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13)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욕망과 지배
마지막 계명 역시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닌 마음에 품고 있는 ‘욕망’을 문제 삼습니다. 성서에서 ‘욕망’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구절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인 창세기 3장 16절이란 사실을 아셨습니까?
한글성경이 이 구절은 다양하게 번역해서 원래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영어성경을 참고해야겠지요. 우선 한글성경을 보겠습니다. 개역개정판은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번역했으며 공동번역은 “(너는)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고 번역했습니다. 후반절은 모두 남편의 지배를 받으리라는 뜻이지만 상반절의 경우는 개역개정판은 ‘남편을 원한다’고 번역해서 ‘남편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번역한 나머지 두 번역본과 내용이 다릅니다. 어느 번역본을 택하느냐에 따라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영어성경은 예외 없이 “너의 갈망은 네 남편을 향하겠고(또는 위한 것이고) 그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yet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라고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트슈카’는 ‘너의 갈망’(your longing, desire)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남녀평등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에 서있습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구절로 이해됐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만 보면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구절은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성서를 읽었을 때 잘못된 해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성서가 쓰였을 당시에는 중동지역 어디서도 남녀의 지위가 평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개념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요즘 사정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서 적어도 문명사회에서는 대놓고 남녀불평등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성서시대처럼 사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서를 죽은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읽으려면 오늘의 상황에 맞춰서 새롭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문제는 이 구절에 드러난 ‘욕망과 지배’의 관계입니다. 곧 ‘너는 남편을 욕망하고’라는 말과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두 서술의 관계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첫째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를 병렬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둘이 어떤 식으로든 묶여 있지 않고 전혀 별개란 얘기입니다. 원문에서 둘은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해석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둘째로, 둘 사이의 연결사를 ‘그러나’로 볼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문맥에 따라서 ‘그리고’ 또는 ‘그러나’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너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은 너는 지배할 것이다.”로 읽힙니다. 아내는 남편을 욕망하겠지만 남편이 아내의 욕망을 누르며 지배할 거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셋째로, 흔치는 않지만 히브리어 연결사 ‘베’는 ‘왜냐하면’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너는 남편을 욕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편이 너를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을 만들어낸다는 뜻이 됩니다. 이렇듯 연결사 하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문장의 뜻이 달라집니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는 읽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쪽을 택해야겠지요.
어느 편을 택하든 이 구절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욕망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지배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대체로 네 가지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하는 경우, 둘째는 욕망 때문에 지배받는 경우, 셋째는 때에 따라 지배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경우, 마지막으로 지배하면서 동시에 지배받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네 해석이 모두 가능하지만 저는 영화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를 욕망과 지배의 역설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네 번째 경우로 읽었습니다.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
영화는 펑크 그룹 ‘시티 데스’(City Death)의 공연으로 시작됩니다. 젊은 관객들은 보컬 아르투르의 열창에 열광합니다. 그는 십계명을 어기라고 노래합니다. “살인하라, 살인하라! 간음하라, 간음하라! 남의 물건을 훔쳐라….” 이때 카메라는 손을 흔들며 관객을 뚫고 그에게 다가가려 애쓰는 한 중년 남자를 비춥니다. 그는 아르투르의 형인 저지인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동생에게 전하려고 애써 관객을 뚫고 그에게 다가갔던 겁니다.
아버지가 죽었는데 형제는 별로 슬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아버지와 연락을 끊고 지내왔습니다. 장례식 후 형제는 아버지가 살던 아파트에 갔습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아파트에 뭐가 남아 있는지 보려 했던 겁니다.
