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

  • 흔하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고 처음인듯 감탄하는 시선, 그런 눈이 있어서 오늘도 세상은 넉넉히 아름답습니다.

    신동숙 2019.12.07 13:4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4)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들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희끗희끗 뭔가 허공에 날리는 것이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니 눈이었다. 작은 눈가루가 날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눈이 오네, 올 겨울 들어 처음으로 보는 눈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는데 생각하니 마침 절기로 ‘대설’, 자연의 어김없는 걸음이 감탄스러웠다.

 

 

 

 

잠시 서서 눈을 감상하고 있을 때 담장 저쪽 끝에서 참새 몇 마리가 날아오른다. 언제라도 참새들의 날갯짓과 재잘거림은 경쾌하다. 참새들의 날갯짓과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하는 눈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맞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이처럼 가벼운 것들이다. 대설과 눈, 눈가루와 참새,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서로 어울려 세상은 넉넉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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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니겠지요?

  • 설마가 사람 잡죠.!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06 14:01
  • 맞아요,
    사람을 잡는 것 중에는 설마도 있지 싶답니다.

    한희철 2019.12.06 18:3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3)

 

저는 아니겠지요?

 

녹은 쇠에서 나와 쇠를 삼킨다. 눈물겨운 사랑도 눈물겨운 배신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어느 것보다도 고맙고 아프다.


십자가를 앞둔 최후의 만찬자리, 음식을 먹던 중에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주님이 말씀하시던 중 ‘진실로’라 하면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듯 마음을 가다듬고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진실로’를 다른 성경은 ‘진정으로’(새번역), ‘분명히’(공동번역)로 옮겼다.
 

 

 


나를 파는 자가 너희 중의 하나라는 말을 듣는 제자들의 마음은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나는 아닙니다.” 하지 못하고, “저는 아니겠지요?” 했던 데서 제자들의 당혹감과 두려움이 읽힌다. 그들은 돌아가며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유다 차례가 되었을 때 유다는 어떻게 했을까? 유다도 다른 제자들처럼 같은 말을 했을까?


예수님으로부터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유다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무도 모르게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고, 예수를 넘겨주기로 거래했고 흥정했다. 모를 줄 알았다. 아무도 모르게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예수는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지 않는가?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말을 유다도 했다면 그의 목소리는 어땠을까? 사시나무 떨 듯 떨었을까? 들릴락 말락 기어들어가는 개미 목소리였을까?


아니, 아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처럼 드는 생각이 있다. 그는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자신 있게 그 말을 했을 것이다. 목소리도 컸고, 당당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는 더욱 더!

오늘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한다.


설마, 저는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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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 반을 마중 나가는 '반보기'라는 말이 정겹습니다.
    어릴 적 제 평소 걸음걸이가 새 날 듯이였답니다 ㅎ
    심지어는 내리막길에서도...

    신동숙 2019.12.05 13:49
    • 내리막길을 새날 듯이 가다가는 넘어지기 십상이었을 텐데요.
      그래도 활달한 모습이 선합니다.

      한희철 2019.12.05 19:41 DEL
  • 감사합니다. 좋은 속담 담아갑니다.

    이진구 2019.12.05 15:26
    • 의미 있는 속담이다 싶습니다.

      한희철 2019.12.05 19:42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2)

 

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대림절을 시작하는 주일, 우리 속담 하나를 소개했다. ‘친정 길은 참대 갈대 엇벤 길도 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간다’는 속담이었다. 참대와 갈대가 있는 곳을 지나면 신을 제대로 신어도 발이 베이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친정을 찾아갈 때는 발이야 베든 말든 신을 벗어들고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간다는 것이다. 친정을 찾아가는 집난이(시집간 딸)의 기쁨이 마치 숨결까지 묻어나는 듯 고스란히 전해진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왜 신을 벗어들고 갈까? 길이 멀 터이니 당연히 신을 신고 가야  하고, 참대 갈대가 있는 길이라면 더욱 더 신을 단단히 신어야 하는 법, 그런데도 왜 신을 벗고 간다고 했을까?

