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고맙습니다, 잘 견뎌주셔서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하박국 3:17-19)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코로나 단계적 완화 조치가 시행된 첫 주입니다. 뭔가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만, 마냥 즐거워할 수만도 없습니다. 여전히 코로나 확진자는 줄어들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저는 코로나19가 몰락을 향해 가는 우리 문명을 향해 하나님이 보내신 멈춤신호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더 큰 세계를 상상하는 걸 포기한 채 소비사회의 논리를 횡단하는 일에 몰두하는 교회에 대한 경고라고도 말했습니다. 섣부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코로나19를 문명사적 전환의 계기로 삼지 않는다면 인류는 재앙적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음식 배달이 줄었다지요? 반면 식당은 상당히 붐빕니다. 사람들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백신 접종 유무와 관계없이 좌석수의 50% 정도의 회중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칸 띄어 앉아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 공동식사는 할 수 없지만 잠깐 동안의 소모임은 허용된다고 합니다. 도무지 모일 수 없었던 시절에 비하면 아주 많은 가능성이 우리 앞에 열린 셈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최선을 다해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들도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을 느낀다든지, 많은 사람이 모인 장소에 다녀오신 분들은 영상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열린 기회의 문이 다시 닫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후면 벌써 입동입니다. 가을의 끝자락에 겨울이 들어서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가을 내내 정신적 여백 없이 지냈습니다. 딱히 할일이 많았다기보다는 그저 뭔가에 붙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인들이 단풍 든 산 사진을 올리거나,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올린 것을 보면서 함께 즐거워하기도 했지만,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저의 뿌리 깊은 버릇이 스스로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내에게 통보하듯 “나 오늘 산에 갈 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생급스런 남편의 선언에 아내는 잠깐 놀란 눈을 하더니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사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저는 월요일이면 거의 무조건 산에 올라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루틴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에게 바위 타는 것을 가르치면서 동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산에서 사고를 당하고, 그 부상의 후유증 때문에 시달리면서부터 산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늘 둘이 함께 다니던 산에 혼자 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다보니 등산화는 다 낡아졌고, 그 때 입었던 등산복도 얼추 사라졌습니다.

장 안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배낭을 꺼내고, 입을 만한 옷을 찾아내고, 아내가 얼마 전에 사 둔 스틱까지 챙겼습니다. 보온 도시락에 점심까지 담고 나니 소풍을 가는 것처럼 설렜습니다. 혼자 가야 한다는 것이 조금 쓸쓸하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집을 나섰습니다. 오랜만의 산행이니 무리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구기동 계곡을 들머리로 하여 사모바위와 승가봉을 거쳐 대남문에서 구기동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으로 대충 밑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산은 정말 한산했습니다. 노랗고 붉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습니다. 오래 전 여름이면 찾아가 그 그늘 아래 머물곤 하던 귀룽나무는 벌써 잎을 다 떨군 채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물소리는 고요했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낙엽이 우수수 쏟아졌습니다. 졸가리 사이를 파고드는 햇살은 맑고 깨끗했습니다. 바닥에 깔린 갈참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신갈나무 잎 위를 걸을 때 자박자박 나는 소리가 가만가만 제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습니다.

승가사 입구에 잠시 앉아 다리쉼을 했습니다. 여느 때 같으면 꽤 많은 이들이 북적거리는 자리인데, 그날만큼은 저의 독차지였습니다. 한참을 그 호젓한 고요 속에 머물렀습니다. 산길을 걷다 보니 다 잊은 줄 알았던 산 모양, 바위 형태, 길의 굴곡 등이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산은 늘 그곳에 있으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그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모바위 앞에 군락을 지어 피어나던 쑥부쟁이도 일부 남아 나를 반겨주었습니다. 승가봉 위에 서서 바라본 북한산 연봉이 장관이었습니다. 가을색으로 물들어 가는 산에 한동안 취해 있었습니다. 대남문 근처에서 한적한 자리를 찾아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돗자리도 챙기지 못해 바닥에 놓고 먹었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 어디선가 낑낑 거리는 소리가 들려 둘러보니 개 여섯 마리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였을 겁니다. 유기견들이 산에 머물며 야생화 과정을 걷는다는 보도가 떠올라 약간의 경계심이 발동되더군요.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개들도 순순히 물러났습니다.

하산하려고 생각하니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더 걷다가 정릉계곡으로 내려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걷다보니 만경대, 노적봉, 인수봉, 백운대 연봉을 가까이서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하얀 화강암 바위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웅장해집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결국 백운대에 이르렀고, 그 때쯤에는 무릎과 고관절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태극기 깃대 아래 서서 사진도 한 장 찍었습니다. 조심조심 바윗길을 내려와 위문 근처에서 잠시 쉬었다가 북한산 탐방로 방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면서 힐끔힐끔 인수봉을 바라보았습니다. 직벽에 매달려 정상을 향해 천천히 조심스럽게 올라가는 이들이 보였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암벽등반을 다시 시작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이내 떨쳐버렸습니다. 산기슭에 다가올수록 단풍나무 붉은 잎이 더욱 선명한 색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탐방로 입구에서 전철을 타는 곳까지 내려오는 길이 조금 길어 지루한 듯 했지만, 산이 준 늡늡한 마음 덕분에 기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올 가을 들어 제가 누린 호사를 자랑하느라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영문 모를 억울하다는 느낌을 씻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설악산 공룡능선을 걸었거나, 한라산, 지리산, 월악산, 두타산, 소백산 같은 산을 다녀오신 분들에게 부탁합니다. 북한산 정도 걸었다고 자랑질이냐고 하지 마십시오. 제게는 나름의 최선이었습니다. 교우들과 어울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걷는 시간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지금 우리는 매우 중대한 역사적 고빗길에 서 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그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기후변화협약당사국총회(COP26)는 지금 지구가 직면하고 있는 환경 위기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전 지구적인 대책 마련을 위한 안건들을 논의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국제사회에서 책임적인 일원으로 동참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대통령의 연설문 일부입니다.

“한국은 오늘 2030 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 상향을 공식 약속합니다. 2018년 대비 온실가스를 40% 이상 감축하는 것입니다. 짧은 기간에 가파르게 감축해나가야 하는 매우 도전적인 목표입니다. 30%의 메탄 감축 방안도 포함했습니다. 한국은 ‘국제메탄서약’에 동참합니다. 한국의 성장 경험을 살려 개도국의 저탄소 경제 전환을 돕는데도 적극 협력하겠습니다. 녹색기후기금과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를 통한 기후 재원 지원을 계속하고, ‘기후기술센터 및 네트워크’를 통해 녹색기술 분야의 협력을 확대하겠습니다. 그린 뉴딜 ODA(*공적개발원조)를 늘리고, P4G(*녹색성장과 글로벌 목표 2030을 위한 연대)의 민관 파트너십을 통한 지원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한국은, 기후 행동이 어떤 경우에도 온실가스 증가를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는 환경 건전성의 정신을 지지합니다. 또한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한 나라로서 선진국들이 바라는 ‘감축’과 개도국들이 바라는 ‘적응과 재원’이 균형적인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적극 기여하겠습니다. 오늘 ‘행동과 연대’의 약속으로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울창한 숲과 맑은 강물이 미래세대와도 대화를 나누길 바랍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한국은 항상 함께할 것입니다.”

