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시노래 한 잔292 통도사, 시월의 나한들 무풍한송로를 걸어서 통도사 대웅전으로 향하는 맨발의 산책길은 나와 너를 지우는 기도의 순례길 절마당 가득한 가을 국화꽃 틈새로 가족들의 이름을 공양 올리려는 염원은 시월의 하늘에 닿아 푸르고 인파에 떠밀려도 홀로 고요해 대웅전 유리창으로 보이는 금강계단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갈빛의 좌복에 깃들어 오늘의 백팔배 숙제를 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발이 멈춘 곳은 길바닥을 구르다가 홀로 멈춘 듯한 조막만 한 마른 잎 하나 새벽 빗자루질에 쓸리지 않은 듯 용케 인파에 밟히지 않은 듯 몸이 저절로 허리를 구부려 손끝으로 집어든 갈빛 마른 잎 하나 어디로 돌려보낼까 그제서야 옆을 봅니다. 좌측으로 난 돌층계를 오르며 가지 않은 길을 갑니다. 작은 나무 아래 풀섶이 좋아 보여 허리를 구부려 조심스레 내려놓고 고개를 드니 .. 2023. 10. 5. 우리 인생의 출발점 국화차 한 모금에 그윽해진 가슴으로 고요히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의 출발점은 어딜까 하고 우리가 태어난 집일까? 마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졸업한 학교일까? 마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닌 첫 직장일까? 마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혹, 저잣거리에 떠돌듯 물고 태어났다는 흙숟가락 금숟가락일까? 물음과 물음을 따라서 흐르는 생각을 따라서 깊어진 가슴으로 깊은 숨을 쉽니다. 숨을 쉽니다. 숨을 고릅니다. 날숨과 들숨이 평화롭게 걸어갑니다. 숨을 고르는 이 순간 우리 인생의 출발점에서 날숨과 들숨 같은 생(生)과 사(死)가 사이좋게 걸어갑니다. 해인사의 장경각 법보전 주련에 새긴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 날마다 새롭게 숨을 고르는 이 순간마다 모두에게 공평히 내려주시는 은총과 맞닿은 지금이라는 .. 2023. 9. 30. 오늘 뜬 달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답 어둑해진 경주 토함산 하늘가에 뜬 달 하루 일을 마친 엄마가 중1수학 좌표와 그래프를 마친 중2아들에게 오, 달이 떴네 천 년 전 경덕왕도 보았을 서라벌의 달이네 했다 아들은 달님에게 새 자전거 얘기 엄마에겐 좋은 과학 시간 아랫쪽으로 활처럼 휜 저 달이 무슨 달일까? 물어보려는데 일편단심 아들은 새 자전거 얘기 입속에선 상현달과 하현달이 구르지만 침묵한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어 우리 내일도 같이 밤하늘을 바라볼까? 오늘의 달보다 더 살이 쪘을지 더 홀쭉해져 있을지 오늘 뜬 달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랬더니 고요히 아들의 두 눈이 달에게로 간다 2023. 9. 23. 하루 하늘과 땅 사이로 울리는 하하하 루룰루 노래처럼 흐르는 물처럼 오늘도 좋은 날 되시라고 까마득히 먼 그 옛날 그 한 사람 그 입에서 꽃 핀 하루 2023. 9. 22. 밥맛 잃은 김에 일종식을 벗삼아 지난 오월에 떨어진 밥맛이 줄곧 내리막길이더니 햅쌀이 나오는 시월에 밥만 먹어도 맛있다는 시월에 이태원 골목길의 배고픈 청년들 저녁밥 먹는 저녁답부터 부르던 경찰 부르던 국가 부르던 엄마 부르던 아빠 저녁해가 넘어가도록 어둔 밤이 다하도록 부르다가 숨이 멎은 가슴들 마지막 숨을 거둔 이름들 그날에 밥맛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오월 잃은 밥맛은 다시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럼에도 날마다 좋은날 밥맛 잃은 김에 일종식을 벗삼아 오늘로 오십삼일째 되는 일종식과 오후불식 저절로 한나절의 졸음이 가시고 길어진 하루에 정신이 성성적적한 촛불이다 돌짝밭을 뚫고서 돋아나는 푸른 숨결에 문득 하루 삼시 세 끼의 망상을 누가 만들었을까 2023. 5. 19. 나는 까막눈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까막눈이 되었네 보이는 세상은 태초의 흑암 불과 100년 전에 쓰여진 우리 조상의 역사서도 나는 읽을 줄 모르게 되었다 정약용 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친필 편지도 일연 스님의 도 나는 읽을 줄 모르게 되었다 홍익인간의 단군이 나온다는 과 도 가믈가믈 현묘하다 중도와 중용도 모르면서 중3학년이 되어 치른 중간고사에서 올백을 맞았을 때(음악 빼고) 눈먼 기쁨 그 너머로 별통별처럼 스치던 깨달음 지금 학교 선생님들이 여기저기서 아무 쓸데없는 장난을 치고 계시는구나 교실의 칠판을 그대로 선생님 입말을 그대로 절대 믿음 절대 복사 그렇게 나는 까막눈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문득 가슴으로 스친 그 한 톨의 진실을 국민의 의무.. 2023. 3. 14. 나무는 참선하는 사람 나무는 참선하는 사람 한 자리에 오롯이 앉아서 땅의 흙을 끌어 안으려는 뿌리들의 결가부좌(結跏趺坐) 둥치의 꽂꽂이 세운 허리 숨으로 나를 지우는 무념무상(無念無想) 잔가지들의 자유로운 비상(飛上) 참선하는 나무가 걸어다니는 나무에게 지구별에서 꿈꾸는 하나의 소망은 아마도 나란히 곁에 앉아서 평화의 숨을 나누자는 천명(天命) 숨을 쉬는 일 숨을 쉬는 일 숨 하나로 나를 지우는 일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 이 땅에서 천국의 안식을 누리는 삶 2023. 2. 26. 별, 중의 별 보아도 보이지 않는 별무리가 보고프면 별, 중의 별 중학생 아들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며 흐르는 성운 이마와 턱과 양 볼의 우주 손길이 닿는 곳마다 별은 별을 낳고 별과 별 사이로 펼쳐진 빈 하늘에 스치는 생애 맨 처음 얼굴 중학생의 얼굴에 빛나는 별무리 중용과 중도의 은덕이 깃든 사람의 얼굴 아침 저녁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찰라마다 청년 윤동주의 별이 바람에 스치듯 우리는 이마와 이마를 맞대어 서로의 우주를 향하여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2023. 2. 15. 하얀 구절초 곁으로 하얀 구절초 곁으로 가을걷이를 다한 빈 들녘 빈 들녘 곁으로 옛 서라벌 토함산 능선을 배경으로 하얀 구절초를 찍으려고 가까이 다가가서 곁에 앉았더니 흰빛을 잃은 구절초 내 그림자가 그랬구나 보이지 않던 해가 바로 내 등 뒤에 있었구나 토함산 자락을 넘어가는 저 하얀 구름을 따라서 나도 슬쩍 푸른 동해로 고개를 기울인다 이 땅 어디를 가든 해를 등진 순간마다 회색빛 그림이 되는 한 점의 나를 보며 착한 길벗 하얀 구절초가 하얗게 웃어준다 2022. 11. 18. 이전 1 2 3 4 ··· 3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