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12:3)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의 새로운 시작인 대림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과 시작이 손을 잡고 시간의 한 사이클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합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셨던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8:22). 계절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고, 그 시간의 갈피에 깃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소망을 품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는 대상을 우리 삶 속에 모셔 들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가오는 대림절기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을 모실 준비를 착실히 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종말론적 미래를 앞당겨 살아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과 공간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뿌리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 또한 달라질 겁니다.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교회 현관 앞에 나란히 놓아두었던 국화 화분을 다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오늘 아침 교육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은은한 국화향이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이에게 향기를 나눠주는 꽃의 너그러움이 참 고마웠습니다. 향기를 굳이 드러내려고 호들갑 떨지 않는 그 담담함이 더욱 귀하게 보입니다.

방역 단계가 올라가면서 교회 모임이 또다시 어려워졌습니다. 공간 수용 인원의 20% 정도의 출입만 허용한다고 합니다. 주기적으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투덜거린다고 하여 상황이 좋아질 리 없으니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대림절 내내 비대면 예배를 진행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영혼이 불안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영혼의 닻을 단단히 내려야 할 때입니다.

교회를 그리워하는 마음, 교우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그리워하는 마음의 풍경을 우련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 번”. 그립다고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 말을 발설하는 순간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그냥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주저주저하다가 다시 돌아보는 그 미묘한 마음을 시인은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런 것이겠지요?

얼마 전 좋은 벗들과 함께 읽었던 다산 정약용의 시가 떠오릅니다. 유배지에 머물면서 썼던 시인지라 그 고적함이 쓸쓸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가동귀家僮歸’라는 시입니다. 가동은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을 가리키는 말 같습니다. 그는 다산의 가족들이 보내는 편지를 간직한 채 천 리 길이 넘는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를 통해 건네진 편지를 읽으며 다산은 가족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가동이 돌아가고 난 후 더 큰 적막감과 쓸쓸함이 몰려와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았습니다.

“편지를 받으니 이야기 나누는 듯하였는데
사람이 떠나고 나니 다시금 적막하다
아무 일도 말도 없으니 하늘은 막막하고
길만은 변함없이 아득하겠구나
새재의 길은 일천 구비요
탄금대 물길은 두 줄기라네“

귀양살이하고 있어 그 땅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은 ‘가동’을 따라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굽이굽이 휘돌며 이어지는 새재 길이며 두 줄기로 뻗어 나가는 탄금대의 물길도 눈에 선합니다. 그 재를 넘으면 한양길이 활짝 열릴 터이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저 한 쌍의 제비가 머물며
온종일 울어대니 사랑스럽구나
집소식 들어서 좋다 했는데
새로운 근심 갈래갈래 일어나네
못난 아내 날마다 운다고 하고
어린 자식 볼 날은 그 언제일까
박한 풍속 참으로 안타깝구나
뜬 말에도 아직은 불안하기만“

무심히 바라보니 금실 좋은 제비 한 쌍이 처마를 넘나들며 온종일 재재거립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니 그리움이 더욱더 깊어갑니다. 차라리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집안 소식 듣고 나니 오히려 근심이 더 깊어갑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날마다 우는 아내며, 죄인의 아들인지라 앞길이 막막하기만 한 자식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염량세태炎涼世態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들도 형편이 어려워지자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야박한 세상에 눌려 행여 가족들의 마음에 그늘이라도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독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서라 이 또한 달게 받으리
세상살이 본래부터 괴로운 것을”

염려한다고 하여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니, 지금은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푸접없는 세상이라 하여 울분을 터트리다가는 자신이 먼저 망가질 수 있음을 그는 알아차린 것입니다. 삶은 본래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가끔은 견뎌야 할 만큼 괴로울 때도 있는 법입니다. 괴로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우리 내면을 허약하게 만듭니다. 괴로움은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뚫고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러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속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대림절은 영원한 생명의 회임기懷妊期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몸을 빌려 이 땅에 오려 하십니다. 불확실함과 혼돈과 공허가 가득한 세상이지만, 영혼이 맑고 따뜻한 사람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숨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병중에 계신 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치유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차가운 날이 당분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목도리도 꼭 두르고 다니시면 좋겠습니다. 몸은 멀리 있어도 우리가 한 몸 공동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맑고도 선선한 미소로 시대적 우울을 몰아내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2020년 11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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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시편 77:19)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방역단계가 1.5단계로 올라갔습니다. 교회는 좌석 수의 30%의 교인만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좌석 수보다 많은 교인이 참석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섭니다. 익숙해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시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적응하며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계14:12)는 말씀을 날마다 곱씹고 있습니다. 화낼 일도 아니고, 한숨을 내쉴 일도 아닙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우리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입니다. 늘 대하던 얼굴을 대할 수 없는 아쉬움은 크지만 저기 어딘가에서 우리 교우들이 온몸으로 어둠과 맞서고 있음을 생각하며 힘을 내야 합니다.
 
지난 주중에는 모처럼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바깥출입이 어려워 오랫동안 교회에 오실 수 없었던 원로 장로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김포를 거쳐 초지대교를 건너서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마음이 상쾌하지 않았던 것은 자욱한 미세 먼지 때문일 겁니다. 바깥 풍경이 사뭇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석모도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꽤 오래전입니다만 교회 봉사자들과 함께 석모도를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신이 난 교우들이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꽃을 터뜨리던 그 날이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새우젓도 사고, 간장게장도 사고, 속노란 고구마도 사며 흥청거리던 그 시간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결국 함께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최근에 우리 교인이 된 형제자매들과 그렇게 허물없이 어울리며 생의 한순간을 즐기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엮어갈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계단을 올라 집 현관 앞에 이르렀을 때 휠체어에 앉아 계신 장로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손을 잡은 우리를 장로님은 소리 없는 울음으로 반겨주셨습니다. 아이처럼 우시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잠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시편 77편을 읽었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고난의 시간을 회상합니다. 삶이 고달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매정하게도 그 기도를 들으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참담한 경험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77:7-9)
 