아파트 문은 여러 개의 자물통으로 단단히 채워져 있었습니다. 겨우 열고 들어가니 요란하게 알람이 울립니다.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 웬 자물통이 그리 많은지…. 아파트 안은 매우 더러웠고 어항 속 물고기는 굶어 죽어 있었습니다. 창문은 못질을 해서 열지 못하게 해놨고 캐비닛이 몇 개 있는데 그것들 역시 다수의 자물통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형제는 기대를 갖고 캐비닛을 열었습니다. 혹시 보석 같은 것이 있나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보석은 없고 몇 권의 우표 책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실망한 형제가 값나가는 것이 있나 아파트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어떤 사람이 와서 아버지에게 꿔준 돈이 있다며 돈 대신 물건으로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형은 적당히 둘러대서 그를 돌려보내는데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아버지의 우표를 처분할 생각이 없냐고 묻습니다. 그때까지도 형제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우표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고 아버지가 우표 수집하느라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 후 몇몇 수수께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형이 아버지가 소장하던 한 우표세트를 아들에게 줬는데 아들은 그걸 가치 없는 우표 수백 장과 바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우표세트는 매우 값비싼 게 아닙니까. 아들은 모르고 그걸 무가치한 우표들과 바꾼 거죠. 그는 우표상에게 가서 항의했지만 주인은 정당한 거래였다며 물러줄 수 없다고 합니다. 동생도 기이한 일을 겪습니다. 그가 우표수집상 쇼에서 우표수집협회장을 만났는데 그는 아버지가 수집한 우표들을 살펴보고 나서 그것들이 엄청난 가치를 가졌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아버지의 수집한 우표의 가치를 알게 된 형제는 도둑맞지 않으려고 아파트의 보안을 강화했습니다. 알람을 새로 설치하고 사나운 개까지 사들였습니다. 우표를 제값을 받고 팔려면 우선 그걸 잘 지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형은 멋진 계략으로 아들이 싸게 판 우표를 돌려받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오스트리아 로즈 머큐리 우표에 대한 얘기를 듣습니다. 세 장짜리 세트 중 두 장은 아버지가 갖고 있고 한 장은 자기가 갖고 있는데 세 장을 모두 모아서 팔면 가치가 엄청나게 뛴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한 장은 돈 받고 팔지 않겠고 대신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자기 딸에게 신장을 기증하는 사람에게 그걸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검사해보니 형의 신장을 이식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형은 고민 끝에 자기 신장을 수집상의 딸에게 기증했습니다. 그 동안 아파트는 줄곧 동생이 지켰지요. 형이 수술에서 회복한 후 둘이 아파트에 가보니 도둑이 들어 모든 걸 훔쳐간 다음이었습니다. 도둑은 능숙한 솜씨로 보안장치를 무력화한 후 모든 걸 훔쳐갔습니다. 무섭고 사나운 개도 소용없었습니다. 둘은 경찰에 신고했지만 도둑맞은 우표를 되찾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형은 왜 개가 짖지 않았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혹시 개가 아는 사람이 훔쳐간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심지어 형은 동생을 의심하게 됐고 반대로 동생도 형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따로 경찰을 만나 형제가 의심스럽다고 말합니다. 둘 사이에 불신의 벽이 생긴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이 각각 거리를 걷다가 아는 사람들이 걸어가는 걸 보게 됩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줬다던 사람, 우표수집상협회장, 아들에게 우표를 사들인 사람 등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호화롭게 차려입고 형제가 사 놓은 개와 똑같은 개를 데리고 걷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형제는 진상을 파악합니다. 그들 모두가 짜고 우표를 털어갔던 겁니다. 영화는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크게 웃는 것으로 끝납니다.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와에게 내려진 징벌은 산고(産苦)와 남편에 지배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욕망과 지배 사이의 관계를 봅니다.
욕망은 뭔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소유해서 지배하고 싶은 게 욕망입니다. 하지만 욕망이란 게 묘해서 소유하고픈 것을 소유한다고 해서 욕망이 채워지는 게 아닙니다.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나지요. 새로운 욕망은 본래 갖고 싶던 것을 갖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그걸 갖게 된 다음에 새롭게 생겨난 새로운 욕망입니다.
사람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을 채우려 합니다. 절대 채워지지 않기에 욕망에는 종착역이 없는 게 문제입니다. 게다가 욕망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건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욕망이 사람을 소유하고 있고 지배합니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는 이 사실을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 빗대서 “너는 남편을 욕망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형제는 아버지가 수집한 우표의 가치를 알기 전엔 평범한 소시민이었지만 우표의 가치를 알게 된 후엔 달라졌습니다. 우표의 금전적 가치에 주목해서 그걸 가급적이면 더 큰 돈에 팔려고 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들이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집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우표세트의 빠진 한 장마저 구해서 더 비싸게 팔려고 신장 하나를 ‘기증’(?)하는 모습은 사람이 얼마나 쉽게 탐욕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줍니다. 사람은 굳이 비장하지 않고 웃으면서도 탐욕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자기도 웃고 남도 웃기면서도 탐욕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는 비극을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뭔가를 욕망하여 그걸 소유하고 지배하려 애쓰다가 결국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지경에 다다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겁니다. 욕망에 대한 사람의 지배가 사람에 대한 욕망의 지배가 되고 마는 겁니다.
이렇듯 욕망은 사람의 의지와 힘만으로 다스리기가 매우 어려운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우리 사회에는 욕망을 북돋우고 마음껏 발휘하라고 불 지르는 것이 있는데 ‘시장경제의 꽃’이라고 불리는 ‘상품광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람이 뭔가가 필요해서 구입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필요’가 느껴질 때까지 사람을 가만히 놔두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필요를 자극하는 사회, 나아가서 필요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쉴 새 없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품광고는 필요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기계와 같습니다. 상품경제는 물건을 만들어내기 전에 필요부터 먼저 만들어내는 체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고되는 상품을 갖고 있지 않으면 결핍감을 느낍니다.
