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은총으로 가득 차는 충만함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0. 7. 19. 06:28



시간이 은총으로 가득 차는 충만함

 

-“김기석 목사의 365일 날숨과 들숨3-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내가 만난 올해의 첫 책이 김기석 목사의 365일 날숨과 들숨3권이다. 1<하나님의 숨을 기다리며>, 2<사랑의 레가토>, 3<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모두 출판사 꽃자리202016일에 펴낸 책들이다. 말 그대로 1365일 매일 읽을 성경 본문, 저자의 본문 해설, 저자가 작성한 기도문이 이 책의 뼈대다. 이것이 성도의 영성 훈련을 위한 하루 분, 한 꼭지의 주요 구조다.

 

날마다 읽고 명상할 자료의 하루 분 분량은 3.5쪽 미만이다. 책을 펴면, 날자 표시와 함께 그 날의 명상의 주제가 제목으로 실려 있다. 성경 본문은 <성경전서> 66권 안에서 저자가 임의로 선택한 5절 안팎의 발췌 본문이다. 인용된 성경본문은 <성경전서 표준새번역>(1993)이 개정되면서 이름을 바꾼 <성경전서 새번역>(2004)이다. 저자의 본문 해설은 두 쪽 안팎이다. 해설에 이어 10행 내외의 기도문이 제시되어 있다. 매주(每週)마다, 서로 마주 보는 빈 페이지가 마련되어 있다. 그 빈 페이지에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곱 개의 빈 칸이 제시되어 있다. 날마다 성경읽기와 기도를 끝내고 나서 각자 자기가 남기고 싶은 글을 적는 지면이다. 보통 손 글씨로 네댓 문장의 글을 써넣을 수 있는 여백이다. 이 메모가 계속되면 자신의 소중한 영성 일기로 남을 것이다.




 

이 책의 활용


하루에 한 꼭지씩 3~4쪽만 읽는다. 보통 속도로 7분 안팎의 시간이 걸린다, 천천히 읽어도 10분이면 넉넉하다. 그러나 말씀과의 대화가 길어지고, 난외 여백에 기록할 것이 많아지고, 기도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면, 매 쪽 여백 말고도, 날마다 쓰는 네댓 문장 분량의 빈칸 메모가 모자라 별지를 활용하여 첨가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미 시간은 통제되지 않는다. 이 묵상 자료를 따라 성경본문을 읽고 명상하고, 저자의 해설을 읽으면서 동시에 저자가 인용하는 수백 명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인물들의 깨달음을 함께 나누다 보면 순간 속에서도 영원과의 접촉을 느낀다. 저자가 마련해준 기도문을 따라 함께 기도하다가도 여백에 각자의 기도를 더 첨가할 수도 있다.

 

수도자 체험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그들의 삶 전체가 예전(禮典 Liturgy)이다. 그들은 깨어 있는 동안이 예배다. 노동도 예배다. 성무일도서(聖務日禱書)는 그들이 깨어 있는 동안, 시간을 배정하여, 읽고 명상할 성경 본문, 전통적인 공통 기도, 교부들의 설교, 찬송으로 부르는 시편 낭송, 찬양 등을 편집해 놓은 전례서(典禮書). 코로나19 때문에 자가격리(自家隔離) 되어 있던 지난 3개월 동안 나에게는 김기석 목사의 365일 날숨과 들숨3권을 정독하면서 개신교가 소홀히 여긴 시간예전(時間禮典)의 중요성을 다시 발견한 소중한 기회였다.


김기석 목사의 365일 날숨과 들숨을 가지고, 시간에 구애(拘礙)됨이 없이, 각자의 형편에 따라 시간예전(時間禮典)을 체험할 수 있다. 아침에 이 예전을 갖게 되면, 그 여운은 하루종일 남는다. 직장에서 점심 시간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시간이 은총으로 가득 차는 충만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잠들기 전 침대에서라면, 악몽 없는 은총(恩寵)과 휴식의 밤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감사


주님의 종이 고백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이사야서 50:4) 이 어려운 시대에 주님께서 저자 김기석 목사의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하시고,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의 저자에게도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면서도 이 책을 숨 쉬게 하는, 표지와 본문 일러스트를 맡아준 고은비 님의 수고에도 감사한다. 바느질 제책(製冊) [DIY Kettle Stitch Bookbinding] 기법으로 책을 만들어, 독자들이 500여 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마음껏 펼쳐 볼 수 있도록 해준 (이것은 예술이다!) 출판사 꽃자리의 새로운 제본기술 도입을 축하하며 감사드린다.


<기독교세계> 7-8월호,. 눈여겨볼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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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훈련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0. 1. 8. 08:20
  • 안녕하세요. 이번에 김기석 목사님 책 산 성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이 표지와 책 본체가 연결이 안되어 있고 허술한 느낌이에요. 제책사에서 잘못만든것 같은데 확인해주시겠어요?
    제가 꽃자리 출판사 다른 책들도 있는데 이 책만 확연히 책 표지와 본문이 붙어있지 않아서요... 만들다 만 것 같아가지고...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드폰테스 2020.01.13 13:37
    • 여러분들이 제본이 잘못됐다고 문의를 하시는데요. 이 책은 누드제본이라고 기존의 무선제본보다 더 견고하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파본이나 잘못된 제본이 아니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종호 2020.02.05 08:53 신고 DEL

영혼의 훈련

<김기석 목사의 365일 날숨과 들숨1,2,3>

 

 

아주 오래 전 백범 김구 선생이 쓰신 편액을 보고 마음에 담아둔 시가 있다. “눈밭 위를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는 뒷사람의 길이 될 터이니(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나중에 이 시가 서산대사가 쓴 것임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 시가 주는 강렬한 도전이 스러진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길을 걷는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던 순간부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사람은 떠나도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은 세월과 함께 지워지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흔적들이 모여 이룬 길을 따라 누군가가 걷고 있다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말할 수 없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누군가의 길이 된다는 생각을 품을 때 삶이 조심스러워진다.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 위에 발을 내디딜 때 묘한 감동이 있다. 함부로 날뛰지 못한다. 시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시간은 새들이나 짐승의 발자국조차 찍히지 않은 깨끗함 자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깨끗함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까지도 염려와 근심으로 채운 후에 삶이 힘겹다고 말한다. 크로노스의 시간 속을 바장이는 사람이 언제나 시간을 영원에 잇대어 살지는 못한다. 그렇다 해도 가끔은 질주를 멈추고 걸어온 자취를 돌아보아야 한다.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이 가리산지리산 정신이 없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예수님은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요한복음 8:14) 안다 하셨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삶은 이 단호한 확신 속에 기초하여 있다. 자기의 근원과 목표를 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아는 사람은 절망하지 않는 법이다.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은 잠시 지체할 수는 있지만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로 인식하고 사셨다. 보냄을 받은 자가 할 일은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일을 다 수행하는 것을 일러 주님은 영광이라 하셨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별명은 ‘그 길의 사람들’이었다. 길은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걷기 위해 존재한다. 예수의 길을 걷지 않으면서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말은 쉽지만 그 예수를 따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 욕망을 거스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걷는 것이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은 그 길을 거쳐야만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은 형편이 좋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운동선수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해진 절차에 따라 운동을 진행한다. 그래야 몸과 마음의 습관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신을 단련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수도사들은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기도와 묵상을 한다. 기도가 몸에 배게 하기 위해서이다.