어쩌면 우리 가운데 이런 상황에 처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식(日蝕) 체험은 우리 쪽에서 보자면 ‘어두운 밤’의 경험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다가오면 확실하던 것은 불확실하게 변하고, 맛있었던 것은 맛없는 것으로 변합니다.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때 시인은 스스로에게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우울감에서 벗어날 처방을 내립니다. 그것은 주님이 해주신 일을 하나하나 되뇌고, 깊이깊이 되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분심에 시달려야 했겠지만 시인은 그 마음을 다잡아 하나님께 가져간 것입니다. 되뇌고 되새기는 동안 들끓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마침내 빛이 그의 내면의 뜨락에 내려앉았습니다. 마침내 시인은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77:13)라고 고백합니다. 고백이지만 사실은 찬양입니다. 장로님은 그 말씀을 들으며 또 우셨습니다. 그 울음 속에 담긴 염원과 진실함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차가운 이론에 대한 관심이 적어집니다. 젊은 날에는 비논리적인 언술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언술 너머에 있는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차가운 신학이론이나 교리를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하지만 이론은 복잡한 현실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차가운 신학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소중하게 대하는 이들 속에서 거룩함을 발견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읽은 글이 제 마음에 참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국대 입구에 있는 빵집 태극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거대한 프랜차이즈점들의 등장으로 태극당은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창업자의 손자가 그 사업을 맡았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代)로 이어져 온 그 빵집의 전통을 잘 지켜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샹들리에도 손질만 하여 재사용하고, 옛날부터 벽에 부착되어 있던 벽화나 안내문도 그대로 살려두었습니다. 옛 감성의 빵도 그대로 담아 판매했습니다. 많은 이가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감성이 다른 세대에게 어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젊은이가 그 빵집을 찾기 시작했고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지금의 주인은 창업자인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가슴에 깊이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오래 걸려 기껏 하루 세 개밖에 못 만드는 빵이 있었어요. 할아버지한테 도대체 왜 이렇게 시간 뺏기면서 어느 날은 팔리지도 않는 빵을 만드시냐고 여쭤봤지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빵을 좋아하셔서 가끔 사러 오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이 빵만 좋아해서 드시는데 우리밖에 못 만드니 그 할머니를 위해서 만들어드리는 거다.’”
 
어쩌면 전통이란 이런 이야기들이 쌓여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해득실을 헤아리기보다는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려는 마음이 사랑이고 평화를 만드는 마음일 겁니다.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합니다. 낡은 것을 다 허물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쌓아 올리는 것을 일러 발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새것 속에는 이야기가 깃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빈곤한 것은 사람들이 함께 살며 엮어가는 이야기가 사라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우울한 시대를 다양한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색의 마법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영혼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중층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을 긴 안목에서 조망하는 시선을 빼앗길 때 삶은 전장으로 바뀝니다. 숨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멈추지도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분홍 구두를 신어서 계속 춤을 추어야 했던 안데르센 동화의 소녀처럼 우리는 휴식조차 없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가끔은 멈추어 서야 합니다. 멈추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잘 보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또다시 힘겨운 시간이 우리 앞에 배달되었습니다. 한숨만 내쉴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고립된 단자가 아닙니다. 잠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날은 왕 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서심으로 오히려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오롯이 드러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1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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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겹 줄처럼 든든하게

세 겹 줄처럼 든든하게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12)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가을의 막바지인 지금 형형색색의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다가 다양한 색이 어울려 꽃보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저절로 ‘야, 좋다’라는 감탄이 터져나왔습니다. 어쩌다 보니 올해는 가을 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붉나무를 보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도봉산 오르는 길에 만나곤 했던 나무들도 떠오릅니다. 계절을 낭비한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돌아가신 박 목사님께서 웃으며 하신 말씀이 가끔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실 거랍니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소?“ “예, 저는 한국에서 살다 왔습니다.“ “어떤 일을 했소?“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설악산 단풍을 보았소?“ “아니오, 너무 바빠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화를 내시면서 “그걸 보라고 그대를 거기로 보낸 건데, 보지 않았다니 실망이오”라고 책망하실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지만 그 말 속에는 생태신학의 멋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찬탄하고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아니겠습니까?

1930년에 제정된 감리교회 교리적선언 제1조는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지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칭하는 서술어 하나가 눈에 띕니다. 하나님을 ‘미’ 즉 아름다움의 근원이라 고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아름다움을 빚는 이들은 그러니까 구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딱딱한 감이 홍시로 변하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딱딱하던 조직이 풀어지면서 떫은 기가 가시고 단맛으로 변하는 그 과정을 화학적으로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그 결과를 누릴 때마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몰려옵니다. 어린 시절 채 익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퍼런 감을 소금물에 담가두거나 쌀독에 묻어두었다가 먹던 생각도 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참 달달했습니다. 소소하지만 이런 행복한 기억을 되살리며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시는지요? 어떤 분들은 말씀을 반추하며 지내기도 하시지만 대개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무심하게 지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설교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서둘러 마무리 하느라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푸는 데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중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책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만난 한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개인이 하나의 사슬을 잇는데 반드시 필요한 지체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작은 지체라도 꼭 맞물려지면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성서의 기도서>, 정지련·손규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p.98)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의 상호 신뢰입니다. 내가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때 우리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고 창조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비판하고 교정하려 할 때 우리도 방어태세를 갖추게 마련입니다. 율법주의의 문제가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온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아픔과 슬픔과 연약함을 헤아리려는 섬세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섬기려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섬김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회퍼는 “섬기는 것을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앞의 책, 99쪽)고 말합니다.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뜻이 꺾이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야 진실로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빚지고 있음을 자각할 때 시작됩니다. 그가 말하는 섬김 몇 가지를 꼽아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섬김의 첫 단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되듯이, 형제에 대한 사랑도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을 배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같은 책, 101쪽)는 것입니다. 적극적 경청은 치유의 시작인 동시에 평화의 시작입니다.