여기 굳이 이 연설문을 인용하는 까닭은 이런 공약이 말뿐인 공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라도 기어코 도달해야 할 최소한의 목표입니다. 정부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소명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정치, 문화, 사회, 종교 등 모든 부문에서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해왔습니다. 생명과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명 중심적 사고로 전환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시대에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돌아오는 주일은 우리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사람마다 소회가 다를 것입니다. 절망의 심연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도 있고, 힘겹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만 하니 다행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우리가 꿈꾸고 바랐던 일이 다 잘 될 때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렁 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현실 속에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기꺼이 몸을 낮추는 이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렇게라도 견디며 사는 것은 그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격절감과 고립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지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내면 깊은 곳에서 힘이 솟아오릅니다. 여러분들이 제게 문자 메시지나 메일을 통해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는 소감을 보내주셨습니다. 어느 한 분도 그늘이 없는 밝음만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늘 속에서 밝음을 지향하는 삶의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잘 견뎌주셔서. 우리가 함께여서 참 다행입니다. 이제 곧 찬 바람이 불어오겠지요? 참 사람의 온기가 그 어느 때보다 그리운 시절입니다. 주님을 모셨으니, 누군가의 시린 마음을 감싸는 이불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모든 교우님들의 삶에 빛이 되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21년 11월 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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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 불붙은 사람



“그는 천사들의 노래를 듣고 황홀해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에 아찔하도록 현기를 느끼며, 창조의 오묘함을 보고 말을 잃고, 하늘의 자비를 두고 노랫가락을 읊은, 하나님으로 불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어떤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다.”(롤런드 베인턴, <마르틴 루터>,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p.30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가득한 나날입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도 가끔은 먼 산도 바라보고, 하늘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땅만 바라보며 살면 시야가 협소해지고 감정이 메말라가기 쉽습니다. 먼 데 눈길을 줄 때 중력처럼 우리를 잡아당기는 잡다한 일들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앞으로 나아감과 뒤로 물러남의 통일이었습니다. 주님의 활동의 비밀은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막 1:35)라는 말씀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개역 한글 성경은 ‘아주 이른 새벽에’라는 구절을 ‘새벽 오히려 미명에’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새벽’과 ‘미명’ 사이에 틀어박힌 ‘오히려’라는 부사가 낯섭니다. ‘오히려’는 “생각한 바와는 달리 도리어”라는 뜻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낯섦이 묘한 맛을 냅니다.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어떤 예외적 행동을 예상하게 됩니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그 시간은 뭔가 새로운 것이 도래할 것 같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외딴 곳이 숲이라면 오직 새들의 지저귐이 새벽의 고요함을 깰 것이고, 광야라면 바람 소리만이 귓전을 스칠 것입니다.

아,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갈릴리 호숫가에서 맞이한 새벽 시간이 떠오르는군요. 몇 해 전 교우들과 ‘성서의 땅 답사 여행’ 중 잠시 머물렀던 갈릴리 숙소에서 호수는 불과 몇 십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대추야자가 지붕 위로 후둑후둑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룬 분도 계셨습니다. 아주 이른 새벽 저는 호숫가로 나가 누군가 내놓은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찰랑거리는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호수에 배를 띄우고 언덕에 앉은 사람들에게 가만가만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큰 물결이 일어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을 향해 물 위를 걸어가시던 주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갈릴리로 돌아와 밤새 그물을 던졌으나 빈 그물만 건져 올린 제자들의 쓸쓸함도 짙게 느껴졌습니다. 아주 고요하게 찰랑대며 기슭으로 밀려오는 물소리가 마치 제자들의 수런거림처럼 들렸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스산할 때면 그 호숫가에서 맛보았던 고요함이 그리워집니다. 아, 그리고 갑자기 물이 흔들리면서 수달처럼 보이는 동물이 나와 내 곁을 재빠르게 스쳐지나가던 광경도 떠오르네요. 교우들과 함께 성서의 장소들을 다시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엊그제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심방 차 간 것이지만 오가는 길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활짝 핀 억새가 바람을 맞아 나붓거리고 있었고, 아직 베지 않은 벼들도 추수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고구마를 수확한 농부들이 박스에 고구마를 담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미 말라버린 고춧대에 붉은 고추가 달려 있었습니다.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병이 들어 수확을 포기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일정이 있어 가을 풍경을 더 눈에 담지 못하고 황급히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분주함은 우리 삶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경제적 빈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서적 빈곤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아름다움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반이며 형인 시인 고진하 목사가 얼마 전 <야생초 마음>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강연 차 서울에 올라온다 하여 인사동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값도 형이 냈습니다. 얼마 전 박인환 문학상을 받았는데 상금이 꽤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흔쾌히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가 제게 건네준 책은 참 예뻤습니다. 스물 네 개의 야생초에 얽힌 이야기를 다각도로 들려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이 더욱 빛난 것은 그의 딸인 화가 고은비가 정성을 다해 그린 들풀 그림 때문이었습니다. 화가는 각각의 식물들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발견하기 위해 발품을 팔고, 그것을 꼼꼼히 살펴보고 만져보면 저절로 뭘 그려야 할지가 떠올랐다고 말합니다. 그림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저자는 “지구의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 자기 존재를 아낌없이 선물로 내어주는” 그 식물들을 일러 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텃밭에서 새싹을 틔우는 생명의 기척을 내 몸을 낮춰 주의 깊게 바라보는 일, 꽃몽우리가 열린 후 씨앗으로 여물기까지의 수고로운 과정을 지켜보며 박수를 보내는 일. 그렇다. 지구별 위에서 공생한다는 것은 그렇게 너와 나를 살피고 응원하는 일. 그런 알뜰살뜰한 살핌과 응원은 결국 너와 나를 살게 하는 에너지원이 아니던가. 이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식물도 오감五感을 통해 더불어 살아가는 인간의 섭생을 살피고, 무심한 듯한 자비로 지구라는 광대한 몸의 세포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며 그 창조적 자발성을 발휘하지 않던가.”(고진하 글/고은비 그림, <야생초 마음>, 디플롯, p.8-9)

 

 


일을 하다가도 책상 위에 놓인 그 책을 무심코 집어 들어 이곳저곳 들춰보다보면 “대지의 미소인 꽃들처럼 ‘쉴 새 없이 명랑하자!’고” 사람들을 꼬드기는 그의 마음이 떠올라 저절로 흐뭇해집니다. 각박한 세상에 ‘쉴 새 없이 명랑하자’고 말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날마다 징징대며 살자고 말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좋습니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에 가득 찬 신비와 기적을 보지 못하기에 그들은 빈곤합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의 허기증에 시달립니다. 밑 빠진 독에 아무리 물을 부어도 채울 수 없습니다. 바닥짐(ballast)이 없으면 배는 작은 파도에도 일렁입니다. 옆질과 키질을 견디지 못할 때 배는 좌초되기 쉽습니다. 마음의 바닥짐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한 일에도 화를 벌컥 내고, 작은 차이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통제하지 못하기에 실수 연발입니다. 능숙한 뱃사람이 넘노는 파도를 타고 가야 할 목적지로 나아가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은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인생의 파도를 타고 나아갑니다.

이번 주일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성채 교회 문에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의 신학 논제를 게시했습니다. 루터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의 행동이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예측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알았더라면 그런 싸움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지만 때로는 ‘모름’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습니다. 베이징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임으로 뉴욕에 폭풍우가 몰아칠 수도 있다지요? 이것은 물론 극단적인 예이긴 합니다만, 세상의 모든 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으로 새겨도 될 것입니다. 95개 반박문의 제1조는 의미심장합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하신 것은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서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어찌 보면 평범한 듯 보이는 명제입니다. 그러나 이 선언을 관통하고 있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신자의 전 삶이 돌아선다는 것은 욕망에 휘둘리던 옛 삶과 결별한다는 말입니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은 시스템으로서의 종교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과 지향의 변화가 더 근원적입니다. 물론 제도 혹은 형식이 내용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에 제도를 바꾸는 것도 중요합니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대가 찢어지기 쉽습니다. 각 교단이 보고한 통계를 보면 신자들의 수가 해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파른 하락세가 심각할 정도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과연 교회의 미래가 있겠느냐고 우려 섞인 음성으로 묻습니다. 신학교는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은 기회의 시간입니다. 비본래적인 것들을 덜어내고 본래적인 가치를 확고하게 붙들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요? 가을이 깊어가면서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집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나무는 졸가리만으로 겨울을 견딥니다. 잎이 진 후에야 우리는 나무의 상처와 옹이를 살피게 됩니다. 상처는 나무가 견뎌온 세월의 풍경입니다. 고급 가구를 만들 때 귀하게 쓰이는 먹감나무 무늬는 안으로 스며든 나무의 상처입니다.

지금 교회의 내상이 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나 예수 정신을 저버린 목회자들로 인해 세상이 소란스럽습니다. 교회에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아 암담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00년 동안도 교회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앞을 향해 전진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까지도 받아들여서 당신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릇된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동시에, 바른 것을 옹골차게 붙드는 것입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쓸데없는 싸움에 힘을 다 빼느니 차라리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창의적 노력을 하는 게 낫습니다.

