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밤에게 낮은 낮에게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 19:1-4a)

주님의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도 무탈하게 지내셨는지요? 우리 인생은 하루의 점철(點綴)이라지요? 점철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수없이 많은 점을 찍어 형태를 드러내는 점묘법 화가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점 찍기는 일종의 수행이 아닐까요? 지루함의 악마와 싸우며 끝없이 반복되는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사는 모습 속에 우리 인생 전체 모습이 반영된다고 합니다. 부분은 전체를 닮고 전체는 부분을 내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전에 산에 자주 다닐 때가 생각납니다. 숲 그늘 아래로 걸어갈 때도 있지만 그늘조차 없는 오르막길을 허위단심으로 올라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지간히 지쳐있을 때면 그 길을 걷는 것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때마다 ‘이 길은 우리 인생을 닮았구나’ 하고 혼잣소리를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주 힘겹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 도전 아니던 순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면 괜스레 고맙고 정겹고 그렇습니다. 매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지금, 그저 상상 속에서라도 여러분들의 길에 동행이 되고 싶습니다.

매일 새벽,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저는 산책에 나섭니다. 걷는 순간은 오롯이 혼자입니다. 내 영혼의 풍경을 살피기도 하고,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아 가지런히 만들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을 생각하며 기도를 올리기도 합니다. 새벽 숲 사이를 걸으면 청량한 기운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풀벌레와 매미 울음소리가 배경음이라면 그 소리를 단속적으로 뒤흔드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흔듭니다. 까마귀의 ‘까악 깍’ 하는 탁성, 다소 신경질적으로 ‘깍깍깍깍’ 우짖는 까치 소리, 그리고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리는 멧비둘기의 구슬픈 소리…. 그 소리의 향연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이 저절로 실감납니다. 창조의 신비를 보고 누릴 수 있는 감각이 열린 사람은 행복합니다. 비록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그 말씀을 얼핏 감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늘 다니는 산책로에서 만나는 풍경 또한 정겹습니다. 길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철역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김밥이나 떡 같은 먹을거리를 진설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계십니다. 그분이 그 장소에 이르러 맨 먼저 하는 일은 간밤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주워 주변을 말끔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제게는 묵묵히 수행하는 그 행위 자체가 경건함으로 보입니다. 트럭에 싣고 온 각종 건축자재들을 가게로 옮기는 건재상 아저씨도 보입니다. 늘 입고 계신 낡은 셔츠는 그분의 건강한 노동의 증거처럼 보입니다. 프랜차이즈 빵집 틈바구니에서 구멍가게와 다를 바 없는 빵집을 운영하시는 아저씨는 앞치마를 두르고 상을 닦는 일로 새벽을 깨웁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로 옆에 트럭을 세워놓고 생선이나 채소 등의 찬거리를 파는 모자도 있습니다. 새벽부터 생선 비린내를 풍기니 상쾌하진 않지만 그 트럭 주변에서 일고 있는 활기가 싫지는 않습니다. 맞은편에는 과일 트럭이 있는데,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슬쩍슬쩍 건너편을 바라보며 아저씨는 애꿎은 과일의 위치를 바꾸며 시간을 견딥니다. 그 모습이 늘 안쓰러워 보입니다. 아마도 손님이 모이는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산균 음료를 파는 아주머니는 공원을 드나드는 분들과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눕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풍경입니다.

공원 안에서도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것은 기본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변형된 춤으로 몸을 흔드는 분들도 계십니다. 목책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걷는 분, 커다란 나무를 등이나 손으로 두드리는 분, ‘헙헙’ 기합 소리를 내며 걷는 분, 자기만의 건강법인지 독특한 자세를 반복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그만큼 진지합니다. 가끔 젊은이들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커다란 헤드셋을 낀 채 몸에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달립니다. 이른 새벽임에도 이미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분들도 보입니다. 

저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걷기 때문에 무리 지어 걷는 분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핏 들려오는 소리가 귀를 스칠 때가 있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간간이 몸 아픈 이야기들을 나누십니다. 소소한 그런 이야기들이 이제는 하찮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마음 따라 살지 말고 몸 따라 살라’는 말이 한때는 나약한 정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 속에 지혜가 있음을 압니다. 고생물학자이며 신부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어느 글에서 인간이 처한 가장 괴로운 정신적 딜레마는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그 말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젊어서는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보며 높이 그리고 빨리 나는 연습을 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에 감정을 이입한 채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강 하구에 몰려들어 밀려오는 물고기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끼룩거리며 다툼을 벌이는 갈매기 떼를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갈매기 떼를 비웃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사소한 것들에 의해 얼마나 크게 흔들리는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들에게 동료 의식을 느낍니다. 나와 그들이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안에 있다는 말이 이런 뜻일까요?

공적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이기도 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내는 일에 몰두합니다. 그린랜드의 빙하가 하루에 85억 톤이 녹아내렸고 그것은 플로리다 주 전체를 5cm 높이로 채울 수 있는 규모라거나, 터키의 산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에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버틀란트 러셀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라는 책에서 “나는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온화한 것을 좋아하려 했다. 나는 이 세상이 한층 세속적으로 변해가는 시대에 살면서도 통찰의 순간들로부터 지혜를 이끌어내려 했다”고 말합니다. 80세 생일을 맞으면서 그는 자기 삶의 주요 가치를 세 가지로 술회하기도 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의 탐구,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그것입니다. 참 대단한 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비루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일상을 충실하고 아름답게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거룩한 삶이란 남들이 하지 않는 종교적 실천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된 삶이야말로 거룩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음식 솜씨는 상차림에서 드러나지만, 그의 인격은 설겆이에서 드러난다”. 어디선가 본 문장인데 보는 순간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을 벗어놓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의 풍경을 알 수 있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원에서 가끔 저를 알아보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일부러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건네는 분들도 계시지만, 가만히 목례만 건네며 지나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낫다고 평가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품성이 다를 뿐입니다. 자기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지 남이 애써 준비해 놓은 것을 누리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것을 남겨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먹고 자고 입고 놀고 일하고 쉬는 일상의 일들을 떠나 어디서 하나님 경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b)는 말씀을 늘 떠올리고 있습니다. 어떤 삶이 거룩한 삶인가요?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밭에서 추수할 때 밭 구석구석까지 거두어들이지 않는 것,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이웃을 속이지 않는 것, 이웃을 억누르지 않는 것, 품꾼의 품값을 미루지 않는 것,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않는 것,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림돌을 놓지 않는 것, 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 헐뜯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하지 않는 것, 앙심을 품지 않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이웃과 평화롭게 살 줄 모르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기 쉽습니다.

힘겨운 때일수록 자기 삶을 정성스럽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 해치우기 위해 하지는 마십시오. 성과에 집착하여 너무 자기를 닦달하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을 자비롭게 대할 수 있어야 다른 이들을 느긋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낙심과 절망과 공포의 얼굴을 직시하고, 그 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우리 일상의 삶이 이루어지는 그 현장이야말로 우리의 도량임을 잊지 마십시오. 벌써 입추 절기가 다가옵니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가을 농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평화와 생명의 씨를 곳곳에 뿌리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자라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여름이 다 지나기 전에 교회 문을 다시 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 시간이 다소 늦어진다 해도 초조해 하거나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사랑과 경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야말로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8월 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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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주님, 제가 아직 짓지 않은 많은 죄에서 저를 지켜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저지른 모든 죄를 슬퍼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만난 모든 사람들, 그들이 저의 친구이든지 적이든지, 그들을 만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들 모두가 결국 제 친구로 되기를 기도합니다.”(Margery Kempe, 1373-1440)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무더위를 잘 견디고 계시는지요? 날이 얼마나 더운지 모기들도 활동을 쉬고 있다지요? 물것을 많이 타는 분들에게는 이 여름이 주는 작은 위안인 것 같습니다. 낮에는 차마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아 이른 새벽에 공원을 걷고 있습니다. 걷는 시간은 기도의 시간인 동시에 얼크러진 생각의 타래를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한낮에 땀을 흘리며 일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안쓰러운 동시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들이 실은 다른 누군가의 수고의 결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하계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올림픽은 편안한 거실에서 즐기는 소일거리이지만,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그날만을 학수고대했던 선수들에게는 수확의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메달을 따든 따지 못하든 일단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모든 선수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무관중 경기가 많다고 합니다. 관중들의 박수소리를 듣지 못하며 고독한 싸움을 하는 이들을 크게 위로하고 싶습니다. 그들은 단련된 몸이 그리고 고도로 집중된 정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는 표지들입니다. 나이가 이미 전성기를 지난 장년의 선수들도 등장하여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운동 경기도 즐기지만, 그들이 빚어내는 삶의 이야기에 더 크게 반응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은 말 그대로 평화의 제전이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면 전쟁도 중단하고,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적대적인 국가를 통과할 때도 그 안전이 보장되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올림피아 제전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르테미시온 해전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나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자, 소수의 (그리스)아르카디아인들이 일자리를 얻으려고 페르시아 진영으로 탈주를 감행했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스군의 행동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신문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리스군이 올림피아제전을 벌이면서 체육 경기와 전차 경주를 관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기의 상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탈주자들은 승리자들에게는 올리브 가지로 엮은 관이 수여된다고 답했습니다. 상품으로 금품이 아닌 화환이 수여된다는 말을 듣은 트리탄타이크메스는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아 마르노니오스여,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필이면 이런 인간들과 싸우게 만들었는가? 금품이 아닌 명예를 걸고 경기를 행하는 자들과!”(헤로도토스, <역사 下>, 박광순 옮김, 범우사, p.305)