섬김의 둘째 단계는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같은 책, 103쪽)입니다. 그것이 설사 사소한 일이라 해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굼뜰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섬겨야 할 때 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번거로울 수 있지만, 그 일에 동참할 때 우리 속의 무기력과 무의미도 스러집니다. 성도들 간에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섬김의 셋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갈6:2). 남의 짐을 진다는 것은 그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눠질 때 비로소 사랑의 친교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의 친교를 빙자하여 무작정 자기 짐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이들은 친교의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섬김이 우리 가운데 자리잡을 때 교회는 든든하게 서고, 연대의 끈은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모처럼 열린 교회 문이 다시 닫히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시는 분들은 가정에서 영상예배로 동참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수요일부터 ‘웨슬리 설교 읽기’를 대면으로 재개했습니다. 눈 앞에 이야기를 경청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칠판이 있으니 한결 마음이 수월했습니다. 작으나마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속히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온이 고르지 않습니다. 환절기에 컨디션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생각날 때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가급적이면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계절에 맞는 은총을 한껏 누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1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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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성자들

세속의 성자들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창28:11-12)

주님의 평화가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별고없이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교우들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지를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감염병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삶을 알차게 가꾸기 위해 애쓰신 교우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을 유지했기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는 고백은 우리 가운데 신앙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일본인 오시다 시게또를 통해 ‘먼 빛의 눈길’이라는 표현과 만났습니다. 그는 신앙은 우리 일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일을 이해득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속상하기도 하고, 속이 타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문제는 우리 인생의 수많은 계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다 보면 일상의 자잘한 일 때문에 감정이 격동하는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성공했다 하여 날뛰지 않고 실패했다 하여 세상이 무너진 듯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가을을 가리켜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라 합니다. 바깥으로 향했던 우리 눈을 거둬들여 내면을 살펴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거짓 자아를 만들어 사람들 앞에 내보이곤 합니다. 신앙인이라 하여 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거짓 자아를 숨기기 위해 다양한 활동 속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예배,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친교 모임, 수양회 등에 참석하는 것으로 내가 꽤 괜찮은 신자라는 자부심을 품을 때도 있습니다. 마치 가인이 자기를 위한 도시를 만들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도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 확장을 꾀합니다. 자기를 선의 범주에 넣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악마화하거나 무시합니다. 종교적 열심이 오히려 사람들을 상식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참 적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어떤 사람이 랍비 모쉐 라이브에게 물었다. “당신은 십이 년 동안이나 당신의 스승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얻었습니까? 십이 년은 긴 세월입니다. 그에게서 경전들의 어떤 의미를 배웠습니까?” 랍비 라이브는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토라(유대교의 경전)를 배우기 위해 스승과 함께 생활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스승을 관찰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가 어떻게 신발끈을 풀고, 어떻게 그것을 다시 매는가를 지켜보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의 단순한 움직임들을 지켜보는 데에 십이 년이 걸렸던 것이다. 그가 숨쉬는 방식, 그가 서 있는 방식, 그가 잠자는 방식…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명상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신비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 자신의 생각이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 머리 속에서 비워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나는 나의 스승을 볼 수가 있었다.”(마르틴 부버 원작, 미카엘 네프 편집, <성자가 되기를 거부한 수도승>, 류시화 옮김, 푸른숲, p.67)

일상을 거룩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이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참 스승은 가르치는 이가 아니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대화하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통해서도 거룩한 삶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 삶의 특징은 삼감과 존중 그리고 경외심일 것입니다. 거친 말과 눈빛이 횡행하는 세상에 살다 보니 그렇게 조심스럽게 살면서 하늘을 드러내는 이들을 만나면 행복합니다.

<전라도 닷컴>이라는 잡지는 제가 제일 재미있게 읽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잊혀가는 시골 마을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분이었으나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생활용품이나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10월호 기획 특집 주제는 ‘고향 편지’였습니다. 흙과 더불어 살아온 노인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손은 주름투성이이고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맑은 미소는 욕심 없이 살아온 이들의 편안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담양에 사시는 90세의 할머니에게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당신을 찍지 말라 하십니다. 늙어 주름진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던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싫지는 않으신 듯 활짝 웃고 계십니다. 기자가 담장 위에 있는 고양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나비야, 너 사진 찍는단다”라며 반기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식구가 없응께 나비가 식구맹키여. 이상 의지가 디야. 영리해. 말하문 이상 알아들어. 안 시캐서 글제, 머이든 갈치고 연십(연습)을 시키문 잘할 것이구만, 하하.” 할머니가 나비를 좋아하는 것은 당신을 보고 ‘알은 척’ 하기 때문입니다. “나비 소리가 테레비 떠드는 소리보다 좋제. 나는 우리 나비 보고 마당에 꽃 보고 살아. 꽃도 나비도 애기 키우대끼 키우고 보제. 사람은 자기 공력 들이고 쳐다보고 살 것이 있어야써. 다 정성이여. 건성으로 되는 것은 이 시상에 없제.”(<전라도닷컴>, 2020.10.222호,p.19)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경세가는 아닐지라도 이런 마음을 품고 산다면 세속성자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속 성자란 우리의 비근한 일상 속에서 거룩한 세계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런 분들은 자기들이 그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꽃도 나비도 애기 키우대끼 키우’는 사람, 생명 돌봄을 자기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영혼은 저절로 맑아집니다.

야곱이 꿈에 본 층계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달아나다가 광야에서 밤을 맞은 야곱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가 베고 잤다고 하는 돌베개가 그의 신산스러운 처지를 오롯이 드러냅니다. 그는 매우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든든한 울타리였던 가족으로부터 멀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낯선 곳에서 맞이한 밤은 또한 들짐승들의 시간이었습니다. 잠을 청해보지만, 비몽사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층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베델’이라 일컫습니다. 성경의 베델은 특정한 장소의 이름이지만, 우리 삶의 베델은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다 베델입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를 만나 취약해질 때 우리가 선 자리가 곧 하나님이 계신 자리임을 알게 됩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땅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입니다(민35:34).