이제 서서히 기지개를 펴야 할 때입니다. 절망의 말, 비평의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용감한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멋진 일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정과 환대의 공간을 넓히고, 하늘빛을 이 눅진눅진한 일상 속에 끌어들이는 일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이들의 소명이 아닐까요?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계신 분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용감하게 주님을 신뢰하며 생명과 평화의 씨를 뿌리며 사십시오.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2021년 10월 2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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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을 함께 본다는 것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을 네게 들려주고 싶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동해야 할 때이다. 에너지가 차올랐다. 그러니 쟁기를 손에 잡아라. 우리는 강해짐으로 강해질 수 있고, 믿음으로 믿음을 배울 수 있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배울 수 있다.”(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서, Carol Berry, <Vincent van Gogh>, His Spiritual Vision in Life and Art, Orbis, p.68)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10월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계절은 벌써 상강(霜降)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교회에 작은 국화 화분 12개를 보내주셔서 현관 앞에 두었습니다. 국화가 외로울까봐 가끔 밖으로 나가 눈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슬그머니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지나치게 화려하여 눈길을 끌지도 않고, 수수한 듯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국화꽃이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크고 좋은 국화 화분을 장만하여 교우들 맞을 생각입니다. 화단에 있는 양달개비는 때를 잊었는지 새로운 꽃을 피웠다 지기를 반복하고 있고, 꽃댕강나무도 여전히 꽃을 피워 향기를 내뿜고 있습니다. 지난 6월경부터 예쁘게 피기 시작한 일일초는 조금 기운이 약하여지긴 했지만 며칠마다 새로운 꽃을 피워내며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꽃 시절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안간힘을 다하여 꽃을 피워올리는 나무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월요일, 교우 아버님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전에 다녀왔습니다. 창밖으로 산을 내다보며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단풍의 시간은 다가오지 않았는지 산은 아직 형형색색으로 물들지 않았더군요. 추수를 이미 끝낸 논도 보였고, 가지런하게 서 있는 벼포기가 바람에 일렁이는 논도 보였습니다. 길가에 선 은사시나뭇잎이 오가는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빈소는 대개 슬픔의 공간이지만 늘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고인이 아름다운 인생을 사셨고, 가족들의 우애가 깊을수록 빈소는 따뜻한 공감과 사랑이 깃드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왠지 가을산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에 인근에 있는 계족산을 찾아 한 시간 정도 황톳길을 걸었습니다. 검은 양복에 구두를 신고 있었지만 마음은 사뭇 유쾌했습니다. 흙을 느껴보고 싶어 맨발로 황톳길을 조금 걸었습니다. 발은 아리도록 시렸지만 흙이 주는 탄력을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월요일이면 가까운 산에 오르곤 했습니다. 월요일에는 아예 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산을 향하는 발걸음이 뜸해졌습니다. 주중에는 시간을 토막을 내 사용해야 하기에, 옹근 시간을 들여서 해야 할 일은 늘 월요일로 미루곤 했던 것입니다. 일단 그런 일이 습관이 되자 더러 일정이 비어 있는 날에도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갈 생각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산에 가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SNS에 올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얼마 전 설악산 공룡능선을 걸으며 찍은 교우의 영상을 보며 ‘와우, 와우’ 감탄사만 터뜨렸습니다. 절경 앞에 서면 사람은 말을 잊게 마련입니다. 아름다움 앞에 설 때 사람은 오염된 말을 버리고 침묵 속에 젖어듭니다. 정화의 시간입니다. 땀 흘림이 없다면 그런 체험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영상을 보다가 문득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방문했던 지리학자의 별이 떠올라 쓰디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별은 어린왕자가 지구에 오기 바로 직전에 들렀던 곳입니다. 어린왕자가 그 별에 도착하자 책상 위에 커다란 책을 펼쳐놓고 있던 늙은 신사가 그를 맞아줍니다. 그는 어린왕자에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묻고는 자기를 지리학자라고 소개합니다. 지리학자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바다와 강과 도시와 산 그리고 사막이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린왕자가 그 별에도 강이나 산 그리고 사막이 있냐고 묻자 지리학자는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자기는 탐험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걸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탐험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기억이 진실하다는 판단이 들 때면 기록하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현실과 학자적 거리를 두고 사는 판단 강박증 환자입니다. 


학자다운 호기심을 품고 그는 어린왕자의 별에 대해 묻습니다. 어린왕자가 자기 별은 아주 작다면서 그 별에는 불이 있는 화산이 둘이 있고 불이 꺼진 화산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꽃 한 송이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지리학자는 자기는 꽃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니, 왜 그 예쁜 것을 기록하지 않냐고 묻자 그는 꽃이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자기는 영원한 것, 변치 않는 것만 기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왕자가 덧없다는 게 뭐냐고 묻자 지리학자는 “그것은 ‘머지않아 사라져버릴  위험이 있다'는 뜻”(앙투안 마리 로제 드생텍쥐페리, <어린왕자>,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p.80)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어린왕자는 갑자기 우울해집니다. 세상에 맞서서 자기를 보호할 수단이라곤 가시 네 개밖에 없는 꽃을 홀로 두고 왔다는 자책감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는 슬그머니 덧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새별오름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만 소중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견고한 토대가 되어줍니다. 하지만 작고 여려 언제라도 소멸할 수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둘 때 우리는 비로소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날이 차갑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 산이나 강가에 있는 나무에 서린 상고대를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앞에 서면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 해도 신비감에 사로잡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상고대를 사시사철 볼 수 있다면 그 감성이 살아날 리 없습니다. 쉬 스러지는 것이기에 더욱 애틋한 눈길을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노래로 알려진 아가(雅歌)에 나오는 사랑의 노래가 떠오릅니다.


“나는 임의 것, 임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 임이여, 가요,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나무 숲 속에서 함께 밤을 보내요. 이른 아침에 포도원으로 함께 가요.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이 피었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함께 보러 가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임에게 드리겠어요.”(아 7:10-13)


작고 여린 것,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본다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자기에게 골몰하던 삶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에 눈길을 주는 순간 나와 타자를 가르는 담장들이 무너지고 잠시나마 하나 됨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쓸모와 유용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늘 우리의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지만,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긴장에서 벗어나 홀가분함을 느낍니다.


벌써 몇 해가 흘렀군요. 이맘때면 우리는 가을 기차 여행을 하거나, 한적한 곳으로 소풍을 떠나곤 했습니다. 설렘으로 가득 찼던 교우들의 표정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함께’라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습니다. 마을 고샅길을 천천히 걸으며 꽃들에 눈길을 주기도 했고, 산길을 걸으며 식물들의 이름을 익히기도 했습니다. 소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 밝았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간간이 끼어드는 예배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어느 동시에서 본 구절입니다만 우리는 ‘나무의 웃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리운 시절입니다. 이제 다시 그럴 때가 곧 오겠지요? 올해는 모두 함께 그런 시간을 누릴 수는 없지만, 일부러라도 시간을 마련하여 한적한 곳을 찾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멋진 숲길을 걸을 때 저를 초대해주셔도 좋겠습니다.


