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52)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요한복음 21:9-13)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 건져 올리지 못한 어부들의 마음은 쓸쓸했을 것이다. 건져 올릴 때마다 텅 빈 그물은 마치 그들의 마음인양 쓸쓸했다. 그때 해변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때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져보라 일렀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렸던 것일까? 그들은 그대로 했다. 그러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그때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인 요한은 자기들에게 말을 건네신 분이 주님임을 알아차렸다. 베드로는 벗어놓았던 겉옷을 걸치고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 다가갔다. 어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힘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으나 시련의 채찍질 소리에 속절없이 무너진 그들이었다. 유구무언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해안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생선과 떡이 그 위에 올려 져 있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계셨던 것이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와서 아침을 먹어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주님이 차리신 식탁은 마치 너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식탁 공동체였다. 예수님은 사회적 기휘의 대상인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가족으로 혹은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닌가? 가족이라는 말은 혈연에 근거한 친족관계를 이르지만, 식구는 말 그대로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바로 식구이다.

 

꾸지람 한 마디 없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식구로 맞아들이신다. 옳고 그름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비판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타인의 지지와 사랑이다. 받아들여짐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안의 상처를 보석으로 가꿀 힘을 얻는다. 돌에 맞고 가지가 꺾이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먹감나무는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바꾼다. 주님은 받아들임을 통해 그들을 가두고 있던 어두운 기억과 상처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신다. 상처가 없었다면 그들은 인간의 연약함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앙이란 일종의 연금술이다. 보잘 것 없는 재료를 가지고 가장 귀한 것을 빚어내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화학적 변화를 위해서는 촉매가 필수적이다. 무너진 영혼의 재탄생을 위해 필요한 촉매제는 따뜻한 ‘받아들임’이다. 믿음의 사람이란 냉혹한 세상에서 영혼의 촉매가 되려는 이들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주님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불빛이 우리 눈을 가려 주님을 시야에서 놓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맛들인 영혼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에 이끌립니다. 주님, 우리를 포기하지 마시고 찾아와 주십시오. 제자들에게 주셨던 그 빵과 생선을 우리에게도 주십시오. 그 귀한 사랑을 먹고 힘을 얻어 상처의 기억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이웃에게는 덕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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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51)

 

뜨거움을 나누는 사람들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누가복음 24:28-32)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절망의 문이었다. 외세의 지배가 끝나고, 시온이 세상의 모든 산들 위에 우뚝 서리라는 꿈은 남가일몽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애써 다독여보아도 마음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드는 허무의식을 떨쳐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미련 없이 예루살렘을 등졌다. 그러나 아쉬움조차 없던 것은 아니어서, 그 동안의 경험을 나누며 걷고 있었다. 재를 뒤적여 꺼져가는 불씨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함께 걷다가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예루살렘을 들끓게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이들이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던 예언자 나사렛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믿었지만 그는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고, 며칠 후 여인들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면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제자는 낙향하고 있었다. 

 

 

                      렘브란트/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 나그네는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고 그들을 책망하면서 모세와 예언자들을 비롯해 성경 전체에서 메시아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풀어 설명해준다. 메시아적 신비에 대해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희미한 빛이 그들 속에 스며들었던 것일까? 두 사람은 나그네를 자기들의 집에 초대한다. 식탁이 차려졌을 때 나그네는 빵을 들어 축사를 한 후에 떼어 나누어주었다. 그들의 영혼에 새벽이 다가왔다. 그들은 그 나그네가 주님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깨달음과 동시에 예수님은 사라졌다.

 

두 사람은 그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되새긴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누가복음 24:32) 그 길 위에서  절망으로 식어버린 영혼에 온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생명은 온기 속에서 탄생하는 법, 그들은 그 뜨거움의 기억을 간직한 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제자들이 머물고 있던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제자들을 통해 주님이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한다. 두 사람도 자기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일어난 일을 증언한다. 경험의 나눔을 통해 그들은 더 큰 확신에 이를 수 있었다.

 

교회는 그런 뜨거움을 나누는 이들의 모임이다. 나그네처럼 다가와 어둡던 우리 인생을 밝혀주셨던 주님에 대한 다채로운 증언이 합류하여 거대한 흐름이 될 때, 욕망의 탁류 속에 떠내려가던 삶을 거스를 수 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걷고 계신다.