이런 현실에 중독된 결과 사람은 자기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뭔지 망각하게 됩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과 진정 필요한 걸 구별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상품광고는 끊임없이 나와 이웃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이웃이 갖고 있는 것을 알면 결핍을 느끼도록 강요하는 기계가 시장경제의 상품광고입니다. 그것은 ‘탐욕’을 ‘야망’으로 착각하게 만들고 ‘사치’를 ‘필요’와 혼동하게 만듭니다. 욕망이 없다면 다른 사람보다 앞설 수 없고 더 좋은 삶을 살 수 없다고 주입하는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탐욕 없이도 행복한 사람들
뭔가를 갖고 싶어 하고 남이 갖고 있는 걸 자기도 가지려 하며, 심지어 욕망을 욕망하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가 되겠습니다.
오래 전에 신문에서 흥미로운 칼럼을 읽었습니다(권태선 칼럼, ‘행복지수가 두려워서야’ 한겨레신문 2010년 1월 31일). 경제상황이나 교육, 의료제도 등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주는 여러 요인들을 분석해서 나라의 행복지수를 발표하는 기관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세계가치관조사(World Values Survey)와 영국 레스터 대학이 각각 2008년과 2006년에 조사해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덴마크가 모두 1위였답니다. 한국은 앞의 조사에서는 62위를, 뒤의 조사에서는 102위를 차지했는데 1인당 국민소득이 3-40위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국민의 행복지수는 국민소득에 비해 무척 떨어지는 셈입니다.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가치라고 할 때 많은 부자나라들을 제치고 인구 1천 만 명도 안 되고 천연자원도 별로 없으며 경제의 대외의존도와 직업 불안정성이 높은 수준인 덴마크가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은 의외입니다. 노동유연성(달리 말하면 쉽게 해고할 수 있는 정도)은 높지만 이 나라 노동자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이유는 철저한 직업교육과 사회안전망 덕에 쉽게 새 직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병에 걸려도 거의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의료제도가 완벽하고 은퇴 후 생활도 안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금 부담이 매우 높지만 세금으로 낸 돈이 복지로 환원되는 비율이 워낙 높아서 국민들은 불만이 없다는 겁니다.
덴마크의 교육현황을 보면 이상세계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유아원 아이들은 모두 집에서 간식을 갖고 가는데 먹을 때는 음식을 모두 모아놓고 나눠 먹는답니다.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하는데 이 기간에는 시험이 없고 수업은 토론식이라네요. 프랑스 영화 <클래스 The Class>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화에서 교사는 끈질기게 학생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답을 찾아갑니다. 제 눈에는 학생들의 태도가 너무 방자해서 화날 정도지만 교사는 화를 내지 않고 토론을 이끕니다. 이 모습에 저는 깊이 감동했습니다. 이런 교육이 경쟁 아닌 연대를 만들어내고 갈등과 투쟁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만들어냈겠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덴마크가 이와 같은 복지제도의 근간을 구축한 때는 대공황이 닥친 1930년대였다는 사실입니다. 파이가 커야 나눌 것도 커진다는 말은 적어도 덴마크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 Foundation)이 2006년에 실시한 행복지수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나라는 ‘바누아투’라는 이름도 못 들어본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호주 시드니에서 동북쪽으로 2,500km쯤 떨어진 남태평양 해역에 산재한 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고 약 2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미니 군도국가랍니다.
이 나라의 통계를 보면 한숨부터 나옵니다. 국민의 취업률은 7% 정도인데 취업자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최고 빈곤국 중 하나인 바누아투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900달러로 전 세계 233개국 중 207위랍니다. 아무리 행복이 물질적인 부에 의해 결정되진 않는다지만 어떻게 이렇게 가난한 나라가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나라 한 관리는 바누아투 국민이 누리는 행복의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물질이 풍부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직접 와서 느끼면 삶을 조금 알게 될 거라고 대답했답니다.
바누아투에는 약 사십 명 정도의 한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어떤 분이 한 신문과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바누아투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소박하고 서로 나누고 존중하는 생활방식 때문이랍니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국에서 중대한 사회문제인 자살이 이 나라에선 지난 5, 6년 동안 단 한 건도 없었다가 얼마 전에 한 건 있었답니다. 자살자가 없는 이유는 공동체가 개인 삶에 든든한 의지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각 섬의 족장과 연장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공동체가 개인의 삶을 지지하고 있다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중미의 코스타리카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이 나라는 영국 신경제재단의 최근 조사에서 행복지수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 조사는 국민이 자신의 생활만족도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수명, 의식주를 위해 자원을 생산하고 폐기하는 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등의 변수로 측정됐습니다. 이 나라가 1위를 차지하는 데는 환경과의 친화성이 큰 요인이 됐답니다.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나라라는 명성을 갖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예일대학과 컬럼비아대학 전문가들이 발표한 ‘2010년 환경성과 지수’에서 163개국 중 3위를 차지했습니다. 영국 BBC 방송은 코스타리카가 친환경적 태도와 행복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이며 덜 물질적인 생활을 함으로써 일상이 단순해지고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게 되고 그리하여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 나라라고 설명합니다.
