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설교

한희철의 얘기마을(120)


가장 좋은 설교


농촌목회를 하면서 느끼게 되는 어려움 중 그중 큰 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란 모든 목회자가 한결같이 느끼는 어려움이겠지만, 농촌에서는 더욱 더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까짓 서너 명 모일 때가 많은데 뭔 어려움이냐 할지 모릅니다. 사실 도시 교회에 비한다면 농촌교회는 지극히 단순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요구가 있는 것도 아니요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내용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적은 교인이 피곤한 몸으로 참석하여 그나마 피곤을 이기지 못하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 적당히 때워(?) 넘겨도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유혹처럼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점이 어렵습니다.


말씀을 사모하며 기다려온 사람들이 빛나는 눈빛으로 설교자를 응시하고, 구절구절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으로 화답할 때 설교자는 신(?)이 나고 다음 설교를 정성으로 준비할 것입니다. 정성껏 말씀을 준비하지만 몇몇 지친 시선뿐 아무런 울림이 없을 때 느끼게 되는 공허함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군데군데 빈자리는 함정과도 같아서 쉽게 시선과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다.  


엉성한 원고와 채 정리되지 않은 어수선한 생각으로 설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준비한 말씀을 접고, 주어진 모습에 걸맞는 말씀을 찾아 넋두리조로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 ‘축복’과 ‘은총’이라는 말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농촌의 현실, 본문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말씀과 예화가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저런 이유로 농촌 목회자에게 설교는 나태해지기 쉬운 일이 됩니다. 주어진 상황에 관계없이 성실하게 말씀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 빈자리의 아픔과 허전함을 믿음으로 이긴다고 하는 것이 명분 있는 큰 고통에 비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이기도 합니다. 설교시간은 무엇보다도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요 내 신앙고백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도 크게 보는, 사소한 일도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훈련을 해야 하며 말씀에 숨겨진 또 하나의 뜻을 캐는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좋은 설교는 일상 속에서 지치고 외로운 이웃들과 어떤 삶을 나누느냐 하는 것일 겁니다. 그게 설교라는 것을 농촌으로 떠나온 지 몇 년 지난 요즘에서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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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모르는 길

신동숙의 글밭(256)


화두(話頭), 모르는 길



가을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가을 바람이 날 부르는 것으로 알고 나선 길입니다. 가을 바람에 날리우는 풀씨 한 알 만큼이나 가벼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에 닿을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모르는 길을 나섭니다.


애초에 알고자 나선 길이 아니라 머릿 속에 가득한 앎과 안다는 생각 조차도 비우고자 나선 길이기에, 습관적으로 머리가 헤아리려 드는 하나 둘 셋 숫자도 잊고서 엎드립니다. 단지 깨어서 알아차림으로 날숨마다 좌복에 몸을 엎드리다 보면 비워질까. 날숨마다 입 속에서 모른다고 시인하면 지워질까.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사라질까. 어디까지가 텅 비운 곳인지. 어디쯤이 나를 잊은 곳인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매 순간을 깨어서, 지금 이 순간으로 이 땅으로 이 몸으로 이 호흡으로 돌아와 처음처럼 다시 시작해보지만 언제나 끝이 없는 길, 애초에 길도 경계도 없는 하늘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있는 듯 없는 모르는 길을 혼자서 걷습니다. 알기 위한 길이 아닌 모르기 위한 길이기에. 


혼자가 아니고선 걸어들어갈 수 없는 고독과 침묵의 좁은 길을, 혹시 이 길이 가을 바람에 날리우다가 흙에 떨어진 풀씨 한 알이 걸어가는 고독과 침묵의 꽃대를 닮았을까. 이 길이 과연 꽃길일까. 어둔밤을 지나서 저 하늘 먼 별빛을 우러러보며 한 걸음 한 걸음 더듬어 내딛는 가벼운 발걸음이 모름으로 향하는 바른 길일까. 이렇게 하염없이 일어나는 것이 생각인지 샘물처럼 흐르는 마음인지 바람의 숨결인지 이미 내 안에 심어놓으신 아득한 그리움인지 몸에 붙은 생명의 호흡처럼 쉼이 없습니다. 



