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공포증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3)


고소공포증


새벽기도회 시간에 설교를 하는 수련목회자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군에서 제대를 하기 전까지 심한 고소공포증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높은데 올라가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식은땀이 나며 큰 두려움을 느꼈는데, 심지어는 텔레비전에서 누가 높은데 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손에 땀이 날 정도였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기억해낸 어릴 적 기억이 있단다. 삼촌들이 모여 서서 어린 자신을 손에서 손으로 공을 던지듯 던지며 놀았다는 것이다. 어린 조카가 너무나 귀여워서 한 일이었겠지만, 자신이 생각할 때는 아무래도 그 일 때문에 고소공포증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 순간에 하늘을 나는 무서움을 큰 울음으로 표현했다면 당연히 놀이는 멈췄을 터, 하지만 자신은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고는 아무런 표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니 삼촌들은 조카도 재미있어 한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던지기를 했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어디 그것이 전도사뿐일까. 누군가에게는 두고두고 트라우마로 남을 일을 누군가는 장난삼아 하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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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서 피운 꽃

신동숙의 글밭(153)


제자리에서 피운 꽃





작약, 수레국화, 양귀비, 민들레, 금계국, 개망초, 철쭉, 소나무꽃, 초록 잎사귀, 둘레에는 언제나 넉넉한 하늘


초여름 강변에 피운 꽃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쉼 없이 떠돌아 다니는 생각은 바람이 되고
집 없이 자꾸만 흐르는 마음은 강물이 되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을 저절로 알 때
제자리에서 피운 꽃들에게서 배웁니다.


바람이 꽃이 되고
물이 꽃이 되는 길을


제자리에 머물러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진리의 땅에 사색의 뿌리를 내리는


들숨 날숨에 기대어 마음을 내려놓으며
명상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일상 속에 그려봅니다


상관없는 모든 아픔에까지 빗물 같은 눈물을 흘리다가
햇살 같은 웃음을 욕심 없이 짓다 보면

씨앗처럼 작고 단단한 가슴이 열리어


제가 앉은 자리에서도
제 안에 아무 것도 없던 땅에서도


진실의 꽃 한 송이
저절로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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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2)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잠에서 깨었을 때,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소리, 새들이었다. 필시 두 마리 새가 나란히 앉아 밤새 꾼 꿈 이야기를 나누지 싶었다. 


그런데 신기했다. 새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여겨지질 않았다.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데도 오히려 정겹게 여겨졌고, 윤기 있는 소리에 듣는 마음까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무엇 때문일까? 단지 새소리이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새들이라고 무조건적인 아량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새벽 이른 시간 끊임없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데에는 분명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새소리를 들으며 세수를 할 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잠언의 한 말씀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잠언 27:14)는 구절이었다.


그동안 교회는 축복을 한다는 이유로 새벽에 큰 소리를 냈던 것은 아닐까, 큰 소리를 듣고 눈살을 찌푸리는 이웃을 향하여 지금 축복을 하는데 그게 무슨 가당치 않은 반응이냐며 오히려 불쾌하게 여겨왔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축복을 한다고 해도 이른 새벽의 큰 소리는 듣는 이들에게 저주와 다를 것이 없는 데도 말이다.


전하는 것이 축복이라면 마땅히 전하는 방법 또한 축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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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신동숙의 글밭(152)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오늘의 가난함은
가난하여서 가난함은 아니다


하루치의 부유함 속에
씨앗처럼 품고 품은
빈 가슴의 가난함이다


풍성한 밥상 앞에서
밥알처럼 곱씹는
굶주린 배들의 가난함이다


행복의 우물 속에서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목마른 입들의 가난함이다


오늘 먹고 마신
부유함이 품은 가난함
있음이 품은 없음


모두가 잠 든 후
홀로 앉아서
없음을 알처럼 품는다


없음을 품고 품으며
침묵의 숨을 불어 넣으면


빈 가슴이
속속들이 차올라


없는 가슴을 채우는 건
있음의 부유함도 풍성함도 행복도 아니다 


없음을 채우는 건
없는 듯 있는 하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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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라는 도구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1)