며칠 전 어느 개신교 신자가 사찰에 불을 지르며 ‘할렐루야’를 외쳤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광신자들의 행태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허물고 있습니다. 타자를 악마화하는 일체의 종교적 신념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예수 정신과 무관합니다. 믿음은 시민적 덕성과 유리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종교적 열심이 지식과 덕성과 결합하지 않을 때 폭력으로 귀착되기 쉽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 이들 곁에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개그우먼 한 분이 세상을 등졌다고 하지요? 참 가슴이 아픕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마침내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그 마음이 얼마나 가엾은지요. 우리 주변에 그런 분들이 없나 잘 살펴야겠습니다. 에너지 빈곤층에게는 다가오는 겨울이 공포스러울 수 있습니다. 유난히 올해는 후원자들의 발길이 뜸하다고 하네요. 마종기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겨울 기도’ 부분)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이라는 표현이 늘 제 마음에 걸려 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14일)에 2남선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연탄배달 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귀한 일입니다. 스산한 날씨에 지치지 마시고, 늘 감사해야 할 일들을 기억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0년 11월 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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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꿀 때

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꿀 때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따로 따로는 지체들입니다.”(고전12:26-27)

평강의 주님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별고 없으셨는지요? 시간 여행자인 인간은 언제나 앎과 모름 사이, 빛과 어둠 사이, 기쁨과 슬픔 사이, 확신과 회의 사이에 걸린 외줄을 타고 삽니다. 어지간히 익숙해지긴 했어도 균형을 잡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도 맑고 선선한 웃음을 지으며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초미세먼지가 ‘나쁨’ 단계에 이르렀다는 뉴스 보도를 보았습니다. 대기의 정체(停滯) 때문이라지만 결국 그 먼지를 만든 것은 우리들이기에 더욱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주 정말 오랜만에 교회 문이 다시 열렸습니다. 비록 마스크 너머로 보아야 했지만 정겨운 얼굴들을 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모릅니다.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근 8개월 만에 처음으로 교회에 온 교인도 가슴이 벅찬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손을 마주잡지도 얼싸안을 수도 없었지만 눈빛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확진자가 줄어들지 않는 상황에서 많이 못 오실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거의 교회의 수용 인원을 다 채울 만큼 오셨습니다.

황지우의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떠올랐습니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가슴 절절한 그리움으로 누군가를 기다려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다림의 시간은 지연된 시간입니다. 늦어지는 도착 때문에 우리 온 몸은 귀로 변합니다. 긴 설렘의 시간 끝에 시인은 마침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고 노래합니다. 기다림은 ‘너에게로 감’입니다. 긴 격절의 세월이 우리 그리움을 깊게 만들었습니다.

예배시간에 쌍둥이 아기를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 품에 안긴 아기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축복하는 시간이 참 좋았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어떤 분은 그 광경을 보고 뭔가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며 그 감격을 전해왔습니다. 문득 이사야가 전해주던 아름다운 비전이 떠올랐습니다. 이사야는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던 백성들에게 한 아기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그 아기야말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징표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사9:2). 우리는 이런 희망을 품고 어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비대면 예배가 일상이 되면서 가장 마음이 많이 쓰이는 분들이 원로들이었습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신 분들도 계셨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계셨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교회생활이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비록 감염병 때문이라지만 교회 출입이 금지되었으니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마치 친교의 자리에서 멀어진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삽상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이면 함께 나들이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먼데 가지는 못했지만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올해는 그럴 수 없어서 고심 끝에 작은 선물을 보내드렸습니다. 스산한 계절, 몸과 마음 두루 덥히시라고 어묵을 선택했습니다. 좋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일은 우리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지난 주일 광고 시간에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할 일이 무엇인지를 돌아보라는 숙제를 내드렸습니다. 사실 감사는 뜻밖의 선물이나 도움을 받았을 때 우리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고마움의 감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를 강조하는 것은 돌이켜 생각해보지 않으면 우리 삶에 주어지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내게 주어지는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고전15:10a)라고 고백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라야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습니다. 자기 삶이 ‘사랑의 빚’임을 아는 사람은 질투, 분노, 혐오에 빠지지 않습니다. 감사는 우리 영혼의 굳어짐을 막아주는 백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뭇잎이 노란색,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급한 녀석들은 줄기에서 분리되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닙니다. 김현승 시인은 유난히 가을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가을을 노래한 시가 아주 많습니다. 그 가운데 ‘나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나무이다.” 시인은 나무 모양이 사람을 닮았다고 말합니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 같고, 앵두나무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물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무도 옆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고, 우리가 멀고 팍팍한 길을 걸을 때면 말없이 그 먼 길을 따라오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러하듯 나무도 머리를 푸른 하늘에 두고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연은 매우 종교적입니다.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시인은 기도하는 나무, 참회하는 나무를 보고 있습니다. 참회의 자세는 찬 바람, 찬 서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만 보면 늦가을 나무는 잎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보입니다. 돌에 맞아 난 상처, 벌레들의 공격을 받았던 흔적, 찢기고 잘린 자리에 생긴 옹이…. 그 자국들은 나무가 견뎌야 했던 아픔의 시간을 보여줍니다. 그 아픔과 상처를 안으로 감싸 안으며 나무는 성장을 거듭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사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숨기려 합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경쟁 사회에서 취약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고 있습니다. 취약함이 자랑일 수는 없지만 부끄러워 숨겨야할 것 또한 아닙니다. 나의 연약함을 누군가에게 드러낼 때, 다른 이들도 자기 안의 상처를 드러낼 용기를 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취약함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인간이 속절없이 떠밀리고 있는 인고와 슬픔의 강 속에 뛰어드셨습니다. 그래서 울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고, 배신도 당하고, 고향에서 쫓겨나고, 거절당하는 쓰라림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아픔과 쓰라림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신비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히2:18). 놀라운 은총입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사회의 가려진 부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무에 새겨진 옹이와 상처와 같은 이들 말입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한 분들, 가혹한 노동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 자꾸만 절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분들의 설 땅이 될 수 있는지 고심해야 하겠습니다.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능력도 없지만, 우리가 함께 지향을 분명히 하고 연대한다면 적어도 절망에 휩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 늘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공적인 문제를 향할 때 삶을 얽어매고 있는 비애감은 줄어들고, 삶의 의욕이 커질 겁니다.

아직 주일까지 며칠 남았습니다. 꼭 걸어온 시간을 반추하면서 우리 삶이 사랑의 빚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등불이 되어 주었던 이들에게 작은 감사의 마음이라도 표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늘 강건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0월 2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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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 연장이 되어

의의 연장이 되어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6:13)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즐겁게 한 주를 지내고 계신지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만 뜻하지 않은 황사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네요.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잊은 채 지냈는데, 우리가 처한 현실의 엄중함을 다시 자각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시드럭부드럭 꽃들이 스러지고 있지만 개망초 쑥부쟁이 바늘꽃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장하고 예쁩니다. 말은 통하지 않으니 따뜻한 눈빛을 보내 그 명랑한 버팀을 응원합니다.

