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릴 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 11:6)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입하와 소만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떡갈나무 잎이 넓게 퍼지고 뻐꾹새와 꾀꼬리 울음소리가 자주 들려올 때입니다. 시인 정현종 선생은 ‘올해도 꾀꼬리는 날아왔다’는 시에서 “5월 7일 오전 9시 43분/올해 첫 꾀꼬리 소리”가 들려왔다고 적었습니다. 청명한 대기를 울리는 꾀꼬리 울음소리는 아득한 그리움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 소리의 품 안에 안기고 또 안긴다고 말합니다. “번개처럼 귀밝히며/또한 천지를 환히 관통하는/이 세상 제일 밝은 光音, 새소리!” 숲길에서 만나는 새소리는 울울한 우리 마음을 말끔히 닦아내는 하늘의 소리처럼 들립니다. 이런 소리의 세계 속에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런 시간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누구 탓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분주함에 포획된 채 허둥거리며 사느라 정작 귀한 시간을 낭비하곤 하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문제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5월을 가정의 달이라 하면서도 흔쾌히 즐겁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5월의 대지를 물들인 피울음소리를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사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불귀의 객이 된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만 23살이 갓 지난 이선호 씨의 때 이른 죽음이 참 가슴 아픕니다. 평택항 부두에서 컨테이너 해체 작업을 하다가 300kg이나 나가는 철판에 깔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후 군대에 다녀와 복학하기 전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잠시 구했던 일터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마치 그 죽음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는 것 같아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그는 휴대전화에 아들의 전화번호를 ‘삶의 희망’이라고 입력해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게도 자랑스럽고 대견했던 아들의 죽음을 어찌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한 젊은이의 꿈이 그리고 한 가족의 희망이 그렇게 무너진 것입니다. 일터에서 집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어린이날에도 어버이날에도 일터에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대기업들은 노동자들의 안전을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무리 정신을 집중한다 해도 한순간 방심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다른 이들의 실수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안전 문제는 그런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어도 부족할 판입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율법도 그와 유사한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가 어떤 사람을 들이받아서 죽게 하였으면 그 소는 반드시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 처형된 소는 먹어서는 안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면 소의 주인은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소에게 받는 버릇이 있는데, 그 임자가 남에게 경고를 받고도 단속하지 않아서 어떤 남자나 여자를 죽게 하였으면, 그 소만 돌로 쳐서 죽일 것이 아니라, 그 임자도 함께 죽여야 한다.”(출 21:29)

 

위험을 알고도 방치한 사람에게 무겁게 책임을 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이 원하면 소 임자를 처형하는 대신 배상금을 물릴 수도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놓거나, 구덩이를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출 21:33)에는 구덩이의 임자가 짐승의 임자에게 배상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런 규정을 세세히 적시한 까닭은 강자들에 의해 약자들의 권리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기보다는 강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집행되곤 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모든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율법은 약자 보호가 하나님의 관심사임을 보여줍니다. 나그네, 과부, 고아, 채무자들은 친족의 보호를 받지도 못하고, 부모나 남편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도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약자의 보호자가 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서,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반드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겠다”(출 22:23).

 

우리 사회의 약자들의 처지를 돌아보고 그들이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책무입니다.

 


며칠 전부터 잠시 짬이 날 때 읽는 책이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 파시스트 정권과 나치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처형당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마지막 편지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짤막한 편지도 있고 긴 호흡으로 쓴 편지도 있지만, 처형을 며칠 혹은 몇 시간 앞두고 쓴 편지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의를 따라 살다가 맞이하게 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선택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남겨진 가족들이 겪을 상실의 고통을 염려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게 깊은 울림을 준 것은 41세의 가구공인 피에트로 베네데티의 편지입니다. 젊어서부터 낡은 질서에 도전하는 일을 해왔던 그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아내에게 긴 호흡의 편지를 썼습니다. 특별 사면을 받을 수 있다면 알량한 자존심 따위는 버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살아 남고 싶어서가 아니라 가족들에게 슬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겨질 아이들에게 유언처럼 당부합니다.

“내 사랑이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아껴 주렴. 그리고 네 엄마를 사랑해 드리려무나. 내 빈자리를 너희들의 사랑으로 채워 다오. 공부와 일을 사랑하렴. 정직한 인생은 살아 있는 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이란다. 인류애를 신조로 삼고 너희와 같은 사람들의 고통과 결핍에 항상 신경 쓰렴. 자유를 사랑하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이 안녕은 누군가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혹은 누군가가 목숨을 바친 대가로 이뤄진 것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저들의 노예로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아. 모국을 사랑하되, 진정한 조국은 전 세계이며, 어디에나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너희들의 형제라는 것을 기억하렴.”(피에로 말베치·조반니 피렐리 엮음, <레지스탕스 사형수들의 마지막 편지>, 임희연 옮김, OLDBEN, p.92-93)

아직은 세상 물정을 다 알기 어려운 나이의 아이들이 그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메시지는 선명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누군가가 대가를 지불했기 때문임을 잊지 말라는 말, 파시스트들의 노예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마치 피울음처럼 들립니다. 단호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족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마음을 추스르는 것처럼 자기가 하려 했던 일의 의미를 밝힙니다.


“인류에게 가해진 이 끔찍한 모욕을 견디고 지금의 슬픈 현실보다는 우리가 누려 보지 못한 더 아름답고 더 좋은 미래를 그들로 하여금 누리게 해 주는 것이 가장으로서의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 그 미래는 곧 실현될 거야. 어찌 되었건 나는 사람, 사물 할 것 없이 전부 파괴하는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질 거야. 나는 내 아이들이 나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꽁무니를 빼는 겁쟁이가 아닌, 의무의 호소에 응답하다 유명을 달리한 아버지로 남고 싶어.”(앞의 책, p.96)

그는 인류에게 가해진 끔찍한 모욕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려 하지 않고 거기 도전하고 균열을 일으켜 결국 더 나은 세상의 꿈이 영글게 하려 했기에 떳떳합니다. 그는 아이들이 아버지를 겁쟁이가 아니라 용감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가 견지한 단호한 입장은 소시민적 안락함을 추구하는 우리 삶에 큰 도전이 됩니다. 지금도 인류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모욕이 세상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며 삽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시 11:3) 히브리의 시인은 이렇게 탄식하다가도 문득 하늘 보좌에 앉으신 분이 사람을 살피시고 눈동자로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의인은 가려내시고 악인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곧 희망입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삶은 계속됩니다.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은 상황이지만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책무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명랑하고 청신한 바람을 불어넣는 일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그리고 우리 사랑의 범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백신 접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도우심이 우리를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길 빕니다.

2021년 5월 1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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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고 아픈 사랑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하나님 아버지 모셨으니 믿음의 반석도 든든하다 우리집 즐거운 동산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 하루”(찬송가 559장 1절)

아름다운 5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로 이어지는 5월의 첫 주간입니다. 뭔가 기대를 품은 아이들의 눈빛이 귀엽습니다. 꽃 가게마다 카네이션을 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네요. 교회에서 보내준 선물 상자를 개봉하며 신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준다는 사실이 주는 위안과 기쁨은 어른과 아이가 다르지 않을 겁니다. 환청처럼 제 귀에 낭랑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비 개인 아침 공원을 천천히 걷다 보면 이 가사가 실감이 납니다. 나무 그늘 밑을 걸을 때면 마치 초록빛이 몸과 마음에 배어드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 말입니다.

