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슬

 


저 잎에서 
이 잎으로

거미가 밑줄 친 
빈탕한데

없는 듯 있는 
거미줄에

없는 듯 있는
기도의 손길이

비나이다
빗물로 둥굴린

옥구슬 
말없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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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라, 버티자

  • 이제 마지막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갈 학생들에게 스승으로서 끝까지 참고 버티자는 말은 맞지 않는것 같다.
    그들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불균형과 노.사 관계의 불평등한 구조체제를 어떻게 바꾸어 나갈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식민시대도 아니고,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 노비로 팔려가는 시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 하나 20년 세월을 기돈의 불평등과 비인권적인 대우를 참고 견디라고 밤낮 참고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Linda 2015.06.09 04:22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5)

버텨라, 버티자
(조와(弔蛙), <성서조선> 1942년 3월)

 

‘한 시간에 740만원을 쓸 수 있는’ 사람이기에 주차요원을 꿇릴 수 있는 정당성이 있다던 ‘백화점 모녀’마저 사회정의를 외치는 시절이다. 세상을 바로잡고 싶었단다. 한참 동면 중인 ‘개구리’도 들었다면 웃을 이야기다. 그들이 ‘바로 잡고’ 싶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의 사회적 배치 속에서 VIP(아주 중요한 사람)로 자리한 사람에게는 무한 존경과 절대 복종을 표시하는 사회, 그것이 그들이 생각하는 ‘바른’ 사회였을까? 어른을 공경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다는데, 그랬다면 740만원 씀씀이나 남편의 권력에 대한 언급은 불필요했을 일이다. ‘내 남편 한 마디면 너희들 다 잘려!’가 어찌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성을 만들 수 있는 선언일까!

 

 

세상이 온통 꽁꽁 얼음판이다. 생명이 버텨내기에 너무나 버거운 시절이다. 지난 연말, 새로운 계약을 많이 체결하여 영업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2주 동안 시린 손 언 발로 뛰어다녔을 젊은 ‘수습’ 사원들은 정직원 승급 평가가 있던 날 전원 해고되었다. 회사는 모두가 자격미달이었다고 변명했지만, 이 시절을 온 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아, 새로운 계약 건수가 필요했구나, 하여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2주 동안 바짝 뛰어줄 ‘알바’ 인력을 구했던 거구나, 하지만 ‘알바’라 하면 설렁설렁 대충 뛸 터이니 성과를 보고 승급기회를 결정하는 ‘수습’사원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었던 거구나! 고용하던 때부터 이미 회사는 ‘쓰고 버릴’ 생각이었고, 이에 더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고용의 기술’을 발휘한 거구나!

 

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세상이다. 고용주들에게 노동자는 이제 ‘쓰고 버릴 물건’이다. 최근 ‘땅콩 회항’이라 불리는 사건으로 세간의 화재가 되었던 항공사의 오너 일가는 기내의 직원들을 ‘기물(비행기 안의 사물)’이라 불렀다 한다. ‘쓰이고 너무나 일찍 버려지는’ 까닭에 생명들이 죽어나간다. 스스로 죽고, 남도(가족도) 죽이는 세상이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와 두 딸의 목을 조르는 가장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허나 그의 참담한 심정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알겠다. 그동안 ‘폼 나게’ 쓰였겠으나 결국은 그도 쓰고 버려진 존재다. 일단 버려지면 하찮은 존재, 실패자로 배치되는 이 사회에서, 그는 현재의 배치와 굴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극단의 선택을 한 것이겠지. ‘쓰고 버려지는’ 참담함을 나 역시 겪어보았기에 요즘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마음이 무겁다. 아리다. 하여 결국은 엎드린다. 기도조차 애가(哀歌)다. 한참을 엎드려 있자하니, 김교신의 기도 글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만든 성전이다. 이 반상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 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가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들. 때로는 5-6마리, 때로는 7-8마리.

 