해인사 원당암 달마선원 참선방에서 제 바로 옆자리에 앉은 어느 보살님이 앉아있는 제 오른편 무릎 위로 살풋 손가락을 찍습니다. 제 앞에 놓인 혜암 스님의 책을 보시더니, "우리집에 혜암 스님 책이 많이 있는데 다 줄까?" 하십니다. 보살님은 36세부터 40년 가까이 원당암을 다니고 있다 하시며, 자식들한테 물려주려고도 사뒀는데 인연이 없는지 아무도 받을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아픈 명주실처럼 뽑아내십니다. 


저에게 화두는 받았느냐고 물으시며, 화두가 없이는 참선방에 앉아 있을 수 없다 하시며, 제게 불경과 화두를 주실만한 스님을 소개시켜주십니다. 그러면서 참선 수행을 하려면 <능엄경>, <신심명>, <증도가>를 꼭 읽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렇잖아도 <신심명, 증도가 강설>, <선문정로>라면 성철 스님의 저서로 이미 사두었고 언제든 읽으려 제 방 책꽂이에 있는 책들입니다. 


좌선(坐禪)의 정중동(靜中動)으로 새벽이 다가옵니다. 유난히 별이 많습니다. 이처럼 많은 별을 보았던 때가 언제이던가. 금생에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이라도 되던가. 언제나 마음으로 수없이 그리는 별이 많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별이 빛나는 하늘을 혼자서 우러러보는 순간은 조금은 쓸쓸하지만 하루 중 영혼이 가장 투명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이 됩니다. 


별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잊고서 가슴이 우주로 열리는 무진장(無盡藏)으로, 말과 글을 잊고서 모름으로 들어가는 텅 빈 하늘의 시간과 공간 속으로, 그대로 나라는 몸까지도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연약한 몸이 따뜻한 곳을 찾습니다. 


두어 시간 온기를 쪼인 몸이 일어난 시간은 이른 아침 7시가 다 되어갑니다. 화두를 받을 스님의 연락처를 제 핸드폰에 저장을 시켜둔 일이 아침해보다 먼저 떠오릅니다. 해인사 원당암에서 충주 석종사까지 달리면 오전 10시 전에는 도착하리라 싶어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는 전화를 했더니, 그러라고 합니다. 불상을 보고 있으면 석굴암 부처님의 얼굴을 닮은 남편의 얼굴과 겹쳐집니다. 무슨 인연으로 쌀쌀맞도록 냉정하고 무심한 제 곁에서 한결같은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스님께 삼배의 예를 갖추려고 했더니, 한 번만 하라고 하셔서 그 말씀을 따르기로 합니다.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습니다. 해인사 원당암에서 참선을 하면 그곳에 방장 스님인 원각 스님도 있는데, 화두를 받으러 여기까지 왔느냐고 물으십니다. 대답하기를, 저도 잘 모르겠지만 인연 따라서 바람이 부는 대로 온 것 같다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스님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눈은 허공을 보고 있습니다. 


스님은 두 번째 물음을 주십니다. 화두를 받을 만한 근기는 되느냐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제 그릇 만큼 담을 뿐입니다." 스님은 세 번째 물음을 던지십니다. 그 그릇이 얼마나 되느냐는 물음에 대답하기를, 제가 길을 나설 때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일상 속에서 널뛰기 하듯이 짧게 드리던 감사한 마음을, 이 땅과 이 하늘에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싶은 한 생각으로 참선을 하러 원당암을 찾았습니다." 스님은 더 이상 묻지 않으시고, "그렇다면 화두를 주지"하시면서도, "공부가 힘들겠는데" 하십니다.


스님이 제 마음을 보고 계셨을까요. 제가 걸어가는 길을 알고서 주신 화두일까요. 아니면 우리 모두가 걸어가야 하는 하나의 바른 길일 뿐일까요. 우연인 듯 제가 받은 화두는 유이무념위종(唯以無念爲宗) '오로지 무념으로써 삶의 지표를 삼으라' 입니다. 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모름으로, 또 다시 일어나려는 생각을 내려놓고 모름으로, 그 모름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서 점점 길어지다 보면, 벽도 경계도 없는 허공이라는 말씀을 입으로 풀어놓으시는 스님의 눈길이 바라보는 곳은 허공인지, 허공 너머의 어디매인지 헤아리려는 마음이 닿는 곳은 없습니다.