간밤에는 모처럼 꿈을 꾸었습니다. 제주도의 오름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길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데, 두런두런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교우들 몇 분이 뒤따라오고 계셨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천천히 언덕길을 오르자, 언덕 저 편에서 많은 교우들이 즐겁게 놀고 계셨습니다. 소풍을 나온 것처럼 유쾌하게 담소하는 이들도 있고, 배구공을 가지고 놀고 계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 입이 벙싯 벌어지는 찰나 팬데믹 시대에 우리가 집합 금지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리를 유지하세요”라고 외치려다가, 잠시라도 그 아름다운 광경을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꿈에서라도 여러분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이게 꿈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그 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버이날을 맞이하면서 만감이 교차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처럼 미묘한 것이 또 있을까요? 도종환 시인의 <새의 사랑>이라는 시는 한 생명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시인은 나뭇가지 위에 지은 둥지에 앉아 처연히 비를 맞고 있는 새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새끼들이 비에 젖을세라 두 날개로 꼭 품어 안고 쏟아지는 비를 다 맞는 새의 모습이 시인의 가슴에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새들도 저렇게 새끼를 키우는구나" 생각하니 숙연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미 새의 사랑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새들의 깃털이 돋아나고 마침내 나는 법을 가르쳐야 할 때가 오자 어미 새는 조금 떨어진 옆 나무에 벌레를 물고 앉아 새끼들이 제 힘으로 날아올 때를 기다렸습니다. 새끼들이 노란 부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울어대도 제 스스로 날아올 때까지 어미는 숲 어딘가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아직 덜 자란 날개를 퍼덕이며 떨어지다가 가까스로 날아오르자 어미는 새끼 새의 입에 벌레를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미 새의 사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시의 마지막 연을 직접 들어보시지요.

"새끼들이 스스로 먹이를 구할 만큼 자라고
숲 그늘도 깊어가자 어미새는 지금까지 보여준
숲과 하늘보다 더 먼 곳으로 새끼들을
멀리멀리 떠나보내는 거였습니다
어미 주위를 맴돌며 머뭇거리는 새들에게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정을 접는 표정을 보이는 거였습니다
사람이나 새나 새끼들을 곁에 두고 사랑하고픈 건
본능일 텐데 등을 밀어 보내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눈물도 보이지 않고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사랑하기에 어미 새는 새끼들을 멀리 떠나보냅니다.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어미는 새끼를 독립적 존재로 키우고 싶은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시행착오를 겪을 시간을 줄여주고 싶어서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식 사랑이 아니라 자식 망치는 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버릇이 든 사람들은 주체적 사고를 할 수 없습니다. 부모에 대한 진짜 효도는 부모보다 더 큰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 뿐만 아니라,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책임에 응답할 줄 아는 것 말입니다.

 

사진/김승범


어버이주일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떠올랐습니다. 교회 역사는 그를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고 현숙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그가 감내해야 했던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은 ‘피에타’라는 도상을 통해 마리아의 슬픔을 드러내려 노력했습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피에타상’ 앞에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인간 모두가 겪고 있는 슬픔이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는 소식을 들은 이후 마리아의 삶은 더 이상 평범한 행복을 구하는 삶일 수 없었습니다. 성령 잉태, 파혼의 위기, 초라한 출산, 애굽으로의 피신, 나사렛으로의 귀환과 가난한 삶, 맏아들 예수의 가출, 예수가 귀신 들렸다는 소문, 십자가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말 그대로 간난신고(艱難辛苦)였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에 드문드문 등장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후 처음 찾아온 목자들은 자기들이 겪은 이상하고 놀라운 일들을 다 사람들에게 고하였습니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천사들의 전갈, 그리고 천군 천사가 함께 부르던 영광의 노래. 누가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다 이상하게 여겼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 속에 곰곰이 되새겼다”(눅 2:19)고 전합니다. ‘고이 간직함’, ‘곰곰이 되새김’이야말로 어머니의 마음일 겁니다. 자식에 관한 것이라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흘려버릴 수 없는 마음 말입니다.

아기의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을 때 마리아는 이스라엘이 받을 위로를 기다리던 경건한 노인 시므온을 만납니다. 성령에 감화된 시므온은 아기를 팔로 받아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는 ‘내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찬양 후에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아기의 운명에 대해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 가운데 많은 사람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으며, 비방 받는 표징이 되게 하려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눅2:34b-35)

아기가 사람들을 넘어지게도 하고 일어서게도 하리라는 것, 비방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말은 어찌 보면 매우 충격적인 말이었을 겁니다. 그 아기의 일로 인해 마리아는 평생 마음 고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마리아만이 아니라 모든 어머니들이 겪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자식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신의 아픔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어머니이니 말입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는 해에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벌어진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축제의 번잡함에 휩쓸리며 지내다가 쫓기듯 도성을 벗어나 하룻길을 가다가 비로소 아들이 일행 가운데 없다는 사실을 알고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이리저리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다가 사흘 만에 성전에서 선생들 가운데 앉아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예수를 발견합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게 무슨 일이냐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고 말하자 예수가 대답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눅2:49) 기가 막힐 노릇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는 그가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확연하게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성년에 이르러 아버지를 도와 목수로 일하며 가정을 건사하던 예수가 집을 떠나 곳곳을 유랑하기 시작했을 때 마리아의 마음은 또 한 번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갈릴리 바닷가 마을을 떠돌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를 보고 사람들은 그가 귀신에 들려서 기적을 일으킨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후 아들을 집으로 데려오려고 찾아갑니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바깥에 와 있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예수가 한 말을 기억하시지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막 3:33, 35)

어쩌면 어머니의 가슴에 못이 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태에 깃든 생명이었지만, 더 이상 자기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인식했을까요? 새끼 새를 숲에서 밀어내는 어미 새의 마음과 같았을 겁니다. 시므온의 예언 그대로였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칼에 찔리듯 아팠습니다. 그래도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 길의 끝인 십자가에서 예수는 직접 어머니에게 말을 건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 19:26). 사랑하던 제자에게 어머니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며 한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는 불효자입니다. 부모의 가슴에 아픔만 안겼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효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 가장 큰 정신의 모습을 이뤘으니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땅의 모든 어머니들이 어느 정도는 또 다른 마리아들입니다. 자식에 관한 말 혹은 자식이 한 말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는 그 마음이야말로 제2의 잉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가없는 사랑과 인내가 큰 정신의 모태가 됩니다. 참 고맙습니다.

가족 간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사정이 저마다 다르기에 뭐라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가정에는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사랑의 마음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인내하는 사랑, 관용과 용서의 용기를 발휘하면 좋겠습니다. 교우님들의 가정마다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샬롬.

2021년 5월 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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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 바쳐지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엡 1:10)

주님의 평화와 은총을 빕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시절은 여전히 어수선하기만 합니다. 주말부터 주초께 코로나 확진자 수가 줄어드는가 싶어 기대를 품어 보지만, 주중에는 어김없이 늘어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희망 고문처럼 느껴집니다. 조금 무심해져 보려고 하지만 교회 문을 닫고 있는 입장에서 그럴 수가 없군요. 이 곤고한 시간이 속히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병원에 입원하신 분들도 계시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주님께서 힘겨운 시간을 견딜 힘을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지난 월요일 모처럼 아내와 용산가족공원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오전 내내 서재에 갇혀 지내다가 나오니 아내 표정이 어두웠습니다. 햇빛 좋고 바람 서늘한 모처럼의 휴일, 일에 붙들려 지내는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용산가족공원입니다. 산사나무 하얀꽃 그늘에 앉아 책을 읽는 이들의 모습이 평화스러워 보였습니다. 바닥에 깔린 참꽃마리의 앙증맞은 꽃잎이 사랑스러웠습니다. 미나리아재비, 골담초, 큰꽃으아리, 등나무꽃을 찬찬히 살피며 오후를 다 보냈습니다. 거리 곳곳에 서있는 이팝나무도 흰꽃을 머리에 인 채 외로움에 지친 사람들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분주한 마음에는 깃들 수 없는 따뜻하고 아늑한 평화를 누렸습니다. 아름다운 계절에는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서 자연과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금주에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윤여정 선생의 오스카상 수상에 쏠려 있었습니다. <미나리>라는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지만, 다양한 매체와 한 윤여정 선생의 인터뷰는 많은 이들에게 유쾌함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유창한 영어는 아니지만 자기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 가학적이지 않으면서도 뭔가 깊은 곳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유머, 젠체하지 않는 태도가 외국인들에게도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당함은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아온 깊은 연륜에서 나오는 것일 겁니다. 고통의 세월을 겪는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깊고 그윽한 멋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때 윤여정 선생의 경우는 제게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시상식에서 그가 한 말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경쟁을 싫어합니다. 5명 후보 모두 각자 다른 영화에서의 수상자입니다. 오늘 제가 여기 있는 건 단지 조금 더 운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축약한 형태이긴 하지만 대략 이런 뜻의 발언이었습니다. ‘운이 좋았다’는 말이 그저 겸양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시상식 직후 온라인 간담회에서 했다는 말도 참 크게 울려왔습니다.

