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64)

 

바위처럼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린도후서 4:7-11)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나무를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백합화를 품은 흙에서는 백합향이 나는 법이다. 비록 그 삶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예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바울은 자기 생의 비밀을 이렇게 밝힌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4:6)

 

그 빛으로 인해 바울은 박해의 어두운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빛과 만났기에 바울은 빛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9) 

 

 

 

 

 

얼마나 당당한 말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이리도 크다. 살아갈 이유를 알고,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고난도 당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가슴에 이미 빛이 밝혀진 사람은 세상이 어둡다 하여 낙심하지 않는다. 돈 좀 못 벌면 어떻고,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낙심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들은 불의와 싸우면서도 거칠어지지 않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하여 안달하지 않는다. 반대자들조차 우정으로 감싸 안는 넉넉함을 보인다. 모름지기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 때문일까?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한 것과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했다. 통나무처럼 투박한 이 고백 속에 바울이라는 거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왜소해졌다. 나는 이게 너무 속상하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마음이 좁쌀보다 작은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늘 자기 문제에만 골똘할 뿐,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니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겨운 길일 수 있다. 겁 많고, 비겁하고, 욕심 사납고, 냉소적인 우리 마음이 일대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런데 일단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예기치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우리는 외로운 참새처럼 두려움에 떨며 삽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천둥소리처럼 울려옵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한 이가 누리는 홀가분함과 당당함입니다. 우리도 그런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주님의 선언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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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5)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잠언 14:31-32)

 

시인 최승호는 일찍이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 당신이 불쌍합니다”라고 탄식했다.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인간대접 받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이들의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고스란히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 신음하는 피조물의 탄식소리에 가슴이 타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믿음의 세계에 들어섰다 할 수 없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새러 로이(Sara Roy)의 글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생환한 아버지의 팔에 새겨진 푸른색 번호를 보며 자란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라 없이 떠도는 이들의 설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여러 해 전 그는 팔레스타인 땅을 찾았다. 학자로서 ‘점령’의 현실이 점령지 사람들의 경제생활, 일상생활,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다. 어느 날 일단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이 지긋한 팔레스타인 사람을 조롱하는 현장을 보았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3-4살 쯤 된 손자와 함께 당나귀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을 불러 세웠다. 군인들은 당나귀에 실린 짐을 검사한 후 당나귀의 입을 벌려보며 말했다. “이봐, 이 당나귀 이가 왜 누래? 날마다 닦아주지 않나보지?” 노인은 당황했고 아이는 겁에 질렸다. 노인이 침묵하자 군인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다. 다른 군인들은 야비한 웃음을 지은 채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노인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군인은 노인에게 당나귀 뒤에 서게 한 후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추라고 지시했다. 노인은 거절했지만 군인의 강압에 못 이겨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는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췄다. 아이는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보며 군인들은 웃으며 사라졌다. 그 노인과 둘러선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려던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Sara Roy,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Vol 32, No. 1, Autumn 2002, Issue 125) 

 

 

 

새러 로이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언 14:31)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이런 모욕과 폭력이 일상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슴은 멍이 들었다. 하나님의 그 멍을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역사의 섭리자로 믿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쉬지 않고 힘써야 한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는 모욕을 당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갑질하는 이들 앞에서도 변변히 자기를 지켜낼 수 없는 을들의 비애가 어둠이 되어 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다 하여 비존재 취급을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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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충실하게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3:12-14)

 

잘 산다는 것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뿐이다. 어제도 내일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지나가 버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살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내다보며 미리 불안해한다. 행복은 늘 저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며 오늘을 헛되이 흘려보낸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그 자리가//바로/꽃자리니라”(구상, ‘꽃자리’).

