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17. 2. 16. 21:01

김기석의 톺아보기(29)


슬픈 몸, 고마운 몸


● 몸의 말을 들으라


“오랜만이야. 얼굴 잊어버리겠네 이 사람아.”


“죄송해요. 잠 못 이루는 토요일 밤 때문에….”


“뭐야? 그러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려면 토요일을 잘 보내야 한다니까.”


“건강은 좀 어떠세요? 얼굴빛은 좋아지신 것 같은 데요.”


“그래? 좋아져야지. 안 그래도 여러 사람한테 미안한데.”


“일 좀 줄이세요. 그 동안 몸을 너무 학대하셨어요.”


“그랬나? 어쩌면 성실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일을 적당히, 얼렁뚱땅 하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내 이미지에 자승자박 당한 꼴이었던 것 같아. 성실한 건 좋은데 그게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바뀐 게 문제지. 나는 스스로 그런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전에 마음 따라 살지 말고, 몸 따라 살라고 하신 적이 있지요? 자칫 오해하기 쉬운 말이긴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럴 듯한 말이에요.”


“요즘은 몸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사는 게 타락한 실존이라는 생각이 들어.”


“몸의 말을 듣는다는 게 어떤 거죠?”


“글쎄,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몸은 항상 소리 없이 말한대. 웬만하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우리 삶이 균형을 잃을 때면 몸이 우리에게 기별을 해주는 거지. 몸이 편치 않고, 피로하고, 통증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돌아보라는 몸의 경고라는 거야.”


“하지만 그런 경고를 경고로 알아듣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몸의 투정을 다 들어주다가는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무시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가 병을 키우는 거고.”


“그렇죠. 병은 처음부터 드러나는 게 아니라면서요. 병의 씨앗을 뿌리는 단계, 그 씨앗에 물을 주는 단계, 그러다가 그것이 고착되는 단계, 그것이 병적인 징후로 나타나는 단계, 그 다음에 나타나는 열매가 병이래요.”


“와, 굉장히 유식하네.”


“그게 아니고요,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래요. 모든 병이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병이 마음이나 생활의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지요? 문제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 데' 하면서도 실제로 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별 일 없을 거야'라는 자기 암시에 매달린다는 거지요.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 같아요.”


“베드로가 들은 닭울음소리 비슷한 거겠지. 그래, 분명히 앎과 깨달음에는 차이가 있어. 앎이 곧 행동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깨달음이 필요하지. ‘깨닫다’는 말은 ‘깨다’와 ‘닫다’로 이루어진 거래. 믿거나 말거나. 바깥을 향하던 지각의 창을 닫고, 잘못된 자아가 어떤 형태로든 깨뜨려질 때야말로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야. 깨달은 사람은 이전처럼 살 수 없겠지?”


“그렇게 잘 아시면서 몸을 왜 그렇게 방치하셨어요.”


“깨닫지 못해서지 뭐. 어느 의사 선생님이 나보고 이제부터는 ‘나는 바보다’ 하고 살래. 마음을 좀 푼푼하게 쓰며 살라는 말이겠지. 한동안 그분 말씀이 내 귓가를 떠나지 않더라.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습에 대한 중간 심판처럼 들려서 말이야.”


                    일러스트/고은비


● 몸, 의미 전달의 매개체


“성경에도 몸에 대한 가르침이 있나요?”


“물론 있지. 사람들은 기독교가 영혼에 집중하느라 몸을 소홀히 여기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히브리인들의 삶은 금욕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이지. 구약성서를 읽다보면 경전에 담기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이는 용어들이나 구절들이 많아.”


“적절치 않다는 것은 전문용어(?)인데요.”


“그렇지?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가리켜 ‘간음’이라고 표현하지.”


“그 만큼 신앙적 순결을 강조한 건가요?”


“그럴 거야. 아직 나라가 꼴을 갖추기 전이었으니, 신앙의 문제는 민족적 정체성의 문제와 곧장 연결되었을 테니까.”


“그렇군요.”


“또 구약의 언어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아. 우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삶의 언어가 고스란히 담겨있지. 때로는 이건 좀 너무 외설적이다 싶은 대목도 많아. 어느 교수님 말씀이 <아가서>를 히브리어 표현대로 번역해 놓으면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거래.”


“그러시니까, 궁금해지네요.”


