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신동숙의 글밭(287)


엄마와 목욕, 공정 거래



이른 아침 목욕탕에서 나오면 머리카락에 얼음이 꽁꽁 얼었습니다. 언제가부터 목욕탕에 헤어 드라이기가 생긴 것은 훨씬 뒷일입니다. 그 옛날엔 1~2주에 한 번 일요일 새벽이면, 참새처럼 목욕탕에 가는 일이 엄마와 딸의 월례 행사가 되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목욕탕 굴뚝의 하얀 연기가 펄럭이는 깃발처럼, 우람한 나무처럼 새벽 하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졸린 두 눈을 뜨기도, 작은 몸을 일으키기도 제겐 힘에 겨웠던 일요일 새벽,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는 일보다 더 싫었던 건 목욕탕 입구에서 엄마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았던 저는 여러 해 동안 목욕탕 입구에서 만큼은 일곱 살입니다. 엄마가 제 나이를 한두 살 깎으면 목욕탕 주인은 일이백원을 깎아주었습니다. 


지금 같아선 어림도 없는 거짓말이지만, 그때는 엄마의 말씀을 거역할 생각도 못했을 뿐더러, 목욕탕 입구에만 서면 제 몸과 마음은 꽁꽁 얼음 눈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딸이 얼음이 된 줄 엄마는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외면한 채 엄마의 일념은 오로지 어린 딸의 몸에서 때를 벗겨내는 일이었습니다. 


비누칠을 한 후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턱 밑까지 푹 몸을 담그고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샘솟는 제 인내심의 원천인지도 모릅니다. 왠만큼 때를 불렸다 싶으면, 엄마와 나란히 앉은 저에게도 이태리 타올을 주십니다. 조막만한 손을 이태리 타올에 넣고서 트실한 왼손부터 때를 밀면 돌돌돌 때가 말려서 나오는 모습을 보시고서야 엄마의 얼굴엔 푸른 새순이 돋습니다. 


그렇게 딸아이의 팔과 다리에서 때가 툭툭툭 떨어지는 걸 보시고서야, 엄마는 때를 미시다 말고 손에 끼고 계시던 이태리 타올을 세숫대야에 툭 던지시곤, 이때다 싶으셨는지 벌떡 몸을 일으키셔서, 제 등과 어깨와 뒷목과 팔과 다리와 온 몸을, 겨울 미역을 빨듯이 빨래를 하듯이 신나게 미셨습니다.


엄마는 제 얼굴과 손바닥, 발바닥까지 그 이태리 타올 하나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 일이 끝나면, 엄마는 어린 딸에게 등을 밀어 달라며 등을 내미셨습니다. "조금 더 세게 밀어라." 하는 말씀에 두 손에는 더 힘을 주어 체중까지 실어서 밀면 그제서야, "어, 시원하다." 하시고, 그렇게 등에서부터 시작해서 어깨와 팔과 허리까지 밀어 드릴려고 하면, 엄마는 몸을 벌떡 일으키시며, "거기는 손이 가니까 놔둬라." 하십니다. 


엄마가 제 몸을 다 씻겨 주신 것처럼, 저도 조금씩 몸이 자라면서 가끔은 엄마의 팔과 다리까지 밀어 드릴려고 들면, 못 이기는 척 몸을 맡기시다가도 이내 엄마는 놔둬라 하시며, 금세 몸을 돌리곤 하셨습니다. 엄마와의 때밀기는 언제나 불공정 거래였습니다. 



지나간 일요일 저녁 때만 해도, 다음날 아침에 있을 토마스 머튼 강론 수업 때마다 늘 지각생이라는 제 말에 엄마는 순댓국을 드시다 말고, 설거지 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어김없이 혼자 나서신 새벽 산책길에 사정없이 뒤로 쿵 넘어지셨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은 후로는, 모든 일상 생활에도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머튼 신부님의 관상의 기도와 예수님의 사랑의 빛이 더욱 비추어야 할 땅으로, 이제껏 가장 그늘진 곳 엄마에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워 계실 병실창문으로도 이제 머지않아 아침해가 밝아올 테지요. 


