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창 18:19)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빕니다.

큰비가 내리더니 대기가 며칠 청명합니다. 영동 지역에는 폭설이 내려 사람들의 발이 묶였더군요.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폭설로 불편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눈 덮인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은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동화 속의 나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헬(1525-1569)의 ‘눈 속의 사냥꾼’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화가는 사냥꾼들이 사냥개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사냥의 수확물이라고는 여우 한 마리뿐입니다. 지쳤는지 그들의 허리는 구부정합니다. 개들도 지쳐 보입니다. 눈을 핥아먹는 녀석도 있습니다. 곧게 솟은 나무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습니다. 사냥꾼들 옆에 있는 선술집에서는 사람들이 짚불을 피우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따뜻하게 보이는 광경입니다. 저 멀리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가 인상적인 높은 산이 보입니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가고 있는 곳은 가족들과 따끈한 차가 기다리는 각자의 집일 것입니다. 마을 앞에 형성된 얼음판 위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팽이를 치는 아이도 있고, 썰매를 타는 이들도 보입니다. 기차놀이 하듯 열을 지어 미끄럼을 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키 채 비슷한 것도 보입니다. 놀이는 현실의 곤고함을 잊게 만듭니다. 놀이는 지나치게 경직되기 쉬운 우리 정신을 환기시키는 창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보러 나갈 짬을 내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겨울 풍경을 즐기는 것입니다.

 


학생이 아니라 해도 각급 학교가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는 3월 2일은 왠지 모를 설렘을 안겨줍니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학교로 향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그렇고, 처음 입는 교복이 어색한지 조금은 자기 모습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학교 입학생,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누가 봐도 신입생인 대학생들의 모습까지, 그 풋풋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교회학교를 담당하는 선생님들과 줌 미팅을 했습니다. 교육의 근본 목표는 ‘유능한 인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의 신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자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죄의식을 주입하거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상과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심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섣부른 죄의식은 우리에게서 경탄의 능력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이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인간의 죄성과 참상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하지 않더라도 삶의 과정을 통해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34)

그날 시간이 없어서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습니다. 교사들이 일상 속에서 꼭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동과 청소년 교육 전문가인 얀-우베 로게(Jan-Uwe Rogge)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네 가지로 요약하여 들려줍니다(안젤름 그륀/얀-우베 로게,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p. 9-11 참조).

첫째, 교육에 관여하는 이들은 아이들이 자기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도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행복과 기쁨,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느낍니다. ‘어린 게 뭘 안다고…’라며 윽박지르거나,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감정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아이들은 다른 이들을 신뢰하게 됩니다.

둘째,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몰아대지 말고 천천히 그와 동행해야 합니다. 야곱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20년 만에 귀향한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했습니다.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한감정이 풀어진 에서가 ‘갈 길을 서두르자’고 말하자 야곱은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돌보아야 할 양 떼와 소 떼가 많다며, 하루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창33:13). 사람마다 속도가 다 다릅니다. 사랑은 그 속도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요?

셋째,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불완전해질 수 있는 용기를 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에게 답을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워야 합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이들과 지내다 보면,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됩니다. 실패를 해도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알 때 아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보다 실패가 우리를 더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넷째, 경계를 정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만사가 자신의 의도나 계획 혹은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욕망의 성취가 지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욕망이 발생하는 순간 즉각 해소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부모나 어른들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게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녀가 둘 있습니다. ‘잘 적응하겠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 여린 감정을 다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닙니다. 소극적이어서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이의 경우가 더 그렇습니다. ‘손녀 바보’ 소리 들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 아이가 더 크지 않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나중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교회에 올 수 있게 되면 어느 교우가 제게 보내준 그림 동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읽어주고 싶습니다. 조금 느리고 빠를 수는 있지만, 모든 삶은 저마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더듬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은 매일 아침 낱말들의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지만 그 소리를 발음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맨 뒤에 앉았습니다. 온종일 말을 할 일이 없기만 바랐습니다. 어쩌다 선생님의 지목을 받아 이야기를 하려면 입술이 뒤틀리고 일그러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키득거리며 웃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겠지요? 어느 날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온 아빠가 소년을 강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알록달록한 바위와 물벌레를 살펴보면서 강을 따라 걷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습니다. 편안했습니다.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아이는 물끄러미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치는 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강은 지체할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 소년은 나중에 울고 싶을 때마다 아빠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 울음도 삼킬 수 있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요. 나중에 소년은 친구들 앞에 서서 강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김지은 옮김, 책읽는 곰).