‘조와(弔蛙)’ 앞부분이다. 늘 기도하던 신앙의 사람이었으니 이 장면이 새로울 건 없다. 다만 1942년이라는 시점과 조용한 산중에서 홀로 무릎 꿇고 그가 했을 기도의 내용들을 상상해보니 그 역시 절절한 애가(哀歌)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가 『성서조선』을 시작한 것이 1927년이었다. 시절이 악하고, 그래서 사람들도 자꾸 악해지거나 약해지지만, 성서에 담긴 자유혼을 외치며 전하다보면 조금씩 소망스런 일들이 생겨날 거라 믿었으리라. 그러다가 1942년! 무려 16년의 긴 세월동안 그가 간곡함을 담아 ‘들어라! 제발 들어라!’ 외쳤던 복음(福音)이 땅에 심기우고 자라기도 전에, 휘몰아치듯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일제의 폭력이 조선인의 마음을 정신을 영혼을 꽁꽁 얼려버리는 사태를 목도했으리라. 하늘로부터 받는 힘과 용기가 그치지 않았으나, 현실을 보며 어찌 애통함과 절망감이 없었을까!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도했다는 그의 표현이 오늘따라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간구하다가 절규하고, 소망을 담다가 순간 절망하고, 바위 위에 엎드린 그는 필시 그랬을 거다.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성서조선>의 외침이 조선인들에게 들리는지 아닌지, 거대한 일제의 탄압에 행여 동면하는 개구리들 마냥 하루하루 생명의 기력을 다해가는 것은 아닌지, 그의 안타까운 심정이 한 구절 한 구절 살아서 전해진다. 젊은 시절에는 읽으면서도 몰랐다. 개구리들이 들어봤자 기도와 찬송을 이해나 하나? 뭐, 이런 걸로 일제는 잡지를 폐간하고 12명의 지인들과 함께 1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했나? 그러고 보면 일제의 검열 담당자들은 문학적 이해와 사회학적 성찰이 꽤나 깊었던 것 같다. 행간을 읽어낸 그들은 다음의 마무리에서 이 글의 힘을 제대로 보았다.

 

봄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 이런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두려웠을 일이다. ‘봄비가 쏟아지는 날’ 말이다. 지배자들이 만든 폭력적 시스템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봄비, 그 따듯한 은혜의 비가 살살도 아니고 ‘쏟아져’ 내린다면, 하여 자신들이 곤고하게 설계해놓은 세상의 질서와 사회적 배치가 다 허물어져버린다면, 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잊고 그냥 숨죽이고 머리 조아리고 동면한 듯 지내던 사람들(조선인들)이 생명의 기운을 얻고 스스로 살아내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들에게는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 일일까. 자신들의 위용이 아직 단단한 시절에도 소망을 버리지 않고,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미래를 현재로 불러오며 당당하게 외치는 저 믿음이, 소망이, 각오가 어찌 두렵지 않았겠나! 하여 자신들이 만든 세상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들에게, 김교신의 이 글은 ‘읽혀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을 거다.

 

봄은 온다, 어김없이! 생명을 위협하는 단단한 얼음 같은 이 시스템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쓰고 버리는’ 노동력으로 대하는 이 악한 제도도 녹아내릴 것이다, 결국은! 그러니 개구리 같이 미약한 생명을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여, 당신이여 나여, 우리여, 버텨라. 버티자. 이 얼음 빙벽의 틈에 봄을 불러오는 팔팔한 산 신앙을 꽂아 넣으며,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며, 기다리자. 어느 날 은총 같이 내릴 봄비를...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애로 서로를 동등하게, 존귀하게 여기며, 함께 모두가 사는 시스템을 건설하게 될 그 날을...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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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강초등학교 졸업식


반짝이는 보석상자, 영롱한 추억의 보고(寶庫), 끊임없이 되살아와서 따뜻하게 생(生)을 감싸는 손길, 편안한 귀향(歸鄕), 마르지 않는 웃음들, 싫증나지 않는 장난감이 가득한 방, 끈끈한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곳, 그게 어린 시절이지 싶다.

지난 2월 19일 단강초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작은 교실 한 칸에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학부모들과 내빈들이 둘러앉았다. 뒤편으론 몇 사람이 서기도 했다.


사무실용 의자를 옆의 사람에게 양보를 하고 난 정말 오랜만에 작은 초등학교 때 앉아 공부하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연필로 혹은 칼로 금을 그어 짝과 경계를 정하고 나란히 앉아 공부했던 그 어린 시절. 내 자릴 넘었다고 때론 짝꿍과 다투기도 했지만 실은 모든 것이 넉넉했었지. 우리들 이름이 적히기도 했던 칠판도 그랬고, 층층이 도시락을 올려놓던 난로도 그랬고, 콩나물 시루처럼 빼곡했던 교실도 그랬고, 부끄러움 모르고 나누어 먹던 급식 빵도 그랬고, 운동장도 그랬고, 축구 골대도 그랬고, 운동장 둘레 나무도 그랬고, 교문도 그랬고, 태극기가 걸리던 국기봉도 그랬고, 동네를 두르고 봄가을이면 소풍을 가던 사방 산도 그랬고, 모든 것이 크고도 넉넉했는데 얼마의 세월을 두고 이젠 느낌이 예전과는 다르니. 지나고 보면 작아 보이는 것들. 그건 이래저래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다.  


