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2. 1. 22. 10:17

 

거의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오는 동안 길이 막힐 때마다 시편을 붙들고 살았다는 저자는 시편의 구절들이 거친 바다를 비추는 등대 구실을 해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층위를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욕망 사이에서 바장인다.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확신과 회의,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이 시도 때도 없이 갈마들며 삶의 무늬를 만든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삶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로 가득 차 있는 시편의 세계를 보여준다. 기쁨의 찬가가 있는가 하면 깊은 탄식이 있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가 하면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다. 가없는 용서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도 있지만 악인이나 원수들의 불행을 기원하는 시도 있다. 시편을 읽다가 가끔 그 적나라한 감정 표현에 놀라는 당혹스러운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편 속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마음을 다해 시편을 읽거나 낭송하는 일은 우리 속에 들끓고 있는 소리를 잠재우는 일이고,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현실이 어둡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가높아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용기를 내야 한다.아직도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는 게 우리현실이다.야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우상숭배자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믿음의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한일서 2:16)에서 자꾸 멀어져야 한다.그래야 자유로워진다.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욕망에 저항할 생각조차 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세상에 길들여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영혼의 발신음> 중에서

 

 

*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시편 27:3).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사람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부력을 경험해 본 사람의 고백이다. 길들인 독수리와 함께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날개를 편 채 유영하는 독수리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모습이 경이로웠다. 신앙인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일을 도외시하고 산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바람은 때로는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일 때도 있지만, 앞에 있는 장애물을 다 날려버리는 회오리바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깨우는 봄바람일 때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날려버리는 태풍일 때도 있다. 가깝게 느끼는 몇 분의 목사님들은 평소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고 겸손하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를 질타할 때는 사자로 변한다. 두 모습 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이다.

<영혼의 파열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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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부끄러움을 배우게 하면서도 한없이 기쁘게 만드는 책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2. 1. 22. 10:10

 
요즘은 어느 하루도 황폐하도록 기진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추악한 요괴들이 도처에 출몰해서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온 몸에 독(毒)이 퍼지겠다 싶을 정도다. 어쩌겠는가. 그러나 이렇게라도 싸우지 않으면 “악의 퇴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우리의 영혼을 스스로 돌보지 않으면 병이 깊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좋은 말씀 한 구절 가슴에 스미면 그게 그날의 구원이다. 우린 어느새 사원(寺院)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일년 열두달, 계절까지 포개어 하루하루의 짧은 일기처럼 쓰여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은 잠언이자 시편이며 말씀이다.
그건 세월로 빚어낸 영혼의 노작(勞作)이며 우리 모두를 위해 길어올린 기도의 생수(生水)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詩’란 ‘언어言의 사원寺’이다.” 우리는 그가 세운 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자신을 위한 방으로 인도되고 그 안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우며 벽을 마주하여 수련하는 자세를 익히고 숲속의 나무 한 그루가 되어 살아가는 시간을 깨우친다.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실력이나 능력만이 아니다. 더욱 신뢰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진실에서 비롯된.”
이런 족자가 걸려 있는 방에서 우리는 과욕을 부려 산 겉옷을 벗게 된다. 더는 껴 입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쁜 놈, 어리석은 놈’이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다. “그 중 나쁜 놈은, 다른 이의 분노를 자극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놈. 그 중 어리석은 놈은, 누군가의 충동에 생각 없이 분노하는 놈.” 해서 이런 충고도 더한다.
“북소리가 들리면 춤 출 일이 아니다. 북을 누가 치는 지를 살필 일이다.”
우리의 허위를 치는 목탁 소리도 들려준다. “말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혀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말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로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는 우리가 놓치 말아야 할 줄이 무언지 넌지시 일러준다.
“누군가를 향해 가장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랑이란....” 그러기에 이런 말도 이어나간다. “사랑하지 않은 시간. 가장 큰 낭비란...”
‘어느 날의 기도’라는 제목의 글은 진실의 길로 들어서는 법을 깨닫게 한다. “제게 필요한 것은 촛대가 아니라 빛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궁핍한 시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로 빚은 떡과 술을 나눠주는 수도승이 있다.
하여 그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이런 글을 우리에게 편지처럼 띄운다.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시편 126:5~6, 공동번역).
시편의 노래는 내 안에서 다른 시 하나와 만난다.

‘거친 들에 씨 뿌린 자는 들을 잊기 어렵나니/어찌 견딜 수 있는 곳을 가려 아직 너의 집이라 하랴’황동규의 <비가悲歌> 제5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울며 씨를 뿌린다니,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간다니, 생각만 해도 먹먹해진다. 고운 땅이 아니라 거친 들에 씨 뿌리는 자는 들을 잊지 못한다. 안락한 곳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곳을 오히려 자기 존재의 집으로 삼는다.
세상은 그렇게 뿌린 씨로 밥을 먹고 산다. 누가 씨를 뿌렸는지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채로.”
아, 하는 탄성을 냈다. 그리고는 다음의 글을 경귀로 삼는다.
“우리가 어떤 짐을 싣고 어떻게 가는지는 세상이 안다. 굳이 우리가 요란한 소리를 따로 내지 않아도 말이다.”

한없이 부끄러움을 배우게 하면서도 한없이 기쁘게 만드는 책 한권, 이 글을 읽는 그대에게 권한다. 등불을 놓친 어두운 길에서도 헤매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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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 낯설지 않은 ‘마음’이 밀려온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2. 1. 9. 08:08


저자는 서문에서 「하루 한 생각」이 ‘누군가 지친 이에게 닿는 바람 한 줄기, 마음 시린 이에게 다가 선 한 줌의 볕’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글이 참 맛있어 쉬이 책장을 넘기기 아쉬워 자연히 저자의 바람이 내게서 이루어진 독서의 시간이었다. 꽤나 지쳤던 내게 닿았던 ‘바람 한 줄기’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고, 꽤나 마음 시린 일상을 이어가던 내게 다가 선 ‘한 줌의 볕’같은 맛있었던 시간, 책을 덮는 순간 그 시간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어떤 책에선가, ‘삶은 관계’라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꽤 공감했던 이유는 그간 내가 가진 고민과 고통은 ‘인간관계’이자, ‘소통’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열한 번째 챕터, ‘길’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쩌면 가장 먼 길 한 사람에게 가는 길, 어쩌면 가장 험한 길 한 사람에게 닿는 길.’ 문장을 마주하고 담담하려 애썼지만 오랜 시간 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여기며 살아온 내게 ‘넓은 위로’가 여기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글은 일상의 공감과 넓은 위로가 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어느 날의 기도’라는 챕터는 참 신선하다. 아니, 신선하다는 표현은 그 챕터를 표현하기에는 어줍잖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읽어 내려가지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2월>, 열세 번째 챕터의 ‘어느 날의 기도’를 무게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꽤 무겁다. 무엇이든 ‘충만’하고, ‘충천’한 기대 속에서 ‘당신’(내 마음대로라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의 방법이라고 느낄 법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도 없는’,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거기에선 ‘당신’을 느낄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을 가장 선명히 만나는 곳이라니. 아마, 기도는 그렇게 나를 비워내는 과정이 아닐까.

