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마리와 길상사




한겨울을 지나오며 언뜻언뜻 감돌던 봄기운이 이제는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요즘입니다. 길을 걸으며 발아래 땅을 살펴보노라면 아직은 시들고 마른 풀들이 많지만 그 사이에서도 유독 푸릇한 잎 중에 하나가 로즈마리입니다. 

언뜻 보아 잎 모양새가 소나무를 닮은 로즈마리는 개구쟁이 까치집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손으로 스치듯 살살살 흔들어서 그 향을 맡으면 솔향에 레몬향이 섞인듯 환하게 피어나는 상큼한 향에 금새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로즈마리를 생각하면 스무살 중반에 신사동 가로수길과 돈암동 두 곳의 요가 학원에서 작은 강사로 수련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고시원 방이 삭막해서 퇴근길에 숙소로 데리고 온 벗이 바로 작은 로즈마리 묘목입니다.

언제나 로즈마리와의 인사법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듯 손으로 잎을 살살살 쓰다듬으며 향을 맡는 일입니다.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에게 물도 주고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날이 더해 갈 수록 로즈마리는 언뜻 보아 위로 키가 자라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키에 비해서 잎은 살이 찌지 않고 오히려 풀이 죽은 듯 보였습니다. 어떻게 살릴까 몇 날 며칠 궁리를 하였습니다.

 



낮에는 요가를 가르치고, 길벗처럼 원성스님의 그림책에서 본 해맑은 동자승의 얼굴을 마음에 담기도 하고, 법정 스님의 삶과 월든 숲 소로우의 삶을 생각하면 혼자 길을 걸으면서도 외롭지 않던 맑은 나날입니다. 

요가를 공부할 수록 명상과 생명과 생태에도 관심이 가게 된 것은 요가의 대체의학인 아유르베다와 한의학에 깃든 자연의 진실하고 선한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자연히 섭생은 자연식에 가까워졌고 몸도 따라서 저절로 기울어 순응하듯 물처럼 도시에서 자연으로 흘렀습니다. 

당근과 감자와 오이와 사과만 먹고도 몸이 만족해 했습니다. 물통이 있고 찻잎이 있으면 어디든 평안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언제나 물통과 찻잎을 지니고 다니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때는 요가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원장님이 다려주시던 따끈한 보이차가 몸을 보호해 주던 따뜻한 기억이 있습니다.

작은 방에서 로즈마리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자니,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의 처지와 나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즈마리가 이 작은 화분이 아닌, 산속이나 산자락 어디쯤에다 뿌리를 내렸다면 훨씬 더 생기를 뿜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빽빽한 도심 속에서만 살아온 나의 처지도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의 생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 한 생각이 들고부터는 마음이 더욱 자연과 산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휴일날, 로즈마리라도 먼저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이른바 로즈마리 출가를 시키자는 결심을 낸 것입니다. 생각 끝에 지하철을 타고 마을 버스를 갈아 타고서 도착한 곳은 법정 스님의 성북동 길상사입니다. 길상사의 시민선방으로 오르는 길 우측 화단 나무 아래에 작은 로즈마리 묘목 하나를 허락도 없이 모셔둔 것입니다. 

그때의 일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 작은 로즈마리가 여전히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벌써 뽑아버렸는지, 아니면 저절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무리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길상사를 떠올릴 때면 저와 잠시나마 벗이 되었던 로즈마리의 향기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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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보스 차와 아버지



아버지는 루이보스 차가 좋다고 하셨다. 딸이 드리는 이런 차 저런 차를 다양하게 맛보시더니 그중에 루이보스 차를 드시면 속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식사는 되새김질로 마무리를 하셨다. 풀밭에 앉은 황소가 우물우물 풀을 씹어 먹듯이 소눈을 닮은 아버지의 큰 눈망울은 끔벅끔벅 먼 고향 하늘가 어드메 쯤인가를 그리시는 듯 보였다.

그러면 함께 밥을 먹던 엄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던 한소리가 "추잡구로" 아버지의 되새김질에 뒤따르는 엄마의 추임새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처럼 점잖구로 어릴 적에 소여물을 먹이시던 묵은 얘기를 또다시 처음처럼 풀어놓으셨다. 

그러면 어린 내 눈앞으로 누런 황소가 보이고, 우물우물 움직이는 소의 되새김질이 보이고, 순한 소의 눈망울 속으로 푸른 풀밭을 닮은 푸른 하늘이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시골의 어느 작은 초가집이 우리집이 되고, 저녁밥 짓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옆으로 지붕 위에는 하얀 박이 밤하늘의 달님을 닮아 있었고, 달님의 순박한 얼굴은 엄마의 얼굴이 되고 아버지의 얼굴이 되고, 순한 한국 사람의 얼굴이 되고 하나의 커다란 얼, 하늘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장이 약한 조카 아들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루이보스 차를 좋아한다. 한참 성장기에 있어서 생우유를 물처럼 마시는데, 간혹 고모집에 놀러올 때면 루이보스 차를 우려서 루이보스 밀크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조카 아들에게도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차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스스로의 몸으로 자기의 체질에 맞는 똑같은 차를 찾았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루이보스 차 티백 하나를 찬물에 담궈두었다. 가족들이 잠자는 동안 밤새 잘 우러나서 아침이면 투명한 보리차 빛깔로 반기며 아침에 가족들의 빈 속을 깨워줄 것이다. 

내 체질에 맞는 차를 하나 알고 있다는 것은 편안하고 좋은 길벗을 곁에 둔 것과 다르지 않다. 몸이 잠을 자는 동안 밤새 비운 속으로 물처럼 순해진 루이보스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첫물길을 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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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신동숙의 글밭(317)


달콤한 교회, 교회당을 나오면서

- 교회가 맹신앙과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지가 되지 않기를 -



코로나 바이러스와 탐진치 삼독의 전파지가 된 일부 교회와 선교기관들로 인해서, 교회가 더욱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요즘이지만, 한 시절 교회에 몸 담았던 나에게 있어 교회 생활은 참 달콤했다. 


그런 달콤한 교회당을 떠나온 일을 비유하자면, 카필라 왕국을 떠나오던 석가모니의 일에 비할 수 있을까. 5년 동안 뿌리를 내린 교회에서, 마지막 갈등의 순간에, 지나온 과거를 깊이 되돌아보았고, 다가올 미래를 거듭 내다보며 뼛속까지 자녀들의 영혼까지 짐작해보았다. 