 

“사람을 인종으로 분류하거나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무지개처럼 모든 색을 합쳐서 더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흑인·황인종으로 나누고,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지닌 평등한 사람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끌어안아야 한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이런 메시지가 일회적으로 소비되지 않고 많은 이들의 삶의 태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오는 5월 첫 주는 어린이 주일인 동시에 우리 교회 설립 11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그 동안 설립의 의미를 되새기느라 어린이 주일을 소홀히 해 온 감이 있습니다. 며칠 전 딸이 손녀들의 근황을 전해주었습니다. 학교에 다녀온 언니가 여섯 살 동생과 상황극을 하며 놀았습니다. 언니는 동생에게 로봇 역할을 맡기고는, 동생의 등에 배터리를 넣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언니의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습니다. 왜 그러냐고 묻자 배터리를 거꾸로 넣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맹랑하지요? 그러다가 자기 역할에 몰입한 동생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왜 로봇으로 태어났을까? 나는 왜 엄마가 없을까?” 아이들도 이처럼 존재론적 질문을 할 줄 압니다. 동생은 급기야 언니에게 자기 역할을 고양이로 바꿔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칼릴 지브란의 말을 떠올립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의 소유는 아닌 것을.”
(칼릴 지브란, <예언자>, 강은교 옮김, 문예출판사, 1979, p.22)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올곧게 받아들일 부모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들풀 하나 앞에 멈추어 서고,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개미를 살피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꾸는 아이들이 보고 싶습니다. 신비와 경이에 대한 감각을 잃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빈곤을 택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분들에게 생태적 감수성을 키워주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어린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공허함, 무력함, 분노 등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현실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석하려면 상당한 공력을 들여야 하겠지만, 우리 시대가 속사람의 건강보다는 겉사람을 꾸미는 일에 더욱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겉사람을 잘 훈련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속사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정보를 알린다. 또한 우리는 고마운 감정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기술을 가르친다. 또한 우리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우리는 잡다한 행위에 가담하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고요함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불어 삶을 장려한다. 동시에 우리는 홀로 있음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능변은 중요하다. 그러나 침묵도 그만큼 중요하다. 기술은 살아가는 데 절대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억제도 그러하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205)

공교육이 소홀히 하는 가치들이 실은 인생에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독교 교육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고마운 감정 기르기, 통찰력, 고요함, 홀로 있음, 침묵, 자기 억제 등을 배울 때 우리 삶이 균형을 잃지 않을 겁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걸 꼭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교회 설립 기념주일에도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교회의 지난 역사를 돌아봅니다. 수많은 낮과 밤이 갈마들며 세월을 이루는 것처럼, 정말 많은 이들의 기도와 땀과 헌신으로 쌓아올린 역사이기에 감사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긴 역사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습니다.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일진대 교회의 교회됨은 그러한 일치를 지향하는 데 있다 하겠습니다. 이번 주 내내 제가 읽으며 기도로 삼은 것은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께 바쳐지이다’입니다.

“이 몸을 님께 바쳐지이다.
세포 하나 남기지 말고
털끝 하나 아끼지 말고
내 것이라곤 하나 없이
나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다 님께 바쳐지이다.

님께서 이 잘난 것을
소용되어서가 아니오라
내게는 둘 수가 없어서
두어둘 터무니가 없어서
님께 바쳐 처분해 주시기를 비오니
이 나를 온통 맡으소서.”

시인은 님께 바친 몸이니 쓰시거나 버리거나 님 곁에 두시거나 아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렇게 처절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까닭은 자기 몸의 세포 구석구석에 죄와 더러움이 가득 차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이끌려 살던 사십 년이 이제는 피곤하고 싫증까지 났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누르고 또 눌러도 미욱한 것이 자꾸 나오고, 내쫓으려 해보아도 지싯지싯 들어오는 염치없는 것을 혼자 힘으로는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그 힘겨운 싸움 다 이기고 깨끗한 기쁨으로 얼굴 들고 주님께 가고 싶지만 그럴 능력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부끄럼을 무릅쓰고 더러운 보자기 채로 자기를 님께 바치려는 것입니다. 받아주시기만 바라면서. 시의 마지막 연을 읽으며 숨이 가빠졌습니다.

“그리워!
님의 영광 그리워!
그 영광의 얼굴 그리워!
그 영광의 목소리 그리워!
그 영광 내 얼굴 비치소서,
내 가슴 흔드소서.
그 영광 내 입고, 내 찬송하고 싶어.
아아, 그 영광 그 영광!
나를 둘러싸소서 감추소서 삼키소서,
나를 녹여버리소서,
영광 영광 아아, 그 영광!”
(함석헌 전집6 <시집 수평선 너머>, 한길사, p.266-269)

이것은 우리들 개인이 바쳐야 할 기도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교회가 바쳐야 할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흔드시고, 녹이시어 그분의 영광 속에 머물 수 있기를 빕니다. 올해 우리는 교회 설립을 기념해서 ‘세이브 더 칠드런’을 통해 인근 지역의 학대받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생필품 지원과 위기 청소년들의 상담 지원 사업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린이 주일을 교회 생일로 삼고 있는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을 돕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 하나 실천해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삶의 자리 어디에서나 어둔 그늘에 갇힌 채 살고 있는 이들에게 햇살 한 줌이라도 전해주려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어제도 오늘도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시고 싶어하십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머무시기를 빕니다. 평화.

2021년 4월 2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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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속도를 줄이십시오


“성급한 사람과 사귀지 말고, 성을 잘 내는 사람과 함께 다니지 말아라. 네가 그 행위를 본받아서 그 올무에 걸려 들까 염려된다.”(잠 22:24-2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셨는지요?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교우들 모두 자기 인생의 때를 사느라 분주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설렘 속에 있는 이들도 있고, 뜻하지 않은 시간에 찾아온 질병과 사고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함에 시달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 모든 분들의 품이 되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찬송하십시오.”(약 5:13)

어느덧 곡우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시간의 속도는 일정하지만 사람들이 경험하는 시간의 속도는 제가끔 다릅니다. 권태에 빠진 영혼에게 시간은 너무 느리고, 어떤 열정에 휘말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빠릅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이든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시간은 꿈결같이 흘러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덧없는 인생’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말하면 이미 늙어버린 것일까요?

