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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영성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맑은 물

-김기석 목사의《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

 

 

1.

 

대학을 마치고 감신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동갑내기 동향인 김기석 목사를 만났다. 그의 큰 눈은 지금처럼 깊이 파였고 형형한 빛을 발산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목의 소임을 위해 입대했기에 깊은 교분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의 인상은 강력하여 소식이 끊긴 다음에도 그의 행적이 종종 궁금했다.

 

당시에 그는 남미로 유학을 가서 해방신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다. 강골의 기질이 느껴졌기에 “그답다”는 생각을 했는데, 십 수 년이 지난 후에 그는 문학비평가가 되어 글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남미대신 자신의 서재를 택했고, 민중신학 대신 문학을 택했으며, 유학대신 독학을 택했다. 아무도 그를 주목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홀로 서재에서 서향을 벗 삼아 자신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그렇고 그런’ 목회 현장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평범한 목회자로 살면서 수도자의 영성을 길렀고, 매 주일 설교자로 강단에 서서 시인의 음성을 들려주었으며, 이런 저런 지면에 기고하는 글을 통해 자신이 체득한 진리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거에 누구도 가지 않았던 그만의 길을 개척하여 올곧게 걷고 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길이 되어가고 있다.

 

그의 최신간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꽃자리)는 설교자이자 신학자이며 사상가이자 문학가인 저자의 영성과 삶에서 우러나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편집자는 요한복음 본문에 대한 저자의 묵상과 요한복음 본문으로 선포한 설교를 번갈아 편집해 놓았다. 한 책에서 “했다” 체와 “했습니다” 체가 번갈아 나오는 것은 아주 드문 편집이다. 아마도 설교문이 가지는 다이나믹을 살리려는 배려였을 것이다.

 

이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분주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야 한다. 급하게 읽어내려 해서는 안 된다. 충분한 시간을 내어 몸을 바로 세우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천천히 읽어야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에릭 프롬이 말한 ‘소유형 독서’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독서를 통해 설교 예화나 자료를 얻으려는 습성에 젖어 있는 사람은 이 책의 향기를 음미할 수 없다. ‘존재형 독서’ 즉 독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키우려는 사람만이 이 책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저자 자신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기우려 쓴 글이기에 그와 같은 정성으로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중에 떠오른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복음 13:52).

 

저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폭넓은 독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자료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쓴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시인들의 싯구다. 그 싯구들은 잡힐 듯 말듯 한 예수님의 말씀에 빛을 던져 준다. 이것은 늘 시의 숲에서 산책하기를 즐기는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동양고전과 사상가들의 통찰도 동원이 된다.

 

 

 

 

2.

 

구약학계의 권위 있는 목소리인 월터 브르그만은 설교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시인의 마음이라고 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묵시가들의 핵심에는 그들의 시적 상상력이 있다고 했다. 학문으로서 성서학을 연구했던 나는 칼릴 지브란의 《예수의 생애》를 읽고 받은 충격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지브란의 문학적 상상력은 그 이전에 내가 읽은 수많은 학문 서적들보다 더 깊은 통찰을 던져 주었다. 그 때부터 나는 신학자보다 문학가의 성서 해석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시를 많이 인용했다는 것은 대단한 미덕이 아닐 수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시인의 심성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시인의 언어로 그것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저자의 설교는 전체로서 한 편의 시와 같다. 저자의 묵상도 마찬가지다. 그는 묵상 중간 중간에 자주 멈춘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묵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쓴다.

 

“이상도 하지. 낯선 이 사나이의 음성에서 고향이 느껴지다니! 그가 건넨 말의 내용이 아니었다. 그의 음성에 실려 오는 따뜻함과 순수함, 그것은 마치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이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봄바람인 듯싶었다”(49쪽).

 

저자는 본문을 마주 보기보다는 본문 안으로 들어간다.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사마리아 여인의 심정이 되어 보지 않고는 저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다. 그는 본문 안으로 들어가 그의 영성으로 맑은 물을 길어 올린다. 실로, 그의 글은 맑은 물과 같다. 자극적인 청량음료와 같은 글들이 홍수로 쏟아지는 현실에 그의 글은 차별성을 가진다. 청량음료는 잠시 만족을 주지만 금새 더 깊은 갈증을 만들어낸다.

