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숙의 글밭498

진수성찬, 내게 그것은 정성스런 손길로 잘 차려진 진수성찬 앞에서 이 몸 낱낱이 전율한다 화면에서 육해공 전쟁터를 보았을 때처럼 마지막 숨이 고통이었을지도 모르는 산과 바다에서 평화를 꿈꾸던 나의 전생들 다른 생명을 잡아먹어야  이 몸이 살리라는  끈질긴 이 생의 저주 앞에 주저앉았던 나의 스무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는 시인의 그 마음 하나 별빛처럼 가슴에 품고서 숨막히던 어둠과 혼돈을 아름다운 밤하늘로 활짝 펼쳐놓을 수 있었지 옆방에는 통닭을 맛있게 먹고 있는  사랑하는 식구들이 있고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으로 조율하는 나의 고요한 방에서 나는 오늘도 한 점 한 점 평화의 숨으로 태초에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음식을 탐구할 뿐 2024. 10. 22.
화엄경은 바흐와 함께 일과 중 한 시간 불교서적 읽기 내 방 책장 고요한 숨을 쉬는 늘 동경하는 보물 같은 벗과 스승들 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듯 진리의 지도를 더듬어 보는, 여기는 일상의 시간이 멈춘  시간 너머의 시간 눈이 가는 대로 손이 가는 대로 성철 스님의 산을 몇 고비 넘긴 후 법정 스님의 물을 건너가는 순례길 화엄경 화엄의 바다 "너거 엄마는 책 사는데 밖에 돈 안 쓰제?" 수년 전 내 곁에 선 딸아이가 들었던  보수동 책방 골목에 울리던  범종 소리 십여 권이 넘는 법정 스님의 책값을  부르시는 대로 치른 후 책탑을 품에 안고서 좋아서 감추지 못한 환희용약 탄로 난  나의 본래면목 그런데 무엇에 빗장이 걸려 있었을까 그동안 열지 못한 화엄의 문 오랜 숙제를 일과로 가져온 일 법정 스님의 긴 호흡에 익숙치 않은 이.. 2024. 9. 19.
한 잎의 가을 어김 없이  오늘 해가 뜨고 쉼 없이  지금 바람이 불고 멈춤 없이 낮은 데로 물이 흐르는  이 가을날 무량수 무량광 하늘 하나님을 뚝! 떼어놓고 설명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여태껏  하나도 찾지 못하였는데 해는 어김이 없고 바람은 쉼이 없고 물은 멈춤이 없어서 없으신 듯 성실하신 하나님 이 가을에도  하늘은 넓고 깊어만 가는데 한 잎의 단풍에  가을이다 2024. 9. 14.
평등한 꽃잎 사과 한 알을 사이좋게 나누려는 손길로 평등하게 나누면 사과는 꽃이 되지 네 잎의 꽃 인의예지 다섯 잎의 꽃 화랑의 세속오계 여섯 잎의 꽃 육바라밀 일곱 잎의 꽃 천지창조 안식일 여덟 잎의 꽃 팔정도와 마태 팔복과  대한민국 팔도에서 살짝 떨군  독도 한 조각까지 중용, 중도, 성령, 양심, 진리, 사랑이라 달리 부르는 평등한 꽃잎 날마다 우리집 밥상에서는 둥근 사과가 동그란 접시 위에서 참되고 바르게 화알짝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지 2024. 9. 7.
삶은 감자가 들려주는 오늘도 고마운 하루를 주시는 흰구름 더불어 푸른 하늘이  푹푹 익어가는 여름날 마트 진열대에 투박한 손글씨로  1키로 2,980원  떨어진 감자값에  순간의 반가움 너머로  한 생각  바람 한 줄기 흙밭에서 떨구던 땀방울 채 마르기도 전에 짠 눈물에 시려 더운 한숨 짓지는 않았을까 산골에 사는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산다던  윤동주 시인의 한 줄 글에  찌는 가슴으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감자는 밥도 된다는데 문득 스친 거울 속 내 얼굴에도 삶은 감자 같은 무상심심 미묘한 빛 어릴까 새벽예불과 일과를 다하고 나서던 아침 양팔 활짝 핀 꽃처럼 나를 부르시며 안으로 들어오라시며 반기시던 시봉 스님 한 분에겐 떠나는 순간 한 분에겐 새로 온 순간 삶은 감자 껍질 같은 수행자의 옷자락 그 스침에  없던 내가.. 2024. 9. 3.
씻은 손 씻은 손 합장하여 하나 둘 셋  물방울 떨구어 종이수건에도 닦지 말고 잠시 그대로 두고 물기가 어디로 가는고 없는 듯 있으면 바람이 말려주고 손이 스스로 손을 말린다 닦지 않아도 닦을 게 없다 2024. 5. 27.
너의 단점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너에게서  보이는 너의 단점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내 안에  없는 것은 티끌 하나도  비추어 보일 수 없다는  거울처럼 선명한 이치를 문득 눈치챈 찰라부터 널뛰던 나의 불평은 멈추고 세상의 모든 빛은 나를 향할 뿐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눈을 감으면 눈앞의 부처도 볼 수 없고 내가 귀를 닫으면 예수의 복음도 들을 수 없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2024. 4. 30.
약단밤 빨간 신호등에  차를 멈추면 창문을 내리고 무조건 내미는 손 손바닥만한 흰 종이 봉투를 열면 무분별지가 하얗게 열린다 다 맛있다 늘 맛있다 배가 고프면  내가 먹고 배가 부르면 가장 먼저 만나는 이에게 주고 곱씹은 약단밤을 삼키며 오로지 한 생각 뿐 가지산 너머로 해가 지기 전에 약단밤들 모두 다 따뜻한 손으로  순한 날의 태화강물처럼  흐르고 흘러 평화의 동해바다로 차도 사람의 발길도 닿지 않으나  모든 생명에게 안전한 그 빈 땅에  멈추어 선  오토바이 한 대 봄날인가 했더니 어느덧 여름인 4월 말 계절을 잊고 웃음 짓는  민들레 한 송이 꽃대 같은 아저씨  그 손에서 피어난 약단밤이 달디 달다 2024. 4. 29.
기도비 출입문 구석에 놓인 작은 접이식 탁자 위에는 기도비 삼만 원 종이접기로 만든 돈봉투가 있고 명단을 적는 출석부가 있고 그런데 사람이 없다 기도비를 받는 사람도 없고 돈봉투를 지키는 사람도 없다 각자의 기도비를 종이 돈봉투에 넣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적을 뿐 겨울 밤하늘이 까맣도록 새벽녘 별빛이 또록해지도록 접었던 두 다리를 폈다가 다시 접는 철야정진 법당 안엔 백여 명이 훌쩍 넘는 대중의 독경소리 침묵 간간히 꽃피는 웃음소리 뿐 기도비는 저 혼자서 밤새 제 청정 도량을 지킨다 이제 산등성이 너머 동녘 하늘이 밝아오는데 어제 치운 눈길 위로 또 쌓이기 시작하는 하얀 눈 새벽 예불 길에 싸리 빗자루를 제 몸인 듯 놀리며 눈을 치우는 사람은 있는데 밤새 수북이 쌓인 기도비를 치우는 사람 아무도 없네 기도비는 .. 2024.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