이대로 교회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면 두 자녀들은 겉으로는 순조롭게 자랄 것이고, 우리 가정은 평안할 것이었다. 하지만 맹신앙으로 영혼은 잠들 것이고, 마음은 거듭되는 기복의 욕망에 젖어들어 비대해질 것이었다. 성경은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느님을 볼 것임이오.'라고 마태복음 팔복은 말한다. 다른 것보다 내게 두려운 하나는 눈이 가져려 하느님을 볼 수 없게 되는 일이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운다>는 전혜성 박사님의 자서전을 읽었던 때는 큰 아이가 두 살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섬김'이라는 단어는 내게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고 큰 아이가 7살이 되던 해에 유치원 선택을 앞두고 또 한 번 깊은 인생의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 불교 유치원과 개신교 선교원을 두고 어디를 보낼까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앞으로 삶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는 인생의 중대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때까지도 가슴에서 내려놓은 적 없던 화두인 '섬김'과 '사랑'으로 인해 자연히 선교원으로 기울게 되었다. 큰 딸아이의 유치원 선택을 두고 갈등하던 당시에 라디오 불교 유나 방송에 사연을 올린 어느 지체 장애인을 대하던 비구니 스님의 답변이 내게 브레이크를 밟고서 기독교로 노선을 바꾸게 한 계기가 되었다. 장애 인식에 대해서 모난 불교와는 달리 기독교에선 장애인을 대할 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은총의 몸이라 했다. 그런 둥근 시선이 내 본성이 가리키는 진리에 더 가까웠다.


큰 아이를 선교원에 보내면서도 엄마인 나는 그 뒤로도 라디오 불교방송을 들으며 일 년을 보냈다. 이미 힉창시절부터 도서관에서 읽어오던 책들은 기독교와 불교의 종파를 초월해 있었고, 동서고금의 양서들을 넘나들고 있을 때였기에 내면에 별다른 혼돈과 갈등은 없었다. 누가 물어보면 자녀는 선교원에 보내고, 엄마는 불교방송을 듣는다고 얘기하곤 했었다.


큰 아이가 선교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레나 마리아>와 이어령 선생의 <지성에서 영성으로> 두 권의 책이 계기가 되어서 인생의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작은 아이가 태어날 무렵 놀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개척교회 사모님이 나를 전도하기 위해서 3년을 기도했다던 그 시기에도 그분들의 유혹적인 도움의 손길을 조심스레 거부했었다. 도움을 받으면 교회를 나가야할까봐 매이고 싶지 않았다. 친정과 시댁이 멀어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섬처럼 고립된 집에서 혼자 두 아이를 키우다 보니 비록 몸이 상했지만, 내가 손길을  내밀기만 하면 지척에 있었던 교회지만 도움을 받았던 적은 없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분들의 보이지 않는 기도가 고마운 터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두 자녀의 손을 잡고서 제 발로 주일날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이다. 교회를 정하기 위해서 작은 개척 교회와 집에서 가까운 대형 교회와 집에서 조금 먼 중형 교회 중에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앙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중형 교회를 선택하게 되고, 5년 간 그곳에 몸담았다. 


처음 교회를 방문한 그때가 빼빼로데이를 앞둔 11월의 주일이었기에 선물로 빼빼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두 자녀를 큰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진정한 섬김을 배우기 위해서, 이 결심은 이미 20대 가슴에 품은 뜻이기도해서,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자 혼자 가슴에 품었던 씨앗이 맺은 하나의 결실과도 같았다.


예수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섬김을 받으러 교회에 간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배우며 섬기기 위해서 교회에 간 셈이다. 그 섬김이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와 세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랬다. 부끄럽지만 교회의 환영식은 떠들썩했다. 새신자 교육을 받던 4주 동안, 문자 몇 통을 주고받던 어느 집사님의 추천으로 문서사역부로 가게 되었다. 교회에 다닌지 한 달 뒤부터 교회 안에서 꿈꾸던 나의 섬김이 작으나마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교인들을 만나서 '칭찬 원고'를 의뢰하고 글을 받아서 원고 교정을 보고 담당 집사님께 이메일로 넘기는 일이 내가 담당한 일이었다. 그 사명은 내가 교회당을 떠나올 때까지도 계속된 섬김이었다. 그리고 더 커다란 교회로 나아가는 걸음이었다.


함께 문서사역을 담당했던 이 권사님은 지금도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한다. 이 권사님은 서울의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신 후, 울산대 교수인 남편을 따라서 울산으로 내려오신 분이다. 교직에 있다보니 총 열한 분의 목사님을 모셨는데, 학교에서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다 보니 지금의 교회로 오시게 되었고, 권사님은 인간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물고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교회당을 떠나온 후로 일 년에 한 차례씩 잊지 않으시고 나를 불러내셔서 밥을 사주신다. 작년엔 코로나19로 만나지 못하고,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면 만나기로 약속을 해두었다. 재작년 가을엔 이 권사님을 만나서 통도사 앞 식당에서 사주시는 산채비빔밥을 먹고 무풍한송로를 함께 산책하면서 한희철 목사님의 <어느 날의 기도> 시집을 선물해드렸었다. 


우리 딸아이를 위해서 닭을 잡아주시던 장 집사님은 우리 가정을 위해서 목장의 목자 가정이 되어줄 테니, 교회에 다시 나오라고 하신 게 코로나 펜데믹 전의 말씀이다. 성가대실에 함께 있어도 별다른 대화를 나눈 적 없던 방과후 아동 쉼터 '반올림'의 이집사님은 지금껏 일 년에 한 두 차례 안부 전화를 주시는데, 지난 주 아침에도 전화를 받았다. 내겐 고마운 분들이고, 여전히 교회다.



2016년 교회당을 떠나올 때의 답답한 심정을 가슴에 담아둘 수 없어서, 2017년 4월에 시작한 페이스북, 내게 온 첫 친구 신청은 같은 교회에 다닌 박 집사님이다. 교회 안에선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서, 처음엔 친구 신청한 분이 누군지 몰라서 프로필과 포스팅을 살펴보니, 교회를 떠나오기 직전 주보에 실을 원고를 문자로 의뢰했던 분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으신 후 울산대 교수로 가시게 된 사연을 전교인들과 함께 나눌 신앙 간증이 주보 원고 청탁의 내용이었다. 


그렇게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우리 가정이 삶과 마음을 나눈 교회의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내겐 교회에 내린 뿌리였다. 삶의 중심에 두었던 뿌리를 뽑아내는 일은 또 한 번의 죽음과도 같았다. 석가모니가 카필라 왕국을 떠나올 때의 심정이 이와 같았을지 어땠을지 지금도 가끔 헤아려본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자본주의의 물질과 문명 사회를 벗어나서 스스로 20대에 산과 인도로 향하던 떠남이 내겐 먼저 있었다. 그것은 이 생에서의 성공과 풍요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나그네 길이다. 사실 나는 아주 어려서도 마음에 성공과 풍요를 꿈꾸어본 적이 없다. 굶기를 밥 먹듯이 보낸 유년기였지만, 하늘을 보면서 자랄 수 있었고 나에겐 늘 마음이 문제였다.


그리고 교회에 출석 후 목장을 선택할 때에도 또래 자녀를 둔 가정이 아닌 선교원 원장이신 권사님이 계신 목장을 선택했다. 그곳이라면 섬김을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섬김'이 나에겐 화두였기에, 목장 생활에서 받을 수 있는 섬김과 혜택은 애초에 접어두었다. 우리 가정은 목장 식구들과 따로 나들이를 간 적이 없다. 그전에 목장 생활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다들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 고지식한 엄마로 인해서 자녀들에겐 목장의 추억이 없다. 목장 모임은 나 혼자서 낮시간에 선교원에 잠깐 들러서 가졌던 짧은 기도와 식사 모임이 전부였기에.


