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 손길이 놓아둔 고마운 걸림돌

신동숙의 글밭(206)


어진 손길이 놓아둔 고마운 걸림돌


글쓰기는 이미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양심의 등불을 좁은 발등에 비추어 한 걸음 한 걸음,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어슴푸레한 어둠 속 호젓한 산책길이다. 그렇게 글이 걸어가는 길은 하늘로 난 허공처럼 매끈한 길이면서 동시에 내면의 땅을 밟고 걸어가야 하는 울퉁불퉁한 길이 마음속 세상 안으로 향해 있다. 


바깥 세상과 내면의 세상, 눈에 보이는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상을 왔다갔다 하면서, 점차적으로 서로가 크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며, 조화로운 드나듦일 수 있다면, 세상은 한결 넉넉해지고 두루 따뜻해지고 더불어 행복해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안과 밖을 자주 드나들다 보면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엄연한 사실과 우리 모두는 원초적으로 하나에서 분화된 개체라는 단순한 사실에 눈을 뜨게 되고, 바깥 사물에 초점을 맞추는 일처럼 그대로 내면의 현상에도 한 점으로 초점이 맞춰지면서, 서로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사물과 세상의 이치를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릴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에서 온전히 투명하게 비추는 사랑과 자유를 그려본다.


하지만 그 초점이란 한 순간에 단 한 번 맞출 수 있을 뿐이다. 한 걸음에 등불 하나씩 놓아두신 어진 마음에는 성급한 넘침이란 없다. 우리 몸의 생명 활동에 필요한 물과 음식과 공기처럼 비워지면 채우고, 채우면 비워야 하는 끊이지 않는 흐름이다. 초점을 맞추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안목이란, 언제나 깨어서 초점을 조절함으로 매 순간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기를 삶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 끝까지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들숨 날숨처럼 숨줄이 붙어 있는 한 다함이 없는 생명의 흐름인 것이다.


그 안과 밖을 빛으로 두루 아우르는 눈동자와 같은 마음속 한 점 중심이 있다. 그 중심이란 과일 속 씨앗처럼 이 세상 속 씨앗 같은 진리와 사랑과 자유의 씨앗이다. 참자아, 불성, 본성, 성령, 하느님, 하나님, 진리 그리고 진리의 몸이 된 그리스도 예수의 온전한 마음이다. 이슬 한 방울이며 눈물 한 방울이며, 눈물처럼 촉촉한 두 눈동자에 한 점으로 맺혀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다. 그 순결한 눈길이 하늘에 태양처럼 환하게, 때론 어둔 밤 달빛처럼 은은하게, 먼 별빛의 그리움으로, 서로가 서로를 향한 그리움의 물길이 누구의 가슴속으로든 공평하게 흘러서 온갖 생명을 살리는 샘물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본다.




말씀과 기도 속에 오래 머물러 깊어진 만큼 고요한, 가슴의 중심이 움푹 낮아져 패인 옹달샘에서 길어 올린 한 그릇의 샘물 만큼 작은, 아무리 배고파 보채어도 체할까봐, 꼭 한 입에 한 숟가락씩 천천히 떠 먹여 주시는 어머니의 어진 손길 만큼 느린, 한 걸음 한 걸음 걷는 두 발의 좁은 보폭 만큼 더딘, 충분히 내쉰 날숨의 깊이 만큼만 저절로 채워 주시는 들숨처럼 자연스러운, 자신의 내면 속 한 알의 씨앗을 향하여 걸어가는 글쓰기에는 성급한 탐욕이란 발 붙이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 속 낮아진 가슴에 고인 한 그릇의 샘물이면 하루를 살아가기에 넉넉한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꼭꼭 천천히 먹으라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낮고 작고 느리고 더딘 사랑을 생각한다. 이 너른 땅을 무작정 달리기보다는 진리와 사랑의 말씀 속에 유유히 함께 거닐자며, 다니는 길마다 돌멩이와 바위와 작은 풀꽃들과 시원스레 하늘로 뻗은 나무들을 놓아두신 어진 마음을 생각한다. 


내면으로 걸어가는 산책길에도 고마운 걸림돌이 있으니 천천히 걸으라 하신다. 천천히 걸으며 세심한 눈길로 주위를 바라보라 하신다. 하늘도 보고 발아래 생명들도 보고 먼 산도 보며 그렇게 천천히 인생길을 함께 걷자 하신다. 그렇게 세상을 향하여 걷는 느리고 더딘 걸음이 동시에 마음을 열어 내면으로 걸어 들어가는 호젓한 산책길임을 깨우쳐 주시려는 뜻인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 동안 걷는 길 위에 어진 손길이 놓아둔 고마운 걸림돌에는 무엇이 있는지 헤아려본다. 선물처럼 주시는 하루 속에 보물처럼 씨앗처럼 내 가슴에 심어 두신 하늘의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겐 그 뜻을 헤아릴 여유도 없이, 서산으로 넘어가는 태양보다 빨리 바람보다 더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 길 위에 돌을 말끔히 치워 버렸다. 대문 앞까지 도로를 닦고 산 위를 밀고 산 속으로 터널을 뚫어 고속도로까지 닦아 놓았다. 


