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민족의 위기 앞에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다(1)
구약성경 속 여성돋보기(19)
에스더, 민족의 위기 앞에 침묵하지 않고 행동했다(1)
고대 이스라엘 포로기 역사 속에 ‘하닷사’라는 이름을 가진 영웅적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별’이라는 뜻의 페르시아 식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그녀의 히브리 식 이름 ‘하닷사’는 팔레스타인이나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꽃을 피우는 화석류 나무를 뜻한다. 향을 품은 이 나무는 잎을 찧을 때 향기를 뿜어내는 허브 종류의 관목이다. 이 나무는 백향목, 소나무와 함께 종말론적 희망과 회복을 상징하는 식물로 언급되기도 한다(이사야 41:19; 55:13).
에스더는 페르시아 제국 아하수에로 왕(주전486-464)의 왕후 와스디가 왕의 잔치 참여를 거부한 불복종 때문에 폐위당한 후 왕의 분노가 누그러지는 시점에 등장한다(에스더 2:1). 자기애로 가득 찬 경박한 왕의 권력에 불복한 와스디가 폐위되고, 이후 왕의 젊은 측근 관료들은 왕을 기쁘게 해줄 새 왕후를 찾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했다. 곧바로 관료들은 아리따운 젊은 처녀를 찾기 위해 미인대회를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절대 권력자 아하수에로 왕의 지혜로운 통치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에스더 이야기 역시 앞선 와스디 왕후의 일화만큼이나 정치적 풍자가 농후하다.
에스더의 등장에 앞서 바벨론 느브가넷살 왕이 유다 왕 여고니야를 포로로 잡아갈 때 예루살렘을 떠나야했던 베냐민 자손의 유대인이 등장한다. 모르드개다. 그는 사울 왕의 아버지였던 기스의 증손이고(사무엘상 9:1), 사울 왕을 열렬히 후원했던(사무엘하 16:5) 시므이의 손자이며, 여일의 아들이었다(5절). 이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모르드개의 사촌 여동생이 에스더이다. 에스더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모르드개는 에스더를 딸처럼 양육했다. 에스더는 용모가 곱고 아름다운 젊은 처녀였다(7절). 에스더의 아름다운 외모 묘사는 제국의 왕실이 주관하는 미인 대회의 자격조건을 충족시킨다는 사실을 슬쩍 제시한 셈이다.
드디어 왕의 측근들이 기획했던 미인대회 조서가 반포되었고, 에스더 역시 지원자로 나섰으며, 선택된 여러 젊은 처녀들과 함께 12개월 동안 궁녀를 관리하는 헤개의 수하에 있게 된다. 헤개는 7명의 시녀를 에스더에게 붙여주고, 가장 좋은 숙소를 제공하는 등 무슨 이유로 에스더를 남다르게 대우했는지 알 수 없으나 히브리 소녀에게 은혜를 베풀었다(9절).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행하시는 신실한 사랑과 친절을 이방인 관리가 실행한 셈이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지시대로 자신의 국적에 따른 출신성분을 밝히지 않았고(10절), 다른 소녀들과 함께 왕 앞에 가기 위한 절차들을 따랐다(12-14절). 그러니까 페르시아 제국의 궁에서 자신의 민족적, 신앙적인 뿌리와 정체성을 숨긴 셈이다. 이후 에스더가 왕 앞에 가게 된 것은 아하수에로 왕의 통치 7년째였다(16절). 왕후 와스디가 폐위 된지 4년 후쯤이다. 왕은 에스더를 보고 완전히 압도당했다. 왕은 그 어떤 젊은 여자들보다 에스더를 사랑했고, 에스더는 왕의 총애와 은총을 받고 와스디를 대신해 왕후가 된다(17절).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권력 엘리트 집단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에스더의 아름다움이 엄청난 신분의 변화를 가져왔다.
왕은 에스더를 위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왕은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해줄 뿐만 아니라, 이 날을 공휴일로 선포하기까지 했다(18절). 제국의 왕과 포로민 유대 소녀와의 결혼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다. 이것은 요셉이 바로의 궁으로, 다니엘이 느브가넷살의 궁으로 들어간 일들처럼, 에스더 역시 억압 받는 신분으로서 왕과 긴밀한 관계로 묶여진 사건이다. 이렇게 포로민이며 고아였던 유대인 젊은 여성과 이방 왕의 결혼은 역사의 새로운 국면을 이어간다. 유대인 젊은 여성을 왕후로 맞이한 왕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쳤다. 때마침 모르드개가 왕을 암살하려는 가신들의 음모를 듣게 되고(21절), 모르드개는 이 일을 에스더에게 알렸다. 에스더는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조사를 착수하게 했고, 암살 음모는 좌절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삶의 드라마를 만들어 가는 중대한 동인이 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왕은 대신들 중 아각 사람 하만이라는 자를 가장 높은 장관으로 임명한다(3:1). 이때 궁궐 문의 모든 신하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하만에게 엎드려 절했지만 모르드개만은 예외였다(2절). 모르드개는 무릎을 꿇으면서까지 지나친 충성을 요구하는 명령을 부당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명령에 불복종했다. 단지 이것 때문이었을까? 하만의 조상 아각은 아멜렉의 왕이었고, 아각이 모르드개의 조상 사울의 대적이었던 것도(사무엘상 15장) 한몫했으리라. 하만은 모르드개를 향한 치밀어 오르는 개인적인 분노를 민족적인 혐오로 확대시켜 잔인한 방식으로 발산한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를 받는 모든 나라에 흩어진 유대 민족을 파멸시킬 대량학살을 획책한다. 이때가 아하수에로 왕 통치 12년째 되는 해였다. 페르시아의 궁정은 연례적으로 상서로운 달을 결정하는 제비뽑기 행사를 열었는데, 하만도 참여했다.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왕에게 접근해 왕의 법을 지키지 않는 민족이 있다는 거짓되고 악의적인 보고를 한다(5-8절).