 

사진/김승범


그렇다고 재미를 빠뜨린 것은 아니다. <3월>의 서른 번째 챕터, 저자의 기록대로라면 ‘마크 트웨인’은 ‘침대’를 가장 위험한 장소로 꼽았단다. ‘80% 이상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의 재미있는 역설과 통찰을 소개하며 삶과 연결 지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저자의 기지가 부럽다. 무엇보다 그가 서른 번째 챕터의 마지막 말로 기록한 것처럼, 조금 더 ‘가볍고 단순한 삶’은 그런 기지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 때문에 더욱 부럽다.

 

독서를 하는 동안, <9월>을 기다렸다. 저자의 가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을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좋은 계절 같은데, 분명 그런 글 하나 쯤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9월>, 열다섯 번째 챕터 ‘낭비’, 더 나열할 것이 없다. 그저 펜 하나 집어 들고, 아주 굵직하게 따라 써본다. “사랑하지 않은 시간, 가장 큰 낭비란”

 

책의 표지 한 켠 ‘눈부시지 않아도 좋은’이라 이름 했지만, 저자에게만큼은 ‘눈부시지 않았던 하루’는 없었던 것 같다. 매일 그가 들여다보고, 그가 걸음 했던 일상은 꼭 한 줄 남기고 싶은 ‘기록’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저자가 놓치지 않았던 일상에 대한 눈부신 발견이 ‘마음 시린 내게 다가와 준 한 줌의 볕’이 되었다.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면, 시린 마음 달랠 길 없고 누구 하나 내 시린 마음 알아주는 이 없다면 한 줌의 볕으로 다가오는 글 한 모금을 추천하고 싶다. 책을 덮고 끝이려나 싶었더니, ‘그’의 일상이 자꾸 다가온다. ‘그’가 담아 둔 낯설지 않은 마음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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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엔 또 불고 있으리니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12. 31. 07:10
  • '길잃은 양일수록 상처는 많아
    끌지않고 업고와야하는..'
    업으려면 다리를 접고 허리를 굽히고 들어메야 하고..
    무엇보다, 양에 묻은 진흙, 지푸라기, 덤불, 그리고 퀴퀴한 냄새까지 등에 밀착해서 함께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교회. 끌고가려고하지 업고가려고는 안하는.. 목회자..

    2022.01.01 10:56

 

 

 

오래 전, 관옥 이현주 목사님이 보내주신 연하장에는 ‘오늘 하루’라는 붓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씨는 나를 침묵 속으로 데려가 잠시 시간을 멈추게 했습니다. ‘오늘’이라는 말과 ‘하루’라는 말이 무척 새롭게 그리고 퍽 무겁게 와 닿았습니다. 이후로 이런 하루, 저런 하루, 어떤 하루, 그때 하 루, 내일 하루… 그 하루마다 ‘오늘’이고 그 오늘마다 ‘하루’ 였습니다.

 

한희철 목사님은 이 책 제목을 ‘하루 한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걸음과 길’이란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럭저럭 별일 없이 지내는 하루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하루가 모여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길은 걸음과 걸음이 모여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규암 김약연 선생께서 말씀하신 유언입니다. 이 말씀을 만나면서 무덤가의 정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한 목사님은 자신이 붙인 이 책 제목처럼 오늘 길어 올린 ‘생각’을 스스로 걸어갈, 걸어야 할 ‘길(행동)’이라고 여깁니다. 문장마다 또한, 그 행간에서 울리는 숨과 같은 고백이 마음에 새겨지는 까닭입니다.

 

이 책에서 한 목사님은 한국, 중국, 미국, 유럽 등 동서고금 에서 오늘날 전해져 오는 철학자들과 시인, 예술가와 지식 인들의 이야기를 오래 음미하고 ‘제 것’을 만들어 ‘그 생각’ 을 내놓았습니다. 마치 어미 새가 사냥도 서툴고 위도 약한 새끼들을 위해 잘 소화할 수 있도록 충분히 씹고 씹어 모이를 주는 것과 같이 말이지요. 사람을 아끼는 사랑 없이는 힘든 작업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나오기 힘든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이자 동화작가인 그는 ‘맘곱’(눈가에 찌끼를 말하는 눈곱 처럼 손톱 밑에 끼는 때를 손곱, 발톱 밑에 끼는 때를 발곱이라 한다. 그렇 다면 ’맘곱‘은 없을까,라고 말하는 언어 조크)이란 말을 지어내 사용 하고 싶을 만큼 언어에 대한 애정이 깊습니다. ‘우리말’을 아끼는 마음은 그가 지닌 품성에서 나오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마음에 낀 때’는 없을까?라는 반성과 겸손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까닭입니다.

 

우리말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고고학자가 유적지를 캐내 듯 여기저기 묻혀 있는 숨겨진 단어들을 정성스레 찾아냅니다. 곡괭이나 호미로 서둘러 파는 것이 아니라, 혹시 깨지 고 상할까봐 여린 붓으로 쓸어가며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찾아냅니다. 그리하여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말들이나, 시골집에 놔둔 말이나,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말들, 다락에 숨겨뒀다 잊어버린 말들을 우리 앞에 꺼내놓습니다.

 

그 말들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아닌, 잠시 잊었던 익숙함처럼 정답고 포근한 냄새가 납니다. 그렇게 찾아낸 보물 같은 단어들은 목회 현장으로 나서기도 하며, 진솔한 고백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며, 때론 역사와 사회에 대한 외침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그 말들이 지닌 언어의 힘으로 ‘말하고자’ 하는 ‘말’의 적절하고도 품위 있는 표현이 됩니다. 그것은 한 목사님이 ‘하루하루’마다 모든 사물과 현상 앞에서, ‘만들어진 언어’ 이전의 ‘선험적 언어’를 묵상함과 같으며 언어 자체보다 ‘사람’을 향한 연민이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소소하고 시시한 일상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은 채 좀처럼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공부하는 방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가 화분에 난을 키우듯 고요하게 이야기들을 키워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누구도 모르는 사이, 꽃이 열리고 향기가 피어오르면 슬며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만나는 문장들은 이렇듯 작고 낮은 것들을 향해 있는 그의 천성이 빚어낸 뜰에서 피어난 나무와 풀과 꽃들입니다. 이내, 이 뜰은 그 분을 닮은 ‘신의 정원’이 됩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이 아니라 모르는 만큼 말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모르는 만큼 씁니다. 말이나 글로 담아내지 못한 더 깊은 세계는 늘 침묵 속으로 침잠합니다. 얼마나 조심스럽고 고요한 마음으로 이 책을 내놓는지 헤아릴 수 있는 글입니다. 사실 저는 한 목사님이 쓰신 글은 낯선 것이 없을 만큼 정답고 많이 익숙합니다. 그가 쓴 동화 ‘소리새’로 92년에 만나 지금까지 한결같이 마음을 주고 받았으니 말입니다. 물론, 단강에서 목자로 살며 기록했던 ‘얘기마을’은 읽을 때마다 눈물을 감추느라 힘이 들곤 합니다. 그래도 이번엔 태연하고 무심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만 이 문장 앞에서 울컥하고 맙니다.

