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2)

 

한바탕
 
한바탕 꿈을 꾸고 나면 그게 한 세상일 것이다.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장자가 내 꿈에 나타난 것인지,
내가 장자 꿈을 빌린 것인지,

 


때로는 꽃길을 걷기도 하고,
때로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기도 하고,
꿈에도 그리던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창을 든 이에게 쫓기기도 하고,


길몽도 있고 흉몽도 있지만
한바탕 꿈을 꾸고 나면 한 세상일 것이다.
가물가물 봄날 가듯 한 생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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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소나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1)

 

잘 익은 소나무
 

 

소나무에 대해 물었던 것은 최소한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조경 일을 하는 홍 권사님께 한 두 마디만 들어도 소나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인우재 앞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데, 산에서 씨가 떨어져 자란 작은 것을 캐다 심은 것이 시간이 지나며 제법 자란 오른 터였다. 나무가 잘 자란 것은 좋은데, 문제는 앞산을 가리는 것이었다. 인우재에선 마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쏠쏠한데, 산을 가로막고 있으니 답답했다. 나무를 다듬을 줄은 모르고 이참에 밑동을 잘라내야 하나 싶어 권사님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권사님은 나무를 봐야지 대답을 하지 않겠느냐며 기꺼이 시간을 냈다. 권사님과 함께 인우재를 찾은 것은 그런 연유였다.

 

도착 후 잠시 숨 돌릴 새도 없이 권사님은 소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아직 소나무가 얼어 있다면서 마당에 있는 반송부터 다듬기 시작했다. 아, 나무를 아는 사람들은 나무가 얼어 있는 것도 대번 아는구나, 새로웠다. 심어만 놓고 한 번도 손을 안 대기는 반송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째 면도를 하지 않은 노총각 면도하듯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는 아주 다른 나무로 바뀌었다. 얼떨결에 노총각을 면하여 예식장에 선 신랑 같았다.


 

 


트럭 뒤에 장비를 싣고 온 권사님은 본격적으로 나무를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자를 건 자르고, 다듬을 것은 다듬었다. 큰 가지와 줄기도 잘라야 할 것은 미련 없이 잘랐는데, 나 같으면 한참을 망설여야 할 것 같은 순간에도 권사님은 전혀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이 따라 움직였는데, 모든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권사님이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니 나무에 올라 전지를 하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이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톱으로 가지를 두드렸다. 그렇게 살아 있는 가지인지, 죽은 가지인지부터 확인부터 했다. 죽은 가지를 잘못 밟으면 부러져 다칠 수도 있는 것이었고, 나무를 다듬으며 죽은 가지를 남겨둘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권사님은 가지에서 나는 소리를 통해 가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싶었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동작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날 내가 한 일은 권사님을 돕는 일이었다. 위에서 자른 나무를 한쪽에 치우는 것 밖에는 없었다. 대신 권사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지를 자르느라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했고, 종일 톱질과 가위질을 했다. 권사님에 비해서는 훨씬 가벼운 일을 했음에도 저녁때가 되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날 아침 일찍 들러 내 몸이 괜찮은지 묻기까지 했다. 권사님이 몸살 안 났는지를 묻자 저는 몸에 배서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올해 권사님의 나이가 일흔 넷, 나이에 비해 일이 과하다 싶은데 권사님 일하는 모습 속엔 원숙함이 담겨 있었다. 하는 일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전문성, 그리고 그것을 무리 없이 해내는 몸에 밴 근육과 움직임, 잘 익은 사람이란 저런 사람이구나 싶었다. 내게는 권사님이야말로 잘 익은 한 그루 소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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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0)

 

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마음으로 가는 길이 진짜 길이다. 단강으로 가는 길은 가르마처럼 훤하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가 여주에서 빠져나가 점동을 거쳐 남한강을 건너면 강원도의 초입 부론을 만난다. 부론을 벗어나면 이내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오른쪽을 택하면 강가 길을 따라 가고, 왼쪽을 택하면 자작 고개를 넘어간다. 그렇다고 갈림길에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은 어느 길을 택해도 길은 정산에서 다시 만나 단강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부론에서 자작 고개 쪽으로 향하다 보면 길 왼쪽 편에 산수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산수골엔 언제부턴가 ‘꿈꾸는 산수골’이 자리를 잡았다. 은퇴를 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꿈꾸는 산수골을 이루었다.

