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목사의 - 세속적 성공주의와 역사의 왜곡 -
설교비평 모음(1)
전병욱 목사의 - 세속적 성공주의와 역사의 왜곡 -
편집자 주/설교비평 모음 꼭지는 예전의 글들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마련한 코너이다. 전병욱 목사가 한창 잘 나갈 때 그의 목회적 관심은 오늘날 이 시대에 생존의 여러 가지 복잡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젊은 세대에게 희망과 용기와 비전을 주는 데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전 목사의 설교가 젊은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의 강도와 그 의미는 매우 중요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자칫 나약해지기 쉽고 좌절에 빠지기 쉬운 청년들이 말씀과 예배, 교회 공동체 의식을 통해 저력 있고 쉽게 굴하지 않는 의지를 가진 인간형으로 자라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그의 왜곡된 메시지와 목회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의 저서인 『영적 강자의 조건』이 나약해지기 쉬운 젊은이들에게 승리와 성공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준다면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고 확고한 신념을 갖도록 돕는다.
문제는 그가 이러한 목회적 관심을 풀어나가는 데 사용하는 비유와 성서에 접근하는 신학적 기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복에 대해서는 불완전하거나 왜곡된, 신학적으로 포장했을 뿐인 현세에서의 출세론을 사용함으로써 그 본질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좌절하지 않고 용기와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누구도 이러한 가치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논리에 좌우되는 험악한 생존 경쟁의 직업 전선에서 성서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어떤 가치와 목표를 사명으로 품을 것인가의 도전일 것이다. 이런 당면한 과제 앞에서 전 목사는 도리어 시장의 논리 곧 현실이 요구하는 승패의 논리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형태로 젊은이들에게 현실적인 승리의 위상과 좌표를 그려주고 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주도하는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 승리자라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하시는 선과 의에 대한 본질적 충성보다는 남보다 더 빨리, 더 강하고, 더 높게 자신의 위치를 굳히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들 때문에 더 많은 소외와 빈곤과 착취와 모순과 부당한 압박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실현할 것인가, 정의롭고 선하고 평등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가. 전 목사에게서 이런 문제들에 대한 고뇌와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촉구와 격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는 패배자가 된다고 해도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과 가치를 이루고자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이 결국 하나님 나라 안에서 승리하는 자의 가장 소중한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점이 최대한 강조되고 부각되어야 하는데 전 목사의 메시지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안타까움이 있다.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워라?
『영적 강자의 조건』은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성서윤리적으로 적절한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전 목사는 미국의 거부 워렌 버핏의 일화를 들면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확실하게 이길 수밖에 없는 일에 자신을 건다고 주장한다.
워렌 버핏이 어떤 사장과 함께 골프를 치게 되었다. 그런데 같이 골프를 치던 사장이 그에게 내기 골프를 제안했다. “당신이 홀인원을 하면 내가 1만 달러를 주겠고, 만약 하지 못하면 당신은 내게 2달러만 내라.” 그런데 워렌 버핏은 일언지하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왜 그런가? 단돈 2달러이지만, 희박한 확률에 기대하지 않겠다는 그의 소신 때문이다. 실패하는 사람은 대부분 희박한 확률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항상 자기에게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운다. 이기는 자는 이기는 법을 안다(『영적 강자의 조건』, 4).
여기서 그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인생관과 자세를 거론하는데, 거부의 ‘골프 내기’ 자체가 신앙적으로 제대로 된 비유가 될 수 있는가? 나중에 지적하겠지만,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에서도 인재론과 관련해서 일제의 황군을 모델로 삼고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지위에 오른 사람을 선망의 대상으로 설정해놓고 그들의 인생관과 승리관을 옳은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출발하는 그의 방식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여기서 ‘유리한 확률을 가지고 싸운다’는 명제를 생각해보자. ‘유리한 확률’이란 세속에서 이길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기실 우리의 ‘십자가 신앙’이란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굳은 신뢰를 가지고 자신을 던지는 것, 당장에는 실패처럼 보여도 궁극적인 승리를 향해 가는 믿음이 아닌가.
세상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처절하게 능욕당하는 것을 보았고, 모멸의 극단에 몰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생명은 죽음의 힘 앞에서 더 이상 기운을 쓰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십자가에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의 배신을 보았고, 세상의 악함이 얼마나 강한지를 절감했으며 자신들의 능력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이 보지 못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정지해버린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이 진정한 출발이었다. 십자가 사건은 이 모든 사태에 대하여 순진해 빠져서 무지(無知)했던 하나님의 실패를 증언한 사건이 아니라, 이 모든 사태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낙담하거나 지치지 않으시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언제나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 축복의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좌절과 실패의 증거로 보았지만 우리에게는 부활과 승리의 길이다. ‘신앙의 위기’는 십자가 사건의 반쪽만 볼 때 온다. 그것으로 세상과 인간에 대하여 다 알아버렸다고 단정하고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하여 아직 알지 못한 자의 무지이다. 세상의 속성을 잘 안다고 여기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는 도리어 눈이 멀게 된다. 이러한 십자가 신앙에서 볼 때 유리한 확률을 기반으로 세속의 승리를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과 반하는 일이다.