우리는 어쩌면 너 나 할 것 없이 ‘강물처럼 말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영원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면 그뿐입니다. 앞섰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뒤쳐졌다고 주눅들 것도 없습니다. 지향이 바르면 언젠가 우리는 그 바다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가끔 그 물살 위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나요? 뭔가를 붙잡으려던 마음도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차이를 만들려는 조바심도 내려놓고, 우리가 전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 편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28일) 미얀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군대와 경찰이 발포를 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우리 또한 역사의 격동기를 거쳐왔기에 미얀마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습니다. 미얀마에서 더 이상 폭력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평화롭게 살고 싶은 대중들의 소박한 꿈이 짓밟히지 않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벌써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조금은 의식적으로 사순절기에 맞갖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순절 달력에 제시된 실천 사항들을 잘 지켜보십시오. 잘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깨어 있음입니다. 성공담이든 실패담이든 우리 영혼을 밝히는 좋은 재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길든 짧든 그런 경험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삶이 더 따뜻하고 밝고 견실해지기를 빕니다. 모든 이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넘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3월 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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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답게 산다는 것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시 122:1-2)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하루하루 기적 같은 날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벌써 2월의 마지막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심히 눈을 들어 바라본 달력 위에서 날들은 가지런하지만 그 행간 속에 깃든 삶의 무게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지혜자들의 말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만 잘 분별해도 삶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목회실에서 이번 주 찬양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단하지만 전통적인 곡을 선정해 녹음을 했습니다. 교우들에게 교회의 여러 장소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제안에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녹화도 진행했습니다. 그 일이 꽤 의미 있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비대면 예배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장소들을 소거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깃든 곳입니다. 텅 빈 예배당에 올라갈 때마다 외롭지 않은 것은 그곳에 스며있는 교우들의 삶의 이야기와 기도 그리고 찬양 소리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 사무실에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대부분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살핍니다. 책들이 켜켜이 쌓인 책무더기를 보며 어떤 분들은 “이 책 다 읽으셨어요?”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를 내는 법’이라는 책을 썼던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 대답합니다. “내일부터 읽을 책이에요.” 그러면 더는 묻지 않고 웃고 맙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상을 통해 많이 봤던 곳이라 낯설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낯선 곳도 아는 누군가가 머물던 장소임을 알면 돌연 친숙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비대면 예배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 약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번 주에 화면에 비쳐지는 공간들을 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달력을 잘 활용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달력의 지시사항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전구 한 개를 빼지도 못했고, 계단을 자주 이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별로 이동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답게 살기’와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실천 사항을 두고는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답다’라는 접미사는 체언에 붙어서 체언의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명확히 한정할 수 있어야 ‘자기다운’ 삶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참 어렵지요? ‘자기’라는 말 속에는 타자와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체적인 존재로 살고 싶어하지만 늘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삽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행여 다른 이들과 나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삽니다. 앞서가는 이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뒤따라오는 이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늘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 제게는 그런 삶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참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성적, 사회적 지위, 재산, 외모’ 등이 우리의 인간적 가치를 재는 척도처럼 변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다 보니 나보다 나은 이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의 감정에 시달리고, 나보다 못한 이들은 낮춰보는 버릇이 들기도 합니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 수는 없을까요? 18세기 유대교 하시딤 지도자인 주시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어째서 너는 모세가 되지 못했느냐?고 묻지 않고, 어째서 주시아가 되지 못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는 마음만 버려도 삶은 한결 가벼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실하게, 기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한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미움, 질투, 원한 감정, 복수심, 밑도 끝도 없는 분노, 심술궂음, 절망...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삶의 부산물들입니다. 그것을 제때에 분리하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해와 바람과 흙의 도움으로 그것을 분해하여 흙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꼭 붙들려 하고, 오히려 남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전시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생의 부산물에 묶어 두기에 우리 삶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처리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춰 서는 시간입니다. 일상을 중단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던 인습적 과거에서 자꾸 벗어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머물다가도 때가 되면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곤 하셨습니다. 나아감과 물러섬이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삶은 건강해집니다. 지금은 물러서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숨결을 맞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봄볕이 잠시 머문 화단에서 푸른 움이 터 오르듯 하나님의 숨과 만날 때 척박해진 우리 영혼이 소생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야말로 바벨의 소음이 오관을 뚫고 쳐들어오는 판에 듣기는 무슨 음성을 듣겠습니까. 온갖 소리와 빛깔과 모습과 느낌과 생각이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을 뒤덮고, 열두 살짜리면 이미 자동차 이름, 자전거 선수 이름, 축구 선수 이름, 영화 배우 이름, 모르는 게 없는 판인데 들리기는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이 북새통 속에서 어찌 내심의 노래가 들려 오겠습니까. 마음의 노래란 휜 가지 끝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 떨리면서 시작되는 것, 새 소리와 트는 새싹으로 시작되는 것, 그것이 차츰 커지고 깊어져 마침내는 우리 안에서 이름할 수 없는 분의 목소리로 화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러끌레르끄, <게으름의 찬양>,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1988, p.45-46)

러끌레르끄 신부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처리해야 할 일에 골몰하고, 다른 이들과의 친교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데 몰두하느라,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비는 외면하고 삽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그 신비 앞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멈춰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새 소리, 새싹이 움트는 소리, 눈석임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화성탐사선인 퍼시비어런스 호가 보내온 화성의 바람 소리를 들어 보셨는지요? 그 소리는 우리를 저 광활하고 아득한 우주의 신비 앞으로 이끌어 갑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투덜거린다고 하여 누가 대신하여 살아주지도 않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내야 합니다. 더 큰 세계와 접속된 사람은 현실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을 겁니다.

예년 같으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입니다. 한 자리에 다 모여 졸업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지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하는 식의 감격스러운 졸업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한 과정을 마치는 의례를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각급 학교를 졸업한 이들, 그리고 새로운 학년을 맞이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학교도 학생들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님들께서는 서슴없이 학생들과 교회학교가 연결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생명과 평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백신 접종이 드디어 시작된다지요?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가 기회가 되면 백신 접종에 응하시면 좋겠습니다. 백신이 만능은 아니어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의 기본 방역 지침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백신 접종 기사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미움과 혐오, 냉소, 분열증을 예방해주는 백신은 없을까?’ 올바른 신앙이야말로 그런 백신이 아닐까요?

꽃샘추위가 남아 있다고는 하더라도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새로운 날을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봄을 단순히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의 봄소식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2월 2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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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순례 여정을 시작하며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막 1:12-13)

주님이 은총과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순례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긴 여정이지만 차분하고 꾸준한 발걸음으로 십자가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과 함께 우수 절기가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날이 매우 차갑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추위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얼음 사이로 눈석임물이 흐르고, 나뭇가지에 연록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책상 위 성경 옆에 김영래 시인의 <사순절>이라는 시집을 가까이 두고 마흔 편의 시를 하나씩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진 않지만 세상의 순환과 거듭남을 노래하는 멋진 시입니다. 그 두 번째 시에서 시인은 봄의 설렘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굴레를 씌우지 않은 망아지가 껑충껑충 뜀을 뛰다가
기쁨에 겨워 방귀를 뀐다.
성급한 봄.
망아지 같은 봄.”


봄을 망아지에 빗대는 이 놀라운 상상력을 따라가 보십시오. 봄을 처음 경험하는 망아지는 풀이 자라 오르는 속도에 놀라고, 꽃이 지는 기척에도 화들짝 놀라 머리를 흔들며 발길질을 합니다. 이때의 놀람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명 혹은 활기를 동반하는 감정입니다. 시인은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는 망아지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차라리 내가/저 벌룽거리는 젖은 콧구멍으로 들고나는/바람이었으면.” 이 마음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모든 게 낡아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어쩌면 늙음의 징후인지 모르겠습니다.


봄의 활기는 우리 시선을 밖으로 향하게 만들지만, 사순절은 우리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시선은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대로 볼 수 있다면 밖에서도 안으로 난 길을 볼 수 있고, 안에서도 밖으로 난 길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은총처럼 주어진 삼감의 시간을 통해 우리 눈이 더욱 맑아지고 깊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은 우리 삶을 뿌리에서부터 성찰하라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참 열심히 삽니다. 요구되는 일도 많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들’이 우리 삶을 이끌어갑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 유능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무능하다는 말, 불성실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에 피로가 켜켜이 쌓입니다. 누적된 피로는 우리에게서 타인을 위한 여백을 앗아갑니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냅니다. 열심히 살면서도 산만한 것이 우리 실상입니다. 산만한 이들은 늘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핍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 합니다. 타인들의 반응에 따라 감정의 부침을 겪기에 늘 불안해합니다. 


물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스로 강자라 여기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건 당당함이 아니라 무례함입니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 곧 자기의 인격이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침묵해야 할 때도 말하고, 배워야 할 때도 가르치려 합니다. 그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만함의 포로일 뿐입니다. 자기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공한 듯 보여도 실패자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타인이란─당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가 됨으로써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사람, 당신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보편적 구원의 행진에 참가하고자 한다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사람. (중략) 타인이란─창조 사업을 완성시키려는 노력에 당신이 협조해야 할 사람, (중략) 타인이란─아버지께로부터 보내어진 사람, 또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요청, 타인이란─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사람”(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p.127)


사순절을 지나는 동안 이웃과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근본으로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경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번 넘어지면 영원히 뒤떨어질지 모른다는 조바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실패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얻은 과실을 한껏 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패배자들의 서러움과 눈물은 보려 하지 않습니다. 