거기다 하만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금고에 제공하겠다는 제안까지 하니(8-9절). 왕은 인장 반지를 하만에게 내주면서 행정적인 최고권위를 부여한다. 권력을 거머쥔 하만은 왕의 칙령을 선포하는데, 이것은 서기관에 의해 작성되고, 각 민족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국에 반포되었다. 그 칙령 내용은 12월 13일 하루 동안 유대인이라면 젊은이, 늙은이, 여인,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하라는 것이었다(10-13절). 유대인을 증오하는 잔혹한 권력자의 손에 유대인의 운명이 기로에 놓였다. 무자비한 권력 때문에 대량학살 위기에 처해진 유대 민족은 슬픔과 공포의 시간을 맞이해야 했다.
이때 모르드개는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공개적인 장소인 성문 앞 광장 에서 대성통곡했다(4:1). 각 지방의 유대인들은 납득되지 않는 상황 때문에 조복을 걸치고 울부짖으며 금식했다(3절). 이때 왕후 에스더는 시녀와 내시들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듣는다. 또한 왕에게 자비를 구하여 민족을 살릴 수 있도록 탄원해 주기를 요청하는 모르드개의 말을 전해 듣는다(4-9절). 상황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에스더는 30일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않은 상황이었고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는 왕 앞에 나갈 수 없었다(10-12절).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14절)라는 말을 전했다.
이때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전한 회신 내용은 민족의 위태로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운명을 걸고 용기와 믿음으로 맞서는 말과 행동계획이었다. 에스더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3일 동안 금식을 요청하고, 자신도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규례를 어길지언정 왕에게 나갈 결심을 전했다(13-16절). 이제 주도권은 모르드개가 아닌 에스더에게로 넘겨졌다. 수산 궁 안에 있는 에스더는 궁 밖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와 함께 금식하면서 잔혹하고 부당한 일 앞에 침묵하지 않고 용감하게 나설 것을 밝힌 것이다. 이제 유대 민족의 유일한 희망은 이 젊은 여인에게 달렸다.
금식 3일째 되는 날, 에스더는 왕의 명령 없이 왕 앞에 나섰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왕후의 예복을 갖추고 왕궁 뜰로 갔다. 왕은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보고 기뻐했고. 오랜만에 왕후를 만난 왕은 나라의 절반이라도 떼어주겠다(5:1-3)라며 과장된 말로 자신의 권력 자랑도 모자라 사랑마저 과시한다. 에스더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잔치에 왕을 초대하고 싶다면서 자기 민족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 하만의 동행을 요청한다. 왕은 그녀의 요청대로 하만이 잔치에 참여하게 했다(4-5절). 왕은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왕이 와스디 왕후를 왕의 잔치에 초대했던 것과 대조적인 상황이다.
잔치는 시작되었다. 술 마시며 잔치가 무르익어갈 즈음, 왕은 에스더의 소원을 묻고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에스더는 왕에게 내일 다시 여는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여하면, 소원을 말하겠다는 것이다(6-8절). 에스더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려는 것이었을까. 에스더의 숨은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한 하만은 무엇인가 대단히 착각하고 마음이 흐뭇해져 궁을 나선다. 하만은 가족들에게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왕과 함께 초대받은 것을 자랑하며 떠들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모르드개의 행동은 여전히 눈에 거슬렸다. 때마침 이것을 지켜보던 하만의 아내와 친구들이 조언한다. 그들의 조언은 23미터 높이의 장대에 모르드개를 매달도록 왕에게 청하고 잔치를 즐기라는 것. 하여 하만은 곧바로 교수대가 될 장대를 세웠다(9-14절).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끼어들었다.
에스더의 이야기에는 인간의 행위만 있을 뿐,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는다. 여호와 신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율법, 언약, 성전도 없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다. 그러니 앞으로 페르시아 제국 수산 궁의 에스더, 모르드개, 그리고 유대민족의 운명을 누가 알겠는가?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순영/백석대 신학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