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세상을 껴안는 기도

by 한종호 2019. 1. 15.

세상을 껴안는 기도


4세기 전에 성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중국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자그마한 섬에서 죽었을 때, 그의 선임자인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그의 죽음의 “소식”을 듣기까지는 한두 해가 걸렸다. 오늘날 우리는 멀리서 비극이 발생한 당일에 그 소식을 들을 뿐만 아니라 TV 화면을 통해 그 광경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보기도 한다. 그래서 에티오피아의 기아, 인도의 비극, 중앙 아메리카의 테러, 북아일랜드의 갈등, 이 모든 것과 훨씬 더 많은 사실들이 연속해서 우리 의식 속에 파고들며, 매일 우리 사고와 감정에 영향을 끼친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은 이 세상에 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후로 이 세상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하는가? 나는 세상과 선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왜 그처럼 어렵게 되는지 살펴보고, 기도를 모든 선교 활동의 견고한 기초로 삼는 방법을 제안하고 싶다.


기도하려면 우리는 세상의 고통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가서 하나님께 손을 대어 치유해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매일 그처럼 비참한 소식들을 너무 많이 듣다 보면, 우리는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 정책이나 니카라과에서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같은 비극들을 “너무 무거워서 질 수 없는 짐”으로 대하고 싶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제들은 너무 많고 너무 커서 마주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친숙하고 안전한 자기 울타리 안으로 물러난다. 이 문제들을 마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문제들은 그들의 삶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 된다.


이 두 집단에게는 더 이상 기도가 가능하지 않다. 어두움에 대한 지식이 늘어가면서 이들은 힘을 일으키기보다는 마비되고 말았다. 죄책감이 희망을 대신하고, 수치가 결속을 해체하거나 격노가 희망을 불사르고 미움이 사랑을 대신할 때 신앙은 비틀거린다. 이렇게 되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야 하는 우리의 과업은 선교에 대한 의식이 거의 없는 감상적인 꿈으로 퇴락한다.


왜 세상이 그처럼 무거운 짐이 되었는가? 단순히 대중 매체를 비난할 수 없다. 나는 우리가 세상에 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으면서도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의해서는 덜 변화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든다. 악의 세력의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이란 문제가 너무 많아 일일이 대응할 수 없고 너무 복잡해서 이해할 수도 없으며 너무 혼란스러워서 다룰 수도 없는 아주 복잡한 문제들로 쌓아올려진 거대한 더미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에 얽혀들면 들수록 우리는 예수께서 구원하시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 문제가 제 3세계의 문제든, 기아의 문제든, 핵문제든 혹은 여성 문제든, 우리의 생활이 문제에 지배를 당하면 기도할 수가 없다. 기도는 문제에 드리는 것이 아니고, 복잡하게 얽힌 것을 풀거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즉 기도는 마음이 마음에게, 영이 영에게 부르짖는 외침이다.


문제는 사람을 가두기 쉽지만 사람은 벗어날 수가 있다. 문제는 우리를 분열시키기 쉽지만 사람들은 결합할 수가 있다. 문제는 쉽게 지치게 만들지만 사람은 휴식을 줄 수 있다. 문제는 파괴하기 쉽지만 사람은 새 생명을 제공할 수 있다. 절망은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태도 때문에 생기고, 희망은 우리가 마음과 지성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향할 때 일어난다. 그것이 기도이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기도의 의미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남기지 않으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시는 구주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 채 굶주림을 덜고 불의를 해결하며 폭력을 극복하고 전쟁을 그치게 하며, 외로움을 없애는 것만을 바라볼 때 생명은 견딜 수 없는 짐이 된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들이고, 그래서 기독교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으로부터 흘러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내리누르는 짐의 무게를 느낀다.


우리 대부분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밑으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한다. “나는 내 가족을 부양하고 일이 차질 없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충분해. 제발 이 세상의 문제로 내게 짐 지우지 말아줘. 그런 문제들만 보면 나는 죄책감이 들고 내 자신이 무력하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아.”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전체 현실에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에 우리가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는 한 구석에 따로 떨어져 있고자 한다. 우리는 여전히 두려움 때문에 기도할 수 있지만 참된 기도는 우리가 사는 작은 부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껴안는 것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렸다.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일어난다. “우리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그 답변은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다만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들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한다는 뜻이다. 바로 그것이 “영이 영에게 말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거하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님께서 우리 역사의 구체적인 사건들에서 나타나실 때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명상할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 주신다. 그래서 예를 들면, 중앙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멈추고 정치로 뛰어들지 않고 기도하는 데서 기도하는 데로 나아간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배우려면 우리는 세상의 짐이 예수님으로 인해 가벼운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인간의 죄 때문에 어떻게 질 수 없는 짐이 되었는지, 즉 고통스런 출산과 고된 노동, 경쟁과 대적, 분노와 원한, 폭력과 전쟁, 병과 죽음의 짐이 되었는지를 아시고 우리의 짐을 치워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짐을 변화시키기 위해 예수를 보내심으로 무한한 자비를 보이셨다.


예수님의 선교는 인간의 모든 슬픔을 깨끗이 없애버리거나 인간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고통의 세상에 온전히 들어오셔서 인간적인 어떤 것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고통을 모으셨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자발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 치명적인 세력을 파괴하셨다. 이같이 하여 예수께서는 질 수 없는 짐을 지게 하셨다. 이제 우리에게는 인류의 고통을 역사상의 그 누구보다 깊고 완전하게 맛보신 친구가 계신다.


우리는 마음으로 깊은 어둠을 겪고 있는 순간에 친구가 방문해 준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을 때 이 신비를 어렴풋이라도 알게 된다. 친구들이 우리의 어둠을 치워버릴 수는 없을지라도 친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어둠에 짓눌리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세상의 고통에 무조건적으로 무한히 참여하신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통스런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거기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의도하셨던 바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그러면 우리는 알고 싶지는 않지만 현재 알고 있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대답은 간단하지만 어려운 문제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의 고난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는 고난을 직면하고도 여전히 살 수 있다. 예수님을 떠나면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도망쳐 숨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교제로 이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같이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여기에서 기도의 더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기도한다는 것은 스스로 예수님과 연합되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들어 하나님께로 가져가 사죄와 화해와 치유와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마주치는 인간의 고통이나 투쟁이 어떤 것이든 혹은 어떤 형태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든지 그것을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에 묶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에 관한 “소식”은 어떤 것이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고난을 새롭게 이해하게 만든다. 우리는 인간 역사의 전개는 또한 예수님의 깊은 마음을 펼치는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기도는 모든 슬픔을 모든 치유의 근원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즉 기도는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원한의 차가운 분노를 녹이게 하고 기쁨이 슬픔을 대신하고 자비가 신랄함을 대신하며, 사랑이 두려움을, 온유함과 관심이 미움과 무관심을 대신하는 공간을 열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도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친밀한 사랑으로 이끄는 예수님의 선교에 참여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은 이 세상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만큼 더 이 세상의 마음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 신비가 모든 선교와 기도의 기초이다. 일단 우리가 모든 짐을 가지고 예수께 와 새로운 힘을 얻으라는 초대를 분명히 들었다면 우리는 기도뿐 아니라 선교에도 가담하게 된다.


선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온 세계에 퍼져 있는 기도의 네트워크가 자신들의 활동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면 힘을 얻을 것이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도가 온 세계에 걸쳐 있는 선교의 네트워크 속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얻을 것이다.


-헨리 나우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