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예전에 독서캠프를 통해 만난 분 중에 나태주 시인이 있습니다. ‘풀꽃’이란 시로 널리 알려진 시인이지요. 시골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신 분답게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그분을 처음 뵙는데, 그 분은 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한 신문에 쓰고 있는 칼럼을 눈여겨 읽어오고 있다 했는데, 금방 친숙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나태주 시인이 쓴 시 중에 최근에 알게 된 시가 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시한부 삶을 선고받을 만큼 중병을 앓고 있을 때, 곁에서 간호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썼다는 시였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라는 제목의 시였는데,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저에게가 아니에요.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아내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뭉뚝뭉뚝 묻어나는데, 더 감동적이었던 것은 남편의 글에 화답하여 쓴 아내의 글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남편이 드린 기도보다 더 간절한 기도, 시인 아내의 절창이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요,

남편의 병상 밑에서 잠을 청하며

사랑의 낮은 자리를 깨우쳐주신 하나님!

 

이제는 저이를 다시는 아프게 하지 마시어요.

우리가 모르는 우리의 죄로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다면,

그게 피할 수 없는 우리의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

하나님!

 

저 남자는 젊어서부터 분필과 함께,

몽당연필과 함께 산, 시골 초등학교 선생이었어요.

시에 대한 꿈 하나만으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만 욕심내온 남자예요.

시 외의 것으로는 화를 내지 않은 사람이에요.

책꽂이에 경영이니 주식이니 돈 버는 책은 하나도 없는 남자고요.

제일 아끼는 거라곤 제자가 선물한 만년필과

그간 받은 편지들과 외갓집에 대한 추억뿐이에요.

한 여자 남편으로 토방처럼 배고프게 살아왔고,

두 아이 아빠로서 우는 모습 숨기는 능력밖에 없었던 남자지요.

공주 금강의 아름다운 물결과 금학동 뒷산의

푸른 그늘만이 재산인 사람이에요.

운전조차 할 줄 몰라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남자예요.

승용차라도 얻어 탄 날이면

꼭 그 사람 큰 덕 봤다고 먼 산 보던 사람이에요.

 

하나님!

저의 남편 나태주 시인에게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좀만 시간을 더 주시면 아름다운 시로 당신 사랑을 꼭 갚을 사람이에요.

 

부부가 나누는 지극한 사랑이 따뜻한 감동으로 전해졌습니다. ‘한 번의 고통이 더 남아 있는 것이라면 이제는 제가 병상에 누울게요.’라는 기도 앞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만, 이만한 기도를 물리치시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토록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우리 곁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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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검은 사람일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

 

 

따끔이 속에 빤질이, 빤질이 속에 털털이, 털털이 속에 얌얌이, 이게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따끔이, 빤질이, 털털이, 얌얌이, 각각의 의미도 짐작하기 쉽지 않은 터에 그것들이 서로의 속에 있다니 마치 말의 미궁에 빠져드는 것 같다.

 

정답은 밤이다. 캄캄한 밤이 아니라, 가을에 익는 밤(栗) 말이다. 밤을 먹기 위해서는 따끔따끔한 가시를 벗겨야 하고, 두껍고 빤들빤들한 겉껍질을 벗겨야 하며, 그 뒤에는 작은 털이 달린 껍질을 다시 벗겨야 하고, 맨 마지막으로는 떫은맛을 지닌 속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마침내 고소하고 오들오들한 밤을 얌얌 맛있게 먹을 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이다. 겉과 속이 다른 것은 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겉 다르고 속 다를 때가 있다. 아니,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참 드문 일이 되었다. 어디서고 가면극이 벌어지는 세상, 허전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양의 탈을 썼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는 말이 있다. 겉은 그럴듯하지만 속에는 음흉한 생각을 숨기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낚시 바늘을 보면 바늘 뒤편에 살짝 되꼬부라진 부분이 있다. 이른바 ‘미늘’인데 바로 그 미늘 때문에 고기는 걸려든다. 미늘 때문에 물고기는 바늘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된다. 겉으론 웃지만 뒤편에 미늘을 숨긴 채 다가오는 사람이야말로 ‘양의 탈을 썼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달과 별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가 그렇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면서 떡을 팔고 장에서 다녀오는 엄마를 호랑이는 잡아먹는다. 떡 하나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결국 호랑이는 엄마를 잡아먹고 만다. 하나씩 하나씩 빼앗기는 것이 결국은 전부를 빼앗기는 길이라는 걸 호랑이를 통해 보게 된다.

