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하듯



모든 게 올랐다. 정말 모든 게 겁나게 올랐다.


‘제사상 차리기도 어려워졌다’는 말이 빈 탄식이 아니다. 
단하나, 농산물만이 멀뚱멀뚱 한다. 바보처럼. 


무엇 그리 억센 놈에게 발목 잡혔는지 땀 벅벅 한숨 벅벅 농산물만 남겨두고, 비웃듯 조롱하듯 모든 게 올랐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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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읽다 가슴이 미어지는 건



“축제의 모임. 환희와 찬미소리 드높던 그 행렬, 무리들 앞장서서 성전으로 들어가던 일,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미어집니다.”(시 42:4) 

말씀을 읽다 가슴이 미어지는 건, 시인의 마음 충분히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떠나간 이 모두 돌아와 함께 예배할 그날은 언제일지, 이 작은 땅에서 그려보는 그날이, 옛일 그리는 옛 시인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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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몰이



쉽게 생각했던 토끼도 이젠 잔뜩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점점 포위망이 좁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겨울 방학 중 임시 소집일을 맞은 아이들이 선생님과 함께 눈 쌓인 뒷산으로 올라 토끼몰이에 나선 것입니다.


몽둥이를 든 아이에 깡통을 두드리는 아이, 산을 빙 둘러 몰이를 시작할 때만 해도 구경하듯 느긋하던 토끼가 아이들의 소리가 점점 커지고 행동이 빨라지자 차츰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발자국 소리에 놀라 저쪽으로 도망가면 “와!”하는 아이들의 함성이 막아섰고, 이쪽으로 뛰면 기다란 작대기를 든 아이들이 막아섰습니다.


이리 뛰고 자리 뛰고 하는 사이에 산을 에워싸던 아이들의 원은 점점 좁혀들었고, 그제야 토끼는 자기가 위태로워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간 게 종대 앞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제 토끼를 잡은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육상부 주장을 맡고 있는 종대는 누구보다도 몸이 빠른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었던 종대는 토끼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쓰러지며 토끼를 덮쳤지만 토끼가 그 틈을 살짝 피해 산 저쪽으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종대는 눈만 한 아름 안고 일어섰습니다.

허탕치고 내려오는 길, 토끼 놓친 걸 모두들 아쉬워했지만 종대만은 달랐습니다. 자기에게로 달려온 토끼를 마주했을 때, 잠깐이긴 했지만 종대는 토끼의 두 눈을 본 것인데, 잔뜩 겁에 질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토끼의 두 눈이 그렇게도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까짓 맘만 먹었다면 지친 토끼를 잡는 것은 종대에겐 쉬운 일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순 없었지만 종대의 마음은 여간 흐뭇하질 않았습니다. 일부러 한 자신의 실수가 토끼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다 잡은 토끼 놓쳤다고 친구들은 물론 선생님까지 아쉬워했지만 그럴수록 종대의 흐뭇함은 더했습니다. 흰 눈에 덮인 학교 뒷산 상자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할 뿐이었습니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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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소리



내 기억 속에는 몇 가지 소리가 남아있다. 메아리 울리듯 지금껏 떠나지 않는 소리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고향집 뒤편 언덕에서 들려왔던 통곡소리다.


쌓인 눈이 녹았다가 간밤 다시 얼어붙어 빙판길이 된 어느 겨울날 아침이었다. 갑자기 집 뒤편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울음이 아니라 통곡소리였다.


바로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였는데, 그때 그 아주머니는 언덕너머 동네에서 계란을 떼다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계란을 떼 가지고 오는 길이었는데 빙판이 된 언덕길에 미끄러져 그만 이고 오던 계란을 모두 깨뜨려버린 것이었다.


듬성듬성 미끈한 소나무 서 있던 뒷동산, 털버덕 언 땅에 주저앉은 아주머닌 장시간 대성통곡을 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을 어릴 적 기억, 그러나 그때 계란 깨뜨린 아주머니의 통곡소리는 아직껏 남아 있다.