1966년에 가수 김용만 씨가 불러 히트했던 ‘회전의자’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지금도 환청처럼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위 능력주의가 당연한 공리처럼 여겨지는 살벌한 세상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러한 능력주의 신화가 우리에게 앗아가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감사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다른 이들을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샌델은 성공에 집착하는 이들의 마음의 풍경을 이렇게 그립니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 될 게 없다는 생각에는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p.109)


이런 마음이기에 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사정에 둔감합니다.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 혹은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이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외부로부터 주어진 가능성, 기회, 행운, 재능 혹은 천분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이라야 성숙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사순절은 애초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려는 이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구별된 시간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옛 삶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의식입니다. 그렇기에 엄격하고 신중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다양한 준비가 필요하지만 경건생활에 매우 소중한 세 가지를 몸과 마음에 새기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기도, 금식, 자선이 그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청하여 얻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고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기도는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이끌리던 우리 마음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금식은 일단 음식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전통은 사순절 기간 동안 육식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의 금식은 우리 영혼의 허깃증을 끊임없이 뭔가로 채우려는 갈망에 저항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침묵은 말의 금식입니다. 친절함은 지배하려는 마음의 금식입니다. 외적인 금식을 하면서도 남들과 다투고,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을 빙자한 위선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당신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사58:6)


그뿐이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떠돌이를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주는 것이 진정한 금식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도 이런 금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선은 이웃들과 좋은 것을 나누며 삶을 함께 경축하려는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시혜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혜자 연하는 순간 도움을 받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굴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좋은 것을 나눠주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잘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이런 삶을 연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 중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경험한 기쁨과 깨달음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곤고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모든 분의 앞길을 은총의 빛으로 환히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21년 2월 1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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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대로 따스하게 맞는 시간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것을 행하라(Ama! et quod vis fac)! 입을 다물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라.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대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사랑의 뿌리가 드리우게 하라. 이 뿌리에서는 선 외에 무엇이 나올 수 없거니….”(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주해 7.8)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설 연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권고 때문에 조금은 쓸쓸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명절입니다. 저도 그냥 집에만 머물고 있을 예정입니다. 어느 댁은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줌(zoom)으로 새해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세배하는 영상을 찍어서 제게 보내준 분들도 계시네요. 덕담을 건넬 수도 없고, 세뱃돈을 줄 수도 없으니 그저 ‘허허’ 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설’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낯설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간은 사실 ‘낯선‘ 시간이지요. 낯섦 앞에 설 때 우리는 머뭇거리게 마련입니다. 머뭇거림 혹은 삼가는 것이 새로움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설을 신일(愼日)이라고도 하지요? 새로울 신(新)이 아니라 삼갈 신(愼) 자를 쓰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허겁지겁 살다가 잠시 멈춰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연휴의 첫날인데도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집에 앉아 있자니, 어린 시절의 설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지게에 쌀 부대와 함지를 짊어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방앗간에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신명났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는 상상을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른들이 윗목에 가래떡을 가지런히 펼쳐 놓으면 굳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안달을 했습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와 누나들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두부를 만들 때도 있었고, 엿을 고느라 밤새 불을 때기도 했습니다. 찹쌀가루로 반죽을 하고 말린 후 꿀이나 조청을 발라 기름에 튀겨낸 강정에 눈독을 들이다가 부지깽이로 맞기도 했습니다. 늦은 시간 설핏 잠이 들었다가 방구들이 너무 뜨거워 깨보면 아버지는 가래떡 써는 작두로 떡을 썰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명절이면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리는 집도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예전만은 못한 것 같습니다.

 



작고한 김남주 시인은 ‘설날 아침에’라는 시에서 텅 비어 가는 농촌 마을의 스산한 설날 풍경을 조금은 쓸쓸하게 노래했습니다. 싸락눈이 밤새 내린 설날 아침 풍경을 시인은 아주 적막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무심코 내리는 싸락눈은 ‘뿌리 뽑혀 이제는 바짝 마른 댓잎’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립니다.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도 설이라고 까치가 날아와 지저귑니다. 시인은 까치에게라도 말을 걸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없고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그런데 김종길 시인은 똑같은 제목의 ‘설날 아침에’라는 시에서 사뭇 다른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시인은 무심히 오고 가는 세월이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보낼 일’이라고 말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시인은 아침에 한 잔 술과 따뜻한 국을 대했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하자고 말합니다. 세상이 험하고 각박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임을 잊지 말자고 신신당부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다 보니 시인의 이런 당부가 어르신의 다독거림 같아 마음이 말랑해집니다.

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참 많지요? 로빈손 크루소가 아닌 바에야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많은 이들을 만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도 사실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빚어질 때가 많습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일이 우리 삶 전체를 뒤흔들곤 합니다. 그만큼 우리 감정의 토대가 부실하다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가끔 희떠운 태도로 자기 감정을 숨길 때가 있습니다. 누가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애써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감정들 말입니다. 부끄러움일 수도 있고, 상처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관심이랍시고 우리들의 감정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우리를 휘어잡기도 합니다. 누구를 대하든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악의 없는 관심이라 해도 다른 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베드로의 가르침이 적실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더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벧후 1:5-7)

앞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입을 다물든, 말을 하든, 남을 바로잡아 주려 하든, 용서하려 하든 그 모든 일을 사랑의 바탕 위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떠올려야 할 가르침입니다. 이번 명절이 가족이나 친지들 사이에 이런 사랑을 연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2월 10일은 스콜라스티카 축일입니다. 낯선 이름이지요? 스콜라스티카는 서방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베네딕도(480-543) 성인의 쌍둥이 누이동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경건한 삶을 살았던 스콜라스티카는 오빠가 이탈리아의 중앙에 있는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설립하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우마롤라(Piumarola) 수도원을 설립하여 수녀들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오 대종이 쓴 <베네딕도 전기>에는 성인을 통해 나타난 많은 기적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스콜라스티카와 관련된 기적도 하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동생은 오빠를 만나러 갔습니다. 베네딕도는 제자들을 대동하고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 동생과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고 성스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식탁에 앉아 거룩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도에게 청합니다. “오빠께 부탁드립니다. 이 밤에 저에게서 떠나가지 마시고 아침까지 천상 삶의 기쁨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눕시다“. 스콜라스티카는 진리의 향연이 펼쳐지던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수도원 밖에서 밤을 지샐 순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제정한 수도규칙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마침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이었습니다. 낙심한 스콜라스티카는 식탁에 머리를 수그린 채 전능하신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잠시 후 갑자기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그 세찬 비 때문에 아무도 문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콜라스티카의 청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베네딕도와 제자들은 할 수 없이 그곳에 머물며 온 밤을 지새우며 영적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이형우 역주, 분도출판사, p.219-221). 그레고리오 대종은 더 많이 사랑한 동생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규칙을 깨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설 명절 기간 누구를 만나든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만남이 그러했듯 기쁨과 감사의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모든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21년 2월 1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 추신: 먼저 이 편지를 읽어본 아내는 스콜라스티카 이야기가 집합금지 권고를 어겨도 된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여지면 어떡하냐며 웃네요. 그럴 일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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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 15:13)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별고 없이 다들 잘 지내시는지요? 며칠 동안 제법 날이 추웠습니다. 건물 사이를 휘돌아 나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내곤 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입춘지절입니다. 24절기상으로는 입춘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대문이나 주련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등의 입춘첩立春帖을 써붙여 놓고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빕니다. 미신처럼 보일지 몰라도 각박하고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의 가정마다 기쁜 일이 넘치시기를 빕니다.