나 또한 잘 닦여진 그 도로를 달려가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기도 하며 살아가는 처지지만, 그리움이 무르익기도 전에 성급히 달려가는 속도 속에 놓쳐 버린 그리움의 의미와 무시해 버린 생명들의 소중함과 언제나 자연이 말없이 들려주는 의미들을 떠올리다 보면, 늘 마음에는 그늘이 진다. 영혼과 섞이지 못하고 소화 되지 못한 삶의 의미들이 쓸쓸히 홀로 그 자리에 그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건지 '삶이 이게 다가 아닌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문득문득 내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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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손을 잡으며

한희철의 얘기마을(48)


아기의 손을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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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고운 아기의 손을 마주 잡습니다. 


품에 안겨 막 잠든 아기, 뜻하지 않은 소리 듣고 놀라지 않도록 가만히 잠든 손을 잡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지 마음이 그런지 그렇게 손을 잡아주면 아기가 놀라지 않는다고 어른들은 말합니다.


 누구일지요.

 따뜻한 손 건네 우리 생 마주 잡는 이, 누구일지요.


-<얘기마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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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47)


어느 날의 기도



아무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검은 숲으로 단숨에 드는 새처럼


당신 품엔 그렇게 들고 싶습니다.

언제라도 주님.  


-<얘기마을>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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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겠다

신동숙의 글밭(205)


춥겠다



여름방학 때

서울 가는 길에


9살 아들이 

문득 하는 말


"지금 서울은 춥겠다."


지난 겨울방학 때 

서울을 다녀왔었거든요


파주 출판 단지 

'지혜의 숲' 마당에서 


신나게

눈싸움을 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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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나

한희철의 얘기마을(46)


보이지 않는 나




“마음이 몸을 용서하지 않는다.”


티내지 말자 하면서도 입술이 형편없이 터졌다.


가슴은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서서히 가라앉았고, 덩그런 바위가 그 위에 얹혀 있는 것도 같았다. 거센 해일을 견디는 방파제 같기도 했다. 잠자리에 누워선 철컥 철컥 벽시계 소리가 가슴 밟는 소리로 들렸다.


시간은 어렵게 갔고, 옥죄이는 초라함에도 내가 보이질 않았다.


-<얘기마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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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하나

신동숙의 글밭(204)


물방울 하나



하나와 하나가 만나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나 하나로 

온전할 수 있다면


너 하나로

충만할 수 있다면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물방울은 

하나로 맺히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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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똥

한희철의 얘기마을(45)


제비똥


안속장님네 마루 위 천정엔 올해도 제비가 집을 지었습니다. 점점 그 수가 줄어드는 제비가 용케 옛집을 찾아 다시 한 번 집을 지은 것입니다.


집 짓느라 바지런히 오가며 때때로 흰 똥을 싸 내려 마루에 똥칠을 합니다. 깨끗하신 속장님 연신 마루를 닦다 이번엔 신문지를 널찍하게 펼쳐놓았습니다.



문을 닫아 놓아도 용케 들어와 집을 진다고, 똥을 싸대 일이라며 말투는 귀찮은 듯 했지만 그 말 속엔 온통 반가움과 고마움이 들었습니다.


한갓 미물의 변함없는 귀향, 사람이 그보다 난 게 무엇일까. 백발의 세월 두곤, 돌아온 제비가 섧도록 고마운 것입니다.


까짓 흰 똥이 문제겠습니까.


-<얘기마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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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오늘

신동숙의 글밭(203)


새로운 오늘




오늘 이 하루를 

새롭게 하는 맑은 샘물은


맨 처음 이 땅으로 내려온 

한 방울의 물이


오늘 속에 섞이어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기에


당신의 가슴 속 맨 밑바닥으로 흐르는 

한 방울의 눈물이


눈동자 속에 맺히어

바라보는 순간마다 새로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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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든 멍

한희철의 얘기마을(44)


가슴에 든 멍



영웅적인 고통이나 희생이 아니다.

그저 잘디 잘은 고통뿐.


단 한 번의 주목받는 몰락 아니다.

그저 서서히 무너질 뿐.


가슴에 든 멍을 스스로 다스리며

또 다시 아픈 가슴 있지도 않은 가슴으로 끌어안을 뿐. 


목회란 울타리, 

그뿐 또 무엇. 


-<얘기마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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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정은

한희철의 얘기마을(43)


눈에 흙이 들어갈 때까정은




버스를 타러 신작로로 나가는데 길가 논에서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일을 하고 있었다. 반백이었던 머리가 잠깐 사이 온통 하얗게 셌고, 굽은 허리는 완전히 기역자로 꺾였다.


할아버지는 쇠스랑대로 논에 거름을 헤쳐 깔고 있었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는 “올해도 농사하세요?” 하고 여쭸다. 나이도 나이고, 굽은 허리도 그렇고, 이젠 아무리 간단한 농사라도 할아버지껜 벅찬 일이 되었다. 


잠시 일손을 멈춘 할아버지가 대답을 했다. 


“올해까지만 짓고 내년에는 그만 둘 꺼유.”


할아버지는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안다. 할아버진 지난해에도 그러께도 같은 대답을 했다. 아마 내년에도 같은 대답을 하실 게다. 올해까지만 짓고 내년엔 그만 두겠다고. 


언젠가 취중에 ‘눈에 흙 들어갈 때 까정은 이렇게 일하며 살 거’라던 할아버지는,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흙을 일구실 것이다. 그걸 당신 삶으로 알 것이며 그런 삶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담 내년엔 그만 둔다는, 입버릇 된 되뇜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얘기마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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