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일깨워준 새로운 삶
꽃자리의 '종횡서해'(1)
‘천사’가 일깨워준 새로운 삶
- 마사 베크의 《아담을 기다리며》 -
몇 해 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개인적 체험』이라는 작품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원래 사소설(私小說)적 전통이 뿌리 깊은 일본이기 때문에 조금 덜 했을지는 모르지만, 작가의 이색적인 자기 고백이 담겨 있는 이 작품이 당대의 국내 독자들에게 준 충격과 감동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작가 개인의 가장 내밀하고도 직접적인 경험을 담은 이 소설의 내용은, ‘뇌 헤르니아’라는 기형의 병을 앓고 있는 장애 아이를 키우는 버드라는 사내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머리에 혹이 달린 아이는 뇌수술을 받지 않으면 곧 죽게 된다.
장애아를 살려 키울 것인가, 아니면 미필적 고의로 죽게 내버려둘 것인가? 이때 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한 생명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적잖은 부담을 느낀다. 결국 주인공은 수술을 결정하게 되고 장애아인 아이를 살려 돌보게 된다. 실제로 오에 겐자부로가 장애인인 아들을 키우던 ‘개인적 체험’이 반영된 이 작품은, 그 과정에서 느꼈을 법한 한 인간의 번민과 고통이 소설의 직접적인 내인(內因)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감동과 공감을 자아낸 바 있다.
여성 칼럼니스트 마사 베크(Martha Beck)의 자전적 회상록 《아담을 기다리며》는 여러 면에서 ‘개인적 체험’을 환기하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아이를 갖게 되고, 그 태아가 다운증후군을 가진 것을 알게 되고, 그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고, 산고 속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부의 고통스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 이 작품은 철저하게 작가의 실제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삼자의 눈에는 휴머니즘의 발현으로 보이는 이 같은 부모의 헌신과 애정이 실은 엄청난 고통과 번민과 망설임과 안간힘의 결과라는 것을 두 작품은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 체험’에 나타나는 개인적 결단의 과정에 비해 《아담을 기다리며》는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근원적이고 신성한 존재와 그로 인해 삶의 가치와 우선순위가 변화하는 과정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자신이 집착하던 가치나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가치에 이르는 감동적인 전신(轉身)의 서사가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이 작품과 ‘개인적 체험’이 갈라지는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이 작품은 한결 밝고 활력에 차 있다. 이 작품을 종교적 각성의 한 은유(隱喩)로 읽을 수 있는 까닭도 이러한 활력과 전신의 에너지 때문이다.
하버드의 엘리트 학생 부부인 마사와 존이 두 번째 아기를 임신하게 된다. 산과 검사 결과 뱃속의 아기인 ‘아담’이 다운증후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 임신 중절을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숱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고통과 절망, 불안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 인해 그들 부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치들과 하나하나 결별한다. 그리고 그 동안 살아오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에 눈을 떠가게 된다. 《아담을 기다리며》는 이처럼 주인공 마사와 존이 그들의 아들 ‘아담’을 통해서 이르게 되는 자기 발견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흐름은 시간의 선형적(線形的) 구조를 따르고 있지 않다. 작가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여러 풍경과 삽화들이 그때그때의 기억의 충실성에 의해 순서 없이 나열되고 있다. 아담을 가지기 전, 아담을 가진 후, 아담을 낳던 때, 아담을 키우면서 등의 시간이 뒤섞여서 일정한 배열 원리 없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아담’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삶의 변화의 여러 결을 보여주려는 데 작품의 초점이 있지, 장애아를 키우면서 삶을 극복해 가는 휴먼 다큐식의 서사에 중심이 있지 않다. 그런데 이들이 그토록 힘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기다린 ‘아담’은 누구인가?
먼저 ‘아담’은 태어날 때부터 다운증후군을 앓은 선천성 장애아다. 그는 “고개가 한편으로 기울고, 입은 헤벌어지고, 혀가 늘어져 나오고, 눈은 초점을 잃”(121쪽)은 외관을 하고 있는, 어찌 보면 한 가정에 근심과 한숨을 가져다줄 것만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존도 처음에는 임신 중절을 생각하게 되고, 주위 사람들도 그들 부부의 자기 성취를 위해서 ‘아담’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것을 권면한다. 그러나 ‘아담’을 가지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이들 부부의 신비한 경험들, 예컨대 집에 화재가 났을 때 마사를 구해준 손길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인형 조종자)’의 도움을 통해 그들은 “생활이 전적으로 나 아닌 누군가의 통제하에 있다는 기괴한 기분”(61쪽)을 느끼게 된다.
