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성경 속 여성 돋보기'/구약 지혜서 산책

아름다움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

한종호 2017. 6. 27. 07:57

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3)


아름다움과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


인생은 아름다운가? 아름답다. 인생은 덧없는가? 덧없다. 허무하다. 부조리하다. 저마다의 인생은 역설과 모순투성이로 가득 차 있다. 누군가의 인생도 세상사도 온통 아름다움과 부조리로 뒤엉켜있다. 그러하여 격한 희망에 감격하다가도 삶의 낙관은 여지없이 무너지곤 한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선생이며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이미 간파했으니, 그는 세상사의 양극적인 현실과 역설에 큰 관심을 가졌다. 이것은 그가 그토록 집요하게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헤벨’(헛됨, 무익함, 덧없음, 허무, 부조리)과 생의 ‘즐거움’을 말한 이유다.


전도서는 ‘헤벨’의 책이지만, 동시에 삶의 즐거움을 촉구하는 “기쁨의 복음서”다. 저자 코헬렛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삶의 기쁨을 용기 있게 확신하면서, 인생의 밝고 어두운 면을 정직하게 대면시킨다. 그는 삶과 죽음의 양극적 현실을 가로질러 삶의 온갖 양태들을 공정하게 치우침 없이 말한다. 이것은 코헬렛이 인생의 절망적인 상황을 목격하고서도 회피하지 않아서다. 그는 아무리 수고해도 결실 없는 노력과 탐구를 거침없이 말하기도 한다(1:12-2:11). 그런 그가 삶의 양극적인 양태를 노래한 ‘때’에 관한 시(3:1-8)는 유명하다. 그가 살아온 세월에서 단련되었을 언어의 단아함과 경쾌함이 멋지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살릴 때가 있다.

허물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

통곡할 때가 있고,

기뻐 춤출 때가 있다.

돌을 흩어버릴 때가 있고,

모아들일 때가 있다.

껴안을 때가 있고,

껴안는 것을 삼갈 때가 있다.

찾아 나설 때가 있고,

포기할 때가 있다.

간직할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다.

말하지 않을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

전쟁을 치를 때가 있고,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전도서3:1-8, 새번역)



이렇게 코헬렛은 삶과 죽음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관찰하여 얻은 통찰을 간결한 언어와 은유적인 심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 천년 넘는 세월 지나 코헬렛의 시는 1965년 미국의 유명한 5인조 록밴드 ‘버즈’(The Byrds)가 발표한《Turn! Turn! Turn!》이라는 곡으로 재생되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인생이 각자의 계획한대로 원하는 시점에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지 않음을 보았기에, 코헬렛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워준 짐이라고 말했다(3:10).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진실이요, 삶에 관한 진실이다. 코헬렛이 지은 시 때문에 삶의 어두움과 밝음의 공존은 낯설지 않은 것이 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고백

‘해 아래’ 일어나는 갖가지 양극의 사건들과 삶의 짐을 사람이 통제할 수 있을까? 코헬렛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신의 결정에 대한 고백을 시로 담아냈다. 그렇다고 코헬렛이 결정론이나 숙명론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죽고 사는 문제부터 일이 성취되는 정확한 때와 순간을 결정할 권한이 사람에게 없다는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의 취약한 조건에 대한 깨우침이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온갖 상황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인간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역동적관계의 표명이다. 그러니까 코헬렛은 삶에서 변화무쌍함을 겪는 사람들과 사건들에서 운명을 반전시키는 하나님의 역동성을 본 것이다. 하여 우리는 한 줄 한 줄의 시행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행동과 책임 사이의 미묘함과 섬세함을 성찰해야하는 여행길에 초대받은 셈이다. 이 노래를 그저 삶의 밝음과 어둠, 긍정과 부정의 현상만을 묘사하려고 쓴 것이겠는가. 코헬렛은 삶의 긍정성과 부정성 사이를 오가는 삶의 현실에서 ‘시간’(때)의 지배자를 생각한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시간에 소속된 사람이 모든 사건들마다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의 인식이다. 사람 나름의 똑똑함이나 온갖 사건의 인과관계 밖에서 통제하시는 초월적인 절대자를 생각한 노래다.



그래서일까. 코헬렛은 확실히 죽음과 삶 중에서 둘 중 어느 하나를 더 선호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있는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자들이 더 복되다고 말하거나 아예 아직 출생하지 않은 자가 더 낫다(4:2:3)라고 까지 말한다. 반대로 살아 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9:4)라며 살아있음의 가치를 강조하기도 했다. 코헬렛은 그렇게 삶의 양극적 상황과 그것의 가치를 동등하게 존중한다. 이것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양극의 사건들과 초월적 존재 하나님이 엮어가는 운명과 역사를 보는 통찰이다. 그러면 이에 대한 우리의 적절한 반응은 어떠해야 할까.


“성경 전체에서 신의 섭리에 대한 가장 위대한 진술”로 극찬을 받은 코헬렛의 말이 있다. 전도서 본문이 설교되지는 않아도 설교 강단에서 인용되는 구절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3:11, 개역개정)


코헬렛의 이 말은 신앙인들의 희망을 담은 공론이다. ‘해 아래’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 사이에서 ‘헤벨’을 말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인생에게 주는 지혜교훈이다. 오랜 세월 지나 사도 바울역시 코헬렛의 말씀을 인용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로마서 8:28)라고 전하지 않았던가. 


양극이 교차하며 반복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코헬렛의 결정적 한 마디는 더 있다. 그는 사람마다 먹고, 마시고, 노동하며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으며,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3:13). 이것은 아름다움과 갖가지 기쁨과 사랑, 그러나 헛됨, 덧없음, 허무, 부조리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소박하지만, 강력하고 지혜로운 행동지침으로 우리 앞에 놓여졌다. 그러니 오늘 하루 땀 흘리고 소박한 밥상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했다면, 이것 보다 더 위대한 선물은 없다. 혹시, 지혜 선생님 코헬렛의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수용하면서도 뒤끝이 불편하다면, 우리는 그 불편함의 크기만큼 시대의 욕망에 충실한 노예가 된 것인지 모른다.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