덧없는 삶이 그나마 아름다운 것은 고마운 인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만 합니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우리를 한 공동체로 세우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참 고맙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걸어온 분들이나 새로운 지체가 된 분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새로운 인류입니다. 이런 저런 기준을 내세워 사람들을 가르고 나누는 것이 현실이라면, 교회는 그런 차이를 넘어 일치를 지향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만나 피차 위로하고, 위로받고, 격려하고,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아파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사진/김승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고 느긋하게 좋은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이느라 서가에서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꺼내 밑줄을 그어놓았던 구절들을 읽어보았습니다. ‘느린 사람들은 평판이 좋지 못하다’는 말로 시작되는 이 책에서 저자는 느림을 의도적으로 선택하겠다고 말합니다. “느림. 내게는 그것이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으로 보여진다.” 조금 길지만 그가 쓴 문장을 인용하겠습니다. 천천히 읽으며 머릿속에 이미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나는 굽이굽이 돌아가며 천천히 흐르는 로 강(江)의 한가로움에 말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거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끝물의 과일 위에서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9월의 햇살을 몹시 사랑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고귀하고 선한 삶의 흔적을 조금씩 그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 시골의 작은 마을 카페. 하루의 노동을 끝낸 사내들이 가득 채운 포도주 잔을 높이 치켜든 채 그 붉고 투명한 액체를 가만히 응시한다. 지그시 바라보다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 마시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수백 년이 넘는 아름드리 나무들. 그들은 수 세기를 이어 내려오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운명을 완성해 간다. 아주 천천히. 그것은 영원에 가까운 느림이다.”(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김주경 옮김, 동문선현대신서50, p.10)

우리를 마구 밀어붙이는 세상에 살면서 느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시간에 떠밀려 표류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느림을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은 자기 숨이 가지런해짐을 실감합니다. 급한 성정이 결삭을 때 우리 주변에 평화의 기운이 감돌게 됩니다. 사람들을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 마음에는 시퍼런 멍자국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 때문인지 조그마한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삽니다. 급한 우리 마음을 자꾸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난 4월 17일부터 이른바 ‘안전 속도 5030’이라는 도심속도제한이 적용된다지요? 일반도로는 50km/h 이하로 달려야 하고, 주택가 등 이면 도로는 30km/h 이하로 달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을 시범적으로 먼저 시행했던 도시에서는 인명 피해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교통 혼잡에 따른 불편도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니 다행입니다. 운전대만 잡으면 입이 거칠어지고 질주 본능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속도의 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이 불퉁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조치는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도심속도제한 소식을 들으며 몇 해 전 독일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베를린에서 집회를 마치고 잠시 괴테의 도시인 바이마르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괴테 하우스 박물관을 찾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처럼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방이 많은 괴테 하우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을 지낸 괴테의 유복한 삶에 약간의 질투를 느꼈습니다. 괴테와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프리드리히 쉴러의 집도 있었습니다. 고단하기 이를 데 없던 그의 삶의 흔적들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무슨 억하심정인지 모르겠지만 괴테보다는 쉴러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노마드적(유목적) 삶의 신산스러움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을 겁니다.

바우하우스 조형대학까지 방문하고 베를린으로 돌아갈 때는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습니다. 속도 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차들의 행렬이 어지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베를린에 가까운 어느 산길에 다가서자 모든 차들이 시속 30km로 속도를 줄였습니다. 도로가 한산했지만 그 속도를 위반하는 차량은 없었습니다. 저를 안내해준 분은 어리둥절해 하는 제게 밤은 동물들도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기에 자동차의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밤 9시가 넘으면 차량통행이 금지되는 도로라 했습니다. 동물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살갑게 다가왔습니다. 마침 차창 밖으로 붉은 여우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선물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프라이부르크(Freiburg im Breisgau)에 갔을 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낮에 몇 차례 지나간 도로인데, 저녁 9시가 되자 차들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양 옆으로 주택을 낀 도로였습니다. 그 시간이면 사람들이 편안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자동차 소리를 제한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규정을 잘 지켰습니다. 시민의식이 높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규정을 어겼을 때 상당한 벌금을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시민 사회는 사람들이 함께 지켜야 할 것을 지켜가는 데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자꾸 엇나가고 있습니다만 한 가지가 더 떠오르네요. 프라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도심 외곽에 살고 있는 한 피아니스트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저녁 만찬을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그 자리에 동석한 한 건축가가 시계를 보더니 오늘은 너무 늦어 자기가 계획했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밀린 빨래를 하려 했는데, 집에 가면 9시가 될 것이고 그러면 세탁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주택에 사는 이의 비애라 했습니다. 이웃들의 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섬세한 배려였습니다. 자유는 그러한 한계를 받아들일 때 아름답습니다. 층간 소음 문제가 이웃 간의 폭력으로 비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우리 사회의 현실과 무척 대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속도를 조금만 줄여 보십시오. 고요한 마음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질주하느라 미처 보지 못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시 ‘난초’는 그런 세계를 절묘하게 보여줍니다. “하늘이/하도나/고요하시니/난초는/궁금해/꽃 피는 거다.”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 속에는 불평불만이 가득 차오릅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큰 시련을 겪은 때는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혔을 때입니다.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에서부터 홍해 길을 따라 나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민21:4) 비록 현실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매사가 더디기만 한 것 같아도, 안달하지 마십시오.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시는 주님을 깊이 신뢰하며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실하게 채우십시오.

이제 한 주 후인 5월 첫 주일은 우리교회 설립 11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가급적이면 그 날은 교회 문을 열고 대면 예배를 드리고 싶습니다. 상황이 나빠지지 않기만 바랄 뿐입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평화.

2021년 4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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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공생의 세상을 향하여



“고난 앞에서 모른 체 돌아설 권리는 없다. 불의 앞에서 사람들은 짐짓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러나 누가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우선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다. 고난이 그에게 우선권을 준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지금 슬퍼하는 사람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의무이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286에 인용된 엘리 비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며칠 사이 제가 아침저녁으로 걷는 효창공원에 흰철쭉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꽃들이 질서 있게 자리바꿈을 하는 것을 보면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산수유꽃이 다 떨어지고 복사꽃이 시들해져서 서운했는데, 새로운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새 소리도 제법 활기찹니다. 농가월령가는 이 꽃 저 꽃 기웃거리며 분분히 나는 범나비의 자유로움을 바라보면서 “미물微物도 득시得時하여 자락自樂함이 사랑홉다”고 노래합니다. 생명은 크거나 작거나 무엇이든 아름답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볼 눈이 열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뿐입니다. 분주한 사람의 눈에는 띄지도 않을 작은 생명들도 각자의 본분을 다하며 우주의 장엄한 춤을 추고 있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는 지구라는 행성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말합니다.

“각 존재는 지구 공동체의 모든 다른 존재들에 의해 지지된다. 역으로 각 존재는 공동체 내의 모든 다른 존재들의 복리에 기여한다. 이와 같은 창조적 관계로 이루어진 복합체를 형성하는 데에 바로 정의正義가 있다.”(토마스 베리, <위대한 과업>, 이영숙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p.91)

지지받는 동시에 기여하는 것, 그 창조적 공생 관계야말로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해야 하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마치 고치 속을 파고들 듯 칩거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합니다. 이제는 가정을 제외한 어떤 공간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지요? 그만큼 지금 상황이 엄중하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봄은 우리를 밖으로 자꾸 불러내려 하지만, 가급적 다중이 모인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선제적으로 비대면 예배로 전환한 뜻을 잘 헤아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김승범


세상이 참 소란스럽습니다. 도처에서 성난 음성이 들려옵니다. 칼과 창날이 부딪는 소리 못지않게 우리 심정을 날카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주고받는 거친 언사들입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 풍경도 사뭇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서 보는 풍경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그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는 지나치게 선명한 입장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흑과 백으로 가르기에는 세상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은 칼로 두부모 가르듯 산뜻하게 가를 수 없습니다. 참, 선, 빛을 지향하지만 내 속에 있는 거짓, 악, 어둠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르다 보면 유머가 사라집니다.
삼척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 한 분이 학생들과 함께 쓴 책과 더불어, 올해 맡은 6학년 학생들이 쓴 문집을 한 권 보내주셨습니다. 늘 심각한 책을 보다가 아이들의 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낄낄거리게 되었습니다. 그 순진하고 거침없는 아이들의 표현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전혜원 어린이의 동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목은 ‘동생 놈’입니다. 제목을 잡는 솜씨부터 남다르지요? 1연입니다.

동생이 갑자기 와서 날 때린다.
같이 게임하다가 지면
지 잘못도 내 잘못이라고 한다.
그냥 갑자기 화를 낸다.
“이게 다 누나 때문이야!”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게임은 승패가 있게 마련이고 서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면 승복하면 좋으련만 동생은 패배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동생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합니다. 누나가 굳이 자기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동생에게 좀 져주면 어때.’ 동생의 마음속 생각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습니다. 분하고 서운한 마음을 풀 길이 없으니 누나 탓이라며 누나를 때리는 겁니다. 그 귀여운 구타는 누나가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을 겁니다.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누나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시의 2연입니다.