교회의 영상장비와 조명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위드 코로나 시대가 열린다 해도 예배 영상을 송출하는 일은 중단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또 늘 질 좋은 영상을 접하는 이들은 영상의 품질이 떨어지면 매우 힘들어한다고들 하시더군요. 저는 새로운 물건을 구입하거나 교체하는 일에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모른 체하며 젊은 세대의 말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강대상을 향해 달린 여러 대의 조명 장비가 조금은 낯설 수도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영상에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방송실에서 봉사하는 이들의 수고를 기억하며 사랑으로 격려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분들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11월 첫째 주는 우리 교회가 해마다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마침 그 주간은 위드 코로나로 전환하며 맞이하는 첫 번째 주일입니다. 얼마나 많은 교우들이 예배에 동참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교우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송을 바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힘겨운 일상이 지속되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만 헤아려 보십시오. 나무가 가을볕을 머금어 아름다운 색을 만들듯, 우리도 주님의 빛과 사랑을 받아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모든 가정에 머무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10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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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의 구별법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요일 4:20-2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하루하루 기쁘게 살고 계시는지요?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전 5:20)고 말하지만, 우리는 마치 근심 걱정이 우리 소명인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은 메시야가 우리에게 틈입(闖入)하는 문이라지요? 자잘하기 이를 데 없는 일들도 잘 살펴보면 그 속에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만 분주함에 쫓기느라 그 작고 미묘한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은 ‘지금’을 한껏 누리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제는 제법 가을 기운이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서재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 보면 서늘한 느낌이 들어 무릎 담요를 가져다 덮기도 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가을 날씨가 왜 이리 덥냐고 투덜거렸는데, 이번 주일에는 영상 4도 아래로 내려간다니 건강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올해는 교육관 옆에 있는 대추나무가 해거리를 하는지 열매가 많이 달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대추 수확을 했는데, 나무에서 절반쯤 썩은 것이 많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이걸 잘 말렸다가 송구영신예배 때 차로 만들어 마실 예정입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열매를 거두는 일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며칠 전 성서학당 시청자 한 분이 고향인 부여에 갔다가 주웠다며 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목회실 식구들과 나누며 참 기뻤습니다. 밤을 먹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보내준 분의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알밤을 줍기도 하고, 밤송이를 발로 밟거나 나뭇가지로 발기면서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흥감스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어른들 속에도 아이들이 숨어 있다지요? 가끔은 그 어린아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우리 삶이 건강해집니다. 놀이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개념을 가지고 인간을 파악했습니다. ‘노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근대인들에게 논다는 말은 부정적인 함의를 지닐 때가 많았습니다. 근면과 성실이 근대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일만 하며 살 수 없습니다. 놀 줄 알아야 삶이 주는 긴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놀이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기에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일상의 경험과 구별되기에 비일상적 행위입니다. 불확실성과 우연성이 일으키는 긴장이 묘한 흥분감을 일으킵니다. 잘 놀 줄 아는 사람이 창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저는 어느새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을이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도 저는 여전히 일상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한가한 때가 별로 없지만 어쩌다 몇 시간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지면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서울 밖으로 나갈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벼가 무르익는 논, 갈대나 억새가 흔들리는 개울가나 산야를 그저 상상 속에서만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유목적 삶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정착 생활이 주는 안온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그리고 홀가분하게 떠도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습니다. 떠돎을 꿈꾸면서 집토끼처럼 사는 삶에 대해 비애를 느끼기도 합니다. ‘은총의 숲’ 조성 문제 때문에 몽골에 몇 차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혹독한 추위도 경험해 보았고, 초원을 가득 채운 야생화에 도취되기도 했고,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어진 별 하늘을 보고 감탄한 적도 있습니다. 몽골 유목민들은 유랑과 정착을 반복합니다. 가축들에게 먹일 신선한 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목민들은 이사를 하기 전에 늘 가족과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느 쪽으로 이동할 것인지 의논하는 가족회의를 연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곳, 풀이 무성한 곳, 물이 있는 곳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사 장소를 정하면 책력을 뒤져 길한 날을 확인한다.

유목민의 이사 준비는 게르의 중심인 난로를 해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불을 끈 후 난로를 빼고, 아궁이 굴뚝과 연통을 제거한다. 그 뒤 게르를 둘러싼 세 개의 줄을 풀면 본격적인 게르 해체가 시작된다. 게르를 해체하고 짐을 치울 때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시간 남짓, 언제라도 풀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유목민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이삿짐을 다 싸면 그동안 잘 살았음을 감사하는 마음과, 훗날 이곳에 다시 옮겨올 때 풀이 많이 자라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차나 우유를 하늘에 바친다.”(대구 MBC HD 특별 기획 10부작, <하늘과 맞닿은 바람의 나라 몽골>, 이른아침, p.228-230)

물론 우리가 송창식의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모진 비바람을 맞아도 거센 눈보라가 닥쳐도 입에 피리 하나 물고서 언제나 웃고 다닐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우리 어깨를 짓누르는 일상의 짐들로부터 벗어나 껄껄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잘 놀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루하루 긴장 속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마 6:26, 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장막에 머물며 이런저런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아브람을 장막 밖으로 끌어내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 15: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굳이 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바라봄은 일상 속에 더 큰 생기를 끌어들이는 통로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연휴 중에 공원에 앉아 두 시간쯤 책을 읽었습니다. 카페에 갈 생각이었지만 신선한 바람이 불어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앉은 자리 옆에는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공원을 산책하는 꽤 많은 분들이 인사를 건네고, 또 잠시 그 곁에 머물다 가는 것을 보니, 공원의 단골손님임이 분명했습니다. 누가 다가와도 물리치지 않았고, 간다고 붙잡지도 않았습니다. 맹자에 나오는 "왕자불추往者不追 내자불거來者不拒"의 경지였습니다. 할머니는 사람들이 와서 말을 하면 다 듣기는 했지만 이러쿵저러쿵 대꾸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떠나는 이에게는 ‘잘 가요’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단 종파에 속한 것이 분명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친절한 말투와 몸짓으로 할머니를 설득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내내 침묵 속에 있다가 제풀에 지친 그들이 떠날 때면 ‘잘 가요’ 하고 인사했습니다. 역정(逆情)을 내지 않는 그 평안함이 참 놀라웠습니다. 어떤 인생의 과정을 거쳐 왔기에 그런 내공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사람들을 어떤 냉소도 조롱기도 없이 대하는 이들을 보면 우리 마음도 절로 따뜻해집니다. 거친 말이 넘실거리는 세상에 살기 때문일 겁니다.

오래전에 한 랍비가 자기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밤이 지나가고 낮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제자 한 사람이 “저 먼 데 있는 짐승이 양인지 개인지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는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다른 제자가 말했습니다. “먼 데 있는 나무가 무화과나무인지 복숭아나무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랍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생각은 어떠한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에게서 형제나 자매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때일세. 그럴 수 없다면 그 시간이 언제든 여전히 밤이라네.”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형제나 자매를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따뜻하게 바라본다는 뜻이 아닐까요? 우리는 늘 경계심을 품고 사람들을 대합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생각과 지향이 다른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날카로운 눈빛이나 거친 말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냅니다. 그와 연루되기 싫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난폭함과 뻔뻔함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날 공원에서 저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의 난해한 시를 읽고 있었지만, 정작 제 마음에 더 큰 빛을 던져준 것은 옆 벤치에 앉아계시던 그 할머니였습니다.

정부는 이제부터 서서히 위드 코로나로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상회복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지요? 반가운 소식입니다. ‘일상회복’이라는 말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우리도 다시 대면 예배의 시간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비대면 예배에 이미 익숙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순례자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마당을 비질하고 물을 뿌려 손님을 맞이했던 옛사람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그날을 준비하겠습니다. 몸과 마음 두루 평안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10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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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편지인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모든 이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어렵고 곤고한 시간을 견디고 계신 교우들이 많습니다. 수술을 받고 회복을 기다리는 분도 계시고, 수술을 앞두고 계신 분도 계십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부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시대적 우울감이 우리를 확고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앞날을 기약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우리 어깨를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불안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끈질기고 확고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주님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영원하니, 밤새도록 눈물을 흘려도, 새벽이 오면 기쁨이 넘친다“(시 30:5)는 시편 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한로(寒露) 절기가 다가오는데 여전히 날씨가 덥습니다. 아열대성 고기압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기후 변화는 절기에 대한 우리의 감성조차 바꿔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이들이 코로나 백신 접종을 마쳤습니다. 10월 말부터는 위드 코로나로 전환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습니다. 교회 모임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방침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서서히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모두가 마음을 모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며칠 연속으로 참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교우들이 많이 모여서 애찬을 나누는 꿈이었습니다. 솥에서는 쇠고기뭇국이 끓고 있고, 다양한 음식이 상 위에 차려지고 있었습니다. 시끌벅적한 그 분위기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땅이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는 세상의 쓸쓸함을 안타까워하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회복을 약속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황무지로 변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는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 또다시, 환호하며 기뻐하는 소리와 신랑 신부가 즐거워하는 소리와 감사의 찬양 소리가 들릴 것이다. 주의 성전에서 감사의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찬양할 것이다“(렘 33:10b-11a). 꿈에서도 이 말씀을 떠올리며 홀로 미소를 지은 것은, 일상의 소음이 더없이 그립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저는 문득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래도 되나? 아직은 모임이 금지되어 있는데. 이러다가 누구 한 사람이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을 하다가 깨곤 했습니다. 꿈에서 깨어서도 불쾌하기는커녕 괜히 흐뭇했습니다. 그리고 제 속에 숨겨졌던 그리움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누리지 못하지만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를 절절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부디 이런 날이 속히 우리에게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오징어 게임‘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 속에 반영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매우 부정적이라지요?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서 다른 사람을 밀어트린 후 자신은 살아남았다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사람, 아내를 때리고 딸에게 몹쓸 짓을 한 후에 습관처럼 ‘우리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는 목사, 눈이 가려지고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비 오는 거리에 버려진 주인공을 모두가 외면할 때 그의 안대를 벗겨주며 ‘괜찮으세요‘라고 묻는 대신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을 건넨 거리의 전도자.