 

사실 삶이 너무 힘들면 이런 이야기가 다 한가로운 사람의 말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 자리가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자리임을 자각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성경은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살다가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며 이렇게 가르친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브리서 3:13)

 

 

 

 

 

사람은 누구나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불안의 해독제로 공동체를 주셨다. 신앙 공동체는 우리가 세상 물결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 믿음대로 살기 위해 애쓰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 속에는 든든한 기둥이 들어선다. 내가 넘어져도 다가와 일으켜 세워줄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릴 때도 선뜻 다가와 짐을 대신 져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죄의 유혹에 흔들릴 때면 다가와 부드럽게 혹은 준엄하게 꾸짖어 바른 길 가도록 해 줄 사람이 있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는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의 가슴에 봄 햇살로 다가가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겨울 삭풍처럼 다가가는 사람들인가? 사람들의 마음이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사람인가, 악을 향해 나아가도록 유인하는 사람인가? 성도는 이웃들 속에 잠든 생명을 깨우는 ‘봄 햇살’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3:14). 인내하는 믿음이 절실하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실히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은 늘 저만치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방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시인의 고백은 삶의 곤고함을 모르는 이의 한가한 노래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을 가장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불만과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시간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인생의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삶을 맡긴 채, 즐겁게 사랑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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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의 마귀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여호수아 1:9)

 

모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여호수아는 중대한 책무를 떠맡았다. 요단강을 건너(cross over)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백성들을 이끄는 것 말이다. 젊은 시절부터 모세를 모셔왔던 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요단강은 옛 삶과 새 삶의 경계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셨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여호수아 1:5). 여호수아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늘 율법을 읽고 그 말씀을 성심껏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또한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낙담의 사전적 정의는 바라거나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실망하고 맥이 풀리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홀로 결단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성숙하지 않은 대중은 비전보다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걸 아시기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후 360년 경 로마의 스키타이(Scythia)에서 태어난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탐식, 부정, 탐욕, , 낙심, 태만, 자만심, 교만이라는 악덕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낙담에 맞서야 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낙담의 마귀는 영혼의 영적 관상 능력을 흐리게 하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완전히 어둡게 만들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고, 형제들을 온유하고 긍휼하게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일에 대한 미움, 심지어 수도 서원 자체에 대한 미움을 주입합니다. 그는 영혼의 유익한 결단을 손상시키고 인내와 끈기를 약하게 만들며, 영혼을 무감각하고 마비되게 하고, 낙심되는 생각들의 속박을 받게 만듭니다.”(<필로칼리아1>, 엄성옥 옮김112)

 

낙담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도,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 성경 묵상,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 등이다. 낙담의 마귀가 횡행할 때일수록 함께 기운을 북돋워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치고 낙심한 이들 곁에 다가가라고 명하신다. 어디에 가든지 함께 있겠다 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불화와 갈등의 세계를 건너 화해와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

 

하나님,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한눈을 파는 순간 패배자로 전락할 거라는 생각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경쟁에서 이길 때는 우쭐하지만 패했을 때는 주눅이 들고 맙니다. 패배의 기억은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그 응어리는 돌덩이가 되어 우리를 짓누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꿈조차 잃고 맙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낙담을 떨쳐버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저 진리의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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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취를 경계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베소서 5:15-20)

 

 

가장 열심히, 가장 분주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도 영적인 잠에 빠지기 쉽다. 분별력 없는 열심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에베소서 5:15) ‘살피라는 단어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영적인 잠에 빠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지 여부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한다. 늘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있던 초대교인들은 이 말을 아주 강력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또 여쭈어야 한다. 서양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의 첫 마디는 들어라’(obsculta)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귀로만 들으면 안 된다. 먼저 머리로 다음에는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라틴어로 순명을 뜻하는 ‘oboedientia’듣다라는 뜻의 ‘audire’와 어원이 같다. 들음은 순명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도취를 경계해야 한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에베소서 5:18) 여기서 말하는 은 좁은 의미로는 알코올 음료를 가리키는 말이겠지만, 모든 종류의 도취를 일컫는 환유換喩로 보아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는 일체의 것들 곧 술, 쾌락, 마약, 오락, 권력, 소유 등이 바로 변형된 이다.

 

 

 

 

신앙이란 깨어남이다. 지금 우리 삶이 뭔가에 도취된삶인 것을 깨달을 때 자유로운 삶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삶이 생기를 얻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에베소서 5:18b-19)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그 눈으로 보면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세상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세상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타인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며 산다. 자기를 열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쁨을 맛본다. 신앙의 신비이다.