늘 새벽 목욕을 가시던 엄마, 깨끗하고 맑은 새벽 목욕탕이 아니곤 몸을 담그지 않으시려던 엄마, 이제는 어린 날의 저처럼, 딸에게 몸을 다 맡기시는 엄마가 두 번째 목욕을 하기로 한 날입니다. 이제는 딸보다 몸집이 더 작으신 엄마의 몸은 배만 커다랗지 팔다리는 삐쩍 마른 제 어릴 적 몸 같습니다. 


이제는 겨울에 목욕을 해도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얼지 않는 참 좋은 시절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뜨거운 온탕에 몸을 푹 담그길 좋아하시는 엄마를 위해선 오후의 햇살이 언제나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음에 얼룩으로 남아 있는, 목욕탕 입구 엄마의 거짓말처럼 저도 엄마의 나이를 깎아봅니다. 세월에 쌓인 이자 만큼 한두 살이 아닌 열 살, 스무 살도 더 넘게 깎아 내려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의 몸이 영 살이 될 때까지 언제나 그 빛을 거두지 않으시는 햇살처럼 그렇게.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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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방

신동숙의 글밭(286)


할머니들의 방



어제 밭에서 뽑은 노란 알배추 속 서너 장, 늦가을엔 귀한 상추 두 장, 푸릇한 아삭 오이 고추 한 개, 빨간 대추 방울 토마토 두 알, 주황 귤 한 알이 침대 사이를 오고가는 할머니들의 방은 콩 한 쪽도 서로 나누어 먹는 방입니다. 


아침이면 작은 보온 국통에 오늘은 무슨 따끈한 국물을 담아 갈까 하고 궁리를 합니다. 옛날 학창 시절에 부모님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뼈가 잘 붙으려면 사골국이 좋다 하시며 구포장에서 버스를 타고 장을 보아 오시던 아버지 생각도 납니다. 


넘어지시기 전날, 아이들이 국물만 먹고 남긴 순대국을 맛있게 드시던 엄마 모습이 힌트를 줍니다. 냉동실에 마저 한 팩 남은 순대국을 따끈하게 데워서 보온 국통에 담습니다. 평소보다 열 배 저속으로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신 엄마가 침대에 앉아서 순대국을 드십니다. 뭐든 쉬엄쉬엄 천천히 드시고 천천히 다니시고 천천히 하시라는 딸의 잔소리가 당분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국물은, 불국사의 애기 단풍이 붉던 날, 맑은 벗님과 맛있게 먹었던 맑은 아구탕이 생각납니다. 남해 작은 어촌 마을에서 태어난 엄마는 탕국과 비빔밥도 하얗게 드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한 사발 덜어 놓고, 식구들이 저녁과 아침으로 먹었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잔가시도 다 발라낸 후 따끈하게 데운 아구탕으로 보온 국통을 채웁니다. 곁들여 엄마의 입맛을 돋구는 음식은,  팔만 뻗으면 닿는 옆 침대 밀양 할머니가 건네주신 알배추를 전어 젖갈 쌈장에 찍어 먹는 맛입니다. 


엄마네 냉장고와 우리집 냉장고에도 한 봉지씩 있는 늦가을 배추가 지나가는 동네 마트 앞에 널려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보니, 김장철입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서도 김치를 담궈야 하는데 하십니다. 김치라면 물김치, 묵은지, 총각 김치, 돌아서면 담궈 둔 김치들이 이미 냉장고마다 가득합니다. 


저녁 나절 돌아오는 집 앞에서 짧은 인사를 드렸더니, 대문 앞 공터에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시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손수 농사 지으신 배추 한 통을 돌담으로 무겁게 넘겨 주시며 맛이라도 보라고 하십니다. 




    ( 그림 : < 할머니 혼자 사는 집>, 황간역의 강병규 화가 )


하늘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강변 가로수의 나뭇잎들도 다 떨어진 초겨울이지만, 땅에는 여기저기 푸릇한 배추가 풍성합니다. 이 많은 배추들로 무슨 음식을 할까 싶어 궁리를 하였습니다. 눈으로만 보고 귀로만 들은 적이 있는 딸아이가 좋아하는 샤브 국물처럼 야채가 많은 밀푀유나베가 집에 있는 재료에 두어 가지만 더 준비하면 간단히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그릇 덜어 두고 저녁밥으로 차려주니 아이들이 기뻐합니다. 딸아이는 "어, 사 먹는 그 맛이랑 똑같아."며 좋아합니다. 다음날 토요일 아침부터 아들이 어제랑 똑같이 또 해달라는 말에 이른 아침부터 남편은 깻잎과 소고기 심부름을 다녀옵니다. 


