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주름들

한희철의 얘기마을(91)


깊은 주름들



“아무데구 자리 좀 알아봐 조유. 당체 농산 못 짓겠어유. 남의 땅 부쳐봐야 빚만 느니.”


해 어스름, 집으로 돌아가던 작실 아저씨 한 분이 교회 마당으로 올라와 ‘취직’ 부탁을 한다. 올해 58세. 허드렛일을 하는 잡부라도 좋으니 아무 자리나 알아봐 달란다.


힘껏 빨아 무는 담배 불빛에

어둠 속 각인되듯 드러나는 깊은 주름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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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발 못 떼는

한희철의 얘기마을(90)


한참을 발 못 떼는


“작년에는 수해 당했다구, 얘들 학비도 줄여주구 하더니, 올핸 그런 것두 없네유. 여기저기 당해선가 봐유.”


“하기사 집까지 떠내려 보내구 이적지 천막에서 사는 이도 있으니, 그런데 비한다면 우리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작년에도 그러더니 올해도 망하니까 사실 힘이 하나도 읍네유.”


“강가 1500평 밭에 무수(무)와 당근이 파란 게 여간 잘된 게 아니었어유. 그런데 하나도 남은 게 없으니. 지금 봐선 내년에도 못해먹을 거 같아유.”



집에 다녀가는 출가한 딸과 손주를 배웅하러 정류장에 나온 한 아주머니가 물난리 뒷소식을 묻자 장탄식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입술이 부르텄다. 


가끔씩이라도 고향을 찾는 자식들.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는 양식이나 마련하고 나머진 자식들에게 먹거리, 양념거리 전하는 게 그나마 외로이 사는 맛인데, 그게 부모 도리일 텐데 갈수록 그 일도 쉽지 않다.


떠난 버스 바라보며 한참을 발 못 떼는 반백의 아주머니.


 -<얘기마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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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 된 믿음이

한희철의 얘기마을(89)


나중 된 믿음이



수요 저녁예배 후, 캄캄한 작실까지 올라가야 하는 할머니가 안쓰럽습니다. 


작실에서 아무도 안 내려와 혼자 가시게 된 것입니다. 


“어떡하죠?” 


걱정스럽게 말하자


“괜찮아유. 성경책 꼭 끌어안구 가면 맘이 환한 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유.”


나중 된 믿음이 먼저 된 믿음을 밝힙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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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힘

한희철의 얘기마을(88)


붙잡힘




체념을 다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뿐인지도 모른다고, 

농촌목회의 의미를 묻던 한 선배에게 대답을 했다.


불쑥 내뱉은 말을 다시 수긍하게 되는 건 쌓인 생각 때문이었을까.

답답하구, 

괴롭구, 

끝내 송구스러워지는 삶,

이렇게 가는 젊음의 한 시절.

무엇일까, 


이 붙잡힘이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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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저녁

한희철의 얘기마을(87)


혼자만의 저녁



동네서 가장 먼 집 출장소를 지나 

외따로 떨어진

끝정자 맨 끝집, 

완태네 집

저녁녘 완태가 나와 우두커니 턱 괴고 앉았다.


잘 그려지지 않는 꿈을 그리는 것일까.

모두 떠나간 형들을 생각할까.


언제 보아도 꾸벅 인사 잘하는 6학년 완태.

흐르는 강물 따라 땅거미 밀려드는

완태가 맞는 혼자만의 저녁.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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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풀에 쓰러지는

한희철의 얘기마을(86)


제풀에 쓰러지는



아침 잠결에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밤새 내린 비, 뜨끔했다.

설마 예배당, 아니면 놀이방, 그것도 아니면 화장실, 놀라 달려 나갔을 때 무너져 내린 것은 교회 앞 김 집사님네 담배건조실이었다.


지난번 여름 장마에 한쪽 벽이 헐리고 몇 군데 굵은 금이 갔던 담배창고가 드디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제법 높다란 높이, 길 쪽으로 쓰러져도 집 쪽으로 쓰러져도 걱정이었는데 사방에서 힘을 모아 주저앉힌 듯 마당 쪽으로 무너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문 벽을 쳐서 헛간 한쪽이 주저앉았을 뿐이었다.


그칠 줄 모르는 빗속에서 동네 남자들이 모여 주저앉은 헛간을 일으켜 세웠다. 몇 곳 버팀목을 괴고 못질을 했다. 담배 창고로 끌어간, 흙더미 속에 묻힌 전깃줄도 잘라낸 뒤 테이프로 감았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하나 둘 제 풀에 쓰러지는 담배 건조실.

