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즐 맞추기

  • 나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그 분의 그림 안에서 살아가기에, 나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만남 앞에 사심없이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의가 나의 사심으로 인해서 가리워지지 않기를요.

    신동숙 2020.01.18 13:30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19 01:52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0)

 

퍼즐 맞추기

 

몰랐던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신기하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걸음을 이끄시는 방법 중에는 새로운 만남이라는 방법이 있지 싶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랐던 두 사람과 점심 식사를 했다. 정릉교회에 부임을 한 뒤로 예배 시간에 자주 얼굴을 대하게 되는 젊은 내외가 있었다. 새벽예배는 물론 금요심야기도회에도 거의 빠지지 않았고, 설교 내용을 열심히 적을 만큼 예배에 집중하는 내외였다. 

어느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다가 두 사람을 마주치게 되었고, 처음으로 차 한 잔을 나누게 되었다. 남편이 국민대 교수라는 것, 주일에 출석하여 섬기는 교회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렇게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점심을 약속하게 되었던 것인데, 함께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마음속 기도제목도 나눌 수가 있었다. 이야기 중에 들려준 퍼즐 이야기가 고마운 메아리처럼 들렸다.




“목사님이 설교 중에 퍼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이해하기 힘든 일과 시간들은 왜 이런 것이 내 삶에 주어졌을까 이상한 퍼즐 조각처럼 보이지만, 그 조각이 없으면 하나의 그림은 완성될 수가 없다고 말이지요. 그런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그동안 힘들었던 많은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만남도 또 하나의 퍼즐 조각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만남이라는 조각 하나를 건네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생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그림으로 그려가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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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좋은 거울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9)

 

좀 좋은 거울

 

고흐가 동생 테오와 나눈 편지 중에 거울 이야기가 있다. 지금이야 위대한 화가로 칭송과 사랑을 받지만, 살아생전 고흐는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살았다. 가난과 외로움이 그의 밥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형의 처지와 마음을 유일하게 알아주었던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쓰며 고흐는 어느 날 이렇게 쓴다. 

“모델을 구하지 못해서 대신 내 얼굴을 그리기 위해 일부러 좀 좋은 거울을 샀다.”(1888년 9월)    


고흐의 이 짧은 한 마디 말을 떠올릴 때면 나는 먹먹해진다. 비구름에 덮인 먼 산 보듯 막막해진다. 울컥, 마음 끝이 젖어온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절대의 고독과, 물감조차도 아껴야 하는 극한의 가난, 그런 상황에서도 놓을 수 없었던 그림, 그림은 고흐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고흐에게는 그림이 유일한 숨구멍이었을 것이다.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대신 자기 얼굴을 그리려고 좀 좋은 거울을 산 사람, 그러면서도 그것조차 조심스러워 하는 고흐의 떨림이 오늘 우리에겐 없다. 고흐 그림 속에 담긴 근원이, 근원을 향한 그리움이나 절박함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좀 좋은 거울’을 사는 가난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좋은 거울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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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다

  • 빠른 회복 빕니다.

    이진구 2020.01.16 15:07
    • 고맙습니다.

      한희철 2020.01.18 07:17 DEL
  • 몸의 아픔으로인해 가라앉은 시간이 저절로 주어지신 듯합니다. 깊이 침잠하는 고요함 속에서 쉼을 선물로 주시는 그 조차도 은총일 테지요.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깊어진 만큼 더 맑고 환하게 다가올 일상으로 평온히 인도해 주시기를요. 하지만, 건강 또 건강하시기를요..

    신동숙 2020.01.16 19:00
    • 따뜻한 배려와 격려,
      고맙습니다.

      한희철 2020.01.18 07:19 DEL
  • 한목사님...탈이 제대로 났군요. 건강을 타고 나신분도... 쾌유하시길 빕니다.

    기쁨지기 2020.01.17 16:11
    • 그러게요,
      고맙습니다.

      한희철 2020.01.18 07:20 DEL
  • 아이구 이런.. 목사님.. 쾌유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이혁 2020.01.17 16:50
    • 고맙습니다.
      이 목사님도 늘 건강하세요.