 

*기도*

  

하나님, 기대하고 소망했던 일이 무너질 때 절망의 어둠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습니다. 애써 몸과 마음을 추슬러 보지만, 한번 상처 입은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삶의 의욕이 사라집니다. 지금 절망의 내림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들 곁에 다가가시어 식어버린 마음에 뜨거운 불꽃을 다시 지펴주십시오. 외로움 속에 유폐되지 않게 해주시고, 삶의 기쁨과 슬픔을 나눌 동료들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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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50)

 

십자가에서 탄생한 빛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마가복음 15:29-32)

 

맹자는 인간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고 가르쳤다. 우물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를 보면 선인이든 악인이든 달려가 아이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는 인애의 감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어떤 순간에는 발현되지만 또 다른 순간에는 발현되지 않는다. 두려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강자와 자기를 합일화 함으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 가운데는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대하는 이들도 있다. 자기들 속에 있는 연약함을 숨기려고 더욱 악마적으로 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며 사람들이 보인 태도는 조롱과 멸시였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신 후에 군인들에게 당하신 조롱도 아프지만, 골고다 언덕에서 보인 사람들의 야멸찬 태도가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한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그 조롱에 가담한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마가복음 15:29-32)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공모의 미소를 지었을까?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연민도 없는 불모의 시간이었다.

 

 

 

 

박두진은 <갈보리의 노래2>에서 예수님이 겪으셨던 그 어둠의 시간을 폭포와 같은 문장으로 드러낸 바 있다.

 

“마지막 내려 덮은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 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그 비애의 시간에 예수님 홀로 고요했다. 하나님의 완강한 침묵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형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했다.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겼다. 이해를 넘어서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도구였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 절망을 빚어 만드는 희망, 죽음을 이기는 궁극적 생명 말이다. 그 빛을 보았던 것일까? 십자가 아래 서 있던 백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가복음 15:39)

 

*기도*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와 아울러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납고 무정한 사람들은 고통 받는 이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픔을 주십시오. 주님의 피를 주십시오. 주님의 눈물을 주십시오. 십자가에서 탄생한 그 영원한 빛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요 길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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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2:17-18)

 

1년 여를 법정에 서야 했던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법정에 서보니까 최후의 심판이 관념이 아닌 현실임을 알겠더군요.” 사람은 자기의 경험만큼만 세상을 이해한다. 물론 간접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거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는 낯선 세계에 대한 심화된 지식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진정한 이해는 아니다.

 

소행성 B612에 살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자기 별을 떠나 우주를 탐험한다. 여섯 번째 별에서 그는 지리학자를 만난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그는 어린왕자의 별에 대해 말해달라고 한다. 어린왕자는 자기 별에 있는 장미꽃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지리학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꽃 따위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유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그는 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는 변하지 않는 것만 기록할 뿐 소멸할 위험이 있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연 세계를 이해한 것일까?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관찰보다는 애정이,/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이 문장은 이해 혹은 관계의 최고 형태가 무엇인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은 달리 보이는 법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지 않던가(스콧 니어링).

 

 

 

 

실패나 가난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이어트를 위한 단식이 아니라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의 서러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파본 사람이라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절망의 심연 앞에서 현기증을 느껴본 사람이라야 벼랑 끝에 선 이의 심정을 이해한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성현들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있는 이가 보여주는 연대의 몸짓에 더 큰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은 얼마나 놀라운가? 무한이 자기를 비워 유한 속으로 들어왔다는 진술은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말로 여겨질 것이다. 예수는 짐짓 인간이 된 체 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2:18) 십자가에 이르는 삶을 남김없이 살아내셨기에 주님은 세상의 모든 질고를 대신 지실 수 있었다. 그 사랑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곤고할 때마다 우리는 그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우리의 가능성이 다 소진되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찾습니다. 절망의 심연에 갇혀 희망의 빛 한 점 보이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다 맛보셨기에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이제부터 주님을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손과 발로 삼아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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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8)

 

