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36)

 

기도는 떡메가 아니다


   
며칠 전 ‘하루 한 생각’에 이정록 시인의 시집 <벌레의 집은 따뜻하다>에 실린 서시를 읽고서 쓴 글이 있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에 대한 글이었다.


그 글 아래 임종수 목사님께서 사진을 한 장 올리셨다. 숲속 도토리나무 세 그루가 나란히 섰는데, 세 나무가 모두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어른 키 높이쯤에 커다란 상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는데 맞았다, ‘내놓으라는 폭력이지요. 갑질~ 도토리를 탈취하려는 폭력~’라는 글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기 흉한 상처 자국은 떽메에 맞은 자국이었다.

 

 

 

 

 

가을이 되어 도토리를 따러 가는 사람들 손엔 떡메가 들려 있곤 했다. 인절미 등 떡을 만들 때 내리치던 떽메로 나무를 쳐서 도토리를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떡메에 맞을 때마다 나무는 껍질이 다 까지고, 껍질뿐만이 아니라 몸에 해당하는 줄기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런 시간이 이어지다보니 나무엔 그리도 큰 상처 자국이 남게 된 것이었다. 목사님의 사진 아래 답글을 남겼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군요.
떡메 자국!
떡메는 떡을 만드는데 쓰면 되는데, 나무를 치는 데도 썼으니 나무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싶습니다.
기다리면 아낌없이 다 줄 텐데 말이지요.
우리의 기도가 떡메가 아니기를 빕니다.
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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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처럼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린도후서 4:7-11)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나무를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백합화를 품은 흙에서는 백합향이 나는 법이다. 비록 그 삶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예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바울은 자기 생의 비밀을 이렇게 밝힌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4:6)

 

그 빛으로 인해 바울은 박해의 어두운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빛과 만났기에 바울은 빛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9) 

 

 

 

 

 

얼마나 당당한 말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이리도 크다. 살아갈 이유를 알고,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고난도 당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가슴에 이미 빛이 밝혀진 사람은 세상이 어둡다 하여 낙심하지 않는다. 돈 좀 못 벌면 어떻고,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낙심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들은 불의와 싸우면서도 거칠어지지 않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하여 안달하지 않는다. 반대자들조차 우정으로 감싸 안는 넉넉함을 보인다. 모름지기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 때문일까?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한 것과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했다. 통나무처럼 투박한 이 고백 속에 바울이라는 거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왜소해졌다. 나는 이게 너무 속상하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마음이 좁쌀보다 작은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늘 자기 문제에만 골똘할 뿐,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니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겨운 길일 수 있다. 겁 많고, 비겁하고, 욕심 사납고, 냉소적인 우리 마음이 일대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런데 일단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예기치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우리는 외로운 참새처럼 두려움에 떨며 삽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천둥소리처럼 울려옵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한 이가 누리는 홀가분함과 당당함입니다. 우리도 그런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주님의 선언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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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5)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잠언 14:31-32)

 

시인 최승호는 일찍이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 당신이 불쌍합니다”라고 탄식했다.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인간대접 받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이들의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고스란히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 신음하는 피조물의 탄식소리에 가슴이 타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믿음의 세계에 들어섰다 할 수 없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새러 로이(Sara Roy)의 글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생환한 아버지의 팔에 새겨진 푸른색 번호를 보며 자란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라 없이 떠도는 이들의 설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여러 해 전 그는 팔레스타인 땅을 찾았다. 학자로서 ‘점령’의 현실이 점령지 사람들의 경제생활, 일상생활,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다. 어느 날 일단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이 지긋한 팔레스타인 사람을 조롱하는 현장을 보았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3-4살 쯤 된 손자와 함께 당나귀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을 불러 세웠다. 군인들은 당나귀에 실린 짐을 검사한 후 당나귀의 입을 벌려보며 말했다. “이봐, 이 당나귀 이가 왜 누래? 날마다 닦아주지 않나보지?” 노인은 당황했고 아이는 겁에 질렸다. 노인이 침묵하자 군인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다. 다른 군인들은 야비한 웃음을 지은 채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노인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군인은 노인에게 당나귀 뒤에 서게 한 후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추라고 지시했다. 노인은 거절했지만 군인의 강압에 못 이겨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는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췄다. 아이는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보며 군인들은 웃으며 사라졌다. 그 노인과 둘러선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려던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Sara Roy,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Vol 32, No. 1, Autumn 2002, Issue 125) 

 

 

 

새러 로이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언 14:31)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이런 모욕과 폭력이 일상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슴은 멍이 들었다. 하나님의 그 멍을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역사의 섭리자로 믿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쉬지 않고 힘써야 한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는 모욕을 당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갑질하는 이들 앞에서도 변변히 자기를 지켜낼 수 없는 을들의 비애가 어둠이 되어 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다 하여 비존재 취급을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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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2)
   

주보 <얘기마을>에는 ‘목회수첩’이라는 면이 있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는 자리였다. 애정과 책임감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싶었는데, 글을 쓰는 마음이 늘 조심스러웠던 자리였다.