 

“길 잃은 양일수록 상처는 많아

끌지 말고 업고 와야 하는 것은”

 

‘목자’라는 글입니다. 교회를 잃은 이 기막힌 시대를 향한 ‘목자로서’ 다짐하는 그 심정이 뭉클하게 묻어납니다. 목회자이니 홀로 삼킨 말도, 꺼낼 수 없는 말도 얼마나 많았을 까요. 그리하여 제법 오래 삭인 말들이 이렇게 책이 되었습 니다. 기억에서 사라진 언어들이 바람처럼 흩어져 뵈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 어딘가엔 또 불고 있을 테니까요. 그가 ‘오늘 쓰려다’ 잊어버린 말이 있다 해도 그리 큰일은 아닙니다. 어딘가엔 그 뜻이 전해지고 있을 테니까요.

 

가수 홍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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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서, 괜히>를 읽으면서_ 두고 온 그리운 모든 것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12. 10. 08:30

 

저녁 늦게 책 한 권이 배달되었다. 포장을 열어 보니, <꽃자리>에서 출판된, 최창남 작가의 유년 회고록 <그리워서, 괜히>. 책을 읽기 전에, 표지의 책 제목의 생김새가 범상(凡常)치 않아, 표지에 잠시 머문다. 표지 날개를 펼쳐보니, 임종수 화백의 캘리그라피다. 글이라기보다는 한 컷 그림이다

 

이 책은 저자 최창남 작가가 1950년대 중반부터 60년대 중반, 태어나서부터 초등학교 2학년 시절까지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살아온 시대가 저자와 부분적으로 겹치는 이들은 최창남의 유년 회고록이 작가 자신의 이야기만이 아닌, 독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작가가 대신해서 말해 주는 것 같은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우리 세대의 우리의 자서전 격인 사회적 전기를 읽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식들이 아버지를 아빠로 부르지 못했던 세대의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다정다감한 아버지가 아니었던 것은 저자의 아버지만이 아니다. 자식을 매로 키웠던 것도 그렇다. 그래서 노년의 아버지들이 일찍이 자식들에게 회초리를 거둔 다음부터 자식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곁길로 들어선 자신들의 좌표를 뒤늦게 확인하면서, 자기들의 잘못을 아버지의 회초리 그친 것에 핑계를 대기도 한다.

 

어머니가 아끼어서 감추어 두고 조금씩 쓰는 설탕을 조금씩 덜어 먹다 들켜 혼난 이야기도, 내가 꿀을 몰래 먹다가 들킨 이야기와 흡사하다. 나의 어머니는 꿀 병을 벽 높은 곳, 천정 밑에 걸어두곤 했다. 드디어 어느 날 나는 밥상을 옮겨놓고, 그 위에 이불과 베개를 겹쌓아, 발꿈치를 한껏 들어 꿀 병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나의 어머니는 꿀을 먹고 취해 혼수상태에 빠진 나를 병원으로 업고 가서 겨우 깨운 적이 있다.

 

작가는 먹거리와 관련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다.

 

내 기억 속의 유년 시절은 대체로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불행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행복에 더 가까웠습니다. 사탕을 먹을 수 없었던 시절에는 메뚜기를 잡아먹었습니다. 구워도 먹고, 튀겨도 먹었습니다. 한 번은 왕잠자리의 몸통을 갈라 그 살을 먹어보기도 하였습니다. 약간의 비린 느낌만 있을 뿐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후로는 왕잠자리의 살을 먹어 볼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커다랗고 누런 쌀방개도 튀겨 먹어볼까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맛이 괜찮을 듯하였지만 시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쌀방개까지 먹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먹을 것도 별로 없을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탕을 사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서도 별로 불행해하지 않았던 것은 메뚜기 등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중글 잃어버린 이야기”).

 

 

작가보다 16년 앞서 이 땅에 와서, 19511.4 후퇴 때 부산 범일동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초등학교 4학년 시절의 나는, 부산에서 메뚜기 구경은 못했고, 미군부대 식당에서 수채에 내다버리는 음식을 건져 먹곤했다. 미군군수품을 실은 기차가 하얄리아 캠프 가까운 범일동을 지날 때부터 속력을 줄인다. 그러면, 기다리던 아이들이 앞 다투어 기차 위로 오른다. 기차가 부대 쪽으로 다가가면, 기차가 부대 철조망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우르르 뛰어내려 부대 취사장에서 흘러나오는 수채로 달려가, 도랑 양쪽에 힘센 서열대로 엎드려, 두 팔 뻗어 물컹한 액체 속을 휘저어 먹거리를 낚는다. 이빨 한가한 주둥이들이 바쁘게 손을 핥는다. , 텅 빈 여물통과 가득 찬 여물통의 이 즐거운 해후(邂逅)라니! 그러나 달리는 기차에서 미처 못 뛰어내린 굼뜬 아이는 이미 기차가 철조망을 지나 부대 안으로 들어선 다음에는 내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부대 안에 잠입한 군수품 도둑으로 몰려 문초를 받고 나서, 구금이 끝나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부대 밖으로 내팽겨진다. 난생처음 영어 문초를 받으며, 통역장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안 아이는, 나중에 커서 통역장교가 되고 싶었는데, 보병장교로 근무하다 예편되었고, 훗날 성경 번역자가 되었다.

 

작가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과 마당의 구조는, 지역이 전혀 다른 곳에서 살던 우리 집과 마당의 구조와 똑같다.

 

다락방은 부엌 위에 있습니다. 다락방 문 아래쪽에는 부엌에서 방으로 물이나 음식을 바로 들일 수 있는 작은 쪽문이 있습니다. 미닫이문입니다. 다락문을 엽니다.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다락방으로 오릅니다.다락방 작은 창에서 보는 밖의 모습은... 마당 저쪽 구석에 토끼집, 문 옆에 대추나무”(첫째 이야기, “원승이 똥 구멍은 빨게”).

 

내가 살던 집 마당에는 이 밖에도 우물이 있었고, 우물 옆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작가가 만난 여성들은 어머니 말고도, 못난 남편에게 구타당하며 사는 이웃집 예쁜 새댁,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보살펴주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여교사, 자기를 귀여워해 주는 멋쟁이 양색시 누나들, 극장 앞에서 같이 좀 데리고 들어가 달라고 애걸하면 엄마인 양 손잡고 함께 데리고 들어가 주는 맘씨 좋은 아줌마들에 대한 그리운 기억을 떠올린다. 휴전 직후의 사회상이다.

 

작가는 어리광을 한껏 부릴 수 있는 막내아들이었으면서도 아버지와는 사이가 소원(疏遠)했고, 아버지는 그러기에 늘 경원(敬遠)의 대상이었고,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어느 해 장마 때 온통 천지가 물바다가 되었을 때 작가는 아버지의 어깨에 얹혀 이동할 때 느낀 아버지의 힘과 체온을 기억한다(넷째 이야기, “아버지와 장마”).

 

아버지의 담배 심부름 간 사이 아버지가 형사들에게 잡혀가 1년 동안 갇혔다가 돌아온 이야기에서 작가는 아버지와의 애틋한 관계를 회고하고 있다(열한째 이야기, “아버지와 담배”).

 

한 해 동안 잘 보관했던 그 청자 담배를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린 이야기에서 부자유친(父子有親)은 극에 달한다(열두째 이야기, “청자 담배”). 아버지가 가택수색을 당하고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옥살이한 배경을 아이는 잘 모른다. 다만 다락에 숨겨뒀던 물건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의약품과 담배들이라고만 기억하고 있다.