 

개신교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훈련이다. 스포츠 생리학을 연구하는 분이 한 말을 기억한다. 그는 평균적인 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팔굽혀펴기 10개 정도는 너끈히 해낼 수 있다면서 문제는 언제라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지 않는데 있다고 말했다. 10개가 무슨 운동이 되겠냐고 코웃음 칠 수도 있지만 일 년 365일 동안 매일 그 운동을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몸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말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정신이나 영혼의 훈련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정하고 시작한 일을 꾸준히 지속하는 열정이 반짝이는 재능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올 때가 있다.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바탕으로 기도를 바치는 습관이 중요하다. 이 책은 지난 일 년 동안 그런 취지에서 써나간 글이다. 이 묵상집이 ‘그 길’을 배우고 익히려는 이의 좋은 안내서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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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고한 성벽의 균열과 고요한 호수의 파문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9. 10. 30. 19:40

강고한 성벽의 균열과 고요한 호수의 파문

 

『일그러진 영웅 vs 만들어진 영웅』은 한신대와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현재 LA 향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곽건용 목사가 쓴 사울·다윗 평전이다. 저자는 이미 다윗과 사울에 대한 수많은 책들이 나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책을 더한 이유가 이 주제에 대한 최근의 학문적 성과를 반영하면서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는 우리말 책을 써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다윗 편향적인 사무엘서의 시각에서 벗어나, 그간 홀대받고 왜곡되었던 사울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성경 최고의 영웅인 다윗의 어두운 뒷모습에도 주목하게 되길 기대한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내려놓기 힘들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 책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성실한 학자인 저자의 역량을 잘 보여주며 대중성과 학문성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다는 저자의 소망을 이루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사무엘서가 일방적으로 다윗 편을 드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사무엘이나 야훼의 입을 통해 나오는 판단일 뿐 설화자(narrator) 자신은 가급적 두 사람의 언행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를 피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평가가 배제된’ 사무엘서 내러티브와 자세히 설명이 생략된 채 남겨진 개별 내러티브의 구멍/갭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신명기사가(史家)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는 공식적이고 신학적인 ‘평가’의 심층에 감추어진 사울과 다윗의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본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주로 공시적-문학비평 방법론을 통해 설화자가 어떻게 사울이 버림받고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을 정당화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는지 세밀하게 분석하며, 사울과 다윗의 본모습을 찾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사무엘이나 야훼가 내린 ‘공식적인’ 신학적 판단을 뒤집거나 비판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결국 이 책은 설화자의 사울-다윗 평전인 사무엘서를 저자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해, 새롭게 복원해 낸 사울과 다윗의 모습을 담은 ‘평전에 대한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으며, 사사시대에서 군주시대로 이행하는 전환기의 첫 왕이었던 그의 삶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그를 왕으로 세운 사무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종교적 권위를 독점한 채 사울과 나누려 하지 않았으며, 사사시대의 전통질서를 대표했던 사무엘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사울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의 승리로 얻는 백성의 지지뿐이었다. 사울은 초기에 이 일에 어느 정도 성공함으로서 권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다윗이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다윗이 새로운 왕이 될 것이라고 공언했으며, 처음부터 강력한 권력의지를 보였던 다윗은 사울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전쟁에 능했다. 점차 주변 사람과 백성들뿐 아니라 자신의 아들딸까지 다윗에게로 기울면서, 사울에게는 왕위를 찬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한 공황이 자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는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계속 실패했고, 결국 사람들과 야훼의 버림을 받은 채 전쟁터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다윗과 달리 철저한 야훼주의자이자 강력한 권력의지의 소유자였던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통해 전쟁영웅으로 등극했을 뿐 아니라 신학/이데올로기적으로도 사울을 확실히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곧 사울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쫓기게 되지만 처절한 생존본능으로 숱한 위기를 극복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구축한 끝에 마침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고려로 두 번이나 사울을 살려주었으며, 이는 그를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다윗을 편애한 나머지 어떤 죄를 저질러도 묵인해 준 야훼 역시 이러한 영웅 만들기에 일조했다.

 

왕으로 등극한 다윗은 새로 정복한 예루살렘에 궤를 안치할 성전을 지어 전통가치와 혁신가치의 융합을 꾀했으며, 이스라엘에 왕조신학을 도입해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 그러나 정치적 위상이 올라감에 따라 다윗의 성품과 행동은 점점 ‘모든 이방나라’의 왕처럼 변해갔으며, 이는 밧세바 사건 이후 강간과 살인과 반역의 피바람을 불러들이며 그의 내리막길을 재촉했다. 노년을 맞은 다윗은 나단의 계책에 속아 솔로몬을 후계자로 옹립했고, 정치적 고려로 제거하지 못했던 요압과 시므이를 죽일 것을 솔로몬에게 당부함으로서 마지막까지 어두운 내면을 드러냈다.

 

사울은 사사시대에서 군주시대로 이행하는 격동기에 등장해 자신의 소임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다윗의 존재 때문에 삶 뿐 아니라 후대에 전해진 기억마저 뒤틀려버린 ‘일그러진 영웅’이었으며, 다윗은 사울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후세에 영웅으로 기억되는 데도 성공했지만 실제로는 시대적·신학적 필요에 의해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진 ‘만들어진 영웅’이었다. 저자는 ‘일그러진 영웅’이 일그러진 데는 ‘만들어진 영웅’의 역할이 컸으며, ‘만들어진 영웅’은 ‘일그러진 영웅’ 때문에 우리가 아는 대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만들어진 영웅’은 살아남아 메시아의 조상이 됐지만, ‘일그러진 영웅’은 만들어진 영웅과의 대결에서 패한 채 잊혀져 갔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서 일그러진 영웅이 만들어진 영웅과의 대결에서 패한 후 잊히는 역사가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지 반문한다.

 

여성신학자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는 성서전승 속에서 ‘해방의 동전’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해석전통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심의 해석학’을 주창한다. 영문학자 임철규 교수는 위대한 문학이란 망각 속에 묻혀 있는 희생자들을 역사 속으로 불러내 다시 기억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며 장례를 지내주는 애도의 행위라고 말한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메시아는 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을 발굴해 기억하고 애도하는 현재의 자리인 ‘지금시간’에 도래하며, 역사가의 과업은 회상과 애도를 통해 과거를 회복하는 힘과 미래를 유토피아적으로 여는 힘이 함께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만들어진 영웅’인 다윗의 어두운 뒷모습을 살피고 ‘일그러진 영웅’으로 낙인찍혀 잊혀져 간 사울을 복권하려는 저자의 시도야말로 의심-기억-애도-혁명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적인 해방을 꿈꾸는 실천의 몸짓이 아닐까? 이 책이 압살롬과 아도니아가 실패했던 다윗에 대한 ‘반란’과 사울의 ‘복권’에 완전히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다윗이라는 강고한 성벽에 균열을 내고 사울이라는 고요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을 깨우고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길 기대해 본다.

