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에서 피운 꽃

신동숙의 글밭(153)


제자리에서 피운 꽃





작약, 수레국화, 양귀비, 민들레, 금계국, 개망초, 철쭉, 소나무꽃, 초록 잎사귀, 둘레에는 언제나 넉넉한 하늘


초여름 강변에 피운 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쉼 없이 떠돌아 다니는 생각은 바람이 되고
집 없이 자꾸만 흐르는 마음은 강물이 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저절로 알 때
제자리에서 피운 꽃들에게서 배웁니다.


바람이 꽃이 되고
물이 꽃이 되는 길을


제자리에 머물러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진리의 땅에 사색의 뿌리를 내리는


들숨 날숨에 기대어 마음을 내려놓으며
명상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일상 속에 그려봅니다


상관없는 모든 아픔에까지 빗물 같은 눈물을 흘리다가
햇살 같은 웃음을 욕심 없이 짓다 보면

씨앗처럼 작고 단단한 가슴이 열리어


제가 앉은 자리에서도
제 안에 아무 것도 없던 땅에서도


진실의 꽃 한 송이
저절로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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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신동숙의 글밭(152)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오늘의 가난함은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하루치의 부유함 속에
씨앗처럼 품고 품은
빈 가슴의 가난함이다


풍성한 밥상 앞에서
밥알처럼 곱씹는
굶주린 배들의 가난함이다


행복의 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목마른 입들의 가난함이다


오늘 먹고 마신
부유함이 품은 가난함
있음이 품은 없음


모두가 잠 든 후
홀로 앉아서
없음을 알처럼 품는다


없음을 품고 품으며
침묵의 숨을 불어 넣으면


빈 가슴이
속속들이 차올라


없는 가슴을 채우는 건
있음의 부유함도 풍성함도 행복도 아니다 


없음을 채우는 건
없는 듯 있는 하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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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종소리

신동숙의 글밭(150)

영혼의 종소리


첫 번째 종소리는
네 살 때 울렸다

옆집 아저씨는
마을 뒷산에서 
4시면 새벽 기도한다더라

기도가 뭐지
아무도 없는 깜깜한 산에서

살아오면서
간간히 들려오는 종소리

두 번째 종소리는
신약을 읽다가 울렸다

예수는
무리를 떠나
홀로 산으로 가시더라

뭐하러 가시나
아무도 없는 산에서

종소리는
빈 가슴에서 울린다

언제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는 빈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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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이마가 더 넓은가

신동숙의 글밭(145)


누구 이마가 더 넓은가




두 자녀들로부터
카네이션을 받은 어버이날 전야제


저녁밥을 먹고 나서
아빠의 얼굴을 꼭 닮은 딸아이


중학생 딸아이와 아빠가
누구 이마가 더 넓은가 떠들썩하다가


개구진 딸아이가 손바닥으로
아빠 이마를 바람처럼 스치며 제 방으로 숨는다


커피 내리던 아빠가 반짝 자랑스레

"아빠 이마는 태평양"이라고 하니까


딸아이가 방문을 열며

"그러면 나는 울산 앞바다" 하며 웃느라 넘어간다


뒷정리 하던 엄마가
"그러면 동생은?" 하니까


신이 난 딸아이가 생각하더니
"동생은 태화강, 엄마는 개천"이라고 한다


엄마는 식탁을 빙 둘러 닦으며
"가장 넓은 건 우주,
우주는 하나님 얼굴이니까
우주 만큼 넓은 마음으로 살아라"고 말해 주는데


떠들썩 돌아오던 대답이 없다
하나님처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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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보다 안개꽃

신동숙의 글밭(144)


카네이션보다 안개꽃




카네이션 한 다발을 안겨 주던 날

엄마가 보고 있는 건


카네이션이 아니라
카네이션을 감싼 흰 안개꽃이란다


네가 내 앞에서 웃고 있던 날
엄마가 보고 있는 건


네 옷차림이 아니라
네 등 뒤에 커다란 하늘이란다


그러니까 말이야
아주 어릴 적부터 그런 거지


눈에 활짝 띄는 세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언제나 더 크니까


자꾸만 눈에 보이는 건
보이지 않는 하늘이란다


그러니까 말이야
그러면 그럴 수록


하늘이 점점점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마음 속으로
푸른 하늘이 펼쳐져


그러면 너도 꽃처럼
활짝 웃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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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당 연필은 수공예품

신동숙의 글밭(143)


몽당 연필은 수공예품




아이들의 연필은 신상품
4B, 2B, HB


깨문 자국은
고심하던 흔적


벗겨진 자국은
손 때 묻은 세월


역사를 지닌
몽당 연필은 수공예품


그래서 버릴 수 없고
남에게 줄 수도 없고


쓰임 받을 때마다
자신을 비우며 내던
울음소리 웃음소리


때로는
고요한 침묵


몸이 부서지더라도
끝까지 심지가 곧은


그런 몽당 연필을
십 년이 넘도록 

다 모아두었다


엄마가 책 읽을 때

몽당 연필은 신난다


중요한 말씀이 나오면
나란히 따라서 걷다가


책장 빈 곳마다
말씀 따라쓰기도 한다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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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와 바람

신동숙의 글밭(137)


국수와 바람




국수를 먹다가
국물을 마시다가


콧잔등에
땀이 맺히고

등더리에 땀이 배이려는데


등 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준다


어려선
아빠 손에 든
부채가 사랑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저절로 부는
바람이 사랑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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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꽃 한 송이

신동숙의 글밭(136)


사진 찍는, 꽃 한 송이





딸아이 뒤로
징검다리 건너다가


유채꽃이 환한
태화강 풍경이 어여뻐서


가던 걸음
멈추어
사진에 담았어요


뒤따라오던
청춘 남자가 여자에게
"니도 저렇게 찍어봐라." 


들려오는 말소리에
넌지시 뒤돌아보니


조금 옛날
내가 머물던 그 자리에


어여쁜 여자가
꽃 한 송이로 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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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벚꽃 할머니

신동숙의 글밭(135)


겹벚꽃 할머니




오일 장날에
참기름집 앞에 서 있는데


앉으신 할머니가 몸을 틀어서
내 있는 쪽으로 손만 뻗고 계신다


할머니의 손이 향한 곳을 보니까
딸기 바구니에 담긴 푸른 엉개잎


바로 지척인데
강 건너 쯤 보일까 싶어


나도 모르게 "갖다 드릴까요?" 여쭈니
할머니는 눈으로 살풋 미소만 지으신다


참기름병을 가방에 넣고 돌아서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를 헤아리다가


선뜻 몸을 일으키시지도
고맙단 말도 또롯이 못하시면서


할머니는 그 몸으로 장사를 하시네
차가운 바닥에 종일 앉아서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갈 일이 까마득해서
해가 뜨면 몸 일으킬 일이 무거워서


나무처럼 할머니의 몸도 입도 무거워서
주름진 얼굴에 핀 수줍은 미소가 겹벚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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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사귀

신동숙의 글밭(133)


푸른 잎사귀




봄바람에 지는 꽃잎은
고요히 눈을 감는다


꽃 진 자리에 돋는 새순은
순한 귀를 연다


가만가만 꽃잎이 눈을 감으면
공평하게 열리는 푸른 잎사귀


여리고 순한 귀를 기울여
투명한 하늘에 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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