 

*기도*

 

하나님, 누구에게나 삶은 힘겹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는 일은 한편으로는 진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늘 낯섭니다.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정답이 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늘 고민하며 길을 모색합니다.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뭔가에 도취함으로 현실을 잊으려 합니다. 그것은 자학일 뿐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꿈에 사로잡혀 살도록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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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0)

 

자기 불화를 넘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로마서 7:24-25)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불화의 쓰라림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서 7:15) 자각과 삶의 불일치, 이것은 바울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바울은 자기 불화라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속절없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도 말한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악한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도 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번번이 패배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주는 율법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이것이었다. 이런 깊은 자각이 있었기에 그는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24절)라고 탄식했다.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사이의 분열 혹은 불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를 사로잡아 버리는 죄를 힘차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무능함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왜 무능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voluntas perversa)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육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성 어거스틴, <고백록>, 선한용 역254)

의지의 왜곡-->육욕-->버릇-->필연-->노예 상태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이것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다. 굳게 결심을 해보아도 우리는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욕에 이끌려 가곤 한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도 애써서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그와 대면하는 순간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던 화가 불쑥 튀어나와 또 다른 불화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감정이 이성에 통합되지 못한 결과이다.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분열되어 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습기習氣, 죄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싶어 절규하던 바울의 어조가 바뀐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로마서 7:25a). 일렁이던 바다가 일시에 고요해진 것 같다. 돌풍이 몰아치던 하늘에서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하다. 이 느닷없는 전환 속에 은총의 신비가 있다.

 

*기도*

 

하나님, 인간의 자기 불화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인지요?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의 불일치는 우리 속에 깊은 자괴감을 자아냅니다. 대개는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체념하고 살지만, 바울은 그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화는 오직 주님의 은총 안에서만 극복될 뿐입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깊이 잠길 때,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이 녹을 때 우리는 죄의 법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그 은총으로 육욕의 노예살이를 하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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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을 사는 사람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행전 2:43-47)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다. 성령 강림절 이후의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실현된 천국과 다를 바 없었다. 누가는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그 모습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저들의 삶은 사람들이 차이를 넘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표징이다.

 

초대교회는 사랑, 일치, 거룩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교회였다. 낯선 이들이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모두가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가르던 사회적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사심 없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참 놀라운 일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많은 이들이 익명성 속에 머물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와의 친밀한 교제를 소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과 연루되는 번거로움을 귀찮아한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받고 싶지 않기에 서로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스스로를 알리려 하지 않는다.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사귐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가장 값진 은총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을 경축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삶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한달음에 그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해도, 노둣돌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독점과 지배와 풍요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과 청빈함이 오히려 삶을 축제로 만든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2:47)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정체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기도*

 

하나님,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자못 따갑습니다. 경멸의 언사와 눈빛을 만날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았다면 이런 난감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진실과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게 도와주시고, 이익이 아니라 의를 검질지게 추구함으로 세상의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싸늘한 세상에 봄소식처럼 다가가는 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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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나누기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17-21)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꼭 붙들어야 할 삶의 지침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21).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기도 가운데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이를 데려오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이 아니다. 솔직하게 마음의 생각을 아뢰라. 왜 그를 용납하기 어려운지를 말이다.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내려놓는 순간 치유가 시작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래도록 귀를 기울이여야 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어떤 힘이 유입됨을 느낄 것이다.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야 한다.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율법의 가르침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율법은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 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3:4-5).

 

삶의 곤경이 오히려 원수와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어려움을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들도 자신과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된다. 교회는 평화를 배우고 익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평화의 표징이 될 수 없다. 박노해 시인은 <평화 나누기>라는 시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과제를 이렇게 밝힌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남과 북, 노동자와 사용자, 여당과 야당,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낯선 시대이다. 하지만 평화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믿는 이들은 이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사랑에 근거한 삶이 가능함을 실증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기도*

 

하나님, 거친 세상에 지친 히브리의 시인은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편 55:21)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실감이 되는 나날입니다. 한 번 두 번 상처를 입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 마음은 갑각류처럼 굳게 닫혔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쓸쓸함입니다. 주님, 선으로 악을 이길 힘을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우리 속에 심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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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뿌리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예루살렘의 주민이 네 모든 친척, 네 혈육, 이스라엘 족속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 '그들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다. 이 땅은 이제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 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 하여라.(에스11:14-16)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 있던 자기 집에서 놀라운 비전을 본다. 그가 유다 장로들과 함께 앉아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하늘과 땅 사이로 그를 들어 올려 예루살렘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그는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역겨운 일들을 다 보았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제 잇속 차리기에 급급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죽음을 선고하신다. 그 참담한 광경을 보면서 망연하게 서 있던 에스겔은 더 놀라운 광경을 본다. 그룹들 사이에 좌정해 계시던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성읍 동쪽에 있는 산꼭대기에 머무르는 장면이었다(에스10).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강도의 굴혈이 아니겠는가.