가을 배추와 깻잎과 버섯과 고기가 겹겹이 푹 익은 구수한 국물을 시원하게 드시는 엄마가 고맙습니다. 말끔히 다 비운 보온통은 점심으로 나온 미역국으로 채웁니다. 엄마는 마당에 있는 복순이를 주려고 챙겨 두신 찬밥이 저기 있다며 손가락으로 가리키십니다. 옆에서 들으시고는 맞은 편 할머니의 간병인 아주머니께서 냉동실에 넣어둔 찬밥 덩이를 꺼내 챙겨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밥을 좋아하는 우리 복순이와 탄이가 한 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 밥덩이가 많이 모였습니다. 수술 후 금식을 하느라 드시지 못한 밥, 가족들이 싸온 음식을 먼저 잡수시느라 드시지 못한 밥, 끼니 때면 꼬박꼬박 나오는 밥이 많아서 덜어둔 밥덩이들이 겨울 눈처럼 쌓여 가는 할머니들 방의 냉동실, 이제는 점점 겨울로 접어 드는지 불어오는 강바람이 제법 쌀쌀한 초겨울 아침입니다.


엄마의 등뼈 하나가 금이 가듯 곱게 부러져 그 자리에 그 모양 그대로 있어서 따로 손을 쓰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였습니다. 많이 누워 계시면서도 끼니 때면 침대에 앉아서 식사를 드신 후 한 시간 정도 화장실도 다녀오시고 아주 천천히 걸으시면서 소화를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병실 복도끝 창문으로 들어오는 정오의 햇살이 반갑습니다.


엄마는 등이 가렵다며 봐 달라 하십니다. 햇살이 가득한 창으로 등을 대고 돌아서서 옷을 돌돌 말아 올려서 등을 내 드리니, 엄마는 그 옛날 푸른 멍이 든 아빠의 등 이야기를 또 꺼내십니다. 로션을 가져와서 발라 드리니 참 좋아하십니다. 뼈를 생성하는 비타민 D는 이 지구상에 음식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햇살 밖엔 없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해드리니 창문 앞에서 꼼짝도 안하시며, "아! 참 좋다. 뼈가 다 붙겠다." 하십니다.


방에 계신 할머니들 생각이 납니다. 잘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마루를 내려오다가 그만 옆으로 넘어져 넙적 다리뼈가 부러져 수술 후 누워 계신 밀양 할머니, 발목뼈 수술 후 조금씩 스스로 걸으시는 할머니, 담석증 수술로 금식 후 그토록 원하시던 삼계탕을 맛있게 드시곤 배탈이 나서 오늘은 흰죽을 드셔야 하는 할머니, 혼자 있어야 하는 집에는 가기 싫고 여기에 계속 있으면 좋겠다 하시며, 가끔 어린 아이가 되기도 하시는 할머니, 아침해가 넘어간 방에 계신 할머니들이 생각납니다. 


이 겨울날 창 안으로 가득 들어오는 햇살의 은총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노란 알배추 속 한 장도 서로 나누어 먹으려는 할머니들의 마음이 이 공평한 햇살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따스한 마음이 이 겨울날 저녁 어둑해진 우리집 마당에 있는 복순이와 탄이에게도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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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신동숙의 글밭(285)


엄마의 집, 종량제 봉투




앞으로 2주 동안 

엄마의 집은 빈 집입니다.

냄비에 남은 찌게를 버릴까 하다가 냉장고로 보냅니다.


수저 한 벌, 밥그릇 하나, 작은 반찬 접시

아침 밥그릇이 담긴 설거지통을 비웁니다.


엄마가 여러 날 동안 

우겨 담으셨을 종량제 봉투에

화장실 쓰레기통 휴지까지 마저 눌러 담습니다.


그러고 보니 

몇 해를 지내오면서도

엄마의 아파트 종량제 봉투 버리는 데를 모릅니다.