무얼까? 세월로도 지워지지 않은 그 소리는 무엇 때문일까? 내 가난한 이웃의 슬픈 소리가. 언 땅에 주저앉아 터뜨린 울음소리가 통곡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는.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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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하고 못 사귄



단강으로 들어오는 직행버스 안에서의 일입니다. 용암에서 한 남자가 탔는데, 못 보던 분이었습니다.


운전기사 바로 뒤에 앉은 그 남자는 버스기사와 열심히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얘기 중에 이어진 것이 교회 욕이었고 신자 욕이었습니다.


자리가 빈 버스인데다가 남자의 목소리가 여간했던 탓에 일부러 귀 기울이지 않아도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욕은 쉽게 끝나지 않았고, 내용도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기사 아저씨가 욕을 해대는 남자의 말을 받았는데, 그 말을 듣고는 풉, 웃음이 났습니다.“ 어째 아저씨는 하나님하고 그리 못 사귀셨어요?”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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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오르는 꿈



친구와 함께 백두산에 오르는 꿈을 꾸었다. 꿈이었지만 가슴은 얼마나 뛰고 흥분되던지.
오르다말고 잠에서 깨어서도(아쉬워라!) 설레는 가슴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내 기똥찬 꿈을 꿨으니 꿈을 사라 했다. 거참 신나는 일이라고 친구도 덩달아 좋아한다.

언제쯤일까, 먼 길 빙 돌아서가 아니라 내 나라 내 땅을 지나 백두에, 天地에 이를 날은. 설레는 오늘 꿈이, 꿈만으로도 설레고 고마운 오늘 꿈이 정말로 가능한 그날은.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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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은 건



잘 보이지 않는 내 모습을 
오늘은 보고 싶습니다.


내 어디쯤인지
어떤 모습인지 
어디로 가는지
거울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일 없이 
턱 없이 밤이 깊은 건 
그 때문입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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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잘 나았심니더



“기도해 주신 덕분에 아기 잘 나았심니더.”


김남철 씨의 전화였습니다. 지난 봄 마을 보건진료소 소장님과 결혼한 김남철 씨가 아기 아빠가 되고 나서 전화를 한 것입니다.


“저를 꼭 닮았심니더.”


전화였지만 목소리만 듣고도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입이 귀에 닿은 웃음이 눈에 선했습니다.


낮선 마을로 들어와 마을사람들과 따뜻한 이웃되어 살아가는, 사랑하는 아내를 따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김남철 씨가 이젠 아기 아빠가 되었습니다.


아기를 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아기 유난히 좋아하는 평소 그의 성품으로 보아 가뜩이나 정겨운 신혼살림에 더욱 더 웃음꽃 피어날 것이, 전화 속 전해온 웃음만큼이나 눈에 선했습니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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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의 햇살

  

그대 등 뒤로 내리는 햇살이 
따스함으로 머물도록
한 올 한 올
품안에서 머물도록
잠깐
잠깐만이라도 그대 고요하라.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비늘 같은 햇살
햇살은 거리에 널리고 
바쁜 걸음에 밟히니 
표정 잃은 등마다 낯선 슬픔 
제 집처럼 찾아드니

그대 등 뒤로 내리는 햇살이 
새근새근
고른 숨결로 머물도록
잠깐
잠깐이라도 그대 침묵하라.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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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 기다려온 씨앗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복음 11:28-30)


박민하 성도님 네 심방을 하며 위의 성경을 읽었다. 무거운 짐, 걱정일랑 주께 맡기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말씀 중 ‘멍에’도 그랬고, ‘두 마리 소가 나란히 밭을 간다’는 농사법에 대한 얘기도 그랬다.


함께 모인 교우들이 그 말을 쉽게 이해했다. 박민하 성도님은 ‘두 마리 소’를 ‘겨릿소’로 받으셨다.

‘소나 나귀는 주인을 알아보는데 내 백성은 나를 모른다’(이사야 1:3)는 속회공과를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알아보나요?” 


여쭸더니 


“그럼요, 주인보다 먼저 알아보고 좋아하는데요.”


허석분 할머니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다. 하늘 바라 땅 일구며, 씨 뿌리고 거두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가슴에 말씀일랑 씨앗처럼 떨어진다.


투박하고 푹푹한 땅의 가슴, 말씀은 발아 기다려온 씨앗처럼 그렇게 떨어진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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