그 알 듯 모를 듯한 말은 색이 공이 되고, 공이 색이 되는, 마침내 색도 공도 다 비운 부처의 중도(中道)를 말함인지, 다석 류영모 선생의 빈탕한 하늘인지,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을 말함인지, 이렇게 머릿 속에서 자동재생되는 이 논리와 생각들이 바로 제가 내려놓아야 할 망상인 줄로 알아차려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이렇게 알아차리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뭣고!


한 생각이 일어나기 이 전의 마음, 그 맨 첫 마음은 관상의 기도 속에서 시詩와 만나는 첫 마음과 닮은 듯도 하여서, 경허선사의 만법귀일(萬法歸一) '이 우주는 하나로 돌아간다'는 법문과 숭산 스님의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라'는 법문으로 비추어 본다면 제가 받은 화두와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더욱 모를 뿐인, 결국엔 오직 모를 뿐인 마음을 지키는 일이, 성경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신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의 말씀과도 똑같은 하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어간 글방에서 만난 한희철 목사님의 시가 오늘의 제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 듯하여 그대로 옮깁니다. 


...


어느 날의 기도


한희철


보이지 않을 만큼

당신의 사랑은

깊고


들리지 않을 만큼

당신의 사랑은

넓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음으로

당신은 가득합니다.


...


모르는 길을 나선 걸음이 지대로 그런대로 걸어간 것일까요. 집으로 돌아오는 마음이 허탕을 친 듯, 온종일 낚싯대를 드리우고도 물고기 한 마리도 못 낚은 듯 허전하기만 합니다. 어쩌면 애초에 마음의 하늘엔 물고기가 살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있는 나의 좋은 벗에게 드릴 좋은 것으로는 저의 작은 찻잔에 뜬 해와 달과 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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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고향

한희철의 얘기마을(119)


무너지는 고향


단강 아이들과 꿈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자기 꿈 이야기를 돌아가며 했습니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아이도 있었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화가, 가수, 군인, 간호사 등 아이들은 차례대로 자기 꿈 얘기를 했습니다. 되고 싶은 게 많아서인지, 미처 생각을 정리하지 못해서인지 대답을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중 미희와 은숙이 얘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던 4학년 미희와 의사가 꿈이라고 대답했던 6학년 은숙이는 이어진 질문,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꿈이었던 미희는 밭에서 담배나 고추를 따고 있을 것이라고 했고, 의사가 꿈이었던 은숙이는 어느 공장에 취직해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애써 가진 꿈이 미리 그려보는 자신의 모습 앞에 어이없이 지워지고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커서도 계속 단강에 살고 싶은 사람을 물었을 때, 아무도 손을 드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승혜는 심심해서 단강이 싫다 했고, 연경이는 친구가 없어서, 경림이는 죽도록 일만 하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일만 하는 부모님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조금 큰 녀석들은 도시로 나가서 살다가 가끔씩 자식들 데리고 들리고나 싶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있어 가끔씩 찾는 너희를 맞아줄 것 같냐는 말에는 아무도 대답을 못했습니다.


얼마 전, 종숙이과 종설이 두 남매가 원주 시내로 전학을 갔습니다. 근근한 살림, 그런데도 종숙이 부모님은 두 남매를 원주로 내보냈습니다. 돈도 돈이지만 이제 4학년과 6학년, 걱정 때문에 자식들 늘 눈에 밟힐 텐데도 안 그런 척 내보냈습니다. 어떻게든 자식만은 공부를 시켜 지지리 고생뿐인 농사를 물리지 않겠다는 안쓰러운 몸부림이었습니다.


부끄러움 많은 단강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부끄러움을 잘 타는 종숙이와 종설이, 녀석들이 원주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 한 구석 힘없이 헐리는 소리와 함께 부끄러움 많은 녀석들이 새로운 학교 새로운 친구들 앞에 서서 인사나 제대로 할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뿌리가 깊고 튼튼하다면야 왜 걱정을 하겠습니까만 오늘의 농촌은 아이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말도 아이들을 품지 못합니다. 무관심 속에 우리의 고향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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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제단

한희철의 얘기마을(118)


새벽 제단


매일 새벽마다 어김이 없는 두 분이 있습니다. 문 권사님과 지 권사님입니다. 문 권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제단을 닦고, 지 권사님은 매일 새벽마다 종을 칩니다. 그 일은 어김이 없어 멀리 자식 집에 다니러 갔다가도 아무리 늦어도 굳이 돌아오는 것은 그 일 때문입니다.


