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에서 만난 듯 소탈한 시골약사 이야기9 영이가 죽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영정 사진 속 예쁜 19살 영이가 비통에 빠진 조문객들을 환한 미소로 마주하고 있었다. 영이는 내년이면 20살이 되었을 것이고, 개나리가 필 쯤이면 풋풋한 대학 새내기가 되었을 것이다. 눈이 크고 예쁜 영이는 분명히 많은 남학생들에게 데이트 신청도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새침한 영이가 너무 좋아서 영이가 오가는 길을 서성이는 남학생도 있었을지 모른다. 내년이면 그랬을 영이가 19살을 다 살지 못한 채 죽었다. 열흘 전 영이는 집 앞 공원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후 의사들은 가까스로 영이의 심장을 살려 냈지만 영이의 뇌를 살려내진 못했다. 영이는 뇌사상태로 일주일을 더 살았다. 영이의 간, 신장, 각막, 심장은 살고자 하는 누군가에게 기증되었고 영이는 그렇게 그녀를 .. 2021. 10. 5. 박카스를 좋아하는 그 남자의 이야기 매주 박카스를 사러 오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아버지이고 남편이며 형이다. 그는 한적한 강가에서 낚시 줄이 고요하게 흔들리는 것을 좋아하고, 어린 손녀가 한없이 사랑스럽고 신기한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30년 하루하루를 신발이 닳도록 성실히 일했고, 아픈 동생과 삶을 함께 해 왔다. 몇 해 전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첫 인상은 50대 후반의 앞머리가 벗겨진 평안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운영하는 제조업공장은 그럭저럭 잘 유지되었고, 아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으며, 30년 넘게 함께 산 아내는 여전히 곱고 다정했다. 10년 전 위암 수술을 했던 동생은 좀 마르긴 했지만 건강해 보였고 무사히 자녀들을 결혼시켰으며 잘 웃었다. 남자는 인생에서 자신이 지켜주고 싶었던 사람.. 2021. 6. 10. 에셀도서관에 부는 바람 나에게 특별한 두 편의 동화를 고르라면 와 이다. 이 책은 내가 글을 배운 이후 내가 처음 읽어 본 동화책이다.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인 부모님은 5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산골마을 떠나 정읍으로 나오셨다. 고향의 논밭을 팔아 변두리에 작은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착했지만 학력이 낮은 부모님이 고를 수 있는 돈벌이는 제한적이었다. 어릴 적 기억을 되짚어 보면 아버지는 끊임없이 일을 하셨다. 가족이 먹을 양식은 직접 농사 지으셨고, 5남매를 가르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던 것 같다. 보일러공, 집짓는 일, 수레에 과일과 야채를 싣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파는 노점상, 공장직공, 청소부 등 아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까지 합친다면 아버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경험.. 2021. 5. 30. 눈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보세요 “방앗간 참새 왔어~!” 길 건너 덕리에 사는 권 씨 할아버지의 약국 문 여는 소리다. 스스로 참새가 되신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어느새 방앗간의 주인이 된다. 82세의 권할아버지는 산 밑의 오래된 옛집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6남매를 낳고 키운 오래된 집은 늙은 부부의 거친 피부처럼 누런 빛깔을 띠고 여기저기 주름과 틈이 생겼으며 검은 그름이 나이테처럼 쌓여있다. “아부지 오셨어요! 때마침 커피타임인데 아부지도 한잔 허실라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그려, 한잔 줘 바. 개미다방 미스리보다 나을라나?”로 되받아 치신다.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신 할머니가 요즘은 밭도 아닌 밭 비탈에 앉아 하루 종일 풀을 뜯는데 말려도 안 듣는다는 하소연부터 뒤뜰에 심겨진 감나무에 감이 얼마나 열렸는지 등 그저 .. 2021. 5. 27. “어머니가 저를 몰라보셔도 괜찮아요” 오늘은 장애인 목욕봉사가 있는 날인데 아침부터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뭄 후 오랜만에 보는 봄비이니 단비인 것은 확실한데 혼자서 우산을 받쳐 들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단비도 씁쓸한 불편함이 될 수 있다. 