43회 졸업식에 졸업생은 13명이다. 점점 심해지는 이농현상을 따라 아이들도 줄어든 것이다. 지난 번 버스에서 만난 교장 선생님은 올해 한 학급이 줄어들게 됐다며 걱정을 했다. 전교생이 70명이었는데 올해에는 그보다 더 줄어 한 학급을 줄이게 됐다는 것이다. 한 학년에 최소한 12명이 되어야 하는데, 결국은 2명이 모자란 두 학년을 한 학급으로 묶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은 두 분이 줄어들게 되는데 없어진 반 선생님하고, 교감선생님이 수업함으로 쉬게 되는 분 그렇게 두 분이 줄어든다고 했다.


한해 두해 이렇게 지내다 보면 결국은 어찌되는 것인지. 맨 뒤에 앉아 지켜보는 한 시골 초등학교의 졸업식이 참으로 착잡했다.


졸업하는 어린이를 위해 교회에서는 해마다 장학금을 준비하는데 시상 순서 맨 나중,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난 무슨 선언문을 읽듯 장학증서를 읽었다.

“우리의 미래가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알기에, 어린이들이 갖는 꿈과 희망에 의해 우리의 내일이 마련되는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위의 어린이를 위하여 작지만 따뜻한 정성을 모아 기쁜 마음으로 이 장학금을 드립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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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삐를 맨 숨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있는 마음

보이지 않지만 
살아서 펄떡이는 마음

이런 마음에 고삐를 맨다면
그건 한 점의 숨

꽃잎 만큼 연한 숨줄로
봄바람 만큼 다정한 숨줄로

때론 모진 세월의 강물 같은 한숨으로
그리고 커다랗고 밝은 무위의 하늘로

마음의 고삐를 잡는다
한 점의 숨으로

그러나 마음도 
숨도 내 것은 아니다

한 장의 꽃잎도 내 것일 수 없듯
한 점의 바람도 내 것일 수 없듯

한 점의 마음도 
한 점의 숨도 내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줄 스스로 알게 하는
내 안에 맴도는 한 점의 숨은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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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형상을 지으시느라

 


둥그런 바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바삐
탯줄을 통해 몸의 형상을 지으신 후

좁은 문과 좁은 길
땅으로 떨어지는 죽음을 주시고
다시 살리시어

배의 탯줄을 끊자마자
가슴으로 숨줄을 드리우사

둥그런 땅
지구별 지금 이곳에서 

백 년 동안 느긋하게
숨줄을 통해 마음의 형상을 지으시느라

숨 쉬는 순간마다 새롭게
하늘 숨을 불어넣으시며 거두시기를 한평생

본래면목(本來面目)
온전한 마음으로 둥그렇게 살으라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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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

송대선의 시편묵상 2021. 5. 17. 06:04

시편 64,5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소서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공동번역》)

 

祈主一顧盼 授手昭慈仁(기주일고반 원수소자인)

死域誰念主? 頌聲絶幽冥(사역수념주? 송성절유명)

 

주님 돌이켜 살펴주소서 당신의 손 내미사 자비 드러내소서

죽음의 땅에서 뉘있어 주님 기억하리이까? 거기서는 도무지 님을 노래할 수 없나이다.(《시편사색》, 오경웅)

 

 

우리가 시간에 속한 존재여서일까요? 세월이 갈수록 스스로가 연약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젊은날 솟구치는 힘과 용기가 있었기에 세상의 그 무엇이든 짊어질 수 있을 것 같고, 모순되는 어떤 것이든 끝내는 풀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열정 가득했었습니다. 이 믿음의 걸음을 잘 걷는다면 이 생을 허락하신 분이 주신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리라고 여겼지요. 헌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반대로 시간의 무게에 짓눌립니다.

 

명확해 보였던 일상들이 점점 흐릿해지고 옳은 것이라 선뜻 말하기도 어려워집니다. 세월의 지혜로 갈수록 선명해지리라 여겼던 문제들이 점차 콕 집어 말하기 더 어렵고 흐릿해집니다. 몸의 일부 기능들이 쇠해지면서 불편함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러다 끝내 무()로 돌아가는 것인가?

 

손 내밀어 붙잡으려 했던 것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그리도 든든히 보였던 것이 바싹 마른 잎사귀되어 바스러지는 가운데 든든히 섰다고 여겼던 바탕마저 밑없는 공동(空洞)이 아닐가 싶은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그 쇠약함이 순식간에 몸과 의식을 덮쳐 숨마저 위협하면 그 아연함에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습니다.