물론 이 기록은 페르시아의 전제정치와 그리스의 자유 정신을 대조하기 위한 헤로도토스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보상보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그리스 정신임을 자부심을 담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객관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에 대한 기록자인 동시에 교육자이기도 합니다. 후대의 사람들의 DNA 속에 그런 도도한 자유혼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대입니다. 건강이 유사 종교가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로마시대 문장가인 유베날리스(Decimus Junius Jubenalis)의 풍자시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의 원래 의미는 조금 다른 듯합니다. 라틴어의 표현을 직역하면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기를 기원해야 할 일이다”가 된다고 합니다. 이 말의 속뜻은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김용석, <일상의 발견>, 푸른숲, p.139). 몸을 단련한다고 하여 곧 정신이 맑아지거나 아름다워지지는 않습니다. 그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올림픽 경기에 빗대 설명했습니다. 올림픽은 그 시대에도 사람들의 큰 관심을 받는 행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고전 9:24) 꼭 신앙생활의 목표가 ‘상’을 받는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그 목표 못지않게 과정이 중요합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은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일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음식을 먹고, 사람들과 만나 대화하고, 일을 하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네 일상입니다. 일상은 너무나 평범하고 반복적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을 지겹게 느끼기에 뭔가 짜릿하고 특별한 경험을 구하거나,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일상이야말로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 일상을 충실히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비결입니다. 김용석 교수의 말이 우리 폐부를 찌릅니다. 

“적지 않는 사람들에게 일상생활은 새콤달콤 ‘잘사는’ 삶이 아니라, ‘남들에게 좀더 잘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아등바등하는 삶이거나 ‘이미 잘살고 있다’는 것을 크렁크렁 과시하는 삶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의미 있는 일상이 그들에게서 멀리 있기 때문이다.”(김용석, 앞의 책, ‘머리말’ 중에서)

‘만일 예수님과 동행할 기회가 주어진다면’이란 가정을 해볼 때가 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들을 상세하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할까?’ ‘도무지 풀리지 않는 신정론의 문제를 여쭤볼까?’, ‘당신을 배신하기로 이미 마음 먹은 유다의 발을 닦아주실 때 심정이 어떠셨는지 여쭤볼까?’ 제게 정말 그럴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깊은 침묵 속에서 예수님의 일상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주무시는 모습,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 기도하는 모습, 길을 걸으시는 모습, 가련한 이들과 만날 때의 눈빛, 그리고 영혼의 목마름에 시달리는 이들을 향해 가만가만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음성, 귀신을 꾸짖으실 때의 어조, 적대적인 질문을 하는 이들을 대하실 때의 호흡... 누군가의 일상을 보면 그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 삶을 뒤흔들어놓는 것은 누군가의 심오한 말이나 이론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자기 일상을 살아내는 이들의 아름다움에 눈을 뜰 때가 아니던가요? 신앙생활은 일상과 무관한 가외의 생활이 아니라, 일상 속에 하나님의 뜻이 배어들게 하는 것입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훈련 없는 거룩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독려하기 위해 믿음을 올림픽 경주에 빗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경기에 나서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합니다. 절제란 자기 훈련 혹은 자기 통제를 의미하지만 실은 많은 것을 포기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편안하게 지내고 싶은 욕구,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욕구, 느긋한 시간을 누리고 싶은 욕구, 친한 벗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 욕구, 이기적으로 처신하고 싶은 욕구. ‘절제’는 욕망과의 거리두기입니다. 바울이 그렇게도 위대한 전도자로 살았던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라 치열한 노력 덕분입니다. 그는 자기 몸을 쳐서 굴복시켰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전 9:27b)

자기 기만에 빠져 결국 영혼이 텅 빈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스스로 잘 믿는다 생각하면서도 결국은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올림픽 선수들은 피땀을 흘리며 훈련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기 위한 것이라 말합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사실 이 자극적인 표현은 신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얻게 될 ‘썩지 않을 월계관’을 더 도드라지게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 표현일 겁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절제하면서 자기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운동선수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욕망과의 거리 두기가 더욱 필요한 시기입니다. 교우들의 애경사가 있어도 공동체가 함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매미 울음소리가 여름을 처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배롱나무에 고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저마다 한 세상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투덜거리지 말고, 기쁘게, 깨어서 우리 일상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한 주간도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일상 속에서 문득 주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기쁨도 누리시기를 빕니다. 평화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2021년 7월 29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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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다리



“삼라만상은 모두 상이하고 독특하고 희귀하고 낯설구나./무엇이나 변덕스럽고 점철되어 있나니(누가 그 이치를 알까?)/빠르거나 느리고, 달거나 시고, 밝거나 어둡구나./이는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지닌 그분이 낳으시는 것이니, 그분을 찬미할지어다.”(제라드 홉킨스, <홉킨스 시선>, 김영남 옮김, 지식을 만드는 지식, p.88, ‘알록달록한 아름다움’ 중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삼복더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초 ·중복이 지났고 이제 대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마른 장마도 끝이 났다지요? 요즘 하늘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새털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뭔가 목가적 세계의 문처럼 보입니다. 저녁 노을 또한 장관입니다. 지난 월요일 늦은 오후에 공원 근처를 걷고 있는데, 여성 몇 분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연신 하늘을 찍고 있었습니다. 제 시선도 저절로 위를 향했습니다. 하늘 저편에 선명한 쌍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위축된 마음을 위로하듯 무지개는 그곳에서 땅을 가만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무지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노아 시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속속들이 썩고 무법천지로 변한 세상을 보며 땅 위에 사람 지으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땅을 멸하겠다고 다짐하십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열이렛날,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밤낮 비가 쏟아졌습니다. 사십 일 밤낮 내린 비로 코로 숨을 쉬며 사는 것들이 다 죽었습니다. 노아와 더불어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 살아남았습니다.

홍수가 끝나자 하나님은 노아와 함께 한 사람들, 그리고 숨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들을 없애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언약의 표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무지개야말로 살아있는 모든 것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기표인 셈입니다. 제게도 예기치 않은 시간에 만났던 무지개의 기억이 있습니다.

 

 


군목으로 최전방에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저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GOP(general outpost, 일반 전초) 부대를 방문하여 예배를 인도하곤 했습니다. 철책선을 담당하는 작은 단위 부대였기에 예배당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식당의 한 켠에 모여 앉아 함께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올리는 시간이 참 복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도 저를 돕는 군종병은 기타를 치며 그의 주특기 복음송을 불렀습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돌봐주시네/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고적감이 느껴지는 그 시간과 장소에서 이 노래와 만난 병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도 뜨거워졌습니다. 분단의 아픔이 크게 느껴졌고, 한반도에 평화의 꽃이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는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구름이 걷혀 있었고, 하늘 저편에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무지개는 한반도를 동서로 갈라놓고 있는 철책선을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제 눈에는 무지개 다리처럼 보였습니다. 병사들은 ‘오오!’ 감탄사를 내뱉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의 마음은 이미 하나였습니다. 근 40년 가까운 세월 저편의 일이지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 날의 감동이 컸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2004년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방 교역자들과 이스라엘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 여정을 마치고 이스라엘의 타바 국경 검문소에 당도한 순간부터 우리 일행은 몹시 긴장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국경에서 폭발물로 의심되는 가방이 발견되어 국경이 폐쇄되었고, 우리는 뙤약볕 밑에서 몇 시간을 대기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아일라트를 지나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11시가 넘었습니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CNN 뉴스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간밤에 지나온 해변 마을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보도였습니다. 그 땅이 분쟁의 땅이라는 사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우리 일행은 팔레스타인에 속한 유적들을 보기 위해 베들레헴에 다녀왔습니다. 말로만 듣던 6미터 높이의 분리의 장벽을 보았습니다. 체크 포인트에서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시달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성경의 세계로 시간 여행을 떠난 셈이었지만 제 마음은 온통 그 땅이 겪고 있는 시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유대 광야를 지날 때 몸과 마음이 몹시 고단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저 멀리 무지개가 보였습니다. 흐릿하긴 했지만 분리 장벽 위로 높이 솟아있는 것은 무지개가 분명했습니다. 모두가 그 광경을 보며 놀랐습니다. 마치 어떤 하늘의 메시지를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무지개는 음악용어 ‘슬러slur’ 곧 이음줄을 닮았습니다. 슬러는 악보에서 음높이가 다른 둘 또는 그 이상의 음표의 위나 아래에 긋는 호선을 이르는 말입니다. 음과 음 사이를 끊어지지 않도록 매끄럽게 연주하여 선율감을 주라는 표시입니다. 사람들이 무지개 앞에 멈춰서는 것은 어쩌면 분열된 세상에서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멋대로의 상상입니다. 무지개는 꿈을 꾸도록 만듭니다. 워즈워스의 ‘무지개’는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시입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바라노니 나의 하루하루가
자연의 믿음에 매어지고자.”
(워즈워스, <무지개>, 유종호 옮김, 민음사, p.18)