몸이라는 도구 


인우재 방에 깔린 비닐장판을 걷어내고 종이장판을 깔았다. 처음엔 흙 위의 멍석이 전부였다. 멍석이란 짚으로 만든 것, 생각하면 단순했다. 널찍한 돌로 된 구들장을 깔았으니 돌 위의 흙, 흙 위의 풀이 방바닥의 전부인 셈이었다. 방에 누울 때마다 자연 위에 눕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좋았지만 인우재를 찾는 이들이 불편해 했다. 엉덩이가 배기는 것보다는 벌레와 친하지 못한 이들의 불편이 참으로 컸다. 어떤 이는 경기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결국은 멍석을 걷어내고 종이를 붙였다. 쌀을 담던 부대의 종이를 붙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 먼 친척 되는 분이 요양차 1년여 머무는 동안 비닐장판을 깐 것이었다.


비닐장판은 물걸레질을 할 수 있어 편하긴 하지만, 인우재와는 안 어울렸다. 무엇보다도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덥혀야 하는 구조에선 더욱 그랬다. 뜨거운 방바닥에 비닐장판, 마음부터 편하지가 않았다.



주일 저녁 아내와 함께 인우재를 찾아 다음날 새벽부터 일하기를 시작했다. 방의 짐부터 옮겨야 했다. 이부자리를 옮기고, 책꽂이를 비우기 위해 책을 옮긴 뒤 책장을 밖으로 냈다. 비닐장판을 벗겨내니 벽지 아래쪽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일일이 잘라내고 잘라낸 곳에 초배지를 바른 뒤 벽지를 발랐다. 방바닥에도 초배지를 발랐다. 방에 불을 때고 초배지가 마르기를 기다려 그 위에 장판지를 붙였다. 두툼한 장판지를 붙이기 위해서는 먼저 장판지를 물로 적셔두는 것이 필요했다.


간단할 것 같았지만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사이사이 쉬는 시간엔 불쑥 자라 오른 마당의 풀을 베기도 했다. 오후가 되어 일을 마칠 즈음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야 했다. 동작 하나하나가 자유롭지 못했다.  


돌아오기 위해 짐을 정리하고 잠시 마루에 앉아 쉬는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60년 넘게 쓰는 연장이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10년 쓰는 연장도 찾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런데 몸이라는 연장을 60여 년 써왔으니, 고단할 때도 된 셈이었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몸, 그런데도 60년을 넘게 쓰고 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고단함을 통해 깨닫는 고마움이 새삼스럽고 새로웠다. 아프다고 고단하다고 불평만 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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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두려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90)


사랑과 두려움




사막 교부들의 금언을 읽다가 만난, 압바 이시도루스의 말이다.


“제자들은 진정 자기 스승인 사부들을 사랑하고, 자기 지도자인 그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사랑 때문에 두려움을 잃어서도 안 되고,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어둡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의 말이 공감되는 것은 더 이상 두려움도 사랑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졌기 때문, 사랑과 두려움 사이의 조심스러운 걸음새를 갈수록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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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개구리의 좌선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89)


청개구리의 좌선 



청개구리가 선에 들었다.
작약 꽃 지고 남은 꽃받침,
그곳에 들어앉아 시간을 잊는다.
바람 거세게 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들어앉아 세상을 잊을
나의 꽃받침은 어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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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 그리고 성서의 시선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5. 20. 06:00

한종호의 너른마당(63)


2020,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 그리고 성서의 시선

 