      한희철 2020.01.18 07:21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8)

 

가라앉다

 

탈이 난 것은 알아차린 것은 집회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오전과 저녁에만 모이는 집회여서 푹 자도 좋았는데, 여전히 이른 새벽에 일어났던 것은 아픈 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탈이 난 것은 배 만이 아니었다. 욱신욱신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계속되었던 무리한 일정들, 몸에 탈이 날만도 했다.

아침에 교육부총무에게서 연락이 왔다. 몸이 괜찮으냐고. 의례적인 안부 인사인 줄 알고 괜찮다고 하자 지방 교역자들 중 여러 명이 탈이 났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전날 먹었던 음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조심하는 마음으로 집회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몸은 여전했다. 복통과 두통, 거기에다가 몸 곳곳이 쑤시는 것이 이어졌다. 목은 가라앉으며 된 기침이 이어졌고, 입술은 터졌다. 웬만한 증세야 참고 견디면 지나갔으니 그러려니 했지만, 주일을 지나면서도 증세는 호전되지를 않았다. 1년 예산을 결정하는 구역회와 오후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혼곤하게 잠에 빠졌다. 걱정이 된 아내가 약사 권사님께 이야기를 하여 약을 지어왔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몸의 탈, 몸이 어딘가로 가라앉는 것 같다. 돌멩이를 매단 채 깊은 수심으로 잠기는 것 같은데, 신기한 것은 덩달아 마음도 잠기는 것이다. 몽롱하기도 하고, 희미하기도 하다. 

그동안 나도 모르게 들떠 있었던 것이라면 이런 경험도 필요할 것이다. 가라앉을 만큼 가라앉아 이게 바닥이다 싶을 때, 그 자리에서 어머니 태속인 것처럼 몸과 마음을 웅크린 채로 얼마간을 지내면 조금씩 다시 떠오를 것이다. 싹이 눈을 뜨듯이 새로운 기운을 찾아들 것이다. 그러면 일상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지금은 다만 몸의 증세에 맡기고는 가만히 가라앉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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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유머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15 00:24
    • 반갑습니다.

      한희철 2020.01.16 08:24 DEL
  • 따뜻한 유머가 어둔 마음을 맑고 환하게 해주는 듯합니다.

    신동숙 2020.01.15 06:52
    • 따뜻한 유머는 눅눅한 가슴에 켜는 등불 같지요.

      한희철 2020.01.16 08:25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7)

 

교황의 유머

 

“가만히 계세요. 깨물면 안 돼요.” 


그 한 마디 말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버럭 교황’에서 벗어났다. 지난해 연말 자신의 손을 세게 잡아당긴 한 여성 신도에게 화를 냈고, 화를 낸 것을 사과하여 논란이 됐던 일로부터 말이다. 

그런 일로부터 며칠 뒤 교황이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을 찾았다. 많은 신자가 몰렸는데, 맨 앞줄에 있던 수녀 한 명이 손을 뻗으며 “바초, 파파!”(키스해 주세요. 교황님) 외쳤다. “오, 나를 깨물려고요?”라고 묻는 교황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니라고 고개를 흔들자 교황은 “당신에게 키스할 테니 그대로 있어야 해요. 깨물면 안 돼요.”라고 말하며 수녀의 오른쪽 뺨에 입술을 맞추고 얼굴을 쓰다듬어 줬다. 유머러스한 교황과 감격에 겨워 좋아하는 수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주변 신도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바티칸 미디어·로이터연합뉴스



그런 교황을 보며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라는 <논어>의 한 구절을 떠올린 글을 읽고 빙긋 웃었다. 적절한 이해라 여겨졌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제가 중에서 누가 학문을 좋아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안회가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성냄을 옮기지 않고, 실수를 두 번 되풀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불행히도 단명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안회가 30대 초반 나이에 죽자 공자는 “天喪予(천상여) 天喪予(천상여)” 하며 참담한 심정을 드러냈다.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며 탄식을 한 것이었으니, 스승이 제자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 마음에 새겨둘 만한 말이다. 잘못이나 어색함을 덮고 지우는 것은 역시 따뜻한 유머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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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15 00:18
    • 고맙습니다.