이런 풍습은 서양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올해 주현절에도 사람들은 자기 집 현관문에 하얀 분필로 ‘20+C+M+B+21’라고 썼을 겁니다. 앞뒤에 나오는 숫자는 ‘연도’를 나타냅니다. 보통은 약자인 C,M,B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의 이름의 첫 글자라고 말합니다. 카스파르(Caspar), 멜키올(Melchior) 발타사(Balthasa)가 그것입니다. 자기 집에 그런 귀한 손님들이 오기를 구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C, M, B는 라틴어 문장인 ‘Christus Mansionem Benedicat’을 축약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여, 이 집을 축복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축원의 말과 동방박사 이야기가 결합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입춘 무렵이면 사람들은 오신채五辛菜를 먹지 않으면 몸에 귀신이 들어온다며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 등의 자극성 있는 채소를 먹었다고 합니다. 위와 장이 연동작용을 돕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런데 그 오신채가 인의예지신의 다섯 가지 덕목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하는 일은 동서를 막론하고 대개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무교병과 더불어 쓴나물을 먹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라는 역사적 기억과 농경문화권의 봄맞이 의식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입니다. 감염병으로 인해 모든 집합 활동이 제한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신명을 깨워야 할 때입니다. 우울과 어둠을 떨쳐버리고 다시금 삶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아직 진짜 봄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엊그제 효창공원을 걷다가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터진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계절의 봄도 봄이려니와 우리는 역사의 봄 또한 기다립니다. 이 맘 때가 되면 늘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이성부 시인의 ‘봄’입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봄’ 부분)

절창입니다. 봄은 꼭 산뜻한 바람과 함께 오는 것은 아닙니다. 봄은 ‘뻘밭 구석’이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느라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에 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봄조차 해찰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봄은 기어코 옵니다. 기다림에 지쳤던 사람들은 봄과 만나는 순간 두 팔을 벌려 껴안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시인은 봄을 의인화하여 말합니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역사의 봄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창 같은 세상과 맞서 싸운 사람들을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 시를 암송하며 가슴 설렜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세상에는 정말 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슴의 얼음을 녹여주는 사람들 말입니다. 지난 주 중에 택배 하나를 받았습니다. 일 년에 한 두어 차례 거창에 있는 목사님 댁에서 보내오는 그 택배를 제가 반기는 것은 그 안에 담겨있는 물품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노란 종이에 인쇄된 사모님의 편지 때문입니다. 택배 상자 안에는 수십 개의 종이봉투 안에 갖가지 곡물과 가공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래기, 들깨, 계피, 생들기름, 토란대, 현미차, 현미찹쌀, 쌀 뻥튀기 과자, 떡국 떡, 먹는 가래떡, 수수, 곶감, 호두, 토종 재팥, 토종 흰팥, 토종 붉은팥, 토종 콩나물 콩, 메주콩, 서리태, 쥐눈이콩, 강남콩, 토종쌀, 손바느질로 만든 컵 받침. 사모님은 각각의 물품을 어떻게 재배하고 수확했는지, 그 종자들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조리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내곤 합니다. 그 작물들을 심고 가꾸는 과정에서 경험한 자연과의 교감 이야기는 덤입니다. 종이봉투 겉면에 작물 이름을 적을까 했지만, 보물찾기하듯 열어보시라고 일부러 적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읽고는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모님의 선선하고 따뜻하고 푸근한 마음과 표정이 읽혔기 때문입니다.

이 얄궂고 험난하고 난폭한 세상을 염려하며 비분강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끔은 과도한 열정 때문에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혐오하고 냉소하기도 합니다. 그분들도 다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잠들어 있는 선의 열정을 조용히 깨우는 이들은 스스로 봄이 된 사람들입니다. 마음 씀이 따뜻한 사람, 누구를 만나든 정성스럽게 대하는 사람들과 자꾸 만나다보면 그들의 선함이 우리 속에 스며들지 않을까요? 이런 사람들과 자꾸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에 골똘하다보니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와 만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가슴에 나는 어떤 흔적을 남겼나?’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고 말했습니다. 꽃들은 다가오는 이들에게 강제로 자기 향을 맡게 하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이들이 자기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자기를 개방할 뿐입니다. 다가오는 이를 밀어내지 않고, 멀어지는 이를 붙잡지 않습니다. 이런 홀가분함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집착하는 순간 향기는 썩은 냄새로 바뀌기 쉽습니다.

주중에 철학자 김진영 선생의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진중한 철학 강의도 있었고, 묵직한 에세이도 있었고, 짧은 단상도 있었습니다. 그는 몇 해 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그는 문장을 통해 생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절제된 언어의 행간에 깃든 절실함에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암과 사투를 벌이며 적었던 글 가운데 두 대목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바울은 옥중 편지에 썼다. ‘내 마음을 고백하자면 저는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소망을 뒤로 미룹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젠가 강의에서 말했었다. 나를 위해 쓰려고 하면 나 자신은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그러나 남을 위해 쓰려고 할 때 나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된다고.”(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p.40)

김진영 선생이 자유스럽게 인용하고 있는 대목은 빌립보서 1장 20절 이하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자기의 바람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지만, 성도들을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을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군가의 삶에 응답할 때 인간다워집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고 싶어한 철학자의 마음과 바울의 마음이 오롯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의지가 굳어도 질병의 고통은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김진영 선생은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살핍니다.

“지금 나의 삶이 위기에 처한 건 의사가 말하듯 소화기관 하나가 큰 병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내 몸속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장기, 즐거움의 장기, 생의 기쁨만을 알고 있는 철없는 나의 장기가 그만 병들었기 때문이다. 이 병에는 근거도 없다. 소화기관은 병들어 사라져도 기쁨의 장기는 생의 마지막까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김진영, 앞의 책, p.73)

그는 기쁨의 장기가 병든 것이 아닌지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기쁨의 장기가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기쁨의 장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을 초월하는 하나님에게 접속되어야 합니다.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깃들기를 빕니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봄을 선구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그대, 겨울을 이기고 돌아온 이들이여’, 여전히 겨울 한기에 갇혀 있는 누군가에게 봄소식이 되어 다가서십시오. 주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우리도 일을 해야 합니다. 샬롬!