동생이란 존재는 참 수학책 같다.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다.
자주 봐도 정말 이해할 수 없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
동생도 포기해야겠다.

이 어린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동생’과 ‘수학책’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시적 언어가 우리를 잡아당기는 까닭은 무관해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킴으로 우리 정서에 틈을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누나가 동생을 보고 ‘수학책’ 같다고 말한 것은 문제는 많은데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답이야 왜 없겠습니까? 다만 수학에 취미가 없다 보니 수학은 그야말로 해답 없는 영역이 된 것이지요. 이 어린 시인은 자기가 수학을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난데, 뭘 어쩌겠느냐’는 듯 천연덕스럽습니다. “난 수학 따윈 포기했으니/동생도 포기해야겠다.”라는 구절에서 저는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시를 읽는 이들은 ‘동생도 포기해야겠다’는 말이 심각한 관계단절의 선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가끔은 귀찮기도 하지만 어떡하겠습니까? 동생인 걸요.

우리 어른들의 어법 속에도 이런 여유와 여백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미나리’로 영국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의 수상소감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고상한 체하는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줬기에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고상한 체 하는 사람들snobbish people’이라는 말은 자칫하면 큰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입니다. 거만하다, 속물적이라는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단어 선택을 유쾌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게 영국적 고상함인가요? 사람들이 그 말에 박수를 보낸 것은 그 속에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태도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똑같은 언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어를 가려 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는 각자의 세계관과 태도가 고스란히 배어 있습니다. 언어가 달라져야 세상이 달라집니다. 언어는 상대가 있는 법입니다. 상대의 언어가 거칠어지면 나의 언어도 따라 거칠어집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거친 언어를 주고받다보면 마음 또한 멀어집니다. 교만과 자애심에서 나온 말은 다른 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단정적인 언사는 대화의 의지를 차단합니다.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피루스는 기원전 3세기 아드리아 해 건너편에 있던 에피루스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와 알렉산더의 후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할 욕망을 품고 있던 그는 로마와의 전투에 코끼리 부대를 끌고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 합니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가까운 친구와 용맹스러운 장군들 그리고 엘리트 병사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피루스의 승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얻은 승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 사는 게 꼭 이 모양이 아닌가 싶습니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멸시하고 조롱하면서 거두는 승리는 사실은 이중의 패배입니다. 우리가 함께 서 있는 신뢰의 토대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이 있으면, 적절한 때에 해서, 듣는 사람에게 은혜가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엡 4:29-32)

지금이야말로 이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덕을 세우는 데 필요한 말’이라 해도 적절한 때를 분간하며 해야 합니다. 듣는 사람의 입장을 늘 살펴야 합니다. 악의를 버리고 서로 친절히 대할 때,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벌써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부터 바꾸겠습니다”라고 다짐했던 우리 마음도 어지간히 무뎌졌습니다. 하지만 그 날의 아픔을 여전히 생생하게 경험하며 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세월호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을 하는 분들도 있는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처 입은 어린양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지극한 아픔을 외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그 아픔에 동참하지는 못한다 해도, 여전히 신원되지 않은 한을 품고 살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외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봄날,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그리스도의 꽃이 피어나기를 빕니다. 주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이 모든 이들을 감싸주시기를, 그리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4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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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일으키는 만남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고후 13:11)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을 지나면서 마치 오래 입은 상복을 벗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별되게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삼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순절 기간 동안 저를 사로잡았기 때문일 겁니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입고 있는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신다고(시 30:11) 고백하지만, 아직 기쁨의 나들이옷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며칠 청명하더니 또 다시 미세먼지가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명자나무 붉은꽃은 찬란하고 복사꽃은 화사합니다. 자주괴불주머니와 광대나물, 냉이꽃과 제비꽃도 저마다의 자태를 자랑합니다.

제게는 이 봄이 조금은 특별합니다. 지난 4월 5일은 제가 청파교회의 인연을 맺은 지 만 4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방황하고 있던 3월의 어느 날, 몇 년째 함께 조그마한 교회에서 동역하고 있던 목사님께서 함께 갈 데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온 곳이 바로 청파교회였습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풍채가 당당한 목사님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박정오 목사님이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선배 목사님께 인사를 여쭙는 자리에 저를 데려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분 목사님께서 한 동안 농담조의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한참 후에 생각났다는 듯이 박 목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전도사, 잘 왔어.”

최초로 들은 전도사라는 호칭입니다. 그 호칭이 매우 낯설게 들렸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김선생’으로 불리웠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목사님으로부터 ‘전도사’로 불리고 나니 뭔가 덫에 걸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목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내 목회는 말이야, 방목이야. 나는 울타리를 좁게 쳐서 양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야. 사람들이 울타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하고 싶어. 그러니 김 전도사도 사람들을 동원할 생각하지 말아.”

그제서야 저는 제가 이 교회에 전도사로 초빙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건 제 의지와는 거의 무관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나중에 저는 그 목사님이 나를 청파교회에 팔아 넘겼다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인생이란 스스로 길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길에 의해 선택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일 때문일 겁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저에게 목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김 전도사, 내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일해. 그러다가 나와 생각과 지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거든 깨끗하게 떠나.”

이 말이 제게는 아주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속으로 ‘그렇지, 내가 뭐 누구 눈치나 보고 살 사람은 아니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유보 없이 유쾌하고 호탕한 박 목사님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날이 어쩌면 제게는 운명과도 같은 날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그날이 제 운명의 지침이 바뀐 날입니다. 잠시 떠나 있을 때도 있었지만 저는 그날 이후 전도사로, 소속 목사로, 부목사로, 담임목사로 40년을 청파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많이 사랑받았습니다. 박 목사님은 맑고 깨끗하고 당당한 삶과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로 제게 목회자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교우들은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저를 늘 넉넉한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저를 목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 구심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시간이 우리 속에 새겨놓은 흔적 혹은 무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났던 많은 이들이 조형의 칼날이 되어 나의 인격과 태도와 믿음을 형성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마커스 보그의 말을 좋아합니다. 믿음은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에 몸을 맡기면 물이 두둥실 우리 몸을 떠받쳐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돌보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쓰시는 부력의 도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김승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만남은 어떤 형태로든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 사건은 다른 말로 하면 변화입니다. 마음에 그리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 삶의 모든 가치들을 재배치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살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들 속에는 그 동안 의미 있게 만나왔던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 물론 부정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만남 말입니다. 그와 만났기 때문에 내 삶이 복잡해지고, 더러워지고, 탐욕스럽게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웃 사랑이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맑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흔적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공자께서 노나라 환공의 사당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의기欹器, 즉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공자는 묘지기에게 이게 무슨 그릇이냐고 물었습니다. “자기 곁에 놓아두었던 그릇[유좌지기宥坐之器]입니다. 비면 기울고, 중간쯤 차면 바르게 서고, 가득 차면 엎어집니다. 이것으로 경계를 삼으셨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 그 그릇에 물을 붓게 했습니다. 그러자 묘지기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는 가득 차고도 엎어지지 않을 물건이 어디 있겠느냐고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자 자로子路가 물었습니다. “지만持滿, 즉 가득 참을 유지하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따라내어 덜면 된다.” “더는 방법은요?” “높아지면 내려오고 가득 차면 비우며 부유하면 검약하고 귀해지면 낮추는 것이지. 지혜로워도 어리석은 듯이 굴고, 용감하나 겁먹은 듯이 한다. 말을 잘해도 어눌한 듯하고, 많이 알더라도 조금밖에 모르는 듯이 해야지. 이를 두고 덜어내어 끝까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방법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지덕至德을 갖춘 사람뿐이다.”(정민, <조심操心>, 김영사, p.30-31에서 재인용)