어려서부터도 재미보다는 의미를 찾아온 삶이다 보니, 목장 생활에서 오는 재미와 안락은 관심 밖이었다. 주일 학교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교사의 역할까지 사역을 담당하시고, 주중엔 선교원의 원장님이기도한 권사님은 늘 바쁘셨고 나는 그분의 뒷모습에서 섬김을 배웠다. 함께 점심을 먹을 가정도 안정적이진 못해서 주일 예배가 끝나고 목장별 점심식사 시간엔 혼자 밥을 먹는 날이 많았다. 그래도 나에겐 외로울 틈이 없었다. 외로움은 나에겐 이미 익숙한 옷이었고, 내 곁엔 언제나 책이라는 좋은 길벗이 있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 지금도 내겐 고마운 선물이 된다. 


주중엔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씀 공부' 과정을 빠짐없이 반복해서 참여했었다. 그리고 5년 간 매 주 있는 목장 모임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비교적 단순한 삶을 살아오던 내겐 따로 정리할 생활이나 버릴 습관이랄 것도 없어서, 내 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돌아갈 수 있었고, 그외 자녀의 학교와 가정과 집안 일들은 자연히 교회 일정을 중심으로 순조롭게 조정이 되었던 것이다. 신년 다이어리에는 예배와 기도 모임과 목장 모임과 말씀 공부 날을 일 년 단위로 먼저 표기해두고 교회를 중심으로 나머지 삶을 조화롭고 균형 있게 살았다.


새신자였지만, 일 년이 지난 무렵부터 십일조를 하기로  결심했다. 교회는 매 달 절기마다 행사는 왜 그렇게 많은지 감사 헌금 봉투와 절기마다 특정 헌금 봉투와 주일 헌금, 작정 헌금, 선교 헌금, 십일조 봉투까지 보태면 주일 아침마다 최소 서너 개의 봉투를 들고 예배당이 있는 3층까지 천사처럼 오르곤 했었다.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주일이면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또래들과 함께 춤추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기도를 배우는 삶이 그대로 행복한 섬김의 삶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기에 교회 건물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 생활을 3년을 넘게 해오던 내게 목사님은 '집사'라는 안수를 주셨다. 그리고 그날 바로 고 집사님은 내 손을 잡더니 성가대실로 향했다. 40여 명의 성가대원 중 총무 집사님이 나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시더니, 바로 그날 오후에 처음으로 교회에 성가대 밴드 모임방이 만들어졌다. 그곳에 간간히 글을 올리는 일이 내겐 소소한 즐거움이었고, 교인들과도 작은 소통의 창이 되었다. 나에게 교회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얘기하라면 성가대 생활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가대원을 하면서 종교 생활에 더욱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무엇보다 받은 사랑과 기쁨으로 넘치던 사랑방이었다.


주일 아침이면 싫다는 아이들을 깨워 일찍 챙겨서 성가대실에 모여 주일 예배 1시간 전에 찬양 연습 후 헌금 봉투 서너 개를 챙겨서 3층 예배실로 향했다. 성가복이 내겐 천사의 날개옷 같았다. 구두를 신고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은 경쾌했고 우아했고 마치 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착각에 스스로 빠지기도 했었다. 우리 가정에게 있어 교회는 위험하고 타락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노아의 방주가 되어있었고, 이생에서 누리는 천국이자 구원의 직행 열차였다. 


삼복 더위 복날 딸아이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닭을 먹지도 만지지도 못하는 엄마에게 주문 통닭이 아닌 엄마가 해주는 삼계탕이 먹고 싶다는 말을 했고, 어떻게 그 얘기를 어깨 너머로 들으신 장 집사님은 밀양 시골집에서 손수 키우신 닭을 잡아서 가마솥에 넣기도 하셨는데, 성가대 전체 모임 외에도 우리 가정과 또 한 가정을 따로 초대해서 바베큐 파티를 해주시던 고마운 마음들, 어린이날 체육대회, 가을 야유회, 전교인 삼겹살 파티, 성가대 연말 음악회를 위해서 카페를 통째로 빌려 음대 교수인 바이올리스트를 초대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들려준 집사님 등등 교회 생활은 풍요로웠고 생활은 기름졌고 달콤한 나날이 쉼없이 돌고돌아서 일 년이 가고 또 일 년이 금새 흘렀다. 


그렇게 교회 안에서 안정적이고 윤택한 생활을 해오던 나와 우리 가정의 종교 생활은 그렇게 순조로웠고 행복했다. 교회 행사 때면 반복되는 불신자 가족 초대의 자리를 통해서, 자판기 커피를 함께 마시며 얘기를 나눌 친구를 한 명 사귀게 된 남편까지도 마음을 돌이켜 온가족이 함께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자녀들까지 각자의 주일 학교 자리에서 또래 친구들과 행복한 교회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그랬던 천국이자 행복의 왕국과도 같았던 교회당을 떠나온 것이다. 어쩌면 더 넓은 교회, 세상으로 나아가는 열린 걸음이다.


행복에 잠든 나를 흔들어 놓은 건, 뿌리를 내린 달콤한 교회와 교인들이 아니었다. 신약을 읽으면서 만난 예수였다. 내 양심 깊은 곳으로부터 가느다란 물줄기처럼 때론 바늘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처럼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이 있었다. 신약 성서의 예수에 비추어 내 양심의 거울은 더 닦여졌는지, '이게 아닌데, 신앙 생활과 섬김의 삶이 이게 다가 아닌데'하는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게 신약 성서를 눈 앞에 펼쳐서 읽던 경험은 밝은 태양빛 아래 선 것처럼 눈이 부셔서 거듭 눈을 감아야 했으며, 가슴이 깨어나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 예수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온전한 진리의 몸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해의 바탕에는 그동안 읽어온 불교 서적과 동서고금의 인문서적과 수행서와 경전이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신약 성서는 내 가슴으로 곧바로 못이 박히듯 파고들었고, 하늘에 박힌 별처럼 지금도 못이 빠지지 않고서 나와 함께 살아서 생명의 숨을 쉬고 있다.


예수는 외식하는 자 교만하며 풍요로운 엘리트 바리새인을 두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으며,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가까이 하며,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자에게 대접한 것이 나에게 대접한 것이라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분명 세상과 단절된 노아의 방주 같은, 내가 다닌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설교하는 기복 신앙이 되는 자녀의 성공과 가정의 부유함과 물질의 풍요와 안정된 삶과 교회의 부흥과 성공, 그것은 예수가 보여주는 마음과 내면의 세계와는 분명히 노선이 달랐다. 예수는 그렇게 나를 뿌리째 흔들어 놓고 있었다. 