2021년 2월 4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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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타작 마당

                             주님의 타작 마당


“하나님의 말씀이 한껏 펼쳐지고 그렇게 풍성하게 전개되는 축복의 만찬에 대한 인간의 가장 깊은 그리고 적절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가장 깊은 감사의 기도가 아닐까요? 감사 그리고 은총을 알아차리는 것 말입니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1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며칠 동안 날이 참 포근했습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 저도 모르게 교회 화단을 기웃거렸습니다. 시퍼렇게 언 채 겨울을 버틴 화초에 약간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기분 탓이겠지요. 지난 주일에는 모처럼 방송팀과 목회자들 이외에 10여 분의 교우들이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왠지 예배당에 생기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이전에 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때는 빈 자리에 마음이 쓰였는데, 이제는 몇 사람이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물을 뜨러 지하 친교실에 내려갑니다. 내려갈 때마다 주방 칠판에 적힌 메뉴에 눈길이 갑니다. ‘육개장, 어묵볶음, 김치’. 주방은 지난 해 1월에 마지막으로 공동 식사를 하던 그 시간에 딱 멈춰 있습니다. 쓸쓸합니다.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두런두런 교우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소란스러움이 그립습니다.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수록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떠오릅니다. 물레바늘에 찔려 공주가 깊은 잠에 빠지자 성 안의 시간도 따라서 멈춰버리고 맙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기 직전에 동작을 멈췄고,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일렁이던 그대로 멈춰버렸습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왕자의 입맞춤, 곧 사랑입니다. 우리 주방과 친교실의 시간도 깨어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람이 그리울 때면 여러 사람들이 보내준 편지와 엽서를 꺼내 다시 읽곤 합니다. 철학자인 김용규 선생님이 저를 가리켜 ‘하나님의 꿀벌’이라고 지칭하신 것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봅니다. 단정한 글씨도 있고 흘려 쓴 글씨도 있습니다. 필체는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지요? 오래 전 독일의 어느 고성 박물관에 갔다가 종교 개혁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의 글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글씨는 단정하기 이를 데 없었고, 루터의 글씨는 호방하고 활달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글씨도 아름다웠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다시 읽으면서 그 행간 사이에 깃든 발신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그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기도의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많이 힘들고 답답하시지요? 그래도 잘 견디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인터콥 상주 모임이 코로나 감염의 숙주 역할을 했다는 소식이 조금 잠잠해질 무렵 우리는 또 다른 단체인 IM선교회가 운영하는 IEM국제학교에서 발생한 집단 발병 소식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비인가 종교시설에서 대규모 감염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들로 인해 기독교가 컬트 집단처럼 여겨지고 있는 현실이 참 괴롭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행 2:46)는 말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호감을 사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은 당하지 말아야지요. 몰상식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코로나19는 가파른 성장을 자랑하던 개신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하여 움츠러들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눅 3:17) 지금이 어쩌면 가름의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도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고전 3:11-13). 지금은 검증의 시간입니다. 우리 스스로 참된 믿음 위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개신교의 현실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소설가 헤더 모리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서 같은 민족의 팔에 문신 새기는 일을 했던 랄레 소콜로프와 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여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박아람 옮김, 북로드)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 나오는 한 에피소드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용소는 육체적인 학대가 일쑤 자행되는 곳이지만 동시에 수용자들에게 인간적 모멸감을 안겨주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인간적 존엄을 박탈당한 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곤 합니다. 질병, 영양실조, 추위, 모멸감, 고통을 견디다 못해 어떤 이들은 철조망으로 달려가다가 감시탑에서 쏜 총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지옥 같은 그곳에서도 사랑이 꽃 피어납니다. 랄레와 기타도 그렇게 연인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그들이 인간임을 일깨워주는 아주 소중한 감정이었습니다. 자유롭지 않았기에 그들은 간수들을 매수하여 살짝살짝 만났습니다. 어느 날 랄레는 기타의 친구인 실카가 오랫동안 보이질 않는다며 기타에게 혹시 소식을 알고 있냐고 묻습니다. 망설이던 기타는 실카가 독일군 간부의 노리개가 되었다고 실토합니다. 그 말은 들은 랄레는 실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며 그 말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기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서 발끈하며 말합니다.

“무슨 소리야, 영웅이라니? 실카는 영웅이 아니야..”
기타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냥 살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래서 영웅이라는 거야. 자기도 영웅이야. 실카와 자기가 살아 남는 쪽을 택한 건 나치놈들에 대한 저항이야. 삶을 붙들고 있는 건 저항 행위라고. 영웅적인 행동이야.”(p.202)

살아 남기를 택하는 것이 바로 나치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이들은 이 말 속에 담긴 그 지극한 아픔과 결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굴욕을 감내하며 살아남으려 한 것은 가련한 생의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벌어진 참상에 대한 증언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던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니체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굳세게 만들 것이다.” 그는 자기들이 겪은 경험은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빼앗아 갈 수 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의 경험뿐이 아니었다.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위대한 사색,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모든 고통이 어떤 것이든간에 과거 속으로 흘러간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로 흘러가 버린 모든 것을 실존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과거에 겪었던 일은 일종의 실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확실한 실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역, 청아출판사, p.139. 일부 수정)

과거로 흘러가버린 모든 것을 실존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허비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아름다운 삶의 계기로 삼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든 실패와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벌써 1월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새해 첫 시간에 품었던 꿈들이 이미 퇴색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은커녕 하루하루 버티기도 벅찬 이들도 있습니다. 안개처럼 스멀스멀 우리 삶을 파고드는 우울과 허무에 갇히지 말고,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처럼 당당하게 삶과 마주하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끝까지 번져 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위로부터 오는 희망이 우리 속에 유입되리라 믿습니다.

모처럼 새 교우들과 줌zoom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렇게라도 우리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교회, 속회, 각 부서, 동호회에서 저를 청해 주시면 기꺼이, 감사하게 그 대화 속에 끼어들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목회실 식구들 모두 그런 초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도 비대면 예배를 원칙으로 하려 합니다. 그래도 사정상 꼭 현장 예배에 동참하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전화로 알려주십시오. 스태프들을 제외하면 서른 분 정도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날이 차가워진다고 합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조심조심 이 세월을 견디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2021년 1월 28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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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의 무게를 줄이는 법

