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17. 2. 7. 09:37

김기석의 톺아보기(28)


우정을 이용하지 말라


인맥 만들기 문화


“직장이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면서?”


“예, 차 타고 한 30분쯤 가야 하지만 오히려 좋아요. 차를 타고 다니면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도 있고, 주변에 맛있는 음식 먹을 곳도 있고, 직장 옥상에 소박하지만 정원도 있고 해서, 짬짬이 쉴 수도 있고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져요.”


“생명이 갖는 친화력 때문일 거야. 목적 지향적인 일직선의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일수록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할거야.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시간은 사실은 순환하는 시간이거든. 노아의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셨어. 사람은 이 순환 속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하지.”


“그 순환하는 시간의 리듬을 타고 사는 사람이 ‘철든 사람’이라면서요?”


“그런데 나는 오염된 ‘철든 사람’이 된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 사무실에 하루만 앉아 있으면 알 수 있어. 옆에 있는 공장에서 들려오는 소음,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냄새,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철가루…. 그런 게 호흡을 통해 내 몸 속에 축적된다고 생각하면 영 기분이 찜찜해.”


“그러니까 중금속에 오염된, 그리고 쇠가루가 몸에 쌓인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정말 우울하네요. 해결 방법이 없나요? 주택가에 그런 공장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벌써 공장이 세워진지 여러 해가 되어서 나가라고 하기도 어렵고. 좀 고약한 이웃을 만난 셈이지.”


“그래도 공해배출 업소인데….”


“구청 환경과에서 나와서 시정 명령을 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때 뿐이야.”


“불편함을 참는 것만이 덕스러운 행동은 아니잖아요? 서운할 땐 서운하더라도 행정적인 조치를 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궁극적으로는 상생의 길일 텐데요.”


“어떤 때는 힘있는 사람이 ‘전화 한 통’을 넣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하지만 금방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지. 더디더라도 공적인 시스템과 절차를 통해서 변화를 이루어야지, 바쁘다고 해서 미시적 동원 맥락(micro-mobilization context)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손쉽게 손에 넣다보면 그게 습관이 되어서 헤어 나오기 어렵게 될 거야.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인맥 만들기에 시간과 정신을 쏟다보면 출세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정신은 황폐해지는 것 아닐까?”


“살다보면 그런 유혹을 떨쳐버리기 어려울 때가 많아요. 교수 임용 청탁 사건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똑같은 맥락이잖아요.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인사의 관행이 아닌가 싶어요. 학교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실력을 갖춘 사람보다는 윗사람들과의 교제가 좋은 사람들이 공부도 빨리 마치고, 일자리를 빨리 찾게 되는 게 현실이잖아요. 그 때문에 공정한 경쟁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마음에는 원망과 의심이 자라게 되고, 냉소와 환멸에 사로잡히게 되는 거죠. 또 그 폐해는 고스란히 아랫사람들에게 전가되고요. 실력 없는 교수들에게 배우는 학생들, 무능력한 상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다 피해자들이에요.”


“참 씁쓸한 현실이야. 물론 인간관계가 중요한 요소라는 건 두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야. 공동생활에 있어서는 다른 이들과 협동할 수 있는 능력은 매우 필요하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필요충분조건으로 작용한다면 그건 곤란하지. 실력보다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찾는 조직이라고 한다면, 그 조직은 사람들의 창의성이나 개성을 죽이는 닫힌 조직이라고 보아야 할거야. 우리 사회에서는 누가 좀 튄다 싶으면 그는 가혹한 눈길을 받거나 제재를 받게 되잖아.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의 개성은 귀퉁이가 다 닳아빠진 상처럼 남루해져서 파릇파릇한 본래의 매력은 간데 없고, 조직에 순응할 줄 아는 평범한 사람만 남는 거지.”


“조금 튀는 사람에게는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는 거지요.”




무지개빛 까마귀


“그런 셈이지. 나는 신앙적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상급자의 부탁을 거절한 적이 몇 번 있는데, 얼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마치 '무지개빛 까마귀'가 된 느낌이었다니까.”


