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마가복음 10:13-16)

 

어느 날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다. ‘쓰다듬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가볍게 쓸어 어루만지다’, ‘마음을 달래어 가라앉히다’이다. ‘쓰다듬음’ 혹은 ‘어루만짐’은 참 살가운 행동이다. 쓰다듬음은 상대에게 나의 사랑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행위이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등을 토닥여준다든지 어루만지는 행위는 얼마나 숭고한가? 그것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의 몸짓이다. 주님이 자기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던 이들은 예수와의 접촉을 통해 아이들의 삶도 아름다워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의 장벽에 부딪혔다. 제자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꾸짖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아이들을 쓰다듬는 것은 시급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고 노하셨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가복음 10:14)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가 문자 그대로 어린이이든,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든, 예수님은 그들과의 접촉을 꺼리지 않으신다. 그들을 보듬어 안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어린이의 어떤 점이 그러하냐고 묻는다. 


류연복 판화



몇 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천진난만(天眞爛漫), 경탄, 호기심…. 오늘 우리가 보는 현실 속의 아이들이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이들’이라는 기호를 꾸밈없이 순수하고 참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이들은 근엄하지 않다. 젠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켜야 할 자기가 없다. 그래서 늘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아 ‘어린이’를 잃어버린 채 산다. 삶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늘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는 사람들, 배울 것은 없고 가르칠 것만 있는 사람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한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먼 사람들이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어린이성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 설레느니,/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다면/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유종호 번역). 부드러움은 생명의 징조이고 경직됨은 죽음의 징조이다. 워즈워스가 역설적으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기도*

 

하나님,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더께처럼 내려앉아 우리 영혼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경탄할 줄 모르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삶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은 우리 영혼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십시오. 묵은 땅을 갈아엎고 기쁨의 씨를 뿌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가슴 설레는 일들이 많아지게 해주십시오. 아멘.


<<사랑의 레가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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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 했다. 사로잡힘은 주체적으로 조장할 수도 없고 물리칠 수도 없다.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사로잡힘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느닷없고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에게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다.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일심으로 달리긴 했다. 돌아보면 갈짓자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가섰다 싶은 순간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 다가오는 길,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진 그 길이 참 힘겹다.

 

한국교회가 위기다.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위기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근본적 위기이다. 교세가 확장되고, 대형교회도 많이 등장했지만 복음은 후퇴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경계했던 ‘다른 복음’이 슬그머니 틈입하여 주인 노릇하고 있다. 십자가는 자동차 룸미러에 매달려 대롱거릴 뿐, 많은 이들이 십자가라는 스캔들과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의 루틴을 깨뜨리는 메시지는 수취인 불명이 되어 허공을 맴돈다. 은혜스러운 찬양의 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예수의 벗들의 신음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도 외롭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가인은 도시 건설자가 되었다 한다. 에덴의 동쪽이 가리키는 것은 ‘불안’, ‘안식 없음’, ‘뿌리 뽑힘’이다.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그 폭력의 흐름은 아직도 잦아들지 않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얼굴마다 오랜 피곤이 똬리 틀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졌던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 번째 질문,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책망이다.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났구나.” 아담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 앞이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천진함을 잃어버린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로 숨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후 사람은 그 마음에 깃든 불안을 달래기 위해 어떤 대상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불안의 대용물 말이다. 누군가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허구렁이 있다고 말했다.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려니 삶은 힘겹고 마음의 공허는 깊어간다.

 

두 번째 질문,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이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닐 것이다. 가인은 불퉁거린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하나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아무리 무심해도 그 눌함訥喊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웃을 지키는 자로 만드셨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인간다운 삶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책임이라는 말이 너무 강박적으로 들려서일까? 성경은 ‘책임’을 ‘사랑’으로 바꾸곤 한다.