늙은 과부에 가난하기까지 하니 무엇으로 봉사하겠느냐고 안타까워 할 때, 두 분께 주어진 일이 제단 닦는 일과 새벽종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두 분은 그 일을 하나님께 받은 사명인양 지성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분은 모두 일흔이 넘은 노인들입니다. 그런데다가 두 분은 모두 몸이 불편합니다. 제단을 닦는 문권사님은 관절염이 심하여 걷는 일도 힘들고 무릎을 꿇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제단 닦는 일은 늘 그분의 손길이고, 제단을 닦는 순간엔 불편한 몸도 다 잊어버리곤 합니다. 




종을 치는 지 권사님은 귀가 어두워 보청기를 꼈는데, 보청기를 끼고서도 제대로 듣지를 못합니다. 그래도 목사님 설교와 남이 당신 흉보는 소리는 들을 수가 있어 다행입니다. 보청기를 끼고서도 귀가 어둡지만 지권사님이 울리는 새벽종은 일분 이른 적이 없고 일분 늦은 적이 없습니다. 


틀림이 없는 시간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지권사님 집에 자명종 시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조그만 시계뿐입니다. 손목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권사님은 매일같이 새벽잠을 설칠지도 모릅니다. 자다 말고 깨어 시계를 확인하고 또 자고, 그러다간 또 깨고, 바쁜 농사철, 이집 저집 일 거들면 납덩이처럼 몸 무거울 텐데도 새벽종은 정해진 시간에 어김이 없이 울립니다.


그렇게 제단 닦는 일과 종 치는 일은 두 분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믿음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제단을 닦는 문 권사님이 늦은 적이 있는데, 종치고 들어온 지 권사님이 대신 제단을 닦았습니다. 그때 예배당 뒤편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는데, 늦게 온 문 권사님이 지 권사님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내가 종 치면 좋아요?” 호령을 한 것입니다. 맘 좋기로 유명한 문 권사님이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누구도 전에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지 권사님이 큰아들 네가 있는 서울로 이사를 갔습니다. 정든 마을도 마을이지만 예배당 종 치는 일 때문에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눈물로 돌렸습니다. 지 권사님은 떠나기 전 당신 후임으로 종을 치게 된 원 권사님께 한 가지를 선물했는데, 당신 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였습니다. 지 권사님은 멀리 서울로 떠났지만 매일 새벽마다 꿈 속에서도 생시처럼 고향교회 새벽종을 치고 계실 겁니다.


만종교회 최 목사한테 지 권사님, 문 권사님 이야기를 들을 때, 작은 시골교회를 지키는 두 분의 모습이 아름답고도 거룩했습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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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롬11:29)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조석 기운이 제법 시원합니다. 건강한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속 거리두기 단계가 조정되어서 다행입니다. 안심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래도 막혔던 통로가 조금은 열린 것 같아 좋습니다. 그렇지만 더욱 조심스럽게 이 시간을 살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본 방역 수칙을 잘 지켜가면서 일상을 살아내는 성실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침 저녁 공원을 산책하면서 색깔이 변해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조락의 계절이 다가옴을 실감합니다. 조금은 쓸쓸한 듯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싫지만도 않습니다. 피어남과 스러짐은 생명의 자연스런 흐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변화 속에서 꼬물거리며 자기에게 부여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저마다의 슬픔과 아픔을 짊어진 채.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낯선 이들조차 정겨워 보입니다.

큰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댄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몸에 자극을 주는 분들을 봅니다. 투정 부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빙그레 웃게 됩니다. 엉거주춤한 기마자세를 한 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두 팔을 맹렬하게 앞으로 내뻗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싯지싯 다가오는 세월을 밀어내려는 것일까요? 눈을 감은 채 배를 퉁퉁 두드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떠날 생각이 없는 뱃살을 달래 어떻게든 돌려보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붉은 볏을 세운 맨드라미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겨운 풍경들입니다.