숫자로 표시하던 ‘목회수첩’ 이야기는 2965번에서 멈췄다. 단강에서 독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쓴 글이 2001년 9월 9일자 <얘기마을>에 담겨 있었다. 무슨 까닭일까, 오래 전 쓴 글을 읽는데도 여전히 두 눈이 젖는 것은.

 

 

 


 

사실 오늘 막걸리를 몇 잔 마셨습니다. 처음 마셔보는 막걸리에 약간의 취기마저 느낍니다. 마을의 젊은 사람들이 마련한 저녁을 함께 먹으며 마주 앉은 재철 씨가 따라주는 막걸리를 기꺼이 받았습니다.


59년 돼지 띠, 재철 씨는 나와 동갑입니다. 그러나 농촌에 산다는 이유로 재철 씨는 아직 결혼을 못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재철 씨는 막걸리를 유난히 좋아합니다. 재철 씨에게 언젠가 “재철 씨가 따라주는 막걸리를 마시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재철 씨의 아픔으로 한걸음 다가가고 싶었습니다. 재철 씨도 한 걸음 다가오면 우리는 형제처럼 만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송별 모임. 이렇게 먼 길을 떠나고 나면 재철 씨와의 약속을 못 지키지 싶어 기꺼이 재철 씨가 주는 잔을 받았습니다. 자꾸 마음이 무너지는 재철 씨 앞에 나도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습니다. 15년, 정들만 하니까 멀리 떠나가는 사람, 갈 사람은 가는구나 당연히 여기며 욕이나 한 마디 하면 될 것을, 무엇 그리 아쉬움에 자리를 만들고 막상 같이 있을 땐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밤이 늦도록 나누니 고맙고 송구할 뿐입니다.

 

옆에 앉은 병철 씨는 자꾸 울먹울먹하고, 그러다 노래를 자청했고, 병철 씨의 애창곡 ‘칠갑산’을 청했지만 병철 씨는 굳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병철 씨가 부른 노래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였습니다. 준이 아버지가 생각나는 대로 따라했는데, 그 노래를 들으며 마음은 눈물에 젖었습니다. 내가 눈물을 보이면 자리가 아니다 싶어 마음을 눌렀지만 같이 얼싸안고 울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요, 이젠 단강을 떠납니다. 내 마음의 고향, 내 삶의 분신과 같았던 곳,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스승, 두고 온 북한 땅 고향을 그리시다 떠난 아버님이 누우신 곳, 멀리서 뒷모습만 보아도 말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아는 정겨운 사람들이 사는 곳, 이젠 이곳을 떠납니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낯선 곳으로 갑니다. 주님의 교회가 큰 상처를 입어 주저앉았다는 말을 듣고 대답을 했습니다. 다시 땅 끝으로 부르시는구나, 나를 광야로 내모시는구나,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단강으로 처음 들어오던 날이 떠오릅니다. 3월 25일이었지만 진눈깨비가 사납게 날렸습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단강을 향할 때의 마음, 창립예배를 드리던 날 첫 발을 내딛은 기억이 소중하게 남아있습니다. 아무도 가려하지 않던 사마리아 성을 찾아가 그 성을 기쁨의 성으로 만든 빌립, 성령께서 그를 또 다시 광야로 이끌자 다시 그 길을 떠나는 빌립을 생각하며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빌립이 걸어간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그 길을 걸어보고 싶었는데, 이번의 부름이 내게는 그런 부름으로 여겨집니다.