 

성경 인물 가운데 노아는 순종의 챔피언이다. 그는 폭력과 부패함이 가득찬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신 하나님도 노아만 보면 흐뭇해 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했다.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들고, 짐승들을 이끌어 들이라 하면 그렇게 했고, 들어가라 하면 들어갔다. 마침내 홍수가 끝났음을 알았을 때도 그는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일까? 물론 아브라함도 순종의 사람이다. 떠나라 하면 떠났고, 바치라 하면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있고 노아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책임성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인 동시에, 그를 위해 스스로를 위기에 내던지기도 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정했고,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기 위해 길을 떠난 하나님 일행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순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바로 책임의 윤리이다. 민족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독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 편에 섰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섰다. 그 때 기독교는 젊었다. 야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늙어버렸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벗들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위선적인 종교인과 지도자들을 향해 ‘화가 있을진저!’라고 일갈하던 예수의 얼굴에는 베일을 덮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만 바라봐 달라고 말할 뿐이다.

 

야훼는 제국의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세계에 던져진 혁명의 깃발이었다. 하나님은 힘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을 지푸라기 강아지로 여기셨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초월적 비전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화려하고 늠름한 이들만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꿈 자체가 불온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의 제국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희소성’의 신화를 가지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한다. 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한다. 적당한 경쟁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희소성의 신화에 갇힌 이들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무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루저가 되고 승리한 이들은 득의만면이다. 예수의 세계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불편을 감수하지만, 희소성의 세계는 한 마리 양을 위해 모든 양을 희생시킨다. 욕망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망각이 깊어지면 주체의 몰각이 찾아온다. 거라사 광인을 사로잡고 있던 레기온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떼는 비탈길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다.

 

기독교는 이런 세계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동안 번영의 복음과 죄 경영(sin-management)을 통해 몸집을 불리느라 바빠, 자본주의의 신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왜곡된 정신을 타격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정방향으로 되돌리고, 세속적 가치 질서의 우상적 작동을 막아야 할 교회가 세상에 투항해버리고 만 것이다. 예수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광야 공동체는 애굽과 바로 체제에 대한 대안이었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일은 창조적 노동이 아니라 고역이다. 고역으로서의 노동은 비인간화를 가속화시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들에게 제시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을 일컫는 말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세상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출애굽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은 그 위대한 문명이 사실은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피를 통해 형성된 것임을 가리킨다. 야훼 신앙은 이처럼 당파적이다. 하지만 그 것은 보편을 지향하는 당파성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살 떨리게 경험하는 학교였다. 만나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을 때 주어졌다. 만나는 제대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받아먹는 것이고, 필요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눔으로 그들은 한 식구가 되었고,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서로 함께’라는 뜻의 ‘com’과 ‘선물’이라는 뜻의 ‘munus’가 결합된 단어이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때 든든히 서 간다. 초대교회의 애찬은 바로 이런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신앙 공동체는 또한 하나님의 파토스를 함께 느끼는 이들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할 때 우리는 예수님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약자들 속에 숨겨 놓으셨다. 그들 앞에 멈춰서고,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고, 그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때 생의 비애는 줄어들고 내적 자유의 공간은 늘어난다. 신앙 공동체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적 세계의 민중적 현실에 연루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남은 목회 여정의 목표가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별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색하게나마 대답한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삶을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축제로 경험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동화시키려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여 하나님 마음이라는 중심을 향해 순례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하지만 즐거운 탈주이다.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중세의 격언이 떠오른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안내인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출구인 동시에 입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통해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는 일, 그것 말고 목회의 다른 목표를 나는 알지 못한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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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등뼈를 곧추 세우라

김기석의 새로봄(191)

 

삶의 등뼈를 곧추 세우라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신명기 29:29)

 