시름하는 동조자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요한복음 19:38-42)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부름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즉각적이고 전폭적인 응답이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1세기 갈릴리의 상황은 참담했다. 그는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티베리아스를 건설했다. 그 건설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것은 무고한 백성들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의 임명권자인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다. 조상 대대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던 어부들도 배와 그물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내야 했고, 기껏 잡아 올린 물고기도 헤롯이 만든 염장 처리 공장에 헐값으로 넘겨야 했다. 삶은 피폐해졌고,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이 어부라는 사실이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여 모두가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이들이었지만 유력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또 깊이 공감했지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를 근기가 없었다. 자기가 예수의 가르침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그것은 주류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일처럼 보였고, 그때 자기들에게 집중되는 비난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까? 따름의 철저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들은 비겁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규정은 여린 싹을 짓밟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여백이 없는 믿음의 강요는 허위의식을 낳기 쉽다.

 

 

복음에 동조하면서도 여전히 생활에 매여 있는 이들이 있다. 헨리 나웬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시름하는 동조자들’이라 명명했다. 그들을 비웃거나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숨은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주님의 시신을 요구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자기의 신앙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겁 많은 자의 용기’를 낸 것이다. 차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끌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기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과 사회적 평판을 계산하지 않았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을 닦고 새 무덤에 모셨다. 빛나는 신앙적 도약의 순간이다.

 

경직된 믿음은 자칫 잘못하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신앙도 그렇게 배워가는 과정이다. 넘어지면 일어서면 된다. 지향만 바르면 된다. 지향이 바르면 잠시 푯대가 보이지 않아도 낙심할 것 없다. 저 언덕을 넘으면 푯대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기도*

 

하나님, 믿음은 결단이고 모험이라는데 안일에 길들여진 우리는 도무지 길을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 옷자락을 붙드는 옛 생활의 습성을 떨쳐버릴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결단해야 할 때를 놓치곤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 영혼은 누추해졌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어떻게 두려움을 떨치고 위험 앞에 설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그들을 일으켜 세웠던 그 뜨거움을 우리에게도 주십시오. 자아의 한계를 넘어 자유롭게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는 검질긴 믿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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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7)

 

죽음의 강에 뛰어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5)

 

바울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의 결과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죄의 유전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게 사실이다. 의문이 생긴다.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행된 첫 사람의 죄에 대해 우리가 공동책임을 져야 하는가? 조금 억울하다. 하지만 아담은 인류의 첫 사람인 동시에 모든 사람이다. 흙으로 빚어진 모든 존재는 아담이다. 어느 시인은 흙에 불안을 더한 게 인간이라 말했다. ‘네가 신처럼 될 것’이라는 뱀의 말은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는 순간 신적 지혜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원망과 경계심이 발생했다.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판별하려 한다. 각자 기준이 다르니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지금 온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음은 각자의 옳음이 충돌하는 데서 빚어진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죄가 죄로 명명되기 전에도 이미 죽음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고 말한다.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르쳐주었지만, 우리 속에 깊이 또아리 틀고 앉은 죄의 경향성을 없애지는 못한다.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은혜 밖에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로마서 5:15)

 

 

 

 

‘동물의 왕국’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장면이 있다. 아프리카 사바나 지역에 사는 누 떼는 건기가 되면 새로운 풀을 찾아 무려 1,600km를 이동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여정이 순탄치만은 않다. 커다란 강 앞에 당도했을 때 누 떼는 자기들 앞에 있는 위험을 감지한다. 강에는 포식자인 악어가 도사리고 있다. 누 떼는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선뜻 뛰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그 건너편으로 가지 않으면 생존을 이어갈 수 없다. 그때 어느 한 마리가 힘차게 강에 뛰어든다. 뒤를 이어 수많은 누 떼가 강을 건넌다. 희생당하는 개체들도 있지만 그들 대다수는 결국 건너편에 당도했고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 마리가 앞서 죽음의 강에 뛰어듦으로 누 떼는 존속될 수 있었다. 

 

예수님도 죽음과 공포의 도도한 물결 속에 몸을 던져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셨다. 주님이 앞서 가신 그 길을 따라 걷지 않고 주춤주춤 망설이다 보면 정신의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예수님을 길이라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 십자가 길을.