 

정한욱/우리 안과 원장이며 독서 블러그 ‘서음인(書淫人)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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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찬란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울을 일그러뜨려야 만 했을까?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9. 10. 11. 07:17

다윗을 찬란한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울을 일그러뜨려야 만 했을까?

 

 

사울은 오랫동안 잊혔던 인물이다. 그의 이름과 생애를 대충 아는 사람에게조차 잊혀왔다. 반면 다윗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추앙받아왔다. 무엇이 사울을 잊힌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다윗은 무엇 때문에 그토록 추앙받아왔을까? 우리가 갖고 있는 사울의 초상은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반면 다윗은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다. 누가 사울을 이토록 일그러뜨렸을까? 무엇이 다윗을 이처럼 화려하게 꾸몄을까?

 

 

 

사울은 이스라엘의 사사들이 다스렸던 지파공동체시대에서 왕이 통치했던 군주제시대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첫 왕이었다. 당시 고대 중동지역의 거대 문화권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는 물론이고 가나안의 작은 종족들도 모두 왕이 다스렸다. 이스라엘에도 왕정이 낯선 제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는 오랜 전통의 야훼 유일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이나 인간이 왕의 자리에 앉는 것을 극구 반대하는 세력이 존재했다.

 

이 전통의 대변자인 사무엘에게 백성들은 왕을 달라고 요구했다. 야훼가 마지못해 이 요구를 들어준 데는 외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서 안정적인 리더십이 필수적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함께 세금과 직업군대 등 관료제를 유지할만한 여력이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사울과 다윗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후대의 역사는 사울을 일그러뜨리는 값을 지불하고 다윗을 찬란한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윗을 그렇게 미화하기 위해서는 사울을 일그러뜨려야 했다. 물론 사울이 다윗을 능가하는 인간적인 매력을 갖췄다고 볼 수는 없다. 사울은 사울대로, 다윗은 다윗대로 매력과 약점을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울은 약점이 부각되었고 다윗은 매력이 두드러지게 강조됐다.

 

우리가 <사무엘서>에서 만나는 사울과 다윗은 신명기 역사가로 짐작되는 설화자에 의해 평가된 사울과 다윗이다. <사무엘서>는 이미 사울과 다윗에 대한 평전인 셈이다. 이 책은 이 평전을 평가하는 책이다. 곧 설화자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평가하는 책으로서 ‘평전에 대한 평전’인 셈이다. 이 책은 다윗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평가를 교정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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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와 순례로서의 독서를 실천한 옛사람의 숨결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9. 7. 23. 13:24

구도와 순례로서의 독서를 실천한 옛사람의 숨결

 

1.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시편>의 한두 편을 외우거나 아니면 몇 구절이라도 암송하는 구절이 있을 듯합니다. 저도 어린 시절 교회에서 시편 1편과 23편을 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시편󰡕은 제게 어떤 불편함과 곤혹감을 안겨주는 책이 되었고, 그래서 멀리한 적도 있습니다. 까닭은 시인의 탄식과 원망 속에 선인/악인,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 타인을 향한 분노와 상대방을 적대하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기 때문입니다.(<시편>의 표층만을 본 사람의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2.

그러나 어느 날, <시편>을 한 편 한 편 다시 읽어나갔습니다. 무겁고 지친 마음 때문일까, 󰡔시편󰡕이 제 마음을 그대로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시편>에 이끌리어 책을 찾다 C.S. 루이스의 󰡔시편사색󰡕과 김기석 목사님의 시편묵상이 담긴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를 만났습니다. 김기석 목사님의 시편묵상을 읽어가는 동안  <시편>은 제 마음의 강으로 점점 흘러 들어왔고, 인간의 정직한 아픔과 호소,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자, 바닥으로 내려간 자의 절절한 탄식이자 기도로 다가왔습니다.

 

3.

이렇게  <시편>과의 만남이 이어지는 동안, 무더위가 찾아오는 계절, 귀한 손님을 만났습니다. 다름 아닌 송대선 목사님의 옮김과 풀이가 담긴 오경웅(吳經熊) 선생의 <<시편사색>>입니다. 출간 소식을 듣자 먼저 기쁨과 반가움이 겹쳤습니다. 학부시절, 목사로서 동양철학을 가르치셨던 현재(鉉齋) 김흥호(金興浩) 선생님의 ‘선(禪)과 현대철학’이란 과목에서 읽은 책이 오경웅 선생의 󰡔선(禪)의 황금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이후로 선생의 자서전 󰡔동서의 피안󰡕도 졸업을 앞두고 읽으면서 그분 영혼 속에 스며든 그리스도교의 진리와 향기가 어떻게 고백되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4.

오경웅 선생은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는 아이”(<<동서의 피안>>)라고 고백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백이 있기까지 겉으로 드러난 삶과 달리 그의 이면의 삶은 가파른 고개들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겉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속사람이 썩어 감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5.

시는 마음의 소리라고 했습니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오경웅 선생이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시편>속에서 들은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공자는 '시(詩)'(<<시경>>) 삼백 편을 ‘생각에 간사함이 없다’(思無邪)는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인간의 솔직한 속내를 담은 노래에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귀하게 여긴 그였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라 봅니다. 전통시대 동양의 문인과 철학자들이 모두 시를 쓰고, 현실의 세계에 이루지 못한 꿈과 열망, 한과 고통, 속절없는 삶의 허망을 시를 통해 드러낸 까닭도 이러한 공자의 마음에 잇닿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6.

<<시편사색>>을 펼치면, 동양의 전통학문과 서학(西學)의 세례를 고루 받은 오경웅 선생의 정신에 동양고전의 세계가 얼마나 깊게 배어있는가, 그 온축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는 동양고전의 세계, 유불도 삼교를 받아들이면서도, 그리스도교는 ‘동서(東西)와 신구(新舊)를 초월’하고, 그리스도께서 “내 생활의 통일을 이루어주시는 본질”이라고 고백합니다.(<<동서의 피안>>) 그런 그가 신의 은총을 입은 자만이 옮길 수 있는 언어로 <시편>을 한 자 한 자 한문으로 옮기고 새겨 넣었습니다. 하여 선생의 학문과 신앙의 깊이가 오롯한 <<시편사색>>에는 동양의 방대한 고전들이 녹아있습니다. 그것을 풀어놓지 않으면 󰡔시편사색󰡕의 의미가 드러나지 못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사색>>의 출전과 관련 고전들을 역자 송대선 목사님이 빠짐없이 찾아내어 제시하였고, 아울러 당신의 사색의 고갱이를 곳곳에 실어놓았습니다. 목사님의 해설을 읽는 동안, 오래 묵히고 삭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글임을 책의 어느 쪽을 펼쳐보아도 쉬이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7.

부족하나 저는 10여 년 째 신학대학에서 동양철학과 고전을 강의해오면서 어떻게 하면 동양의 언어로 하느님의 뜻과 말씀, 은총을 표현할 수 있을까를 모색해왔습니다. 동양철학자로서 목회자가 될 제자들, 목회자, 넓게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들을 구상해왔습니다. 동양고전의 세계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제자들 중 깊이 있는 목회자들이 나오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람에서 제자들에게 성경 옆에 󰡔논어󰡕나 <<노자>>, <<주역>> 등 동양고전을 늘 곁에 두고 반복낭독, 음미하길 권유하곤 했습니다. 언젠가 <<논어>>를 성경 곁에 두고 읽으며 묵상한다는 제자들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시편사색>>을 읽어가는 동안 미력이나 쓰고 싶었던 책의 한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해 신기하고, 저자와 역자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염도 교차했습니다.