출애굽 공동체가 모압 땅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른바 호렙산에서 맺었던 언약에 덧붙여서 주어진 모압 언약이 그것이다. 모세는 출애굽의 긴 여정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간략하게 언급한다. 애굽 땅에서 베푸신 이적, 광야에서의 이적은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권능의 행위였다. 백성들은 그런 놀라운 일을 보고 겪었지만 여전히 수동적 객체일 뿐 역사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 모세는 그런 현실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나 바로 오늘까지,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신명기 29:4).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가 열리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독립적 주체로 서지 못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른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이들의 언어를 자기 말로 여기며 산다. 광야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한다. 척박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해져야 한다. 하지만 광야는 중첩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물크러질 수도 있는 공간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필요한 것들을 다 얻을 수 있었고, 위기 때마다 구원을 경험했다. 모세는 그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그들은 새로운 언약관계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힘 있는 이들의 편익을 위해 동원되는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는 순간 평등공동체의 꿈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이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모호함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모호하다고 하여 모든 판단을 유보한 채 되는 대로 살자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신명기 29:29a)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지도 삼아 시간 여행을 하면 된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 혹은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인이다. 그 말씀이 설사 우리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말씀을 척도로 삼아 우리 삶을 조율할 때 삶이 가지런해진다.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익숙해질 때 우리 삶의 등뼈가 곧게 세워진다. 광야를 헤매는 것처럼 삶이 고달프고,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어 어지러울 때면 말씀 한 자락을 붙들고 그 미로를 헤쳐가야 한다.

 

*기도

 

하나님, 삶이 순탄치 않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버릇처럼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우리가 누려야 할 몫까지 독점한 것 같은 이들을 미워합니다. 강자들의 편을 드는 것 같은 사회 시스템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하여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원망하는 버릇을 내려놓고 성실하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미로와 같은 세상을 통과하겠습니다. 우리의 동행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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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김기석의 새로봄(190)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의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일뿐이지만, 악인이 기대할 것은 진노뿐이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 곡식을 저장하여 두기만 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그것을 내어 파는 사람에게는 복이 돌아온다. 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받는다(잠언 11:23-27).

 

“의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일뿐이지만, 악인이 기대할 것은 진노뿐이다.” 의인은 자기 분수를 알고 사는 사람이다. 남을 배려하기에 다른 이의 몫을 대신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억지가 없기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명랑하다. 그는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 필요한 이에게 계산하지 않고 준다. 사람은 아끼지만 재물은 아끼지 않는다. 남에게 주는데도 그는 더욱 부유해진다. 그런데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도 있다. 움켜쥐지만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슬금슬금 줄어들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었다. 하나님은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대로 하자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출애굽기 16:17-18). 그 지시를 어기고 많이 거두어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나? 남겨둔 것에서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겼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고 말한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네페쉬 베라카)이다.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구원사의 일부가 되라고 부르시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창세기 12:3b)이라고 약속하셨다. 바울 사도도 성도들에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면서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사도행전 20:35)라고 말했다.

 

꽃밭에 넉넉히 물을 주는 사람은 향기를 되돌려 받게 마련이다. 내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하여 목마른 이들을 외면할 때 또 다른 목마름이 찾아온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흘러야 하는 법이다. “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받는다”(잠언 11:27). 사람은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 땀 흘려 수고한 일에 결실이 없다고 낙심할 것 없다. 때가 이르면 결과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기도

 

하나님, 많은 이들이 선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삽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겠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누룩이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심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씨가 세상을 밝히는 꽃으로 피어날 날이 올 것임을 믿습니다. 이런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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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김기석의 새로봄(189)

 

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할렐루야. 내가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모두 깊이 연구하는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 그 하신 기이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다(시편 111:1-4).

 

적대감에 가득 찬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달픈 일이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넋을 놓고 걷다가 느닷없는 크랙슨 소리에 놀라 질겁을 하듯이 언제 봉변을 당할지 몰라 우리는 전전긍긍하며 산다. 얼굴빛 환한 사람 만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다. 함석헌 선생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탄식하듯 말한다.

 

“영웅심에 들뜬 청년/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실망한 얼굴,/병에 눌린 얼굴,/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얼굴> 중에서).