벌써 여러 해 전입니다만 영화 ‘밀양‘이 나왔을 때 청년 교사들과 함께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이청준 선생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였습니다. 소설은 기독교인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용서의 문제가 우리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어떻게 작동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작가는 ‘용서하라‘는 말이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애지중지하던 아들 알암이가 참담하게 죽임을 당한 후, 알암이 엄마의 삶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범인은 알고 보니 아이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이었습니다. 알암이 엄마는 그 범인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범인은 오히려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복수의 표적을 빼앗긴 알암이 엄마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주변의 기독교인들이 집요하게 전도를 합니다. 주님께 귀의하지 않으면 그 시련의 시간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알암이 엄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보다 더 열성적인 신도가 되었습니다. 영화는 기독교인들의 집회 모습을 보여줍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 열정적인 설교자 등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어느 날 알암이 엄마는 교인들에게 교도소에 있는 범인을 찾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지만 기어코 그를 만나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은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범인과 마주한 알암이 엄마는 범인의 평온함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전도를 받았고, 주님께 귀의한 후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암이 엄마는 그 범인을 용서한다고 말함으로 그보다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온한 범인의 모습은 알암이 엄마를 내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할 수 있나?‘라는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알암이 엄마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신에 대한 변형된 복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인 이청준 선생은 땅에서 벌어진 일은 땅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애를 써보아도 결국 풀리지 않는 문제는 하나님께로 가져갈 수밖에 없지만요. 영화 ‘밀양‘은 원작의 이 비극적인 결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알암이 엄마의 아픔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한 존재를 통해 새로운 삶을 이어갈 희망의 싹을 암시하며 끝납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들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들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다가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던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찬양 인도자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 사람들 눈에 나도 그들처럼 보이겠거니 생각하니 한 대 맞은 것 같아요.” 찬양 인도자의 열정적인 멘트와 몸짓과 태도는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보면 조금 이상해 보일 법도 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 속에 반영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세속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의 적나라한 모습인 게 분명합니다. 거룩함을 말하지만 가장 세속적이고, 현실에 대해 가장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몽환적 세계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 말입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랭돈 길키가 일본의 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산둥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43년에 중국에 있는 한 기독교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에 머물고 있던 서양인들을 잠재적 위험 요인으로 파악하여 위현(지금의 산둥) 수용소라는 곳에 가둡니다. 그 수용소는 나찌의 수용소나 구 소련의 수용소처럼 학대와 고문이 자행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끼니는 이어갈 수 있도록 음식이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수용소에서는 나름의 수용소 문화가 형성되었고, 때로는 아주 유쾌한 시간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동기로 중국에 와있던 사람들이 비좁은 공간을 공유하다보니 사람들의 특성이 오롯이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곳은 일종의 축소된 인류와 같았습니다. 랭던 길키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서구 사회를 지탱한다고 여겼던 합리성과 공정함의 원리가 자기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속절없이 무너지는지를 여실히 경험했습니다.

그나마 종교인들은 신앙이 없는 이들에 비해 조금은 관대한 태도로 다른 이들을 대했습니다. 그들은 삶에는 뜻이 있다고 믿었고, 그 열악한 상황을 일종의 과제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부와 수사와 수녀들은 수도원 생활의 경험 때문인지 그 공동생활에 잘 녹아들었습니다. 쾌활하고 이타적인 모습을 보였고, 용감하고 강인하게 현실에 맞섰습니다. 그들은 수용소 안에 있는 이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누구하고나 잘 섞였습니다. 술, 도박, 욕설, 음란을 일삼는 사람들까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들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들은 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물리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려고 애를 쓰기는 했지만 여전히 벽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랭돈 길키는 그 경험을 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타인을 도울 수 있는 길은 경건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성이 높은 사람도 변덕스러운 형제를 품을 포용력이 없다면 그를 섬길 수 없다.“(랭돈 길키, <산둥수용소>, 이선숙 옮김, 새물결플러스, p.343) 개신교를 비하하기 위해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정말 요구되는 태도가 무엇인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의 조롱이 아픕니다. 바로 우리들 각자가 일상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 이미지를 바꾸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고후 3:3)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먹물로 쓴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쓴 편지입니다.

이 가슴 벅찬 선언이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홀로는 감당하기 어렵지만 함께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이 멋진 길에서 여러분의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오늘도 내일도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은총의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든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10월 7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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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 60: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걸어오는 동안 젖은 바짓단이 온 종일 축축합니다.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습니다. 이런 날에 듣는 첼로 소리는 더없이 깊은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어지럽지만 가끔은 그런 분잡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이 우리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홍수 통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말이 넘치는 이 시대에 참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고 등장하고, 파렴치함이 정의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 소란 속에서 우리 영혼은 점점 파리해집니다. 넓고 큰 세계에 대한 비전을 잃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지식의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이지만, 영혼의 국량은 점점 협소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 겁니다.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고, 숲을 거쳐온 바람처럼 청량한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 1:8)는 말이 실감납니다. 뭔지 모를 결핍감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말 가운데 제가 늘 명심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도덕경 44장 중).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같은 교훈을 줍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 6:6) 누가 이 말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마모나스mamonas’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아람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물’ 혹은 ‘돈’이라는 단어를 두고 굳이 이 단어를 택하신 것은 ‘맘몬’은 신격화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돈은 우리의 가치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입니다. 거라사의 광인 속에 머물고 있던 군대 귀신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비탈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멈출 수 없음, 그것이 광기의 본질입니다.

족한 줄 모르고 ‘조금 더’ 차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은 망신을 자초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이들은 멈출 줄을 몰라 앞만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위태로움에 빠지곤 합니다. 만족함과 멈출 줄 앎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를 획득한 이들은 거기에 더해 명예까지 얻으려 하고, 더 나아가 권력까지 쥐고 싶어합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무는 지키지 않은 채, 명예라는 폼 나는 지위까지 다 얻고 싶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영리 추구와 양립할 수 없는 지위를 모두 차지하는 순간, 영리 추구와는 양자택일 관계였던 명예는 자본주의 승자의 전리품으로 변화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명예는 승자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되고, 승리하지 못한 자에겐 명예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조건도 제공되지 않는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p.133-134)

이것은 오늘의 현실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자기 시대의 전도된 현실을 함축적인 말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 5:8) 권력자들은 탐나는 밭이나 집이 있으면 주인을 속여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연대의 뜻으로 곡식을 빌려주는 대신 그들은 집이나 밭을 담보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지 못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만들어서 결국은 그 땅과 집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인간의 삶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땅과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변질된 오늘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경고는 참으로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서민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하며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데, 소위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이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예언자의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말도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욕망의 길을 따르다가는 영혼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니까, 어떤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줄일 수 있어요?” 이 질문 속에는 욕망을 줄이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태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일단 “그냥 해보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싱거운 대답에 싱거운 웃음을 지었습니다. 소비자본주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뭔가를 소비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길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욕망이나 취미 더 나아가 생각까지 대중문화와 매체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습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의 허영심을 조장합니다. 소비하지 않음이 죄인 것처럼 우리를 몰아댑니다. 욕망은 발생하는 즉시 실현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가끔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 포도는 셔서 못 먹어.” 정신 승리법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자유로워집니다. 먼저 질문에 대해 제가 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하겠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 속에 결핍감이 큰 것 같습니다. 마음의 스산함을 가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선망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오롯이 누리려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농어촌에 사시는 분들 가운데 이 시대의 지혜자처럼 여겨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제게 배송된 잡지 ‘전라도닷컴‘에서 읽은 이야기가 좋아서 제 수첩에 적어 놓았습니다.