 

내가 겪은 그 무렵의 환경은 작가의 것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하얄리야 부대 취사장 수채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만이 아니었다. 흐르는 구정물 속에는 이미 약속된 대로 따지 않은 깡통, 밀폐된 봉지에 담긴 고기, 열지 않은 우유, 뜯지 않은 커피, 뜯지 않은 설탕, 무엇인지 다 모를 새것들이 잠수함처럼 유유히 흘러내렸고, 맨 앞에 서 있는 어깨들은 양동이에 그것들을 퍼 담아 재빨리 대열에서 벗어나 국제시장 쪽으로 사라졌다.

 

당시는 미군부대가 우리의 물류센터였다. 기지촌의 아버지들은 군수품 빼돌리다가 폐인이 되었고, 기지촌의 어머니들은 썩을 몸을 두었다 무엇에 쓰겠냐며 학대에 몸을 내맡기면서, 위로 부모 시부모 봉양하고, 아래로 자식들 거두었다. 킬링필드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자식들, 잿더미 위에서 솟아나서 푸르게 자랐다. 그들이 다음 세대의 건강한 초석이 되었고, 전후 사회를 복구한 역군이 되었다. 최창남 작가의 유년 회고담 덕분에 나도 잠시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온 역사 속의 소년으로 되돌아간다.

 

 

작가 최창남 님의 열두 소박한 이야기에 딱 어울리는 임종수 화백의 스물여섯 컷 순박한 일러스트는 이야기를 그대로 시각화하는 효과가 넉넉하다. 일러스트의 주인공은 작가의 유년 시절 사내 아이다. 다락방에 홀로 앉아 스스로 유폐(幽閉) 속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어린아이, 아이가 살던 기지촌 마을 풍경, 그림으로 재현되는 아이의 노래(원숭이, 사과, 바나나, 기차, 비행기, 백두산, 반도 삼천리, 무궁화), 아이 주변의 잠자리와 물 방게, 아이가 잡아 올린 고기, 떠내려오는 사과 상자 안에 죽은 애가 담겨 있는 것을 보곤 하던 아이, 아이가 다니던 학교의 비가 새는 교실 풍경, 여선생님과 데이트가 좋기만 한 초등학교 1학년 아이, 스포츠머리 깎다가 걸린 기계충[백선(白癬)]에 걸린 아이, 오랜만의 부자유친, 병원에서 집으로 5년 만에 돌아온 엄마와의 서먹한 재회, 100점 맞고 와서 엄마에게 설탕물에 밥 말아 먹고 싶다고 한 아이, 5남매 일곱 식구 중의 막내 아이, 아이가 전학 온 학교 교실 풍경, 극장 앞에 서성이며 맘씨 좋은 아줌마 만나 공짜 입장의 기회를 엿보는 아이, 아이스케키를 팔며 과자를 실컷 먹는 아이, TV가 있는 수정이네 집에 우주가족을 보는 동네 아이들 틈에 끼어 막간의 셀렘민트 껌 선전에 마음을 빼앗기는 아이, 그 껌이 먹고 싶어 동네 가게에서 껌을 훔치다가 곤죽을 치른 아이, 미군 부대 군수품을 훔치다 들켜 포승줄에 묶여 잡혀가는 아버지, 감옥에서 풀려난 아버지와 1년 만의 재회, 두고 온 그리운 모든 것을 시각화한 스물 엿 컷 일러스트는, 작가의 이야기를, 한편으로는 읽고/듣고, 다른 한 편으로는 눈으로 보고/느끼게 한다.

 

민영진/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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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12. 7. 16:44

 

 

<그리워서, 괜히>는 오래 전 사라져간 유년의 시절을 노년이 되어가는 세월에 다시 손에 어루만져 읽는 이들에게 그리움, 슬픔 그리고 아련함과 자기성찰의 자리로 초대해줍니다.

 

내 기억 속의 유년 시절은 대체로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불행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행복에 더 가까웠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가난해져 사탕을 사 먹지 못하게 된 일들에 대한 기억도 있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이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렇게 말문을 여는 저자는메뚜기, 잠자리, 방개, 거머리, 문둥이, 미군이 던져주던 사탕, 양색시 누나들, 친구들, 형과 누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셀렘민트껌, 바브민트껌, 텔레비전, 버드나무, 옥수수밭, 얼음공장, 경미극장, 장안벌 등과 루핑으로 지붕이 덮여 있던 교실, 개울에 떠내려오던 사과상자 등으로 가득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그래서 유년 시절은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 단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나 마주 대하면서 그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모두 정겨운 기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의 추억은 우리의 풍경이 되고 낯설던 동네가 자신이 살던 동네로 변모하곤 합니다. 물론 세대마다 다른 기억을 지니고 살고 있기에 그 안에 똑같은 자세로 들어설 수는 없을지라도 느끼게 되는 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살아있는 파편들이 되어 세포증식을 한다고 할까요.

 

그의 말대로 사람들은 그들의 유년 시절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 삶의 가장 소중하던 시절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습니다. 유년 시절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삶의 조각입니다. 퍼즐 조각입니다. 이 조각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삶이라는 퍼즐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그리워서, 괜히>는 이상하리 만치 괜히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방치되어 있던 조각들을 불러내어 우리의 이야기를 만들도록 돕고 있습니다.

 

, 그랬어! 그게 그런 거였어!! 하는 식으로 우리는 자기 이야기처럼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건 일종의 마법과도 같은 시간입니다.“나의 영혼은 전설처럼 남아 있는 수십 년 전의 다락방으로 달려갑니다.”라고 할 때 우리는 각자 오랫동안 문고리조차 잡지 않았던 자신의 다락방을 열게 됩니다. 그리고는 퀴퀴한 세월의 냄새에 젖어듭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조심스레 밟고 다락방으로 오르자 묵은 세월을 뛰어넘어 마치 어제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이제는 서 있을 수 없이 자란 나의 몸뚱이 뿐입니다.”라고 독백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월은 흘렀으나 다락방에 들어선 우리는 어느새 그 시절의 아이가 되고, 그 시절의 냄새를 맡고 그 시절의 풍경 속으로 들어갑니다. 몸은 노인이 되어가도 존재는 여전히 아이라는 이 신기한 도술이 펼쳐지는 곳에서 독자들은 저자를 만나기도 하면서 자신과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 얼마나 어렸는가! 세상의 크기는 또한 얼마나 컸고 모르는 것 투성이였던가! 이미 익숙했던 곳의 지도를 꺼내들고 다시 처음 가보는 길처럼 길을 찾는 건 흥미롭고 긴장되는 즐거움입니다.

 

때로 아려오는 아픔이 있지만 그 조차 추억 속에서는 행복이라고 할까요.

 

짙은 화장을 한 양색시 누나들은 미군부대 옆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우리들의 눈에는 정말 눈부시게 예뻤습니다. 물론, 껌을 얻어먹는 날의 양색시 누나들은 더욱 예뻤지만 말입니다. 그런 날의 양색시 누나들은 정말 천사 같았습니다.”

 

여기에다 대고 미군 기지, 양공주, 식민지 그런 단어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아이는 눈부시게 이쁜 여인의 자태에만 홀리고 맙니다. 그게 참 당연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 안에 담긴 슬픈 비밀을 알기에는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고 그런 단서들이 되는 사건들은 그의 이야기 속에 마치 숨겨진 플롯처럼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골 소사에서 그때만해도 서울의 촌동네 답십리, 그리고 충무로로 이어지는 그의 삶의 경로는 60년대의 서울을 떠올리게 하고 가난한 집에서 가장이던 아버지의 우여곡절 인생도 그렇게 탐사하는 서사로 펼쳐집니다. 지독히 매를 들었던 아버지, 그의 수감, 엄마의 사랑, 그 사랑의 눈물이 지닌 의미들은 그 시절 소년의 체험과 노인이 되어가는 세월의 회상이 만나면서 비로소 완전한 서사로 정리됩니다.