 

 

사진/김승범

 

시인은 자신이 무너지고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경험하는 중입니다. 무너지는 것보다 무너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의식 한가운데서 지켜본다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겠지요. 게다가 이제껏 그가 의지했던 하느님은 멀리 계십니다. 이 거리감이 시인을 당혹하게 합니다.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느끼고 고백하고 사랑하던 임재의식이 흐릿해지면서 생겨나는 거리감은 신앙을 지닌 이들을 무너져내리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의 삶의 곳곳에 자리잡은 신앙의 기억들이 그를 붙잡아줍니다.

 

신앙의 기억은 그저 흐릿한 추억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고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때때로 기도란 갑자기 발생한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한없는 간격을 좁히려는 우리의 어리석으면서도 유일한 시도이며 더없이 가상한 짓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이때 기도의 재료는 우리의 무너짐이며 두려움이니 말도 안되는 것 같으나 이것만이 유일한 우리의 기도 밑천입니다.

 

특히나 시인은 존재가 무로 돌아가는 가녀린 숨결 중에 있기에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셔야겠습니다 주님! 제가 죽음으로 돌아가면 무() 따위가 어찌 당신이 베푸셨던 사랑과 손길을 기억하겠습니까? 저 어둠의 땅에서 어떻게 당신을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 이 나약한 몸뚱이가 당신의 은총을 떠올리는 통로가 되고 점차 희미해져가는 의식이 주님의 손길을 끌어당깁니다. 기실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도구는 그리 가치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고 높여드리는 그 무엇이 아니라 대부분 이렇게 연약한 것들이며 그 연약함은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고 우리 존재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의 거처로 삼는 경우가 허다하십니다.

 

유명(幽冥), 옛 사람들은 죽음의 땅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흐릿하고 어둑어둑하고 한없이 멀어 아득합니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보이긴 하되 형체가 없고 뭔가 들리긴 하는데 소리가 없는 것’(視之無形 聽之無聲 시지무형 청지무성)이라 하였습니다. 삶이라는 경계 너머를 선명하게 말할 수 없는 인생인지라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겠지요. 시인은 자기 생명이 그와같이 흐릿함과 경계너머의 아득함으로 흩어지는 중이라고 항변합니다.

 

침상의 요는 눈물로 젖어들고 시련에 영혼은 지쳐 스러져가며 눈은 흐려지고 뼈도 녹아내립니다. 그런 시인에게 기도는 여유있는 행위가 아닙니다. 마치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마지막 여정에서 여리고를 지나실 때 그분이 지나신다는 소식을 들은 소경에게 주어진 유일회적인 외침, “나사렛 사람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와도 같습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더이상 외칠 수 없지요. 그걸 몸으로 알아챘던 것일까요? 그는 온몸과 영혼으로 유일회적인 외침과 간구를 올려드렸고 새로운 삶을 허락받았습니다. 모순된 말이지만 모든 기도는 유일회적인 외침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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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3편 3절, 6절 그러나 야훼여! 당신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이십니다. 내 머리를 들어 주십니다.〔3절〕 적들이 밀려 와 에워 쌀지라도 무서울 것 하나 없사옵니다.〔6절〕(《공동번역》) 護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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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시편 3편 2절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공동번역》 彼無神助 其命幾何(피무신조 기명기하) 하느님이 저를 돕지 않으시니 그 목숨 앗는 것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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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6절 “그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줄까” 하고 말하는 자가 많사오니, 밝으신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야훼여.(《공동번역》) 衆庶喁喁望 何日見時康(중서옹옹망 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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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편 2절 너희, 사람들아! 언제까지 나의 영광을 짓밟으려는가? 언제까지 헛일을 좇고 언제까지 거짓 찾아 헤매려는가?(《공동번역》) 嗚呼濁世子 冥頑盍有極(오호탁세자 명관함유극)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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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https://fzari.tistory.com/2580?category=974810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시편 5편 1, 2절 한숨짓는 까닭을 알아주소서 살려달라 애원하는 이 소리 모르는 체 마소서(《공동번역》) 鑑我默默情(감아묵묵정) 聆我哀哀號(영아애애호) 침묵으로 말씀드리는 저를 살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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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의 마음 담아, 오롯한 사랑을 나누며https://fzari.tistory.com/2588?category=974810

 