 

8.

그리스도인이자 동양철학자인 제가 받는 물음 중 하나는 그리스도교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란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그러한 질문을 주신 분들은 동양, 특히 유학에서는 수신과 수양을 강조하지 않는가, 자기의 변화를 자신 밖에서 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니 기도가 강조되는 것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답을 하곤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제게 인간의 유한함을 깊이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9.

<<시편사색>>은 인간의 유한함, 하느님의 무한함이 드러납니다. 이 간극을 어떠한 언어로 채워 넣을 수 있을까.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 <<시편사색>>의 책장을 넘기면서 하느님 없는 인간의 비참을 토로하면서도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 파스칼. 과학의 천재이자 압도적인 지성의 소유자였으나 하느님을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회심한 파스칼이 떠올랐습니다.

 

10.

성서의 뜻을 밝히고자 동양고전을 맥락 없이 끌어와 현학을 면치 못한 책을 더러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사색>>은 저의 염려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확인하게 해주었습니다. 오경웅의 시편 번역이 방대한 동양고전의 세계에 출전과 전고를 두고 있음을 또렷하게 보여주면서, 앞에서도 비쳤듯이, 무엇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송 목사님이 동양고전의 알짬을 깊이 풀어낸 대목들을 만나며 놀랐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다보니 책장을 넘기다 밑줄을 그은 대목들도 여럿입니다. 오경웅 선생의 고심을 드러내면서 송대선 목사님의 사색을 겹쳐놓은 대목들에도 공명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시편사색>>을 오경웅 선생과 송대선 목사님의 공저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저의 경우 송대선 목사님이 동양적 사유와 그리스도교를 비교하신 부분을 특히 주목하게 되었는데요, 다소 길지만 직접 음미해보시면 좋을 듯하여 아래에 옮겨보았습니다.(저로서는 이러한 동양적 사유와의 비교가 단순한 비교로 그치지 않고, 송 목사님의 안목 속에 그리스도교 신앙의 깊이를 더욱 드러내었다고 생각합니다. 관견이나, 이 점이 󰡔시편사색󰡕이 가진 여러 미덕들 중 가장 귀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의 구원을 체험하고 그것을 되새기며 온전히 주의 뜻대로 행하게 되는 것! 이것이 믿음의 길이고 성장이다. 유학의 공부론과 비교해보자. 유학의 공부는 널리 배우고, 의심이 가는 부분을 자세히 물으며, 배워서 아는 것을 반성해서 그 생각에 신실하려 하며, 잘 분별하여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되고, 독실히 힘써 실천하는 것, 즉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 이 다섯을 공부라 한다.”(227쪽)

 

“7절에서 오경웅은 하느님을 지성(至誠)이라 읊었다… 동양적 사유의 장점은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면서 사람이 능히 그려볼 수 있고 닮아갈 수 있는 언어를 찾고자 힘쓴 것인데 그 가운데 소중한 언어가 성(誠)이라 하겠다. 성(誠)은 충(忠, 이때의 충은 충성스러움보다 그 마음의 중심의 마음을 뜻하는 정직과 가깝다)과 정직이기에 그 근본에 거짓이 전혀 없음이다.”(290쪽)

 

“히브리 시 80편은 유독 ‘만군(萬軍)의 주님’이라는 호칭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오경웅은 이 호칭을 피하고 있다. 고대 히브리적인 호칭이어서일까” 그가 믿고 의뢰하는 하느님을 전쟁의 신이라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있어서인가? 그가 체험한 그리스도 신앙 안에서든, 그의 토양이 된 동양적 사유 안에서든 만군의 주님이라는 호칭이 자리 잡기 어려워 보인다. 하늘과 땅의 자연스런 이치로 모든 만물을 생하게 하고 잘 기르며, 인생을 잘 교화하여 바르지 못한 것들을 버리고 참된 이치에 따라 살도록 돕는 것이 성인의 길이요 하늘의 길이라 여기는 사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목민족의 사유와 농경민족의 사유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살아온 역사적 경험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이다.”(425쪽)

 

“히브리 시인이 하느님의 의(義)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오경웅은 그러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인생의 길을 안내한다. 유학의 사유에서 인(仁)은 언제나 거할 집(宅)으로 비유되고 의(義)는 걸어야 할 길(路)로 비유되곤 해서 안택정로(安宅正路)라고 하기도 한다… 히브리 시인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청하는데 오경웅은 이를 방택(芳澤)과 춘풍(春風)으로 번역하여 동양적 정서의 맛을 더한다.”(445쪽)

 

“시인은 하느님 앞에서 그의 마음속 슬픔과 분노를 토해놓는다. 그는 이 모든 시련을 다 견뎌내면서도 남을 미워하지 않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그는 나약한 인간이다. 그 나약한 인생이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속을 다 꺼내놓으면서 그는 점차 미워할 사람에게서 자비를 베푸시고 신원(伸冤)하시는 하느님께로 옮겨간다. 자신이 겪은 시련과 고난의 감정에서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로 눈길이 옮겨가는 것이 기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가장 연약한 인간의 모습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시간이 되고 은혜의 공간이 된다. 그에 반해 동양적 전통에서는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진술이기도 하다. 오히려 도리에 맞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끊을 때 그 사람의 허물을 꺼내지 않고 덮는 것을 마땅히 여겼다. 시편의 기도가 하느님께 드리는 고발과 탄원이라면 동양적 기저에는 침묵 가운데 스스로 소화함이 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다 할 수 없으니 잘 새길 일이다.”(578쪽)

 

“오경웅은 5절과 7절에서 먼저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위가 하나(知行合一)이신 분임을 역설하고 있다. …송대 신유학에서 지식인이 배우고 아는 바대로 행하거나 살아내지 못하는 괴리와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큰 논쟁거리였다… 유학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논의된 주제를 오경웅은 신앙 안에서 풀어간다. 그는 이 시편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함으로 즉 행하고서야 비로소 앎이 있다고 말한다.(能行始有知)”(585쪽)

 

“도덕경적 사유가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유혹에 깨어있고자 한다면 성서적 사유는 그분의 거룩한 이름과 말씀에 오롯이 뛰어들어 그분의 은혜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전자가 유한한 인간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런 인간이기에 오롯이 투신할 영원을 사모할 수밖에 없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서로 멀리 있지 않다. 그렇게 오경웅은 이 시편의 제목을 그분의 이름과 말씀이라고 제목을 붙여 머뭇거리는 인생을 초대하였다.”(737쪽)

 

“동양적 사유에서는 마땅한 결과로서 인과(因果)를 말하지만 오경웅은 이 시편의 이야기를 통해 인과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 다름 아니다. 눈앞의 왜곡된 현실이나 시인이 겪는 아픔에 휘둘리지 않고 이 모든 것을 끝내 바로잡으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를 인과로 표현하고 있다.”(748쪽)

 

“동양적 사유에서 숙명에 대한 사유는 인생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오경웅은 이 숙명을 그러한 수동적 사유보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뜻과 장차 이루실 역사로 풀고자 한다. 하느님의 계획이며 섭리이시다.”(786쪽)

 

12.