목욕탕으로 이동하려니 횡단보도 앞에 휠체어를 잡고 계신 팔십이 넘은 어머니와 육십이 넘은 아들이 우산을 받쳐 든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익히 알던 분들인지라 나는 얼른 늙은 어머니대신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어머니는 봉사하러 온 고등학생의 우산을 같이 쓰고 목욕탕으로 따라오셨고 나는 아들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밀고 봄비 속을 앞서 걸었다. 휠체어에 앉은 사람과 밀어주는 사람이 빗속을 함께 걸으면 한사람은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15분동안 비를 맞았지만 어머니는 20년 .. 2021. 5. 3. 나는 세 번째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간다 살아오면서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많은 빚을 지었다. 내가 머물 곳이 없을 때 어떤 이는 자신의 작은 방에 나를 재워 주었고, 어떤 이들은 얼굴도 모르는 내게 장학금을 주었으며,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주셨다. 가난했던 나는 여러 사람들의 돌봄과 배려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상을 향해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이자를 포함해서 그 돈을 갚으면 그만이지만 나를 도왔던 많은 이들은 내게 돌려받고자 빌려준 것이 아니기에 내가 갚을 수 있는 형편이 되어도 나는 갚을 수가 없다. 그들 중 어떤 분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기에 어떤 식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와 빚이 있다. 나는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지고 살아왔고, 이제는 가능하면 살면.. 2021. 4. 28. 나는 더 먼 길을 걷는 꿈을 꾼다(2) 다음날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을을 지나 산으로 들어가니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넘나들며 무지개 꽃을 피워낸다. 꽃천사 루루가 찾던 “행복의 무지개꽃”은 오늘 우리가 만난 햇살을 잠시 바라볼 여유만 있어도 쉽게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테를링크의 책 ‘파랑새’에서도 주인공 틸틸은 결국 자신의 집에서 파랑새를 찾지 않았던가. 1코스는 접근성이 좋고 지리산 둘레길의 시작인지라 걷는 이들이 많다. 혼자 걷는 이부터 수십 명의 산악회까지 가족, 연인, 직장동료 등 길을 걷는 이들의 관계도 다양해보인다. 100년도 못사는 인생에서 우리는 참 다양한 인연의 거미줄을 치고 산다. 그 중 대부분은 돌보지 못한 세월에 사라지고, 일부는 크고 작은 풍랑에 끊기고, 남은 몇 가닥 거미줄만이 오.. 2021. 4. 25. 나는 더 먼 길을 걷는 꿈을 꾼다(1) 몇 년 전부터 나는 친구와 함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약국에 매여 있는지라 시간을 자주 낼 순 없지만 그래도 계절마다 걷기 좋은 길을 찾아 종일 걷곤 한다. 올해는 석가탄신일을 이용해 1박 2일 코스로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로 했다. 작년에 2박 3일 동안 지리산 둘레길 중 운봉에서 동강구간를 걸었는데 그 느낌이 좋아서 ‘지리산 둘레길 완주’를 나의 버킷리스트에 추가시켰다. 그러니 다리 후들거리기 전에 틈틈이 찾아가야 할 곳이 지리산이 되었다. 5월 21일 새벽 5시 30분 구례구역행 KTX를 타기 위해 새벽부터 서두른 덕분에 도시락까지 챙기며 여유롭게 기차에 올랐다. 호남선KTX가 생기고 서울에서 남원까지 2시간이면 가는 세상이 되었다. 예전엔 고향인 정읍과 서울을 오갈 때 4시간씩 걸리곤 했는데 이젠 .. 2021. 4. 23. 화성 노인의 지구별 여행기 14평의 작은 시골약국에는 하루 종일 여러 사람이 다녀간다. 2살배기 아이부터 90세가 넘는 노인까지... 나이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먹고 사는 일도 다르고 살아온 인생도 다른 사람들이 오늘도 약국 문턱을 넘나들며 인사를 나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약국 출입문 옆에 걸어 둔 정현종 시인의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약국에 오는 이들이 보게 될 글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내가 제일 많이 읽게 된다. 약국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을 습관처럼 무감각하게 대하거나, 매출을 위한 돈줄로 보게 되는 마음을 경계하고, 또 내가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좀 더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길 바라며 되새겨 읽게 되는 글귀이다. 평소 나는 약국을 찾는 이들에.. 2021. 4. 2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