교회와 목사라는 이름이 요즘처럼 욕을 먹는 시대가 종교 개혁을 꿈꾸던 루터의 중세 시대 쯤에나 있었을까? 콘슨탄티누스 황제의 야욕으로 기독교가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오늘날 개신교회의 기틀이 갖추어졌다고 하니, 괜스레 한 인간이 뿌린 탐진치 삼독의 씨앗이 이만큼 자라서 우리 사회에 이 만큼 끼치는 해악을 생각해보게 되는 요즘이다. 그래서 내겐 한 생각 일으키는 일에 대한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이 언제나 있다. 그래서 기도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온전치 못한 기도가 이루어질까봐. 온전치 못한 기도조차도 이루어질 줄을 알기에.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과 머리가 무겁기만 하다. 그럴 수록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곳곳에서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별처럼 빛나고 있음을 본다. 


그 빛은 비록 작을지라도 밤이 깊고 어두울 수록 작은 별은 더욱 빛나는 법이다. 가난을 사랑했던 성 프란치스코 신부님과 고독과 침묵을 사랑하신 법정 스님과 바보 김수환 추기경님과 무리를 떠나 홀로 산으로 오르시던 고독한 예수의 뒷모습이 내겐 어둔 세상 별이 되었고, 오늘도 우러러보면서 걸어가는 별자리가 된다. 김기석 목사님의 선한 연대처럼, 별은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며, 하늘에서 거리두기를 하며 서로가 서로를 위한 하나의 별자리가 된다.


내가 몸 담았던 교회의 목회자와 경상도 지역의 일부 극우 개신교의 목회자들과 일부 정치인들과 장사치들의 의식은 참 많이도 닮아 있다. 그들을 볼 때면 마치 사고뭉치 어린 아이를 보는 심정과 같다. 내가 몸담았던 담임목사의 설교도 자세히 보면,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주고 가신 성령이 아닌 탐진치 삼독에서 허우적거리는 목회자의 독재체제로 교회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밑에서의 달콤한 안정과 풍요였다. 영혼이 질식해버릴 것만 같은  하늘을 가리는 그 달콤함의 구름을 걷어낸 것이다.


내가 달콤한 교회당을 떠나온 일은 어찌 보면 때가 되어 스스로 열매가 익어서 신앙과 구도의 유치원을 졸업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예수의 이름을 간판에 두지만 예수와는 상관없는 교회, 한국 교회는 성공과 부흥을 외치는 기복 종교로써 의식 수준은 여전히 구약의 모세와 다윗과 야곱의 유치한 물질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 깨어나고 있는 개신교인들과 몸부림 치고 있는 목회자들이 어느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 서로가 서로에게 별이 되고 별자리가 되어서, 이 어둔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빛나는 길이 되어주고 있다.


그저 성공과 부흥과 물질의 부유함과 세상과 자기 자신을 구분 짓는 맹신앙의 거룩함에 도취 되어서 스스로 세상과 둑을 쌓고 침체된 체 영혼과 생명의 심지가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든, 꺼져가고 있는 병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 개신교회가 또한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한 탐진치의 몸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이 또한 나 자신이기도 하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겉모습을 말함이 아니다. 성도의 마음과 영혼과 내면 세계를 말함이다. 예수가 그토록 가리켰던,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함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처럼 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일로 숨을 쉰다.


그리고 지금도 개신교와 불교와 천주교와 한국의 풍류를 넘나들면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길 위의 나그네가 나의 모습이다. 마음이 가리키는 길, 양심이 비추는 길이다. 이제는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이 길은 위로 오르는 길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고, 나를 채우려는 배움이 아니라 나를 비우려는 배움이다. 탐진치의 세상과 거꾸로 가려는 몸부림이다. 내 마음으로 온전히 들어온 진리는 오직 예수의 마음 밖엔 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내려서 등에 짐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이 아닌, 성령의 해처럼 씨알처럼 가슴에 품고 가는 길이다. 


만약에 개신교의 담임목회자가 안정된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를 하고 불경도 읽는다면, 신약의 예수가 하신 말씀을 더욱 온전히 이해함으로 성도들에게 예수의 마음과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람과 아쉬움이 늘 있다. 진리의 구도자로써 불타 석가모니는 시대를 앞서 간 모범생이기도 했기에 나는 부처로부터도 하느님의 숨결, 공성의 하늘을 본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나처럼 종교를 넘나드는 이들이 참 많이 있다. 이런 이들에게 종교다원주의라는 말을 붙이기 이전에 제발 공부 좀 하시기 바란다. 욕심을 채우려는 물질의 성공과 부흥을 위한 공부가 아닌, 자신을 비워서 저절로 하늘이 드러나게 하는 마음 공부를 말함이다. 성경과 불경과 동양의 경전이 쉼없이 지금도 살아서 그 길을 가리키는 등불이 되고 있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지, 목회자가 성경을 자신의 목적과 수단을 위해서 한 구절만 뽑아 읽고서 설교 시간에 팔아먹는 자는 세상에 독을 뿜는 바리새파 같은 독사의 자식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또한 나 자신이 코로나 바이러스와 맹신앙의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숙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만물에 깃든 진리, 내가 찾으며 바라보고 있는 하나는 그런 하느님이다. 신약 성서의 예수가 끊임없이 가리킨 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마음이다.


이렇게 정처 없는 듯 자유롭게 종교를 넘나들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와 성령이 있고, 구도자의 모범생인 부처의 불성이 있고, 진리와 양심의 성령이 해처럼 때론 샘물처럼 나를 비추고 있다.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집에 있든지 밖에서 누굴 만날 때에도, 자유이신 바람은 언제나 불고 싶은 데로 부는 자유의 바람이기에.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몸에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숨은 하느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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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가 당한 고통은

신동숙의 글밭(306)


십자가형의 백배가 넘는 고통

- 정인이가 당한 고통은



                                         사진/김동진



백을 잘해줘도 영아를 키우는 엄마는 

잘못한 하나가 마음에 걸려 밤새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영아가 놀이매트 위에 앉아서 놀다가 뒤로 쿵

넘어지기만해도 엄마는 간이 떨어져서


말 못하는 어린 것을 한순간도 내려놓지 못하고

만일에 하나가 두려워 병원으로 달려가는 사람이다


5개월 동안 온몸에 뼈가 부러졌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입 속까지 찢어진 살갗에 뜨거운 이유식이 파고들고


아이는 췌장이 찢어지고 뱃속이 터져도 울지 못한다

의사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라 진단했다


정인이의 고통을 읽는 일이 이렇게 고통스럽다

벽에 붙은 십자가 앞에서 일어난 고문과 살인 행위다


십자가형의 백배가 넘는 고통을 

잘나가는 목사와 어린이집 원장의 아들과 딸이

율법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에게 내렸다


이 땅에서 영아를 키우는 엄마들 가슴에

화형식을 해놓았다


밤새 하얀 눈이 온 땅에 내렸다

하얀 눈이 하얗게 불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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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 안에선 범죄도 아카데미상을 받는다

신동숙의 글밭(305)


프레임 안에선 범죄도 아카데미상을 받는다

-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보다 약한 생명에게 -


타락한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예배당은 노아의 방주처럼 안전한 믿는자들만의 구원의 세상, 그 거룩한 모태 기독교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예수의 두레 밥상처럼 둘러앉아 하나가 되어야 할 예배의 자리에서조차 서로가 가슴으로 하나 되지 못하고, 말씀을 전하는 입과 귀로 나뉘어 분리된 예배의 형식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구원과 내세 천국을 설파하면서 침을 튀겨도 그리스도인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는다며 대면 예배를 고집하며 헌금은 대면으로를 주장하는 그릇된 목사와 그의 거룩한 자녀라는 프레임 안에서.