 

떠난다는 말을 처음으로 교우들에게 할 땐 무슨 큰 죄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눈물, 탄식, 한숨, 망연한 눈빛. 덩달아 뜨거운 눈물이 솟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안 된다고 사정을 하기도 하고, 땅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울고, 아무 말도 못한 채 손만 마주잡고. 예배가 끝났는데도 돌아설 줄을 모르고…. 떠남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리도 힘든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는 못하니 하나님이 목사님 가는 길 막아달라고 교우들이 기도를 드릴 땐 다시 한 번 주님의 뜻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대로 힘들어 했습니다. 외출한 목사를 기다리며 밤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눴답니다. 다음날 박종관 씨 집에서 어르신 몇 분을 만났더니 둘 중의 하나를 택하랍니다. 아예 교회 문을 대못으로 걸어 닫고 떠나든지, 당신들이 모두 교회에 나올 테니 남아달라고요.


깊은 한숨과 함께 두 눈이 젖고 말았습니다. 당신들이 교회에 나올 테니 떠나지 말라니요. 내가 정말 떠나도 되는가, 내가 지금 어디를 떠나 어디로 가려 하는가, 이미 정한 일이면서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욕을 먹더라도 난 못 갑니다, 떠날 수 없습니다, 해야 되는 것 아닌가, 고마운 인사로 받기에는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아렸습니다. 이런 분들을 두고 떠나려 하는 나 자신이 안쓰럽고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곧 돌아오겠다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지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금은 떠나지만 언젠가 꼭 돌아오겠노라고, 한참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맙게도’ 목사의 말을 받아주신 그분들은 오히려 나를 위로했고, 마을 사람들과 같이 식사할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지나온, 쉽지만은 않았던 단강에서의 시간이 눈물로 녹아 아름다운 강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은물결과 은모래로 아름답게 빛나는 강, 지나온 모든 시간과 일들이 문득 하나의 아름다운 강으로 변하는 은총이라니요!

 

이곳을 떠나 최악의 상황으로 빠졌다는 그 곳, 독일로 갑니다. 주저함 떨치고 약한 마음 버리고 갑니다. 다시 한 번 내 삶을 이끄시는 주님을 만나려 합니다. 조금씩 상처가 회복되고, 잃어버렸던 웃음을 되찾게 되겠지요. 그러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이 전해주신 기도와 사랑. 깊이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지요.

 

‘내가 선 이곳은’ 이라는 동화를 쓰며 벼랑 위에 자라는 한 그루 소나무가 흔들리고 약해질 때마다 ‘바위들이 나를 붙잡아 주었습니다.’라고 쓴 적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저에게는 바위였습니다.

아름다운 우정으로 간직하겠습니다. 그 아름다운 우정은 가슴속에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오래도록 남을 것입니다. 부족한 사람이 가는 길, 다시 한 번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단강에서 쓰는 ‘얘기마을’은 이렇게 멈추지만 서로를 향한 기도 안에서 여전히 우리는 하나일 것입니다.

 

바다를 모래로 막으신 하나님, 바다 한 가운데 마른 길을 내시고 당신 백성을 건너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2001. 9. 8. 단강에서 한희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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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3)

 

오늘을 충실하게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3:12-14)

 

잘 산다는 것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뿐이다. 어제도 내일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지나가 버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살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내다보며 미리 불안해한다. 행복은 늘 저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며 오늘을 헛되이 흘려보낸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그 자리가//바로/꽃자리니라”(구상, ‘꽃자리’).

 

사실 삶이 너무 힘들면 이런 이야기가 다 한가로운 사람의 말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 자리가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자리임을 자각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성경은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살다가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며 이렇게 가르친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브리서 3:13)

 

 

 

 

 

사람은 누구나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불안의 해독제로 공동체를 주셨다. 신앙 공동체는 우리가 세상 물결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 믿음대로 살기 위해 애쓰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 속에는 든든한 기둥이 들어선다. 내가 넘어져도 다가와 일으켜 세워줄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릴 때도 선뜻 다가와 짐을 대신 져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죄의 유혹에 흔들릴 때면 다가와 부드럽게 혹은 준엄하게 꾸짖어 바른 길 가도록 해 줄 사람이 있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는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의 가슴에 봄 햇살로 다가가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겨울 삭풍처럼 다가가는 사람들인가? 사람들의 마음이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사람인가, 악을 향해 나아가도록 유인하는 사람인가? 성도는 이웃들 속에 잠든 생명을 깨우는 ‘봄 햇살’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3:14). 인내하는 믿음이 절실하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실히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은 늘 저만치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방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시인의 고백은 삶의 곤고함을 모르는 이의 한가한 노래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을 가장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불만과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시간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인생의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삶을 맡긴 채, 즐겁게 사랑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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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4)

 

시간 여행(1)
   

우연히 발견한 몇 장의 옛 주보는 시간 여행을 하게 했다. 표지에 ‘징검다리’라는 짧은 글을 실었던 2001년 8월 17일자 주보 교회소식 란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다.