경외의 마음 담아, 오롯한 사랑을 나누며

시편 5편 7절 당신의 크신 사랑만을 믿고 나는 당신 집에 왔사옵니다. 주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하여 엎드립니다.(《공동번역》) 我欲入主室 暢沾主膏澤(아욕입주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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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징숑(오경웅)의 《성영역의》를 우리말로 옮기고( 《시편사색》) 해설을 덧붙인 송대선 목사는 동양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나름 귀동냥을 한다고 애쓰기도 하면서 중국에서 10여 년 밥을 얻어먹으면서 살았다. 기독교 영성을 풀이하면서 인용하는 어거스틴과 프란체스코,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서양 신학자와 신비가들 뿐만 아니라 『장자』와 『도덕경』, 『시경』과 『서경』, 유학의 사서와 『전습록』, 더 나아가 불경까지도 끌어들여 자신의 신앙의 용광로에 녹여낸 우징숑(오경웅)을 만나면서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지평에 눈을 떴다. 특히 오경웅의 『성영역의』에 넘쳐나는 중국의 전고(典故와) 도연명과 이백, 두보, 소동파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장가와 시인들의 명문과 시는 한없이 넓은 사유의 바다였다. 감리교신학대학 졸업 후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열린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제천과 대전, 강릉 등에서 목회하였고 선한 이끄심에 따라 10여 년 중국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귀국 후 영파교회에서 사역하였고 지금은 강릉에서 선한 길벗들과 꾸준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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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농부시라’

작은 체구. 그러나 그는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투박한 그의 말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지고 들려 왔다. 그런 설득력의 근거는 그의 말이 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있었다. 분명 그의 말속에는 땀내와 흙내가 섞여 있었다.


농민 선교 대회, 오전 강사로 나온 <서울로 간 허수아비> <어머니 죄인> <오늘의 아모스>를 쓴 윤기현 선생은 자신이 자라온 지난날들 속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전라도 그 특유의 사투리를 섞어가며 과장 없이 이야기 해 나갔다.


이야기를 들으려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한기를 맞은 농촌교회 교인들이었고 살아가며 직접 겪고 느꼈던 여러 가지 지적들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착하고 열심히 살면 부자 된다는, 어린 시절 그의 성실함을 지켜주었던 그 그럴듯한 교훈이 한갓 공허한 교훈일 뿐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교회의 메시지에서 느낀 당혹감. 그런 걸 극복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노력. 여러 가지로 좋은 교훈이었다.


적당히 참여하고 적당히 외면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우리네의 비겁한 도피근성.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쩜 내 생(生)의 뿌리는 땅속으로가 아니라 허공 위로 거꾸로 자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 경제적인 모순, 그 거대한 구조악의 벽 앞에 너무 쉽게 주저앉은 우리를 두고 일어서자고,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래도 함께 뭔가를 해 보자고 그는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 연세대 원주의대 운동장에서 열린 공동체 놀이마당. 신나게 돌아간 놀이패들의 공연이 어느 정도 추위를 녹여 주었고 이어 벌어진 술팀과 쌀팀의 몇 가지 경기는 모두를 들뜨게 했다.


돌아가며 춤을 추기도 했고 신나는 시합도 했다. 이기면 신나고 져도 아쉽지 않은, 내 편 네 편은 있되 모두가 우리들인 멋진 어우러짐.


모든 경기가 끝난 후 펼쳐진 화해의 춤마당, 신나는 장단에 맞춰 모두들 신나게 춤을 췄다.


춤에 어색해 슬쩍 빠진 전도사 대신 들어간 최일용 성도님. 햐, 신나고 멋있기도 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연락해서 다 같이 올 걸 그랬다고 돌아오는 길 아쉬워하던 성도들.


가난하고 없더라도 내가 주인 되는 날은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날인 걸. 하나님, 기억하소서. 이 땅에 농부들을.  오늘의 주제 ‘하나님은 농부시라’는 말 빈말 아니게 하소서.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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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의 윤리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4)

 

응시의 윤리

- 전집 4권 『성서 연구』 「율법의 완성-간음과 이혼」 -

 

 

내가 김교신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거의 ‘완벽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윤리와 도덕에 엄격하다는 점이다. 나 역시 ‘율법주의자’는 아니지만(글쎄 내 생각이기만 할지도),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꼴’은 나나 남이나 잘 못 견디는 편이다. 그게 고스란히 드러나는지, 미국에서 목사안수과정을 밟는 중에 받았던 인성 테스트에서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평가인즉, 내가 목회를 한다면 교인들에게 너무 엄중한 윤리적 잣대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가정사로 인해 결국 안수를 받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족이 길었지만, 내 성향이 그러하다보니 김교신의 ‘극단의 도’가 나는 참 좋았다.