따스한 이웃들, 적절한 조언을 해주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펑펑 울고 마는 그들 부모의 애정도 이러한 변화에 중요한 몫을 한다. 이 순간 그들이 기다리던 ‘아담’은 장애아로부터 신성한 존재로 탈바꿈된다. 결국 아담을 통해 만나고 알게 된 이러한 신성한 존재들과의 신비로운 소통을 통해 “너무나도 논리적인 사람”(33쪽)이었던 마사는 자신이 “내 자식인 이 아이는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것, 내가 그를 ‘정상적’인 아이로 만들려고 애쓰며 겪는 고통에 대해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사랑한다는 것”(79쪽)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반복되고 있는 마사의 가혹한 ‘구토증’은 이러한 발견과 변화에 따르는 고통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그들의 생을 고통으로부터 축복으로 이끈다. 그래서 마사는 “아담은 그를 갖기 전에 내가 느낀 어떤 것도 능가하는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사물의 핵심을 보는 것,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장미뿐만 아니라 관목들까지 냄새를 맡아보는 것에서 오는 것”(84쪽)이라는 고백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존 역시 “황량한 황무지 대신에 온갖 가능성이 충만한 세상에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을 버리고 과거의 싸움터로 돌아가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그건 전혀 바랄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290쪽)라는 변화를 겪는다. 이 모든 것이 아담이 가져다준 신비로운 은총이다. 그만큼 “조그만 기적들이 항상 아담 주위에서 일어난다는”(109쪽) 것, 그리고 “나는 내가 받은 그 모든 교육과 훈련에도 불구하고 즐겁게 사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것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단 한 사람 내 아들에게서 배웠다는 것”(123쪽), “아담에게는 사물의 외면적 일상성을 꿰뚫고, 그것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마술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202쪽)는 것에 대한 일련의 귀중한 발견이 뒤따르면서 그들의 생은 변화한다.
이 책의 부제가 “A True Story of Birth, Rebirth, and Everyday Magic”인 것을 참조하면, 이들 마사와 존의 삶은 탄생과 재탄생 그리고 매일 일어나는 마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그 일상적 마술이 ‘아담’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조그만 기적들의 다른 이름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가운데 마사가 고통 속에서 듣게 되는 신성한 음성과, 특별히 마사가 진통의 혼몽중에 바라본 “공중에 서 있는 한 쌍의 맨발”(302쪽)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각적 형상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생의 극한에서 만나게 되는 신의 음성과 손길과 맨발, 그것들은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은 아주 틀린 말이다. 사랑은 지상에서 오직 하나 우리에게 서로를 가장 정확하게 보게 해주는 것이다”(234쪽)라는 발견을 통해 그들 부부를 궁극적인 사랑의 힘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초점은 이제 ‘사랑’에 가 닿는다.
“우리의 짧고 덧없는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고립된 자신을 벗어나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인간이 하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사는 것이다.”(147쪽)
그래서 이 “손을 뻗쳐 서로에게서,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힘과 위안과 온기를 발견하는 능력”은 자연스럽게 사랑의 힘으로 이어진다. “방안의 그 물리적 존재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과 함께 온 사랑이었다. 나는 빛나는 사랑의 물결에 휩싸인 느낌이었다. 그 사랑은 땅 위의 모든 고통이 조그만 흠집도 낼 수 없는 그렇게 강한 사랑이었다”(302쪽)는 발견은 그래서 이 책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이룬다.
책의 서문에서 김종철 교수가 “베크 부부는 그들 자신이 이 세상에 전혀 새로이 태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소중하고, 무엇이 하찮은 것인가 하는 데 대하여 근원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랑으로의 변화를 일컫는 증언이다. 그 근원적 깨달음을 던져준 ‘아담’은 결국 천사들의 호위를 받고 강림한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형식이 된다.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인류의 구원자인 ‘예수’와 선천적 장애아이자 뭇사람들에게 진귀한 은총을 주고 있는 ‘아담’은 이 순간 하나의 육체로 통합된다. 이처럼 이 책은 크게는 종교적 발견의 서사, 작게는 한 인간의 가치의 중심이 전이되는 자기 탐색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장애인 문제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고 있다. 장애아를 돌보는 것은 휴머니즘이라는 인간 본위의 실천이 아니라, 신성한 힘에 의해 주어진 은총의 일부라는 생각으로의 전환을 이 작품은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서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이 같은 풍경은, 생의 재앙을 생의 복으로 변화시키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과 은총을 함께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이른바 ‘아이비리그(Ivy League)’에 속해 있는 엘리트들의 맹목에 가까운 삶의 태도에 대한 우회적 비판의 함의도 띠고 있다. 하버드를 이루고 있는 풍경은 치열한 경쟁과 엄청난 속도, 지독한 자기 중심성이다. 특히 존이 존경해 오던 유능한 사업가인 카버나 하버드의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인 고우트스트록에 대해 존이 치르는 존경과 경멸의 엇갈림은, 그 자체로 성취 중심의 지식인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을 담고 있는 전회(轉回)의 장면이다. 고우트스트록 교수가 존에게 한 “암흑시대가 아직 가장 명석한 정신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군”(221쪽)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불문율처럼 전제하는 이성 중심, 효율성 중심, 자기 본위의 상상력을 그대로 드러내주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성적·기능적·자기 중심적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인간의 종교적 욕망을 “한계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읽은 호킹이나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읽은 틸리히의 견해를 존중한다면, 그리고 원천적으로 종교적 체험이 어떤 거룩한 실재와 접촉하는 성스러움의 경험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베크 부부가 겪은 ‘신성한 존재’와의 만남은 종교적 체험의 일부를 이룬다. 종교적 경험의 현상학적 특징이 자기 부정을 통하여 새롭게 자기를 재긍정 하는 통과제의적 과정을 겪는 데 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궁극적으로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기 때문이다. 베크 부부는 ‘아담’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엄청난 고통 속에서 찾았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아담’은 그들 부부를, 우리 모두를 ‘새로운 존재’가 되게끔 인도한 ‘천사’였다. 말 그대로 “하늘이 보낸 사자”였다.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