 

 

 

 

1. 벌침 같이 쏟아지던 볕이 조금씩 순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순한 볕에 들판의 벼들도 패기 시작하네요. 이번 주 목요일(23일)이 ‘처서’, 이젠 찬 공기에 익숙해질 때입니다.


2. 지난 주 섬뜰의 박종관, 변학수, 변완수, 최태준, 김재용 씨가 예배당 화장실의 벽을 넓히는 공사를 해주었습니다. 자원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땀을 흘렸는데, 그 정성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이어지던 중 마지막 소식은 이랬다.


7. 미국 뉴저지의 길벗교회(담임, 김민웅 목사)에서 창립주일을 맞아 단강으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귀한 정성, 고맙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소식들, 나로서는 아찔하고 그리운 시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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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3)

 

내 몸이 너무 성하다

 

 


 

거꾸로 걷거나 뒷걸음질을 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정록 시인의 시를 읽다가 그의 시를 모두 읽고 싶어 뒤늦게 구한 책 중의 하나가 <벌레의 집은 따뜻하다>인데, 보니 그의 첫 번째 시집이다. 첫 번째 시집을 뒤늦게 읽게 된 것이었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책머리에 실린 ‘서시’가 매우 짧았다. 군더더기 말을 버려 끝내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것이 시라면, 시인다운 서시다 싶다. 

 

다시 한 번 곱씹으니 맞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사람 손을 많이 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몸이 너무 성하다니! 나는 아직 세상을 잘 모른다고, 사람들 속에서 살지만 삶을 모른다고, 여전히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짧은 말 속에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밝힌다. 그런 표현과 단어조차 흔하고 뻔해 슬그머니 나무 이야기를 통해서. 

오히려 그런 고백이 시인을 향한 신뢰로 확장된다. 다음 장을 넘기는 마음에 설렘과 기대가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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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아닌 때
    


1981년, 그해 가을을 잊을 수 없다. 짝대기 하나를 달고 포상 휴가를 나온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군에 입대한지 넉 달여 만의 일이었으니 그야말로 꿈같은 휴가였다. 
논산에서 훈련을 마친 뒤 자대에 배치를 받자마자 배구대표선수로 뽑혔고, 광주 상무대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을 했다. 9인제 배구였는데 나는 레프트 공격수였다. 아무리 규모가 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해도 이등병에게까지 휴가를 줄까 염려했던 것은 기우, 보란 듯이 3박4일간의 휴가를 받은 것이었으니 군 생활 중에 누릴 수 있는 기쁨 중 그만한 것도 드물 것이었다.

구름 위를 날아가는 것 같은 기차를 타고 올라와 수원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부곡역에 내린 나는 먼저 교회를 찾아갔다. 예배당에서 기도를 드린 뒤 목사님께 인사를 드리려 사택에 들렀다. 사모님이 나오셨는데, 나를 보더니 왈칵 눈물을 쏟으신다. 반가움과는 다른 눈물이었다. 잠시 뒤에 나오신 목사님도 마찬가지였다. 눈물부터 보이셨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더 참지를 못하고 여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요?” 질문을 받은 두 분은 당황하셨다. 모르고 왔느냐며 되물으셨다. 

막내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그렇게 들어야 했다. 나를 좋아하고 따르던, 자기도 신학을 공부해서 형을 도와 목회를 하고 싶은 꿈을 가졌던, 형이 우승을 하면 휴가를 나갈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는 매일 밤 예배당을 찾아 기도를 드렸던, 우승을 하며 누구보다 먼저 떠올랐던, 휴가를 나오며 가장 싶었던 사랑하는 동생이었다.


사고였다. 막 입대한 내가 충격을 받을까 집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채 막 장례를 마친 뒤였다. 포상 휴가를 받아 기쁨으로 달려온 내게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내가 동생을 잃은 것과 어머니가 막내아들을 잃은 것은 달랐다. 비교할 수가 없는 슬픔과 고통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생의 유일한 벗을 잃었다고 했다. 그만큼 막내는 심성이 착했고 다정다감했다. 그런 어머니 앞에서 나는 눈물조차 보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를 모르겠는 시간을 뒤로 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그 때의 쓸쓸함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눈물에 젖은 기도를 드렸다. ‘내 것 아닌 것, 내 것이라 하지 않게 하소서.’