생활 속 거리두기 단계가 낮아지면서 공원 곳곳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느라 둘러쳐져 있던 끈들이 말끔히 제거되었습니다. 배드민턴 치는 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아침 대기를 뒤흔들더군요. 운동 기구가 있는 곳마다 늙수그레해 보이는 분들이 모여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줄이 쳐졌는데도 굳이 그 안에 들어가 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유난히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그분들을 보면서 ‘죄의 사회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죄책감이라는 무게를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 자기들의 죄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의 부담을 경감하려는 일종의 전략일 겁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준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청소년들이 유난히 욕을 많이 하고 위악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동료들로부터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른이라고 하여 다를 것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에 포도밭 근처에 서 있던 배나무에서 주인 몰래 배를 훔쳤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는 자기가 도둑질을 했던 까닭은 “조금이라도 어쩔 수 없는 궁색에서가 아니오라, 정의가 없고, 싫고, 불의에 배불러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결함 자체를 사랑했단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해서는 안될 일을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다만 해서는 안될 일인 그 때문에 한다는 것이 그토록 즐거울 수가 있었겠나이까?”(성아구스띤, <고백록>,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2, p.65) 생각해보면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그 일을 행했던 까닭은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싫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갈림길에 설 때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인들에게 준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고린도교회가 불필요한 논쟁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장에 나오는 질 좋은 고기가 우상 앞에 바쳐졌던 것이 많았다는 데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서는 그 고기는 그저 고기일 뿐이라며 서슴없이 구매하여 소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걸 먹는 순간 우상과 연루된다고 생각하여 한사코 거부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 문제는 교회를 뒤흔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고전8:4). 그러니까 우상 앞에 바쳐졌던 고기라 하여 못 먹을 이유는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전8:13)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상 앞에 바쳐진 고기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 사도가 전제했던 말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b) 나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무입니다. 

공원의 금지된 공간에서 운동을 하던 분들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네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문득 나뭇잎 사이에 떨어진 모과를 보았습니다. 채 익지 못한 채 떨어져 한쪽이 이미 검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주워올까 말까 하다가 그냥 버려두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들어오니 고진하 시인이 이번에 출간한 시집 <야생의 위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목차에 ‘모과’라는 시가 있어 먼저 찾아 읽었습니다.

“아직 덜 익은 채 떨어진
황달 기 느껴지는 노란 연민을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고
하루 몇 번씩 킁킁 코를 대봅니다”(‘모과‘ 부분)

역시 시인은 시인이지요? 그는 덜 익은 채 떨어진 모과를 가리켜 ‘노란 연민’이라 말합니다. ‘노란 연민’이라니요? 그것은 사실 무르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모과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혹은 마음일 겁니다. 아무의 눈길도 받지 못하는 그 모과를 그는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았습니다. ‘모서리‘라는 시어가 바닥에 떨어진 모과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킁킁 냄새를 맡음으로 시인은 모과의 존재를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버림받은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마 자기 안의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세월을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택배 노동자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오늘은 더 늦을 거예요’라는 아들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라 울고 또 울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은 모든 이들에게 힘들지만, 특히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이들에게 참 가혹합니다. 쉼 없는 노동, 소외된 노동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지만 그런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에게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일 또한 시민의 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현장 예배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일단 이번 주일은 영상예배를 기본으로 합니다만 그래도 꼭 나오시고 싶은 분들은 사무실에 먼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꼭 붙들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십시오. 금주의 남은 시간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와 청량한 기쁨을 안겨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가슴 가득 하늘의 숨결을 받아 안고, 사랑의 여정을 계속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0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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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객

한희철의 얘기마을(117)


낯선 객


산이 불씨를 품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이 골짝 저 능선 붉은 기운이 번져간다. 한꺼번에 펼쳐서는 안 될, 천천히 풀어 놓아야 할 그리움인 냥, 안으로 붉음을 다스린다. 자기 몸을 불살라 가장 눈부신 모습으로 자기를 키운 대지 품에 안기는, 기꺼이 순응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보아주는 이, 눈길 주는 이 없어도 뿌리 내린 곳 어디라도 꽃을 피워 올리는 들꽃이 아름답다. 연보랏빛 들국화와 노란 달맞이꽃, 길가 풀섶의 달개비꽃과 강가의 갈대잎, 저마다의 빛깔과 모양으로 피어나 찾아온 계절 대지를 수놓는다.