 

인간의 생애란 이렇게 체험 자체로 설명이 되지 못합니다. 그건 시간의 방에서 다시 만나고 만나면서 그 의미를 얻게 되는 법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리워서, 괜히>는 고달픈 시대의 위로가 됩니다. 아픈 기억들조차 따뜻하게 되새기는 저자의 영혼이 가진 온도의 힘 때문일 것입니다.

 

두고 온 그 모든 것들이 그립습니다. 제 삶에 들어와 제 삶이 된 사람들이고 시간들입니다. 그들은 제 인생이었습니다. 삶 자체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내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들에 의해 채워지고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그리고는 고마움을 이렇게 표합니다.

 

그 시간들, 그 사람들로 인해 제 인생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때로는 많이 힘들기도 하였지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제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은 다만 저자의 것만이 아닌 것을 알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워서, 괜히>는 그렇게 우리의 영혼에 깊은 자욱을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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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흙내음으로 태어난 ‘칠칠한’ 옛말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7. 1. 08:26

 

 

 

‘속담(俗談)’은 “예부터 민간에 내려오는 쉬운 격언이나 잠언”이라고 합니다. ‘민간(民間)’은 “여느 사람들 사이”를 가리키고, ‘격언(格言)’은 “겪은 이야기”를 가리키며, ‘잠언(箴言)’은 “가르치는 말”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옛날부터 여느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던 말이란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지는 일을 하는 동안 내려오던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속담 = 시골말’인 셈이요, ‘시골 이야기’인 셈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진 말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겪은 이야기예요.

 

“칠칠하지 못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칠칠하면 되었을 텐데, 왜 우리는 칠칠하지 못하다는 야단만 맞았을 뿐 칠칠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31쪽).

 

“그가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바위옷이 이쁘잖아요? 지금은 말랐지만 물을 주면 다시 살아날지도 몰라요.” ‘바위옷’이라고 했다”(58쪽).

 

시골마을에서 목사로 일하는 한희철 님이 쓴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를 읽습니다. 한희철 님은 ‘속담’이라는 말보다는 ‘옛글’이라는 말을 씁니다. 197가지 옛글을 놓고 오늘날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손수 시골일(흙일)을 하기도 하면서 옛글(속담)을 되새긴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한테 ‘살아가는 뜻’을 교회에서 들려주려고 옛글을 되읽는다고 해요.

 

“한숨도 버릇되는 것이라면 절망도 원망도 슬픔도 버릇 아닐까? 웃음도 희망도 사랑도 버릇일지 모른다. 타고난 성품으로서가 아니라 순간순간 내가 가진 마음의 결과가 켜켜 쌓여 만든 결과일 것이다”(75쪽).

 

“어느새 우리들의 삶은 농사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비가 올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말 몇 개쯤은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84쪽).

 

‘시루에 물은 채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라든지 ‘늘 쓰는 가래는 녹이 슬지 않는다’라든지 ‘호미 빌려간 놈이 감자 캐 간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입니다. ‘썩은 감자 하나가 섬 감자를 썩힌다’나 ‘윗논에 물이 있으면 아랫논도 물 걱정 않는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이에요.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는 동안 시골사람이 스스로 겪은 삶을 짤막한 말로 남겨서 흘러온 이야기예요.

 

 

오늘 우리는 흔히 ‘속담·격언·잠언’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곰곰이 따진다면 ‘시골말’이나 ‘시골슬기’나 ‘흙말’이나 ‘흙슬기’ 같은 새 이름을 붙여 볼 만하구나 싶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은 시골에서 태어났고, 흙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속(俗)’이나 ‘옛’이라는 이름하고는 사뭇 다른 자리에서 흐르는 말이지 싶어요.

 

시골에서 살며 시골일을 하는 시골사람은 ‘논밭’이라 말합니다. ‘콩’하고 ‘팥’을 말합니다. ‘호미·낫·쟁기’를 말합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말합니다. ‘씨앗·가을걷이·설·한가위’를 말합니다. ‘도랑·고랑’을 말합니다. ‘날씨’를 말하고 ‘바람·하늘·비·눈’을 말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이런 시골말을 놓고 도시에서는 으레 ‘한자로 옷을 입힌 다른 말’을 쓰기 마련입니다. 흙을 만지지 않는 관청 일꾼도 시골말을 잘 안 써 버릇합니다.

 

“‘돌이’와 관련된 말 중에 ‘돌이마음’이란 것이 있다. “사심을 돌려 바르고 착한 길로 들어서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돌려먹는다” 해서 ‘돌이마음’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136쪽)

 

‘옹달’이란 말이 들어가는 낱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옹달솥’은 “작고 오목한 솥”이란 뜻이다. ‘옹달시루’란 “작고 오목한 시루”라는 뜻이요, ‘옹달우물’은 “작고 오목한 우물”이란 뜻이다(146쪽).

 

한희철 님은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을 빌어서 ‘돌이마음’이나 ‘바위옷’이나 ‘옹달’이나 ‘겉볼안’이나 ‘언구럭’이나 ‘도사리’ 같은 시골말을 새롭게 살려서 오늘날에도 넉넉히 쓸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흙을 가꾸면서 살림을 짓던 오래된 말마디마다 깃든 따사로운 슬기를 돌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매우 많이 살고, 흙을 만지기보다는 흙하고 멀어진 일을 하더라도, 누구나 밥을 먹는 살림인 만큼 ‘밥이 태어난 흙자리’를 되새기는 말(슬기로운 말)을 마음에 얹어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보다도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이다”(291-292쪽).

 

“다 같이 듣고 있어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귓등’으로 들을 수도 있고, ‘귀담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314쪽).

 

옛날부터 흔히 썼기에 ‘옛말’입니다. 옛말이라 해서 오늘날에 안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삶(살다)·사랑·살림·사랑·슬기’ 같은 낱말은 아주 오래된 한국말인데, 이 말을 쓰면서 ‘오래된 말’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지 싶어요. 예나 이제나 즐겁게 쓰고 새롭게 쓰기도 해요.

 

그러나 어떤 말이든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사라지지 싶습니다. 이런 뜻에서 ‘옛말(어제 말)’을 되새기면서 ‘새말(오늘 말)’을 짓는 살림으로 나아가는 슬기로 북돋우지 싶습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살림도 ‘옛말(어른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새말(아이 말)’을 가꾸어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이끌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에서 첫머리에 다루는 ‘칠칠하다’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참말 ‘칠칠하지 못하다’나 ‘칠칠치 못하다’ 꼴로만 흔히 쓸 뿐입니다. “넌 참 칠칠하구나.”라든지 “우리 칠칠하게 살림을 지어요.”처럼 말하는 일이 매우 드물지 싶어요.