 


부대에서는 포병 생활과 군종 생활을 겸하여 했는데, 어느 날 말씀을 준비하다가 마가복음 11장을 읽게 되었다. 잎만 무성한 채 열매가 없었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는 구절이었다.


예수께서 베다니 지역을 지나가실 때는 유월절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6월말 7월초에 열매를 맺는 나무에게 4월에 열매를 찾는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었다. 나무 잘못이 아니라 열매를 찾는 이의 잘못이었다. 동생을 보낸 슬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당하게 여겨졌던 그 말씀은 이런 의미로 다가왔다. ‘주님은 때 아닌 때에 열매를 요구할 수 있는 분이구나.’

며칠 전 새벽기도 시간에 만난 본문이 같은 본문이었다. 같은 본문 앞에서 다시 한 번 동생을 떠올리게 되었다. ‘너는 멀리 떠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턴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자’ 했던, 귀대하던 기차 안에서 가졌던 다짐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우리의 삶이란 때 아닌 때에 열매를 찾는 그분의 요구를 따라야 하는 삶이다. 시간이 우리 몫이 아닌 것처럼 항의나 원망 또한 우리 몫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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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61)

 

징검다리
    

오래 전 단강에서 보낸 시간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보와 함께 기억을 하곤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주보에 담았다. 땅 끝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여겨졌던 일들, 그 일을 기록하는 것은 내가 이웃에게 다가가는 한 방법이었고, 내게 허락하신 땅을 사랑하는 한 선택이었다. 고흐가 그림을 통해 땅의 사람들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나는 이야기를 통해 다가갔다. 주보의 이름도 <얘기마을>이었다.

지렁이 글씨로 글을 쓰면 아내가 또박또박 옮겨 썼다. 때로는 아내조차 내가 쓴 글씨를 읽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글씨를 읽지 말고 이미지를 읽으라 말하고는 했다. 그렇게 손으로 써서 만든 주보는 민들레 씨앗처럼 조용히 퍼져갔고, 700여 명의 독자가 있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얼마든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식구들이었다.

 


 

단강을 떠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서로에게 그랬다. 떠남을 얼마 앞두고 만든 주보 표지에 ‘징검다리’라는 짤막한 글을 실었다. 

내가 아니면 건너지 못한다.
나는 건너지 못한다.    

떠나는 날이 보름여 남았을 때니 단강을 떠난다는 것을 교우들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떠나는 마음을 남기고 싶었다. 우연히 만난 옛 주보 표지에 실린 ‘징검다리’, 나는 여전히 징검다리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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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52)

 

낙담의 마귀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여호수아 1:9)

 

모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여호수아는 중대한 책무를 떠맡았다. 요단강을 건너(cross over)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백성들을 이끄는 것 말이다. 젊은 시절부터 모세를 모셔왔던 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요단강은 옛 삶과 새 삶의 경계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셨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여호수아 1:5). 여호수아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늘 율법을 읽고 그 말씀을 성심껏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또한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낙담의 사전적 정의는 바라거나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실망하고 맥이 풀리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홀로 결단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성숙하지 않은 대중은 비전보다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걸 아시기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후 360년 경 로마의 스키타이(Scythia)에서 태어난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탐식, 부정, 탐욕, , 낙심, 태만, 자만심, 교만이라는 악덕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낙담에 맞서야 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낙담의 마귀는 영혼의 영적 관상 능력을 흐리게 하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완전히 어둡게 만들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고, 형제들을 온유하고 긍휼하게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일에 대한 미움, 심지어 수도 서원 자체에 대한 미움을 주입합니다. 그는 영혼의 유익한 결단을 손상시키고 인내와 끈기를 약하게 만들며, 영혼을 무감각하고 마비되게 하고, 낙심되는 생각들의 속박을 받게 만듭니다.”(<필로칼리아1>, 엄성옥 옮김112)

 

낙담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도,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 성경 묵상,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 등이다. 낙담의 마귀가 횡행할 때일수록 함께 기운을 북돋워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치고 낙심한 이들 곁에 다가가라고 명하신다. 어디에 가든지 함께 있겠다 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불화와 갈등의 세계를 건너 화해와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

 

하나님,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한눈을 파는 순간 패배자로 전락할 거라는 생각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경쟁에서 이길 때는 우쭐하지만 패했을 때는 주눅이 들고 맙니다. 패배의 기억은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그 응어리는 돌덩이가 되어 우리를 짓누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꿈조차 잃고 맙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낙담을 떨쳐버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저 진리의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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