승리는 무엇이고 패배는 무엇인가
전 목사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하는데 과연 승리는 무엇이고 패배는 무엇인가? 패배라는 것이 도전과 난관에 부딪치면 쉽게 물러나고 무너지는 패배주의를 말한다면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무엇을 향한 승리인지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서는 현세적 출세주의 논리에 빠지기 쉽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승리라는 것은 세상의 승패와는 전혀 다른 기준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믿음에서 비롯된 일이 불신(不信)의 위기에 처하고, 소망을 쌓으려 했던 일이 절망의 깊이를 보는 일로 결말짓게 되면 이내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이 이루어질까? 아, 안 될 거야”하며 인간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 않는데 이것이야말로 패배주의에 빠지는 일이다.
그는 교회 젊은이들에게 “집중하는 인생을 살라”고 하면서 ‘싱글 포커스’(single focus)라는 말을 사용한다. ‘집중하라’는 것은 나머지는 포기하고 자기의 에너지를 어떤 일에 최대한 하나로 모아서 성과를 거두라는 것이다. 우리의 에너지를 이리저리 분산하고 낭비하지 말고, 힘을 압축시키고 집중시켜야 진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학화를 거친다면 다른 차원의 얘기가 필요하다. “무엇을 위한 집중이고 무엇을 위한 포기인가.” 이것이 명확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여러 가지 현세적인 욕심과 목표를 좇는 세상 사람들에 동의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선과 의, 소외된 사람들을 향한 헌신, 세상의 악과 맞서는 용기, 평화 등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꿈과 이상을 추구하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무망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 일에 관심을 갖고 최대한 영적 에너지를 쏟아 부을 때 집중하는 삶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지침 정도를 주는 것이 아니다. 가치관의 생명적 전환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하나의 초점으로 집중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적 관심에 자신을 철저하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다.
결혼, 현세의 유불리를 따져라?
전 목사는 결혼조차도 철저한 현세적 논리로 접근한다. 이 이야기는 『영적 강자의 조건』과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에 반복해서 나오는 대목이다.
요즘에는 자매들도 대개 네댓 명의 형제를 사귀다가 결혼합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이렇게 여러 남자들과 교제하다가 그중 하나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A, B, C, D 네 명의 남자가 있는데 심사숙고 끝에 A를 골랐다고 합시다. 그러나 B도 B 나름으로 장점이 있고 C도 C 나름으로 감칠맛이 있을 것입니다. D도 남 주기는 아깝겠지요. 그러나 결혼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집중입니다. A에 집중한다는 것은 B, C, D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진짜 사랑은 하나에 집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례를 맡다 보니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우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었습니다. 신부가 울면 친정아버지도 따라 웁니다. 하지만 저는 그 신부가 왜 우는지 속사정을 압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결혼식날 신부가 우는 것은 B, C, D가 아까워서 우는 것입니다. ‘그 아까운 놈들…’ 하면서 웁니다. 그런데 친정아버지는 자기 때문에 우는 줄 알고 따라 울고, 주례자인 저는 기가 막혀서 웃습니다(『영적 강자의 조건』, 49-50. 『미래를 결정하라』, 52).
그는 딸을 보내면서 느끼는 아버지의 사랑과 슬픔을 끌어안기는커녕 비아냥조로 딸의 눈물을 해석한다. 안타까운 사연을 깊이 이해하기보다 현세에서 유불리의 조건을 따져 하나를 택한다는 식의 접근은 가당치 않다.
역사에 대한 심각한 왜곡
역사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 이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이해하는 일에 매우 근본 되는 작업이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바르지 못한 권세의 질서를 뒤바꾸고 하나님 나라의 의와 선을 이루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예언자 전통은 모두 이 역사의 불의에 대한 질타와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의한 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전병욱 목사는 말로는 “역사를 믿음으로 뒤집어 바로 세워야 한다”고 하는데, 그의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깊이가 얕고, 편견과 왜곡에 사로잡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믿음의 걸림돌이 ‘피상적인 지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말이야말로 자신에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가 뒤집고자 하는 역사 자체에 대한 이해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면, 그가 바로 세우려는 것이 도리어 거꾸로 세우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는 사뭇 위험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전 목사의 역사관에 드러난 심각한 왜곡과 오도를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선비 중 대표적으로 대원군이나 최익현처럼 옳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다 말아먹었습니다. 옳은 소리는 했지만 나라 지킬 힘은 갖추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에게는 구호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옥쇄’(玉碎)라고 그러죠? 장렬히 죽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했다고 하면서 자폭해버리고 맙니다. 저는 이런 사람을 키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영적 강자의 조건』, 263).
과연 나라를 말아먹은 사람들이 대원군과 최익현 같은 사람들인가? 나라를 팔아먹고 말아먹은 사람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 물론 한계는 있었으나 당시의 역사와 현실 앞에서 그들 나름대로 절박한 경각에 몰린 나라를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서 고민했다는 것을 생각하고 가슴 아파해야 하는데 “힘도 없는 게 떠들기만 했다, 선비에게는 구호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당시에 정작 의도적으로 악의적으로 나라를 팔아먹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은가.