문을 나서며 처음 마주친 아주머니께 여쭈니

"앞쪽에 버려도 되고, 뒷쪽에 버려도 되는데,

이왕이면 가까운 뒷쪽에 가세요." 하십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뒤로 하며 뒷쪽으로 가니

태우는 쓰레기통, 안 태우는 쓰레기통이 나란히 두 개


태우는 쓰레기통 손잡이를 위로 당기니 열리지 않아서 아파트는 쓰레기통도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되나 싶어서

쓰레기통 주위를 사방으로 살피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좀 전에 아주머니가 

저 멀리서 내 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두 팔을 번쩍 들어 보이시며

힘차게 하늘을 밀어올리십니다.


내가 쓴 힘이 약했구나 싶어서

태우는 쓰레기통 뚜껑을 힘껏 

하늘로 밀어올리니

커다란 뚜껑이 머리 위로 활짝 열립니다.


종량제 봉투가 무사히

툭 바닥에 닿는 걸 확인하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돌아서며

한 번 더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 찾으니

아주머니의 모습이 아무래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내어주기만 하시고 

받을 줄 모르시는 울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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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주신 땅에게

신동숙의 글밭(284)


키워주신 땅에게




키워주신 땅에게 얼만큼 고맙냐구요? 마지막 잎새까지 떨구어, 다 주고도 모자랄 만큼 고맙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잎새까지 다 내어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춥고 시린 마음보다는 저 잎들의 초연함 앞에 이제는 가슴 뭉클한 뜨거움이 올라옵니다. 


땅으로 돌아가는 가을잎들이 왜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빛깔의 옷들로 갈아입었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헤아리다 보면, 여전히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추운 늦가을 밤에도 가슴이 따스하게 환해져옵니다.


때를 따라서 돌아가는 가을잎의 발걸음을 괜스레 재촉하고 있는 가을비와 가을 바람이 마냥 야속하기보다는, 이제는 길벗이 되었다가 재잘거리며 속을 나누는 도반인지도 모릅니다.


가을 바람이 아무리 차가워도, 황금빛 햇살을 걸쳐 입은 나목이 조금은 쓸쓸해 보여도, 수도승처럼 홀가분한 그 모습이 내심 부럽기도 합니다. 


키워주신 땅으로 돌아가는 가을잎들의 발걸음이 마치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는 마른풀들의 행진처럼, 불어오는 가을 바람을 따라서 경쾌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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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신동숙의 글밭(283)


가을 달빛을 닮은 눈길로



며칠 동안 간간히 가을비가 내리더니,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어둑한 밤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던 가로수의 노란 은행잎이 이제는 땅 위에 수북합니다. 그 노란 은행잎 융단을 밟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일으키는 작은 파동이 가을바람의 빗자루질 같습니다.


지난 시월의 어느날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철야 참선을 마친 후 일찍 나서던 길에, 잠시 보았던 스님들의 분주한 빗자루질 풍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단풍이 아름다운 날 느즈막히 길을 나설 때면, 말끔하게 쓸어놓은 공원 산책길과 훤한 절 마당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어쩌다가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고는, 가을 소식인가 싶어 반가운 마음에 줍기도 하고, 곁에 선 나무 아래로 돌려보내주기도 하던 적이 지금은 옛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는 덤덤히 낙엽을 밟으며 길을 걸어도, 바라보는 눈길 만큼은 가을햇살처럼, 어려운 시기를 함께 지나온 한 해 동안의 고마운 마음을 담은, 따뜻한 시선을 땅에서 끝까지 거두지 않으리라는 한 마음을 내어봅니다. 


그리고 점점 드러나는 빈 나뭇가지를 바라보면서, 그 앙상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어디에다 제 푸른 마음을 두어야 할 지, 마음이 가을바람처럼 제자리를 찾으려 맴돕니다.


이제는 떠날 채비를 다 끝내가는 이 가을과 어떻게 작별 인사를 나누어야 할 지, 비우고 털어낸 앙상한 가지를 볼 때면 허전한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 지, 그럴 수록 빈 하늘을 더 자주 바라보게 되는 11월의 끝자락에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비우고 털어내고 있는 이 가을날, 이른 새벽부터 가로수길과 공원 산책길과 절 마당을 쓰는 사람들의 수고롭고 고마운 손길을 생각합니다. 낙엽을 쓸어놓으면 또 금새 땅을 뒤덮으려는 11월의 가을잎들과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는 마음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사는 집에도 일찌기 마당에 가지치기를 끝낸 터라 친정 엄마는 올 가을엔 빗자루질을 안해서 좋다며 홀가분해 하시는데, 그런 마음은 아닌지.


