한 국가기관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습니다. 그 진상을 속속들이 파헤쳐야 합니다. 누군가는 그 사건을 망각의 강물 속에 띄워 보내고 싶겠지만, 그 일이 우리에게서 스러지지 않도록 치열한 기억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차적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 그들을 돕지 않으셨느냐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비틀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을 산 자의 땅으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을 의미 있는 죽음으로 바꿀 수는 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벌거벗은 욕망이나 이익이 아니라 생명이 최우선의 가치로 존중받는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가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2년 전 속절없이 죽음의 강을 건넜던 이들은 살아있는 사자가 되어 우리 곁에 머물 것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호세아는 “바람을 먹고 살며, 종일 열풍을 따라서 달리고, 거짓말만 하고 폭력만을 일삼는” 에브라임에 닥쳐올 파멸을 예고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파멸을 목전에 둔 것은 아닌지요? 이 자리에 동참한 이들은 피해자 의식을 넘어 역사 변혁의 주체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 <론다니니의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피에타 이야기로 제 설교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죽기 직전까지 매만지고 있던 작품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론다니니의 피에타>(1564년)라고 부릅니다. 그 작품은 지금 밀라노에 있는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피에타상은 바티칸의 피에타와 여러 모로 대조적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우툴두툴한 돌의 질감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태가 좀 특이합니다. 어머니가 뒤에서 자꾸만 중력에 이끌려 무너져 내리는 아들을 부축하고 있는 형태인데, 가만히 보면 마치 죽임 당한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 기묘합니다. 미켈란젤로는 그 작품을 통해 은총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죽임 당한 이가 산 자를 위로하고 붙들어줍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그 신비를 경험할 수 있기를 빕니다. 누가 사람입니까? 신음하는 이웃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서는 이들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안일한 평안을 깨뜨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희생당한 304명은 우리의 인간됨을 묻는 물음표로 우리 앞에 서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희생자들의 가족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그들의 슬픔을 나누어지며 더 나은 세상의 주체로 서기 위해 광야에 나선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편집자 주/이 내용은 김기석 목사님이 4월 13일, 안산 분향소에 열린 세월호 참사 2주기 예배에 한 설교(누가 사람인가? 요한복음 9:1-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