이런 식의 접근은 ‘실력이 없으니까 결국은 일제 식민지가 된 거지 어떻게 해, 별 수 없는 거 아니야’라는 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해방 이후 친일파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그래도 실력 있는 사람들인데 살려내야지 어떻게 해’ 따위의 해괴한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 사람의 실력과 능력을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의 가치관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의와 선을 좇느냐가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미약하게 보여도, 힘이 없고 약한 것 같아도 정작에는 큰 힘을 드러낸다.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잘하고 대단한 역량을 갖추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람을 앞세워 나가는 것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인간적 처세와 인간적 비전을 길러 엘리트주의식 사고를 종용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잘 아는 겨자씨 비유는 세상의 욕망과는 근본적으로, 전격적으로 달리 살아가는 이들을 상징한다. 문제의 근원을 깨달은 이들의, 미미한 듯하나 마침내 거대한 역사를 이루는 그 놀라운 능력과 성취를 증언해준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믿음, 그리고 삶의 자세는 세상이 탐하는 영광이나 대세(大勢)와는 너무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영 현실성 없고 우스우며 미력(微力)하게만 여겨진다. 그러나 겨자씨와 같은 존재라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도모하기 시작하면 그 끝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주체세력은 과연 어떤 이들인가, 그들이 이루는 나라의 성품은 어떠한가를 밝혀주고 있다. 문제의 근원을 깨달은 이들답게, 이들은 높은 곳을 탐욕스럽게 열망하지 않고 자신을 나누기 위한 낮은 곳을 향해 간다. 교만한 권세에 머리 숙이지 않으며, 겸손의 힘을 믿는다. 크지만 허세를 부리는 강자들의 위선을 꿰뚫어 보고, 작지만 열매가 있는 진실함을 귀히 여긴다. 화려함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소박함을 자랑한다.
이들은 부드럽고 따뜻한 온유함이 날카롭고 냉혹한 분노를 마침내 이긴다고 확신한다. 힘 있고 강한 자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힘없고 약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이 축복과 영광임을 받아들인다. 혼자 자신을 내세워 명예를 차지하기보다는, 함께 손잡고 나가기를 기뻐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러한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모든 악한 권세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작다고 하여 덤벼드는 새들의 공격 앞에서 지레 겁먹고 자신의 생명과 그 생명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인재의 문제와 관련한 그의 역사적 시각을 살펴보자. 전 목사는 역사를 통해 인재의 중요성을 되새겨보자면서 패망한 일본이 어떻게 급속한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50-60년대부터 일본은 이미 세계 경영에 참여한 바 있는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아시아를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미얀마,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지로 거침없이 들이닥쳤다. … 일본군은 대위쯤 되는 위관급 장교라든지, 소령쯤 되는 영관급 장교들에게 식민지 행정을 맡겼다. …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던 사람이 스물여덟 살이었고 싱가포르 사령관이 서른 살이었다. 스물여덟, 서른 된 청년이 한 나라를 통치한 것이다. 기간은 1년 혹은 2년, 길면 5년쯤 되었다. 패망한 일본은 잿더미에 올라앉았지만 인재만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스케일이 크고 세계를 보고 나라를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20대 젊은이들이었다. 폭넓은 시각을 가진 그들은 군사적 침략전쟁 대신 무역전쟁, 수출전쟁의 일선에 나섰다. 영토가 아니라 무역을 잠식해 들어가면서 세계 경영권을 휘어잡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인재가 성공의 관건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100-101).
한마디로 기가 막히다. 침략황군이 일본을 재건했다는 얘기이다. 사실, 미군이 일본에 대한 역사 청산을 하면서 과거에 식민지 제국주의 투쟁에 나섰던 세력들을 고스란히 보존했고 전후 일본의 중요한 주도세력을 만들었다. 결국 일본이 과거의 흔적과 유산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했고, 그 까닭에 일본은 아직도 진실한 회개를 하지 못하고 여전히 망언을 하고 있다.
하기야 당시 지만원(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이란 사람이 친일청산 문제를 얘기하면서, “아무런 능력도 없는 병신들이 100년 전 일본에 점령됐을 때 ‘누가 머리 좋아 일본 육사 갔고, 누가 동경제대를 갔는지 조사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른다”고 비난하면서 당시 관료를 지낸 사람들은 당대의 수재들이고 대단한 인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다. 전 목사의 인재론은 지만원이 주장하는 개념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역사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작업은 요원해질 뿐만 아니라, 전 목사가 인재라고 부른 그들이 아시아의 힘없는 무수한 민중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억압한 죄과를 완전히 은폐하고 마는 것이다. 끝으로 설교자로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에 있어서 전병욱 목사의 경우 ‘진정성’의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전 목사는 성서 자체의 메시지를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성서를 자신의 지식을 옹호하고 정당화하려는 자료로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