며칠 전 우리교회 청년의 사진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 인도의 갠지스 강이 보고 싶어 문득 찾아간 바라나시에 40일간 머물며 찍은 사진과 자기 마음의 풍경을 그린 글로 구성된 전시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만 이 둘은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그의 시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풍경 속에 깃든 삶의 본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진을 둘러보다가 작가에게 어느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가리킨 사진은 온갖 오물이 떠밀려오는 얕은 강물에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조야한 낚시 바늘을 강에 던져둔 채 집중하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재를 실은 강물을 더럽다, 불쾌하다 여기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그 광경을 통해 젊은 작가는 성스러움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해질녘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살피고 있는데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모니터에는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의 이름이 떠있었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권사님의 음성은 맑고 또렷했습니다. “목사님, 많이 망설이다 전화를 올렸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00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목사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괴질 때문에 만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음성이라도 듣고 싶었어요.” 피차 안부를 주고받으며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함께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고마움으로, 안쓰러움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쇠락의 징조가 드러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헬렌 니어링이 엮은 <인생의 황혼에서>라는 책을 찾아 읽다가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남아 있는 힘이 줄어들수록 내게 그것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나는 한쪽 귀를 잃었지만, 지금처럼 감미로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눈이 너무 나빠져서 젊은 시절 자연이 보여주었던 그 빛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순수한 기쁨으로 자연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내 수족은 이내 지치겠지만, 무한한 창조의 섭리가 드러나는 이 활짝 열린 공간에서 내 수족을 움직일 수 있는 특권을 지금 이 순간처럼 소중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 꼬박꼬박 먹는 이 소박한 음식을 이렇듯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비록 삐걱거리고 흔들리기는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움막집에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헬렌 니어링 엮음, <인생의 황혼에서>, 전병재·박정희 옮김, 민음사, 2002, p.30-31/윌리엄 엘러리 채닝이 ‘루시 에이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40)

연세 드신 분들의 마음이 이 글 그대로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생을 한껏 기뻐하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핍에만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잘 누릴 줄 아는 것이 생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잘 익어 땅에 떨어지는 열매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홀가분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 여정 마치는 그날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임을 압니다. 무명의 시인은 땅의 길이 끝나는 순간 하늘의 길이 열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지난 주부터 교회당 수용 인원의 1/3이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번 주일부터 대면예배와 영상 예배를 병행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교우들을 만날 생각에 설렙니다. 한 동안 사람들이 전혀 머물지 않았던 지하 친교실 공간도 깨끗하게 쓸고 닦았습니다. 아직 식사를 나눌 수는 없지만 행여 교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시면 그곳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실을 담당하는 교우들도 예배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1,2부 예배 리허설을 했습니다. 초봄부터 시작된 팬데믹 상황이 늦가을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힘겨운 시간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춘추春秋‘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한 줄 쓴 다음/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병술년 봄을 보냈다”. 산수유 꽃 피는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시인은 ‘꽃망울을 터뜨린다’라는 표현을 연상했던 것일까요? 그렇기에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조사 하나를 바꾸는 순간 문장의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고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습니다. 물난리가 지나가고, 열대야로 밤을 지새던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시인은 마침내 한 줄을 시에 더 보탰습니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고 적고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를 적기까지 세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춘추’라는 시 제목이 참 적실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간도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시간을 우리는 그리움으로 채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으며,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밀린 이야기를 다 나누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분하게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사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 일반이라기보다는 ‘기독교신앙’ 전반이기에 상투적으로 쓰는 이 말이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의 신학 논문’을 비텐베르그 성교회 문에 게시한 날을 사람들은 종교개혁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개혁 정신은 낡은 것, 변질된 것, 권력으로 변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예수 정신이라는 알짬이 사라진 교회와 제도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만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안타깝게도 지금의 교회는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각 교단들이 보이는 행태는 개혁 정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이 희망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희망은 품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먼저 위로부터의 은총이 주어져야 합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조롱, 냉소와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무너지는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은 기우뚱한 벽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밀어넣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더디다 하여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칠 뿐입니다. 잔뜩 찌푸린 날입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가끔은 어둠에 잠기지만 본래는 청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주위에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 한껏 누리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10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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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롬11:29)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조석 기운이 제법 시원합니다. 건강한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속 거리두기 단계가 조정되어서 다행입니다. 안심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래도 막혔던 통로가 조금은 열린 것 같아 좋습니다. 그렇지만 더욱 조심스럽게 이 시간을 살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본 방역 수칙을 잘 지켜가면서 일상을 살아내는 성실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침 저녁 공원을 산책하면서 색깔이 변해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조락의 계절이 다가옴을 실감합니다. 조금은 쓸쓸한 듯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싫지만도 않습니다. 피어남과 스러짐은 생명의 자연스런 흐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변화 속에서 꼬물거리며 자기에게 부여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저마다의 슬픔과 아픔을 짊어진 채.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낯선 이들조차 정겨워 보입니다.

큰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댄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몸에 자극을 주는 분들을 봅니다. 투정 부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빙그레 웃게 됩니다. 엉거주춤한 기마자세를 한 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두 팔을 맹렬하게 앞으로 내뻗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싯지싯 다가오는 세월을 밀어내려는 것일까요? 눈을 감은 채 배를 퉁퉁 두드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떠날 생각이 없는 뱃살을 달래 어떻게든 돌려보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붉은 볏을 세운 맨드라미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겨운 풍경들입니다.