“사람하곤. 그렇게 궁금하거든 아쉬운 대로 에스겔서 16장이나 23장을 봐. 히브리인 예언자들은 파리한 얼굴을 한 지식인들이 아니야. 붉은 피가 펄펄 끓는 야인들이지. 그들은 과도한 욕망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꾸짖었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은 부정하지 않았어.”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래서 신약보다는 구약에 더 끌린다고 했대요.”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래도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했잖아요.”


“물론이지. 종교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니까. 경건 생활을 위한 금욕 혹은 절제는 꼭 필요한 거 아닐까?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을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금욕을 위한 금욕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잔치를 더욱 즐기시지 않았어?”


“저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예수님의 별명이 참 마음에 들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는 어떻고?”


“좋긴 좋은 데, 제가 그 자리까지 가려면 아직도 내공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건 자신 있고?”


“그럼요.”


“그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 사이에 화해가 일어나고, 낙심했던 이들이 살맛을 회복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


“예수님은 참 다정다감하신 분 같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기도만 하지지 않으시거든. 고통 당하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접촉을 시도하시지. 열병 걸린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킨다든지,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댄다든지, 앞 못 보는 이의 눈에 손을 대고, 말이 어눌한 사람의 혀에 손을 댄다든지….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나도 가끔 병원에서 경험하는 바이지만 어떤 때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이 께름칙할 때도 있어. 그러니까 환자들을 어루만지는 예수님의 손길이야말로 말없는 기도라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배를 쓸어 내리시며 '엄마 손은 약손' 하시던 어머니의 손길과 같은 거겠지요.”


“맞아. 만짐 혹은 접촉이야말로 친밀함의 모태가 아닌가 싶어. 접촉은 ‘손으로 빚어내는 개념’(manual concept)이래. 손으로 상징되는 몸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 전달의 매개체인 거지.”


“말보다는 몸짓이 더 큰 의미를 전달할 때도 많은 것 같아요.”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 알지? 하나님의 손끝이 아담의 손끝에 닿을락말락하잖아? 사람들은 그 미세한 지향 혹은 접촉에서 창조행위를 보아내지. 손가락 하나를 통해 천지창조의 그 오묘한 순간을 남김없이 담아내는 화가의 솜씨가 정말 일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 마음이란 몸속에 깃든 마음이니까.”


● 타자화된 몸


“성경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요?”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에 나오는 구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공감은 가지만 좀 부담스럽네요.”


“그래도 나는 이 구절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이 구절은 음행을 삼가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기는 하지만,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 우리 몸이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곳으로 의식하고 산다면, 아무 음식이나 함부로 먹어도 안 되고, 과식을 해도 안 되겠지.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하는 삶의 방식, 즉 과로나 과욕도 피해야 할 거고.”


“뭐든 과한 것이 문제군요.”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족한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렵지.”


“일전에 삶의 중심이 하나이면 ‘忠’의 삶을 살게 되지만, 중심이 여러 개이면 ‘患’이 된다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어쩌면 우리가 건강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다 보니까 마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고, 몸도 덩달아 균형을 잃고요.”


“기원전 6세기의 그리스 의학자인 알크마이온은 인간의 몸이 단순한 물리학적 개체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여러 요소들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 건강한 것이고, 그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가 다른 요소를 침범하여 균형이 깨지면 병이 된다고 설명했어. 알크마이온은 병을 ‘모나르키아’라고 했는데, 그건 ‘파탄’ 혹은 ‘한쪽의 지배’라는 뜻이래.”


“세상의 모든 일을 음양과 오행의 원리로 설명하는 동양 철학의 원리와도 비슷하네요.”


“그렇지?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져야 한다는 점인데,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몸적 사고에 지나칠 정도로 길들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요즘 유행하고 있는 웰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포장만 바꾼 소비주의가 아닌가?”


“명상이나 영성에 대한 관심은 어떤가요?”


“그것조차 자본주의 시장의 유통 경로를 통해 상품화 된 것 같아. 물론 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 그것을 통해 몸과 마음의 관계적 합리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좋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구조로부터 먼저 해방되어야 할 거야.”