 

참 아름다운 얼굴을 만나야 삶이 바로 선다. 히브리의 시인은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정직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샤르yashar’는 ‘곧다’, ‘옳다’, ‘똑바로 서다’라는 뜻으로 두루 쓰인다. 정직한 이들은 바로 선 이들이다. 내면에 기둥 하나가 들어선 이들이라는 말이다. 기둥이 바로 서면 그 위에 어지간한 무게가 얹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이 그러하다. 김흥호 목사님이 ‘믿음’을 ‘밑힘’이라 해석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아주 길쭉하고 홀쭉한 인물상을 많이 만들었다. 불안과 고독과 취약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궁핍한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물들의 눈빛은 형형하다. 마치 자기 운명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대개 직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큼성큼 걷는 그 인물들은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외롭고 고달프지만 불멸을 지향하는 사람의 존엄함을 본다. 직립한 사람은 아름답다.

 

시인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의 모임에 속한 즐거움이 크다고 고백한다. 그 모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꿈을 간직한 채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크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은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눌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시편 111:3).

 

장엄함에 대한 인식을 잃을 때 영혼은 남루해지고 삶은 왜소해진다. 장엄함 앞에 설 때 인간은 겸손해지고 심성은 확장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그의 처소에는 권능과 즐거움이 있다”(역대상 16:27). 주님 앞에 머물 때 푸석푸석하던 삶이 단단해진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밀려드는 일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우리는 떠밀려 가듯 시간 속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시선, 적대적인 시선을 만날 때마다 우리 가슴에는 퍼런 멍이 들곤 합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장엄한 위엄 앞에 서겠습니다. 내면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 하나 세우고 살겠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삶의 꿈을 나눌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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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김기석의 새로봄(188)

 

늘어난 제단에서 죄가 늘어난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 수만 가지 율법을 써 주었으나,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여겼다.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짐승을 잡아서 제물로 바치지만, 그들이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먹는 고기일 따름이다. 그러니 나 주가 어찌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겠느냐? 이제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그들의 허물을 벌하여서, 그들을 이집트로 다시 돌려보내겠다.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 유다 백성이 견고한 성읍들을 많이 세웠으나, 내가 불을 지르겠다. 궁궐들과 성읍들이 모두 불에 탈 것이다(호세아 8:11-14).

 

예언자들의 말은 거칠다. 사람들의 안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폭풍이다. 느른한 행복을 구하는 이들의 일상을 괴롭히는 소음처럼 들린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그렇기에 예언자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환영은커녕 박해를 받기 일쑤이다. 예언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이다. 가까운 이들조차 그들에게 등을 돌릴 때가 많으니 말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예레미야 20:8b)라고 탄식했다. 탄식하면서도 그 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억센 힘에 사로잡힌 자들이기 때문이다.

 

호세아는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이들이 만든 세상에 분노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정언명령은 기각되었다. 사람들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언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엄중한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스라엘이 바람을 심었으니, 광풍을 거둘 것이다. 곡식 줄기가 자라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 리 없다. 여문다고 하여도, 남의 나라 사람들이 거두어 먹을 것이다”(호세아 8:7).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신 데 그럴 리 없다고 믿는다. 신실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자의적 신앙일 뿐이다. 믿음이란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바치는 일이다. 스스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등지는 이들이 많다. 이 전도된 현실이 한국교회 개신교회의 자화상이다.

 

예언자의 말은 가차 없다. “에브라임이 죄를 용서받으려고 제단을 만들면 만들수록, 늘어난 제단에서 더욱더 죄가 늘어난다”(호세아 8:11). 두려운 말씀이다. 교회가 늘어날수록 죄가 늘어난다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생각이 없다면 번다한 예배가 무슨 소용인가?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을 드리고, 더러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께 가증하게 보일 수도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이스라엘이 궁궐들을 지었지만,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를 잊었다”(호세아 8:14a).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이 죄가 아니던가. 다 잊어도 잊지 말아야 할 것,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두렵고 떨림으로 기억할 때 죄의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가지 않는다.

