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30)
“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
믿음은 무엇인가? 누군가를 또는 누군가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받드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신비지만 생각과 질문이 없으면 맹신과 미신에 빠진다. 질문이 제거된 신앙은 맹신에 빠지기 쉽다. 질문은 사유의 영역을 넓히고 사유는 진리에 이르러 믿음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시킨다. 묻고 답하기를 통해 서두르지 않고 참 진리로 이끄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신약성경에 있다.
예수님이 유대 지역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는데,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수가’라는 마을로 들어가셨다. 이곳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깝고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이었다(요한복음 4:3-5). 구약 본문에서 야곱이 우물을 팠다는 기록이 없지만, 그가 세겜 땅을 매입한 사실이 언급되었기에(창세기 33:19; 여호수아 24:32) 우물이 있었거나 팠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우물은 그리심 산 기슭에 있고, 수심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예수님은 피곤했고, 우물곁에 앉았다. 낮 시간 중 가장 뜨거운 정오의 시간(6절), 예수님은 지친 여행자의 모습이다. 그때였다.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다(7절). 성경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주로 저녁 때 물을 길으러 우물로 나오곤 했다(창세기24:11). 이른 아침이나 저녁시간은 더위를 피하는 시원한 시간일 테고, 음식을 만들거나 씻기 위해 물이 필요한 때다.
그런데 뜨거운 정오의 시간, 이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여자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집안에 응급상황이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직접적으로 자신이 이혼한 상태여서 현재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4:17) 사회적으로 외면당하는 처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려고 뜨겁고 더운 시간을 택했나보다. 여자들이 우물가로 모여드는 시간대가 아니어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시감이 든다.
물을 길으러 온 여자에게 예수님이 물을 좀 달라고 청했다(7절). 사마리아 여자는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독자는 기대감이 충족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우물가에서 물을 좀 달라는 요청이 뭐 그리 유별난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거는 행위 자체는 뜻밖의 행동이다. 예수님이 돌출된 행동을 하고 있음이 사마리아 여자의 말에서 곧 밝혀진다. 사마리아 여자는 물을 달라고 말을 거는 예수님에게 분명하게 대답한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여자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은 나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말씀하십니까?”(4:9)
한마디로 정리하면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겁니까?”라는 물음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세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다(9절).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과의 반감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주전8세기 앗시리아에 의해 북이스라엘 왕국이 망하게 되었던 시점으로 소급된다. 앗시리아 사람들이 사마리아에 거주하고 정착하면서 생겨난 혼혈인이 사마리아인의 기원이 된 시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열왕기하 17:24-41). 사마리아 여자는 남북의 기나긴 반감의 역사적 배경과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잘 알았던 터였다. 그러니 여자는 자신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 예수님이 사회적 관례를 위반했다고 말한 셈이다. 겨우 물 한 잔 달라고 했을 뿐인데. 여자의 말은 남북의 문화적인 배타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의 암묵적인 거절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 걸기는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간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더 요청하지 않았지만, 기술적으로 말을 맞받아친다. 한글번역은 상대방을 낮추는 말투로 번역했지만, 예수님이 우리말로 대화했다면,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와 어법을 취하지 않았을까.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선물과 당신에게 물을 달라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당신은 그에게 구했을 것이고, 그는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4:10)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의 답변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내포하는 “하나님의 선물”을 “생수”와 동일시했다. 물은 생명을 이어가는 절대적인 필수 요소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생수의 근원”(예레미야 2:13)이라고 표명하신 바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생수를 주는 자,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자임을 밝힌 셈이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여자는 의구심을 풀지 않은 채 질문한다.