 

에스겔의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지금 우리 형편은 어떤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는 많지만 하나님의 영이 머물고 계신 교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과 함께 아파하고 그분의 손과 발이 되려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희망의 빛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은 이방 땅에 끌려가 죗값을 치르고 있는 백성을 보며 마음 아파하신다. 예루살렘에 남겨진 이들은 포로로 잡혀간 이들의 땅을 차지할 생각에 온통 부풀어 있었지만 하나님은 잡혀간 이들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비록 내가 그들을 멀리 이방 사람들 가운데로 쫓아버렸고, 여러 나라에 흩어 놓았어도, 그들이 가 있는 여러 나라에서 내가 잠시 그들의 성소가 되어 주겠다”(11:16).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백성들을 찾아가 스스로 성소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때가 되면 여러 나라에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모아 이스라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들 속에 일치된 마음과 새로운 영을 넣어주시어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법도와 율례를 따라 살게 할 것이라 약속하셨다(에스36:26-27).

 

이 약속은 위태롭기만 한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반석이었다. 종말론적인 희망이 삶에 유입될 때 잿빛 현실은 완전히 다른 빛깔로 바뀌지 않던가. 캄캄한 밤과 같은 세월을 지난다 해도, 주님의 동행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어둠을 헤쳐 나갈 수 있다.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며 걷는 것이 믿음의 행보이다. 희망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우리는 그 희망을 살아내면 된다.

 

*기도*

 

하나님, 광야에 세워진 회막은 소박했지만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세워졌던 성전은 애초에는 아름다웠으나 결국은 더러워지고 말았습니다. 권력과 탐욕이 영광의 빛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오늘 더럽혀진 이 땅의 교회들을 회복시켜 주십시오.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게 해주십시오. 이제 다시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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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혹은 향기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냄새가 되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됩니다. 이런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저 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먹고 살아가는 장사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일꾼답게,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2:14-17)

 

바울은 드로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마음은 고린도에 가 있었다. 신생교회의 위기가 그 교회를 무너뜨리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품고 마케도니아로 선교의 현장을 옮겼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소식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안해하던 바울의 어조가 급격히 바뀐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언제나 우리를 참가시키시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어디에서나 우리를 통하여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고후2:14)

 

바울은 왜 여기서 굳이 개선 행렬이라는 수상쩍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 개선 행진은 로마의 군사주의와 깊이 연루된 것이다. 로마는 이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거나, 5천 명 이상의 적을 죽이거나, 새로운 땅을 정복해 황제에게 귀속시킨 장군에게 개선 행진을 허락했다. 그는 호위대의 경호를 받으며 금빛 마차를 타고 로마의 주도로를 행진했다. 그의 부대가 획득한 전리품과 포로들이 행렬을 뒤따랐다. 사제들은 행렬을 뒤따르며 향을 피워 신들의 가호를 빌었다. 개선 행진은 원형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큰 원을 뜻함)까지 이어졌다. 그곳에서 포로들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이처럼 로마의 개선행렬에는 피의 냄새가 난다. 억눌린 울음소리가 섞여 있다. 사제들이 피우는 향기는 잔인한 폭력을 숨기는 역겨운 냄새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바울은 이런 용어를 가져다 쓰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던 것처럼, 바울은 로마의 개선 행렬과 철저히 대비되는 다른 개선 행렬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그 개선 행렬은 비폭력적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낯설었던 사람들을 벗이 되게 하는 행렬 말이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 말을 택하여 로마 체제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자기를 희생함으로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제안한다.

 

십자가는 멸망당하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냄새(stench)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이들에게는 생명의 향기(aroma)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우리는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린도후서 2:15)

 

오늘 우리는 어떤 향기를 풍기며 살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는데도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길을 잘못 든 사람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기도*

 

하나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불안과 두려움이 늘 우리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습니다. 사도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길들여진 채 살아갑니다.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나부끼다보니 우리 삶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닌 악취를 풍길 때가 많습니다. 이 부끄러운 악순환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개선 행렬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맑은 영을 우리 속에 채워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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