“묵고 사는 것은 힘들어도 콩 하나라도 서로 나놔묵고 살고, 옛날에가 재밌었어. 백원 벌문 천 원 모탤라는 욕심있듯이 인자는 세상이 좀 각박해졌어.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안마도 어부 서용진씨)

“나는 바다가 젤로 재밌어. 그런께 이것 하제. 날마다 하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젤로 행복한 사람이여.“(안마도 어부 김영식씨)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라는 말은 우리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마치 시 구절처럼 여겨집니다. ‘재미난 세상‘은 어쩌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무와 욕망 사이를 오가는 동안 재미는 사라지고 삶은 잿빛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오전에 ‘웨슬리 설교 강의‘를 녹화했습니다. 44편의 설교 가운데 이제 42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전달하는 저의 부족함을 감안하더라도 웨슬리의 설교는 참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나 칼뱅처럼 많은 신학적 저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교 속에는 감리교 신학과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저의 선생님은 설교가 모든 신학을 종합하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말에 가장 부합하는 분이 존 웨슬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론신학과 성서신학, 실천신학과 윤리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설교 ‘자기 부인否認‘에서 웨슬리는 ‘십자가를 견디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을 구별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십자가를 견디는’ 일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온순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참을 때, 그때는 적절하게 ‘십자가를 견딘다.‘고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을 자진하여 감수할 때, 자신의 뜻에 상반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게 될 때, 또한 현명하고 은혜로우신 창조주의 뜻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을 선택할 때, 우리가 적절하게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됩니다.“(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 3>, 조종남·김홍기·임승안 외 공역, 대한기독교서회, p.255-6)

믿음으로 살려는 이들은 십자가를 견디기도 해야 하지만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은 마치 껍질이 깨지는 순간과 마찬가지입니다. 아픔과 충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길 위의 적당한 지점에 멈추어 선 채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것이지요. 잊지 않으셨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해 길 떠난 순례자들입니다. 어렵더라도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늡늡한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경주를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1년 9월 3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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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하는 날, 이날 당신은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항상 더 많이 행하고,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며, 항상 길 위에 있으십시오. 결코 되돌아가지 말고, 결코, 길에서 벗어나지 마십시오.”(안셀름 그린,<길 위에서>, 김영룡 옮김, 분도출판사, p.41에 인용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명절 잘 보내셨는지요? 명절 풍경이 사뭇 달라졌다고 하더군요. 고속도로를 가득 채운 차량의 행렬도 보이지 않고, 기차도 창가쪽 좌석에만 승객을 앉혔다 합니다. 가족들조차 8명 이상 모일 수 없으니, 옛날처럼 시끌벅적한 명절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저희도 아들과 딸네 식구들을 따로 따로 맞아야 했습니다. 모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온 아이들은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벽에 붙여놓은 키를 재는 판에 서서 자란 키를 자랑했습니다. 거의 넉달만에 만났는데 각각 약 4cm쯤 자라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자란다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 그 놀라운 성장력이 희망이겠지요?

저희는 추석에 음식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올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간단한 먹을거리를 장만한 아내가 ‘그래도 전(煎)은 좀 준비해야 하지 않나?’ 하고 말했습니다. 웬일로 집에서 전을 부치려나보다 생각했더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공덕역 근처에 있는 유명한 전 가게에 가서 구입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짐꾼으로 발탁되어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전을 구입하려는 이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각자 커다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얇은 비닐장갑을 낀 채 그들은 무드럭지게 쌓여있는 전 가운데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담았습니다. 가게 바깥 대로변에는 차들이 즐비하게 서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올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 줄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저는 바깥 도로변에 서서 아주 무료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가족들이 수다를 떨며 전을 부치고 음식을 장만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구나’, ‘아니, 그런데 명절에는 왜 꼭 전을 먹어야 하는 거야?’,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각종 재료를 튀겨내는 것이 번거롭긴 하지만 잔치 기분은 나겠구나’,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거야?’.

뜬금 없이 서홍관 시인의 ‘어머니 알통’도 떠올랐습니다. 시인은 아홉 살 적 기억을 떠올립니다. 뒤주에서 쌀 한 됫박을 꺼내시던 어머니가 문득 아이를 보고 웃음 띤 얼굴로 말합니다. “내 알통 봐라.” 시인에게 그 때의 일이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때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모처럼 어머니 집에 들른 시인의 밥상을 차리느라 어머니가 냉장고를 열고 게장을 꺼내시다가 그만 왈칵 엎지르고 말았습니다. 주방은 온통 간장으로 넘쳐 흘렀고, 그 상황이 민망했던 팔십 세 어머니는 혼잣말처럼 말씀하십니다. ‘손목에 힘이 없다’, ‘이제는 병신 다 됐다’. 짤막한 시 속에 어머니의 한 평생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시간은 이 두 사건 사이의 갈피에 묻혀 있었지만요. 시인의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늘이 있어 서 있던 자리에 해가 들어올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른 후 아내가 나타났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나타날 거라 예상했지만, 득의의 표정을 짓고 있어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전을 장만했으니 추석 준비는 거의 끝난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아이들이 오고 가는 짬짬이 청소와 설거지를 반복하다가도, 조금 한가해지면 서재에 앉아 가벼운 읽을거리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언론인인 임재경 선생님의 회고록 <펜으로 길을 찾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님의 대담집 <문학과의 동행>, 국문학자 겸 민속학자인 김열규 선생님의 <이젠 없는 것들>을 두서없이 설렁설렁 읽었습니다. 어쩌다보니 다 옛 기억들을 더듬는 책들이었네요. 이건 순전히 명절 탓입니다. 김열규 선생님의 책은 제목만 봐도 갖가지 추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예컨대 사라진 소리와 냄새들, 삼삼한 정경들을 돌아본 셋째 마당의 제목은 ‘귀에 사무치고 코에 서린 것들’입니다. 제목 속에 모든 게 담겨 있습니다. 낙숫물 소리, 타작 소리, 다듬이 소리, 아낙네들 떨이하는 소리, 방아 소리, 풀피리, 버들피리 소리, 닭 울음, 황소 울음, 할아버지 담뱃대 터는 소리, 할머니 군소리, 깨, 콩 볶는 냄새, 술 익는 냄새, 누룽지, 숭늉, 처마 끝 고드름, 처마 밑 제비집. 이런 소리와 냄새, 그리고 그런 정경에서 멀어진 삶이 과연 행복한 것인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제게는 그리운 시절입니다. ‘얼굴’이라는 노래 기억하시는지요? 우리가 젊은 시절부터 불렀던 이 노래가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하여 놀랐습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얼굴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이 가사의 핵심은 ‘무심코’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각인된 어떤 기억이 예기치 않은 순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는 정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소월도 같은 경험을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이상하지요? 그리움이라는 말 그 자체 속에 어떤 마술이라도 걸려 있는 것일까요? 코로나19 시대여서인지 ‘그립다’는 단어가 더 자주 떠오릅니다. 심심풀이로 성경에서 ‘그리워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꽤 많지만 몇 구절만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시 63:1)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시 84:2)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내 두 손을 펴 들고 기도합니다. 메마른 땅처럼 목마른 내 영혼이 주님을 그리워합니다.”(시 143:6)


“나는 임의 것, 임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나.”(아 7:10)


“그가 돌아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우리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리워하고, 내게 잘못한 일을 뉘우치고, 또 나를 열렬히 변호한다는 소식을 그가 전해 줄 때에, 나는 더욱더 기뻐하였습니다.”(고후 7:7)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있는지는,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빌 1:8)


“갓난 아기들처럼 순수하고 신령한 젖을 그리워하십시오. 여러분은 그것을 먹고 자라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벧전 2:2)