 

*기도*

 

하나님, 에덴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늘 뭔가에 쫓기며 삽니다. 느긋한 평화를 꿈꾸지만, 우리 마음을 뒤흔드는 일이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집니다. 처리해야 할 문제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도무지 삶의 여백을 마련할 수도 없습니다. 복잡하게 뒤엉킨 우리 마음, 찌그러지고 멍든 우리 마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빚어주십시오. 그래서 허망한 열정에 사로잡혀 살기보다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참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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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6)

 

보물이 오물로 변할 때

 

그들은 은을 길거리에 내던질 것이며, 금을 오물 보듯 할 것이다. 내가 진노하는 날에, 은과 금이 그들을 건져 줄 수 없을 것이다. 은과 금이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못하고, 허기진 배를 채워 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은과 금은 그들을 걸어서 넘어뜨려, 죄를 짓게 하였을 뿐이다. 그들이 자랑하던 아름다운 보석으로, 역겹고도 보기 싫은 우상들을 만들었으므로, 내가 보석을 오물이 되게 하겠다.(에스겔 7:19-20)

 

자본주의 체제는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을 통해 유지된다. 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지만 바다를 다 채우지 못하듯이 인간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영혼은 ‘이제 그만’이란 말을 모르기에 삶을 한껏 누리지 못한다. 그들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접근이 허용된 ‘희소한 것’을 소유함으로 남들과 구별되려 한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죄는 ‘새로운 상품’의 소비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사람들은 피곤하다. 

 

돈은 힘이 세다. 못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구매력이 있는 사람은 어딜 가나 당당하다. 낯선 곳에 가도 주눅 들지 않는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 사람들은 돈을 신으로 모신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렇게 된다. 돈을 위해 양심을 팔기도 한다. 예수님은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어른들은 참 이상하다면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말하면 그 친구의 목소리나 그 친구가 좋아하는 장난 혹은 나비를 수집하는지는 묻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만 묻는다고 말한다.  “나이가 몇이냐? 형제가 몇이냐? 몸무게가 얼마냐? 그 애 아버지가 얼마나 버니?” “창틀에는 제라늄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고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해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십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라고 해야 그들은 ‘야, 참 훌륭하구나!’ 하고 감탄한다”. 타락한 세상이다. ‘어린왕자’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가게에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친구를 파는 가게는 없으니까. 

 

 

 

 

비상한 시기가 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돈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돈은 무력하다.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돈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기며 살았던 삶을 후회해 보아야 소용없다. 에스겔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리고 욕망의 길을 따라 간 백성들에게 경고한다. 주님의 분노의 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시는 날,  “매질할 몽둥이가 꽃을 피우고 교만을 꺾을 채찍이 싹터”(에스겔 7:10) 나오는 날이 곧 닥쳐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매질을 피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으랴! 그때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행복의 신기루를 좇고 있었음을 알고 후회할 것이다.

 

“그들은 은을 길거리에 내던질 것이며, 금을 오물 보듯 할 것이다. 내가 진노하는 날에, 은과 금이 그들을 건져 줄 수 없을 것이다. 은과 금이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못하고, 허기진 배를 채워 주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은과 금은 그들을 걸어서 넘어뜨려, 죄를 짓게 하였을 뿐이다.”(에스겔 7:19) 그날이 오면 보석이 오물로 변한다. 무서운 심판이다. 보석이 오물로 변하는 일은 일상에서 다반사로 벌어진다. 돈 때문에 인간성을 포기한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돈이 중심이 되는 순간 아름다운 관계는 파탄 나고, 공동체도 파괴된다. 돈 없이 살기는 어렵지만, 돈이 우리 삶의 주인 노릇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기도*

 

하나님, 이전보다 우리 삶의 형편이 많이 나아졌지만 행복감은 오히려 줄어든 것 같습니다. 골고루 가난하던 시절, 이웃들은 콩 한 쪽도 나눠먹었습니다. 가속화된 시간 속을 바장이는 현대인들은 도무지 이웃들에게 곁을 내주질 못합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는 순간 다른 이들이 우리를 추월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입니다. 행복을 원하면서도 행복을 피하며 사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금과 은, 보물이 오물로 변할 수도 있음을 한 순간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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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5)

 

나귀를 타신 왕

 