 

김교신의 엄격한 윤리적 수행성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세 배경을 말해야할 것 같다. 김교신은 아주 어려서(네 살 무렵) 아버지를 여의었다. 홀로 되신 어머니는 행여 아버지가 없어 버릇없이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하셨던 것 같다. 하여 더욱 엄격하게 도덕적 훈련을 시키신 것으로 안다. 유교적 지식에 해박하신 분이셨기에 훈련의 준칙은 유교적 도덕률이 주를 이루었다. 여기 더하여 스무 살 무렵 스스로 기독교인이 된 김교신에게 기독교적 가르침은 ‘전적(全的) 기준’이 되어버렸다. 가정과 일터, 성경공부 모임과 『성서조선』 간행에 이르는 벅찬 일정 가운데서도 성실하고 규칙적인 일상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삼중겹의 도덕 훈련 덕분이었을 거다. 오죽했으면 동료교사와 바둑을 두다 보내버린 세 시간의 여가를 놓고도 산상수훈을 적용했을까. 그만한 일로 ‘손을 잘라버리고 싶은 만큼’의 죄책감을 느낀다면 일상을 어찌 살겠나,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일이다.

 

 

 

 

 

그런 김교신이었으니, 만약 그가 요사이 매일 들려오는 사건·사고들을 듣는다면 어찌 반응했을지 궁금해진다. 얼마 전에는 놀이시설 여자 탈의실과 샤워장을 몰래카메라로 찍어 동영상을 팔다 잡힌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그런 행위로 생활비를 마련하겠다는 발상도 어이없지만, 그걸 또 돈을 주고 사겠다는 사람은 뭔가 싶다. 하긴 ‘하의 실종’이니 ‘시스루 룩’이니 ‘입다 만 것 같은’ 패션도(음, 나도 어쩔 수 없이 기성세대인가보다.) 결국엔 입는 이나 보는 이나 ‘몸’의 응시를 염두에 둔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여, 오늘날의 문화를 ‘육체문화’라고 부르는 사회학자도 있다. 사람이 언제 육체를 가지지 않은 적이 있었나? 왜 오늘날을 유난히 ‘육체문화’라고 이름붙이는 걸까? 인간 육체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전통사회에서 육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생식과 노동이었다. 때문에 튼튼한 몸이 기대되었고 그 몸은 감상용이 아니라 매일 바쁘게 움직이는 몸이었다. 그러나 소위 ‘현대(modern)’ 사회로 진입하면서 생산 수단으로서의 몸의 기능은 상당부분 축소되었다. 여전히 다수의 서민들은 노동을 하지만 그것이 꼭 ‘육체적 힘’과 직결되는 노동만은 아니다. 오히려 정신노동이나 신체의 부분노동 측면이 더 많다. 또한 ‘생산’하는 자녀들의 숫자도 현격히 줄어들었다.

 

그러고 나니 이제 남은 몸의 활용도는 ‘즐기는(성적 쾌락을 포함하여)’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 거다. 상업적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후기 상태에 와 있다 보니 그 정도가 더욱 심각하다. 몸은 이제 소비의 도구를 넘어 사람을 ‘등급매기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나의 몸을 경이롭게 쳐다봐 준다면 그것이 ‘경쟁력’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이다. 타인의 시선을 훔쳐라! 나를 보게 만들어라! 이러한 응시의 명령이 마치 도덕률이라도 되듯 우리의 문화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보니 너도 나도 ‘탐나는 몸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니 맞다. ‘육체문화’의 도래다. 이제는 몸에다가 도덕 판단을 부여하는(‘착한 몸’이라는 표현) 지경이다.

 

 

그런데 이런 마당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8)라니! 예수의 윤리는 과연 이 ‘육체문화’의 한가운데서 적절한 윤리적 선언일까? 아니 세상을 살며 이 원칙을 적용할 수는 있는 걸까? 이에 대해 김교신의 생각은 단호했다.

 

간음(moicheia)이란 유부녀와 그 본 남편 이외의 딴 남성과의 불륜의 관계를 칭함이니,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즉 타인의 처는 범할 것이 아니며, 인처(人妻) 된 자는 다른 남성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이 모세 계명의 주안점이었다. …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에 대하여 ‘오직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여, 예와 같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진개(陳開)가 시작된다. 즉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벌써 간음을 범한 것이라고. 행위의 말엽(末葉)을 논함이 아니요, 그 동기의 대두(擡頭)하는 곳을 다스리신다.