생활 속 거리두기 단계가 낮아지면서 공원 곳곳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느라 둘러쳐져 있던 끈들이 말끔히 제거되었습니다. 배드민턴 치는 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아침 대기를 뒤흔들더군요. 운동 기구가 있는 곳마다 늙수그레해 보이는 분들이 모여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줄이 쳐졌는데도 굳이 그 안에 들어가 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유난히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그분들을 보면서 ‘죄의 사회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죄책감이라는 무게를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 자기들의 죄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의 부담을 경감하려는 일종의 전략일 겁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준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청소년들이 유난히 욕을 많이 하고 위악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동료들로부터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른이라고 하여 다를 것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에 포도밭 근처에 서 있던 배나무에서 주인 몰래 배를 훔쳤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는 자기가 도둑질을 했던 까닭은 “조금이라도 어쩔 수 없는 궁색에서가 아니오라, 정의가 없고, 싫고, 불의에 배불러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결함 자체를 사랑했단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해서는 안될 일을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다만 해서는 안될 일인 그 때문에 한다는 것이 그토록 즐거울 수가 있었겠나이까?”(성아구스띤, <고백록>,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2, p.65) 생각해보면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그 일을 행했던 까닭은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싫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갈림길에 설 때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인들에게 준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고린도교회가 불필요한 논쟁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장에 나오는 질 좋은 고기가 우상 앞에 바쳐졌던 것이 많았다는 데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서는 그 고기는 그저 고기일 뿐이라며 서슴없이 구매하여 소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걸 먹는 순간 우상과 연루된다고 생각하여 한사코 거부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 문제는 교회를 뒤흔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고전8:4). 그러니까 우상 앞에 바쳐졌던 고기라 하여 못 먹을 이유는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전8:13)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상 앞에 바쳐진 고기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 사도가 전제했던 말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b) 나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무입니다. 

공원의 금지된 공간에서 운동을 하던 분들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네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문득 나뭇잎 사이에 떨어진 모과를 보았습니다. 채 익지 못한 채 떨어져 한쪽이 이미 검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주워올까 말까 하다가 그냥 버려두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들어오니 고진하 시인이 이번에 출간한 시집 <야생의 위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목차에 ‘모과’라는 시가 있어 먼저 찾아 읽었습니다.

“아직 덜 익은 채 떨어진
황달 기 느껴지는 노란 연민을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고
하루 몇 번씩 킁킁 코를 대봅니다”(‘모과‘ 부분)

역시 시인은 시인이지요? 그는 덜 익은 채 떨어진 모과를 가리켜 ‘노란 연민’이라 말합니다. ‘노란 연민’이라니요? 그것은 사실 무르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모과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혹은 마음일 겁니다. 아무의 눈길도 받지 못하는 그 모과를 그는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았습니다. ‘모서리‘라는 시어가 바닥에 떨어진 모과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킁킁 냄새를 맡음으로 시인은 모과의 존재를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버림받은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마 자기 안의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세월을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택배 노동자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오늘은 더 늦을 거예요’라는 아들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라 울고 또 울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은 모든 이들에게 힘들지만, 특히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이들에게 참 가혹합니다. 쉼 없는 노동, 소외된 노동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지만 그런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에게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일 또한 시민의 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현장 예배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일단 이번 주일은 영상예배를 기본으로 합니다만 그래도 꼭 나오시고 싶은 분들은 사무실에 먼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꼭 붙들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십시오. 금주의 남은 시간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와 청량한 기쁨을 안겨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가슴 가득 하늘의 숨결을 받아 안고, 사랑의 여정을 계속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0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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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이번 주에는 며칠 앞서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일 직전보다는 주중에 소식을 나누는 것이 더 좋겠다는 제안 때문입니다. 별고 없이 잘 지내시는지요? 함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지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격절의 시간이 길어지니 그리움이 깊어갑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가을빛이 왠지 너누룩해 보입니다. 오늘이 한로寒露네요. 찬 이슬이 내리는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람이 서늘합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때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碧空(푸른 하늘)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는다. 만산滿山 풍엽楓葉(산에 가득 찬 단풍잎)은 연지臙脂(화장할 때 두 볼에 찍어 바르는 붉은 색)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黃菊花는 추광秋光(가을 빛)을 자랑한다.”

아직 본격적인 단풍철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절이 깊어가고 있음을 날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공원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던 꽃무릇이 다 시들었습니다. 꽃대 위에는 마치 사위어버린 불꽃같은 꽃의 잔해가 남아 허망한 열정의 시간을 돌아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꽃대 아래도 잎들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조촐하게 피어나는 여뀌는 자기를 도드라지게 보일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갑니다. 공원 곳곳에 서양등골나물 흰꽃이 만발입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생태교란종이라지만 눈꽃을 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제법 그럴싸합니다.

식물들은 묵묵히 자기 시간을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만 홀로 유정하여 쓸쓸하다느니, 허망하다느니 요란을 떨 뿐입니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1923-2012)는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서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고 노래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시간입니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겹고 공허해도 살아 있다는 것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소멸할 것임을 알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이 이렇게 아름답게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쓸데없는 불안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맛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멋진 가을날 우리의 시간이 그런 아름다움으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행했던 성찬식의 후일담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낯선 경험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고들 말씀하시더군요.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의례에 동참하는 일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졌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느 부부는 ‘빵과 포도주’를 서로에게 건네며 “이는 당신을 위해 주시는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이는 당신을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라고 말할 때 가슴 깊이 뭔가가 들어온 것 같더라고 증언하시더군요. 한 공간에서 성례를 집행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주님은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은총으로 모두를 감싸주셨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은혜의 자장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교회 야외예배를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기차를 전세 내서 갔던 것 기억나시지요?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가는 것처럼 설렜던 그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김유정 역 앞 식당에서 때 맞추어 익어가던 춘천닭갈비의 맛도 떠오릅니다.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나누었던 이야기의 내용은 다 잊었지만 그 장면만큼은 머리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참 좋았던 시절입니다. 불광동 팀 수양관도 잊을 수 없습니다. 노천극장에서 드렸던 예배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새들도 찾아와 즐겁게 노래를 불러주었었지요. 잔디밭에서 나누었던 커피 향이 그립기만 합니다.