 

칠칠하다

 

1. 나무, 풀, 머리털이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

2.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고 얌전하다

3. 결이나 일 매무새가 반듯하고 야무지다

 

“칠칠한 나무”나 “칠칠한 나물”이나 “칠칠한 머리카락”처럼 “칠칠한 차림새”나 “칠칠한 사람”이나 “칠칠한 나라”로 나아가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칠칠하지 ‘못한’ 모습이 아닌, ‘칠칠한’ 아름다움을 기쁘게 찾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못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한다’는 생각으로 칠칠한 말과 넋과 삶으로 거듭나는 길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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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족적 관조의 삶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6. 12. 07:35

 

존경하는 페친 최창남 목사님이 내신 책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꽃자리)를 단숨에 읽었다. 술술 잘 읽힌다. 아포리즘처럼 읽히고 수필처럼 읽히고, 또 거친 역사의 시간을 헤쳐온 한 인간의 자성적 고백처럼도 읽힌다.

최 목사님은 군부독재, 졸속근대화 시기의 거친 세월을 노동운동, 빈민운동, 문화운동과 같은 운동권에서 살아오시면서 많은 고난과 상처를 온 몸으로 겪어내셨다. 그러다가 연세 70이 가까운 시점에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집을 만들어 그 가운데 유유자적하며 은자처럼 사신다. 많은 시간 주변의 자연물을 관조하고 지난 삶을 성찰하면서, 또 떠돌이 고양이들 친구 삼아 밥 주면서 세상만사에 초연한 듯, 자족적으로 안돈하며 사신다.

 

 

이 책의 글들은 어찌 보면 고대 스토아 사상가들이 추구한 '초연한 무관심'(adiaphora)의 자세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자세의 태반이 우주적 이성의 조화가 아니라 자연만물의 여여한 이치에 깃들어 있는 점이 좀 다르다. 또 스토아 사상가들이 발명하여 바울 사도도 참조한 '자족'(autarkeia)의 가치를 내면화한 글들이 상당히 많지만 이들과 달리 최 목사님은 특별한 목표를 향해 달음박질하는 외곬의 지향점을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바람과 풀과 같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삶, 여유와 여백의 강조, 늙어가고 죽어가는 뭇 생명과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극진하고도 성의어린 배려의 태도, 시시비비를 초월한 원융적 화엄의 경지에 잇닿은 달관의 자세, 노자가 설파한 공과 허, 적요와 고독의 미덕 등을 부드러운 성찰과 권유의 말들로 풀어내며 그 견고한 지향의 자리를 대신한다.

 

간간이 80년대 경험한 투쟁적 변혁 운동의 상처와 회한이 묻어나는 글들에서는 실패의 기억들이 무성한데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늘날 인간을 더 잘 이해하고 더 잘 품고 더 잘 사랑하는 자양분으로 승화시키는 담백한 마음이 퍽 인상적이다. 역시 고상한 명분은 위험하고 강인한 용기와 도전, 투쟁의 열정은 그 앞길에 함정이 많다. 이제 70세에 근접하여 최 목사님은 그 함정을 피해가는 묘법을 체득한 듯 보이는데 그렇다고 그것을 무슨 거창한 지혜로 강변하지도 않는다. 이렇지도, 저렇지도 않은데, 이런 것, 저런 것 두루 감싸면서 넘어가는 게 이 책의 미덕이다.

 

최 목사님이 살아내신 거친 삶의 이력에 대한 동정적 혜안이 없이 이 책을 읽으면 그 달관의 언어들과 관조적 삶의 태도가 상처의 후유증을 달래는 일종의 보호기제나 이 세상사를 통달한 것처럼 보이는 턱없는 '겉멋'의 허영처럼 오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지혜의 대안적 가치를 몸으로 깨치며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실행하고자 외로운 섬의 깊은 산속에 은자로 하루하루 견디며 살아가는 삶이란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글과 삶의 거리는 항상 아득한 것이지만 그 간격을 조율하고 줄여나가고자 애쓰는 일을 이 땅에 말깨나 하고 운동깨나 하는 사람들이 최 목사님만큼만 할 수 있다면 이 나라, 이 땅은 머잖아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로 변모할 것이다.

 

*췌언: 이 책에서 비교를 나타내는 격조사 "~보다"는 그 앞의 명사나 대명사에 붙여 쓰는 것이 맞는데 대부분 띄어서 썼다. 이런 군더더기 지적을 하는 것은, 첫째, 이 책이 많이 팔려 2쇄, 3쇄 낼 때 그 편집 오류를 교정하여 책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였으면 하는 기대가 있어서이고, 둘째, 글 쓰는 것을 전문업으로 삼아 몇 권의 책까지 내신 정** 작가를 비롯해 유명한 작가들 중에도 이곳 페북 글에 이 "~보다"를 늘 띄어 쓰는 오류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기에 고쳤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차정식/한일장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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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5. 28. 12:45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

 

속담이나 우리말에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우리네 삶의 경험과 생각이 녹아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냄새가 무엇이냐 물으면 우리 옛 어른들은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를 적실 때 나는 냄새’라 했다. 생각해보면 그윽하다. 농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옛 어른들에게 석 달 동안 가뭄이 든다는 것은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곡식이 될만한 풀포기는 모두 새빨갛게 타들어가고 논바닥은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졌을 터. 식구들을 먹여 살릴 길이 보이지 않으니 농부의 마음은 갈라진 논바닥보다 더 깊이 타들어 갔을 것이다. 하루하루 애(창자)가 타는 마음으로 쳐다보는 하늘,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천둥소리가 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천둥지기’라 했다) 후드득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를 대 로 마른땅을 적시며 스민다. 그때 피어나는 냄새는 세상 그 어떤 냄새와도 비교할 수 없는 냄새였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하늘 은총의 향기였을 터이니 말이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는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종교, 환경과 일상의 삶 등을 녹여 낸 197개의 속담과 생소한 29개의 우리말에 대한 간결한 해설과 마음에 새길 교훈이 담겨 있다.

 

사람들이 쏟아내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가 무서운 시절이다. 옛 어른들의 “호랑이 입보다 사람 입이 더 무섭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아무리 무섭다 하여도 호랑이 입은 한 번에 사람 한 명이나 동물 한 마리밖에는 물지를 못한다. 아무리 재빠르고 사납다하여도 한꺼번에 사냥감 둘을 물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입은 다르다. 말 한 마디로도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죽일 수가 있다. 잘못된 말 한 마디로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명을 다치게 하거나 쓰러져 죽게 만든다. 사람의 입이 호랑이 입보다 무섭다는 것을 언제쯤에나 깨달아 세상 평온해질까.

 

그 외에 이 책에 수록된 몇 가지를 살펴보자.

 

“시루에 물은 채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

시루의 가장 큰 특징은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구멍이 숭숭 뚫린 시루에 물을 채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런데 시루에 물을 채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다. 사람의 욕심을 채우는 일은 시루에 물을 채우는 일보다도 어려운 것이어서, 불가능의 끝이라 여겨진다.