우선 드는 생각은 맨발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걸음 아니었을까 싶다. 급한 마음에 자꾸 벗겨지는 신을 신고 가느니 단숨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는 누가 뭐라 하든 맨발이 어울릴 것이다.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신을 아꼈다가 친정집 가까운 곳에서 신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모처럼 친정을 찾는 딸의 신이 다 닳거나 헤진 것을 보면 친정 부모님과 형제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친정집을 찾는 딸의 마음으로 퍼뜩 지나가는 생각 중에는 그런 생각이 왜 없었겠는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 적어도 우리가 반을 마중 나가는 ‘반보기’를 하자고, 주님을 맞으러 가는 우리의 걸음이 참대 갈대 엇벤 길도 신 벗어들고 새 날 듯이 가는 집난이의 걸음이 되자고 했다. 귀한 분이 먼 길을 찾아오시는데 가만히 자리에 앉아 편하게 맞는 것은 영 도리가 아니지 않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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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생각

  •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보통 먹을 것이나 다른 것을 쟁여 놓지 않나요? 가난한 이들에게서도 그때는 향유가 필요했었나요?

    이진구 2019.12.04 09:52
  • 어머니께 받은 것이라면,
    어머니는 또 당신의 어머니께 받은 것이라면,
    더없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한희철 2019.12.05 06:33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1)

 

어리석은 생각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일을 두고 예수님은 ‘좋은 일’이라고 한다. 노동자 1년 치 품삯에 해당할 만큼 값비싼 향유, 제자들의 불만처럼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가난한 자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품었던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여인을 책망하는 제자들의 입장에 동조를 하실 것 같은데, 그 일을 ‘좋은 일’이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뜻밖이다. 주님의 말씀은 이어진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주님은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과 아무 때나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신다.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은 어느 때나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한 일은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주어진 때가 있어, 그 때를 놓치면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지금의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은, 그런 점에서 어리석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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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것이 없다면

  •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왔을 때,
    주님은 손주와 달리 울고 떼쓰지 않으시니..
    단지 손주와 주님의 공통점은 '사랑의 구심점'인 듯합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내면의 힘은
    결국은 처음부터 긑까지 '사랑'이네요.

    신동숙 2019.12.03 15:15
    • 사랑의 구심점,
      귀한 공통점입니다.

      한희철 2019.12.03 19:34 DEL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03 17:05
    • 고맙습니다.

      한희철 2019.12.03 19:35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30)

 

 달라진 것이 없다면

 

온유 지역이 부른 찬양은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였다. 대림절이 시작되었기 때문일까,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으로 다가왔다. 찬양을 들으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구는 손주를 중심으로 돈다는 말이 있다. 손주가 태어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마음도 달라지고, 생활의 우선순위도 달라지고, 집안의 서열도 달라진다. 집안 가구도 달라지고 얼굴표정도 달라진다. 늘 입이 귀에 걸린다. 기회만 되면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이다. 손주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일 때마다 만원씩을 내야 한다고 해도 십만 원을 선불로 낼 의향이 있다.

 

 

 


오랜만에 손주가 찾아와도 마찬가지다. 일정도 손주를 중심으로 짜고, 약속도 손주를 최우선으로 정한다. 음식점 앞에서건 장난감 가게 앞에서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온유’에 대한 덕담에 이어 짧게 이야기를 보탰다. 손주 한 명만 태어나도 세상이 달라지고, 손주가 찾아오면 집안이 달라지는데, 주님이 내 마음에 찾아왔을 때 우리는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주께서 내 마음에 오셨는데도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일까? 그런 고민들이었다. 조용한 시간에 ‘주 예수님 내 맘에 오사’ 찬송을 부르며 곰곰 생각해 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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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짐승이 사는 곳

  • 제 마음에도 살고 있네요.
    늘 마음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장의 맨 처음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첫소절부터 얼마나 많이 걸려 넘어지는지 모릅니다

    신동숙 2019.12.02 17:09
    • 그래도 주님은 늘 슬며시 문을 여시니까요.
      아름다운 초대지요.

      한희철 2019.12.03 09:33 DEL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02 17:38
    • 반갑습니다.