무지개를 보고도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면 그의 영혼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인 까닭은 ‘경탄’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깃든 신비에 눈을 뜰 때 사람은 아름다워집니다. 경탄의 순간은 우주의 맥박 소리를 듣는 시간이고, 표현 불가능한 세계로 진입하는 시간입니다. 경탄을 잃어버릴 때 세상은 처리해야 할 일이 되고, 우리를 위협하는 적대적인 공간으로 변합니다. 최근 며칠 동안 많은 이들이 SNS에 무지개, 구름, 노을 사진을 올렸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과 만났던 순간의 행복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다시 노아 시대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무지개는 홍수 이후에 나타났습니다. 모든 생명이 멸절 당한 이후에 말입니다. 기후 위기에 대한 경고의 나팔소리가 울린 지 이미 오래건만 우리는 벌써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다들 큰일났다고 말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짐짓 눈을 감고 있는 형편입니다. 위기의 시간은 삶의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겨울이 되기 전에 나뭇잎을 떨구는 나무의 지혜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풍요의 환상 속에 오래 머물수록 지구는 더욱 망가질 것입니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지역을 휩쓴 대홍수로 많은 인명피해가 났습니다. 재산 피해의 규모도 천문학적입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잘 갖춰졌다고 평가받는 유럽 국가들도 대규모 자연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미국의 서부 지역은 매해 산불과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알라스카와 캐나다는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뜨거운 여름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기후 변화로 인해 제트 기류가 약화되어 열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라지요? 우리 눈앞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무지개는 모든 살아 숨쉬는 것들이 죽임을 당했던 그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정말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상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답해야 합니다. 풍요로움에 길들여진 이들은 감사를 모릅니다. 아낌과 돌봄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이라야 삶의 비의에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일상적 삶의 자리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당분간 비대면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불편하고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성도들의 코이노니아가 약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접속을 유지하고, 기도 중에 서로를 기억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교우들은 언제라도 제게 메시지를 보내주십시오. 함께 고난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 젊은이들의 신앙 교육이 원활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안타깝습니다. 부모님들께서 적극적 관심을 가지고 교회학교에서 제공하는 영상자료를 활용하여 자녀들과 복된 시간을 마련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휴가철이 되었습니다. 안전하고 유익하고 즐거운 휴가를 즐기실 수 있기를 빕니다. 주님의 사랑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의 평화.

2021년 7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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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으로의 초대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당신 옆에 앉을 은총을 구합니다. 지금 하던 일은 뒷날 마치겠습니다. (중략) 지금은 말없이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 조용하며 넘치는 안일 속에서 생명의 헌사를 노래할 시간입니다.”(타고르, <기탄잘리>, 김병익 옮김, 민음사, p.18)

긴장된 시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지뢰밭 위를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합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아도 긴장된 표정이 역력합니다.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보면 불편합니다. 함부로 지적했다가 시비에 휘말릴 것 같아 얼굴만 찌푸리고 재빨리 지나칩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마주 선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 일을 삼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자유는 위험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한 밤중에 등불을 밝혀 들고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분별하지 못하는 당신이 등불을 들고 가는 까닭이 뭐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등불을 밝혀든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이 배려의 마음일 겁니다. 배려는 우리 일상에서 꼭 드러나야 할 사람됨의 드레입니다. 

교회 예배도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갔습니다. 겨우 석 주 대면 예배를 드리고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가자니 속이 쓰렸습니다. 허탈한 느낌도 들었구요. 학교나 유치원, 어린이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난감해 합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비상한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다면 좀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 역시 벼랑 끝에 내몰린듯 위태로운 나날입니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만, 심리적인 압박감 역시 큽니다. 다들 어떻게들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친밀한 이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긴장도 좀 풀어지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도 좀 덜어지련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 무더위 한복판을 통과하며 겨울을 떠올리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가끔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칼바람을 피하며 겨울을 견디는 로제트 식물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민들레, 질경이, 냉이, 꽃다지, 달맞이꽃, 개망초 등이 여기에 속한다지요? 로제트 식물은 아니지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잘 자란다는 인동덩굴도 떠오릅니다. 가끔은 식물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곧잘 비애에 빠지는 것은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만, 고통은 피하려고 할수록 고통의 장악력은 점점 커집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인생은 본디 고달픈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가지런하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을 풀어야 할 과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살아내야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향이 분명하다면 명백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순간순간 성실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한 걸음만 나아가도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먼 미래를 그려볼 것 없이 지금 당장 절실한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박지성은 세계적인 축구 선수였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도 슬럼프로 위기를 겪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플레이가 좋지 않으니 홈 관중들도 그가 공을 잡기만 하면 야유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들어가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공을 받고 그 공을 다시 동료에게 패스하는 것은 축구 선수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는 패스를 연결시킬 때마다 자기 스스로를 칭찬했다고 말했습니다. ‘잘했어.’ 어처구니없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런 자기 긍정이야말로 남들의 평가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집중할 수 있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기를 향할 때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로 귀결되고, 타자를 향할 때는 ‘선망’이나 ‘원망’을 낳습니다. 어느 것도 건강한 감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루 중에 몇 번이라도 자기 마음을 살피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을 살피노라면 별 것도 아닌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자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들어보셨지요?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런저런 말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 오롯이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이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금방 다른 생각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맙니다. 그것을 일러 분심이라 합니다. 나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떠돌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다시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기도에 몰입하기 전에 단어 하나를 선택하고, 분심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 단어를 조용히 떠올림으로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평화, 자유, 하나님, 고요…’ 등 어떤 단어라도 괜찮습니다. 그 단어를 일러 ‘거룩한 단어’(sacred word)라 합니다. 흙탕물을 가만히 놔두면 흙이 가라앉듯 우리 마음도 고요함 속에 머물 때 가지런해집니다. 마음이 가지런해졌다는 말은 단순함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닐까요?

 

 



화가인 장욱진 선생은 ‘나는 심플하다’라는 말이 자신의 단골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속뜻은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입니다. 그 마음을 찾으려 했기에 그의 그림이 순박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들뜨고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리라는 중심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질문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진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단순함과 정직함을 실천합니까?” “함께 예배드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조화를 잘 나누고 있습니까?”(로버트 L. 스미스, <퀘이커 지혜의 책>, 박기환 옮김, 사월의 책, p.67) 질문은 우리를 성찰로 이끕니다. 스스로 묻지 않을 때 삶은 더러워집니다. 단순함을 실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세상 안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욕구, 최상의 상태로 나아가려는 욕구를 좇을 자유를 허락하는 것을 말합니다.”(로버트 L. 스미스, 같은 책, p.88)

삶은 복잡하고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욕망의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삶은 늘 뿌리가 없기에 늘 흔들리고, 중심이 없기에 늘 고단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욕구야말로 단순한 삶의 요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박이약지(博而約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폭넓게 섭렵하되 하나의 초점에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빌 3:8b-9a)

이런 목표가 있었기에 바울은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팬데믹 상황은 부산하기만 한 우리 삶을 단순하게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님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산타 치아라 채플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 가운데 하나는 프란체스코 성인과 그의 형제들이 읽던 성무 일과서입니다. 그 책의 앞 페이지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평생의 동료였던 레오 수사가 적어놓은 글이 있습니다.