 

“어머니는 살아서는 서푼이고 죽으면 만 냥이다”

살아생전 어머니의 모습을 철없는 자식들은 서푼의 초라함으로 보곤 한다. 시간이 흘러 어머니의 모습이 서푼이 아니라 만 냥이었음을, 만 냥이 아니라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때쯤 어머니는 이 땅을 떠나시고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다 씻어 먹어도 물은 못 씻어 먹는다”

다른 것이 더러워지면 물에 씻으면 되지만 물이 더러워지면 물을 씻을 것은 따로 없다. 이 말 속에는 무엇이 우리 삶의 최후 보루인지가 담겨 있다. 자연과 환경 문제와 관련하여 그 어떤 말보다도 깊은 울림을 가진 잠언으로 다가온다.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

이 말은 단지 냇물을 건널 때만 필요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우리 인생을 위한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겉모습만 보고 ‘얕은 내’로 여겨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그렇게 하면 실수하게 되고 결국 좋은 사람을 놓치게 된다는 엄한 가르침으로도 다가온다. 누구라도 지극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그윽한 가르침을 옛 어른들은 냇물 이야기로 편하게 했지 싶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것은, 먼 길을 나설 때는 눈썹조차도 빼놓고 가라는 뜻이다. ‘눈썹조차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다 빼놓고 가라는 것이다. 온갖 것을 다 챙겨가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네 삶에 눈썹의 무게 이야기는 얼마만한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을지.

 

“흉년 손님은 뒤꼭지가 예쁘다”

흉년 때에는 손님이 찾아오는 것보다도 왔던 손님이 가는 것이 더 반갑다는 뜻이다. 돌아서야 할 때 돌아서는 것이 아름다운 법, 남는 것보다도 떠나는 뒷모습이 더 아름다울 때가 있는 법이다.

 

“무는 개는 짖지 않는다”

물 때 물을지언정 함부로 짖지 않는다. ‘받는 소는 소리치지 않는다’는 속담도 있다. 일을 능히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사람은 공연히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속이 허전한 이가 요란할 뿐 정말 능력이 있고 속이 알찬 사람은 대개가 말이 없다. 무림의 고수가 언제 함부로 제 실력을 입방아로 대신하고, 함부로 칼을 빼들던 가. ‘김 안 나는 숭늉이 더 뜨겁다’는 말이 있거니와, 말 많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더욱 가볍게 하지는 말 일이다.

 

“제가 똥 눈 우물물 제가 도로 마신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재미있고, 통쾌하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급하다고 아무도 안 본다고 앞 뒤 가림 없이 행동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은 우물에 똥을 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는 이 없다고 슬쩍 쓰레기를 버리거나, 돈에 눈이 멀어 비 오는 날 하수구에 독성이 있는 공해물질을 함부로 흘려버리거나, 화가 났다고 자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든지, 그 때는 편할지 몰라도 그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선생님은 늘 애가 타고 속이 썩는다. 애가 타고 속이 썩는 사람이 눈 똥이 다른 사람이 눈 똥과 같을 수가 없다. 아무리 먹을 게 궁한 개에게도 훈장이 눈 똥은 쓰디써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개도 그랬을까,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은 선생님 노릇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거지가 빨래하면 눈이 온다”

거지가 빨래를 하면 눈이 온단다. 거지가 눈 오는 날을 용케 알아맞힌다는 게 아니다. 거지가 빨래를 하는 날은 날이 푹한 날이고, 그런 날은 눈이 올 가능성이 많을 뿐이다. 거지가 빨래하는 모습을 본 지가 오래 돼서 그러는 것일까, 이제는 날씨의 징조도 신문이나 방송의 일기예보에 의존을 하며 살아간다. 거지의 빨래에서 눈을 짐작하는 마음조차 잃어버린 이 시대에 시대의 징조를 헤아리는 눈을 갖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기대일까?

 

“봄비는 일비고 여름비는 잠비고 가을비는 떡비고 겨울비는 술비다”

내 인생의 계절이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하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을 건강하고 여유 있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삶,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마음 아닐까? 언제 어떤 비가 오면 어떠랴, 은총으로 받으면 모두 은혜의 단비인 것을….

 

“삼 년 가는 거짓말 없다”

 

거짓말로 잠깐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아주 속일 수는 없다. 거짓말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을 속일 수는 없다. 결국은 모두 드러난다. 그런데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음보다도 악함 때문이다.

 

“좋은 목수한테는 버리는 나무가 없다”

좋은 목수는 무엇보다도 적재적소에 필요한 나무를 안다. 꼭 필요한 나무를 꼭 필요한 곳에 쓴다. 그러기에 좋은 목수는 그 어떤 나무도 함부로 버리지를 않는다. 다른 사람이 버리는 나무라 할지라도 그 나무를 잘 보관하였다가 그 나무의 소용에 꼭 맞는 곳에 사용을 한다. 버리는 나무가 없는 목수가 좋은 목수다. 버리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정성만 있으면 앵두 따 가지고 세배 간다”

아무리 때가 늦었다 하여도 정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마음을 전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때를 놓쳤다고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비춰 생각해 보면 때를 놓친 것보다는 정성이 부족한 경우가 더 많다. 부족한 정성을 때 놓친 탓으로 돌리는 것은 못된 버릇이다.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 벼슬길에 오를 길이 막막하니, 혹시 역모라도 일어나 그 참에 벼슬자리나 얻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을 두고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고 했다.

 

"속 빈 자루는 곧게 설 수 없다"

자루는 제 스스로는 힘이 없어 무엇인가로 채워지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 지독하게도 가난했던 시절 아마도 이 속담은 먹는 것과 관련하여 ‘굶주린 사람은 체면을 차리고 올바로 살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쓰였을 것이다. 오늘날은 다르지 않을까? 마음이 비면 똑바로 설 수가 없다. ‘비면’이라는 말은 ‘비우면’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마음을 스스로 비우면 천국이려니와, 있을 게 없어 속이 비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결국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산이 울면 들이 웃고 들이 울면 산이 웃는다”

어떤 일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이 있고, 즐거워하는 이가 있으면 괴로워하는 이가 있는 법이다. 내가 즐거워할 때 혹 누군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볼 일이다. 그러면 이기적인 기쁨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눈물 흘릴 때 혹 누군가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돌아볼 일이다. 그러면 슬픔을 이길 수 있는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반보기’

반보기란 시집간 딸과 친정의 가족들이 양가의 중간쯤에서 만나 그리움과 정담을 나누는 풍습이었다. 친정으로 가지 않기 때문에 시댁의 가사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고, 또한 친정 갈 때 준비해가야 하는 음식(그것을 정받이 또는 정성이라고 불렀다)도 장만하지 않아도 되고, 당일로 다녀올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한 풍속으로 이용되었다. 서로 반쯤 다가가 눈물겨운 만남을 가졌던 반보기, 옛 시집살이는 그만큼 섧고 고달팠던 것이리라.

 

‘집손’

‘집손’이란 허술하고 초라한 차림으로 이 집 저 집 다니며 밥 도 얻어먹고 잠자리도 얻어서 자는 사람인데, 겉모습만으로 보면 거지와 다름없지만 그냥 밥을 얻어먹고 잠만 얻어 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시간을 통해 그 집에 있는 문제를 꿰뚫어보면서 넌지시 해결책을 일러주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없이 허술한 차림으로 바람처럼 살아가지만 어디에도 속해있지를 않으면서 모든 사람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 티내는 일없이 구원의 빛과 길을 전해주는 사람, 그들을 ‘집손’이라 한다고 했다.

 

‘언구럭’

‘사특하고 교묘한 말로 떠벌리며 남을 농락하는 짓’이다. ‘괜히 죽는 소리를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떠보는 일’을 ‘언구럭을 떤다’고 한다.