여기서 나온 말이 지만계영持滿戒盈입니다. 차면 덜어내고 가득 참을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득 채워지는 순간 자기의 실상을 잊기 쉽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은 사람됨을 달아 볼 수 있다”(잠 27:21)고 했습니다. 칭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의 전락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덜어내고 비우라는 말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충만한 은혜’, ‘충만한 복’,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듣기 때문입니다. 충만의 뜻은 ‘가득하게 참’입니다. 사람들은 ‘가득 참’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충만이라는 뜻의 헬라어 ‘플레로마pleroma’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다 채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 문자적 의미는 ‘가득하다’는 뜻이지만 신약에서 그 단어는 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존, 능력, 풍요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이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누군가의 선물로 내놓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몸에 있는 가시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그것이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하나님은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응답의 거절도 때로는 응답입니다. 거절된 응답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바울이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a)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의 4차 대유행이 진행되는 것 같은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계심이 풀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또 다시 비대면 예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깊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매개로 한 집단 감염이 또 다시 여기저기서 발생하면서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사뭇 날카롭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친밀한 교제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잠시 멈춰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복의 매개가 아니라 감염병의 매개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함께 써가야 할 신앙의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다닌 연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우리 신앙 이야기의 공동 저자입니다. 사실 저자는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손에 들린 필기구라고 말하는 게 합당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과 동행할 수 있음이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서로 영혼의 숫돌이 되어 모난 부분이 갈려나가고, 무디어진 부분은 예리하게 바뀌어 그분의 쓰임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빕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4월 8월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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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행복의 꿈을 내려놓고


“내적 자유와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 땅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잡으십시오.”-브루더호프 공동체 설립자 하인리히 아놀드

그리스도의 자비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우리는 사순절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늦추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하여 잿빛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계절의 흐름은 이렇게 유장하건만 사람 홀로 유정하여 희망과 절망 사이를 분주하게 오갑니다. 가만히 꽃 앞에 멈추어 서면 우리 속에서 들끓던 소리가 비로소 잠잠해지고 결삭은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듭니다.

지난 40일 동안 늘 책상머리에 두었던 사순절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실천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위 아래 두 줄로 되어 있는 실천 과제 가운데 밑에 기술된 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장바구니 사용하기’, ‘냉장고에 빈 자리 만들기’, ‘컴퓨터 시간 줄이기, ‘텀블러 가지고 다니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기술된 내용을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나의 목마름 살피기’, ‘희생의 사람’, ‘무관심 버리기’ ‘비교하는 마음 버리기’, ‘조급함 버리기’, ‘무책임한 태도 버리기’, ‘어리석음 깨닫기’, ‘편견 벗어나기’ 등의 내용은 깊은 자기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차분하게 자기를 돌아볼 수 있어 좋았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절감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벼락치기 숙제를 하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있어 다행이다 싶습니다.

느긋하고 한갓진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현실은 늘 우리를 극한의 긴장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세상 풍경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군경에 의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와 폭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히스테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커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삶의 조건이 점점 악화될 때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타자들에 대한 배제와 폭력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러니 인종 범죄를 인정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선택할 용기를 발휘하자는 말입니다. 푸접없는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 주는 것보다 더 보람찬 일이 또 있을까요.

 

사진/김승범



지난 주중에 강릉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려는 길벗들의 모임에서 저를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조금 내서 안목항 근처 솔숲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카이트 서핑(kite surfing)을 하는 이들을 한참 지켜봤습니다. 보드 위에 올라 연이 이끄는 대로 파도 위를 스치듯 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이 역동적이었습니다. 활기찬 육체를 보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입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허난설헌 기념관이 있습니다. 매우 뛰어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대개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이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난설헌은 호이고 본명은 허초희(1563-1589)입니다. 이 땅에 겨우 27년 간 머물다 갔지만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남아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1577년에 김성립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과거시험 공부보다는 기생집에 출입하는 것을 더 즐기던 한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마 뭐라 말할 수도 없던 시대였던지라 그 애태움이 컸을 겁니다.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낳아 길렀는데, 그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 때문인지 그도 또한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운의 천재인 셈입니다.

기념관 바깥뜰에는 그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다리(가체)를 다하여 얹은머리를 높게 한 모양이었는데, 왠지 허난설헌의 쓸쓸했던 삶과 연결이 되지 않아 씁쓸했습니다. 그 동상 앞에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습니다. ‘아들 무덤 앞에서 우노라’(‘哭子’)라는 시입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비록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리라.
(<허난설헌 시선許蘭雪軒 詩選>, 허경진 엮음, 평민사,p.20)

마주보고 있는 아들과 딸의 무덤을 보는 엄마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나 후손을 앞세우는 것을 일러 참척(慘慽)이라 합니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경험이라는 뜻일 겁니다. 옛말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청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습니다. 사시나무에 부는 바람이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허난설헌은 스산할 뿐 아니라 속절없이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그 나무에 빗대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를 날리며 남매의 혼을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남매의 무덤 위에 술잔을 붓습니다. 여기서 술잔이라 번역된 한자는 ‘현주(玄酒)’인데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무술)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린 자식들의 무덤에 술을 올릴 수는 없지만 무술을 부어준 것입니다. 허난설헌은 앞서 떠난 남매가 저승에서도 의좋게 노는 광경을 그림으로 절망을 밀어내려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 깃든 속울음조차 몰아낼 수는 없어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이 시를 굳이 소개하는 까닭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 섰던 여인들의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분이 그렇게도 큰 고통을 겪으며 생과 사의 경계선을 건너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들의 아픔을 우리는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평범한 행복을 바라던 분이었을 겁니다.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고, 석양 무렵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새들이 즐겁게 재재대는 소리를 듣고 싶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평범한 행복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생태를 보여주는 영상을 볼 때마다 생명의 신비와 장엄함을 절감합니다. 동물들도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긴장한 채 살아갑니다. 악어에게 다리를 물린 누 한 마리가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온 몸의 힘을 다리에 모아 그는 밖으로 솟구쳐 오르려 하지만 악어는 완강한 이빨로 그는 물고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힘과 힘의 팽팽한 균형, 기진할 때마다 누는 잠시 쉬지만 다음 순간 또 다시 벗어날 길을 찾아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그 옆으로 새 한 마리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와 그 광경을 보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겅중겅중 그 곁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동물세계의 문법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런 광경에 감정을 이입하곤 합니다. 어쩌면 그게 인간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 고백합니다. 주님은 당신 눈앞에 펼쳐지는 인간세계의 참극을 무심하게 지나치실 수 없었습니다. 사투를 벌이는 악어와 누 곁을 유유히 지나쳤던 그 새처럼 사셨다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서러움, 고통과 모순, 더러움과 추함을 당신의 온 몸으로 받아들여 정화시키려 하셨기에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로 귀결된 삶과 무관하게 살면서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저버린 채 종교의식에만 골몰하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호통을 치십니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암 5:23). 십자가의 길을 온전하게 가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 지향만큼은 분명해야 합니다. 힘들다 하여 지향조차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었던 여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이나 가르침뿐이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라는 존재 그 자체를 그들은 차마 떠나보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던 분, 쓸쓸한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 주셨던 분과 헤어진다는 것은 마치 벼랑 끝으로의 추락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 간절한 사랑은 결코 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비밀을 조금은 압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부활절에도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어 유감입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우리는 한 몸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는 분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속에 들어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평강의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2021년 4월 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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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넓히십시오

“그러자 우리 주님이 내게 한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난당한 그것이 너를 만족케 하였느냐? 내가 말했다. 예, 선하신 주님, 제 모든 고마움을, 선하신 주님, 당신께 드립니다. 복되소서. 우리 선하신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만족이면 나도 만족이다. 너를 위해 당한 고난이 내게는 기쁨이요, 지복이요, 한없는 즐거움이다.“(<노리치의 줄리안>, 이현주 옮김, 말씀과밥의집, p.149)