예수와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다. 그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가서 보면,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있을 것이다. 풀어서, 나에게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리하면 곧 내어줄 것이다.” 이것은,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타셨다. 큰 무리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가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무리와 뒤따라오는 무리가 외쳤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에,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다.(마태복음 21:1-11)

 

세상에 급할 게 뭐가 있냐는 듯 느릿느릿 걷는 나귀를 본다. 무거운 짐을 등에 얹고도 태연자약하다. 주인의 바쁜 마음 아랑곳 없이 제 속도로 걸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이스라엘의 왕들은 나귀 혹은 노새를 타고 도성에 들어갔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측근인 브나야로 하여금 솔로몬을 자기가 타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인도한 후, 거기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라고 명령했다.(열왕기상 1:33-34) 

 

왜 말이 아니고 노새인가? 말은 전쟁을 연상시킨다. 말을 길들임으로 인간은 이동 거리와 속도를 늘릴 수 있었다. 말에 오르거나 균형을 잡기 위해 안장에 부착한 등자(鐙子)의 발명은 전쟁 역사를 바꾸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제국의 틈바구니에서 힘겨운 생존을 이어가야 했다. ‘병거’와 ‘기병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성경에서 가장 오랜 층에 속하는 미리암의 노래는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지없이 높으신 분, 말과 기병을 바다에 던져 넣으셨다”(출애굽기 15:21))고 고백한다.

 

토라는 왕들이라 해도 군마를 많이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신명기 17:16)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던 다윗은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자기 세력을 되찾으려고 출정하였을 때에, 다윗이 그를 치고, 그에게서 기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다. 다윗은 또 병거를 끄는 말 가운데서도 백 필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모조리 다리의 힘줄을 끊어 버렸다.”(사무엘하 8:3-4) 그들이 일어설 수 없도록 조치한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말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치빙전렵영인심발광馳騁畋獵令人心發狂’, 말을 타고 사냥질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는 말이다. 문명은 속도를 자랑하지만, 가속의 시간은 우리에게 평화를 안겨주지 못한다. 시인 정지용이 ‘다락처럼 높다’고 했던 말이 아니라, 만만해 보이는 나귀 혹은 노새를 탄 왕의 모습은 평화의 상징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제자들이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자 예수님은 그 위에 올라타셨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도 겉옷을 길에다 펴고,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 흥분한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며 그를 맞아들였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태복음 21:9) 이 행렬은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로마군의 위풍당당한 행진과 대비된다. 로마의 점령군은 자기들의 위세를 드러내는 동시에 피식민지 백성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주입하기 위해 깃발을 앞세운 채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은 공포가 아니라 사랑이, 위세가 아니라 겸허함이 영원함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는 어느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가?  

 

*기도*

 

하나님, 가속의 시간에 적응하느라 우리는 늘 숨이 가쁩니다. 평안을 희구하면서도 늘 불안에 시달립니다. 질주하지 않으면 남에게 추월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우리는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머리에 그려봅니다. 그 속도는 사랑의 속도이고, 함께 함의 속도입니다. 어쩌면 생명이 자라는 속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속에 일고 있는 불안의 광풍을 잠잠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속도에 맞춰 살아갈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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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4)

 

주님의 기쁨, 나의 기쁨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징벌을 그치셨다. 너의 원수를 쫓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왕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게 말할 것이다. “시온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아라.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2)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스바냐 3:14-17)

 

스바냐가 활동하던 시대는 공의와 정의가 철저히 무너진 시대였다.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예루살렘에서는 우상숭배가 성행했고,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밥으로 삼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스바냐는 예루살렘을 가리켜 ‘망하고야 말 도성’, ‘반역하는 도성’, ‘더러운 도성’, ‘억압이나 일삼는 도성’(스바냐 3:1)이라 꾸짖는다. 백성들을 잘 돌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와 같고, 정의를 세워야 할 재판관들은 저녁 이리 떼와 다를 바 없다. 예언자들은 거만하고 제사장들은 성소나 더럽힐 뿐이다. 총체적 난관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는 미뤄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님은 거만을 떨며 자랑을 일삼던 자들을 거룩한 도성에서 없애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주님은 그 도성 안에 “주의 이름을 의지하는 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을 남길 것”(스바냐 3:12)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들에게도 시련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이들에게 시련은 더 큰 희망의 단초가 되기도 하는 법. 심판의 불길을 통과하는 동안 그들은 세상의 헛된 것들에 미혹되지 않고, 오만에 빠지지 않는 단련된 인격을 얻게 된다. 믿음의 사람들은 시련의 불꽃 속에서도 노래하고 즐거이 외쳐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힘없이 팔을 내려뜨리고 있을 이유가 없다.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스바냐 3:17a) 이 한 마디면 족하지 않은가.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는 시련의 불꽃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보며 기뻐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그런 하나님의 기쁨을 또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우리 삶의 든든한 토대로 삼아야 한다. 타고르도 〈기탄잘리〉에서 이런 체험을 아름답게 노래했다.