어느 구절 할 것 없이 그리움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감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동료들에 대한 그리움은 우리 속에 있는 거칠고 날선 것들을 부드럽게 만들어 줍니다. 아무 것도 그리워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위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리움은 ‘나’는 ‘너’를 통해서만 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인간은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홀로 인간일 수 없음도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움의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삶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의 삶을 이런 말로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빌 3:14)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들을 가리켜 세상 곳곳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벧전 1:1)이라 칭했습니다. 히브리서는 길손과 나그네로 살던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은 더 나은 곳 곧 “하늘의 고향”(히 11:16)을 찾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움이 우리를 밀고 갈 때도 있고, 우리를 앞으로 잡아당기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방탄소년단(BTS)이 유엔 총회 특별 행사 가운데 하나인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 개회 세션에서 청년세대와 미래세대를 대표해서 한 연설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멈춘 줄 알았는데, 분명히 조금씩 앞으로 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런 데 있습니다. 느닷없는 운명의 타격을 받으면 잠시 동안 당황스러워하지만 다음 순간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합니다. 미래 세대에 대한 음울한 전망이 도처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렇지만 BTS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너무 어둡게만 생각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세상을 위해 직접 고민하고, 노력하고, 길을 찾고 있는 분들도 계실 테니까요.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페이지가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엔딩이 정해진 것처럼 말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변화에 겁먹기보다는 ‘웰컴’이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나가자는 것입니다. 존재의 용기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사하라 사막 인근에서 은수자로 살다가 순교한 샤를 드 푸꼬의 ‘의탁의 기도’를 저는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맡겨 드리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의탁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선의를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궁극적 신뢰입니다. 그 신뢰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 계절은 추분에 접어들었습니다. 진정한 가을의 시작입니다. 허장성세를 거두고 내적으로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주님의 빛을 받아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 속을 걸어가십시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9월 2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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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백로와 추분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 가정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길 빕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이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때입니다. 도시의 소음 때문에 그 소리를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어릴 적에 벽 사이에서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고, 둘이서만 알자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귀뚜라미와 나와’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고요한 귀 기울임의 풍경이 떠올라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크고 새된 소리보다는 작고 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평안해집니다. 시냇물소리, 솔숲이나 대숲을 스쳐온 바람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다시 윤동주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나무’ 전문). 이것은 인과관계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시인에게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나무가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기 때문일 겁니다.

어렵고 난감했던 세월을 살면서도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현실을 외면했다고 탓하면 안 됩니다. 힘겨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아름다움을 한껏 끄집어내야 합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평안한 시절에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그는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폭격기의 굉음이 들려올 때에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들판의 치커리와 카모마일을 꺾어 질겅거리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은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빵 한 조각, 죽 한 모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라는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늘 남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p.187) 

선의 희미한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삶이 저 높은 삶의 차원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많은 영세 상인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원룸의 보증금을 빼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세상을 등진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쇠로 된 감방에 갇힌 듯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이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인 공덕역을 지나는데, 환풍구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며칠 후 그곳 환풍구에 놓인 꽃 몇 송이를 보고서야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환풍구 공사를 하던 20대의 젊은이가 9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자리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조치를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 본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눈앞에서 추락하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까요?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의 몸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피에타는 자식을 잃고 애통하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 해 전 팽목항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떠올렸습니다. 피에타 하면 흔히 바티칸에 있는 작품이 떠오르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만큼 제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은 없습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 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아래로 무너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전후좌우에서 살피다 보면 왠지 호흡이 멎은 예수가 오히려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업고 있는 것 같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인류의 아픔을 온통 짊어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의 아픔 속에 화육하고 계십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마치 세상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런 말조차 부질없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설 땅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외로운 이들 곁에 다가서고 싶어 하십니다.

미국의 영성가이자 설교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책을 읽는 중에 꽤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명 쯤 되는 혼성그룹의 영성 모임을 이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들이 다룬 주제는 ‘구체화된 경건’이었습니다. 그날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팔복이었고 일체 말은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그 말씀을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제시된 말씀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난감해 했습니다.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토론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낯설어 합니다. 자의식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그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팔복을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십 번 이상 들었을 터였습니다. 멤버 중의 목사들은 슬그머니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에 속한 한 사제가 시체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됐기 때문입니다. 15분이 지나 모든 조가 중앙에 모였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는 시체 역할을 자청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섰습니다. 두 번째 여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시체 역할을 하는 이의 머리를 무릎에 뉘였습니다. 다른 두 여성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 위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마치 그 죽은 여인의 몸 위로 고딕식 건물이 세워진 것 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이의 몸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사랑과 슬픔 속에 잠겨 그렇게 멈춰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그들 속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번져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깊은 당혹감 속에 빠졌습니다. 그 슬픈 흐느낌은 누구도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 역할을 하던 분의 몸이 흐느낌으로 흔들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흐느낌은 점점 커졌고 다른 사람이 따라 울기 시작했고, 울림소리도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울음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울음은 죽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Barbara Brown Taylor, , HarperOne, p.48-51 참조)

기쁨보다는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슬픔 혹은 비애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입니다. 슬픔의 강을 따라 흐르다보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슬픔의 강은 국경, 이데올로기, 종교, 문화, 남녀노소, 빈부귀천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슬픔을 배제하는 문화는 천박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슬픔은 극복되어야 할 삶의 부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세계에 접속됩니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참 사람됨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군요. 가족들이 마음 편히 모이기도 어려운 시대이긴 합니다만, 안전하고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평화.

2021년 9월 1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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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먹는 새

한 아이가 쌀새에 대해 물었다.

“저 새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죠, 엄마? 혹시 꽃을 먹는 게 아닐까요?”(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노래>, 강은교 옮기고 엮음, 도서출판 이레, p.17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모처럼 맑은 햇빛을 보니 참 좋습니다. 마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9)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요? 가끔 삶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언덕을 넘고 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언덕이 우리를 기다리곤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꾼 꿈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께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 위에서 서서 들려주신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둘째,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땅 위의 모든 백성이 그들 덕분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내가 너와 동행하면서 너를 지켜주고 반드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감동적인 약속입니다. 큰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일상에서 직면해야 하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시간 속을 기어가야 했습니다. 시련과 고통, 서러움과 두려움을 통과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사 41:14)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처지를 빗대서 한 표현이겠지만 저는 이 속에 담긴 아픔을 읽습니다. 어린 시절,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 시골 신작로를 타박타박 걷다 보면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흙이 가라앉아 고운 바닥에 마치 들판에 난 외길처럼 긴 선이 그어진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 외줄은 지렁이가 온 몸으로 기어간 자취였던 것입니다. 흙 위를 기어간 지렁이의 자취가 왜 그리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심상 속에 또렷하게 각인된 그 이미지 탓인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구절을 볼 때마다 저는 역사의 밑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세상에는 발레리나가 몸을 솟구치듯 가뿐하고 상큼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처럼 허청거리며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짓밟히면서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거미’라는 시에서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설움과 자주 입을 맞추었다는 표현은 시인이 겪어야 했던 신산스런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으로 뻘밭을 기어가는 것처럼 살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더 고귀하고 높은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는 것, 그것이 시인의 드넓은 긍지일 겁니다. 시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의 시인들입니다.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정화하는 이들이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시인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믿음의 반대어는 불신이 아니라 숙명론입니다. 숙명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숙명론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미움을 살까 무서워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나태함입니다. 영어로 나태를 가리키는 단어는 sloth인데, 이 단어는 나무늘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무에 매달려 지내면서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사는 동물입니다. 물론 나무늘보도 급할 때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입니다.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나태는 몸이 굼뜬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메말라 활력과 생기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종의 무기력증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며 자기 일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송악산 둘레길


파란 가을 하늘이 우리의 시야를 시원하게 합니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가끔 하늘도 바라보고, 나무도 바라보고, 흘러가는 강물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찰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런 느긋한 시간 경험이 우리를 신성한 시간 앞에 데려가기 때문입니다. 요한 페터 에커만은 괴테의 마지막 십 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가 남긴 <괴테와의 대화>라고 하는 책은 괴테의 작품을 넘어 괴테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참 중요한 자료입니다. 물론 에커만이 괴테를 늘 경외심을 품고 대했던 것을 감안한다 해도 그 글 속에 나타난 괴테는 품격 있고 또한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책 가운데서 읽은 한 에피소드입니다. 어느 날 에커만은 어떤 사람으로부터 둥지에 들어 있는 새끼 휘파람새를 어미 새와 함께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미 새는 실내에서도 쉴 새 없이 새끼에게 먹이를 먹여주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놓아주어도 다시 새끼에게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에커만은 위험과 감금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미 새의 사랑에 감동하여 괴테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때 괴테는 미소를 지은 채 “만약 자네가 신을 믿고 있다면 그것이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네”라고 말하며 자기가 쓴 시의 한 대목을 낭송해주었습니다.