“그게 뭐지요?”


“아, 저지 코진스키의 소설 제목인데, 숲에 사는 한 남자가 심심했던지 까마귀 한 마리를 잡아서 알록달록한 색을 칠하지. 그리고는 새의 날갯죽지를 비틀어. 새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면 동료 새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날아오는 거야. 그때 사내는 무지개빛 까마귀를 공중으로 날려보내지. 억센 손아귀에서 풀려난 새는 죽어라 하고 동료들을 향해 날아오르는데, 까마귀들은 그 낯선 빛깔의 새를 용납할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쪼아대지. 이것은 그 소설에 나오는 일화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는 그 까마귀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이 다르고 모습이 다른 이에게 가하는 동료 인간들의 불합리한 폭력과 모욕을 드러내고 싶었던 걸 거야.”


“합리(合理)가 아니라 정리(情理)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합리를 말하고, 연줄이 작동하는 집단에 속해 있으면서 그 기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다 ‘무지개빛 까마귀’ 신세인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몇 번 쪼여본 적이 있어서 그 아픔을 조금은 알아요.”


“시인 김승희의 <제도>라는 시 들어본 적 있지?”


“글쎄요, 어떤 시지요?”


“‘아이는 하루종일 색칠공부 책을 칠한다./나비도 있고 꽃도 있고 구름도 있고 강물도 있다./아이는 금 밖으로 자신의 색칠이 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시인데, 시의 화자인 엄마는 ‘누가 그 두려움을 가르쳤을까?/금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자문해보면서 ‘나비도 꽃도 구름도 강물도/모두 색칠하는 선에 갇혀 있다’는 사실에 울적해지지. 아이는 연신 엄마에게 ‘크레파스가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되지?’ 묻고. 그런데 이 시의 묘미는 이 대목에 있어.


내가 엄마만 아니라면

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

금을 뭉개버려라. 랄라. 선 밖으로 북북 칠해라.

나비도 강물도 구름도 꽃도 모두 폭발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이다. 랄라.

선 밖으로 꿈틀꿈틀 뭉게뭉게 꽃피어나는 것이다

위반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이다. 랄라


엄마는 어쩌면 이미 한계에 갇힌 제도인지도 몰라. ‘엄마만 아니라면/나, 이렇게, 말해 버리겠어’라는 건, 실제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거거든.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아이를 어떤 틀 속에 가두는 ‘제도’라고 ‘총독부’라고 자탄하지.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마디는 비명이나 마찬가지야. ‘엄마를 죽여라! 랄라.’”


“가슴이 찡해 오네요. 사실 저도 세상에 잘 순응하지 못하는 ‘삐딱이’여서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사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그럴 거야. 조직생활을 하기에는 다소 감성적이고, 우리 시대의 속도를 따라 살기에는 생각이 많고. 인맥을 형성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질 않고.”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도 나름대로 잘 적응해가며 살고 있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 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한때 ‘끈끈한 정’이라는 말이 유행했잖아. 좋은 말 같지만 좀 문제가 있는 말이야. 합리에 바탕을 둔 끈끈한 정이라면 좋겠지 하지만 그게 합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작동될 때가 많다는 게 문제지.”


“함석헌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네요. ‘피는 물보다 걸다지만 건[濃] 것이 좋은 것 아닙니다. 맑아야지. 제발 핏줄 소리 하지 마셔요.’ 촌철살인이라고 하나요? 이 말씀은 짧지만 정말 정곡을 찌르는 말씀 같아요.”


“정말 그러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연줄에 집착하는 걸까요?”


“글쎄, 나라가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니까 자기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한 결과가 아닐까?. 그러니까 혈연·지연·학연 등을 통해 유사-가족적인 유대감을 형성하고 그 속에 머물 때라야 비로소 안심하는 거지.”


“그렇다면 인맥 만들기의 뿌리는 공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라고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그 말을 뒤집으면 국가가 공적인 기능을 올바로 수행한다면 사적 관계에 바탕을 둔 정리의 문화는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다는 말이 되나?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국가 인권 위원회의 활동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 그 동안 피해자들의 가슴에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한 맺힌 이야기들이 역사의 조명을 받으면서 실체가 밝혀지고 있으니 말이야."


