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 아닌 협력과 공생을 위하여
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4)
경쟁이 아닌 협력과 공생을 위하여
어떤 향기도 열정도 재미도 없는 건조한 글을 꼽으라면 교과서다. 이것은 학교공부에 흥미를 못 느끼고 어정쩡한 시간을 보내며 가끔씩 무료하면 아무거나 읽던 중고등학교 시절 느꼈던 나의 생각이다. 그런 내가 마흔을 훌쩍 넘긴 세월을 지내며 십대 청소년기의 아들에게 “학교공부도 잘 해야지”라고 말하는 학부모가 되어있다. 그렇게 나는 세월과 함께 평범한 학부모의 대열에 서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공부가 시민적 교양과 덕성을 목표하는 교육이 아니다. 경쟁에서 이긴 소수의 사람들에게 우월성을 부여하는 시대의 폭력성과 연계된 상태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야지 다짐했지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나는 기독교인이고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부끄럽다. 그런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자들의 동맹과 힘의 위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아들이 낙오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식사랑과 꿈으로 포장한 속물적 욕망 때문이다.
이 속물적 욕망을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멋지게 포장해도 소용없다. 이런 삶에 말을 걸어오는 구약 지혜서의 말씀이 ‘다른’ 대안의 삶을 꿈꾸고, 상상하라고 심장과 옆구리를 찌른다. 한걸음 더 나아가 지혜의 가르침이 생각을 고치고, 태도를 교정해야 할 책무 속으로 밀어 넣는다. 특히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은 타인들과의 경쟁에서 우월적 지위를 차지하려는 발버둥을 멈추고 협력과 공생의 문제를 고민하고 발설하도록 설복시켜 지혜의 말씀 곁으로 바짝 끌어들인다.
코헬렛은 농경사회에 기반을 둔 고대 사회에서 살았지만, 상업적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경제적인 잉여 소득을 남기려는 시대적 욕망을 지켜본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전도서는 그가 살았을 시대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 곳곳에는 인간의 수고, 곧 ‘노동’의 문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이익’과 관련된 어휘와 질문들이 반복된다. 이 때문에 그의 삶의 자리를 어림할 뿐이다.
코헬렛은 위로받을 길 없는 억압적인 현실의 문제를 돌이켜 보고(전도서 4:1-3), 인간의 수고와 성공의 위력이 아니라 허상에 관심을 가졌다. 코헬렛은 누구의 위로도 얻지 못하는 온갖 억압과 사람들 사이에 일어는 시기심, 거기서 비롯된 경쟁을 비웃는다(4:4-6). 그리고서 그는 그 허망한 수고, 또는 노동을 극복하고 함께 나누는 행복의 가치를 논한다(4:7-12). 코헬렛은 동료애는 물론 함께 나누는 행복을 수호할 가치로 여겼다. 코헬렛의 말을 한 문장 한 문장 되새김질하듯 읽다보면, 그가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자인지 지금 나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사는 지혜 선생님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시대적 적실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코헬렛은 쉼을 모르고 일만하는 한 남자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남자는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다(4:8). 이 남자의 삶을 관찰했을 코헬렛의 말은 그의 시대를 뛰어넘어 경쟁 때문에 공동체적 가치를 모르거나 외면하며 사는 지금,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를 향해있다. 그의 말이 어디서 들어본 듯도 하여 독자는 무심히 지나쳐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짧고 단순한 문장이 고요히 심장을 파고든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4:9, 개역개정)
혼자보다 둘이 낫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4:9)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하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듯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듯하겠는가?(4:11)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4:12, 새번역).
가장 좋고, 가장 많은 것을 홀로 차지하는 것이 승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눌 사람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겠는가. 불행한 노고일 뿐이다(4:9). 코헬렛이 살았을 세상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지금은 사회적인 억압과 경쟁에 내몰려 쉼을 박탈당하고, 위로해 줄 사람 없는 인생들이 허다한 세상이다. 이웃과 즐기지 못하고 수고만하며 한탄하는 한 남자의 말,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4:8, 새번역) 부자였어도 행복하지 않았던 고독한 남자의 말이 현대인의 외롭고 쓸쓸한 삶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다.
끝없는 과잉의 수고와 거기서 얻은 부요함을 자랑하는 한 남자의 일화와 그의 질문은 현대 사회와 신앙 공동체에게 던지는 사회학적이며 신학적인 질문이다. 더군다나 코헬렛은 이것 역시 헛되고, 불행한 일이라고 판단했다(4:8). 그의 말 때문에 현대사회의 절제되지 않는 탐욕과 포장된 자아실현, 그리고 초과수익을 얻기 위한 과도한 노동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해 강요된 장시간의 노동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노동자의 쉴 권리를 빼앗거나 축소시킨 거대자본가의 배후에는 인간을 그저 소비재로 전락시켜버리는 탐욕적인 착취가 있다. 내적인 욕망의 분출 때문이든 외부적인 압력에 의한 것이든 끝내 과도한 노동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연민마저 빼앗고 함께 누릴 연대의 기쁨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가 코헬렛의 가르침을 심장에 새긴다면, 남보다 더 높고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경쟁은 자신을 억압하는 일이지 행복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한다. 돈의 위력이 지배하는 우리 사회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고 타인을 짓밟는 무한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무차별적인 경쟁은 끝내 나와 타인 사이에서 갈등관계를 조장하여 공동체의 불신과 분열을 가져올 뿐이다. 그러나 고대의 지혜 선생 코헬렛은 경쟁을 권하는 사회에 무기력하게 포섭당한 개인에게 경쟁보다 나은 협력과 공생을 요청한다. 하여 오래된 그의 말씀은 소수의 우월적인 지위 확보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인 삶의 행복 실현을 요청하는 부름이다.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서의 정경, 전도서의 가르침과 부름에 교회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김순영/백석대 교육대학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