유년기부터 장성하기까지 거쳐온 엘리트 코스, 기독교계의 서울대학교라고 부르는 포항의 HD대 미션 스쿨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미쿡 유학파 통역사라는 프레임 안에서.

기독교 방송국 직원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입양 기관 봉사 단체 회원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EBS 방송 다큐멘터리를 통해 방영된 행복한 입양 가정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성형 선진국 한국에서 가슴 성형술로 이것만 하면 더 완벽히 아름답게 보여져 사랑 받으리라는 프레임 안에서.


16개월 핏덩이를 살해한 후 무료로 땅에 뭍은 직후에 다가올 목사 아버지의 생일 잔치를 위하여, 예수의 피로 상징되기에 누가 뭐래도 허용되는 술인 '와인 파티'라는 프레임 안에서.


두 돌도 안 된 영아에게 '아멘'을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는다는 프레임 안에서.


세상과 이웃을 철저히 자신과는 분리시켜온 그 이분법과 이원적인 프레임 안에서.


마음껏 누려온 특권 의식과 엘리트 교육과 명예와 물질적 풍요의 삶을 자랑하던 그들 영혼은, 수개월 동안 서서히 어린 생명을 매 순간 짓밟으면서도 겉으로는 밝은 표정으로 일상을 영위하며, 영아가 죽어가던 이제는 죽어버린 어린 생명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도저히 나의 피부처럼 느낄 수 없는 영혼과 몸의 감각까지 상실한 뼛속 깊이 병든 영혼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모태에서부터 이미 구원 받았기에 그 구원 프레임 안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과 이웃은 이미 나와는 분리된 다른 대상, 영화 속 등장인물로만 보여졌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조차도 세상에는 번듯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위한 프레임 안에 갇혀서 성실하고 밝은 역할을 연기해오던 선한 역에서 단지 세상에 들통남으로인해 하루 아침에 악역으로 바뀌었을 뿐인 연기자였으니까.


나와 너를 분리하는 이 철저하고도 처절한 이분법의 프레임은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한국의 전통 문화와 글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품성에 깃든 민간의 풍습 그 어디에서든 그 흔적을 본 적이 있었던가 찾아보고 또 찾아본다.


이 끔찍한 영아 살해라는 범죄가 만약 헐리웃 영화라는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아카데미 수상식에 노미네이트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세기부터 자본주의의 꽃인 영화는 그래왔으니까.


저들이 영화라는 프레임 안으로 한 꺼풀 더 들어갔더라면, 두 얼굴을 가진 양부모라는 캐릭터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극악한 범죄 중 가장 최고의 악역을 잘 소화해서 연기한 배우에게 주는 아카데미 악역상을 수상한 후 영예롭고 아름다운 영화인의 밤을 보내며 와인 파티를 벌일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그 모습에 박수를 치며 흥미진진해 하며 그런 범죄 영화를 함께 즐겼을 자들은 지금 누구인가?


만일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였다면 허용되었을 단지 끔찍한 범죄자의 역할로만 남았을 그 양부모들의 악역 말이다. 실제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고의 악역상을 수상한 인기 영화 배우가 세월이 흐른 뒤 알고보니 정말로 현실에서도 친딸에게 어려서부터 성폭력과 폭력을 행사해왔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세상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지 않았던가.  


정인이 입양 전(왼쪽 사진)과 후 모습. SBS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화면 캡처



내가 생각하는 범죄란, 나와 너를 분리시키고 세상과 나를 분리시키는 이분법과 이원적인 시각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나와 너는 다르다고 보는 이분법으로 분리된 인간의 의식 속에는 이미 범죄의 씨앗이 싹틀 수 있는 밭이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는 허용 되고 있는 전쟁들과 전쟁의 영웅들이라 칭송하며 폭력과 살인을 정당화 해오고 있지 않은가. 그 수많은 전쟁과 지구 파괴와 범죄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 아카데미상을 받아왔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아왔으며, 수많은 자본이 영화 산업으로 흘러들어가는지를 돌이켜 생각해 볼 일이다. 


이웃을 나와 나의 가족으로 보는 시각에선 차마 나올 수 없는 영화의 극본들과 직업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 않고 이웃을 나와 다른 타인이자 수단으로 보는 시각에서 얼마나 많은 악이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멀쩡한 사람 등 뒤에다 이단이라는 주홍글씨로 낙인을 찍는 맹신앙인들이 바로 그 흔한 옆집에 사는 교회에 다니는 평범한 아저씨와 아주머니 그 흔한 기독교인들이 아니던가.


전쟁 영화라는 프레임, 범죄 영화라는 프레임, 잔혹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허용되는 범죄들, 단지 나는 안락한 쇼파에 앉아서 개인적으로 때론 영화관에서 단체 관람자의 입장만 견지하면 된다는, 사회적 암묵적인 허용 속에서, 그 무수한 범죄의 장면들 앞에 노출된 어리고 무딘 영혼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영혼과 피부의 감각까지 무디어지고, 실상으로부터 차단되고 세포가 죽어가는 줄도 모른 채 영혼의 나병환자가 되어가고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영혼들. 그런 자가 바로 나와 너가 아니던가. 그 허상의 프레임으로부터 틀로부터 깨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도 쳐보았던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려는 나 자신이 눈먼 벌레는 아니던가.


내 자식만 일등을 해서 미쿡 유학을 하고 돌아온 후 사회의 엘리트 코스에서 탈선하지 않으면 가화만사성이 되리라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부모들의 눈에는 옆집의 자녀가 나의 자녀처럼 소중해 보일까? 그런 부모가 교회와 절에서 자신의 자녀와 가족만을 위한 천일 백일 기도를 드리는 자리에 머무는 동안 틈틈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샘물처럼 비집고 올라오는, 이웃의 자녀들이 눈에 들어온다면, 기도의 흐름이 바뀌지 않겠는가. 모두를 위한 기도로, 지구와 모든 생명을 위한 기도로, 그 길이 또한 나와 내 자녀까지 더불어 살리는 온전한 생명 평화의 기도라는 사실을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순간 왈칵 샘솟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만일 옆집에 자녀가 내 자녀처럼 소중하게 보이지 않고 단지 누르고 무시하고서라도 밟고 올라가야 할 학교 성적과 사회 생활의 경쟁자로만 보인다면 그들은 정인이의 몸을 짓밟던 양부모와 다르지 않은 시각을 지닌 사람들이다. 단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언제든 환경만 주어지면 싹이 틀 수 있는 내재된 범죄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니기에. 몸을 짓밟는 행위와 마음을 짓밟는 행위와 영혼을 짓밟는 행위가 무엇이 다른가.