      한희철 2020.01.16 08:26 DEL
  • 한국에 내리는 겨울비가 호주에서 내렸으면 하는 저도 그런 마음입니다. 말씀 앞에서 호불호가 사라지는 복된 자리,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신동숙 2020.01.15 06:55
    • 겨울비 치고는 많은 양의 비를 보면서 호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했답니다.

      한희철 2020.01.16 08:27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6)

 

호불호

 

강화서지방 연합성회에 다녀왔다. 연초(年初) 첫 번째 주에 말씀을 나누는 것이 강화서지방의 전통이었다. 연일 겨울비가 내렸지만 한해를 말씀으로 시작하려는 교우들의 열심은 날씨와는 상관이 없었다. 겨울비 치고는 많은 양의 비, 생각하니 눈이 아니길 다행이었다. 눈이었다면 폭설, 오히려 길 나서기가 어려웠을 터였다. 이 비가 산불로 재난을 겪고 있는 호주에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강화서지방에는 섬에 있는 교회들도 있었다. 석모도에 다리가 놓여 육지화 되었음에도 볼음도, 주문도, 아차도, 말도 등 5개의 교회는 여전히 섬에 있었다. 섬에 있는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은 집회 기간 동안 뭍에서 지내며 집회에 참석을 했다. 둘째 날 아침에는 섬 교회 목회자 내외분들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섬에서 목회하는 목회자에게는 다른 이들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애환이 있었다.




연합성회를 인도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은혜를 사모하는 방식도 다르다.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고, 교회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뜨거움을, 어떤 이들은 온전한 말씀을 기대한다. 어떤 기대에 부응하기보다는 내가 전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하기로 했고, 가능한 차분하게 말씀을 나눴다. 양해를 구하고 헌금에 대한 강조도, 헌금봉투에 적힌 이름을 호명하는 일도 삼갔다.


집회를 모두 마치는 날이었다. 마지막 저녁집회를 앞두고 잠깐 지방 감리사를 만나는 시간이 있었다. 너무 강사 방식대로 해서 걱정을 끼친 것 아닌가 조심스럽다고 하자, 감리사가 고마운 말을 한다. 강사의 성향에 따라 교우들과 목회자들의 호불호가 선명하게 갈릴 때가 많은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어 참 좋았다고 했다. 

물론 강사를 위한 배려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말이 고마웠던 것은 우리의 성향이 서로 다르다 해도 말씀 앞에서 갖는 우리의 마음은 서로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 앞에서 호불호가 사라지는 자리가 복된 자리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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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중에 한 말

  • 말에 신중함을 말씀하시겠지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12 06:59
  •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한희철 2020.01.12 19:1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5)

 

 부지중에 한 말

 



손톱을 깎다가 잘못 튄 손톱은 뒤늦게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부지중에 한 말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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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세번

  • 통곡할 수 있음이,
    자신을 돌아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속울음을 우는 것 말고는, 사실은 그것 말고는 이 세대를 지나갈 수 없다는 걸. 오늘도 그런 무력감에 감싸인 채 도심 숲을 걸었답니다.

    신동숙 2020.01.12 03:16
    • 그래도 그 눈물이 베드로를 살렸다 싶습니다.
      우리는 그 눈물을 잃어버린 것이고요.

      한희철 2020.01.12 19:18 DEL
  • 읽고보니 그렇네요. 참말로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12 06:55
    • 한결같은 걸음,
      반갑습니다.

      한희철 2020.01.12 19:18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4)

 

삼세번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는 더욱 놀랄 만한 말을 덧붙인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가복음 14:30)


구체적인 숫자까지를 밝히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 부인한다. 마태복음에 따르면(26:69~75) 베드로는 그냥 세 번을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여종의 말 앞에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부인을 한다. 표정관리를 하며 시치미를 뚝 떼는 정도였다.