 

엄마를 잡아먹은 호랑이는 외딴집에 남겨진 오누이마저 잡아먹기 위해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오누이를 찾아온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오누이가 문을 열어주지 않자 호랑이는 자기 발에 분을 바르고 엄마 목소리를 흉내 낸다.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어찌 분칠을 한 호랑이 발을 엄마의 손으로 알 수가 있었는지, 호랑이 목소리를 엄마의 목소리와 혼동할 수가 있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결국 오누이는 호랑이 앞에 문을 열어주고 만다.

 

생각해 보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오누이는 바로 우리들일 수 있다. 분칠을 한 호랑이 발을 엄마의 손으로 알고, 그럴듯한 호랑이 목소리를 엄마의 목소리로 알고 헛된 것 앞에 문을 여는 일은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난다.

 

우리의 속담 중에 ‘속 검은 사람일수록 비단 두루마기를 입는다’는 속담이 있다. 검은 속과 화려한 비단옷이 대조를 이룬다. 속이 검으면 검을수록 그것을 가리려는 화려함은 더욱 화려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비단옷을 입었다고 덕 있는 사람이라 당연히 생각해서도 안 되고, 허름한 옷 입었다고 당연한 듯 무시해서도 안 될 일이다. 비단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무조건 검은 속을 의심할 건 아니겠으나, 비단 옷 입고 비단 같은 말을 한다 하여서 무조건 믿을 일 또한 아닌 것이다.

 

비단옷을 입어 다른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느니 차라리 무명옷을 입고 무명옷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이지만, 무엇보다 비단옷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겠다. 두껍게 바른 분으로 감추고 다가오는 날카로운 발톱을 행여나 엄마의 손으로 혼동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바로 그런 일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행여 비단옷을 입고 보는 이의 마음을 어지럽히느니, 무명옷을 입고 무명옷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레 그립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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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

 

 

내 책상 위에는 그림 하나가 놓여 있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형상화 한 그림으로,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다 늙은 아버지가 끌어안아주는 장면을 담고 있다.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인지 나중의 해석이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보면 아들의 등을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은 서로 다르게 보인다. 한 손은 크고 억세게 보이는데, 다른 한 손은 보드랍고 작다.

 

마치 한 손은 아버지의 손 같고, 다른 한 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보인다. 거장 렘브란트가 두 손을 똑같이 그릴 재주가 없어 그렇게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두 손을 이렇게 이해하곤 한다. 네 모습이 어떠하든지 얼마든지 너를 용서한다는 어머니의 마음과, 내가 다시는 너를 놓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마음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이라고.

 

 

 

 

그것뿐이 아니다. 아버지가 걸친 붉은 색 망토는 상처 입은 새끼 새를 보듬어 안는 어미 새의 품 같고, 아버지 가슴에 기댄 아들의 머리에 땀이 밴 것은 마치 자궁 속에 자식을 품는 심정이며(히브리어 긍휼이라는 말에는 태, 자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다), 아버지의 거반 감겨 있는 두 눈은 지난날 지은 모든 잘못에 대해 이미 눈을 감은 아버지의 심정을 담아낸 것으로 이해한다. 그림을 통해 아버지의 심정을 표현하는 화가의 이해력이 놀랍기만 하다.

 

그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아들의 꼬락서니가 볼만하다. 영락없이 거지꼴을 한 아들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신발은 다 헤져 있고, 그나마 신발 한 짝은 벗겨진 채 무릎을 꿇고 있다.