마지막으로 󰡔시편사색󰡕을 읽어가는 동안, 동양의 전통적인 독서법이 체득된 책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경웅 선생님과 송대선 목사님의 음미(吟味), 우유(優游), 함영(涵泳), 저작(咀嚼), 잠심(潛心), 숙독(熟讀), 완색(玩索)… 책을 읽는 내내 성현의 마음을 읽기 위한 구도와 순례로서의 독서를 실천한 옛사람의 숨결을 경험했습니다. 책장을 덮고, 읽고 난 후의 소회를 정리하며, 책을 책상머리에 놓아두었습니다. <<시편사색>>이 그리스도의 향기이자 편지로서 살아가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귀한 신앙의 선물이 되길 바라며, 향기와 깊이를 잃어버린 오늘 한국 그리스도교에 오래도록 널리 읽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임종수/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 성균관대학교에서 동양철학으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고,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역임했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동양철학과 고전, 종교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 <<종교속의 철학 철학속의 종교>>(공저),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만든 역사 1>>(공저), <<21세기 보편영성으로서 誠과 孝>>(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중국미학사中國美學史:선진시대에서 명청시대까지>>(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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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랗게 질린’시대에, ‘하나님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시절에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8. 11. 22. 08:35

‘새파랗게 질린’시대에

‘하나님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시절에

 

부제(副題)는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다. 읽으니 우선 글이 저자의 인품처럼 잔잔하고 진진하다. 묵직한 중량감이 독서를 차분하게 한다. 인용된 예레미야 시대의 정세와 동요는 화염과 폭풍 같을지라도 그 숨 가쁜 현실을 행간에 묻어둔 채 담백하게 기록된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 내려가는 저자의 말씀을 대하는 진중한 숨결이 느껴진다.

 

실존이 놓인 현실과 더불어 가는 슬픔

 

그것은 우선 겸손한 자세다. 어떤 겸손인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4,5)”,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니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1:6).(「훨씬, 무한히」,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너무나 바쁘고 들떠있는 주변세상의 속력과 속도에 제압당하며 살아가는 세태 속에서, 이런 걸 느끼기도 어렵지만, 드러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자는 아마 예레미야서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걸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그것부터 느끼게 해준다. 복중에 짓기 전에, 태에서 나오기 전에,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첫마디로 지극한 슬픔을 표명한다.

 

그 슬픔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현실과 직면한 민생의 고통과 다가오는 멸망의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와 더불어 있다. 그것은 차분한 사람의 슬픔이고,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다. 그는 세상의 선지자로 나서기 전, 남에게 무언가를 표명하기 전 이런 슬픔의 고백을 품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 풍경은 그래서 읽기도 전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거라고.

 

그러나 독자들이 저자를 따라 하루하루 시간을 들여(그렇게 읽으면 좋겠다) 예레미야의 발자취를 따라가노라면 삶과 존재의 신비에 대한 경외와 실존의 고백으로부터 나오는 겸손함과 그러한 자기부인이 주는 뜻밖 은총의 휴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비일지라도 실존이 놓인 현실과 더불어 가는 슬픔이고, 피치 못하게 선택받은 선지자(先知者)의 슬픔일지라도 자기는 물론 이 세상 전체를 부인함으로써 영생을 따라가는 은총의 과정이다.(자기를 줌〔버림〕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가능의 영역에서 가능한 꿈과 비전으로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 비현실의 현실을,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가능하고 소멸되지 않는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의 양식(성만찬, The Holy Communion)일 것이다.

 

 

하나님은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저자의 손가락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관심이 늘 이 세상의 중심보다 구석진 곳, 외진 곳, 그늘진 곳, 그래서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외면당하는 곳,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무명의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고 가리켜준다.(「하나님의 방법」) 그것은 무명(無名)이나 유명(有明), 예레미야가 그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자명하다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굳이 손가락까지 짚어가며 읽음으로써 새롭게 발견하다니. 마치 본래 있던 대륙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대륙’이라 부른 사람만큼이나 신기하다.

 

저자는 그 항목의 결미에 이렇게 쓴다. ‘말을 잘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어눌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43쪽) 그러므로 그것은 「약점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통해 용기를 낸 겸손한 사람의 의연하고 결의에 찬 선언이다.

 

예레미야가 살아간 시대에 예레미야는 지금 우리가 읽는 예레미야가 아니었다. 당대에 그는 예언자로 인정되지 못했다. 경멸받고 무시당했으며 욕설과 조롱과 투옥과 추방과 피체를 당해야 했고 원치 않는 곳(이집트)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시대에 ‘하나님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시절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예언의 말씀을 업으로 삼아 삶을 살아갔다. 그의 전 청춘을 다 바쳐서.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파국으로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의 예언서처럼 예레미야와 함께 우는 여정도 거기서 끝난다. 예레미야가 우리가 읽는 예레미야가 아니듯이, 예레미야와 함께 우는 독서 역시 항용 우리의 독서(우리 시대의 설교)와 같지 않는 점이 비상하다. 그 비상함은 현실을 과장하거나 소망을 부풀리거나 억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일체의 욕망과 야망과 소망과 아첨을 거부하는 예언자의 예언자적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하나 결연하고 피동적이나 단호하게 행동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지시해준다.

 

겸손과 결의와 절제의 굳셈

 

설교를 업으로 삼고 사는 목사로서 동시대의 설교에 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나의 스승이지만 그 말은 다른 의미론 모두가 나의 경쟁자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때론 선의의, 때론 불만족과 저항과 대립의 경쟁이기도 하다. 모두가 선의의 경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교도 그 무엇도 선행하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지만 설교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바람직하다는 것보다 그저 어떤 사람이냐 정도의 무심함이 필요하다. 무심함이지만 과학성이 있는 무심함.

 

모두들 목표와 비전과 소망과 꿈과 야망의 구획된 프로젝트 안에서 발버둥치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만족스럽지 못한 총체적 불만이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바로 그런 분주함과 분요함으로부터 지극한 샬롬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전파해야할 교회와 교회의 설교가 그러한 불만족의 표상이 되었다. 예레미야가 나와도 열 명, 스무 명, 백 명은 나올 법 한. 그러나 저자의 예레미야 읽기는 그러한 불만족에 대한 속 시원한 해법이 아닌 그래서 더욱 불만족스러운 해법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고전적이고 너무나 겸손하고 너무나 정중한 건지도.

 

그러나 바로 그런 겸손과 결의와 절제의 굳셈이 또 다른 섣부른 분요함을 추가하는 설교가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차분함과 고요함의 미덕(美德)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심한 듯 치밀한 과학이 들어있는. 저자는 우리(나)로 하여금 예레미야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예레미야를 읽는 사람됨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가시덤불과 묵은 땅을 내버려 둔 채 그 위에서 요란하게 믿음의 언구럭만 떨고 있는 것은 혹 아닐까?’(「언구럭을 떨지 말라」) 정말 싸워야할 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고 정말 싸운다는 건 무엇인지, 저자는 마치 말과 경주하듯 끝까지 겸손과 결의의 손가락을 떼지 않는다.