주님의 평안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사순절 순례의 여정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조금은 더 맑아지고 깊어지셨는지요? 엄벙덤벙 시간에 떠밀리며 살다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삶에 대한 질문은 잠시 멈춰 서라는 요청입니다. 우화 속의 토끼가 생각납니다. 토끼는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 아래 누워 낮잠을 자던 토끼는 사과 한 알이 떨어지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일어나 다짜고짜 달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무너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숲속에 있던 동물들도 토끼의 서슬에 놀라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왜 달리고 있는지 아는 동물은 없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달리기에 무작정 따라 달렸으니 그럴 수밖에요.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지 속에 있을 때 두려움은 이렇게 물결처럼 번져 가게 마련입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400여명 근처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수십 명만 돼도 화들짝 놀라곤 했는데, 이제는 조금 무덤덤해진 것 같습니다. 긴장들이 풀린 탓인지 공원이나 거리 혹은 식당이나 카페에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몰리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이 더디게나마 지속되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비록 20% 밖에는 허용되지 않지만 대면 예배가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나고 있습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속히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다가오는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성을 올렸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들뜬 표정의 사람들 속에서 주님 홀로 쓸쓸하셨을 것입니다. 당신 앞에 드리운 어둔 그늘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맘 때면 예수님이 감내하셔야 했던 고독과 쓸쓸함에 깊이 감응하는 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주님의 괴로움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허망한 기대에 들떠 건듯건듯 걷고 있었습니다.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의 활기로 인해 도성은 흥청거렸지만 주님의 마음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외롭게 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주중에 목사 안수식을 앞둔 젊은 후보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생명부지의 사람이었지만 꼭 제게 안수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간곡한 부탁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일단 만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자격 심사를 받는 과정 가운데서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절망감이라기보다는 굴욕감 혹은 염증이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그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를테면 차별 금지법이라든지 방역 지침을 위반하였다가 두 주간 교회 폐쇄 명령을 받았던 00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듣고 싶었던 말은 차별 금지법에 반대한다는 명백한 답변이었고,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논증이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대답을 망설이는 후보자를 꾸짖으며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진급에서 누락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설명은 필요 없으니 가타부타만 명확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보자는 마음으로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견해에 맞서기보다는 ‘알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그 순간을 모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 가득 비애가 차올랐을 겁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저는 젊은이들을 길들이려는 순간 역사는 퇴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깎인 채 기존 질서에 두루뭉수리로 적응하며 살도록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존 웨슬리는 ‘관용의 정신’이라는 설교에서 논쟁을 통해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이나 예배나 회중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라면, 죄를 피하여 애쓰고, 선한 일을 하는 데 열심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 3>, 대한기독교서회, p.77)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라는 실체를 찾기 위해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철학사 책에서 읽은 것이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레싱의 말이 떠오릅니다. 만일 신이 오른손에 모든 진리를 쥐고 왼손에는 살아 있는 진리를 향한 노력을 쥐고 계시면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레싱은 자기라면 공손하게 왼손을 택하면서 이렇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십시오. 순수한 진리는 오직 당신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젊은 시절 진리에 대한 목마름에 시달리던 제게 이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진리 그 자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속의 어둠을 밝히며 앞으로 나갈 뿐입니다.

자기 확신에 찬 언어가 횡행할 때 세상은 거칠어집니다. 내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와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사람은 비진리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가 위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근본주의는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재단합니다. ‘옳음’과 ‘그름’을 그렇게 두부모 자르듯 가를 수 있나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고 이질적입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섬세함이 곧 사랑이 아닐까요? 양극적 사고는 위험합니다. 우리가 위치를 나타낼 때 쓰는 지시대명사 ‘여기’와 ‘저기’ 혹은 ‘이것’과 ‘저것’은 그 내포하는 의미가 참 모호합니다. 도무지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반경 10미터 안에 있으면 ‘여기’고 더 멀면 ‘거기’인가요? 서울에 있으면 ‘여기’고 부산에 있으면 ‘거기’인가요?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은 이런 양극적 언어는 사람들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언어 하나를 예시합니다.

“시베리아 북동부의 추크치족의 경우는 화자와 관련해 대상의 위치를 표현하기 위해 무려 아홉 개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윤영호 김미선 옮김, 사이, p.155)

이 말 속에는 위치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 세분화될 때 우리 감정 또한 양극단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백이 있는 언어, 나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즉각적으로 배제하거나 동화시키려 하지 않는 언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절입니다. 요즘 토마스 베리 신부와 수리물리학자인 브라이언 스윔이 함께 쓴 <우주 이야기>(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 다른 존재들과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것, 상호 공존의 기쁨에 들어갈 수 없는 이런 상황들을 지옥의 본질the essence of damnation로 여겼다.”(p.133-4)

조그마한 차이를 용납할 수 없어 배제해 버리는 일이야말로 편협한 정신의 특색입니다.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더 깊은 이해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비로소 참을 찾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고난 주간 연속 강좌가 열립니다. 교회에 모일 수 없기에 유튜브 영상으로 송출할 예정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절기이지만 이번에는 목회자들이 한 권의 책을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로완 윌리엄스의 책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비아)을 읽어나갈 예정입니다. 각각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재판 이야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 이야기를 통해 복음서 기자들이 증언하려 했던 예수님은 누구인지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서계셨던 그 재판정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 자리는 예수님에 대한 심판 자리가 아니라 몰상식과 관행화된 신앙에 기댄 채 살아온 우리 삶에 대한 심판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번쯤은 점검해보아야 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의 남은 기간만이라도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라고 청했던 죄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변함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2021년 3월 2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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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산다는 것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슥10:9) 기독교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마치 씨앗처럼 ‘땅의 모든 나라 중에’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신 28:25). 이것은 그들에게 저주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머나먼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존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2)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미세먼지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만, 봄기운이 완연한 나날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건강에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 생긴 대형 백화점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공원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감염병에 대한 경계심이 어지간히 느슨해진 것 같습니다. 행여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무서워 가급적이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 시인 황동규  선생님의 <오늘 하루만이라도>라는 시집을 곁에 두고 한 편 두 편씩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연세가 80이 넘어서 쓰신 시인지라 관념적이지도 않고, 표현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고, 깨달음을 나누어주겠다는 은밀한 의도도 보이지 않아 아주 담백합니다. 쇠약해지는 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연세이기 때문일 겁니다. 수영을 배울 때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겨야 몸이 떠오르듯이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긴 이의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시인은 자기 몸의 변화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그것을 시적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처럼
가파른 언덕을 촛불 안 꺼뜨리듯 조심조심 내려와
맨땅에서 넘어졌다.”
(‘맨땅’ 부분)