제풀에 쓰러지는 것들이 어디 담배 건조실뿐일까만.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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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첫 열매

한희철의 얘기마을(85)


할머니의 첫 열매



주일낮예배를 드릴 때 제단 위에 덩그마니 수박 한 덩이가 놓여 있었습니다. 수박농사를 지은 분이 없을 텐데 웬일일까, 궁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농사를 지어 추수하면 교우들은 첫 열매를 제단에 드립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요.


예배 후 알아보니 허석분 할머니가 가져오신 것이었습니다. 텃밭에다 몇 포기 심었더니 뒤늦게야 몇 개 달렸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택에 모여 수박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할머니 걱정과는 달리 속도 빨갰고 맛도 여간 단 게 아니었습니다. 노인네가 작실서부터 수박을 가져오느라 얼마나 혼났겠냐며 교우들도 할머니의 정성과 사랑을 고맙게 새겼습니다.


씨는 내가 심었지만 키우기는 하나님이 키우셨다며 첫 열매를 구별하여 드리는 할머니의 정성과 함께 나눠 먹는 수박의 단맛, 빨리 돌아가 해야 할 바쁜 일들도 잊고 한동안 얘기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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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마음

한희철의 얘기마을(84)


나누는 마음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받았다. 그저 심부름만 했을 뿐이라고 인사 받을 때마다 대답했지만 계속되는 인사엔 남이 받아야 할 인사를 내가 대신 받는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했다.


물난리 소식을 들었다며 수원에 있는 벧엘교회(변종경 목사)와 원주중앙교회(함영환 목사)에서 성금을 전해 주었다. 지하 셋방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신혼부부가 드린 결혼반지가 포함된 정성어린 손길이었다. 


어떻게 써야 전해 준 뜻을 살릴 수 있는 것인지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다가 라면을 사기로 했다. 크건 작건 수해 안 본 집이 없는 터에 많이 당한 집만 고르는 건 아무래도 형평성을 잃기 쉬울 것 같았다. 먹거리가 아쉬운 집에 겨울 양식으로 전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일은 나중에 다시 관심을 갖기로 했다.


작실, 섬뜰, 끝정자 모두 헤아리니 한 집에 한 박스씩 전할 수가 있었다. 전한다고 하는 건 늘 어려운 일. 카드를 써서 라면을 전하는 사연을 적었다.



단강마을 여러분께.

지난번 뜻하지 않은 물난리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애써 가꾼 농작물들과 무엇보다 소중한 논밭이 망가졌을 때, 그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겪은 아픔을 염려하며 전해준 사랑의 손길이 있어 이렇게 작은 정성에 담아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립니다. 여러분이 겪으신 어려움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사랑으로 여기시고 기쁘게 받으시면 저희도 기쁘겠습니다.


수확의 계절,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여러분 가정마다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저희들도 여러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라면박스마다 카드를 붙였다. 집집마다 전하는 일은 각 마을 반장님들이 수고해 주셨다.


마을 분들이 고마워했던 건 단지 라면 한 박스를 받아서가 아니었다. 그건 당한 고난에 비한다면 지극히 작은 것이다. 몰랐던 누군가가 우리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고난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던 것이다. 남의 것도 빼앗아 제 것을 삼으려는 세상 속에서 그런 일은 여간 드문 일이지 않은가.


따뜻한 정성이 가슴마다 훈훈한 기운을 일으키고 있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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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라는 말의 무게

한희철의 얘기마을(83)


목사라는 말의 무게



목사라는 말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때때로 스스로에겐 너럭바위 얹힌 듯 무거우면서도,

때때로 사람들의 회자 속 깃털 하나만도 못한 가벼움이라니.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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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한희철의 얘기마을(82)


상처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힘든 일이지 싶어 저녁 어스름, 강가로 나갔다.

모질게 할퀸 상처처럼 형편없이 망가진 널따란 강가 밭, 

기름진 검은 흙은 어디로 가고 속뼈처럼 자갈들이 드러났다.


조금 위쪽에 있는 밭엔 모래가 두껍게 덮였다.

도무지 치유가 불가능해 보이는, 아물 길 보이지 않는 깊은 상처들.

한참을 강가 밭에 섰다가 주르르 두 눈이 젖고 만다.


무심하고 막막한 세월.

웬 인기척에 뒤돌아서니 저만치 동네 노인 한분이 뒷짐을 진 채 망가진 밭을 서성인다.

슬그머니 자릴 피한다.

눈물도 만남도 죄스러워서.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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