저는 어제 오늘 아름다운 원로 분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가상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해 온 시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함께 건넜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하루 나들이를 기획하고 있었을 테지요. 먼 곳을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버스를 타고 오가며 보는 경치며, 차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갈대, 그리고 잔잔한 햇살이 고즈넉했습니다.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에도 우리 교회의 새 식구가 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 때문일 겁니다. 아직 대면하여 사귈 수는 없더라도 그분들이 청파교회에 속한 지체임을 기쁘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 교우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교회생활을 안내하는 새교우 교육은 영상을 통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감리교회의 감독 선거가 열립니다. 각 연회의 감독과 4년 임기의 감독회장을 선출하는 중요한 모임입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감리교회는 오랫동안 감독선거로 인해 분열을 거듭해 왔습니다. 소송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올해도 감독회장 선거를 앞두고 아주 심각한 갈등 상황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의 지도력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거룩한 영적 직무를 위임받은 이들이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올해는 어느 분들에게 감독의 직임이 맡겨지든 그분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세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 장인 이드로는 신실한 사람들을 뽑아 일을 나누라고 권고하면서 그 기준을 정해줍니다.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출18:21)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거짓이 없어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야 사심 없이 백성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독의 직임은 명예로운 자리도 아니고, 높은 자리도 아닙니다. 섬김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전도된 현실을 놓고 비웃고 손가락질만 할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문제를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감리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에 재야로 물러가면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이런 약속을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삼상12:23)

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소란스럽지만 평화로운 세상의 꿈은 포기될 수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0월 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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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할 수 없는 사랑 속으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속으로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시16:1-3)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한가위 명절을 잘 보내셨는지요? 고향을 찾은 분들도 계시고, 집에 머무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그 마음도 귀하고, 그리운 마음을 달래며 영상으로만 인사를 나누는 마음도 귀합니다. 구름이 걷혀 보름달을 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보름달 하나 둥덩실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자동화된 이미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가위 보름달 하면 제게는 늘 시골집 초가지붕 위에 열렸던 둥근 박이 떠오릅니다. 보름달과 마주 보고 있는 희고 큰 둥근 박의 이미지는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제 마음을 적십니다. 그런 박을 바라보며 어른들이 들려주시던 흥부 놀부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저는 지금, 마치 전쟁을 치른 것 같은 온 집안을 정리하고 서재에 앉아 있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찾아와서 놀다 갔습니다. 집안 곳곳에 남은 아이들의 흔적이 사뭇 정겹습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재잘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고 그것을 가위로 자르고 다른 곳에 이어 붙이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무한 체력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다 아시지요? 잠시라도 아이들 눈을 피해 쉬려 하면 ‘할아버지, 놀아줘야지!’ 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또 놀이 현장으로 끌려나가곤 했습니다. 몸은 고단한데 마음은 흐뭇합니다. 놀다가 지치면 아이들은 제 무릎 위에 오도카니 앉아 제 얼굴을 살핍니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에 있는 이 점은 누가 심어놓은 거예요?” 
“내가 기르는 거야.“ 
“뭐 하려구요?” 
“나중에 요리해 먹으려고.” 
“무슨 요리요?” 
“이게 버섯이거든. 나중에 할머니가 양념을 넣고 요리해 줄 거야.”
“아닌 것 같은데.”

낄낄 거리고 웃지만 아이는 따라 웃지 않습니다. 쇠락의 징조를 읽는 것일까요? 반칠환 시인의 <어머니5>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부제가 '검버섯'입니다.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다니던 산지기 아내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마루에 걸터앉아 먼산 바라보신다칠십 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반칠환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시와시학사)

어떤 광경이 선하게 그려지지 않습니까? 시인은 산골짜기를 터전 삼아 일평생 노동하며 살아온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허리는 굽었고 눈도 약해져 자꾸 눈물이 굅니다. 마루에 걸터앉은 어머니는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무심한 눈길이 향하는 곳은 단순한 풍경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회한조차 없이 자기 생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가 어머니 얼굴을 밭 삼아 뿌리내린 겁니다. 시인은 담담하게 그 광경을 그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애잔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생의 엄중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주어진 자리에서 견뎌야 할 생의 몫을 잘 살아내셨습니다.

이 어머니와 저를 견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이 시대이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한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둘은 갈등을 거듭합니다. 꾀쟁이 야곱은 붉은 콩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삽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기도 합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에서는 아버지의 장례만 끝나면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야곱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늘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오바댜서는 이스라엘이 침략군을 맞아 고군분투할 때 에돔은 형제 국가를 돕기는커녕 침략자들과 한패가 되었다고 꾸짖습니다. 심지어는 피란길에 나선 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리기까지 했다고 말합니다. 불구대천의 원수란 말이 실감 납니다.

이 두 나라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한배에서 나온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원으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갈등이 근원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을 살면서도 자꾸 우리 삶의 뿌리를 돌아보며 산다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고백이 자연과학적 진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 속에 머문다는 것은 삶이 신비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외심을 품고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비와 경외심을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숨결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나라, 세대와 세대,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의 차이, 피부색과 종교의 차이는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귀향의 계절에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일치의 가능성이 아닐까요?

긴 연휴의 마지막 날이 마침 주일입니다. 매해 10월 첫 주는 전 세계의 교회가 ‘세계 성찬 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 뿌리는 미국 장로교회가 1930년대에 제안한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은 1982년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 모임부터입니다. 대회 참가자들은 이념과 분쟁으로 찢긴 세상을 그리스도의 식탁 앞에 함께 앉아 치유하자는 뜻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사실 세상 분쟁의 많은 부분이 종교 분쟁임을 생각할 때 ‘세계 성찬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비대면으로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어떻게 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온라인으로라도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 웨슬리가 말하는 ‘은혜의 수단’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의식인 성찬식 없이 한 해를 보낼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우려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교우들의 성숙한 믿음과 태도를 신뢰합니다. 할 수 있으면 온 가족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의논하십시오. 성찬상을 정갈하게 마련하고 빵과 포도주 혹은 포도즙을 그 위에 올리십시오. 예배 중에는 깨끗한 천으로 덮어놓으십시오. 의복은 가급적이면 단정하면 좋겠습니다.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가족들이 함께 성찬의 은총을 비는 기도를 올리십시오. 참고로 신학자 칼 라너의 성만찬 기도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만찬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을 되찾게 하소서. 몸과 영혼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 당신의 은혜가 참으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는 사람,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과 우리가 섬겨야 하는 이들을 위해 그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당신을 그저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여기는 우리, 우리의 삶과 죽음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 희생 제물로 드려지신 하나님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어 주소서. 진리의 생명, 무한한 자유의 생명, 빛의 생명, 그림자 없는 밝음의 생명,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을 거룩하게 먹고 마시는 생명, 모든 피조물이 아버지께로, 모든 것 안에 계신 모든 것 되시는 아버지께로 넘어감을 끊임없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생명, 바로 그 생명입니다.”(칼 라너, <칼 라너의 기도>,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9, p.188-9)

아직 어리거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성찬의 소중함을 미리 일깨워주는 게 좋겠습니다. 이 성찬을 통해 가족의 일치는 물론이고, 각지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제 추석 연휴가 끝나고 상황이 좋아지면 우리가 다시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품습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10월에 우리 믿음이 더욱더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온 교우들이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좋으신 주님 앞에 기도 올립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시기를 빕니다.