 

*

일독(一讀)을 권한다. 매 회 분량은 길지 않다. 차분한 독서. 두런두런 들려주는 진진한 음성. 우렁우렁 울리는 마음의 공명. 그리고 예화로 꺼내보는 저자의 추억의 에피소드들 속에는 사람에 대한 따스한 사랑과 맛깔스런 이야기와 빛나는 지혜가 담겨 있다.

 

동화작가이기도 한 저자를 만나면 비전(秘傳)으로 간수해온 오래된 고전의 신선함이랄까 하는 동화적(?) 발견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를 통해 독자들이 동화 속 짤랑 거리는 금화와 같은 순결한 정신의 힘을 만나게 되기를. 여러 번역을 대조하며 짚어가는 저자의 손가락 끝에서 요란한 세상 가운데 본래 있는 평화를 찾아가는 좁은 문을 발견하기를. 깡그리 끔찍한 폐허일지라도, 웅덩이에 빠졌을지라도, 낮과 밤이 자신의 때를 따르는 한, 흔들릴수록 중심에 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기를. 흐르는 강물처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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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가야 할 길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8. 10. 11. 12:10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가야 할 길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의 요청으로 시스트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 대작을 그렸다. 그는 천장을 9개의 틀로 나누고 그것을 다시 34개 면으로 분할하여 작업했다. 이미 ‘피에타’와 ‘다비드 상’을 통해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 그가 프레스코화를 그린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교황과의 계약 때문에 마지못해 감당한 일이었다. 1508년에 시작하여 완성하기까지 했으니 무려 4년의 시간이 걸렸다. 위태로운 비계 위에 올라가서 거의 누운 자세로 그림을 그리느라 그는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아직 종교개혁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돈과 권세를 탐닉하는 타락한 교권에 대한 저항은 저 기층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완성할 무렵 그는 사람들의 눈에 띄는 자리에 예언자 예레미야와 요나를 그려 넣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의 얼굴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왜 하필이면 이 두 예언자를 마지막에 그린 것일까? 옛 세계는 기울어진 담처럼 균형을 잃고 있었고, 새로운 세계는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은 시절이었다. 두 세계가 부딪치면서 증오와 배제의 언어가 넘실거렸다. 생각이 다른 사람, 교권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한 적대적 시선이 유럽을 내부적으로 허물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시대를 향해 참회하는 니느웨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마음을 증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너지는 조국의 운명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슬피 울던 예레미야의 마음을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한희철 목사는 “그럴 수 있다면 언제고 예레미야를 만나 실컷 울리라/여전히 젖어 있는 그의 두 눈을 보면 왈칵 눈물이 솟으리라”고 고백한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목회자로 살아가는 동안 그는 자기 시대의 모순과 어둠을 온몸으로 앓았던 예레미야의 심정에 깊이 동조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지도자라 하는 이들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터무니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잇속 차리는 일에 발밭을 뿐이다.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라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평안이 없는 데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말하며 사람들을 혼곤한 잠으로 인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정신 차리라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그 외침을 부담스럽게 여길 뿐, 삶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앞서 눈 뜬 이들은 울 수밖에 없다.

 

한희철 목사는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듣는 사람이다. 그는 이 땅 구석구석에서 자기만의 빛깔로 주어진 생명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너무도 평범하기에 누구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보편성의 보화를 찾아내 사람들에게 전해준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담배를 끊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백발노인의 회한이며, “하나님, 해두해두 너무 하십니다”라고 탄식하며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마음을 드러낸 여인, 굴참나무 껍질처럼 깊게 패이고 갈라진 틈을 따라 흙물과 풀물이 밴 손으로 땅을 만지는 정직한 농부들의 삶의 내력이 성경 이야기와 합류하고 있다. 예수는 종교적인 언어를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오롯이 드러내시지 않았던가? 일상 속에서 거룩함을 볼 눈이 없다면 성경에서 거룩을 발견하는 일 또한 불가능할 터.

 

이런 시선의 따뜻함과 깊이 때문일 것이다. 그가 두런두런 들려주는 예레미야 이야기는 예레미야 시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걸린 외줄을 육신을 지닌 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도 상통하게 마련이다. 자기 시대의 아픔 때문에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에 한희철의 마음이 공명하고, 그 공명이 또 다른 공명을 일으킨다. 물결처럼 번져가는 공명, 그 깊은 울림에 우리 영혼을 잇댈 때 영혼은 깊어지고 맑아진다.

 

언어에 민감한 그는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혹은 번역한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다. 자기 가슴에 깃든 생각과 마음을 뒤적이며 글을 써온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글을 쓰는 이들은 구둣점 하나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다. 그 마음을 알기에 그는 정성스럽게 텍스트와 마주한다. 그리하여 텍스트 혹은 기호 속에 다 담아내지 못한 숨겨진 메시지까지 읽어낸다. 주름 잡힌 텍스트인 성경은 그 주름 속에 깃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에게 풍성한 세계를 열어 보이는 법이다. 친절한 훈장님처럼 한자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어 보여주는 까닭은 언어 너머의 세계를 가리켜 보이기 위함이다.

 

성경에 대한 해석 권한을 독점하려는 이들이 있다. 물론 성경을 바로 읽기 위해서는 원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텍스트가 탄생한 시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도구를 갖추었다고 하여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 속에 깃든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한희철 목사의 예레미야 읽기에 동참하려는 이들은 일단 하나님 말씀에 대한 모든 선입견을 내려놓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성경 해석에 대한 단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주체가 되기보다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가늠해보려는 이들, 자기 삶을 새롭게 정위해보려는 이들에게 이 책은 좋은 안내자가 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도 좋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여기저기 들춰보아도 상관없다. 그 어느 부분에서든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예레미야의 마음, 그리고 한희철 목사의 마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자기 얼굴로 예레미야의 모습을 그렸다면, 한희철 목사는 예레미야의 얼굴로 자기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다시는 주님 말씀 전하지 않으리라 다짐할 때마다/뼛속을 따라 심장이 타들어가던” 그 마음, “애써 적은 주님의 말씀/서걱서걱 왕의 칼에 베어질 때” 함께 베이고 말았던 그 마음을 열 번 스무 번 혹은 수 백 번 더 겪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 길은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가야 할 길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의 동행자가 될 차례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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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현경장(解弦更張)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8. 4. 23. 10:36

해현경장(解弦更張)


굳이 프랙탈 이론을 들지 않더라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는 우리의 일생을 닮게 마련이다. 인생은 오늘의 점철이라지 않던가? “이 세상 뭘 하러 왔던고?/얼굴 하나 보러 왔지,/참 얼굴 하나 보고 가잠이/우리 삶이지.” 요즘 들어 함석헌 선생의 시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삶이 부박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가만히 앉아 살아오는 동안 마주쳤던 그 많은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맑고 고운 얼굴, 따뜻하고 고요한 얼굴, 수심 가득한 얼굴, 비굴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 독기 어린 얼굴…. 그러다가 문득 다른 이들의 눈에 비친 ‘내 얼굴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아뜩해진다. 누구나 한번쯤은 길을 걷다가 창문에 얼비친 자기 모습이 낯설다고 생각했던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얼굴을 ‘얼의 골짜기’라고 설명한 분도 계시지만, 우리 얼굴은 정확하게 우리 내면을 반영한다. 옛날 초상화가들은 대상의 외모만 그린 게 아니라, 그들의 내면의 풍경까지도 그리려 했다 한다. 전신사조(傳神寫照)가 그것이다.