애초에 나와 너는 다르지 않은 것이다. 깊은 뿌리에서 우리는 하나이기에. 이 하늘이 가득 우리와 함께 숨쉬고 있지 않은가! 푸른 하늘처럼, 출렁이는 바다처럼 우리들 저마다의 가슴속에서.


앞으로 사람의 의식이 더 진화를 한다면, 범죄 영화를 찍는 영혼과 범죄를 저지르는 영혼이 둘이 아님을 뼈저리게 깨닫고 영화의 역사를 다시 쓰게 되는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한 생각이 가슴 속에서 떠올라 지워지지 않는다. 


마음 공부를 하면 할 수록, 마음으로 죄를 지어도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서. 마음의 세계가 실체라고 보여준 석가모니의 깨달음을 따라서. 책을 통해서 많은 선현들이 보여준 구도의 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한 생각 일으키는 일의 무거움을 안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말하는 이 모든 감각적인 일들을 함부로 행할 순 없게 될 텐데... 


그래서 나는 폭력과 범죄 영화를 안본다. 작년에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어느 영화를 난 안 보았다. 지인의 입에서 잠깐 서술된 그 마지막 장면의 이야기만으로도 나는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기에. 만약 감독의 눈에 아역 배우가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눈 자신의 자녀로 보였다면 나올 수 없었던 영화 속 아역 배우의 충격 장면들, 어느 정신이 멀쩡한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끔찍한 영화 실험 놀이를 한단 말인가.


때론 인기 영화인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몸을 파는 사람을 불쌍하다 여기는 것보다 영혼을 파는 사람이 더 불쌍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은 영화를 찍고 난 뒤에는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위한 저들만의 살풀이로 푸닥거리인 영화제를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딘 세상에서 한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무대 위에서 대중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고 주머니에 엄청난 돈을 챙긴 후 건물주가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 영화 속 캐릭터들의 트라우마, 영화 성공 후 서서히 마약에 중독되어가는 아역배우들과 재벌과 권력자 그들 2세들이 놓친 인간적이고 평범한 일상은 무엇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나? 생명을 살리는 일에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서 허용되는 무수한 범죄들, 이미 구원 받은 특권층 기독교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칼로 자르듯 분리시킨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영혼의 나병환자들이 내가 머물던 교회에서 본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말씀을 그들은 그렇게 거꾸로 왜곡되게 해석하고 있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주일날 야외 공원 사생대회에서 그림을 심사하던 목사와 주일 학교 교사들의 눈에선 그날 같은 시각 세상 사람들이 아파 눈물 흘리던 눈물을 볼 수 없었다. 그날 그림의 주제였던 '노아의 방주'에는 배에 올라탄 행복한 표정의 온갖 짐승들만 그려졌을 뿐이다. "신도들 중에 세월호 가족이 있느냐? 내 가족이 없으면 됐다"는 목사의 설교 한 마디가 그 무렵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언급의 전부였다. 기독교는 그렇게 철저하게 세상의 아픔과는 스스로가 분리 단절을 시키면서, 부흥과 성장을 위한 권력과 자본과는 피보다 진하게 유착되어 있었다.


예수가 걸었던 방향과 정반대의 노선인 이 내리막길에서 스스로는 멈출 수가 없는 비대해진 몸집의 기독교가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의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는 강물의 거친 물살을 거슬러 오르듯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오르며 거꾸로 예수를 따르려는 목회자와 신앙인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다.


어린 영혼을 끔찍히 살해하고도, 자신의 형량을 낮추려 지인 목사와 부검사를 동원하고 변호사를 선임하려던 그 영아 살해자의 눈에서 볼 수 있는 영혼의 형태란, 여전히 타인을 자신과는 별개의 존재인 둘로 나누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도 피부로 느끼지도 못하는 영혼의 나병환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다 들통이 난 지금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기 스스로가 모태로부터 노아의 방주처럼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던 프레임 안에서 단지 잠시 벗어난 상태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심판이란,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공평하게 주고 가신 양심의 성령이 있어서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심판한다고 하셨다.


모태에서부터 그들이 받아온 프레임 안에서, 깨어지지 않는 그 견고한 특권층 선택 받은 기독교인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 옛날의 특권층 외식하는 바리세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 퍼부었던 것일까? 


미쿡 문화가 수입되기 전, 중국의 유교가 들어오기 전, 고대 한국인의 의식이 기록된 천부경과 민간의 풍습과 한국 민중들의 의식 저변에선 일원적인 의식 체계를 엿볼 수 있다. 


태초에 나와 너는 둘이 아닌 것이다. 자연과 나는 둘이 아닌 것이다. 천막 안에서 영화를 보다가, 흑백 영상 속에서 소나기가 퍼붓는 장면을 보고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며 마당에 고추를 널어놨는데 큰일 났다며 천막을 뛰쳐나가던 할머니들 할아버지들의 모습에서 한국 민중들의 저변 의식을 본다. 그저 현실과 영화를 구분도 못하는 바보라고 부르고 말 일인가? 나의 일과 이웃의 일을 둘로 나누지 못하고 함께 울고 함께 기뻐하던 이들을 두고 천지분간 못하고 어리석다 할 일인가? 아니 그 하나된 마음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순수한 본성은 아니던가?


석가모니가 보았던 중도 연기법의 세계에선 색과 공이 둘이 아니다. 성경에선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마음을 지키라고 하였다. 예수는 마음으로 간음하여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남이니 무릇 지킬 것은 마음이라고 성경은 태양처럼 비추고 있지 않은가.


이 모든 현상과 사건들 속에서 거듭 비추어보고 돌아보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다. 내 속엔 수많은 나의 모습이 있다. 사람들에겐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보여지지 않는 나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모습들 중에서 어떤 모습이 과연 진짜 나의 모습인지 스스로를 비추는 말씀이 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곳에서 나보다 약한 생명을 대하는 나의 모습이 현실계를 살아가는 나의 진짜 모습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내려가서 우리 모두의 참 본성을 본다면, 누구나가 다 밝고 아름다운 씨앗을 지닌 존엄한 존재들인 것이다.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으러 가는 예수의 마음에서 나는 그 온전한 마음을 보았다. 그리고 진리의 몸이 된 그 온전한 마음 앞에서 마음 둘 곳 없어 떠돌던 내 영혼이 비로소 안식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너와 나를 분리시키는 이 끔찍한 이분법의 이원적 프레임인 사고의 틀을 깨고 나와서,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며 우리는 깊은 곳에서 하나였다는 일원적인의 사고로 회복되어 가는 과정이 내가 걸어가는 공부와 배움의 지향점이 된다. 