 

‘땅 타박’

말 그대로 ‘땅이 나쁘다고 타박하는 것’을 말한다. ‘타박’이란 말이 ‘허물이나 결함을 잡아 핀잔하거나 탓함’을 뜻하니, 땅 타박이란 공연히 땅만 나쁘다고 땅만 야단치는 경우를 말한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서 상사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고, 환경 탓을 하고, 하늘 탓을 한다면 그야말로 땅 타박을 하는 것과 다름 아니다.

 

‘돌이마음’

‘사심을 돌려 바르고 착한 길로 들어서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묵무덤’

‘오래도록 거두지 않고 내버려두어서 거칠게 된 무덤’이 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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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댐 없이, 드러남 없이, 흔적 없이”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5. 5. 06:17

시간차가 있긴 하지만, 저자와 나는 공유한 역사의 시간대가 넓게 겹친다. 비록 같은 하늘 밑에 살았어도, 그는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았고, 나는 현장과는 철저히 격리된 상아탑 속에서 스스로 갇혀 살았다. 학문적으로도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긍정적 관심과 수용, 우리의 민중신학에 대한 성서학 쪽에서의 지원을 자처했으나, 나 자신의 공헌은 미흡했다. 


70년대 말, 어느 날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피폐해진 모습의 청년을 만났다. 그는 한때 모 대학 기독학생회에서 내가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참여하였고, 그 후 현장에 뛰어들었다가, 모진 고문 끝에, 건강을 잃었다. 그때 거기에서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한 국립대학교와 두 사립대학교의 기독학생회에서, 정기적으로 때로는 부정기적으로 인도하던 성경공부를 나 스스로 중단해 버리고 말았다. 학생들의 요청을 진작 거절하지 못한 것, 위험한 책 성경을, 아무런 예비지식 제공 없이, 예방 조처도 없이, 민감한 비전공 수재들에게 그대로 읽힌 것이 후회막급이다. 실천을 강조하다가, 결과적으로 내가 참여하지 못한 고난의 현장에 내 아우, 내 자식을 대신 보낸 격이 되었으니, 내 죄가 크다. 


은퇴하고 나서도 한 참 후, 은퇴한 사람이 마치 현역처럼 바쁘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를 나무라는 한 친구가 있었다. 이젠 인생 좀 조용히 살라고, 지난 삶을 뒤돌아보며, 자기 성찰을 하며, 참회하는 삶을 살라고, 내게 권한 책들이 있다. 2016-17년에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조지 기싱, 시어도어 젤딘의 책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자서전 같기도 하고, 수상록 같기도 하고, 명상록 같기도 한,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한 해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내가 인생 끝자락만이라도 후회하지 않고 살 것을 다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문의 탓일는지 몰라도, 이 세 명, 영국과 미국 지성인 말고, 우리나라에서도 실천과 이론을 겸비한 이들 중에 이런 종류의 명상록이나 수상록을 쓸 사람은 없는가,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다가 이번에 꽃자리출판사에서 나온 최창남의 <그래서 하는 말이에요>를 만났다. 

 


삶의 지혜가 번득인다. 위로가 있고, 격려가 있다. 저자의 경륜이 있다. 삶에 대한 성찰이 있다. 시와 산문과 SNS 문자 같은 것이 섞여 나오는가 하면, 이야기의 문체도 유려하다.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 읽히면 그냥 읽어나갈 것이지, 남의 글 읽으며 분석하고 평가하고 장르를 규정짓는 못된 버릇 평생 못 버리고, 최창남의 “하는 말”을 연구한답시고 자빠져 있다. 나의 첫 마디, “이건 아포리즘이다.” 20여 년 전에 읽은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책이 떠오른다. 내가 알기로는 그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아포리즘”이란 말을 책 제목과 함께 나열한 첫 책이다. 독서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시가 끝나면 산문이 나온다. 산문은 ‘하다체’와 ‘하게체’와 ‘합니다체’로 구분된다. 왜 그랬을까? 내가 나를 재촉한다.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계속 읽어, 어서 읽으라고! 독백 같은 것은 ‘하다체’로, 누군가 듣는 이가 설정되어 있을 때는 ‘하게체’와 ‘합니다체’다. 시도 마찬가지다.

이 책 1/3쯤 읽어왔을 때 나는 이 책의 성격을 규명해 버리고 말았다. “명상록이다”, “수상록이다”, “더러는 회고록이다”(109, 113-114, 133쪽 이하). “더러는 참회록이다”(111쪽). 내 멋대로 어쩌구, 저쩌구.... 이 책 절반을 넘기면서부터는 나는 이 책을 그만 “구약성서 <전도서>류의 지혜문학”으로 분류하고 말았다. 울릉도간첩단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울룽도1974>를 쓰기 위해 생존자 손두익 선생을 만나러 가는 저자(133쪽)를 보면서, 나는 구약 <전도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전도서>의 저자 ‘코헬렛’의 관찰이다. 그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과, 억압당하는 이의 억울한 처지를 목격한다. 힘없는 이들이 억울하게 억압을 당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에게는 억울함을 위로해주거나, 맺힌 한을 풀어주는 보복자가 없는 현실을 확인하고 한탄한다(전 4:1). 최창남은 한탄만 하고 있지 않고, 참여하여 위로하고, 실천하러 나선다. 그 결과물이 2012년에 출간된 <울릉도1974>다. 1978년 동일방직사건, 1979년 YH사건, 1980년대의 대표적인 노동 탄압인 '원풍모방사건, 1980년대 콘트롤데이터 노동조합 사건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산동네 목회 현장, 노동 현장의 위장취업에 이르기까지 지역 운동에 참여한다. 


내가 이 책을 <전도서>류의 지혜문학이라고 한, 두 번째 까닭은 그에게서 발견되는 해학 때문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296쪽 이하), “서툴게 살 수 있어 좋다”(318쪽 이하)를 위시하여, 2014년부터 삶의 터전을 서울 신도림에서 제주도의 어느 중산간으로 옮기고, 미친 듯이 쏘다니며 살던 삶을 그치고, “나댐 없이, 드러남 없이, 흔적 없이” “그냥저냥 대충대충 드문드문 서툴게 살기로”(372쪽), “그저 ‘알 수 없는 채’로 살기로 했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무엇인가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안다고 아는 것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안다고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순간 순간 내 삶에, 내가 머무는 공간에 함께 하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성의를 다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갈 뿐”(373쪽)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코헬렛의 숨겨둔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한창 때는 초등학교 6학년 읽기 교과서에 게재된 동화 <개똥이 이야기>(2000/2007), <그것이 그것에게>(2005), 50일간의 백두대간 종주기 <백두대간 하늘길에 서다>(2009), <울릉도 1974>(2012), <숲에서 만나다>(2013) 등의 역작을 냈다. 그는 노동가요 "노동의 새벽"을 비롯한 민청련의 주제가 “모두들 여기 모였구나”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소로우, 기싱, 젤딘에 필적할 사상가를 만난 것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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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연세대학교와 히브리대학교(Ph. D.)에서 공부하고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와 대한성 서공회 총무, 세계성서공회연합회 이사를 엮임하였다. 어지간하면 열정 따위는 시드럭부드럭 스러질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명징한 인식과 탐구하는 열정은 아직도 줄어들지 않으신 듯하다. 2003년 <창조문예>에 황금찬, 이성교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성서신학자와 성경번역자로 살아오는 동안 누구보다도 언어에 예민하였기에, 그 여정이 시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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