“선생님, 당신은 물을 길어 올릴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습니다. 당신이 어디서 그 생수를 얻겠습니까?”(4:11)
이 질문은 아직 예수님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터라 자연스럽다. 그러나 여자의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야곱의 우물에서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아들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을 마셨는데, 예수님이 말하는 이가 야곱 보다 큰 자인가를 묻는다(12절). 여자는 우물의 긴 역사성을 말하며 “그가 야곱보다 큰 가”를 묻자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과 자신이 주는 물을 비교하여 좀 더 근원적인 영역을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개역개정)
예수님은 질문하는 여자에게 하나님과 자신의 연결된 정체성을 드러내셨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자기 자신을 고갈되지 않는 샘물, 곧 영생하는 물이라고 소개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나님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는 분(이사야 44:3)이라는 위로의 말씀과 겹쳐진다.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여자는 “그 물을 내게 주십시오”(15절)라고 요청한다. 다급해보인다. 예수님이 처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주시겠소?”(4:7)라고 했던 상황이 뒤집힌 순간이다. 그녀는 삶의 갈증이 해소되기를 간절히 바랬겠지만, 무엇보다도 다시 이곳으로 물 길으러 오지 않는데 관심이 있었다. 여자는 아직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선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뜬금없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한다. 그녀가 남편이 없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인정하셨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던 것과 지금의 남편은 내연의 남자처럼 법적인 혼인관계로 묶이지 않은 것을 알고 계셨다(15-17절).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의 과거를 들추어 부도덕한 여자라는 수치심을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의 태도에 진정성을 느꼈을 터. 그녀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제 보니 당신은 예언자셨군요.”(19절) 여자는 완전한 진리를 향해 한걸음 차근차근 다가서고 있었다. 희미한 깨달음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궁금증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는 적합한 예배 장소에도 관심이 있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20절) 여자는 예수님을 향해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을 유대인들 중 한 사람으로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여자에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는 민족중심적인 배타적 태도를 벗어난 예수님의 답변이 돌아왔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오.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고 당신들이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오.”(4:21)
예수님은 나름의 역사적 정통성이나 민족적인 편견을 해체시키는 발언을 하셨다. 그럼에도 “구원이 유대인에게서”(22절) 온다는 것과 예배에 관한 선언적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4:23-24, 개역개정)
예수님은 구약 전통에서 매우 희귀한 ‘아버지’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다윗 왕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했을 뿐인데(시편 89:26), 예수님이 언약의 계보에 따른 그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사마리아 여자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가 대답한다. “나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불리는 이가 오실 줄을 압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25절) 사마리아 여자는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공유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 순간을 포착하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그라.”(26절) 예수님은 찬찬히 대화를 주도하면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여자의 의문을 말끔히 해소시키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소외된 여자에게 먼저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이다.
이 중대한 시점, 예수님의 제자들이 돌아왔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여자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27절). 랍비 저작들에 의하면, 당시 남성은 길거리에서 여성과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자기 아내와의 대화도 금기시했던 사회적 분위기였으니 다른 사람의 아내와 대화하는 것은 타인들의 공론거리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노상에서 만난 낯선 여자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누구도 예수님께 “왜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라고 묻지 않았다(27절).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그때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와서 보라! 내가 말한 사람이 그리스도 아닌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의 첫 마디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로 갔다(30절).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당당하지 못했던 여자는 구원의 선물 “생수”를 그녀의 이웃들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39절).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개인구원을 넘어 마을 공동체의 구원을 위한 발걸음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여자는 예수님을 만나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자아의 변화까지 경험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와 그녀가 속한 마을 공동체는 더 이상 예수님 사역 밖의 외부자들이 아니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는 남북의 오래된 배타적이고 민족적인 감정을 넘어 사마리아인들 가운데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탄생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뜨거운 한 낯의 열기 아래 질문을 멈추지 않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기꺼이 대답하시는 예수님. 우물곁에 있는 둘의 대화 장면이 상상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요, 생수라는 것, 영과 진실함으로 드리는 예배에 더해진 배움이 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는 민족적인 배타성과 사회적 통념을 깨는 만남이요, 서로 존중하는 묻고 답하기는 새로운 깨달음과 예수 공동체를 세우는 아름다운 발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맹신이 아니라 질문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요, 완고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신학적인 증오와 대립을 혁파하는 본보기다.
김순영/구약학, 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