말이 장황해졌지만 내게도 아름다운 얼굴이 한 분 계시다. 민영진 박사님(이하 민영진)이다. 20대 초반에 만나 60대에 이른 지금까지도 그 얼굴은 내게 시종 맑고 환하게 기억된다. 민영진은 학문의 즐거움과 엄정함을 가르치면서도, 학생들로부터도 배우려는 태도를 시종 견지하신다. 그런 학생 정신이야말로 그 얼굴에 깃든 맑음의 뿌리인지도 모르겠다.


몰강스러운 세태조차 민영진을 후락(朽落)의 자리로 이끌어가지 못했다. 어지간하면 열정 따위는 시드럭부드럭 스러질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명징한 인식과 표현의 욕구는 줄어들지 않으신 듯하다. 성서신학자와 성경번역자로 살아오는 동안 누구보다도 언어에 예민하였기에, 그 여정이 시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시인들은 일상적인 언어를 재배치하여 놀라운 이미지와 의미의 세계를 드러낸다. 언어의 올가미로 영원을 잡아채는 것, 바로 그것이 시적 순간이다.


민영진의 시는 과잉을 모른다. 놀랍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심상에 떠오르는 것들을 관념으로 비틀거나 베일로 가리지 않고 직정적으로 그려낸다. 그렇다고 하여 나이브하지 않다. 그 언어는 정갈하고 고요하다. 성품이 시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에게 시는 삶의 진실과 진정을 드러내는 통로이고, 삶은 시의 자양분이 된다. 지금 민영진에게 중요한 것은 가족과 일상의 성스러움, 성경, 언어 등이다.




민영진의 삶은 아내인 김명현과 함께 빚어온 작품이다. 그에게 아내는 “하나님의 숨/흙에 닿아 한 점 혈육/우주 바꾸고 몸 바꾸어”(<만물의 어머니> 중에서) 나타난 존재이다. 함께 걸어온 긴 세월을 민영진은 기꺼움과 고마움으로 돌아본다. 유학생활 중에 잃었던 태중의 아기에 대한 기억과 슬픔이 그 둘을 든든하게 이어주는 정서적 밑절미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가정에서나 흔히 일어날 법한 소소한 일상을 엿보며 슬그머니 미소를 짓는 것은 그 속에 담긴 따스한 정과 유머 때문이다. 깔끔한 아내와 털털한 남편, 추위 타는 남편과 더위가 싫은 아내, 사랑의 표현을 갈구하는 아내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남편은 늘 티격태격한다. 손톱 발톱을 깎다가 궤도를 이탈한 녀석 때문에 방청소를 하던 아내에게 지청구를 듣고, 한밤중에 소변을 보고 변기 깔개를 내려놓지 않았다가 타박을 당할 때면 남편은 애꿎은 친구들을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여보, 당신도 알지 그 친구,

거 왜 가끔 그 모임에 나오는 그 키 큰 친구

요즘, 손톱 발톱이 다 빠졌대

면역력 결핍증이라나 뭐라나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겠대, 멀쩡했잖아,

손톱 발톱이 없으니까

손가락도 발가락도 제 구실을 못하고

폐인(廢人) 같아 보여

- <손톱 발톱> 중에서


여보, 당신, 내 친구 김 아무개 알지?

비만이라고 걱정하던

그 친구 요즘 소변을 못 본대

터질 듯 마려운데 안 나온다나?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바지가 다 젖어있다나 뭐라더라?

- <쉬> 중에서


나이 듦의 애잔함이 능청스러움과 버무려져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소소한 일상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장성한 자식들과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온 그 놀라운 손님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자못 따스하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신비이다. 손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우리에게 보내주신/한 편의 시(詩)”(<손자>)이고, 손녀는 “당신 품에 안고 있던 딸/예쁘게 키우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존재(<편지>)이다. 아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태에서 태어난 거룩하고 신비한 존재(<아이들아>)이다. 아이들은 생명의 신비함과 거룩함을 가리키는 징표로 우리 가운데 있다. 생명의 주인이신 분 안에서라면 늙어감조차 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회한조차 없을 수는 없다. 주어진 시간을 한껏 살아내기는 했지만, 어떤 일도 완전할 수는 없기에, 못다 한 일에 대한 회한이 그림자처럼 영혼에 드리우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성경번역자로 살아온 민영진은 맡겨진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린다. 그는 하나님이 툭 치고 지나갈 때마다 익숙했던 모국어가 서툴러지고, 그 때문에 메시지를 적절한 언어로 바꿀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청중들에게 익숙한 구문론이나 문법을 지킬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음과 하기 싫음 사이의 경계선에서 바장이다가 그는 자신이 “늘 모국어를 배반하는 설교”를 해왔다고 자책한다(<날 건드리더라>). 짐짓 해보는 겸양의 말이 아니라, 준엄한 자기 성찰에서 빚어진 말이다.


그는 “광야의 포효(咆哮)”가 되지 못하고, 볼모로 잡혀온 이후부터 “침묵한 덕분에/운 좋게도 도살만은 피했”(<볼모>)다고 말한다. 민영진은 ‘그래도 이만하면 잘 해온 것 아닌가’ 하는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 엄정한 심판관이 되어 자신의 허물을 폭로한다. 그는 “번역자는/오늘도/의미의 바다를 표류한다”(<표류>)고 노래한다. 말씀 속에 담겨 있는 의미의 심연을 드러낼 적절한 언어를 찾으려는 노력은 언제나 좌절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막막함을 견디며 그는 살아왔다. 이제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떠날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산다. 인생의 마지막 날은 유예된 집행일 뿐, 그날은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울 때는 울면서 왔었습니다만

돌아가는 날은

당신을 부르며 갈 것입니다

당신께서 오라 하실 때

쇠약해진 이 몸 당신 품에 안기어

깊은 잠, 푹 들게 하여 주십시오

- <새 하늘, 새 땅> 중에서


시인은 이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무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것들임을 절감하며 만물과 소통하고 싶어 한다. 식물, 동물, 바위, 흙과의 대화를 꿈꾸는 것이다. 우주의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처럼 그는 삼라만상에 빼곡히 적힌 글을 해독하고 싶어 한다(<사파리>). 그것은 인간의 오염된 언어 혹은 분절된 언어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언어 너머의 언어가 필요하다. 구상 시인은 마음의 눈만 뜬다면 “어느 곳에나 신비는 충만하고/어느 곳에나 생명은 약동한다.//베란다의 봄 국화가 시든 화분에/제풀에 돋아난 애기똥풀이나/그 옆 수챗구멍 질척한 쇠그물에/오물거리는 새끼 지렁이를 보려므나!//어느 곳에나 신비는 충만하고/어느 곳에나 생명은 약동한다”고 노래했다(<마음의 눈만 뜬다면>). 민영진이 당도한 세계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에게 세계는 신비의 정원이다. 마음의 눈이 열리자 늘 밥상에 오르는 각종 나물이 희생제물임을 깨닫게 된다(<나물>). 몸 안에 들어와 우리의 몸을 이루니 말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나물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호명 행위를 통해 그 나물들은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라 생명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 된다. 보아주는 사람이 있든 없든 때가 되면 피어났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스러지는 야생화 역시 그 생명 세계의 일원이다. “부레옥잠화, 금낭화, 물봉선화, 모싯대 꽃, 노루귀꽃, 등(燈)꽃….” 낯설기는 해도 그 귀한 야생화가 그곳에 있기에 세상이 온전하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시인은 은근한 소망을 피력한다. “구름패랭이, 꿩의비름, 말나리 꽃, 뻐국나리, 솔나리, 금꿩의 다리, 천일홍(天日紅)…/내 이름도 너희들 사이 어디쯤에 넣어볼까/다시 태어나는 날, 한번쯤은/너희들과 함께 야생초이고 싶다”(<야생화>).