법정 스님은 마당에 떨어지는 낙엽을 일부러 때마다 쓸지 않으시고, 마당에 떨어진 모습 그대로 오래 두고 보기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스님의 그 넉넉하고 고즈넉한 마음이 어둔밤 마당에 내려앉는 가을 달빛을 닮았습니다. 그럴 때면, 함께 생각나는 한시가 있습니다.


竹影掃階塵不動 죽영소계진부동

月輪穿沼水無痕 월륜천소수무흔


대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하나 일지 않고

달빛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 없네


(金剛經五家解 금강경오가해)


떠나는 이 가을날, 떨군 잎들과 빈 가지와 빈 하늘을 바라보는 눈길에도, 온 땅을 덮어주는 낙엽들의 넉넉한 마음이 깃들기를. 


땅에 뒹구는 잎들에 난 구멍과 찢긴 상처를 보며 제 허물과 상처를 본 듯 바라보기를. 때론 그 모습이 마치 주어진 생을 살아오느라 무릎과 허리가 성할 날 없이 견디어낸, 몸이 부서져라 애쓴 정직함과 제 몸을 내어주고 욕심을 비우느라 구멍 뚫린 가슴의 진실함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이 가을날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는 눈길이 따스히 은은하게 비추는 온유한 가을 달빛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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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한 하늘

신동숙의 글밭(282)


충만한 하늘





빈 하늘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기에

아침마다 이렇게 환하게 밝아오는지


태양이 비추는 우주 공간은

언제나 어둠인 채로 아침이 오지 않습니다.


들숨으로 들으킨 하늘이

뼈와 피와 살이 되는 신비로움


몸이 하늘에 공명하여

울리면 노래가 되고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를 따라서

몸짓은 춤이 되기도 합니다.


비로소 잎들을 다 털어낸 빈 가지를 

하늘이 고이 품에 안고서 이 겨울을 지나며


겨울 바람이 웅웅 자장가를 불러주는 겨울밤은

촛불 하나만 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긴긴밤


황금빛 햇살을 걸쳐 입은 빈 가지마다

새 움을 틔우는 이 충만한 하늘의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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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신동숙의 글밭(281)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세상엔 매듭 짓지 못하고, 풀리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작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하루도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게 할 뿐입니다.


유약(柔弱)한 가슴에 어떠한 원망이나 분노의 씨앗도 뿌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가 내 살과 뼈를 녹이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려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품고서도, 몸을 움직이며 그럭저럭 일상을 살아갈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멈추어 바라본 순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분노를 제 가슴에 품고서 새벽 기도를 드리던 고요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엄습하던 온몸의 느낌을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몸이 멈춘 그 순간에 분노 속의 기도란, 내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마치 핵분열을 일으키는 발열체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 폭발할 듯한 열이 제 몸의 세포를 녹이고, 파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른 기도를 멈추었던 자각의 순간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그 후로 저에게 분노란 씨앗이 되지 못하도록 하는, 하지만 가끔은 무기력한 스스로를 끓어올릴 화력으로 전환하여 사용하기도 하는 장작불 에너지원이 되기도 합니다. 평소 게을러서 하지 못하던 일을 그 화력을 사용해서 움직이게 할 뿐, 그 화력이 나와 타인에게로 무심코 흐르게 방치하지 않도록 깨어 있으려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싸움과 갈등은 늘상 흐르는 강물의 한 줄기가 되어 우리의 일상 가운데 유유히 섞이어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게로 오는 방해물 또는 장애물을 애써 지우려거나 막으려 들지 않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일입니다. 저항하지 않으려는 일입니다. 강물의 넉넉한 흐름 속에 섞이어 흐르도록, 단지 깨어서 바라보는 시선의 고요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만든 둑을 세우고 저항하던 힘이 한계 수위를 넘어서고는, 욱하며 터져서 약한 보다 약한 어린 자녀에게로 흘러 가는 경험을 많이도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끝이 없습니다. 단지 방해물과 장애물이란 끊이지 않는 호흡처럼 평생토록, 흐르는 강물 속에 섞이어 흐르는 하나의 물줄기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로 선택을 하는 일은 저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의 영역입니다. 불교에선 이번 생을 살아가는 동안 풀어야 할 업장이 될 테고, 기독교에선 제 몫의 십자가가 될 테지요. 