 

*기도

 

하나님, 도심의 밤거리 어디에서나 붉은색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십자가를 보며 평안과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공동묘지를 떠올리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단이 늘어날수록 죄도 늘어난다는 말씀이 예리한 통증이 되어 우리를 찌릅니다. 욕망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꿈을 품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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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뭄을 겪으며

김기석의 새로봄(

 

인생의 가뭄을 겪으며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환난을 당할 때에 구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행하시고, 하룻밤을 묵으러 들른 행인처럼 행하십니까? 어찌하여,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처럼 되시고, 구해 줄 힘을 잃은 용사처럼 되셨습니까? 주님, 그래도 주님은 우리들 한가운데에 계시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이 아닙니까? 우리를 그냥 버려 두지 마십시오.(예레미야 14:7-9)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고 제 고집대로 살던 백성들, 죄악에 익숙해져서 선을 행할 줄 모르는 백성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극심한 가뭄을 내리셨다. 백성들은 기력을 잃은 채 땅바닥에 쓰러져 탄식하고, 땅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땅에서는 풀조차 돋아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동안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도도하게 살아왔지만, 하나님이 잠시 은총을 거두시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들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주님, 비록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고발하더라도, 주님의 이름을 생각하셔서 선처해 주십시오. 우리는 수없이 반역해서,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예레미야 14:7)

 

절실한 기도이다. 하지만 이 기도가 진실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삶이 먼저 갱신되어야 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살 권리를 마구 짓밟았던 죄를 회개해야 한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함부로 말했던 죄를 눈물로 씻어야 한다. 남의 골수를 마르게 했던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때때로 고통은 사람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계기가 된다. 버티기 힘든 고통을 겪고 보니 백성들은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살 수 없는 자기의 한계를 직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민족사의 어려운 고비마다 지키시고 건져주신 은혜를 떠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처지에 아랑곳하지 않으시는 것 같다.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마십시오.”

 

80년대에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 절박하게 불렀던 노래가 있다. “우리들에게 응답하소서 혀 짤린 하나님/우리 기도 들으소서/귀 먹은 하나님.” 불경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사 속에는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한 이들의 절규가 담겨 있다. “그래도 당신은 하나 뿐인 늙으신 아버지.” 실낱같은 희망조차 버릴 수 없다.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올 수밖에 없다.

 

그 희망을 품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이 머무시는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맺는 관계 속에, 우리가 섞여 살고 있는 사회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소외시킨 죄를 참회하고, 하나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보인다. 불화와 분쟁을 만드는 호전적인 말들을 그쳐야 한다. 누군가를 없앰으로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망상을 떨쳐버려야 한다. 그때 비로소 인생의 가뭄이 그칠 것이다.

 

*기도

 

하나님, 전도자는 ‘바람 그치기를 기다리다가는, 씨를 뿌리지 못한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가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막연한 기다림, 불모의 기다림이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인생의 가뭄이 찾아왔을 때,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더하여 주십시오. 우리 마음의 지성소를 차지하고 있는 헛된 것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게 해주십시오.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을 소외시키는 일이 없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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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는 끝나고

김기석의 새로봄(187)

 

잔치는 끝나고

 

벨사살 왕이 귀한 손님 천 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과 더불어 술을 마셨다. 벨사살 왕은 술을 마시면서 명령을 내려서,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였다.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모두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할 참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들을 꺼내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다니엘 5:1-4)

 

벨사살 왕은 바벨론 제국의 쇠퇴기에 등장한 사람으로, 그 이름은 ‘벨이시여, 임금을 지키소서’라는 뜻이다. ‘벨’은 바벨론의 최고신인 마르둑의 다른 이름이다. 벨사살은 어느 날 제국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귀한 손님 천명을 불러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거나해져 기분이 한껏 고조된 벨사살은 자기 위세를 만방에 과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선왕인 느부갓네살이 전쟁 중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그릇과 은그릇들을 가져오라고 지시했고, 거기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힘에 대한 과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약소국에 대한 조롱인 동시에 야훼에 대한 모독이었다. 스스로를 전능자로 인식하는 이의 부박함이여!