 

그러게 말이다. 모세의 법 지키기도 힘든 시절에 예수는 더 근본적인 것을 요구하신 게 아닌가? 일부다처제가 용인되던 당시 문화권에서는 실제로 율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처첩을 거느리는 욕망을 실현하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은 ‘경건한 유대인’입네 자부심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이 많았다. ‘임자 없는 여인’이라면 ‘보고’ 품는 음욕쯤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나? 더한 일도 가능할 터인데... 지참금을 내고 데려오면 될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응시’의 윤리성이 더 근본적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간통이 형사법 상의 효력이 있던 당시에도 법적인 관건은 현장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했어?” 부부 관계의 신뢰성이 깨진 마당에 대부분의 남편과 아내 역시 이게 제일 중요한 집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김교신이 읽어낸 예수의 윤리는 이런 법적 실체성을 넘어선다. 문제는 오히려 ‘동기’요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무릇 여인(혹은 남자)을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이는 유부녀에 한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볼 때에 사념을 품음은 이미 간음을 행한 것이다. 예가 아닌 언사와 몸짓이 간음인 것은 물론이다. 누가 능히 핑계할 자인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 백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유익하고,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베어 버려라. 네 백체 중에 하나를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빠지는 것보다 유익하니라. … 눈과 손을 운운한 것은 육체 중에서도 가장 근이(近易)하게 사념(思念)의 중개를 하는 기관인 까닭이다.

 

또 나왔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빠지느니 눈과 손을 우리 몸에서 떼어 내어 버리는 것이 낫다는 ‘극단의 도’ 말이다. 더구나 김교신은 남녀 쌍방에게 이 ‘극단의 윤리’를 제안했다. 이를 ‘율법주의적’으로 적용한다면 성한 눈과 손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아가 ‘이혼 금지’라는 더 엄격한 도덕규범을 제시한 김교신이고 보면, 오늘날 그의 윤리가 많은 기독 신앙인에게 은혜롭게 받아들여지기는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김교신이 예수의 윤리에서 발견한 것은 ‘무조건 따라야하는 형식주의적 금지조항’이 아니었다. 김교신이 페미니즘을 모르던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그 시절 기독교적 결혼의 근본 원리에 대한 그의 해석은 여성신학자의 입장에서도 솔깃한 부분이 있다.(물론 부분적으로)

 

기독교의 결혼관은 금전, 권세 등을 위한 책략 결혼이 아님은 물론이요, 단지 생식(生殖)을 위한 것도 아니므로 생남(生男)하지 못한 것으로써 칠거지악의 하나로 셀 수 없으며, 쾌락을 중심으로 한 것도 아니니 연애지상주의도 아니요, 우애결혼도 아니다. … 인간의 제반 관계 중에 부부의 관계처럼 오묘하고 심원한 것이 없으며, 이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 직접 관계한 원시적 제도였다. “사람이 홀로 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도와주는 짝을 만들리라.”(창세기 2:18)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 ‘돕는 배필’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곁에 서서 동등하게 마주보고 응시하며 도움을 주는 짝’이라는 말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오고가는 관계의 신비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거야 다른 동물들도 받은 축복이니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다. 허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독처’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자유와 창조성을 자꾸 자기 확장과 타인소유에 사용하려 할 유혹을 가진다. 그걸 서로 견제해주면서 과한 욕망은 눌러주고 포기하려는 마음은 격려해주며 전인격적 관계 안에서 서로를 건설해가라고 만든 최초의 공동체가 바로 ‘나-너’(마틴 부버)라는 짝-공동체이다.

 

이 창조원리를 아는 신앙인이 아무런 사이도 아닌 몸을 뭐하러 훔쳐보겠나? 뭐하러 탐하겠나? ‘소비할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니기는 내 짝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예수의 윤리를 ‘극단적’으로 읽어낸 김교신의 원칙은 이 시절에도, 아니 오히려 이 시절이기에 더욱 더 강조되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응시에도 윤리적 시선이 필요하다. 전인격체로 바라보고 ‘너’로 마주할 윤리적 의무 말이다. ‘응시의 윤리’!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뽕띠도 말했던 이 윤리적 시선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꽉 차 있을 때에야 자연스럽고 성실하게 일상 가운데서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백소영/강남대학교 교수

 

<버리지마라 생명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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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과 십자가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31)

 

연꽃과 십자가

 

 

모름지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하거든 하나가 되십시오!

 

서울의 어느 교회의 대학생들이 주최한 문학의 밤 행사에 초대 손님으로 참석하여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질문은 젊은이들답게 생기발랄하였고 거침이 없었다.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한 학생이 당돌한 질문을 던져왔다.