“신은 어울리게도 안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자기 안에 자연을, 자연 속에 스스로를 품어 기른다
그러므로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 것은
신의 힘과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괴테는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신이 어미 새에게 자기 새끼 새에 관한 이와 같은 무한한 사랑의 본능을 불어넣지 않았다면, 또한 똑같은 본능이 자연 전체의 일체 생물에 미치게 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는 지속하지 못할 게야!―그와 같이 신의 위력은 세계 어디에나 편재해 있고, 무한한 사랑은 어디에서나 약동하고 있는 것이네.”(요한 페테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2>,곽복록 역, OLJE CLASSICS, p.142-3) 세계의 지속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 속에 불어넣으시는 무한한 사랑의 본능 덕분이라는 말에 저는 크게 감복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누군가의 덕분에 삽니다. 최초에는 부모의 사랑이 그리고 나중에는 운명처럼 다가온 이런저런 사랑이 우리 삶을 든든하게 붙잡아주는 끈이 됩니다. 괴테는 그러한 사랑을 가리켜 “편재하는 신의 상징”이라 말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누구나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본 주관식 시험 문제 중에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건 우리도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이렇게 답을 적었다고 하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 대답 속에는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는 아이의 고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게 실화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설사 누가 꾸며냈다 해도 이 질문과 대답은 우리 생명이 사랑의 빚임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랑의 빚만 늘어나는 것 같아 하나님께 송구할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삶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겨워도 그 속에서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것을 발견해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진 사람들입니다. 아름다운 새소리를 듣고 새가 혹시 꽃을 먹고 있는 게 아닐까 묻는 아이를 보고 무지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천진함을 잃어 우리 삶이 무거워졌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생각의 무게 때문에 물속에 빠져 들어갔던 베드로처럼 우리 또한 비애 속에 자꾸 잠깁니다. 도처에서 생명의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데, 시름에 잠긴 채 그 사이를 절름거리며 걷는 것은 삶의 낭비입니다. 세계 교회는 창조절기 가운데  9월 1일부터 10월 4일까지의 기간을  지구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는 기간으로 정했습니다. 이 기간을 지나면서 지구에 대한 문해력이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편재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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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의 빛이 어둡지 않은가?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p.233에 나오는 권정생의 말)

주님의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벌써 9월에 접어들었습니다. 별고 없이 잘들 계신지요? 격절의 세월이 한없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임이 분명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 7:14).

 

‘알지 못함’, 어쩌면 이게 유한한 우리 인생의 비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뜻한 바가 이루어졌다고 너무 으스댈 것도 없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인생의 지혜는 우리에게 당도한 삶의 현실을 잘 갈무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요? 흐리고 힘든 날도 있지만, 맑고 상쾌한 날도 있는 법입니다. 어떤 날이 다가오든 우리 내면의 빛이 어둡지 않다면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우리 교우의 첼로 독주회에 다녀왔습니다. 서정적인 첼로의 선율 속에서 모처럼 마음의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와 첼로가 소리를 주고받기도 하고, 다른 소리 위에 또 다른 소리가 유연하게 포개지며 만들어내는 화음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나찌가 만든 절멸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이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지요?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저는 한 장면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날아가 그 유명한 관문인 ‘체크포인트 찰리’ 앞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인 ‘사라방드’를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억압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면서 자유를 갈망했던 사람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애가였을 겁니다. 저는 신문에서 그 연주 장면을 스크랩 해두고 가끔 꺼내 보곤 했습니다. 음악의 위대함을 전율하며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국립극장에서 오페라 ‘박하사탕’을 보았습니다. 영화 ‘박하사탕’을 원작으로 하여 세심하게 인물들을 재배치하여 만든 작품이었고,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작곡가 이건용 선생님이 여러 해에 걸쳐 대작을 작곡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이런 모임에 가는 게 쉽지 않았지만 우리 교우 가족이 오페라 제작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관람했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한 그 오페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으깨지고 망가지는 지를 처연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빚어지는 사람들의 연대와 사랑의 아름다움 또한 가슴 시리게 드러냈습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극한의 상황 속에서 드러나는 것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극장 앞에서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등을 뒤로 기대고 편히 쉴 생각이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기사님이 말을 걸었습니다.

“공연을 보고 오시나봐요.”
“예.”
“무슨 공연이었나요?”
“‘박하사탕’이라는 오페라였어요.“
“요즘 공연자들의 형편이 말이 아니라는데 그래도 공연을 할 수 있었군요.“
“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공연자들의 형편을 그렇게 잘 아세요?”
“예, 사실 우리 집 아이들 셋이 다 국악을 했어요.”
“그렇군요. 지난 2년 동안 많이 힘들었겠어요.”
“큰 아이는 경기 민요를 하고, 작은 아이는 판소리를 하고, 막내는 한국 무용을 하는데요. 공연이 끊겨서 어려움이 많았지요.”
“아유, 자제분들이 재능이 많으시군요. 혹시 선생님도 국악을 하시나요?
“나야 뭐, 하하,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하는 정도지요 뭐. 내 아내는 프로는 아니지만 한국 무용을 꽤 잘해요.”

기사님은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큰길가에 내려달라고 하는 데도 굳이 아파트 앞까지 차를 몰면서 “차가 올라가는 거니까 내가 힘들 건 없어요”라고 말하며 껄껄 웃었습니다. 유쾌한 저녁이었습니다. 그 기사님은 지금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아들과 딸이 자랑스러운 것 같았습니다.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놓게 마련입니다. 내 속에 기쁨이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친절해지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러나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뒤흔들고 있을 때는 사소한 일로도 화를 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세상이 온통 나에게 적대적인 것처럼 느껴져 우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치유자이신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정결법 위반이라며 나무랐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전통을 지킨다 하면서도 율법의 본 정신을 저버린 그들을 꾸짖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 15:11).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은 우리 내면의 풍경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성급함, 난폭함, 비방, 무절제, 불평, 불경, 교만함 등은 우리 속에 자리잡고 있는 혼돈과 어둠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권고를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눅 11:35).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본本과 말末은 각각 나무 목木 자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자의 자형을 보면 ‘본’은 뿌리를 가리키고 ‘말’은 열매를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본’이 중요하고 ‘말’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본이 바로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열매도 좋은 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라고 말했습니다. ‘항상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기본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편의상의 구분일 뿐입니다. 대체 시간이란 무엇일까요? 어거스틴도 동일한 고민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시간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묻는 이가 없으면 아는 듯하다가도 막상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 들면 말문이 막히고 맙니다.”(성아구스띤, <고백록> 제11권 14장, 최민순 역, 성바오로출판사, p.324)


시간에 대한 탐색을 거듭하던 어거스틴은 결국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 하는 것이 그럴 듯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구절이 나옵니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앞의 책, 제11권 20장, p.330). 인간은 시간을 기억, 목격함(직관), 기다림의 형태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정화하는 것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겠지요. 과거는 믿음으로, 현재는 사랑으로, 미래는 소망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시간과 연결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 삶의 토대가 될 때 흔들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위험에 직면한 이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고통에 반응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은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거룩한 소명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이 움베르토 에코와의 대화에서 들려준 말이 귀에 생생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책임지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존엄성은 단지 내 쪽에서 내린 호의적인 평가나 인도주의적인 충동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름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존재는 단지 ‘나’라든가 ‘나의 것’, 또는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움베르토 에코·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무엇을 믿을 것인가>,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p.56)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충실한 것이 생명 존중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삶을 부단히 연습해야겠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은 바로 우리가 의젓한 사람으로 지어져가는 일종의 도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보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2021년 9월 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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