“복되신 프란체스코는 그의 동료인 안젤로 형제, 레오 형제를 위해 이 성무 일과서(breviary)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늘 이 성무 일과서를 가지고 수도 규칙에 따라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병 때문에 성무일도(聖務日禱 *시편, 찬송, 기도, 낭독으로 구성되어 하루에 여러 번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수도자들의 공동 기도)를 드리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분은 누군가 낭독하는 음성이라도 들으려고 하셨습니다. 일평생 동안 그는 그 직무에 신실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복음서 사본도 가지고 계셨는데 병이나 다른 사유로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면 누군가 그날의 복음서 말씀을 낭독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죽는 날까지 그 신실함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부님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면 나는 예배 중에 늘 그러했던 것처럼 기도 중에 내 영혼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경배하곤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 사부께서는 복음서의 말씀을 읽거나 경청하고 나면 늘 주님에 대한 존숭의 표시로 그 성경에 입을 맞추셨습니다.(하략)”(Theophile Desbonnets, , Porziuncola, p.103)

이런 태도와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그리스도 이후에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분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저 자신도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힘겨운 나날입니다. 며칠 후부터는 한반도가 열섬에 갇힐 거라는 보도도 접했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때야말로 우리 믿는 이들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야 할 때입니다. 주변에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허위단심으로 올라간 산마루에서 만나는 서늘한 바람이 지친 몸과 마음을 소생시키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시원한 바람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주님이 주는 평안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7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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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되어



“참으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이십니다.”(사 25:4)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소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전례를 중시하는 교회는 지난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켰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탈출공동체가 땅에 파종하여 거둔 첫 번째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여름에 수확하는 곡물이 보리라 하여 맥추절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래저래 7월은 농부들에게 분주하고 힘든 달입니다. 보리, 밀, 귀리를 베어내고, 가을 농사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 때의 풍경을 이렇게 그립니다. “大雨도 時行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머구리(참개구리) 소리로다.”

남부 지방에는 벌써 큰 비가 내려 많은 피해가 났다고 합니다.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볼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서울에도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화단을 관리하는 권사님은 아끼는 백합꽃이 세찬 비에 스러질까봐 지지대에 우산을 묶어 꽃 위에 씌워 주었습니다. 우산을 쓰고 있는 백합화를 보며 저는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최영철 시인의 ‘우짜노’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어, 비 오네/자꾸 비 오면/꽃들은 우째 숨쉬노/젖은 눈 말리지 못해/퉁퉁 부어오른 잎/자꾸 천둥 번개 치면/새들은 우째 날겠노/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흥건히 고인 흙탕물/몸 간지러운 햇빛/우째 기지개 펴겠노/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우째 먼길 가겠노”

시인의 오지랖이 넓습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꽃과 잎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새들이 젖은 깃으로 날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흙탕물을 슬쩍슬쩍 어루만지던 햇빛이 기지개를 펼 수 있을지 걱정하고, 먼 길 가야 하는 바람까지 염려합니다. 시인 반칠환은 이 시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세상사람 모두가 저런 ‘우짜노’를 연발했으면 좋겠다. 창문 밖 장맛비를 내다보며 정치인이, 군인이, 장사꾼이, 도둑놈이, 시인이 모두 손을 놓고 꽃잎 걱정, 풀잎에 매달려 빗방울 뭇매를 맞을 왕아치, 풀무치, 때까사리, 소금쟁이 걱정을 하다가 제가 정치인인지 사기꾼인지 도둑놈인지 시인인지 몰라 잠시 멍청해지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전쟁광이 좀 손해보고, 무기상이 셈하다 갸우뚱하고, 도둑놈 장물 수입이 줄고, 히히- 시인은 시 한 편 더 건지는 그런 시간이 많이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반칠환, ‘이 아침에 만나는 시’, 동아일보, 2003/08/22 자)

이악스러운 마음들이 빚어내는 살풍경 속에 살다보니 이 마음이 더 없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가끔 산책길에서 만나는 민달팽이나 지렁이를 풀 속으로 슬쩍 던져주는 것도 이 시가 떠올라서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산을 쓴 백합화 이야기의 후일담입니다. 하룻밤 지나고 나자 우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느 취객이 우산이 필요했던지 화단의 꽃을 밟으며 기어코 그 우산을 뽑아 가져갔던 것입니다. 몇 해 전에는 활짝 핀 해바라기를 댕강 꺾어간 분도 있습니다. 화단에 심긴 화초를 뽑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사소해 보이는 그런 도둑질이 밉게 여겨집니다. 염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은 선의를 품고 사는 이들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만듭니다. 영혼의 빈곤은 물질의 빈곤보다 심각합니다. 물질의 빈곤은 채울 수 있지만 영혼의 빈곤은 치유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낙심하거나 세상을 어둡게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은 좋은 마음으로 사는 이들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에 띄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있음 그 자체로 우리 삶이 허무의 벼랑으로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이들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정적 기억일 수도 있지만 긍정적 기억일 때도 많습니다. 탄식시편의 시인들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세태에 멀미를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워 있어 보니, 그들의 이는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도 같았습니다.”(시 57:4)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 그의 입은 엉긴 젖보다 더 부드러우나, 그의 마음은 다툼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 55:13, 21)

이 시편 기자들의 마음을 실감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이 절로 쏟아져 나올 때 우리 영혼은 황무지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자기들의 그런 마음을 속에 쌓아두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 정직하게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 순간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던 무거움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중첩된 어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비쳐듭니다. 그 빛은 기억을 통해 다가옵니다. 생의 고빗길에 처할 때마다,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허둥거릴 때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힘이 되어주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떠올리는 순간 비애는 줄어들고,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설 힘이 스며듭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계 1:8)께 소망을 둔 사람은 생의 시련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시련에 압도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런 근원적인 희망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화요일에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부산 YWCA 창립 75주년 감사예배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가는 길에 부산 인문학 아카데미 회원들과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부산이 아주 먼 곳처럼 여겨졌지만 고속열차가 생긴 이후에는 그 거리가 큰 부담이 되지 않습니다. 기차에서 읽으려고 제가 선택한 책은 통일 부총리와 교육 부총리를 역임하셨던 사회학자 한완상 박사님의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였습니다. 책 제목이 이사야의 비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들은 다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가는 기차 안에서 그 책을 다 읽은 후 든 생각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던 지식인인 그는 자신의 사상의 근저에 기독교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세상을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꾸려는 열망을 그의 속에 심어준 것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도 이사야 11장 6절부터 9절에 이르는 역사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육 부총리 시절에 그는 교육이 비정하고 잔인한 승자만을 축복해 주는 기능으로 전락한다면 짐승의 세상보다 못한 세상이 될 수도 있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짐승은 배가 부르면 맛있는 사슴이 지나가도 잡아먹지 않지만, 인간 정글의 강자들은 아무리 배가 불러도 계속 약자들을 착취하고 약탈하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욕구는 생물학적으로 자동 조절되지만 인간의 탐욕은 그렇게 조절되기 힘듭니다. 가질수록 더 가지려하기 때문입니다.”(한완상,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후마니타스, 2017, p.302)

한완상 박사님은 진정한 평화의 세상은 갑이 을의 입장에서 상황을 생각하고 해석하는 단계인 역지사지(易地思之)나, 갑이 을의 가슴으로 상황을 파악하는 단계인 역지감지(易地感之)를 지나 갑이 을의 주식을 먹으며 자기의 체질을 을의 체질로 바꿀 때 열린다고 말했습니다(한완상, 앞의 책, p.340-341). 사석에서 만났을 때 한 박사님은 그것을 일러 역지식지(易地食之)라 명명한 바 있습니다. 험하고 난폭한 세상이지만 한 번 품은 그런 꿈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우리 속에도 이런 신앙의 불꽃이 타오르면 좋겠습니다.

7월을 맞이하며 품었던 우리의 기대는 점점 탄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점점 나아져서 곧 일상이 회복될 것 같은 기대를 품었지만,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확진자가 아주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경각심이 다소 흐트러진 데다가, 전염력이 강한 델타 변이 바이러스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활동적인 젊은이들의 감염이 늘고 있는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입니다. 정부와 방역 당국은 수도권 상황이 매우 위급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어렵게 열었던 예배당 문을 다시 닫아야 할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습니다. 저도 긴장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도 정말 조심스럽게 이 상황을 이겨내시기를 빕니다. 병과 사고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어디에 부딪쳐서 다치고, 넘어져서 골절상을 입고, 뜻밖의 질병이 찾아와 혼란을 느끼는 모든 분들에게,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모두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평화.