근심의 무게를 줄이는 법


“내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날이야말로 영적 각성의 날이다.“(막데부르크의 메히틸트)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대한大寒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겨울의 마지막 절기라지요? “설중雪中의 봉만峯巒(봉우리 모양을 한 산)들은 해 저문 빛이로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땅의 현실이 팍팍하기 때문일까요? 설산은 마치 신비의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경이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하늘의 광채를 보게 됩니다. 괴테가 “모든 산봉우리에는 정적이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진실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의 첫 번째 환자가 발생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 긴 세월이었습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이 감염병이 이렇게 심각하게 우리 일상을 뒤흔들어 놓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몇 주 불편을 감수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질병은 이러한 우리의 낙관론을 무참하게 짓밟았으며, 우리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포스트-코로나 담론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편을 즐겁게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건강 문제로 입원하고 수술을 하거나 기다리는 분들도 계시고, 병이 재발하여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화재로 작업장을 잃어버린 가족도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어버려 몸에 익지도 않은 노동의 현장에 서신 분도 계시고, 전직(轉職)을 준비하는 분도 계십니다. 퇴직을 앞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신 분도 계십니다. 모두 절박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역병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절박함에 관심이 없다. 역병 그 자체의 운동 원리에 충실할 뿐이다.”(안재원, <아테네 팬데믹>, 이른비, p.7). 냉혹한 현실입니다. 이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자각입니다. 교우들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생의 가장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계신 모든 이들을 은총의 큰 손으로 감싸주시기를 하나님께 청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살고 있는 땅’과 ‘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위험 속으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보호의 울타리가 없는 곳에서 낯선 존재로 산다고 하는 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않으면 더 큰 세계에 접속하지 못합니다. 새가 부화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깨지는 것은 아픔을 동반하지만 더 큰 세계로의 도약이기도 합니다. 부등깃이 자라 날개가 제법 펼쳐지면 새들은 허공으로 도약을 감행하며 날기를 연습합니다.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는 게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우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새로운 삶으로의 열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힘들지만 정서적인 긴장감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속적인 긴장 속에 머물 때 우리 속의 여백은 줄어들고 낯빛은 어두워집니다. 말이 퉁명스러워지고, 표정 또한 싸늘해지기 쉽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지고, 분노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몸의 자세가 바뀌면 생각도 바뀝니다. 제가 종종 산책을 즐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거리를 두면 모든 것이 변한다면서 몽테뉴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작은 장소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작은 근심에 빠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몽테뉴는 언제나 거듭, 우리가 근심이라 부르는 것은 자체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키우거나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무게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무게를 지닌다. 가까이 있는 것이 멀리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작은 척도로 움직일수록 작은 것이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낸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안인희 옮김, 유유, p.130-131)

 

어떤 일 혹은 사태에 대해 우리가 부여한 무게가 우리가 느끼는 무게라는 말이 참 크게 와닿습니다. 매사를 가볍게 대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진중하게 살면서도 언제나 그 더 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시121:1-2). 이 시의 맥락에서 ‘산’은 ‘시온’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눈을 들어’라는 말입니다. 시선을 돌리는 것은 회피가 아닙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한 일종의 거리 두기입니다. 현실은 우리를 한없이 몰아댑니다. 거기 휩쓸려서 전전긍긍하다 보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매게 마련입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어느 날 문득 길을 잃었다는 자각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그때야말로 영원의 세계가 우리를 소환하는 순간입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냐?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구냐? 네 혀로 악한 말을 하지 말며, 네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시 34:12-14)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씀은 우리를 물음표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도 누군가가 정색을 하고 물으면 낯설게 보입니다. 질문은 우리 삶의 환기창과 같습니다. 전도자의 이 질문은 우리 삶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즐겁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좋은 일을 보며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답은 간명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악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숨기거나 확대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악한 말은 다른 이들을 밀어내거나 어려움에 빠뜨리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자기 확장 욕망과 타자 부정이야말로 즐거운 삶의 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꼭 붙들어야 할 삶의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선을 행하라(do good)’,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stay in love with God)’.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소극적 윤리라면 선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윤리입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추위에 떨고 있던 사람에게 자기가 입었던 외투와 장갑을 벗어준 사람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선을 행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냉랭한 세상의 얼음을 깨는 봄소식처럼 들려왔습니다. 그가 봄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속에 이미 봄이 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이웃들에게 따뜻함과 친절함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평화는 기다린다고 하여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어 가꾸는 사람이 있어 광야가 푸르러지는 것처럼 평화로운 세상은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드러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중심이 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아픔과 비애가 서린 폭력의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야 평화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라는 가파른 언덕을 허위단심으로 넘느라 다 숨이 가쁘지만, 가끔은 멈춰 서서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흘러가는 강물도 보고, 새들도 보고, 교우들의 얼굴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늘 바람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1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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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 3:12-13) 

 

환자를 대동하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니 눈이 퐁퐁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눈이 시원의 세계로 저를 안내하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열린 흰 세계를 보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첫 문장만은 잊을 수 업습니다.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 삶의 무거움을 조금쯤 짐작하며 현실과는 아주 다른 세계를 꿈꾸었던 터라, 이 문장은 그야말로 주술처럼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흰 눈으로 덮인 세상은 분명히 사람을 낭만적으로 만듭니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나오는 한 두 구절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란 이름이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던 백석에게는 외롭고 쓸쓸한 자기 마음을 의탁하기에 적절한 이름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시구가 유난히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과 눈이 내리는 것을 인과 관계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요. 마치 황지우 시인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설렘 가운데 기다리는 이의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고 노래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파트 앞은 눈밭으로 변했고,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아이 둘이 엄마와 함께 나와 썰매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미리 마련해 놓았던 것일까요? 그런데 저만치에서 나무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경비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썰매를 타느라 빙판이 만들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겠지요. ‘에이, 잠깐이라도 눈 감아 주시지.’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내리는 눈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침묵’(Die Große Stille)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무려 168분짜리이니 짧다고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해발 1,300미터의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삶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이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한 봉쇄 수도원입니다. 대사도 별로 없고, 자연의 소리 이외의 인위적인 음악도 일체 배제하고, 자연 조명만으로 제작한 다큐입니다. 수도원의 삶이라는 게 단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노동하고 침묵하는 것이 다입니다. 침묵 속에서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다림질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참 거룩해 보입니다. 단순한 일상입니다. 한 가지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절뿐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들이 유일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산골에 눈이 내리자 하얀 수도복을 입은 수사들이 열을 지어 언덕을 올랐습니다. 울력이라도 하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언덕 아래로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습니다. 그 근엄하던 수사들의 입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놀이야말로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쉴러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들 속에는 너나없이 아이들이 숨어 있습니다. 역할과 지위와 나이라는 의상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잠시 깨어날 때 우리는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유머가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풀어준다면 웃음은 우울을 해독하는 명약입니다.

 

예수님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은 한결같이 그분의 거룩하신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맑고 고요한 관상의 깊이 속에 머물고 계신 주님을 그린 그림도 있고, 적대자들 앞에서도 한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그림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또한 비장합니다. 십자가 처형 장면을 형상화한 그림은 숭고한 아픔으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베다니 마을에 살던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평화를 알지 못하는 도성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주님은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눅 19:41). 이 말씀 앞에 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 5:7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은 주님을 거역하고 역사의 주권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며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시2:4)고 말합니다. 이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웃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1980년대 초반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던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던 예수님의 초상이 있습니다. 그 그림 속에서 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계십니다. 억압과 두려움이 먹장구름처럼 우리를 짓누를 때 주님의 그런 표정은 우리를 적잖이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자부하던 이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 있습니다. ‘마구 먹어대는 자’, ‘포도주를 마시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입니다. 이런 별명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적어도 사람들의 목을 조르듯 답답하게 만드는 분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흔쾌하게 초대에 응하고, 낯선 이들과의 잔치를 즐기셨던 주님은 분명히 젠체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드는 열쇠와도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요? 영혼이 맑은 사람, 깊은 곳에 잇대어 사는 사람은 강박적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힘들더라도 자꾸 유쾌하게 현실을 대하자고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행복’이라는 시는 역설적 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헤세는 그 바람이 절박할수록 행복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 목표나 목적을 정해놓고 맹렬히 돌진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붙잡으려고 쫓아다닌다면,

너는 아직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거야,

사랑스런 모든 것이 네 것이 된다 해도.