 

 

 


그 중심에는 이도형 씨가 있다. 얼굴을 보면 영락없이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인데, 그는 어색할 것도 없이 자신을 ‘좌파’라 소개한다. 한전 등에서 노조활동을 한 이력이 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삶일까를 고민했고, 꿈꾸는 산수골을 시작했다.

 

산수골엔 콩 할배, 론 할배, 꽃 할배, 짱 할배 등 몇 몇 할배들이 모여 산다. 꿈꾸는 산수골을 처음으로 찾던 날, 꿈꾸는 산수골이 꿈꾸는 꿈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꿈은 의외로 단순했고, 소박했다. 집에서 죽자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 약해져 병이 들고 병이 들면 병원으로 간다. 그리고는 병원 침대에 누워서 생을 마감한다. 생을 마감하는 과정도 대개가 비슷하다. 수많은 의료기기의 도움 속에서 겨우 숨을 쉬다가 그것조차 힘에 부치면 세상을 떠난다.


산수골의 꿈은 거기에서 시작이 된다. 이 세상을 떠나는 자리가 병원이 아니라 산수골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끝까지 돌보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마지막 눈을 감게 하자는 것이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할배들은 하루하루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

 

꿈꾸는 산수골의 꿈은 릴케의 <기도시집> 한 구절을 닮았다. ‘오 주여, 그들 하나하나에게 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그가 사랑, 의미, 그리고 고난을 겪은 삶에서 가버리는 그러한 죽음을’이라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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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들의 모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9)

 

 종들의 모임
 

새해 들어 시작한 모임 중에 ‘신앙강좌’가 있다. 한 달에 한 번 외부 강사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다양한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보편성과 깊이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두 번째 시간, 지강유철 전도사님으로부터 장기려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장기려 그 사람>의 저자, 누구보다 장기려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줄 적임자라 여겨졌다. 거기에 더해 장기려를 아는 이들이 안타까울 만큼 적었다.

 

 

 

 

강의 전 잠깐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 책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장기려 선생이 교회를 떠나 마지막으로 향했던 ‘종들의 모임’이 어떤 곳인지가 궁금했었다. 들려준 이야기 중 마음 깊이 와 닿은 대목이 있었다.

 

장기려는 대뜸 기존의 교회를 등지고 종들의 모임을 향하지 않았다. 적잖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던 중 고민의 종지부를 찍을 일이 있었다. 장기려 선생이 태국을 방문한 것은 막사이사이상 수상자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국에 있는 종들의 모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태국에서 한 종들의 모임에 속한 자를 만났는데, 그는 천막 안에서 살고 있었다. 천막의 절반은 집, 절반은 사람들을 만나는 곳으로 삼고 50년을 살아온 터였다. 한 자리에서 50년을 살아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허름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다.


50년간 몇 명을 전도했는지를 물었을 때, 종이 들려준 대답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두 명이라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50년 활동에 단 두 명,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그것은 실패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종은 분명하게 대답을 했단다.


“저는 결코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이곳에서 살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동안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단 두 명을 전도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이기에 저는 충분합니다.”

 

그 일이 장기려를 종들의 모임으로 향하게 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했다. 50년에 단 두 명을 전도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 우리가 얼마나 숫자나 규모에 매몰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돌아보게 하는 일이었다. 의미 있는 삶을 살되 시간을 잊는 것, 그것이 종이 걸어가야 할 마땅한 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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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 흙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네요. 정말로 그림내용이 목사님 말씀하신 모습처럼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2.14 03:14
    • 다양한 표현법을 찾는,
      화가에게는 구도의 길이었겠지요.

      한희철 2020.02.14 07:14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8)

 

자화상


 
인우재를 다녀오는 길에 그림 한 점을 가져왔다. 오랫동안 인우재에 걸어두었던 그림인데, 비어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액자 안에 습기가 찼다. 아무래도 표구를 다시 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먼지를 닦으며 그림을 마주하니 옛 일이 떠오른다.

오래 전 일이다. 김정권 형이 목회를 하던 신림교회를 찾은 일이 있다. 새해를 맞으며 드리는 임원헌신예배에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예배를 마쳤을 때, 정권 형이 화가 이야기를 했다. 인근에 젊은 화가가 사는데, 한 번 만나러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기꺼이 동행을 했고, 그렇게 김만근이라는 화가를 만나게 되었다.