 

가장 거룩한 일을 위해 구별했던 성전 기물을 술자리의 여흥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이 야훼에 대한 모독과 조롱인 것은 그들이 한 다음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다니엘 5:4) 그들은 바벨론 제국과 그 신들의 우월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순간 흥겹던 잔치는 공포로 변하고 말았다.

 

갑자기 사람 손 하나가 나타나더니 촛대 앞에 있는 왕궁 석고 벽 그러니까 모두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제국의 모든 지혜자들이 그 글씨를 해독하려고 애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이것은 제국이 자랑하던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오직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인 다니엘만이 그 글씨를 해독할 수 있었다. 다니엘은 기록된 글자가 ‘메네 메네 데겔’과 ‘바르신’(5:25)이라고 말하며 그 뜻을 풀어준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임금님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데겔’은, 임금님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바르신’은 임금님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다니엘 5:26-27)

 

사실 ‘메네’ ‘데겔’ ‘바르신’이라는 글자 속에 그렇게 심오한 뜻이 담겨 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다니엘이 암호화된 단어를 그렇게 해석했을 뿐이다. 성경은 바로 그 날 밤에 벨사살이 살해되고, 메대 사람 다리우스가 그 나라를 차지하였다고 전한다. 흥겨운 잔치, 벽에 쓰인 글씨, 심판 예고, 심판의 실현이라는 사건의 흐름이 이렇게 신속할 수가 없다. 과시적인 소비, 흥청망청, 경외심이 없는 삶의 결국은 파멸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인상 깊게 들려줄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도

 

하나님, 가끔은 자기 권력을 과신한 나머지 하나님을 모독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의 버릇입니다. 권력의 들큼함에 취하면 실상을 볼 수 없습니다. 독선과 오만에 빠진 권력은 하나님의 주권을 넘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어진 인생의 순간순간을 삼가는 마음으로 살게 해주시고, 우리에게 위임된 힘과 권력을 오직 사랑과 정의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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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권력의 몰락

김기석의 새로봄(186)

 

오만한 권력의 몰락

 

르호보암 왕은 부왕 솔로몬이 살아 있을 때에, 부왕을 섬긴 원로들과 상의하였다. “이 백성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경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이 백성의 종이 되셔서, 그들을 섬기려고 하시면, 또 그들이 요구한 것을 들어 주시겠다고 좋은 말로 대답해 주시면, 이 백성은 평생 임금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원로들이 이렇게 충고하였지만, 그는 원로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기와 함께 자란, 자기를 받드는 젊은 신하들과 의논하면서, 그들에게 물었다. “백성들이 나에게, 부왕께서 메워 주신 멍에를 가볍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소. 이 백성에게 내가 어떤 말로 대답하여야 할지, 그대들의 충고를 듣고 싶소.” 왕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백성은,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메우신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고, 임금님께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이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내 새끼 손가락 하나가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다. 그러나 나는 이제 너희에게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겠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너희를 쇠 채찍으로 치겠다’ 하고 말씀하십시오.” 왕이 백성에게 사흘 뒤에 다시 오라고 하였으므로, 여로보암과 온 백성은 사흘째 되는 날에 르호보암 앞에 나아왔다. (열왕기상 12:6-12)

 

왕위를 계승한 르호보암은 두렵고 떨렸을 것이다. 통치 경험은 전무하고, 다스려야 할 나라는 컸다. 어느 날 여로보암을 대표자로 한 북부 지파 동맹 사람들이 세겜에 있는 왕을 찾아왔다. 그들은 솔로몬이 백성들에게 부과했던 세금과 노역이 너무 과중하여 견딜 수 없으니 그 멍에를 가볍게 해달라고 청했다. 솔로몬 시대의 영화로움은 백성들의 희생을 통해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황한 르호보암은 먼저 선왕과 함께 나라를 일으켜 세웠던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한다. 그러자 그들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고언한다.