선선한 바람과는 달리 햇살이 따뜻하다. 한 올 한 올 손에 잡힐 뜻 나뉘어 내리는 햇살이 마음껏 가을을 익힌다.




텃밭에서 통이 커가는 배추하며 알 굵은 무, 산다락 밭 산 그림자 아래서도 밭고랑 금 그으며 익어가는 고구마, 길가마다 널려있는 벼와 고추들, 해마다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해 준 산수유도 올망졸망 빨갛게 익어간다. 산수유는 겨울철 좋은 소일거리가 될 것이다. 구들 따뜻한 방에 모여 싫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손톱이 닳도록 씨를 빼 낼 것이다.


움푹 노란 물감을 찍어 휘휘 아무렇게나 덧칠해 놓으면 거반 비슷하지 싶은 가을 벌판도 제법 허전하다. 짚가리 볏가리가 배치 받은 병사처럼 빈들을 지킨다. 우두커니 선 모양이 초가집 같기도 하고, 노총각 헝클어진 더벅머리 같기도 하다. 키를 뒤집어 쓴 채 소금 얻으러 나선 오줌 싼 아이 같기도 하고, 운동회 날 기계체조 하는 아이들 층층이 올라선 것 같기도 하다.


지붕마다 호박들이 한가롭다. 거기가 제자리라는 듯 꾸물꾸물 잘도 올라가 편히들 누워 있다. 여기저기 헐리고 기울어진 폐가 담벼락에도 덩그마니 늙은 호박이 매달렸다. 쉽게는 돌아오지 못할 떠난 아들네 기다리는 옛 넋인지.


툭툭 떨어지는 알밤이며 도토리는 마을 아이들을 부르고, 머루 개암 등 보물이 가득한 산에선 아이들의 가을 해가 너무 짧다.


몸집과 색깔만 다를 뿐 다람쥐와 다를 바 없는 청설모는 잣과 밤을 까먹는데 선수다. 휙휙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재빠름은 혀를 내두를 정도지만 아이들은 고무줄 새총을 당겨 청설모를 잘도 잡는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 깊어가는 가을이 아름답다. 그러나 무엇일까. 그 무엇이 이 변함없는 아름다움을 두고도 해마다 마을을 허전하게 하는가.


주름진 노인들의 분주한 손길뿐 참새의 재미도 예전만 못한, 풍년가도 오래 전 사라진 들녘, 다만 가을이 낯선 손님, 낯선 객인 냥 깊어가는 것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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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

한희철의 얘기마을(116)


사탕



가까운 친구 주명이가 죽은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저수지로 향했다. 고기, 우렁, 조개를 잡을 수 있고 수영도 할 수 있는 곳, 학교에선 가지 말라 금하였지만 철길 넘어 저수지는 어린 우리에겐 얼마나 신나는 곳이었던지. 갈 때마다 그러했듯 그날도 모두들 신나게 놀았다.


저녁 무렵, 집으로 오려고 철교 아래 모였는데 주명이가 보이질 않았다. 오리를 잡는다고 물로 들어갔다는데, 그 뒤론 모두들 모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입을 모아 주명이를 불렀다. 목이 쉬도록 불렀지만 그는 대답하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때가 저녁, 통근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친구 한 명과 나는 숨이 멎도록 기차역으로 달려가 퇴근해 돌아오는 주명이 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퇴근하던 마을 분들이 그대로 저수지로 뛰었다. 


배가 뜨고 옷을 벗은 어른들이 물로 뛰어들었다. 얼마 만에 친구는 동네 아저씨 발에 걸려 주검으로 떠올랐다.


다음날 친구랑 광에 기대섰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주명이가 물에 빠진 걸 그의 형에게 알렸을 때, 알려줘서 고맙다고 그 형은 우리에게 각기 2원씩을 주었었다. 우린 그걸로 눈깔사탕을 사서 입에 물곤 왠지 모를 슬픔과 걱정으로 광에 기대섰던 것이었다.