환경문제와 관련해서 이 나라가 취한 조치는 가히 획기적이라 하겠습니다. 이 나라는 그 어떤 선진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코스타리카는 개발도상국으로는 처음으로 2021년에 탄소중립국을 이루겠다고 선언했고 대규모 식목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삼림이 국토의 20%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절반 이상으로 높아졌습니다. 1997년에는 이산화탄소세를 앞장서서 도입하여 이를 재원으로 산림보존 지원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에너지 공급원의 90% 이상이 재생가능 자원이란 사실에 이르러서는 탄성이 나옵니다.
마지막 웃음, 그것은 희망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는 <십계명> 영화 열 편 가운데서 유일한 블랙코미디입니다. 다른 영화들은 모두 심각한데 마지막 에피소드인 이 영화만은 웃게 만듭니다. 저는 영화 제목이 왜 ‘어느 희망에 관한 이야기’일까를 생각해봤습니다.
고대 희랍철학은 사람의 몸과 영혼을 철저하게 구별했습니다. 그 중 어떤 분파(分派)는 몸을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봤습니다. 영혼은 몸에 갇혀 있는 동안 자유롭지 못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지(靈知 Gnosis)를 얻으면 몸이 죽는 순간 영혼은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신약성서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영지주의와 대립하고 싸웠지만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싸우면서 영향 받았던 거죠.
영지주의 가르침 중에는 관심이 가는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그들이 구약성서를 이해하는 방식 중에는 잘못된 것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상황 속에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 중 하나는 구약성서가 전적으로 물질적 사고에 머물러 있다고 본 겁니다. 구약성서는 영혼과 육체를 철저하게 구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물질적인 차원에만 매몰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희랍철학처럼 둘을 철저하게 구별하진 않지만 물질의 차원을 벗어난 뭔가가 있다는 생각은 구약성서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탐심을 규제하는 십계명 중 마지막 두 계명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명이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 규제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사람의 내면을 규제하려 했다는 사실은 구약성서가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전부는 아니라고 이해했음을 보여줍니다. 구약성서는 겉으로 드러난 육체와 행위와 연관되어 있는 내면의 무엇이 존재함을 전제합니다. 그걸 ‘영혼’으로 부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께서 십계명을 극단으로 몰고 가거나 내면화하신 일도 전례가 전혀 없진 않습니다. 계명은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내면 또는 영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웃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형제는 자기들이 서로 의심했음을 무언으로 고백하고 용서를 빕니다. 탐욕에 대한 탐욕을 이기지 못해서 모든 걸 잃어버렸음을, 그래서 엉뚱한 사람들의 욕망을 채운 걸 알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습니다.
이 웃음은 뭘 의미할까요? 어떤 약점을 갖고 있든지,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어떤 실패를 했든지, 얼마나 많은 계명을 어겼든지 사람에게는 새로 시작할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저는 이들의 웃음에서 그런 메시지를 읽었습니다. 탐욕으로 누군가를 지배하려 했다가 오히려 탐욕의 지배를 받게 됨을 경험한 후 애초부터 자기 게 아닌 것에 대한 미련과 탐욕을 버리고 새로 삶을 시작하면서 웃는 웃음 말입니다.
모두의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은 거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탐욕을 채워서 행복해지려 한다면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탐욕은 채우면 채울수록 새로운 탐욕이 새롭게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탐욕이란 채우고 또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지수에 대한 조사는 행복해지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덴마크 식으로 철저한 사회보장제도가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누아투 식으로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지 않고 단순소박하고 서로 나누고 존중하는 생활방식이 행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코스타리카 식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데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언뜻 보면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세 나라가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란 사실이 놀랍지만 공통점이 보입니다. 세 나라가 방법은 다르지만 탐욕에 지배되지 않고 그걸 제도와 문화로 제어한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덴마크는 세금을 통한 재분배제도로, 바누아투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 윤리로, 코스타리카는 자연의 리듬에 순응하는 자세로 말입니다.
이런 걸 보면서 행복은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행복은 혼자 누리려 해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신기루일 뿐이란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이런 점에서 여전히 지켜져야 하는 소중한 계명입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