2021년 7월 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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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깊게 살피고, 마음을 다해 응답해요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마 7:3-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일기가 고르지 않아 생활에 불편이 많습니다. 불볕더위에 시달리지 않아 다행이기는 하지만 푸른 하늘만 믿고 우산 없이 외출했다가 비를 만나기 일쑤입니다. 이제 장마철이 다가온다니 더욱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캐나다 서부 지역의 온도가 거의 50도에 육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초유의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많지만, 불편함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용기를 내는 이들은 아직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교회 지붕 수리를 마쳐서 다행입니다. 지붕을 덮은 판넬의 낡은 페인트를 벗겨내고 새롭게 도색을 했고, 곳곳에 난 크랙을 메우고 방수처리를 했습니다. 위험 요소를 줄이기 위해 다각도로 애쓰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완벽할 수는 없는 것이 사람인지라 긴장한 채 여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년 6개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는 지하 친교실에 내려가면 서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환기를 하면서 교우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만, 그 공간에 정겨운 이야기 소리로 가득 찰 날이 언제일지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7월에 접어들면서 모임에 대한 제한이 조금씩 풀리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확진자가 오히려 늘고 있는 이 상황이 걱정스럽습니다. 백신 접종이 다시 재개되면 상황이 나아질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여전히 위기의 시간입니다. 예배 참석 인원을 조금씩 늘려가려 하지만, 각자가 방역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호흡기 증상이나 열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당분간은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는 이들이 예배를 위해 모인 장소가 곧 교회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서 형식적인 예배에 집착하는 무리들을 무섭게 질타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사 1:12) 가끔 이 말씀 앞에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배제된 신앙 고백은 허위에 불과합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예배를 드릴 때는 외경심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두루 피곤할 때면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드는 책들이 있습니다. 엊그제부터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교 교수인 박희병 교수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창비, 2020)을 곁에 두고 아무데나 펼쳐 읽고 있습니다. 이미 <선인들의 공부법>, <연암을 읽는다> 등의 책을 통해 익숙한 저자입니다만, 이번 책은 좀 특별합니다. 제목에 들어있는 ‘엄마’라는 말 자체가 친숙하면서도 낯섭니다. 초로의 아들이 구순에 이른 어머니를 엄마라고 지칭하는 일은 별로 없거니와 그런 호칭이 제목에 활용되었다는 사실도 뭔가 새로운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2018년 10월부터 말기암과 알츠하이머성 인지저하증에 시달리다가 꼭 1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자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어머니 곁을 지키는 데 전념했습니다. 어머니는 기억이 흐리마리한 중에도 최소한의 주체성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말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 말들은 전후 맥락이 분명치 않고, 때로는 의미 없는 말처럼 보였지만, 그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말들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해독되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알았기에, 단편적으로 발화되는 말 속에 깃든 어머니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사적인 경험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것을 공적인 의미를 갖는 말로 바꿔놓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말 속에는 중층의 경험과 역사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이 닦았나?” “네 이가 희어졌다.” 이 말은 사정을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별 의미없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어머니의 회한과 아픔이 배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가정 형편상 작은 아들의 이는 교정해 주었지만 큰 아들의 이를 교정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들의 이가 고르지 못하고 희지 않은 것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네 이가 희어졌다”는 말은 어떻게든 그 회한을 풀고 싶은 어머니의 바람을 나타낸 것일 겁니다.

“춥다. 목도리 하고 다니라.” 박희병 교수는 이 말 속에 깃든 어머니의 마음을 이렇게 읽어냅니다. “나를 보는 엄마의 시선, ‘근심’과 ‘걱정’의 시선이 느껴지는 말이다. 근심과 걱정은 엄마가 아프시기 전에도 늘 갖고 계시던 것이지만 병원에 계시면서 더 커지고 더 뚜렷해진 듯하다. 생활과 의식이 극도로 제한되고 단순화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눈에는 초로의 노인인 내가 더욱 ‘아이’로 보인 듯하다.”(55쪽)

어머니의 말을 다 받아 적고 그 의미를 해독하기 위해 애를 쓴 끝에 박희병 교수는 어머니의 말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평생 늘 해오신 말들을 했고 늘 해오신 걱정들을 했으며 늘상 눈을 주곤 했던 대상들에 눈을 주셨다. 엄마 평생의 사랑의 방식은 죽어가는 과정에도 관철되었다. 나는 이 점을 감동적으로 지켜 봤다.”(397쪽) 생각해보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가 늘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언어화되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유심히 살피고 염려해줄 때, 너무 노골적이지 않지만 따뜻하고 섬세한 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치유 받는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가끔 손녀들이 집에 오면 아이들은 신나게 놀다가도 쇼파나 서재 의자에 앉아 있는 제 얼굴을 가만히 살핍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생긴 주름이며, 성긴 머리카락, 얼굴에 생겨난 검버섯, 더러더러 보이는 흰 눈썹까지 헤아리며 아이들은 안타까워합니다. 제 얼굴을 그렇게 똑바로 자세히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 아이들이 전부일 겁니다. 따뜻한 바라 봄은 따뜻한 관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따뜻한 언어는 새로운 삶의 분위기를 만듭니다. 미국의 가톨릭 노동 운동가였던 도로시 데이의 전기를 썼던 로버트 콜스는 도로시라는 사람의 사람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폈고 끊임없이 그들과 엮여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잠시 동안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그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로버트 콜스, <환대하는 삶>, 박현주 옮김, 낮은산, p.33)

이용하기 위해서나, 또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도로시 데이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 따뜻함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얼음 같은 것이 녹고 있음을 알아차릴 겁니다.

 

우리는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종으로 팔렸던 요셉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꿈쟁이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그런 면도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가장 큰 특징은 다른 이들의 기색을 잘 살피고 그들의 염려를 덜어주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역시 그곳에 수감된 이집트 왕의 두 신하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은 그들의 얼굴에 어린 근심을 보고 묻습니다.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창 40:7b)

 

이런 관심 덕분일 겁니다. 그는 왕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해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바로의 꿈까지 해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는 두려움이나 타자에 대한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 앞에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냈습니다. 나찌가 만든 수용소에 갇혔던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랬습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동료 수감자들의 좋은 벗이 되려고 애썼고, 위로가 필요한 이들을 돌보는 목사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것”(요 6:3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절망에 빠질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다른 이들의 눈에서 티끌을 빼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면에 숨겨진 그늘 혹은 연약함을 보시고, 그것을 조용히 품에 안으실 뿐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과 만나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와 깊이 만난 사람은 누구나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옛 사람의 옷을 입고 지내는 것은 예수를 만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깊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곳곳에 무궁화꽃이 단아한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능소화 역시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자기 때를 놓치지 않는 식물들의 성실함 앞에 설 때마다, 투덜거리느라 자기 때를 살지 못하는 유정한 인간의 모습이 부끄러워집니다. 지금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의 말과 표정과 몸짓이 무얼 말하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슬그머니 그 부름 혹은 요구에 응답하십시오. 조금 더 인내하면서 이 어려운 시간을 유쾌하게 건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한껏 누리시고, 그 기쁨으로 새로운 세상을 빚으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1년 7월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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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불편을 택하라



“내 당신의 곁에 가기만 해도
내 자신이 이미 아니리만큼 당신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너무도 어두우시와, 내 하찮은 밝음조차
당신의 가장자리에선 의미도 없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 시선>, 구기성 역, 을유문화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무탈하신지요? 워낙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기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느닷없는 중병 선고는 우리 삶의 기반을 사정없이 흔들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를 드리고, 별일 없이 잘 극복하실 거라고 격려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혼돈과 두려움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 43:2) 이사야가 들려주는 이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 오신 교우들을 보며 ‘이제는 예배당이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정물인 공간이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빈 공간을 눈길로 더듬곤 했던 제 마음의 풍경이 공간의 외로움으로 느껴졌던 것이겠지요. 주일을 준비하며 묘한 설렘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길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왕자가 자기를 길들이면 일어날 일도 들려줍니다.

“난 보통 발소리하고 다른 발소리를 알게 될 거야. 보통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굴 속으로 숨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안 먹으니까 밀은 나한테는 소용이 없구, 밀밭을 보아도 내 머리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 그게 참 안타깝단 말이야. 그런데 너는 금발이잖니.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정말 기막힐 거란 말이야. 금빛깔이 도는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도 좋아질 거야."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은 서로를 길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우는 아니지만 한 분 두 분 교우들이 교회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면서 묘한 설렘이 일었습니다. 감상적이라고 웃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 공허함은 한 길을 가는 벗들의 우정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꽤 많은 이들이 온라인 예배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이야기합니다.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렇게 생긴 여유 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옷을 갖춰 입고, 먼 길을 나서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일이 아닐까요?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제물을 바치는 과정이 참 번거롭구나 싶지요? 제사를 바치는 사람은 성전에서 스스로 제물을 잡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받아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은 제사장들의 일이었지만,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저미고,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 것은 봉헌자의 몫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숨을 거둔다는 것처럼 긴장되고 꺼림칙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봉헌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운 밀가루를 바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요즘처럼 방앗간에서 빻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절구에 밀을 넣고 공이로 찧고 또 찧었을 겁니다. 그리고 체질을 통해 거친 것들을 골라내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소금을 치고 향을 얹어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을 통해 곱게 빻아지는 것은 봉헌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농사꾼으로 사셨습니다. 많진 않았지만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시느라 한가한 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겨울철은 농한기이긴 하지만 필요한 가마니나 돗자리를 짜는 일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여름은 참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토마토, 참외, 수박이 때맞춰 익어가고, 가지와 오이도 지천이었습니다. 토마토나 참외가 익어갈 무렵이 되면 어린 저는 날마다 밭에 나가 초록색 토마토 열매가 먹음직스러운 붉은 색을 띄는 것과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는 것을 즐겁게 지켜봤습니다. 며칠 후면 저걸 먹을 수 있겠구나 싶어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면서 토마토와 참외를 살피러 밭에 나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밤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야 자초지종을 알고 얼마나 서운해 했는지 모릅니다. 새벽 기도회에 나가시면서 어머니가 그 열매를 따다가 목사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어린 시절 저의 적이었습니다. 내가 누려야 할 몫을 가로챈 사람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제가 이렇게 목사로 평생을 살고 있으니 사람 일 정말 모를 노릇입니다.