 

아버지께 돌아오기 전 아들은 아버지께 이렇게 말하려 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께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가로막는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대신 종들을 불러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라 한 뒤 잔치를 준비시킨다.

 

아버지가 말을 막아 아들이 아버지께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아버지는 돌아온 아들로부터 그 말 듣기를 원하지 않으셨고, 차마 그 말 듣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성으로 용서를 빌면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는 데는 무쇠도 녹는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그럴진대 하물며 하늘이겠는가.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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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간다

 

 

삶은 공식이 아니라 신비다. 나이 먹으면서 우리는 그것을 배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평생 생의 학교에 다니는 코흘리개 학생들이다.

 

열심히 하는데도 일이 안 될 때가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는데도 오히려 일이 꼬일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별로 애쓰지 않았다 싶은데도 일이 뜻대로 잘 될 때가 있다. 누가 돕기라도 하듯 술술 풀릴 때가 있다.

 

일이 술술 잘 되는 것을 두고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간다’고 했다. ‘체’란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밭거나 거르는데 쓰는 도구였다. 그물이 드물었던 어린 시절에는 체를 들고 나가 개울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다. 동그란 체를 대고 고기를 몰면 미꾸라지 새우 등이 걸려들었다. 대개의 경우 고기를 잡다보면 체에는 구멍이 났고 그러면 어머니께 된 꾸중을 맞았지만 말이다.

 

 

 

체를 많이 사용하던 시절에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다 헤어진 쳇불을 갈아 끼워 주거나, 얼레미, 도디미, 생주체, 고운체 등 체를 파는 체 장수가 있었다. 그만큼 일상생활 속에서 체의 사용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의 전통 술인 막걸리는 술이 익은 후에 술막지를 체로 걸러낸 후에야 먹을 수가 있다. 술이 알맞게 익어갈 무렵 술 맛이 궁금하던 차에 때마침 술을 거를 수 있는 체 파는 장수가 지나가니 일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다. ‘술 익자 임 오신다’는 속담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일이 잘 맞아 돌아가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삶에도 그런 즐거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대추나무에 연 걸린 듯 사방 답답한 일들이 엉겨 있는 요즘에는 더욱 더 그런 마음이 든다. 술 익자 체 장수 지나가는, 술 익자 임이 찾아오는 기가 막힌 즐거움이 더러더러 있어 답답한 숨구멍을 터주는.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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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 


 

40여 일 동안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고 온 지인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꼭 필요하다 싶어 챙긴 짐들 중에서 중간에 버린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걷는 것이 워낙 힘들다보니 버릴 수 있는 것은 뭐든지 버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단다. 눈썹도 짐이 된다니, 눈썹에 무슨 무게가 있다는 것일까 싶다. 눈썹이 없는 사람도 없지만 눈썹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눈썹이라는 말과 무게라는 말은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는 말이다. 그러나 ‘백 리만 걸으면 눈썹조차 무겁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눈썹도 먼 길을 걸으면 느낌이 달라지는 모양이다.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는 것은, 먼 길을 나설 때는 눈썹조차도 빼놓고 가라는 뜻이다. ‘눈썹조차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뜻을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것들은 무엇이든 모두 다 빼놓고 가라는 것이다.