2020년 10월 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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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림으로 만드는 평화

머뭇거림으로 만드는 평화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고후13:11)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맑고 청명한 대기가 우리 마음속 우울함을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는 아주 오랫동안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입니다. 잊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그리스도인 됨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만 국한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기시키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거룩의 세계를 가리켜 보여야 한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욕에 길든 우리는 자신이 순례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욕망의 거리를 바장입니다.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려면 신앙의 길을 걷는 동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비대면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다는 사실이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나날입니다.

가을입니다.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조금씩 물드는 모습을 지켜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찾아옵니다. 열흘 붉은 꽃도 없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실감 나는 나날입니다. 강둑에 앉아 반짝이는 윤슬을 보고 있노라면 아늑한 고요함이 물결처럼 번져옵니다. 문득 어린 시절에 부르곤 했던 동요들이 떠올라 가만히 불러봅니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사알살 떠다니겠지”. 평화롭지만 쓸쓸한 정경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즐겨 부르던 동요는 대체로 쓸쓸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섬 집 아기’, ‘겨울나무’, ‘엄마야 누나야’ 등이 다 그렇습니다. 아기를 혼자 놔두고 섬 그늘로 굴을 따라가야 하는 엄마의 마음,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에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부는 나무도 그렇지요.

동요는 아니지만, 이은상 선생님이 가사를 쓰고 현제명 선생님이 곡을 만드신 ‘그 집 앞’이라는 곡도 떠오릅니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이 머뭇거림, 망설임을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답답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습니다.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의지적인 행동이 아니라 비의지적인 행동입니다. 그 속에 애틋함이 있습니다. 서슴없이, 당당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대세처럼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이런 은근함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은 나이 듦의 징조일까요? 어쩌면 너무나 난폭하게 흘러가는 세상에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머뭇거림’(hesitation)이 그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고, 응대하는 이들은 시원시원해 보일지는 몰라도 삶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마련입니다. ‘달의 이면’이라는 말처럼 세상에는 우리가 파악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고, 그건 사람 살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며 살자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을 아주 몹쓸 사람으로 몰아붙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가을에 이런저런 동요가 떠오른 것은 우리의 거친 세태에 대한 피곤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년 가을이면 각 교단 총회로 시끄럽습니다. 영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총회 때문에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총회는 각 교파의 지향과 정책을 결정하고 교단을 이끌어갈 리더를 뽑는 것을 주된 소임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지향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이 시대의 문제들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논의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총회는 그 기본적인 직무를 내팽개친 채 정치꾼들의 무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음성을 높이는 이들은 다 어떤 진영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영 논리에 가담하는 순간 참을 향한 순례는 중단되고 맙니다. 교권을 쥔 이들의 단일한 목소리가 다양한 소리를 압도할 때 진리는 잦아들게 마련입니다. 동일한 소리를 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사상 검증을 하려하고, 그들에게 불온의 딱지를 붙여 침묵시키려 할 때 교회는 퇴행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교리나 예배 방법의 차이가 우리들의 일치를 가로막을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꼭 갈라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묻습니다. 

“비록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비록 한 가지 의견으로 통일되지는 못한다 해도 한 마음이 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차이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연합되어 있습니다. 서로간의 차이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행과 사랑에 있어서 서로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웨슬리 설교전집3>, 설교 ‘관용의 정신’중에서, 기독교서회, p.61)

누군가를 동화시키려는 것, 자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차이는 잠시 놓아두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선행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과잉 대표하는 정치 문제로 인해 교회는 분열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부정하는 거친 말이 오고 가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찢기고 있습니다. 각급 교단의 총회가 그런 대결을 해소하는 화해의 자리가 아니라 더 큰 분열의 자리가 되고 있으니 딱할 따름입니다. 감리교회도 10월 중순에 감독을 뽑는 선거를 하게 됩니다. 감리교회는 그간 감독회장 직무를 두고 오랫동안 다퉈왔습니다. 혼란이 감리교회에 큰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리교회가 새로워져야 할 때입니다.

이제 추석이 다가옵니다. 감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맞이하는 명절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가급적이면 많은 이들이 접촉하는 자리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기억하시는지요? 명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두레 밥상 앞에 앉습니다. 시인은 우리가 한 끼 밥 차지하기 위해 혹은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은 모두가 귀히 여기는 사랑을 회복하라는 일종의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회복되는 자리라는 점에서 그 식탁은 성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올 추석에는 이런 밥상 앞에 둘러앉지는 못한다 해도, 서로를 귀히 여기는 마음만은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잠시 물러나 우리 생명의 본질을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은 ‘서로 기대어 있음’입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 때 곁에 있는 이들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이맘때면 저는 김종삼 시인의 시 ‘묵화墨畫’를 떠올리곤 합니다. 묵화는 물론 먹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화려하진 않기에 오히려 우리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그림입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정경이 눈에 잡힐 듯 선합니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소가 물을 마십니다. 쟁기질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소도 힘겨웠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마치 자식을 돌보듯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소도 고스란히 느꼈겠지요? ‘고맙다’, ‘애썼다’, ‘너라도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니?’ 부은 발잔등이 안쓰럽습니다. 적막하지만 애상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시는 ‘마침표’로 끝나지 않고 ‘쉼표’로 끝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도 이런 마음을 품고 서로를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뿐인가요? 우리가 인생길에서 마주치는 이들 하나하나를 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질 것 같습니다.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도 더러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실천하는 범위 안에서 공원 산책이라도 하십시오. 텔레비전만 보시지 말고 문득 창문을 열어 밤하늘도 바라보십시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이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별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그리운 이름들을 떠올렸던 윤동주의 마음도 한번 느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중에 수술을 받은 교우가 계십니다. 잘 회복 중이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연세 드신 교우들도 건강에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시니 고맙습니다. 점점 원만한 빛으로 무르익어가는 벼들이 우리 마음의 날카로운 것들을 녹여내고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도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면 좋겠습니다. 은총 안에서 걷는 길에 생명의 향기, 평화의 훈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9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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