해현경장(解弦更張), 거문고 줄을 풀어 다시 고쳐 맨다는 뜻이다. 시와 더불어 그의 삶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시작(詩作)은 그에게 다른 중요한 일들 사이에 부룩 박은 또 다른 일이 아니라, 성서신학자이자 성경번역자로 살아온 민영진의 삶의 여정 끝에 당도한 세계이다. 하이데거도 생의 말년에 시의 세계에 빠져들지 않았던가? 합리적 언어 혹은 학문적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세계, 오직 마음의 눈을 통해서만 보이는 신비한 세계가 그의 시를 통해 오롯이 드러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세상은 한결 풍요로워질 것이다. 상투적인 종교 언어에 식상한 이들의 눈이 민영진의 시를 통해 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 한희철/ 말씀은 다시 한 번 사람의 몸을 입고http://fzari.tistory.com/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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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우리 둘을 무슨 관계로 볼까?”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8. 4. 21. 12:19

“다른 사람들은 우리 둘을 무슨 관계로 볼까?” 


1968년에 결혼한 후 50주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우리 부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둘만 있어도 깔깔대며 잘 웃는다. 우리 부부의 웃음 묻은 이야기를 가끔씩 이야기하면 재미있다고 글로 써서 책을 내라는 사람도 있고 나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은 그동안 『민영진 어록』을 발표하라고 한다. 이것이 언제 책이 출간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우리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어 독자 여러분에게 웃음을 드리고 싶다. 우리의 이런 꾸밈없는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흠이 될지 욕이 될지도 모를 것 같아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의 삶이요 나의 사랑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냥 웃음을 선사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44년생이고 그이는 40년생이니 나는 그이보다 네 살이나 더 어리다. 결혼 후, 첫 새해를 맞아 남편은 갓 결혼한 새댁을 어른들께 인사시키고 싶었나보다. 어른들께 세배를 간다기에 치마저고리에 두루마기까지 차려 입고 거기에 걸맞도록 머리를 위로 올리는 업스타일을 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자가용이 없어서 택시를 타고 다녔다. 그이는 동안이고 날씬해서 어리게 보였고 나는 살이 통통(?)해서인지 더 늙게 보였나 보다. 택시기사가 나보고 누나냐고 묻는 게 아닌가! 난 너무 당황하고 화나고 기분이 안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에게 내가 간 빼 놓고 살아서 아마 늙어졌나보다며 이제부터는 당신이 간 빼 놓고 살라고 명령(?) 하였다. 그랬더니 그이 하는 말 “지금 누나 정도면 괜찮은 거지, 우리가 이 다음에 더 늙게 되면 제자들이 와서 “민 선생님, 어머님이 꽤 젊으시네요.” 할 때가 올 거란다. 그 후 20년이 지난 후부터 그이의 머리에는 은가루가 해를 더해갈수록 자꾸 자꾸 많이 뿌려진다. 난 너무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절대 염색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당신은 머리가 희어갈수록 멋도 더해진다고 아주 근사하다고 속삭여준다. 바로 로맨스 그레이 그 자체라고.


그이는 한복 입기를 즐겨 해서 신정이면 두 주간을 거의 한복을 입는다. 교회 갈 때도 마찬가지고, 어느 주일날 그이가 한복을 입으니 나도 한복을 입었다. 예배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힘들게 한복 입었는데 그냥 집으로 가기는 아까우니 근사한데 가서 커피라도 마시자고 했다. 우리는 어느 고급 호텔의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여기저기 사방을 보니 선보는 팀들이 많았다. 수상한 관계의 남녀들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이에게 “다른 사람들은 우리 둘을 무슨 관계로 볼까?” 하고 물었다. 그이의 말 “목사와 여신도 사이로 보겠지.”


《지구별에서 노닐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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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18. 4. 20. 08:57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대만신학자 송천성은 어머니를 가리켜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라 말했다. 생명을 낳아 기르는 행위의 소중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날이 갈수록 그 말이 실감난다. 현대문명은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의 폐쇄회로에 갇힌 이들은, 기쁨을 누릴 줄 모른다. 이웃은 신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합리성과 효율이 최상의 가치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삶은 부박하고 공허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마음 내려놓을 곳을 몰라 방황한다. 고향 상실, 안식 없음이 지금 우리 삶의 실상이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여성적인 것이 대체 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관계 지향적인 공감능력을 가리킨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시절 여성들은 주체로 살기보다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객체처럼 살아왔다. <씨알의 소리> 1978년 5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목은 “나야 뭐“였다. 함 선생은 아내 황득순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의 삶을 ‘나야 뭐’라는 말로 요약했다. “먹을거나, 입을거나, 뭣에서나, 자기는 늘 빼놓으면서 늘 하는 말의 첫 머리가 ‘나야 뭐……’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여인들의 삶이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지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 말이다. 지금은 세월이 달라졌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객체의 자리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주체가 된다는 것이 곧 외로운 단자로 살아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주체는 다른 이들과의 창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던가.



김명현 선생님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주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공부한 신학을 자양분 삼아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지속해왔다. 교회갱신을 위한 헌신, 여성들의 권익과 지도력 개발을 위한 활동에서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긴장을 해소시키는 건강한 유머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가정생활이야말로 바깥에서의 활동을 가능케 한 생명의 묘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속성을 돌봄, 존경, 지식, 책임이라 했다. 김명현 선생님은 그러한 사랑의 좋은 예이다. 가끔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표정과 말 속에 배어있는 남편에 대한 아낌없는 신뢰와 사랑은 곁에 있는 이들을 가만히 미소 짓게 만든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이어야 한다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들이다. 두 아들에 대한 존중과 신뢰,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실답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사는 것은 어쩌면 이 가없는 사랑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어제도 오늘도 마을 어귀를 지키며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맞아주는 품 넓은 느티나무를 닮아가고 있다.


민영진 박사님과 함께 걸어온 50년의 세월을 회고하고 또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이 글 모음집에는 배꼽 빠지게 만드는 웃음, 아련한 아픔,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가 넘실거린다.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비근한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장엄한 명분을 붙드는 것보다 거룩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도 일상의 일들 속에서 깃든 하늘나라의 광휘에 주목하시지 않았던가. 코헬렛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전도서 5:18).


우리의 영원한 중심이신 그분의 마음에 당도하기까지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빌고 또 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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