감사하게도 저에겐 가슴에 품은 맑은 샘이 있습니다. 예수. 그곳으로부터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 나와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눈물로, 기쁨으로, 감사와 감격의 모습으로 샘솟아 나를 적시우고, 흘러 넘쳐서 물길을 내어 세상 밖으로 흐르도록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흐름이 작은 생명을 살리우는 물길이 되기를 소망하는 일. 유약한 저 자신이 스스로 저항하며, 버티려는 제 힘만으로는 이 한 몸이 숨을 쉬기도 버겁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알아차리게 됩니다. 저항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더불어 함께 흐르게 하는 편이 한결 마음을 더 넉넉하게 하고, 나와 우리와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살리우는 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마음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탁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샘솟는 샘물을 가슴에 품지 못함일 테지요. 가슴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이 끊임없이 흘러 넘쳐서 흐를 수 있다면, 한 줄기의 장애물과 한 줄기의 혼탁함도 넉넉히 품어 더불어 흐르는 강물처럼 흐를 수 있을 테지요. 제 가슴에 품은 샘물은, 사랑과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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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신동숙의 글밭(280)


소망은 떨구어 주시는 씨앗


저는 바라고 원하는 기도 앞에 언제나 떨며, 두렵고 머뭇머뭇 조심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장소, 어느 종교, 어느 누가 드리는, 어떠한 형태의 기도라고 해도 기도에는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제가 드린 기도대로 이루어질까 싶어서 기도 앞에 언제나 머뭇거리며 주저하게 되는 마음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특정 종교 생활에 꾸준히 성실히 몸 담을 수 있는 배경이 되는 뒷심은, 기도의 힘을 맛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주위에 여러 종교인들의 얘기를 통해 종종 듣게 되면서 그러리라 짐작해봅니다.


하지만 그 기도란 우리네 어머니들이 장독 위에 정안수를 떠 놓으시고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홀로 두 손으로 빌던 소박한 기도가 예배당에서 드리는 새벽 기도와 다르지 않다는 점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주의 하늘은 이미 모든 생명에게 두루 공평하게 열린 하늘입니다. 기도란 장소와 형식보다는 마음의 간절함에 달린 영역입니다.


물론 혼자서 태우는 한 개비의 장작불보다는 함께 여럿이 어울려 태우는 모닥불이 아울러 받게 되는 커다란 상생의 힘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 역시도 새벽이면 예배당이나 성당 또는 조용한 사찰이나 안전한 숲을 찾아서, 제 자신이 한 그루 나무가 되어 고요히 말없이 앉아 있고픈 적적한 마음이 늘 하늘 같습니다.


바라고 원하는 기도 앞에 떨며, 스스로가 머뭇머뭇 주저하며 스르르 내려놓다 보면 어느덧 제게 있어 기도란, 그저 머물러 앉아 있는 고요한 시간으로 흐를 뿐입니다. 시간을 잊은 그곳은 생산성과 효율성과 경제성이라는 현대인에게 익숙한 논리와 가치는 발붙일 수 없는 성역이 됩니다. 


저의 이런 한 생각은 이십대 초반부터 생긴, 미리 짐작해 볼 수 있는 기도의 힘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서, 늘 머뭇머뭇 엉성하게나마 흘러오는 내면의 풍경입니다. 




만약에 기도의 자리든 마음 한 구석에라도, 나의 요구와 필요를 채우려는 육신의 안일과 분노와 탐욕과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운 무거운 기도를 잔뜩 입으로 꺼내었거나 설령 마음에 품었다가, 그것이 나중에 어느날 현실이 되고 난 후의 뒷일을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그때 가서 '이게 아닌데!' 하는, 그제서야 온전치 못한 바램을 저 혼자서 원을 세워 집중해서 살아오느라 아까운 인생을 낭비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온다면, 얼마나 애석할까 싶은 그런 마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도의 힘에 대한 믿음이, 주신 씨앗처럼 제 가슴에 떨어지고부터는, 기도란 부족한 제 자신을 채우려는 원하고 바라는 기도가 아닌, 보다 바르고 온전한 기도를 찾아야겠다는 구도의 길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루어진 후에도 후회의 얼룩을 덜 남기도록.