 

저자는 언어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라 하지 않던가!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사용하여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무뎌지기 쉬운 독자의 정신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가 이렇게 언어에 천착하여 스스로를 연마하는 이유는 말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말을 통해 ‘말씀’ 즉 ‘다바르’에 이르기 위한 그의 치열한 궁구 덕분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다바르, 곧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말이다. 물 흐드듯 유장하고 나직하지만, 마치 폭포처럼 힘찬 말씀에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개념과 논리로 오염되지 않은 말, 본질을 향해 곧장 돌진하는 그 말씀은 낯설지만 거역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127쪽).

 

3.

 

이 책에서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쓰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상과 신학과 삶의 자세를 드러낸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영성가다. 하지만 그의 영성은 토마스 머튼의 그것처럼 사회적 관심으로 체화되는 영성이다. 앞에서 내가 해방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해방신학을 통하여 추구하려 했던 것을 지금은 영성을 통해 그리고 문학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길을 바뀌었을지언정 방향은 그대로다.

 

영성과 정의가 그의 내면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은 글 전체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요한복음 8장과 9장에 대한 묵상에서 선명하게 빛을 발한다. 그는 당시 권력자들과 예수님 사이에서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권력의 속성과 인간의 탐욕의 정체를 폭로한다. 그는 말한다.

 

“정의에 민감하고, 약한 이들에 대한 연민이 커지고 있다면, 배움을 향한 개방성이 자라고 있다면,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해도 좋을 것이다”(158쪽).

 

정의에 대한 관심과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영성은 미신이나 광신과 다르지 않다. 반면, 영성에 뿌리를 두지 않은 정의는 자칫 폭력으로 흐를 수 있다. ‘홀로 있음’과 ‘같이 있음’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처럼, 영성과 정의는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하는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묵상과 설교를 읽는 중에 그 아름다운 동행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저자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한국교회를 향해 아픈 충고를 내어 놓는다.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저자는 이렇게 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묵상하는 동안 가슴 한 켠이 무지근해졌다. 오늘의 교회는 이런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찾아온 무리들을 가르치고, 해저물면 차마 그들을 그저 보낼 수 없어 많거나 적거나 나눠 먹으려는 그 소박한 마음을 이미 부유해진 교회는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어마어마한 교회당을 짓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온갖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오늘의 기적에서 이 풀밭 위의 기적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99쪽)

 

저자가 서문에서 쓴대로 그의 묵상은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개인의 삶에서, 교회의 삶에서 그리고 이 세상의 삶에서 우직하게 실천하는 것이 묵상의 목적이다. 렉시오 디비나에서 말하는 ‘콘템플라치오’가 결국 이것이다. 읽고(‘렉시오’), 묵상하고(‘메디타치오’), 기도한(‘오라치오’) 말씀이 삶을 통해 그 진실을 드러내도록 맡기는 것이 마지막 단계인 ‘콘템플라치오’다.

 

온전한 서평이라면 부족한 점도 지적해야 하지만, 내가 훈련받은 분야와 저자가 스스로 개척한 분야가 너무 달라서 딱히 부족한 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저자는 묵상을 위해 믿을만한 성서 주석을 꼼꼼히 챙겼음에 분명하다. 그의 묵상은 본문에 대한 성실한 연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 때로 문학적 상상력으로 성서 묵상을 하는 사람들이 본문에 대한 연구 없는 ‘게으른 묵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본문 앞에서 무릎을 꿇기 전에 책상에서 해야 할 숙제의 책임을 다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요한복음 본문을 다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책으로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부해 보려는 사람에게는 아쉬움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학습을 위한 참고서가 아니다. 설교를 위한 주석서도 아니다. 저자가 요한복음에 기록된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여 얻는 깨달음을 기록한 책이다. 마치 깨달음의 이삭들을 모아 놓은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정진에 감사를 드린다. 그는 품격을 잃고 값싼 상품처럼 되어 버린 설교와 묵상에 품격을 입혀 주었다. 기독교 사상을 이 정도로 품위 있고 깊이 있게 풀어낼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부디, 기독교의 경계선을 넘어 일반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 사상가로 그리고 저자로 계속 깊어져가기를 기원한다. 법정 스님이 불교적인 사상으로 다른 종교인들과 일반인들에게 소통한 것처럼, 저자도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를 바란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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