입에 가득한 사탕의 단맛과 왠지 모를 슬픔과 두려움이 뒤엉킨 그때의 심정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남아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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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방

신동숙의 글밭(255)


고독의 방




가슴으로 쓸쓸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못 견디게 시리도록 

때론 아프도록


바로 이때가 고독의 방이 부르는

영혼의 신호


사람을 찾지 않고 

홀로 침잠하는


날숨마다 날 지우며

시공간(時空間)을 잊은 無의 춤


처음엔 온통 어둠이었고 

언제나 냉냉하던 골방입니다


홀로 우두커니 선 듯 앉은 듯 

추위에 떨다가 문득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반짝이는 한 점 별빛

그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 먼 별이 살풋 짓는 여린 미소에 

가슴 속 얼음이 녹아 눈물로 흐르면


흘러가기를 

목마른 곳으로


골방에 나보다 먼저 다녀간 이가 있었는지

아궁이에 군불이라도 지폈는지 훈훈한 온기가 감돕니다


문득 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아.. 이제는 고독의 방으로 드는 일이 견딜만합니다


고요히 머무는 평온한 침묵의 방에서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르는 기도의 골방


내가 사랑하는 고독의 방은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即是)


지금 이 순간, 있는 모습 그대로 꽃 피울

꽃자리의 사랑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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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를 버리라고요?

한희철의 얘기마을(115)


오토바이를 버리라고요?


목사님, 먼저 저의 이런 못난 처신을 용서하십시오. 언젠가 목사님은 목사님이 펴내시는 주보를 통해 “그대의 오토바이를 당장 버리시오”라고 호령하신 적이 있습니다.


“흙 가운데 살면서, 흙의 사람들 가운데 살면서 어쩌자고 그 괴물을 타고 흙길 가운데를 질풍처럼 달리느냐.”고 하셨습니다. 본시 사람이란 흙 밟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목사님이 주시고자 했던 말씀이셨죠.


이어 보내신 편지에서도 다시 한 번 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흙 같은 가슴들일랑 흙가슴으로 만나야 한다고요.


처음 목회 떠나왔을 땐 말씀대로 걸었습니다. 걸을 수밖에 없기도 했고요. 뱀처럼 늘어진 길을 땀으로 목욕하며 걷기도 했고요, 아픈 아기를 안고 그냥 비를 맞고 걸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전거를 구했습니다. 걷는 것에 비해서는 좋았지만 자갈길, 툭하면 나는 ‘빵꾸’가 영 골치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빵꾸 때우는 기술자가 되었지요.


그러다가 오토바이를 구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게 된 선배 목사님이 거저 준, 오토바이 중에서는 가장 작은 것이었습니다. 오토바이를 난생 처음 타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땀 안 흘려도 된다는 것보다는 빵꾸를 덜 때워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몇 번 아찔한 순간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옷을 찢은 적도, 오토바이만큼 몸을 망가뜨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탑니다. 목사님도 모르시지 않는다 했던 대로 교통사정 때문입니다. 한낮 서너 시간 기다리는 대신 걷는 거야 그런다 해도 저녁 여섯시 반이면 끊기고 마는 막차, 그 시간 이후 원주에서 열리는 행사는 남의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서너 시간의 밤길은 영 자신이 없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 위해 다른 분 신세를 진다는 건 속편한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시골 사정 알 듯 모르시는 말씀에 야속하기도 하고, 그래도 원칙적인 말씀에 고맙기도 합니다.


바쁘고 안개 낀 세상, 그런 걱정과 호통은 차라리 속 시원합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밖에는 한 ‘갇힘’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 땅의 많은 후학들은 주신 말씀 고맙게 새길 것입니다. 


저도 명심하겠습니다. 흙 밟고 살라는 그 말씀!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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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주세요

신동숙의 글밭(254)


풀어주세요




천장의 눈부신 조명 위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창문틀 너머로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멘트 바닥 아래 

흙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벽돌 우리에 갇혀 매여 있는 

나를 풀어주세요


안락이라는 족쇄에 묶여 꼼짝 못하는

천국이라는 재갈을 입에 물고 말 못하는


몸 속에 갇힌 나를 

풀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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