수북이 쌓인 눈길을 뚫고 당도한 그의 집은 치악산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아도 허름하고 허술한 농가였다. 비어 있던 농가를 화실로 삼은 그는 놀랍게도 흙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흙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찾는데 5년의 세월이 걸렸다는데, 그가 보여주는 그림에는 박수근을 닮은 질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밤이라 해도 방안에 촛불 하나만 켜두면 방안의 물이 얼지를 않는다.”는 말을 그 밤에 들었다. 필시 그것은 화가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그의 화실을 찾았을 때,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액자에도 넣지 않고 그냥 벽에 붙여 놓은 그림이었다.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아마도 자화상인가 봐요?”


이야기를 듣고 그는 흠칫 놀라더니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화실이 너무 조용하여 조용함에 눌릴 것 같을 때면 그 그림을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림 속엔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는 모습이 담겨 있다. 통곡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뒤로 젖힌 고개 탓에 얼굴의 중심은 입이 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처럼 시커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두 눈은 퉁 퉁 부은 듯이 보인다. 얼굴의 윤곽은 어쩌면 눈물이 흘러내린 자국처럼도 보였다. 거칠게 붓질을 했지만 그럴수록 내게는 살아있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그린 그림이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설 때 그는 그림을 돌돌 말아 내게 건네주었다. 거듭 사양을 했지만, 그림을 알아본 사람이 목사님이니 그림의 주인은 목사님이라며 끝까지 그림을 돌려받지 않았다. 그러면서 표구를 할 때는 큰 액자에 담는 것이 그림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조언을 덧붙였다. 그런 사연으로 갖게 된 그림이었다.

 

그림의 주인공인 화가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금도 고요함을 견디며 자화상을 그리고 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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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지키면

  • 내 선자리에 뿌리를 내려 생명을 지키고 사는 것이 쉽지 않는 거군요. 내 선 자리 왜 이렇게 생겨먹은거냐고 원망하지 않고 살겠습니다.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2.12 14:11
    • 작은 키의 분재가 우리를 가르치네요.

      한희철 2020.02.14 07:13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7)

 

 생명을 지키면
 

두 주 전부터 예배실 앞에 있는 탁자 위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란색 꽃을 피운 화분이었는데, 저만치 떨어져 볼 때 그 꽃이 생화인지 조화인지 모를 만큼 꽃을 가득 피워 올린 상태였다.

일부러 다가가서 보니 분재였다. 구불구불 비틀어진 몸이 저가 견뎌낸 세월이 얼마쯤일까 궁금증을 자아냈다. 꽃을 보니 영춘화였다. 정릉교회 담장을 따라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늘어져 있는 영춘화가 화분에 활짝 피어 있었다. 예배드리러 오는 교우들에게 어서 오라며 환한 웃음을 건네는 것 같이 빙긋 웃음이 났다.

 

 

 

 

꽃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때 마침 지나가던 홍 권사님이 내게로 다가왔다. 조경 일을 하면서 정릉교회 조경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권사님이다. 분재는 권사님이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집에서 정성껏 길러 교우들과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었다. 꽃이 참 아름답다고 인사를 하자 권사님이 말했다.


“실은 이 분재에서 정릉교회 마당에 있는 영춘화가 퍼져나간 거예요. 이 분재가 퍼뜨린 영춘화가 꽤 많답니다.”

 

화분 속 작은 분재에서 퍼져나가 많은 담장을 눈부신 꽃으로 수놓고 있는 영춘화, 권사님의 말은 숙연함으로 다가왔다. 


누구라도, 그 어떤 존재라도 제 선 자리에 뿌리를 내려 생명을 지키면 얼마든지 생명을 나눌 수 있는 법, 내 선 자리 비좁다고 원망으로 시간을 보내면 안 되는 것이었다. 고마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바라보는 영춘화 분재의 자태가 의젓하고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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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충동

  • 감사합니다. 한우충동! 무용지물!

    이진구 2020.02.11 03:24
    • 한우충동과 무용지물,
      재미 있는 이해입니다.