 

“당신은 나를 무한케 하셨으니 그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비우고 또 비우시고 끊임없이 이 그릇을 싱싱한 생명으로 채우십니다./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넘어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당신 손길의 끝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즐거움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당신의 무궁한 선물은 이처럼 작은 내 손으로만 옵니다./세월은 흐르고 당신은 여전히 채우시고 그러나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가냘픈 갈대 피리 같은 우리 속에 숨을 불어넣으시어 하늘의 선율을 연주하게 하시는 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애쓰지만, 우리 눈빛이 싸늘하게 식을 때가 많습니다. 불의한 이들이 득세하고, 선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힘없이 팔을 늘어뜨리고 있지 말라’ 이르십니다. 그 말씀에 의지하여 힘을 내겠습니다. 불의에 맞서면서 선의 싹을 키우기 위해 땀 흘리겠습니다. 주님께 속한 그 기쁨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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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3)

 

바디매오에게 배우다

 

그들은 여리고에 갔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 가에 앉아 있다가 나사렛 사람 예수가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눈먼 사람을 불러서 그에게 말하였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시오. 예수께서 당신을 부르시오.” 그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께로 왔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그 눈먼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마가복음 10:46-52)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 주님은 세 번씩이나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 말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 생각에 골똘한 탓일 것이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노골적으로 자기 청탁을 하지 않았던가? 다른 제자들은 그들 형제에게 분개했다. 그들의 철 없음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그림자를 그들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칼 구스타프 융에 의하면 그림자란 우리 속에 있으나 스스로 거부하거나 억압해온 내면이다. 자기들이 먼저 하고 싶었으나 차마 할 수 없었던 말을 그들이 앞서 꺼냈으니 화가 난 것이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떠나실 때 제자들과 큰 무리가 뒤를 따랐다. 디매오의 아들인 바디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가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며 그를 꾸짖었다. 자기들의 안일한 평안을 깨뜨리는 소리를 사람들은 참아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장벽이 되어 바디매오를 침묵시키려 한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절박했기에 더욱 큰 소리로 주님을 불렀다. 마침내 그 소리가 예수님을 멈춰 세웠다. 

 

주님이 그를 데려오라 하시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께 왔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바라느냐?”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군더더기라곤 없다. “그러자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마가는 감동적인 현실을 건조하게 서술할 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일체의 말을 생략하고 있다. 질문과 대답 그리고 실행 사이에 조금의 틈도 없다.

 

‘그 눈먼 사람은 곧 다시 보게 되었다’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가는 ‘바디매오’라는 고유명사 대신 ‘그 눈먼 사람’이라는 보통 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눈을 떠야 할 처지에 있는 이들을 상정한 의도적 표현이 아닐까? 그 구절은 주님의 제자라 하면서도, 3년씩이나 동고동락 했으면서도 여전히 눈에 안개 같은 것이 씌워져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눈을 뜬 바디매오와 눈을 감고 있는 제자들이 대비된다. 게다가 바디매오는 “예수가 가시는 길을 따라 나섰다.” 호기심에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예수를 길로 삼았다는 말이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였다는 말일 것이다. 바디매오는 이상적인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진리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교회 생활에도 익숙해졌고, 성경말씀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선포되는 말씀이 어디로 향할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 눈이 감겨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절박함조차 없습니다. 어느덧 신앙생활은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 나태함에 빠진 우리 영혼을 깨워주십시오. 그리고 진리의 샘물을 마시고 일어나 주님의 뒤를 따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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