 

잃어버린 것을 네가 안타까워하고

목표를 정해 놓고 초조해한다면,

너는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모든 갈망을 단념하고

목표나 욕망 따위를 더 이상 알지 못할 때,

행복이라는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을 때,

 

비로소 일상의 물결은 더 이상 네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네 영혼은 안식을 찾으리라.”

-헤르만 헤세, ‘행복’, <인생의 노래> 중에서

 

대충대충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하며 조바심치거나 안달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고문하지 말고 묵묵히 일상을 충실히 살아낼 때 사람은 비로소 영혼의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원에 잇댄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나님의 값진 선물임을 자각하면서 한껏 기뻐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의무라는 단어가 조금 무겁지요? 그렇다면 영적 지혜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웃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이 많음을 잘 압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수록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시130:1-2) ‘깊은 물’ 속에 빠져들 듯 암담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해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잠시 쓰린 시간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희망의 날이 움터 올 것입니다. 희미한 빛, 미미한 희망이라 해도 꼭 붙드십시오. 그 작은 빛과 희망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스며드는 통로이니 말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명랑함을 감염시킬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1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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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누가 "나는 마음이 깨끗하다. 나는 죄를 말끔히 씻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와 되는 모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비록 아이라 하여도 자기 행위로 사람됨을 드러낸다. 그가 하는 행실을 보면, 그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올바른지 그른지, 알 수 있다.(잠 20:9-11)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제법 차갑습니다. 소한 절기를 맞이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안락함과 편안함에 길들여진 비루한 몸 탓인지 바람 앞에 우뚝 설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세월에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도 물론 그러한 나태함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이 추위를 이겨낼 수 있기를 빕니다.

 

러시아 시골 마을인 야쿠티아의 오미야콘 초등학생들은 영하 50도에도 등교를 한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추운 마을이라는 그 마을 아이들의 빨간 볼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적응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얼음의 세계에서도, 사막의 열기 속에서도, 물 위에서도 삶을 일구니 말입니다. 혹독한 추위가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시절을 거쳐온 이들 모두가 겪은 일입니다. 웃풍이 심한 방에서 겨울을 나기란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리맡에 뭉쳐 두었던 걸레가 새벽이면 꽝꽝 얼었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도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습니다. 방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연탄가스가 스며들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기에 창문을 빠끔히 열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틈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이 어찌나 차가웠던지요. 아침이 되어 수돗가로 나가면 고무 다라이에 밤새 똑똑 떨어진 물이 꽁꽁 얼어 있기 일쑤였고 바가지로 그 얼음을 깨뜨린 후 그 아래 고여 있던 물로 세수를 했습니다. 얼굴이 마치 칼로 베는 것처럼 시렸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빙판길로 변해버린 가파른 마을길은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줍니다. 늦은 저녁에 온 물차에서 물을 받은 주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비틀비틀 언덕을 오르다가 쏟아놓은 물이 빙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내놓은 연탄재를 깨뜨려 길을 만들곤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면서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묻던 안도현 시인의 시가 그대로 피부로 와 닿는 것은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몇 해 전 남극의 황제 펭귄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펭귄들의 모습이 생명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알을 낳고 그 알이 얼지 않게 하려고 발 위에 올려놓고 아랫배로 눌러 그것을 보호하는 펭귄의 모성애 혹은 부성애를 보며 생명 경외를 가르쳤던 알버트 슈바이쳐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펭귄 허들링이었습니다. 남극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펭귄들은 서로 몸을 기댄 채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바람과 맞섰습니다. 원의 중심부에는 상당한 온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맨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내야 했고 체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씩 움직이며 안쪽에 있던 펭귄들은 바깥쪽으로 이동하고, 바깥쪽에 있던 펭귄들은 안쪽으로 이동하는 허들링을 한다고 합니다. 따뜻한 안쪽을 독차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 세상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바로 이런 원리가 작동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간의 뜨거운 이슈는 양부모의 학대를 받다가 숨진 정인이 이야기입니다. 너무 끔찍하여 보도를 보기 어려웠습니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실이지만, 그 대상이 여리고 여린 아이라는 사실에 말문이 막힐 따름입니다. 게다가 그 양부모란 사람들이 둘 다 목사의 자녀이고 유명한 기독교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습니다. 이 세상에 와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학대받다가 죽어간 아이를 하나님께서 선하신 능력으로 안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중에도 실천적 무신론자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시편 시인의 고백과 기도가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포악함과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시 10:14). ‘그런데 왜?’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정인이가 그렇게 지속적인 학대를 당할 때 하나님은 왜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셨는지요? 우리는 참담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이런 질문 앞에 서곤 합니다. 누구도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증언자로 일생을 산 엘리 위젤의 희곡 <샴고로드의 재판>은 17세기의 유럽에서 벌어진 유대인 집단학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은 우리를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그런 일을 방관하셨느냐는 질문 앞에 세웁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힌 채 하나님에 대한 모의재판을 엽니다. 재판을 하려면 원고와 피고, 재판장과 변호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변호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나중에 한 나그네가 등장하여 변호사를 자처하면서 그럴듯한 논리를 동원하지만 그는 사실 사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신이 없는 증거, 혹은 신의 무능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신정론의 문제는 이처럼 언제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안타깝게도 ‘기계 장치로서의 하나님’(Deus ex Machina)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하여 악인들을 처벌하고 선인들을 구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역사는 그래서 악인들의 독무대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며 조급해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더디게만 흐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역사를 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참담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투덜거리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동학대 방지 법안 90여 건이 국회에 계류 중이랍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아직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 낭비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꿈이지만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꿈입니다.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만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매우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을 품고 광야로 들어갔던 탈출 공동체는 거듭되는 시련과 난관 앞에서 회의에 빠졌습니다. 영롱했던 꿈은 어느새 퇴색되고 고생스러움만 도드라지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의 끓는 가마솥을 그리워했습니다. 노예처럼 부림을 받았던 시절, 자기 삶의 주체로 설 수 없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처럼 안쓰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지향해야 할 목표가 흐릿하면 현실은 중력처럼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많은 이들이 순례자로서의 삶을 포기합니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믿음 안에 머물려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겉으로는 좋은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어둠의 영에 속한 이들이 있습니다. 열정적이지만 그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면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됩니다. 끝없는 성찰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믿음이 때로는 자기를 속이는 허위의식일 수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합니다.