말을 타고 멀리 가려고 하는 자는 말을 배불리 먹일 것이 아니라 말이 내핍에 견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뭐가 필요한지 불필요한지 생각지도 않은 채 온갖 것을 다 챙겨가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우리네 삶에 눈썹의 무게 이야기는 얼마만한 무게로 다가올 수 있을지.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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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사랑을 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지금이야 대부분 미터법을 사용하지만 이전에는 치(寸), 자(尺), 척(尺) 등 지금과는 다른 단위를 썼다. 거리를 재는 방법도 달라져서 요즘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도 기계를 통해 대번 거리를 알아내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측정법이 좋아져도 잴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하늘의 높이나 크기를 누가 잴 수 있을까. 바라볼 뿐 감히 잴 수는 없다. 그런데도 자기 손에 자 하나 들었다고 함부로 하늘을 재고 그 크기가 얼마라고 자신 있게 떠벌리는 종교인들이 더러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도 잴 수가 없다. 기쁨과 슬픔 등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잴 수가 있겠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잴 수 없고, 재서는 안 되는 것 중에는 사랑도 있다. 때로는 궁금한 마음에, 때로는 욕심으로 누군가의 사랑을 재려 할 때가 있다. 어떤 땐 내게 주는 사랑의 정도가 궁금하고 어떤 땐 내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손해 아닌가 사랑을 재려 할 때가 있지만 결국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랑이 길거나 짧다 생각하는 것은 모두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강물처럼 흘러가도록 두어야 한다. 스스로 숨을 쉬며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윽해 진다. 재기 시작하는 사랑은 서서히 질식하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사랑초서>는 절창이다 싶다.

 

떫은 사랑일 땐

준 걸 자랑했으나

익은 사랑에선

눈멀어도 못다 갚을

송구함뿐이구나

 

-김남조 <사랑초서>(53)

 

‘사랑은 정직한 농사

이 세상 가장 깊은데 심어

가장 늦은 날에

싹을 보느니’

 

-김남조 <사랑초서>(83)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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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똥 눈 우물물 제가 도로 마신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동네 한복판에 있었다. 지리적으로 한 가운데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물을 긷고 빨래를 하고, 우물은 만남의 장소였고 대화의 장소였다. 우물이 있어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한 식구와 같은 ‘우리’가 될 수 있었다. ‘남’이 따로 없었다. 우물은 그렇게 마을을 형성하는 중심이었다.




그런데 우물에다 똥을 누다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우물에다 똥을 눈다는 말인가? 누군가를 골려주려고 그랬을 수도 있고, 대판 싸운 집이 있어 분한 마음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속담은 ‘제가 똥 눈 우물물 제가 도로 마신다’고 말한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재미있고, 통쾌하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 급하다고 아무도 안 본다고 앞 뒤 가림 없이 행동하는 모든 것, 그 모든 것들은 우물에 똥을 누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는 이 없다고 슬쩍 쓰레기를 버리거나, 돈에 눈이 멀어 비 오는 날 하수구에 독성이 있는 공해물질을 함부로 흘려버리거나, 화가 났다고 자기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낸다든지, 그 때는 편할지 몰라도 그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자기 입으로 들어오게 된다. 우물에는 제발 똥 누지 말 것, 그 당연한 일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있다니!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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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밑에 쉬 스는 줄은 모른다



손톱 밑에 가시 드는 거야 대번 안다. 눈에 금방 띄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아프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부위보다도 손톱 밑에 박히는 가시는 아프기도 하고 빼내기도 어렵다.


그런 점에서 ‘손톱 밑의 가시’란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그마한 것 때문에 겪게 되는 적잖은 곤란이나 고통을 의미한다. 염통이라 함은 심장을 말하는 것일 터, 그런데 ‘쉬 스는’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낯설다. ‘쉬가 슬다’라는 말은 ‘파리가 알을 까다’라는 말이다. 심장에 파리가 알을 까다니, 그런 심각한 상 황이 어디에 있을까 싶다.





그런데 사람이 묘하다. 손톱 밑에 가시 박힌 것은 알아도 심장에 파리가 알을 까는 것은 모르니 말이다. 눈에 보이는 작은 문제는 알면서도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이 우리들이다. 우리의 엉뚱한 민감함과 위태위태한 우리의 무감함이라니!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중에서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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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29)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

 

 

강원도 단강에서 지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새집을 하나 발견하였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새집을 발견하면 새집을 ‘맡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맡다’라는 말이 묘합니다. ‘맡다’라는 말에는 ‘차지하다’는 뜻도 있고, ‘냄새를 코로 들이마셔 느끼다’ 혹은 ‘일의 형편이나 낌새를 엿보아 눈치 채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릴 적 말했던 ‘맡는다’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담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새집이 어디 있는지를 눈치 챘다는 뜻도 있고, 내가 차지했다는 뜻도 담겨 있었을 테니 말이지요.