 

그러나 두 번째는 달랐다. 두 번째 부인을 할 때는 맹세를 하고 부인을 한다. 우리식으로 하면 이랬을까? 만약 그 말이 맞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내 성을 간다고 말이다. 자기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맹세까지 했다.

 

세 번째는 더하다. 이번에는 저주하며 맹세를 한다. 저주 속에는 예수를 향한 욕이 담기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던 그 입으로(마태복음 16:16) 더러운 욕을 쏟아놓지 않았을까? 내가 정말로 예수를 안다면 천벌을 받아도 좋다고 하지 않았을까?

 

‘3’은 단순히 숫자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는 ‘완전’을 의미하는 수다. 세 번 부인한다는 것은 부인하는 횟수가 세 번이라는 뜻만은 아니었다. 너는 나를 확실하게 부인할 것이다, 어쩌다가 실수로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부인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고, 설마 그럴 일은 없을 거라 했던 장담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정말로 완전하게 부인을 한 것이었다.

 

 

 

베드로는 제대로 넘어졌다. 때마침 울어대는 새벽닭의 울음소리, 순간 자신의 장담이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베드로는 너무나도 뻔한 자신의 초라함과 알량함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통곡을 한다.

 

우리는 그런 베드로를 안쓰럽게 여긴다. 혀를 차며 동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베드로와 다를 것이 없다. 베드로도 그랬는데, 하물며 우리들일까! 베드로와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삼세번의 부인이 아니다. 맹세와 저주를 동반한 부인이 아니다. 그런 일은 피차 다를 것이 없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통곡이다. 그래도 베드로는 새벽닭울음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듣고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을 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다르다. 새벽이 되어 닭이 우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새벽닭 울음소리를 무시하기도 하고, 요즘 새벽에 우는 닭이 어디 있느냐며 아예 새벽닭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도 한다. 베드로와 우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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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 다

  • 참으로 몰랐던 부분을 콕 알려주시네요.. 무심코 넘겼던 단어 '다'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08 15:22
    • 그랬다면 저도 좋습니다.

      한희철 2020.01.09 09:12 DEL
  • 아멘.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주의 말씀이다."
    태양처럼 환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신동숙 2020.01.09 08:00
    • 그 부분 앞에서 저도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한희철 2020.01.09 09:13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3)

 

 다, 다, 다

 

베드로의 부인과 예수의 붙잡힘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마가복음 14장 27~50절 안에는 같은 단어 하나가 반복된다. ‘다’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27절)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한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29절)


닭 두 번 울기 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 앞에 베드로는 힘있게 말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1절)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같은 말을 한다. 모든 제자들이.

 

 

 

굳이 택하라면 베드로와 제자들의 말을 인정하고 싶다. 그래도 명색이 제자인데, 어찌 스승을 버리겠는가? 다른 이들은 다 버려도 어떻게 주님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설령 주와 함께 죽으면 죽었지 주를 부인하지는 않겠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나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진심이었고, 확신에 찬 말이었을 것이다. 마음은 안 그런데 말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주님을 버릴 수 있을까, 믿음이 약한 우리라도 얼마든지 그랬을 것이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제자들을 너무 못 믿고 있거나, 십자가를 앞두고는 마음이 약해지신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잠시 뒤, 또 한 번 ‘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제자 중 하나인 유다의 배반으로 예수께서 붙잡히신 뒤의 일이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50절)

 

버리지 않겠다고 다 말했지만, 결국은 다 버리고 도망쳤다. 복음서 저자는 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장면을 외면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하고 있다. 다 장담했는데, 다 도망쳤다고.

 

제자들은 자신의 마음만 믿었다. 하지만 예수는 말씀을 통해 상황을 바라본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했던 스가랴13:7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다, 다, 다라는 말이 전해주는 가르침은 자명하다. 아무리 확신에 찬 말이라 할지라도 이루어지는 것은 내 말이 아니다. 아무리 믿어지지 않는다 하여도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주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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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가장 많은 곳

  • ^^ 교회를 다니는 분들에겐 교회가 되지만,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든 그런 것 같습니다. 침묵을 미덕으로 삼고 수행 정진하는 수도처가 아니고서는요.