주일을 맞이하기 전 어머니가 늘 하시는 일은 꼬깃꼬깃한 지폐를 다리미로 펴는 것이었습니다. 인두를 사용하실 때도 있었고, 다리미에 숯을 담아 사용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바로 그런 준비 과정 자체가 어머니의 예배였습니다. 분주함 속에서 허둥거리는 현대인들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는 신화적 세계에 속한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참된 예배는 그렇게 바쳐졌던 것입니다.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자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왔네요. 이번 주까지는 많지 않은 인원만 예배당 입장이 허용됩니다. 그러나 7월 첫 주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집니다. 백신 접종을 하고 2주가 지난 분들은 20% 제한에 상관없이 예배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1미터 쯤 거리를 두고 앉아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니 더욱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래도 예배당에서 울려퍼지는 찬양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요즘 교회학교 교사들은 여름성경학교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많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한꺼번에 모일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을 마련하는 중입니다. 가끔 비가 내리긴 하지만 요즘 말갛게 개인 하늘과 간간이 떠있는 구름을 보노라면 저절로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아침해 명랑하게 솟아오른다’로 시작되는 여름성경학교 교가가 떠오릅니다. 요즘은 이 곡을 많이 부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이 곡을 흥얼거리노라면 순수하고 순박했던 시절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 아내와 경의선 숲길을 걸었습니다. 양 옆으로 포플러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걷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무는 앙상하게 전지되어 좀 볼품이 없었습니다. 꼭 저렇게까지 잘라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내는 흥이 났는지 ‘미루나무가 포플러지요?’라고 물으며 어린 시절에 불렀던 동요를 흥얼거렸습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 구름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놓고 갔어요.”

모든 것이 노골적이기만 한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살짝 걸쳐놓고 갔다’는 노랫말이 참 정겹습니다. 왠지 이런 노래를 부르면 영혼이 깨끗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옆지기가 이런 노래도 부르더군요.

“포플러 이파리는 작은 손바닥 잘랑잘랑 소리난다 나뭇가지에 언덕 위에 가득 아 – 저 손들 나를 보고 흔드네 어서오라고”

비슷한 유년시대를 거쳤을 텐데 이 곡은 제 기억 속에 전혀 없습니다. 아내도 정말 오랜만에 이 곡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래도 그 가사를 다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의 정서의 원형 속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했군요. 삶이 무겁고 힘겨우니 가끔 일부러라도 시간을 마련하여 이런 가벼운 일상도 즐겨보시라는 뜻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과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 되신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를 빕니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곧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6월 2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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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늘 같은 사람



“얼굴이 바로 푸른 하늘을 우러렀기에
발이 항시 검은 흙을 향하기 욕되지 않도다.”(정지용, ‘나무’ 1연)

주님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제 며칠 후면 하지입니다. 계절이 아주 빠르게 여름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청명한 하늘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여주시길래 목회실 식구들도 점심 식사 후에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고 지붕에 올라가 남산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교회 십자가 탑, 햇빛 발전소, 남산 타워로 연결되는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맑은 대기 속에 머물다 보면 마음까지 절로 환해집니다. 한 동안 거기 머물다 보니 지붕의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낮 시간에 조금 움직이다 보면 저절로 그늘을 찾게 됩니다. 뙤약볕 아래서 오랜 시간 걸어본 사람이라면 한 줌 그늘이 주는 위로가 자못 깊다는 것을 다 알 겁니다. 시골 마을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 그늘이 떠오릅니다. 그 밑에 평상이라도 마련되어 있으면 길을 가던 사람들이 잠시 다리쉼을 하다 가기도 하고, 이웃이라도 만나면 이야기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나무는 마음에 드는 사람과 안 드는 사람을 가리지도 않고, 잔소리를 늘어놓지도 않으면서 품을 열어 모든 이를 안아줍니다. 북한산에는 제가 좋아하는 귀룽나무가 있습니다. 산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그늘이 좋아 언제나 그 아래 머물다 가곤 합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아름답습니다. 새소리와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어느새 울울함은 스러지고 평화로운 느낌이 배어듭니다.

나무 그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늘 시뜻한 표정을 지으며 부정적인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 속에 머물면 저절로 힘이 빠집니다. 가르는 말, 다그치는 말, 성내는 말, 빈정거리는 말, 을러대는 말, 모욕하는 말, 새된 소리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그런 말로부터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세계-내-존재인 인간은 우리를 둘러싼 여러 가지 조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주변에 있는 이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표정과 말씨, 그리고 행동 하나하나가 가족이나 이웃의 환경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변에 마음 따뜻한 이들이 많으면 우리 마음 또한 맑아지지만, 늘 우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으면 맥이 빠집니다. 이웃 사랑의 기본은 다른 이들의 좋은 환경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월요일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생각을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줌zoom을 통한 강의였기에 친밀하게 소통할 수는 없었지만, 그 모임을 주선한 이와 잠시 안산 자락길을 걸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느긋하게 걷는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산뽕나무에 매달린 오디, 풀숲에 숨어 열린 뱀 딸기에 저절로 눈길이 갔습니다. 느긋한 평화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사람들로 복닥이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고요함을 누릴 수 있음을 왜 잊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소월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섭대일 땅이 있었더면’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꿈을 꾸었노라, 동무들과 내가 가지런히
벌 가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석양에 마을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꿈을 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한가로운 평화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시에는 집을 잃어 떠돌 수밖에 없는 사람, 보습을 댈 땅 한 평 없는 사람의 쓸쓸함이 배어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살았던 많은 이들의 경험이 그렇게 시적으로 형상화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현실이 그렇다 하여 시인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길이라 해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겠노라고 다짐할 뿐입니다. 제법 이런 시를 떠올리며 걷다가 다리 쉼을 하던 참에 동행한 목사님은 자기 삶에 잊을 수 없는 이정표가 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처음 지방의 소읍으로 목회를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평소에 늘 마음으로 따르던 목사님 한 분이 지리산에 가던 참에 그를 만나러 잠시 들렀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삼재까지 차로 모셔다 드리고, 그는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 날이 마침 수요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요집회를 마치니 늦은 밤이 되었습니다. 성삼재까지 다시 올라가 약속했던 산장까지 홀로 걷는 길은 호젓하다기보다는 괴괴했습니다. 두 시간여 무서움을 달래며 걷는 데 저만치 산장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밤 10시가 넘어 실내등은 다 꺼졌지만 외등 하나만 밝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래로 작은 불빛 하나가 왔다갔다 하는 게 보였습니다. 선배는 홀로 산 길을 걸어올 후배를 기다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불빛이 그렇게 반갑고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밤에 두 사람은 계곡에서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 날 보았던 그 불빛은 그의 마음에 쑥 들어왔고, 그날 이후 그는 그 선배를 선생님으로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려주고, 마중까지 나와 준다는 것이 때로는 큰 격려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홀로 동떨어진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이 참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마중과 배웅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곁에 있는 장막 어귀에 앉아 있다가 낯선 세 사람을 발견하고는 달려 나가 땅에 엎드려서 절을 하며 그들을 맞이합니다. 손님을 신이 보낸 존재로 여겼던 유목민의 전통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귀한 손님으로 맞이합니다. 물과 먹을 음식을 장만하겠다면서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창 18:5)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구절과 만난 이후에 마음에 소망 하나를 품게 되었습니다. 가급적이면 나를 찾아온 이들이 마음이 상쾌해져 돌아가게 만들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러 이 구절을 떠올리곤 하는 건 사실입니다.