우리에게 2020년은 한일합병과 식민지로서의 전락이 이루어졌던 1910년에서 110년이요, 한반도 분단의 결과인 19506·25 전쟁으로부터 70,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19604·19 혁명 60주년, 그리고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19805·18 민주항쟁 40주년이다.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이다.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전쟁 체제의 연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희생되었는가를 증언한다. 우리 역시 그런 극단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근현대사를 이어왔고, 21세기는 그런 극단의 시대를 초극할 수 있는 역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조명은 그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성찰하면서 그 교훈을 되씹어 미래의 자산으로 삼는가에 달려 있다. 성서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의 기반이 된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아주 오래 전 겪었던 역사의 고투를 두고두고 되돌아보면서 현실의 힘으로 삼는 것을 보여준다. 유랑과 추방, 망명과 노예적 삶, 탈출과 해방, 무수한 전쟁과 평화, 분단과 통일, 패망과 재건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성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읽도록 일깨운다. 함석헌 선생이 오래 전 뜻으로 본 조선 역사를 펴냈던 것도 우리의 과거를 그런 하나님의 시선으로 통찰하자는 의미였다.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유대 역사에서 유월절이 갖는 의미는 결정적이다. 이는 억압되어 있던 피압박 족속이 하나님의 해방 사건으로 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서는 길에 대해 신념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다. 달리 말해, 영구 혁명적 신앙의 반복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출애굽 사건은 역사와 믿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며, 그것은 현실을 감당하는 능력에 대한 갈망이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기도 하다.

 

성서는 사실 거듭해서 역사의 교훈, ,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걸 깨우치지 못하거나 망각한 자들의 비극과 패배를 또한 함께 조명하고 있다. 왕들의 역사는 이걸 각성했는가 아닌가로 판명되고 평가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과거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뜻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채 있다면 그건 어리석게도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 자가 된다. 역사는 그런 뜻에서 보자면, 과거라는 시간을 통해서 미래를 위해 개봉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껏 서구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독일 역사철학의 대가 헤겔은 서구의 역사만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아시아의 역사를 열등하게 보았다는 오류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역사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정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한 인물이다. 절대정신의 근본에는 자유가 있고, 이 자유가 어떤 역사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이루어나가는가를 본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절대정신 하나님의 실체와 그 뜻을 헤겔은 추적해나간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적 방법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나, 그에게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역사를 현상으로 기억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뜻으로 푼 것이다. 이는 역사철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성서의 역사관을 철학적 용어로 재정리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의 역사관도 그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헤겔적 풀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와 다른 것은 서구 중심의 사관이 아닌, 우리 자신의 내면을 존엄하게 바라보면서 다가갔다는데 있다.

 

헤겔이나 함석헌 선생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의 깊은 심연에 흐르는 보편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성서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나 현상을 그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본질적 차원의 깨우침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서는 역사이해와 역사철학적 시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의 근현대사

 

이러한 성서적 시선을 전제로 하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총괄적으로 보자면, 19세기 중후반 조선조는 봉건체제의 모순을 경험하면서 숱한 농민들의 봉기와 사상적 전환기를 맞이했고 이 과정에서 주체적인 근대화 전략이라는 선택을 밀고 나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의 중심에 인간에 대한 존엄한 권리의 존중이라는 생각보다는, 신분과 계급적 차별의 심화로 역사의 동력을 상실했고 이기적 기득권의 방어에 치우치면서 세계적 흐름에서 동떨어져나가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도 기회는 있었다.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등 시대의 모순을 뚫고 주체적 근대화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역동적인 시기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1853년 미국 페리호의 위협 아래 식민지로 전락할 상황을 결국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서 극복해내고 동아시아에서 근대전략의 수행에 일정하게 성공한다. 반면에 조선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질서에 복속된 채 시선을 밖으로 돌리지 못하고 만다. 역사의 거대한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는데, 조각배를 타고 샛강에서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세계사라는 맥락에서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이미 쌓아온 기득권, 그것도 사실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계속 움켜쥐려다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마주한 세계사의 대세는 조선을 황망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게 했으며, 그런 혼란의 와중에 일부는 저항하고 일부는 투항하면서 나라는 식민지의 늪에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조선의 20세기는 그렇게 해서 비탄과 비극으로 시작되었다.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는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시켰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쥐는 일에 보다 본격적인 능력을 얻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협력, 지원을 기초로 조선반도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1868년 명치유신 이후 40년 만에 이룬 일이었고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 성립이라는 자신감에 넘친 일본은 제국주의 체제로 질주했고 그 첫 희생자는 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조선의 근대사는 제국주의와의 접전이었으며, 이는 이후 조선 근대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했다. 식민지가 된 나라의 최대 과제는 당연히 독립이었고 그 독립투쟁의 대상은 그냥 일본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인식이 얼마나 철저한가에 따라 역사의 시대적 극복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히브리 민족에게 출애굽이 핵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따라서 이는 제국주의의 굴레와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제국주의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자 체제이며 이를 분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바인 것이다.