      한희철 2020.02.14 07:12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6)

 

 

 한우충동


 
책을 읽다가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는 말을 만났다. 낯설어서 찾아보니 ‘棟’이 ‘용마루 동’이었다. 
‘소가 땀을 흘리고 대들보까지 가득 찬다.’는 뜻으로, 책을 수레에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집에 쌓으면 대들보까지 닿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지니고 있는 책이 많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었다.
(글을 쓰며 피식 웃음이 났던 것은 ‘한우충동’이 ‘한우를 먹고 싶은 충동’은 아니었군, 생뚱맞은 생각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디 한우충동을 부러워할 일이겠는가? 한두 권이라도, 한두 줄이라도 내 것으로 삼아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할 터, 아무리 집안 가득 책을 쌓아두어도 그것이 내 삶과 상관이 없다면 책은 무용지물, 다만 나를 꾸며줄 액세서리일 뿐이다.

성경책과 온갖 경전이 무엇 다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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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한

  • 죽음은 관계가 끊어지는 것~! 와, 관계가 끊어진지도 모르고 살아왔었네요.. 하나님과의 관계!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2.11 03:27
    •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정의였습니다.

      한희철 2020.02.14 07:11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5)

 

함께 사는 한
 

생생했다. 꿈을 꾸는 내내 꿈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있었다. 그가 살고 있는 미국이었다. 무슨 급한 일이었는지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채 나는 미국에 있었고, 덕분에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일이 많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친구는 자연스럽고도 넉넉하게 모든 것들을 도와주었다.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든든했고 고마웠고 즐거웠다.

 

 

 

그러다가 깼다. 무엇 그리 급한지 훌쩍 곁을 떠난 친구, 하지만 꿈으로 찾아와선 여전한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었다. 죽음이란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라 했던 모리 교수의 말을 떠올린다. 함께 사는 한,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죽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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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다

  • 저도 '스미다'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햇살처럼, 물처럼 그렇게
    어느 생명도 아프지 않게
    공평하게 적시는 말 같아서요.

    신동숙 2020.02.08 08:42
    • 스미다,
      물들다,

      가만가만 다가오는 말들이지요.

      한희철 2020.02.09 12:54 DEL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2.09 03:14
    • 한결같음이 고맙습니다.

      한희철 2020.02.09 12:55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4)

 

스미다


 
식물을 가꾸는 이들에게는 자연스럽기도 하고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새롭게 보였다. 목양실 안에 있는 몇 몇 화분 중에는 난도 있는데, 어느 날 보니 난 화분이 물을 담은 양동이 안에 들어가 있었다. 사무실의 장집사님이 한 일이다 싶은데, 난 화분에 물을 주는 대신 화분을 물에 담금으로 물이 스미도록 한 것이지 싶었다.

 

 

 

 

난 화분에 물을 부어주는 것과 물이 스미도록 하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하지만 단번에 쏟아 붓는 것보다는 조금씩 스미도록 하는 것이 난에 필요해서 그리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난 뿐일까? 믿음도, 은혜도, 함께 나누는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단번에 넘쳐나도록 쏟아 붓는 것보다는 시간을 잊고 알게 모르게 스미는 것, 그것이 더 그윽하고 유익하고 오래가는 것 아닐까, 양동이에 담겨 있는 난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스미다’라는 말이 마음으로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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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두레박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93)

 

깊은 두레박

 

특별한 일이 없다면 하루의 일과는 일정하게 시작이 되고 진행이 된다. 4시 45분 기상, 5시 30분 새벽예배, 한 시간 쯤 후에 책상에 앉는다. 새벽잠을 물리고 책상에 앉는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아침식사까지 삼가면 조용한 시간이 꽤 길게 이어진다.

 

2020년 들어서며 아침마다 갖는 시간이 있다. 김기석 목사님이 쓴 묵상집을 읽는다. 일용할 양식을 대하듯, 그날그날의 묵상을 따라간다. ‘365일 날숨과 들숨’이라는 부제가 적절하게 여겨진다.

 

 

 

 

참으로 두레박의 줄이 길다. 두레박의 줄이 이리도 기니 깊은 물을 길어 올린다. 맑고 시원한 물이다. 어두운 샘에서 물을 길어 환한 데 쏟아 붓는 두레박(루미), 탁하고 미지근한 물과는 다르다. 함께 길을 걷듯 천천히 따라 읽으면 마음이 맑아진다. 물을 긷는 성실과 사랑이 물씬 물맛처럼 전해진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사막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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