 

저녁 무렵 교회 뒤뜰을 거닐다가 새 한 마리를 보게 되었는데, 날아가는 모양이 특이했습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스럽게 이 가지 저 가지를 옮겨 다니고 있었지요. 어릴 적엔 새가 쫑긋거리며 나는 모양만 보고도 새집의 존재 여부와 위치를 짐작하곤 했지요. 그런 떨리는 예감이 틀리지 않을 때의 짜릿함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신비로움이었습니다.

 

눈앞에서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만 비춰 봐도 근처에 새집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는데, 새의 부리에 벌레까지 물려 있으니 새집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더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었습니다.

 

 

 

 

경계하는 새의 눈에서 벗어나 사택 계단 쪽으로 물러나와 가만히 새를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는 나의 행동이 미심쩍었던지 여간해선 둥지에 들지를 않았습니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새는 안심을 했던지 둥지 쪽으로 내려앉았고, 새집의 위치를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 성탄절, 성탄장식을 했던 소나무와 소나무가 넘어지지 않도록 모래를 넣어 사용한 플라스틱 양동이를 예배당 뒤편에 놓아두었는데 놀랍게도 새집은 그곳에 있었습니다. 비스듬히 누워 있는 양동이 안은 비가와도 비에 젖을 것이 없는 매우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양동이 안 소나무 가지를 피해 둥그렇게 만들어진 새집 안에는 - 새는 언제 누구에게서 자기만의 집 짓는 법을 저리도 훌륭히 배운 것일까요 -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새끼 세 마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새끼들은 내 인기척을 듣고는 어미가 온 줄로 생각을 했던지 쩍쩍 입을 벌려대고 있었습니다.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 있던 비밀 하나를 알게 된 것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잘 보살펴야지 싶었습니다. 개구쟁이 아이들에게 들키면 새끼들은 장난감이 될 지도 모를 일, 그런 수난 없이 잘 자라 둥지를 떠나게 하고 싶었지요.

 

둥지를 살필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가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어느새 솜털을 지나 고운 털들이 몸을 덮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새끼 새 한 마리가 둥지에서 떨어져 나와 양동이 안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내 딴엔 새를 더 잘 살핀다는 마음으로 시간이 될 때마다 둥지에 들른 것인데, 결국 생각하니 이유라면 그게 이유 아닐까 싶었습니다.

 

어미로서는 누군가 둥지를 찾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그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끼를 옮기려다가 그것이 제대로 안 되어 그만 새끼가 죽은 것이겠다 싶었습니다.

 

누군가의 비밀을 안다는 것, 그를 돌본다는 이유로 내밀한 비밀을 함부로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일인지를 양동이 안에서 죽은 새끼 새는 지금도 엄하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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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런두런(29)

 

어떤 새

 

한 마리 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되면 하늘로 날아오르곤 했습니다.

다른 새들이 잠이 들면 슬며시 혼자 깨어 일어나 별들 일렁이는 밤하늘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쉬는 법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기 전 그는 어김없이 둥지로 돌아왔고, 잠깐 눈을 붙였다간 다른 새들과 함께 일어나 함께 지냈습니다.

아무도 그가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마리 새가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밤중에 깨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뒷모습을 우연히 본 것이었습니다.

이내 눈에서 사라지는 까마득한 높이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막 둥지로 돌아온 새에게 물었습니다.

 

-어딜 갔다 오는 거니?

-하늘.

-모두들 하늘을 날잖니?

-하늘은 깊어.

-왜 하필 밤이야?

-모두들 잠들잖아.

-그런데 왜 돌아오니?

-이곳에 살기 위하여.

-돌아올 걸 뭣 하러 날아오르니?

-이곳을 사랑하기 위하여.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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