부족하고 넘어지고 때때로 먼지 한 톨보다 못한 몸이 되는 어둔밤이 매번 찾아오지만 묵묵히 걸어가야지. 몸에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엔 이렇게 살아질 일이다. 내 몸 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 이 숨이 아직은 날 살아가게 하기에... 너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가 된 세상이 내겐 지상에서 누리는 천국이기에... 하느님과 동행하던 에덴 동산의 삶을 바로 지금 이 순간 누릴 수 있는,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관상의 기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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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첫날, 오늘도 무사히

신동숙의 글밭(301)


2021년의 첫날, 오늘도 무사히




기대와 설레임으로 서서히 다가오던 새해의 첫날로 추억한다. 오늘 맞이하는 2021년 신축년(辛丑年)의 새해 첫날에선 고요함 속에 생명들의 묵직한 아픔의 소리가 들어있다. 


자연의 흐름을 따라서 겨울에는 멈추어야 할 생명들이 문명의 흐름을 따라서 더는 멈추지 못하고서 여기저기 생가지 꺾이듯 터져 나오는 소리들이 그치질 않는다.


빙판길로 변해버린 제주의 도로에선 미끄러진 차량들과 사람들. 거제시에선 새벽 출근길에 가장들이 탄 오토바이가 달리던 도로 위 블랙아이스에서 줄줄이 미끄러져 내동댕이 쳐지는 사고가 일어나고, 늘어나는 배달 음식 주문량을 소화하느라 위험천만한 도로를 달렸을 오토바이 배달업 종사자들 그들의 더운 한숨으로도 이 추운 겨울날이 따뜻해지지 않는다.


설레임으로 잠못들던 새해의 첫날 밤을, 오늘은 걱정과 염려로 잠못드는 밤이 된다. 입에선 저절로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장이 맴돈다. 까마득히 어린 시절에 본 무릎 꿇고 앉아서 기도하는 소녀의 두 눈이 향하던 허공은 2021년의 하늘에까지 닿아 있다.


부디 있는 곳에서 멈추어, 제발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기를, 떨어지지 않기를, 기계에 끼이지 않기를, 아프지 않기를, 회복되기를, 안으로 뿌리를 내리는 한 그루 겨울 나무의 묵묵한 깊어짐으로 오늘도 무사하기를 빈다. 


떠오르는 동해의 태양이 비추어 닿기를 원하는 곳은 가장 어둡고 외진 우리들의 마음속이다. 우리들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가 진짜 해이기에,


새해 첫날 새아침

해가 떴습니다


어둡고 가난한

제 마음에도


해가 떴습니다

해의 이름은 사랑해`입니다


햇살은 언제나 따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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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장소가 뒤바뀐 시대

신동숙의 글밭(299)


안전한 장소가 뒤바뀐 시대


인간의 역사는 안전한 장소를 찾으려는 탐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재지변과 야생 동물의 습격으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마침 동굴이 되었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한숨 돌린 인간은 비로소 동굴벽에 그림을 그릴 여유가 생겼으리라 짐작이 간다. 


차츰 주위에 흔한 돌과 나무와 흙을 모아서 움집을 세우고, 한 곳에 터를 잡고 모여 살게 되면서 부락이 형성되고, 세월이 흐를 수록 집의 형태는 더욱 정교해지고, 나아가 집은 하나의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안전한 집터 주변으로 농경과 목축이 발달하면서 잉여물이 생기고, 잉여물은 그보다 더 커다란 권력과 국가를 낳고, 급기야 집은 인생의 목표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늘날의 집은 주거지의 목적에 덧붙여서 잉여를 생산하는 자본가인 건물주를 낳았다. 


동굴벽화로부터 시작된 기록의 역사를 주거 환경의 관점에서 그리고 한 개인의 인생 여정으로 비추어 볼 때, 집이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안전하고 번듯한 집과 건물을 마련하기 위한 여정이 되었다. 인생의 꿈을 꾸며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노동을 해서 드디어 마련하고자 하는 목표물인 정착지와 다르지 않았다.


위험한 바깥으로부터 보다 안전한 실내로, 좁은 실내로부터 보다 넓은 실내로, 건물이 주거지의 목적에 덧붙여서 월세가 꼬박꼬박 들어오는 생산의 역할까지 담당하기를 바라는 황금알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건물은 안정과 자본력과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런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자연스레 흘러오던 흐름이 뒤바뀐 것이다. 시스템 창호로 밀폐된 실내 공간일 수록, 열심히 환기를 시켜주지 않으면 코로나19 바이러스 전파에는 치명적이다. 대형 교회와 성당과 절이 비대면 예배와 미사와 기도 모임으로 전환하게 된 중요한 이유도 밀폐된 실내 공간이기 때문이다. 


비와 바람과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실내 공간이 이제는 가장 위험한 바이러스 전파지가 된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이다. 새로운 세상에 맞추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선 초점을 다시 조절해서 맞추어야 할 일이다. 아울러 우리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맞출 것인가?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목표가 집이 되고 단지 건물주에 머물려는 생각은 영혼이 서글픈 삶이다. 


밤늦도록 시내의 번화가가 가장 북적였을 이 연말에, 시내의 거리와 음식점과 주점과 모임을 즐기던 그 모든 실내 공간이 가장 썰렁하고 한산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서울의 명동이나 부산의 남포동이나 다르지 않다. 반면에 산과 강을 따라 펼쳐진 바깥 세상은 마스크로 무장을 하고 산책 나온 사람들로 줄을 잇는다. 


이웃집과 친척집도 식당과 카페도 교회와 성당과 절에도 여행도 실내공간 어디라도 갈 수 없는, 집 안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답답한 우리들의 숨통을 틔여줄 장소가 산과 강을 따라 형성된 공원의 산책길인 것이다. 서로의 몸이 부딪히지 않으려 조심스레 지나치는 몸짓에는 모두가 안전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이제는 실내보다 바깥 세상이 쉼쉬기에 더 안전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슬프기도 하고, 허한 웃음도 난다. 요즘 같으면 비싼 월세를 감당치 못해 어쩔 수 없이 폐업을 해야하는 자영업자들에게 시장의 노점상인들이 더 부러워 보인다고도 하니... 


오죽하면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썰렁한 가게 문 밖에서 붕어빵이라도 구워 팔면서 동네 사람들한테 훈기라도 주고 싶다는 얘기가 이 추운 겨울날 하얀 입김처럼 이웃들의 입에서 새어나올까 싶다. 그들의 한숨이 깊다. 새해에는 숨통이 트일만한 좋은 소식들이 봄바람에 꽃씨처럼 날려오면 좋겠다. 