      한희철 2019.12.03 09:34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29)

 

 사나운 짐승이 사는 곳

 

12월을 시작하며 모인 월삭기도회, 마침 온유 지역이 찬양을 드렸다. 모든 찬양이 그러하겠지만 새벽에 드리는 찬양은 여느 때보다도 더 많은 정성을 필요로 한다. 온유 지역의 찬양을 고마운 마음으로 받으며 덕담을 했다. 온유한 사람들이 되시라고.

 

 

 

 

“‘온유’라는 말 속에는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다’라는 뜻이 있어요. 가장 사나운 짐승은 깊은 산이 아니라 사람 마음속에 사는지도 몰라요. 길들여지지 않은 난폭한 자기감정에 끌려가지 말고, 내 감정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도록 하세요.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이 임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시던 때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던 때였어요. 온갖 무기를 든 자들이 땅의 주인이던 시절, 예수님은 그 한 복판에서 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신 것이지요. 사나운 무기를 들고 있는 자가 아니라, 온유한 자가 땅의 진정한 주인이라고요.”

 

때로 주님의 말씀은 현실과 세상 앞에서 무기력하거나 무모해 보인다. 좋기는 하지만 경험상 동의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어쩌면 믿음이란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스스로 무모한 길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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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게와 낮게

  • '낫게'와 '낮게'
    획 하나 있고 없고 차이로 높낮이가 달라지네요.
    한글이 재미 있습니다.

    신동숙 2019.12.01 14:51
    • 우리말의 묘미겠지요.
      사소한 차이가 큰 차이를 가능하게 하니 말이지요.

      한희철 2019.12.01 19:31 DEL
  •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낫다. 낮다. 낳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2.01 15:21
    • 낫다, 낮다, 낳다
      재미난 발상이네요.

      한희철 2019.12.01 19:32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28)

 

 낫게와 낮게

 

책을 읽다말고 한 대목에 이르러 피식 웃음이 났다. 재미있고 일리가 있다 싶었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라는 말씀이 있다. ‘낫게’ 할 때 ‘낫’의 받침은 ‘ㅅ’이다. 그런데 그 받침을 ‘ㅈ’으로 바꾸면 뜻이 엉뚱하게 바뀌게 된다. ‘낮게’가 되기 때문이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과, ‘낮게’ 여기는 것이 어찌 같은 수가 있겠는가.

 

 

 

‘낫게’와 ‘낮게’는 묘하게도 발음이 같다. 다른 이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과 나보다 ‘낮게’ 여기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얼마든지 말로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 하면서도 마음이 그렇지 못하면 결국은 ‘낮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말로 마음을 가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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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마 타기

  • 확신은 퍼센트이지만 믿음은 그냥이겠죠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1.30 08:39
    • 그냥이 훨씬 무겁게 느껴집니다

      한희철 2019.12.01 19:28 DEL
  • 저는 가르마가 오른쪽에 있는데, 오래 되어서 왼쪽으로 내려니 많이 망설여집니다. 전 계속 오른쪽으로..

    신동숙 2019.11.30 09:40
    • 워낙 헤에스타일에 관심이 없다보니 내내 익숙했던 것이 그중 편하더군요.

      한희철 2019.12.01 19:29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27)

 

가르마 타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머리를 깎는 것은 아무래도 조심스럽다. 편하고 익숙한 스타일이 있는데, 그걸 말로 설명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정릉에 온 뒤로 교우가 하는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데 때가 되어 미용실을 찾았더니, 집사님은 손을 다쳐 머리를 깎을 수가 없었고 집사님 대신에 낯선 미용사가 머리를 깎고 있었던 것이었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잠시 기다리며 보니 손놀림에 막힘이 없어 보였다.

 

 


내 차례가 왔을 때 혹시라도 머리를 어색하게 깎을까 걱정이 된 아내가 한 마디 부탁을 했다. 오른쪽 이마 부분이 휑하지 않게 깎아달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미용사는 선뜻 가위를 드는 대신 이리저리 머리를 만지고 넘겨보더니 대뜸 이야기를 했다.