소돔 성에 살고 있던 롯도 낯선 이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히브리서는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히 13:2)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롯을 머리로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사랑이 한 일>이라는 책에서 롯이 나그네들을 영접한 경위를 유추해보고 있습니다. 도시적 삶에 이끌려 소돔에 정착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소돔 사람들은 그를 뜨내기로 취급할 뿐, 자기들의 일원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동료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귀속에의 열망은 번번이 좌절되었습니다. 이승우는 롯이 경험했을 법한 일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땅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그 도시에 스며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도시 사람들이 그를 스며들지 못하게 했다. 그가 그 도시 사람들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도시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을 때는 영역 안의 일원처럼 대했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영역 밖의 외부인으로 간주했다.”(이승우, <사랑이 한 일>, 문학동네, p.31)

롯이 나그네들을 따뜻하게 영접했던 것은 자신이 겪은 따돌림의 아픔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토라도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나그네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몸붙여 살았으니, 나그네의 서러움을 잘 알 것이다."(출 23:9)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떠오르지만 어쩌면 여러분에게 조금 낯선 성경의 인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르실래라는 사람입니다. 길르앗 사람인 바르실래는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다윗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세상의 인심이 압살롬에게로 넘어가고 있던 참이지만, 다윗 일행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침대와 이부자리, 대야와 질그릇, 밀과 보리와 밀가루, 볶은 곡식, 콩, 팥, 볶은 씨, 꿀, 버터, 양고기, 치즈 등이었습니다(삼하 17:27-29). 그는 다윗에게 설 땅이 되어준 셈입니다. 세상이 모두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것 같은 때, 가까이 다가와 꼭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는 사람이 하나만 있어도 우리는 삶의 용기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바르실래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도 떠오릅니다.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의 몫을 미리 달라고 했던 아들, 방탕한 생활 끝에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아들을 먼 발치에서 본 아버지는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20). 참 이상하지요.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라는 개역판의 번역어가 뇌리에 스칩니다. 상거相距는 ‘서로 떨어진 거리’를 뜻하는 한자어입니다. 그 낯선 표현이 주는 생경함이 부자간의 재회를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은 밥상을 차려놓고 제자들과 만나셨습니다. 마중이라 해도 좋고 다가섬이라 해도 좋습니다. 다가섬은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적대적인 시선이 넘치는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불쾌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리에서 곁을 스쳐지나가는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임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주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어두운 밤 산길에서 만난 깜빡이는 불빛 하나가 위안인 것처럼, 이 냉랭한 세상에서 우리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하나쯤 있다면, 형편이 아무리 힘겨워도 다시 살아갈 힘을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 주일부터 교회 문을 열고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아직은 제한된 인원만 입장이 가능하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기쁨과 설렘으로 이 주간을 보내겠습니다. 하루하루 건강 잘 살피시고, 지친 이웃들의 작은 그늘이 되어주십시오. 그 환대의 자리에서 문득 주님의 그림자를 보게 될 지도 모릅니다. 평화를 빕니다.

2021년 6월 17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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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보신다.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기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 16:1-3)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6월에 접어들면서 낮 기온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퇴근 무렵에도 낮 동안 달구어진 지열 때문인지 무척 덥습니다. 재킷을 벗어 들고 걷는 데도 땀이 흠뻑 뱁니다. 농부들은 보리 수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모내기를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땅을 가까이 하고 사시는 분들의 노동이 때로는 거룩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농부들이 일확천금을 노리지 않기 때문일까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사는 이들이 부럽습니다.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 다른 이들이 누릴 몫까지 전유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안병무 선생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사유화하는 것이 죄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박 나세요’라는 덕담 아닌 덕담이 유행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영끌해서라도 도심에 집을 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모르진 않지만, 그걸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모두가 인정해버리는 세태가 안타깝습니다. 불안이 불길한 안개처럼 우리 삶을 뒤덮고 있습니다. 불안은 섬뜩한 낯섦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슬그머니 스며들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 홀로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이성적인 판단은 작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던 우화 속의 토끼 아시지요? 어느 날 토끼가 사과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다가 사과 한 알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납니다. 전후좌우를 살필 겨를조차 없이 토끼는 세상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여 질주합니다. 숲에 있던 다른 동물들도 토끼의 그 서슬에 놀라 함께 달리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왜 달려야 하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기진할 정도로 달린 후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왜 달렸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화라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멈추어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잠시 멈추곤 했다지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의 미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속에 깊은 진실이 있습니다. 분주함과 서두름 속에서는 지혜가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가끔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책장에서 빼드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책장을 설렁설렁 넘기다가 밑줄이 그어진 부분에 눈길을 주곤 합니다. 오늘도 그 중에 한 권을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만난 구절들이 있습니다.

“시간과 맞서 싸우려고만 하지 않고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은 자(‘시간은 내 편이다.’라고 믿는 자)는 느림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즐겨야만 한다.”(칼 하인츠 A. 가이슬러, <시간>, 박계수 옮김, 석필, p.172)

“천천히 가지 않으면 가까이 있는 것과 당연한 것을 간과하게 된다. 인내심을 가진 자만이 마음을 열고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앞의 책, p.177)

“느림은 무엇보다 사랑과 잘 맞는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빠름이지만 사랑에서 (그리고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림이다. 사랑은 느림에 의지한다. 바쁘고 일이 많으면 우리는 사랑을 잃게 되고 사랑은 노동이 된다. 시간이 있고 시간과의 전쟁을 잊을 때만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앞의 책, p.178-9)

시간의 여백을 마련하고 살자고 하면 사람들은 ‘참 한가한 소리를 다하고 있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봅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하나님의 속도는 얼마나 될까요? 출애굽 공동체는 천천히 걸어도 한 두어 달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전진과 후퇴를 반복했고, 애굽을 떠난 사람 가운데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광야는 출애굽 공동체가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훈련한 수도원이자 학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철저한 신뢰와 인내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만, 한국에서 거의 처음으로 유기농업을 시작한 분을 인터뷰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벌써 30년 저편의 일입니다. 그는 화학비료와 농약, 제초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퇴비를 만들어 밭에 뿌려 지력을 돋우려 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기자는 그 무모한 열정에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래서 많은 수확을 거두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망했지요, 뭐.” 정확한 표현은 모르겠지만 대충 그런 뜻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벌레가 들끓었고, 작물들도 크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3년째 될 때부터 조금 형편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타산에 맞지는 않았습니다. 기자가 이제는 포기할 때가 된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짓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망한다면 내 망신인가요? 하나님 망신이지요.” 제가 그렇게 오래 전에 읽었던 그 이야기를 잊을 수 없는 까닭은 그 고집스러운 농사꾼이야말로 참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망하게 하시지는 않을 거다. 설사 망한다 해도 나는 망한 것이 아니다. 그 분의 뜻대로 살았으니까.’ 이런 강고한 믿음이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고, 지금은 그 뜻을 잇고 있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간 저는 아시아권 선교사들의 새벽기도회 모임에서 zoom을 통해 설교를 했습니다. 200명에 이르는 분들이 동참했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 뜨거웠습니다.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응답은 물론이고 선교사들이 직면한 다양한 어려움을 두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채팅 창에 올라온 기도 제목을 보며 저는 꽤 많은 선교사들이 코로나19로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빚진 자 되어 이국 땅, 언어와 기후, 풍토와 문화 등 모든 게 낯선 그 땅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을 섬기다가 속절없이 쓰러진 이들과 그 가족을 위해 드리는 기도가 절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틀 연속으로 50분 정도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도 유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로 갈라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팬데믹 상황 이후 실추된 교회의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편협한 성경 해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훈련이 필요한지, 예수님을 15명의 선지자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지만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슬림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전해야 하는지…. 늘 생각하는 주제이면서도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질문들이었지만 성심껏 대답하려고 애썼습니다.