특권을 내려 놓으라


“한 사회를 제도적으로 개혁해나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것 아닐까요?”


“그렇지, 언제나 문제든 인간 문제로 귀결되는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게 문제지. 이런 문제를 다루는 어떤 토론회를 보아도 열띤 토론 끝에 내놓는 전문가들의 결론이라는 게 기껏해야 ‘의식개혁’을 해야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뿐이잖아.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으면 답답한 거야. 어느 사회학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요소로 정부와 기업과 NGO를 들더군. 한 문화의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종교 혹은 교회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 유감이기는 하지만 그게 현실이니까…….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결국 종교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말씀도 원론적으론 맞지요. 하지만 어떻게요? 지금의 교회는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요. 온통 정신이 교세 확장에 맞춰져 있는 지금의 교회는 의식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그 대상이 아닐까요?”


“참 뼈아픈 이야기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닐 거야.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제일 먼저 요구한 게 뭐였어? ‘자기 부정’이잖아. 먼저 깨어난 사람이 자기가 누리던 특권을 내려놓는 일부터 시작해야겠지. 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나도 목사로서 누리고 있는 특권이 꽤 많을 거야. 지금부터라도 그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연습을 시작해야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인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해. 그 말씀을 볼 때마다 나도 손 노동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특권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고난 당하는 특권’ 말이에요.”


“그렇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야 우리 삶이 맑아질 거야.”


“조금 불편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요.”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이 있나?”


"그렇지요? 고난 당하는 특권을 포기하는 것은 일도 아닌데,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잘만 하는데, 달콤한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내공이 좀 쌓여야 가능할 것 같아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면서요?”


“맞아. 그러니까 특권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하겠다는 결의이지. 입원실이 없다고 하여 누군가 힘있는 사람에게 부탁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고, 자기 신분이나 잘 아는 이와의 우정을 이용해 어떤 일을 신속하게 처리하고 싶은 욕구와도 싸워야 해.”


“뙤약볕 아래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제치고 옆문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뻔뻔함도 버려야지요.”


“그렇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 전화 한 통 넣어줄 가까운 사람 하나 없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우리 행동을 돌아보아야 할 거야.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상을 실체 그대로 볼 수 있는 자리가 바로 가난한 이들의 현실이라는 것이지. 미국의 눈이 아니라 지금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시리아, 이라크 사람들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겠어?”


“각자 자기들이 선 자리에서만 현실을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군요.”


섬김이라는 묘약


“문제는 자기가 누리는 것이 특권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할 수도 있다는 거야. 경북대학교 법학과의 김두식 교수가 쓴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에 보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법조계에 나온 사람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살겠다던 애초의 꿈을 그렇게도 쉽게 포기하는 까닭을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아주 공감이 가더라구. <그들이 사법시험이라는 장벽을 넘어 들어간 곳에서는 ‘새로운 세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새로운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특권을 향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특권과 특권의식은 가랑비처럼 소리 없이 그들의 삶 속에 젖어들었습니다.> 이게 무서운 거지. 가랑비처럼 젖어드는 거 말이야.”


“어쩌면 마하트마 간디가 아무리 일정이 바쁘더라도 경전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물레 잣는 일을 쉬지 않았던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한 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서였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분주한 시간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예수님의 경우와 같은 거겠지요?”


“그렇지. 결국 구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 나는 특권의식에 길들여진 사고를 치유하기 위한 묘약은 어쩌면 ‘섬김’이 아닐까 싶어. 예수님이 좌우명이 섬김이었잖아.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겸손해지려면 많은 모욕을 받아야 한다는 데,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소라도 특권을 내려놓은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몸으로 섬기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사실 몸이 앞서지 않으면 마음의 변화는 어렵지요. 그런데 저는 스스로를 치열하게 돌아보고 자기를 닦아나가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행화 된 특권에 대해서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일도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것은 귀찮은 일이고, 때로는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지만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