“가르마를 오른쪽에 내는 것이 좋겠어요.”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이어지는 동작을 보면서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왼쪽에 위치한 가르마를 오른쪽으로 바꾸어보라는 것이었다. 그 때가 언제였을까, 아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왼쪽에 가르마를 내고 오른쪽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며 살아왔다. 원래 머리 스타일에 대한 관심이 없거니와 그렇게 시작했고 그렇게 지내온 터라 지금까지 가르마의 위치를 바꾸는 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처음 만난 미용사가 대뜸 가르마를 오른쪽에 내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그렇게 권하는 미용사가 신기하게 여겨졌다.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이 없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고 웃으며 대답을 했다.  그러자 미용사는 다시 한 번 뜻밖의 말을 한다. 이제껏 자기 말을 들은 사람 중에 80퍼센트 이상은 만족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는데 정말로 가르마를 오른쪽으로 내고 자르는 것이 아닌가. 뜻밖의 제안을 듣고 당황했을 뿐 충분히 동의를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80퍼센트에 대한 지나친 신뢰,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대한 무리한 확신, 내게는 그런 것이 왜 없을까, 예배를 드리러 나가기 전 거울 앞에서 습관처럼 머리를 오른쪽으로 넘기며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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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여는 방법

  • 아멘.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는.
    자격 없는 나에게 긍휼로 열어주시는 은총의 문으로'

    신동숙 2019.11.29 09:00
    • 문 앞에서는 언제라도 수동태가 되어야겠어요.

      한희철 2019.11.29 16:42 DEL
  • 열려라 참깨가 아니라 열어주심에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1.29 11:00
    • 우리의 기도가 "열려라 참깨"의 반복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희철 2019.11.29 16:44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26)

 

문을 여는 방법

 

닫혀 있는 문을 여는 방법에는 두어 가지가 있다. 문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면 두 가지라 해도 되겠다. 하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법이다. 열쇄로 열든 비밀번호를 누르든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된다. 집의 주인이 당연히 선택하는 방법이자 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문을 여는 다른 하나는 문을 두드리는 일이다. 손으로 문을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른 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을 하고는 주인이 문을 열어줄 때를 기다려야 한다. 열쇄가 없고 비밀번호를 모르는 이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며 신앙에 대해 생각한다. 신앙도 마찬가지구나 싶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을 은총의 문을 여는 열쇄를 얻거나 비밀번호를 배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을 단순한 공식이나 공정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신앙의 참된 의미는 문이 열리는데 있다. 은총의 문은 내가 여는 것이 아니라 내게 열려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총을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은총을 받아 누릴 뿐 은총의 주인이 아니다.

 

은총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쇄를 달라고 떼를 쓰거나 비밀번호를 가르쳐달라고 조를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나에게 긍휼로 열어주시는 은총의 문을 감사함으로 들어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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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심지만으로 탈 수 없다

  • 촛불의 심지가 예수라면
    촛농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일런지요.

    신동숙 2019.11.28 08:52
  • 멋진 묵상입니다.

    한희철 2019.11.28 08:56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11.28 10:53
    • 반갑습니다.

      한희철 2019.11.29 06:39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25)

 

 촛불은 심지만으로 탈 수 없다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촛불을 켜는 일이 더 많아졌다. 촛불은 촛불만의 미덕이 있다. 촛불을 켜면 마음이 환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백열전등과 다르고 난로와도 다르다.

 

밖에 다녀올 일이 있어 켜둔 촛불을 껐다. 거반 다 탄 초였는데, 그렇다고 촛불을 켜 둔 채 외출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을 보고 돌아와 다시 초에 불을 붙였다. 자기 몸을 다 태워 키가 사라진 초는 촛농으로만 남아 접시에 물 담긴 듯 촛대 안에 담겨 있었다. 그래도 한 가운데 심지가 서 있어 불을 붙였는데, 잠시 불이 붙던 심지는 하얀 연기를 내며 이내 꺼져버리고 말았다. 심지가 다 타기 전에 촛농을 받아들여 태워야 하는데, 백록담처럼 가운데가 파인 상태였기에 녹여낼 촛농이 부족했던 것이다.

 

촛불은 심지만으로는 탈 수 없는 것이었다. 심지가 없어도 안 되지만 심지만으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촛농이 심지를 적셔야 한다. 촛불 하나를 켜는데도 그렇다면 세상의 빛이 되는 데는 얼마나 더욱 그런 것일까, 잠시 타오르다 불이 꺼진 촛대를 바라보는 마음이 문득 아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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