 

그러나 한일합병 110주년이 다가오는 때 이 나라는 반일, 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제국주의문제는 철저한 역사적 성찰의 내용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의 적대적 긴장은 우리와 일본 사이의 종족적 모순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만들어진 제국주의와 과거 식민지체제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역사적 투시는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 지배종식을 위한 역사의식이나 세계관은 성장할 사이가 없었고 그것은 강대국에 대한 의존, 종속, 굴복을 역사 속에서 체질화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바로 서는 것보다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는 것을 질타한다. 이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씀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부족한 결과로도 민족 분단에 대한 극복 의지는 견고하지 못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두 개로 갈라놓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남과 북 양 쪽에 분단정권을 세워 전쟁의 시작을 만들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남과 북에 각기 독자적인 분단정권이 성립하면 전쟁이 필연적이라며 이를 치열하게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은 북의 남침이 그 직접적인 시작이었으나 보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관리하고 해결하지 못한 결과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들 일본 제국주의 잔재 세력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움켜쥐고 유지하기 위해 분단정권 성립에 광분했으며 이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을 거의 모두 빨갱이로 몰아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 제국주의 청산이나 민족 분단의 극복을 위해 일어나야 할 남쪽의 민족적 역량은 결정적으로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은 전쟁의 끔찍한 비극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함을 아직도 낫지 않는 상처와 응어리로 남겨놓았다.

 

7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한국전쟁은 남과 북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내는데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당시 만들어진 휴전체제는 평화체제로 전환되고 있지 못하다. 전쟁이 한참인 때에는 휴전이 평화지만, 이 휴전이 길어지면서 그것은 전쟁을 다시 할 수 있는 역량의 비축기간이 되었고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대치를 결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평화는 성서의 근본사상인데, 한국전쟁 70주년은 그런 차원에서 생명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일깨우는 기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한국전쟁은 여전히 대북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에서는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것보다는 북한 붕괴론에 기여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패망했던 히브리 역사를 돌아봐도 민족분단과 상호 적대감의 지속이 얼마나 민족 전체에 비운을 가져다주는지 분명한데, 한국전쟁 70년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그 의미를 재정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604·19 혁명은 이러한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제국주의 잔재 청산의 실패가 축적한 민주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역사의 에너지였다. 이승만 독재는 제국주의 잔재 존속과 전쟁의 논리가 만들어낸 기득권 체제였고, 이로 인해 억압당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가난과 정치적 부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억압 등 당대의 현실은 민중 전체에게 숨 막히는 사태의 연속이었다. 쌓이고 쌓인 불만과 모순의 심화는 결국 발화지점을 만들어냈고 4·19 혁명은 그 발화의 현장이 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 논란에서 이승만 체제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려는 세력이 있는데 이는 4·19혁명으로 극복하려 한 역사의 과제를 모멸하는 것이며 역사의 역주행을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러한 역주행은 곧바로 이어졌다. 19615·16 군사쿠데타는 정치적 혼란, 경제적 빈곤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독자적 근대화 전략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에서는 고강도의 억압과 역사의 후퇴를 가져왔다. 4·19 혁명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로써 사라졌고, 군사 쿠데타 주역이 일본 관동군 소속의 친일분자였다는 점에서도 역사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게 이어진 역사의 퇴행적 전개는 18년간 이 나라를 괴롭히다가 무너져 내렸고 새로운 역사의 공간이 열렸다고 기대했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군사주의 세력의 반격으로 19805월 광주는 피로 물들게 된다. 80년 광주의 역사적 경험은, 이 나라가 여전히 분단, 지역주의, 빨갱이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걸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역사의 발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광주의 5월이 벌써 40년이라니 세월의 흐름도 무상할 따름이나, 문제는 이 사건의 의미가 우리 대중 전체의 역사의식에 분명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는 광주지역의 문제라는 식의 시선이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이를 전국적 차원의 고뇌와 역사인식의 성찰적 단계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수준의 지점에 놓여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는 셈이다.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는 역사를