 

 

 

 

 

원로들은 이미 특권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기는 했지만, 아직 출애굽 정신을 다 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왕에게 주어진 권한은 백성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일이라는 사실, 백성들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백성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점잖게 일깨워준다. 하지만 르호보암은 그 충언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벗들에게도 충고를 구한다. 성서 기자는 그 젊은 관료들이 누구인지를 두 가지 말로 표현한다. “그와 함께 자란”, “그를 받드는.”

 

그들은 왕실 가까이에 머물면서 온갖 특권적인 삶을 누려온 이들이다. 또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는 길임을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다.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과중한 조세 부담에 허리가 휜 민중들의 처지를 알 리가 없다. 그들에게 세상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로 나뉠 뿐이다. 르호보암은 백성들의 말을 듣다가는 통치를 할 수 없다면서 그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는 그 젊은이들의 조언을 달콤하게 들었다. 몰락은 그렇게 시작된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남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이다.

 

르호보암은 고통을 호소하며 부담을 경감시켜달라는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그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저 아래 땅의 사람들이 겪는 삶의 애환이 보이지 않는 법이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불의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세상과 연루되는 것을 꺼리지 않는 분이시다. 성육신의 신비는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가르쳐준다. 르호보암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이전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메우고, 쇠 채찍으로 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멍에’와 ‘채찍’이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은 출애굽 정신에 대한 부정의 상징이 아닌가. 어느 사이에 이스라엘은 새로운 애굽이 되고 만 것이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면서 멍에와 채찍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르호보암은 자기에게 위임된 권한이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임을 잊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오만한 권력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결여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열어주십시오. 아름답고 장엄해 보이는 것들 속에 깃든 약자들의 피와 눈물과 한숨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특권의 포기야말로 공동체를 든든하게 떠받치는 기둥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쓴 소리보다 단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 역사를 혼돈 속으로 밀어넣었던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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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을 견주지 말라

김기석의 새로봄(185)

 

 

소명을 견주지 말라

 

베드로가 돌아다보니,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의 가슴에 기대어서, “주님, 주님을 넘겨줄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이 제자를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이 믿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한다.(요한복음 21:20-25)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내 양떼를 먹여라’, ‘나를 따라라!’ 하고 명령하셨다. 20절은 ‘베드로가 돌아다보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나를 따라라!” 하는 명령과 “돌아다보니”라는 단어가 묘하게 엇갈리고 있다. 따르기 위해서는 부르신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뒤를 돌아본다. 어쩌면 이게 연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를 흘낏 바라보고는 주님께 묻는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천박한 호기심이다. 다른 사람의 소명과 나의 소명을 견줘보고 싶어 하는 이 마음이 유혹의 뿌리이다.

 

자기와 다른 이를 비교하는 순간 원망과 시샘이 나온다. 주님은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베드로를 책망하시고는 재차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요한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그는 신실한 복음의 증인이 되었고, 그 복음의 기록자 역할을 잘 감당했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면서 몸에 있는 다양한 지체가 하는 일이 다 다르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부름 받는다(에베소서 4:11). 역할에 경중은 없다. 모두가 다 소중한 일들이다. 각자가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든든히 세워진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값비싼 은총보다 값싼 은총을 좋아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그런 값싼 은혜를 맹렬히 비판한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이고,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그렇다면 값비싼 은총이란 무엇인가?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요,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디트리히 본회퍼 묵상 52>, 이신건 편, 102-3쪽)

 

값싼 은혜에 중독된 이들은 따라야 할 분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길을 잃을 때가 많다. 주님은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우리보다 앞서서 가고 계시다.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있는 곳, 그곳에 갈 때 우리 신앙의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남이 어떻게 하는 가 눈치 볼 것 없다. 각자 자기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게 중요하다.

 

*기도

 

하나님, 주님을 등지고 떠났던 제자를 지싯지싯 찾아오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는 예수님의 그 끈질긴 사랑에 우리는 할 말을 잊습니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이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셨기에 버리지 않으실 줄 믿습니다. 가끔은 유난히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가장 무거운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부여하셨음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남과 비교하며 일희일비하지 말게 하시고, 끈질기게 소명을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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