“정말 우리 시대는 몸이 상품이 되어 버린 듯한 감이 들어요. 우리 나라에 불고 있는 성형과 다이어트 열풍은 정말 병적이에요. 물론 이런 열풍의 배후에는 서구인들의 체형과 외모를 따라가도록 부추기는 매스컴이 있지요. 하지만 이건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것처럼 검은 피부에 하얀 가면을 쓰려는 것이 아닐까요? 아름다운 몸을 갖고 싶은 욕망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 욕망이 자기 생의 다른 가능성들을 억압하고 타자화한다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지요. 언제쯤이나 우리는 타자에 대한 열등감 없이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할 수 있을까요?”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요즘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느낌이야. 언젠가 여성민우회에서 ‘세계 다이어트 반대의 날’ 행사를 하면서 ‘내 몸의 주인은 나―노 다이어트, 노 성형’ 캠페인을 했다지? 난 이런 소수의 깨어남이 결국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고 생각해. 한 때 ‘안티 미스 코리아 페스티발’이 열렸잖아. 중요한 것은 ‘선발대회’가 아니라 ‘페스티발’이라는 거야.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적합한 이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드러내고 또 그것을 함께 긍정해가면서 삶을 축제화 하는 것이지. 간디도 마을 공동체 운동이 세상을 바꿀 거라고 말했는데, 변혁은 항상 작은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고, 정신이 잠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


●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저는 요즘 몸은 정말 슬픈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학대받는 시리아나 이라크 포로들의 벌거벗은 몸을 보면서 저는 몸을 가진 자가 경험할 수도 있는 어둠의 깊이를 본 것 같아요. 일제시대에 우리 민중들이 겪은 아픔과 독재정권 시절에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이들이 겪었다는 고통, 그리고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에서 나치에 의해 학대받고 죽어간 유대인과 집시들의 고통도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분히 추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피라미드처럼 겹겹이 쌓인 그 벌거숭이 몸이 남이 아닌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벌거벗기운 채 인간적 모멸감과 공포의 극한에 몰리면서도 어떠한 저항할 수 없다는 것, 스스로를 존엄성을 가진 인간으로 긍정할 수 없다는 것, 그보다 잔인한 일은 없을 거예요. 게다가 그런 그들 곁에서 웃고 있는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 이 부조화와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칼을 손에 쥔 사람은 허공이라도 베어보고 싶어하잖아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저갱이 열리면서 사탄이 옥에서 놓여나는 장면이 있는데, 내 마음에는 자꾸만 그런 광경이 떠올라. 사탄은 우리의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닌지도 몰라.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 속에는 이미 천사도 있고 악마도 있다고 하잖아. 어느 쪽 열쇠를 쥐고 사느냐가 중요한데, 전쟁이라는 상황은 아무래도 악마를 풀어놓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할 거야. 토니 모리슨의 소설 <<연인>>에 나오는 한 대목이 기억나는군.


‘오! 나의 사람들이여 그들은 당신들의 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묶고, 구속하고, 자를 때만 손을 사용할 뿐이어서 빈손으로 끝납니다. 당신의 손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세요. 두 손을 높이 들고 두 손에 키스하세요.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만지시고, 양손으로 서로 두드리고, 얼굴을 쓰다듬으세요.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일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쓰다듬고 어루만지라고 주신 손으로 묶고 구속하고 자르고 학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타락한 실존의 흉한 모습이 아닐까?”


● 몸의 윤리


“몸에 가해지는 억압과 통제를 통해 어떤 대상들을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 분노를 영속화시키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렇겠지. 나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몸의 윤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어. 그 윤리는 ‘어루만짐’과 ‘보살핌’이야. 우리의 손이 어떤 대상을 어루만지고 보살필 때, 우리 마음도 제 자리를 찾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슬픈 몸’이 ‘고마운 몸’이 되겠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나는 살덩이와 뼈와 피와 땀, 그리고 눈물과 욕망과 꿈으로 가득 찬 자루’라고 말했지만, 그 자루를 잘 간수하지 못할 때 그 모든 것들이 땅에 쏟아질 수밖에 없지. 몸은 소중한 거야.”


“육체에 탐닉할 것도 없지만, 받은 몸을 건강하게 돌보고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잘 지키는 길이기도 하겠네요.”


“물론이지. 몸을 사용하여 마음을 이끈다지 않던가. '그늘진 얼굴, 긴장된 근육, 구부정한 자세 속에 불행과 부정적인 것들이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더군. 그러니까 늘 얼굴에 미소를 띠고, 몸의 긴장을 풀고, 자세를 바로 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맑아지겠지? 틱낫한 스님의 미소 명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런 원리에 따른 걸 거야.”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몸에서 힘 빼는 거 같아요.”


“워낙 긴장을 내면화하고 살아왔으니까. 자기 몸과 남의 몸을 공경하고 보살피려고 애쓰다보면 언젠가는 저절로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