 

하지만 이런 역사의 단계가 다 비관적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암울했던 식민지의 역사도 막을 내렸고,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고 남과 북의 평화체제 성립을 위한 노력도 그간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의 문제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내려는 의지 역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 나라에서 다시는 군사주의자들이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시대는 불가능하도록 하는 역사의 기반도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진화해왔고 발전해왔다. 중요한 단계 하나하나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역사가 가야 할 길에 대하여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경험을 우리의 역사적 혈관 속에 기억하고 살아온 것이다. 이제 실로, 지난 110년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을 힘차게 펼쳐야 할 때가 왔다. 나라는 자주해야 하며, 정치는 민주주의가 바로 서야 하고 민족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제 국민의 의지를 거스르는 친일세력은 붕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의 격동 그 밑바닥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 쉬고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의 무수한 격랑 속에서 하늘의 뜻을 믿고 자신을 던져 희생한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음도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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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보다 무서운 기억의 편집

  • 기억의 편집
    참 무서운 말입니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믿어버리면
    진실이 된다는

    김현호 2020.05.21 10:18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88)


망각보다 무서운 기억의 편집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았다. 자식들의 비석을 쓰다듬는 어머니들의 눈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난다 해도 그 눈물이 어찌 마를까. 어찌 뜨거움이 달라질 수 있을까. 어머니 가슴속에 묻은 자식들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간다 해도 여전히 꽃다운 청춘들이다.


                              사진/일요신문


그 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부끄럽다. 모르기도 했고, 모른 척 하기도 했다. 오히려 광주의 아픔을 헤아리게 된 것은 군 입대 후였다. 입대를 한 것이 신학공부 3학년을 마친 1981년 7월 1일, 5.18이 일어난 지 막 1년이 지날 때였다. 논산에서 훈련을 받은 뒤 자대 배치를 받은 곳이 광주 송정리 평동에 있는 포대였다. 


그 해였는지 이듬해였는지, 근무하던 부대에서는 동원예비군 훈련이 있었다. 예비군들이 부대로 들어와 며칠간 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예비군들의 대부분은 광주 인근에 사는 이들이었다. 예비군 훈련 중에는 야간보초를 예비군들과 같이 섰다. 우리보다 먼저 군 생활을 마친 선배들, 1시간의 보초 시간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조심스럽게 물었던 것이 5.18이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런데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발설 후 생길지도 모를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걸 어찌 말로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말로 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구나, 오히려 대답을 피하는 침묵이 버거운 무게와 헤아릴 길 없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당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이들은 한결같이 다른 말을 한다. 아예 회고록에 박아 책으로 내기까지 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망각이 아니다. 망각보다 무서운 것은 기억의 편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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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에 걸려 온 극동방송 전파 선교비 재모집 전화

신동숙의 글밭(151)


5.18에 걸려 온 극동방송 전파 선교비 재모집 전화


5·18에 극동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예전에 극동방송에 전파 선교비를 후원하셨는데, 다시 하실 생각이 없느냐고 전화기 너머에서 점잖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편에선, 왜 하필 5·18에 전화를 하셨느냐며 못마땅한 듯 반문을 하였다. 


두 자녀 이름으로 두 구좌를 후원했었다. 교회를 다니는 동안 극동방송 전파 선교비가 자동이체가 되었으니까 4년이 넘는 기간인 것 같다. 당시에 극동방송 측으로부터 선물이 배송된 적이 있다. 책 한 권이었는데 창업자이자 현 이사장인 김장환 목사의 자서전이다. 그 안에 전두환 대통령이 김장환 목사의 집에 방문한 일화가 나온다. 김장환 목사는 스스로의 행동을 자랑삼아 들려준다. 대통령이 내 집에 방문했는데, 여느 사람들을 대하듯 소박한 밥상이여서 대통령이 오히려 마음에 들어했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친분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기 목사가 집에 들렀다가 슬쩍 100만원이 든 봉투를 주고 가더라는 이야기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는 한창 민중들이 어려움과 고통에 처해 있던 국가 고난의 시기였다. 