 

옛 선비들은 자기 닦음에 철저했습니다. 대학의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입니다. 큰 배움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덕들입니다. 선비들은 아홉 가지 바른 생각(九思)과 아홉 가지 바른 몸가짐(九容)을 유지하려고 늘 경계했습니다. 발걸음을 가벼이 하지 않기, 손을 공손하게 맞잡기, 눈을 단정하게 뜨기, 입을 다물고 있기, 말소리를 고요하게 하기, 머리를 곧게 들고 몸을 바르게 하기, 호흡을 가지런하게 하기, 의젓하고 품위 있게 서기, 얼굴빛을 명랑하고 점잖게 유지하기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수련 혹은 수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허위의식일 따름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끊음), 더러운 것을 닦아내야 하고(씻음), 지향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향은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낌과 존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빛에 속한 사람인지 어둠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의 관계 속에 하늘의 빛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새해 두 번째 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기 위해 더욱 정성스럽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생명과 평화의 파종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1월 7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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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신비 속으로

은총의 신비 속으로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시 90:14-15)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에 당도했습니다. 험한 파도에 시달리며 항해한 배처럼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흔적이 깊습니다. 상처도 많고 달라붙은 것들도 참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 이렇게 견뎠습니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고단한 시간을 건너왔습니다. 아직 평안의 포구에 당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한 해를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후회와 자책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기 손을 끌어 머리에 얹고 장하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엊그제 TV를 보다가 가슴 찡한 광경과 만났습니다. 어촌 마을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며칠 동안 어민들의 일상을 취재했던 이들이 작별인사를 건네자 그 시선을 외면한 채 ‘잘 가라’고 하시다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고에서 스티로폼에 포장한 뭔가를 들고 나왔습니다. 가재미라며 어촌에서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며 취재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 치는 이들에게 할머니는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정성껏 대접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에 할머니의 그런 마음 씀은 제 속에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저는 혼잣소리로 ‘저 마음 하나면 그만인데.’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따뜻함과 배려야말로 세상의 어떤 이론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요?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 마음의 풍경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번져갈 즈음 저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예배를 비대면으로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두 주만 잘 넘기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근거 없는 낙관론이었습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을 예배당에서 함께 경축하지 못한 것은 아마 우리 생애의 첫 경험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팬데믹의 한복판에 처해 있기에 이 시간의 의미를 온전히 가늠할 수 없지만, 먼 훗날 우리는 이 암담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기만을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제3차 웨이브를 지나고 있습니다. 두 차례 경험했던 것보다 그 파고가 높고 또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큰일 없이 이런 상황이 지나가도 제4, 제5의 웨이브가 올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더욱 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난감한 시간을 견디고 계십니다. 코로나19만 우리를 괴롭힌 건 아닙니다. 기후 위기가 빚은 홍수 피해가 자못 심각했고, 도처에서 일어난 산불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자영업자들이나 소상공인들도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거리를 조금만 걸어보아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인파에 떠밀려 다녀야 했던 명동 거리도 한산하기만 합니다. 소득은 줄고, 두려움은 증대되고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불확실성은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자가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분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큰 목소리로 전화하는 이들을 보면 눈총을 주기도 했습니다. 행여 감염의 매개가 될까 무서워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립니다. 낯선 외로움이 우리 삶을 휩쓸고 있습니다. 

 

유대교 랍비인 나오미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70대 중반에 이른 외할아버지께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실 뿐 아무 일에도 의욕을 보이질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평생을 함께 했고, 아들딸과 손자손녀들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고, 사업 또한 번창했고, 건강 또한 좋았습니다. 우울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느낀 엄마가 할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잠자코 계시던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다!” 그리고 “키비츠(kibbitz)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그에게 결핍된 키비츠란 무엇일까요?

 

“‘키비츠’는 이디쉬어로 친구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든 것을 두루 일컫는 단어다. 몰려다니며, 농담하고, 수다피우고, 놀리고, 이야기하고, 마음을 짐을 풀어놓고, 귀 기울여 들어주고, 킬킬거리는 등등...”(나오미 레비, <아인슈타인과 랍비>, 최순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213)

 

때로는 하찮아 보이고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일들이 어쩌면 우리 삶을 지탱하는 토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그리워합니다. 날이 갈수록 우정 공동체가 그립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길어지면 줌(zoom)으로라도 잡담회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창의적인 제안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무엇보다도 속상했던 것은 개신교회가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유난히 개신교회발 감염에 대한 보도가 많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습니다. 목회 데이터 연구소의 발표를 보니 불교와 가톨릭에 대한 호감은 커졌지만 개신교회에 대한 호감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거리를 두고 싶은’, ‘이중적인’, ‘사기꾼 같은’이라는 대답이 많았다고 합니다. 성내고, 소리 지르고, 비꼬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시민적 상식으로부터 멀어진 교회에 대한 냉정한 평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일상적 삶의 자리에 하늘의 통치를 가져가는 것이건만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배타적인 동시에 편협한 믿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설가이며 평화운동가인 아모스 오즈는 “광신주의의 씨앗은 언제나 결코 타협하지 않는 정당성에 기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협하지 않음은 물론 신앙적 확신이라는 외피를 입고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모든 광신자들에게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저속함(kitsch)을 몹시도 좋아하고, 그런 취미에 매달립니다. 대체로 광신자의 머릿속에는 ‘하나’라는 숫자밖에 없고 ‘둘’ 이상의 복수(複數)는 너무나 큰 숫자라 흡사 머릿속으로 집어넣지 못하는 듯한 형국이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광신자들은 대책 없이 감상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성보다 감정을 좋아하고, 자신의 죽음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있습니다.”(아모스 오즈, <광신자 치유>, 노만수 옮김, 세종서적, p.61-62)

 

광신자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억지로라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삶은 본래 모호하고 복잡한 것인데 그들은 스스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모스는 광신자들에게 결핍된 것은 유머 감각이라고 말합니다. 유머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능력에서 발현됩니다. 냉소주의자들은 유머를 모릅니다.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명랑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명랑한 이들과 만나면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게가 조금 줄어드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송구영신예배에도 우리는 직접 얼굴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떼제 찬양을 함께 부르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성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시간을 통해 깊이 결속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해 전 제가 미국의 버몬트 주에 있는 작은 수도원에 잠시 머물 때 한 수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수도원은 남미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한 이들을 가족으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늘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지냈고, 할 수 있는 한 외부인들과 접촉하지 않으려 했답니다. 그 가족들이 첫 번째 성찬에 참여했을 때, 수사들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어머니가 성찬 떡을 그 갓난아기의 입에 조심스레 넣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사님은 그 광경을 보며 성찬의 신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성찬은 딱딱한 교회 의례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음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도 성찬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이 계셔서 참 든든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가족이 되었지만 아직 깊은 친교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올 한 해를 주님 안에서 잘 마무리 하시고, 가슴 벅찬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바라봅니다. 괴로움의 시간은 결국 지나갈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2월 3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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