 

“시인께서는 기독교 목사님이기도 하신데, 시 속에 연꽃이나 불상 등의 불교적 이미지를 그렇게 자주 사용하십니까?”

 

그 당시 내 시집 속에 수록된 시들이 불교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연꽃이나 불상, 또는 불두화 같은 불교적 상징이 강한 언어들을 이따금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제도종교의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았고,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예수도 종교의 외피에서 자유로운 분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회적으로 답변할 요량으로 질문을 던진 학생에게 되물었다.

 

“연꽃과 불교 가운데 무엇이 먼저 생겨났다고 생각하지요?”

 

학생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연꽃’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연꽃을 꼭 불교에 속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시는 자유롭고 활달한 상상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기독교인이라고 왜 연꽃을 시적 재제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느냐?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연인’이라면, 연꽃 또한 하나님이 어여삐 여기는 사랑스러운 연인이 아니겠냐? 이렇게 거듭 되묻자 질문을 던진 학생은 납득할 수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이런 생각엔 변함이 없다. 연꽃이 불교적 상징인 것이 틀림없지만, 연꽃은 불교를 넘어 누구에게나 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꽃이 아니던가. 전라도 무주의 아름다운 백연지를 가본 적이 있지만, 거기 흐드러지게 핀 연꽃들이 예수가문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자기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주지 않던가. 나는 예수가문에 속한 사람이지만, 왜소한 나를 넘어서 우주적 자아로 거듭나기를 꿈꿀 때 진흙탕에 핀 연꽃을 떠올리곤 하는데, 이런 관상의 자유를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고은비 그림

 

 

종교를 ‘으뜸의 가르침’이라고 한다. 하지만 으뜸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이가 그 으뜸의 가르침을 공경하고 사는 것 같지는 않다. 더러는 으뜸의 가르침을 제멋대로 왜곡하여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취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왜 목사시인이 연꽃 같은 상징을 취하느냐고 황당한 질문을 던진 학생을 가르친 종교 지도자가 예수의 종지를 제대로 받드는 사람이었다면, 그 학생이 그처럼 사유의 부피가 작은 존재로 자라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어떤 종교, 어떤 교리보다 사람이 더 귀하고 크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어떤 종교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가 속한 종교를 넓히는 것이다.

 

예수의 종지가 좁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왜소해지고 편협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왜소함이 그들이 따르는 분의 종지를 왜소하고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부단한 마음공부를 통해 자기를 확장하여 자비와 관용의 정신을 지닌다면, 그런 정신으로 사는 이들의 삶이 기독교를 자비와 관용의 종교로 드높여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몇 년 전 나는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과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부님이 상대방의 사원을 방문하며 진리의 법을 아름답게 나누는 것을 보고 <연꽃과 십자가>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자기보다 크고 둥근 원(圓)에

눈동자를 밀어 넣고 보면

연꽃은 눈흘김을 모른다는 것,

십자가는 헐뜯음을 모른다는 것,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는

연꽃과 십자가는 둘이 아니라는 것,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니라는 것.”

 

지금도 늦지 않았다. 늦은 깨달음이라도 깨달음은 귀하고, 늦은 어울림이라도 어울림은 향기로운 법. 우리가 연꽃보다 십자가보다 크신 분 앞에서 좀더 너그러워지고 서로를 품어 안을 수 있다면, 우리보다 앞선 선각자들이 나란히 앉아 진리의 법을 나누던 대화와 관용과 협력의 전통을 아름답게 이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드높은 진리의 산봉우리를 함께 오르다가 이쪽에서 ‘야호!’ 소리치면 저쪽에서 ‘야호!’ 화답하는 산울림처럼 종교간의 그런 어울림의 목소리가 이 산 저 산에 두루 메아리쳐 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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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배원 아저씨와 복순이

 

 

집배원 아저씨가 
"등기왔습니다!"

싸인을 받으시고
대문을 나서려는데

우리집 대문지기 복순이가
"멍~멍~멍"

집배원 아저씨가 
허리를 구부리시며
덩치 큰 복순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복순이는 
땅에 납작 업드리며 
큰 앞발로 아저씨 신발을 꼭 붙잡고 안 놓아준다

집배원 아저씨는
"반갑다고? 형아~ 이제 가야한다아" 하시고는

바쁜 걸음으로 대문을 나서며 
오토바이에 올라타신다

그 짧은 순간
망설이다가 건넨 아쉬운 한마디
"오빠얀데요..."

아저씨가 
"아, 그래요!" 하시며
한순간 푸른 하늘처럼 멍해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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