다른 종교가 우세한 지역에서 제도로서의 기독교와 그 교리를 전파하려 할 때는 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 정신으로 사는 이들을 마다할 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누군가의 은결든 마음을 깊은 공감으로 다독이고, 그들 속에 있는 존엄함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라는 선교 신학자는 선교를 가리켜 ‘매력의 감염’이라 말했습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바라보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이들이 매력적이지 않다면 우리가 소개하려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그러나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의 현장에서 겪는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제가 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선의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취하려 하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바로 선교 현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 피에르 신부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봉사 현장에 가서 겪은 일을 들려준 바 있습니다. 기억이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아버지는 빈민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가서 이발 봉사를 하곤 했습니다. 아베가 따라갔던 그날, 공교롭게도 이발기계에 한 사람의 머리카락이 끼었고, 고통을 느낀 그는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어린 아베에게 그것은 충격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베는 아버지에게 뭐하러 고마워할 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일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봉사할 자격을 얻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선의가 선의로 응답받지 못할 때도 여전히 그 일을 지속할 힘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는 꽤 오랫동안 비대면 예배를 지속해왔습니다. 6월 20일부터 현장예배를 재개하려 합니다. 감염자가 획기적으로 줄고 있진 않지만, 많은 분들이 백신 접종을 받으셨고, 교회 안에서의 예방 수칙에 다들 적극적으로 협력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우들과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대합니다. 예배당에 고요하지만 마음이 담긴 찬양이 울려 퍼지는 시간이 그립습니다. 부디 몸과 마음 두루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6월 1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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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한 삶을 위하여



“좋으신 주님, 제 인생의 배를 저어 아늑한 당신 항구로 이끄소서. 거기라면 죄와 갈등의 풍랑을 피하여 안전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취해야 할 항로를 보여주소서. 제 안의 분별력을 새롭게 하시어, 저로 하여금 가야할 방향을 바로 찾게 하소서. 비록 바다가 거칠고 물결이 높다 하여도, 당신 이름으로 수고와 위험을 뚫고 나가면 마침내 위로와 평안을 얻게 될 줄 아오니, 저에게 바른 항로를 선택할 힘과 용기를 주소서.”(카에사리아의 바실리우스, 이현주가 옮기고 엮은 <세기의 기도> 중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가내에 넘치시기를 빕니다.
벌써 6월입니다. 망종(芒種) 절기가 다가옵니다. 왠지 햇보리밥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빨갛게 익은 앵두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이른 아침 공원에서 주변 눈치를 살피며 앵두를 따서 입에 넣는 노인을 보고 빙그레 공모의 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오디 열매 또한 지천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오디는 오고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피하지 못해 짓뭉개지면서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제 아내는 장에서 오디를 사옵니다. 한 개 두 개 달착지근하고 신선한 오디를 먹다 보면 어느새 엄지와 검지 끝에 검붉은 물이 듭니다. 오디 물든 손을 보면서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했습니다. 농부로 사셨던 두 분의 손은 겨울만 빼고는 늘 풀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풀물이 든 손이야말로 정직한 손이 아니겠습니까?

생의 과정 중에 만난 것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에게 흔적을 남겨놓습니다. 그것은 의도한 것은 아니라 해도 슬그머니 스며들어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기도 합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 흔적이야말로 우리 삶의 빛깔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람과의 만남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엷고 진한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와 다양하게 얽힌 사람들은 우리 존재에 어떠한 형태로든 흔적을 남깁니다. 누군가 자기가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흐뭇하게 상기하게 되는 흔적이 되고 싶습니다.

드문드문 들려오는 교우들의 소식을 들으며 인생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일곱 가지 감정이 번갈아가며 찾아옵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운 지경에 선 분도 있고, 불이 사위어가듯 오랜 질병으로 기력이 쇠해가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울과 공허감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정신을 곧추세우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삶의 시간을 겪고 있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시 23:4).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단순해 보이는 구절이지만 그것이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백이라면 우리는 당당하게 눈물 골짜기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간을 견디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지켜주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저도 다음 주 초에 예약을 해놓았습니다. 목회실의 다른 식구들도 잔여 백신 접종 신청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백신 접종을 마친 이들의 경험담이 심심찮게 올라옵니다. 아직 꺼림칙한 마음에 용기를 내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나와 가족들 그리고 동료 시민들의 건강을 위해 접종에 임하시면 좋겠습니다. 부활절 이후 비대면으로 진행되던 예배는 6월 셋째 주인 20일부터 대면예배로 전환할 예정입니다. 이 때 쯤이면 꽤 많은 이들이 백신 접종을 받으실 시간입니다. 물론 좌석수의 20%로 제한되지만 현장 예배를 목말라 하시는 분들이 많아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은 텅 빈 예배당에 올라갑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좌석에 잠시 앉아 교우들을 생각합니다. 오후가 되면 찬양대석에 햇살 한 줌이 내려앉아 잠시 숨을 고르다가 물러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 고요한 풍경이 참 좋습니다. 교회 건물이 지어진지 40년이 넘어 이곳저곳 손 볼 곳이 많아집니다. 지붕에서 녹을 벗겨내고 새로 칠을 했습니다. 곳곳에 갈라진 곳으로 물이 스며들고 있기에 방수작업도 진행했습니다. 지붕의 물매가 급하진 않지만 그래도 위험한 과정인지라 인부들의 안전이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 공사가 다 마무리 되지 않았는데, 모든 일정을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사진/김승범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입니다. UN이 해양 오염과 지구 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환경보호를 위한 행동을 촉구하기 위해 1972년에 제정한 날입니다. 벌써 거의 50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지구라는 초록별은 중병에 걸렸습니다. 기후학자들은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산불과 홍수, 가뭄과 땅 꺼짐, 대규모 빙하의 붕괴 현상은 그들의 경고가 겁주기 위한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것은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의 생태학자 윌리엄 리스(William Rees)와 마티스 웨커네이걸(Mathis Wackernagle)이 개발한 독창적인 지표입니다. 생태 발자국은 인류가 매일 소비하는 자원과 배출되는 폐기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토지 면적으로 환산한 수치입니다. 동물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많은 흔적이 남지 않지만, 사람이 머문 자리는 황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태발자국이 크기 때문입니다.

국제사회는 기후 위기의 심각성에 공동 대처하기 위한 노력을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2050 탄소중립위원회’를 출범시켰습니다. 탄소중립이란 화석연료를 사용하면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불가피하게 발생한 온실가스는 나무를 심거나 청정에너지 분야에 투자함으로 실질적으로 탄소 배출량을 0이 되도록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목표가 공허한 구호에 머물지 않도록 하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합니다. 정부와 산업계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신앙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무총리실 녹색성장위원회 김정욱 민간위원장은 지구 생태계를 살리는 일에 교회가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살리는 데 무관심하면 기존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 정책을 좌지우지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눈을 똑바로 뜨고 이 세상의 이 나라의 정책이 바로 가도록 지켜봐야 합니다. 교회가 빛이 돼 가지고 탄소중립 사역이 잘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교회는 단순히 감시자의 역할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만물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해야 합니다. 지으신 세상을 보며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그 마음을 자꾸 떠올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경탄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소비사회가 우리에게서 자족하는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욕망을 우리 삶의 밑절미로 삼을 때 삶의 무질서와 혼돈과 버거움은 커지게 마련입니다.  심원한 경험은 사라지고, 더 큰 세계와의 접속은 끊어집니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면서도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며칠 전 헨리 데이빗 소로의 <월든 숲속의 생활>이라는 책을 구입했습니다. <월든>은 이미 영어책으로도 읽었고 몇 종류의 번역서도 가지고 있지만 굳이 이 책을 또 산 것은 그 번역자인 안정효 선생에 대한 신뢰 때문입니다. 도착한 책을 군데군데 읽다가 이런 구절과 만났습니다.

“내가 숲으로 들어간 까닭은 인생을 생생하게 의식하며 살아가고, 삶의 본질적인 면목들만 접하여, 인생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내가 충실하게 배워서, 죽음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내가 인생을 헛되게 살지는 않았음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며, 나날의 삶이 너무나 소중하여, 삶답지 않은 삶이라면 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리고 또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 소망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아서였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숲속의 생활>, 안정효 옮김, 수문출판사, p.137)

소로우는 미국의 콩코드에 있는 월든 호숫가에서 몇 년 살았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그 호수를 저도 찾아가 천천히 한 바퀴 걸은 적이 있습니다. 소로는 그곳 숲에 들어가 산 것은 인생을 생생하게 의식하며 살고 싶었고, 인생을 헛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하네요. 이 문장이 우리를 잠시 멈춰 세웁니다. 우리 삶은 어떤가요? 모두가 숲으로 들어가 살 수는 없습니다. 개그맨들의 우스갯소리를 인용하자면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겠습니까?’ 분주하게 살고 계신 분들에게는 제 이야기가 한가한 소리쯤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분주할수록 시간을 마련하여 일상과 무관한 세계에 잠시 머물러야 합니다.

 

시인 문태준은 “오늘날에도 유형(流刑)이라는 형벌을 시행하는 국가가 있다면/나는 그 나라에 가 죄를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갇히고 싶은 감옥은 철창살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는 풀잎 속에 갇히기를 원합니다. 벌레와 바위 속에 갇혀도 좋겠다고 말합니다(문태준 시집, <먼 곳>, ‘유형’) 시적 표현이라고는 하지만 왠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나요?

저는 요즘 월요일이면 잠시라도 시간을 내서 공원을 걸으려 노력합니다. 며칠 전에는 원효로에서 연남동까지 이어지는 경의선숲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홍제천에 이르러 돌아왔습니다. 느긋한 평화를 누렸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힘겨운 나날이지만 스스로 희망과 기쁨의 빛을 만드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빛으로 주변을 밝히면 더 좋겠구요. 주님의 은총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6월 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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