    "말 대신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살아낼 수 있다면."
    이 말 앞에 작아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신동숙 2020.01.07 09:10
    • 사람들의 모임에 말이 없을 순 없지만, 그래도 신앙공동체는 뭔가 구별되야 하지 않을까 싶어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한희철 2020.01.09 09:11 DEL
  • 감사합니다.

    이진구 2020.01.07 10:25
    • 반갑습니다.

      한희철 2020.01.09 09:11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2)

 

말이 가장 많은 곳

 

말에 관한 글을 쓰다가 문득 지난 시간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우리말에 말은 ‘말’(言)이라는 뜻도 있고, 말(馬)이라는 뜻도 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속담은 그래서 더욱 재미를 더한다. ‘말’(言)은 말(馬)처럼 발이 없지만 천리를 가니, 애써 달려야 하는 말(馬)로서는 부러워할 일일지도 모른다.

 

발 없는 말(言)인데도 속도가 있다. 어떤 말은 빠르고 어떤 말은 느리다. ‘나쁜 소문은 날아가고, 좋은 소문은 기어간다.’는 속담이 괜히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래된 경험이 쌓이고 쌓였을 것이다.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나쁜 소문은 더 빨리 번지고 좋은 소문은 더디 번진다니, 그 또한 신기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태 전 켄터키 주 렉싱턴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토머스 머튼이 수도자로 지냈던 겟세마네 수도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사방으로 광활한 들이 펼쳐져 있었고, 들판에서는 많은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말이 참 많다고 하자 운전하는 목사님이 말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영국왕실의 말들도 대개는 켄터키 주에서 돌보고 공급한다고 했다. 이야기 끝에 덧붙인 말이 있었다.


“아마도 세상에서 말들이 가장 많은 곳이 켄터키 주일 거예요.”

 

가까운 지인들, 그래서 가볍게 농을 했다.


“그보다 더 말이 많은 곳이 있어요.”


차에 탔던 이들이 관심을 보이며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교회요.”


모두가 유쾌하게 웃었지만, 마음까지 유쾌했던 것이 아니었다. 우린 언제나 말 대신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살아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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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족지유(吾足知唯)

  • 많은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글그림, 그림글입니다.

    신동숙 2020.01.06 08:48
    • 그렇지요,
      글과 그림의 재미난 만남이다 싶습니다.

      한희철 2020.01.09 09:07 DEL
  • 감사합니다.

    저도 아버지께 써달라고 해야겠는데요.

    이진구 2020.01.06 09:50
  • 목사님 오족지유라고 하나요? 오유지족이라고 읽나요? 인터넷에서는 오유지족이라고 나오는데...

    이진구 2020.01.06 15:37
    • 당연히 오족지유가 맞겠다 싶습니다.
      '오직 유'가 말이지요.

      한희철 2020.01.09 09:09 DEL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71)

 

오족지유(吾足知唯)

 

지난번 말씀축제에 강사로 다녀간 송대선 목사가 본인이 쓴 글씨를 보내왔다. ‘吾足知唯’라는 글도 그 중 하나였다. 대화중 나눴던 말을 기억하고 직접 글씨를 써서 보내준 것이니, 따뜻한 기억이 고마웠다.

 

 

 

가만 보니 글씨가 재미있다. 가운데에 네모 형태를 두고, 4글자가 모두 그 네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족지유, ‘나는 다만 만족한 줄을 안다’라고 풀면 될까? ‘나에게는 더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로 받으면 너무 벗어난 것일까. 좀 더 시적이고 의미가 선명한 풀이가 있을 텐데, 고민해봐야지 싶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더 높은 곳에 오르려 욕심을 부리며 뒤뚱거리며 기웃거리며 살지 말고 바람처럼 홀가분하게 살라는 뜻으로 받는다. 세월이 갈수록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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