극동방송 홈페이지


전화 너머 극동 방송국의 점잖은 목소리에게 말했다. 목사님이 있을 자리는 예수가 있었던 자리가 아니냐고. 그랬더니 오히려 최근 감옥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김장환 목사가 면회를 간 일화까지 들려준다. 김장환 목사의 말씀으로는, 내가 아니면 누가 가겠냐고. 목사가 누군 만나고 누군 안만나고 차별하면 되냐고, 누구에게든 평등해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반문을 하였다. 예수가 언제 바리세인들하고 벗하였느냐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과 낮은 자리에 있지 않았느냐며 점잖게 반문을 하였다. 그랬더니 점잖은 목소리가 하도 들어서 귀에 굳은살이 박힌 소리를 한다. 


사람은 다 나약한 것 아니냐고,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아니겠냐고. 예수님 시대에는 그런 환경이여서 그랬던 거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당시에도 성전이 있었고, 성전에서 장사를 하다가 혼이 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언제 예수님이 바리세인들하고 나란히 같은 길을 걸었느냐며. 하지만 내 귀는 굳은살이 박힐 만큼 딱딱한 귀가 아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살아 있으려 발버둥 치는 귀다. 


후원하던 당시에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하루에도 수 십 번씩 흘러 나오던 김장환 목사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극동 방송국 사옥 건축 헌금 모금 광고. 건축은 잘 하셨느냐고 물으니, 점잖은 목소리가, 홍대 쪽에 건물을 올렸다는 얘기를 한다. 평수를 물으니 400평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극동 방송은 광고비 없이 김장환 목사의 뜻에 따라서 100% 후원금으로만 운영되는 곳이라는 자부심을 얘기한다. 예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선교비는 어디에 쓰이는지 뒤늦게 물었다. 방송국 운영비에 쓰이고 직원들 월급도 주고. 그 외에 어려운 이웃들을 후원을 하지는 않느냐고 물으니, 방송에서 들리는 내용이 곧 선교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번 대구 코로나를 위한 후원금 모집을 한 것은 100% 지원금으로 나갔다는 얘기를 해온다. 


극동방송 전파 선교비 자동이체를 끊으면서 극동방송은 일체 듣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다시 극동방송에 관심을 가져 주시고 기도해 주시고 들어달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그래서 대답을 했다. 극동방송이 가난한 곳이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가난한 게 뭐가 좋은 거냐며 반문을 해온다. 건물도 있어야지 방문자들과 차도 한 잔 마실 수 있고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며 당연하다는 듯 얘기를 해온다. 그래서 말해주었다. 나는 극동방송국의 번듯한 건물을 보고 후원을 한 게 아니라고,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 나오는 곳이라 마음을 기울인 것이라고. 김장환 목사의 자서전을 훑어볼 때도 잿더미 속에서 진리의 불씨를 발견하고 싶어서 꼼꼼히 읽었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적어도 최근까지의 여정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극동 방송으로부터 잿더미 속에 불씨처럼 진리의 불씨가 보이는 날, 다시 듣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 불씨는 한 사람으로부터 피어날 수 있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진리의 양심이 밝은 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불씨는 감출 수 없이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겠냐며. 꿈 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마저의 희망의 불씨라도 꿈꾸지 않고선 스스로가 견디기 힘들 것 같아서.


그리고 하필 5·18에 전파 선교 후원금을 재모집하는 전화는 좀 그런 것 같다는 얘기를 다시 해주었다.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서 통화할 기회가 주어졌기에 제 편에서도 얘기가 나오긴 했지만, 김장환 목사의 지나온 여정을 아는 눈 밝은 이들이 많다고. 스스로가 자서전에서 얘기했던 내용이기도 하고. 다만 말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리고 까마득한 옛날의 예수라고 하지 말고, 오늘도 가슴에 살아 있는 예수의 여정을 따라가면 좋겠다고 했다. 기득권과 권력과 건물이 아닌 작고 소외된 이들과 동행하는 극동 방송이기를 바란다고 작은 소리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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