언덕길을 팔랑팔랑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아, 저 생명 덩어리’라는 말이 목에 차오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매사가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산수(傘壽, 80세를 이르는 말)를 넘긴 분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기탁하는 데는 그만한 이미지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스쳐가는 바람에 그만 촛불이 꺼질까 싶어 조심조심 걷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평탄한 곳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이런 경험 없으신가요? 월요일마다 산에 오르던 때 이런 경험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특히 겨울철 산행이 그랬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내려오다가 이제 다 왔다 싶어 방심하다 흙 속에 숨어 있던 얼음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 구절이 참 절묘합니다. “어이없지 않다.”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어이없지 않다고 말합니다. 달관도 아니고 체념도 아닙니다. 삶의 곡절과 부침을 많이 겪어본 이의 담담한 자기 수용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하여 다 이런 마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런 고요한 자기 응시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푼 욕망의 격전장에서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칙을 합니다. 재산 증식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공적 자리에 있으면서 얻게 된 정보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추구한 이들의 행태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협잡과 폭력, 혐오와 불신은 우리 사회를 불신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드린 기도에서 세상 현실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그리는 현실은 아주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합니다.
부가 늘어갈수록 교만해지는 사람들,
기술이 발전할수록 늘어나는 파괴들,
혐오를 낳는 압제, 폭력을 낳는 혐오...
어딜 가나 가득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으로 인해 조각나고 불타고
짓이겨지고 사라지는 삶,
무질서와 혼돈, 끝을 모르는 불안....“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의 기도>, 박천규 옮김, 비아, p.149)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개 비슷한가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왠지 암울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편의 시인들은 그런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도, “폭력의 한가운데서도 뿌리 뽑히지 않는 꿈을,/분노가 사무쳐도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상실과 실패 속에서/마르지 않는 슬픔의 노래를,/혐오로 불타오르는 세상에/희망을 심는 법“을 노래합니다. 시인들은 그러니까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꿈꾸는 이들은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 취급을 받을 때가 많지만, 꿈이 없다면 인간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또다시 떠들썩합니다. 땅과 집이 예전부터 투기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처럼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정책과 재산을 일시에 증식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맞물려 빚어낸 현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각축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은 세상 현실에 분노합니다. 욕망의 물결에 떠밀리고,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다 보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잊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표점’(빌3:14)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표점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 삶은 지리산가리산 엉망이 되고 맙니다. 가끔 흔들릴 수도 있고, 길에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바른길을 걷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인간 속에는 두 가지 욕망이 상존합니다. 하나는 비좁은 일상에서 벗어나 광활한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여행은 우리를 소진시키는 반복적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거리가 멀수록 시간의 속박은 줄어듭니다. 백패킹이나 캠핑족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욕망의 반영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안전한 둥지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어도 괜찮은 곳 말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고, 세상에서 입은 상처들이 회복될 수 있을 때, 우리 숨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낯선 곳에 가면 낯익은 곳이 그립고, 낯익은 곳에 오래 머물면 낯선 곳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비좁은 곳에 있으면 광활한 공간을 꿈꾸고, 모든 방향으로 개방된 광활한 공간에 서면 안온한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에 간섭하거나, 누군가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그런 시선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네요. 반면 천지간에 나 홀로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친밀한 접촉을 갈망합니다.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3:8)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가나안 땅은 그렇게 아름답고 넓은 땅은 아닙니다. 오히려 척박한 곳이 많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협소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 땅을 ‘아름답고 넓은 땅’이라 칭하신 것은 공간적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곳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새 땅입니다. 주인이나 관료가 부과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노예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말입니다.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기에 그곳은 아름다운 땅입니다. 성경에서 ‘아름답고 넓은 땅’은 주님의 사랑이 끊이지 않는 땅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땅에서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마5: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땅은 바로 그런 땅이 아닐까요? 우정과 사랑으로 빚어지는 자유의 영토 말입니다. 가급적이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마음이 스산하여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와 만나 더욱 상처를 받고 돌아서지 않도록 애쓰십시오. 아주 바쁜 시간이라 해도 그를 전심으로 환대해 보십시오. 말은 적게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서둘러 해답을 주려 하지 말고 그의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태도야말로 누군가에게 설 땅을 제공하는 일일 겁니다. 본회퍼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사는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춘분이 다가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파종을 준비하는 농부처럼, 이 난감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3월 1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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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사람들



“주님,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내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나를 달래 줍니다.”(시 94:18-19)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매화꽃은 벌써 만개했고, 산수유도 한창입니다. 공원에는 노란색 히어리가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히어리의 꽃말은 ‘봄의 노래’라지요? 미처 떨구지 못한 겨울눈 껍질이 마치 모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춘화도 막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선화, 히아신스, 크로커스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바야흐로 꽃 시절의 시작입니다. 20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루이스 글뤽은 눈풀꽃(snowdrop)이라는 시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은 눈풀꽃의 은밀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략)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후략)”

축축한 흙 속에서 자기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낀다는 것, 그래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낸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눈풀꽃을 설강화(雪降花)라고도 하더군요. 눈 내린 땅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일 겁니다. 이 놀라운 시를 읽고 있으면 왠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도 봄볕이 스며들어 새로운 삶의 용기를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아주 반가운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잠시 머물렀던 학교의 졸업생들이었습니다. 졸업한 지 벌써 31년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커피를 마시려고 마스크를 벗자 여고시절의 얼굴들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시간이 스쳐간 흔적이야 숨길 수 없지만 익숙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찾아온 까닭은 한 친구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교목실에 찾아와 제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사뭇 진지하게 생의 의미를 탐색하던 친구여서 특별히 기억에 남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커리어 우먼으로 열심히 일하던 중 몇 년 전 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는 영상을 통해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들어왔습니다.

그렇게도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병이 점점 악화되어,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면회조차 할 수 없기에 친구들의 안타까움이 더 커졌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생명 불꽃이 다 스러지기 전에 나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만들어 그에게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문득 그가 내게 보냈던 편지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저마다 치열하게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3학년 2학기 끝자락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교목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학생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공부에 대한 후회는 없다면서도 이상한 헛헛함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면서 편지를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3년만 참으라고, 3년만 앞만 보고 달리라고 모두가 말하기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외로운 생각에 질주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제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장은 학교 교육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하며 살던 한 사람의 생명 불꽃이 가물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없다더니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희떠운 소리를 한마디 한 후에, 더듬더듬 몇 마디 말을 건넸습니다만 이런 때일수록 말의 부질없음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며칠 후 의식이 깨어난 그 친구는 제 메시지를 듣고 아주 행복해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자기를 여는 법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김승범


이 봄에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방패를 들고 벽처럼 서 있는 경찰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수녀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왠지 익숙한 광경입니다. 사람들은 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연결하는 몸짓을 통해 미얀마 사람들의 민주화 투쟁에 연대한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금 활동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그러나 흉포한 권력은 그런 평화의 꿈을 총과 칼로 막으려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에 나가 자기들의 민주화 의지를 드러내는 미얀마 사람들의 숭고한 용기에 감동합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는 것,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동의할 수 없는 현실과 만나도 속으로만 투덜거릴 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장벽을 돌파하는 일입니다. 그 장벽이 그의 몸과 마음을 조각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돌파를 감행하는 이들 덕분에 인류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서곡을 여는 이들은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브아입니다. 그들은 바로의 지엄한 명령 앞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주다가, 낳은 아기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명령보다 더 높은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십브라와 브아는 시민불복종 운동의 원조입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그리스 신화의 인물 프로메테우스도 저항의 상징입니다. 비극작가인 아이스퀼로스의 희곡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그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제우스의 적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되도록 가볍게 견디려 합니다.

“나는 인간들에게 명예의 선물을 주었던 까닭에
이런 고통의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회향풀 줄기에 싸서
불의 원천을 몰래 훔쳐냈는데, 그것이 인간들에게
온갖 기술의 교사(敎師)가 되고 큰 도움이 되었지.
그러한 죄를 지은 까닭에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노천(露天)에서 사슬에 꼭꼭 묶인 채.”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중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 출판부, p.208-9)

장엄하지요? 교황과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되었습니다.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국회의는 루터에게 그동안의 모든 신학적 주장을 취소하고 펴낸 책들을 폐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매여 있으며 제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름은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술 끝에 루터는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오니,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린들 로퍼, <마르틴 루터-인간, 예언자, 변절자>, 박규태 옮김, 복 있는 사람, p.288-9에서 재인용)

이들이 아니라 해도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 수많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가 지중해 세계를 억압하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는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가장 높은 분이 자발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선다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혁명은 피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가는 혁명이야말로 가장 급진적 혁명이 아닐까요?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점잖음이 아니라 비겁입니다. 주님은 대놓고 누군가를 비판하지는 않으셨지만 불의에 맥없이 끌려가지도 않으셨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새로운 비전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용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미얀마의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제 사순절 순례 여정도 중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팥죽에 앉는 더께처럼 우리 마음을 뒤덮고 있는 둔감함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도덕경 36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봄의 신비가 그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의 난감함을 돌파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한껏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3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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