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했던 어머니 하갈, 하늘의 약속을 받다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29)
절박했던 어머니 하갈, 하늘의 약속을 받다
살다보면 동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더러 끝내 헤어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이 당당히 국가로 발돋움하기 사백년 전쯤(창세기 15:13),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12:2). 그러나 아브람 아내의 불임은 약속을 성취하는데 걸림돌이었다. 그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10년쯤 되었을 때다. 그는 아내 사래의 여종이었던 이집트 사람 하갈을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한다(16:1-3). 사래의 제안이 먼저였지만, 사람의 계획이 어찌 자기 뜻대로 흘러가던가. 하갈이 임신하자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다(4절). 아브람의 두 아내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어졌고,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갈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사래에게서 도망쳐 나온다(6절).
임신 중에 도망쳐 나온 하갈이 광야의 샘 곁에 앉았을 때였다. 여호와의 천사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온다. 그는 여호와이며 하나님이셨다(9, 13절). 여호와는 하갈의 이름을 부르며 주인 사래에게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시지만(9절), 아브람처럼 동등하게 대응해 주신다. 그녀의 후손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10절). 약속의 내용이 아브람에게 주신 것과 비슷하다(12:2). 이뿐만이 아니다. 천사는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지어준다(11절).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16:11, 개역개정)
이른바 ‘수태고지’ 장면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주로 영웅 탄생과 관련된다. 이후 삼손(사사기 13:3-5), 요시야 왕(열왕기상 13:2), 예수님의 탄생이 그렇다(누가복음 1:31). 하갈은 어떤가.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들 중 처음으로 유일하게 여호와의 천사가 이름을 불러준 인물이다. 더욱이 족장 아브라함처럼 태어날 아들 이름과 신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하갈이 사래의 학대로 도망쳤지만, 그녀는 천사와의 만남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를 얻었을 테다.
그러나 약간의 긴장은 남아있었다. 하갈은 ‘하나님이 들으셨다’라는 뜻의 ‘이스마엘’이 들 나귀 같아서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 것이라는 신탁의 말씀을 듣는다(12절). 약속과 신탁을 받은 하갈은 자신이 앉았던 샘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13절). 그리고서 그 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 곧 “나를 보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이라고 지었다(14절). 그녀가 우물에 붙인 이름은 살피시는 하나님과 약속받은 아들 이스마엘에 대한 감사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아브람과 사래는 여호와로부터 약속의 확증과 함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으로 개명된다(15:5, 15). 아브라함이 75세에 후손을 약속받았지만(12:4), 백세의 노쇠해진 몸이 되어 아들을 얻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고지 받은 대로(17:19)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고 불렀다(21:3). 그런데 하갈이 이스마엘 출생약속을 받았을 당시 신탁내용의 현실화 조짐이었을까. 약속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 아브라함이 젖을 뗀 이삭을 위해 전치를 열었을 즈음이다. 아브라함이 86세 때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이(16:16) 이삭을 놀렸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청한다. 이 일은 아브라함에게 큰 근심거리였다(21:9-11). 사라는 이삭과 이스마엘이 상속을 공유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삭과 이스마엘은 동거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의 고민을 하나님이 아셨다.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하셨지만, 하갈의 아들도 한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다만 여호와는 이삭이 아브라함 언약의 상속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21:12-13). 결국 다음날 이른 아침 아브라함은 빵과 물을 하갈의 어깨에 메어주고 이스마엘과 함께 내보낸다. 얼마나 떠나왔을까. 십대 소년 이스마엘과 하갈은 인적이 드문 ‘브엘세바’(맹세의 우물) 광야에 이르렀다. 가죽부대의 물은 바닥났다. 하갈은 아들을 관목 덤불 아래 있게 했다(14-15절). 흙먼지 날리는 건조한 땅에서 자라난 관목의 그늘이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충분히 식혀주지 못했으리라.
하갈은 아이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다며 소리 내어 울었고, 하나님이 소년의 울음 소리를 들으셨다(16절). 아들이 죽을까 염려하는 절박한 어머니의 모습이다. 광야는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장소다. 해설자는 하갈의 울음만을 기록했는데, 큰 소리로 우는 엄마를 보며 아들도 울었나 보다. 긴장된 순간이었지만 하나님의 들으심이 독자의 마음을 이완시킨다. 이때였다.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의 이름을 불렀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7-18, 개역개정).
하갈이 아브라함처럼 땅을 약속받는 것은 아니지만, 족장 아브라함이 약속을 재확인 받은 것처럼 하갈역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다(16:10; 21:18). 하갈이 아브라함 족장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인 약속의 담지자가 된 셈이다. 마치 여자 족장처럼 보이지 않는가?
바로 그때였다. 물을 찾지 못했던 하갈이 샘물을 발견했다. 하나님이 보게 하셨다. 위험한 광야길, 탈진으로 인한 죽음의 위기를 넘겼다. 이후 하나님이 소년 이스마엘과 함께 계셨고, 그는 바란 광야에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로 성장했다(20절). 아브라함 약속의 성취 과정에서 신실하지 못했던 부부 때문에 발생했던 가족갈등의 문제를 결국 하나님이 해결하셨다. 그리고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이삭만큼의 동일한 수준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안에 살게 되었다. 하갈은 더 이상 사라의 종이 아니다. 자유인이다.
이후 하갈은 이스마엘을 위해 이집트 출신 여자를 아내로 얻어주었다(21절). 하갈은 구약에서 아들의 아내를 구하는 유일한 여성이다. 아브라함이 고향 땅에 자신의 늙은 종을 보내 이삭의 아내를 구한 것처럼(24장), 하갈은 아브라함 족장의 역할과 많이 닮았다. 더욱이 하갈이 머물렀던 브엘세바는 이후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왕이 서로 언약을 맺은 장소요(21:22-23),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에게 자손의 번성을 약속한 장소가 된다(26:22-33; 46:1-5). 한 마디로 하갈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브엘세바’는 이후로 이스라엘 족장들이 하나님을 만나 약속을 받는 거룩한 땅이 된다.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피해 도망쳐 나와 머물렀던 수르 광야의 ‘브엘라헤로이’도 마찬가지다(16:14). 이후 이곳에서 이삭이 머물게 된다(24:62; 25:11). 놀랍게도 비천한 노예출신의 하갈과 하나님이 만났던 장소는 이스라엘 족장들의 중요한 장소가 된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하갈의 인연은 간단치 않다. 하갈은 아브라함 집안의 자식을 낳아주는 대리모, 그 이상이었다. 하갈이 이집트인 종이었지만 아브라함의 ‘아내’(히브리말, “잇샤”, 16:3; 개역개정, “첩”)였다. 하갈은 위기 순간마다 찾아오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거듭 받았으니 아브라함과 비슷하다. 하갈이 노예 신분으로 아브라함 집안에 들어왔으나 하나님은 그녀를 자유인으로 바꾸셨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린 광야에서 하갈이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는 이스라엘 족장 역사에서 언약을 확증하는 신성한 장소였다.
믿음의 선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남 경험은 지리적, 혈통적 경계를 넘어 이집트인 여종 하갈에게도 적용되었다. 하갈의 관점에서 약자의 편이 되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이 오롯하다. 하여 하갈 이야기는 노예, 추방된 자, 여자, 과부, 억울한 자들 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구속역사’라는 성경의 거대담론에서 단절과 소외를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선의가 어떻게 발휘되는가를 보여준 희망의 이야기다. 헤어짐이 끝이 아니라 모두의 공존이 허락되는 공존의 아름다움이 움트는 이야기다.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