바르고 온전한 소망의 기도를 찾기 위해선 바르고 온전한 법, 곧 진리를 바라보며 따르는 구도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한 마음을 먹는 일에 있어서도 조심스러움과 한 생각을 일으키는 일에 있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을 낳는 것은 씨앗같은 한 마음과 한 생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걸어온 진리를 찾는 여정이란, 더욱 더 부족한 제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바를 날숨마다 지우고 또 지우는 길이었음을 어렴풋이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의 제 자신이 그 구도의 선상에 있는지 스스로를 거듭 호흡처럼 감찰하며 되돌아보는 일이 어느덧 버릇이 되었습니다. 


내면의 땅을 고르고 넓히는 일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지난한 작업을 해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을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양심이 가리키는 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원하거나 바라지 않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기도가 소망이 없는 허망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망의 의미가 보다 더 온전해지는 일입니다. 모자란 나의 소망이 아닌 보다 온전한 진리의 소망에 더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기도란 나를 내어맡기는 시간이 됩니다. 모자라고 틀어진 나를 온전한 품에 안기우듯 맡기는, 위로와 치유와 안식을 누리는 고요함과 침묵 속에서 비로소 내면이 충만한 사랑방이 바로 기도의 자리가 됩니다.


척박한 자갈밭 같은 나의 아집과 나의 욕심과 나의 의지를 내려놓고 비운 빈 마음밭에 눈물로 비를 뿌리다 보면, 어느날 문득 떨구어 주시는 씨앗 한 알이 바로 진리의 성령이 떨구어 주시는 소망이 아닌가 하고요. 성경에서도 언제나 우리에게 소망의 씨앗 주시기를 원하나, 문제를 삼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마음밭입니다.


그렇게 받은 온전한 소망의 씨앗이란, 처음엔 미세하지만 분명하여서 세월의 흐름 속에 믿음의 싹이 트고, 진리의 땅에 더욱 뿌리를 내리며,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바람에 꺾이거나 매 순간 흔들린다 하여도 해맑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삶으로 꽃 피울 수 있는 참된 소망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처럼 온전한 진리의 영이 떨구어 주신 진리의 온전한 소망이란, 애써 욕심껏 채우려는 모자란 나의 욕망이 아님을, 날숨을 따라서 나를 비우고 내려놓으려는 고요함 속에,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표현한 갈망의 침묵으로 그저 머물러 앉아 날숨마다 나를 비운 빈 마음밭에, 진리의 성령이 떨구어 주고 가시는 씨앗 한 알이 참된 소망이 아닌가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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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그릇

신동숙의 글밭(279)


하늘 그릇




그릇에 담긴 물을 비우자마자

얼른 들어차는 하늘처럼


나를 채우려는 이 공허감과 무력감은

얼른 들어차려는 하늘의 숨인가요?


나를 비우고 덜어낸 

모자람과 패인 상처와 어둔 골짜기마다


하늘로 채우기를 원합니다.

나의 몸은 하늘 그릇입니다.


더 가지려는 한 마음이 

나의 모자람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남을 헐뜯으려는 한 마음이 

나의 패인 상처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시고


높이 오르려는 한 마음이 

나의 어둔 골짜기인 줄 

하늘에 비추어 알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를 채우려는 이 없음이

없는 듯 계시는 하느님인 줄 스스로 알게 하소서.


나의 몸은 하늘을 담는 

하늘 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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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신동숙의 글밭(278)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샘물




글을 다 쓴 후

자꾸만 손이 갑니다

열 번도 가고 백 번도 가는 일


바르게 고치고 또 고치고

부드럽게 다듬고 또 다듬으며 

글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는 쉼 없는 일


문득 이 세상에서 

일필휘지가 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사색으로 흐릅니다


한 순간 떨군 눈물 한 방울

한 순간 터트린 웃음 한 다발

풍류 장단에 춤추는 민살풀이


우리들 모든 가슴마다

이미 공평하게 있는 샘물이 샘솟아 올라 

순간이 영원이 되는 일


본래 마음이 휘 불면

일필휘지(一筆揮之)

아니할 도리가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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