또한 다가올 하루하루를 있는 모습 그대로 감사하며 맞이할 수 있는 열린 마음 주시기를 소망한다. 비와 바람과 추위와 땡볕도 감사히 온몸으로 맞이하는 야생의 풀과 꽃과 나무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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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에 썰매를 매달아요

신동숙의 글밭(297)


오토바이에 썰매를 매달아요


배달물을 싣고서 바쁘게

도로 위를 달리는 오토바이를 보면

아찔하니 가슴으로 찬바람이 불어요


일하러 나가는 엄마가

온라인 등교로 집에 있을 자녀에게

짜장면을 시켜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아요


오토바이를 탄 사람도

이웃집 귀한 아들이고 아빠일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요


도로를 달리는 차들 사이로 

비틀비틀 달리는 오토바이를 보는 마음은

언제나 아슬아슬하지요


만약에 오토바이 뒤에 

양쪽으로 바퀴가 달린 썰매를 매달면


음식 배달, 우편물 배달, 택배 배달물을 뒤에 싣고

비와 눈을 가려줄 천정 덮개를 길게 앞으로 늘이고


그러면 오토바이 속도가 느려진다며

주문한 짜장면이 늦게 도착한다며

우편물이 늦게 온다며

불평할 이웃이 있을까요?


우리가 조금만 느긋한 마음을 낸다면

우리의 아빠와 아들이 탄 오토바이가 안전할 수 있어요


안전 신호를 지키고

속도를 조금만 줄이고

서로가 조급한 마음을 줄인다면


우리의 가족이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쿵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어요.


썰매를 매달고 안전하게 달리는 오토바이는

선물을 싣고 도로를 달리는 우리의 산타가 되지요.


...


배달 주문이 늘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의 집배원은 오토바이를 타고서 집집마다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빗속에 우비를 입고 도로 위를 달리는 집배원 아저씨가 탄 오토바이 뒤에는 우편물함이 커다랗습니다. 살얼음이라도 낀 날에는 아찔합니다. 저러다라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일텐데 싶어서, 차를 운전을 하면서도 조마조마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아마도 갈수록 주문 배달량은 늘어날 테고, 오토바이 배달 업체들은 너도나도 늘어난 시장으로 발을 들여놓을 것입니다. 우리의 아들과 아버지들은 생계를 위해서 달리는 오토바이에 앉을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도로는 오토바이가 달리기엔 너무나 위험합니다. 아차! 넘어지기라도 하면, 대형사고가 예정된 도로입니다. 다행히 시내 도로 규정 속도가 50~70키로로 낮추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두 발 짜리 오토바이는 한순간 넘어지기라도 하면....



인도 여행 중에 보았던, 오토릭샤와 자전거릭샤에는 바퀴가 두 개인 경우가 없습니다. 한국의 오토바이와 자전거처럼 중간의 앞 뒤로 두 바퀴가 있고, 뒷바퀴 양 옆으로 또 바퀴 두 개가 나란히 있어서, 옆으로 전복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서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편집배원 아저씨들을 보면서, 작은 경차나 마트용 경차로 전원 교체를 하면 배달일이 덜 위험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앞으로 생산되는 수요라도 그렇게 충족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예산 관계상 당장에 기존의 이륜 오토바이를 사륜 구동으로 바꿀 수 없다면, 간단한 개조만으로 오토바이 뒤에 이륜 썰매를 달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도의 릭샤를 참고한다면 알맞은 오토바이 썰매 디자인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썰매를 달고 달리면 오토바이 속도는 느려지겠지요. 그리고 함께 달리는 자동차들도 조심스러워질 테지요. 더불어 함께 공생하는 도로가 되기 위해서 자동차들도 저부터 조심씩만 속도를 줄이고, 조심하는 노력만으로 단 한 건의 오토바이 사고라도 줄일 수 있다면 해 볼 수 있는 투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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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신동숙의 글밭(295)


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오늘 성탄절 전야는 가장 어둔 밤이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어 뜬눈으로 지새운다. 하지만 밤이 깊을 수록 별은 유난히 밝게 빛난다는 하나의 진리를 붙든다. 까맣도록 타들어간 내 어둔 가슴을 헤집어 그 별 하나를 품는다. 별을 스치듯 부는 바람에 그제서야 거친 숨결을 고른다.


지난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겪어오고 있는 일들을 하나 둘 돌아보면, 수학 여행 때 단체로 뭣모르고  롤러코스터와 바이킹에 올라탔을 때처럼, 숨을 멎게 하는 듯 늘어나는 아픈 이들의 증가수와 평범하던 일상의 중력을 거스르는 과도한 포물선과 휘몰아치는 기세를 벗어나고 싶어도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팬더믹과 어쩌면 그보다 더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부정부패의 바이러스를 보고 있다. 바이러스들은 혼돈의 밤이다. 사랑과 자유와 정의를 덮는 어둔 밤이다. 흔하던 만남과 모임들을 끊어 놓는 단절이다.


동짓달의 어둡고 긴 겨울을 지나며, 봄 소식보다 먼저 우리들에게 찾아오길 기다리는 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를 멈출 백신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백신을 기다리고 있지만, 내게는 그전부터 마음에 틈타려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의 바이러스를 멈춘 아니 채운 나름의 백신이 있다. 때때로 하얀 별빛과 같은 그 백신이 나를 고독과 침묵이라는 내면의 뜰로 인도해준다. 이미 내면에 있는 평온의 하늘과 땅이 밝게 펼쳐진다.


법정 스님, 토머스 머튼, 성철 스님, 혜암 스님, 다석 류영모 선생의 제자 박영호 선생님의 강의, 유튜브로 듣는 코리안 아쉬람의 동서양 융합 강의,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선하고 바른 생각을 지닌 페친들의 글과 사진과 그림들이 고마운 마음의 치료제 백신이다. 선현들과 눈 밝은 분들이 내 어둔 마음의 바이러스를 다스려준 별처럼 환한 백신이다. 


책과 유튜브와 페이스북으로 이분들을 만나다 보면, 푸른 숲속을 산책하는 듯, 맑은 하늘을 보는 듯, 자연과 진리와 인간이 삼위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왈츠를 추는 듯, 석간수처럼 맑은 물 한 사발 들이킨 듯, 청아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정취에 감싸여 젖어들게 된다. 깊은 심해로 잠수를 해서 들어가듯 스승이자 벗들과 함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만큼 깊은 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심령이 기뻐서 정화가 되면 또 하루를 한순간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요즘 들어 유독 자주 어루만지듯 얼굴을 닦듯이 보고 또 보는 한 분이 있다.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사서삼경 등 한학에 통달했으며, 14세 때에는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무살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1913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곧바로 조선인 최초의 판사로 임명된다.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10여 년간 법관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내면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인간인 내가 어떻게 다른 인간을 벌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온다. 어느 젊은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나중에 진범이 나타나자 헤아릴 수 없는 자책감과 회의감에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여름, 그의 나이 36세에 스스로 법복을 벗고 3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엿장수와 노동자로 방랑한다. 당시에 두 아들과 아내를 둔 그였지만,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 후 그는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座不臥)로 오래 참선하는 스님으로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공부에만 전념한다. 그의 법명이 효봉 스님이다.


효봉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하시느라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계시던 1955년 초 어느 추운 겨울날 전라도에서 상경했다는 24살 청년의 인사를 받고 출가를 허락하신다. 당초 이 청년은 서울을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가 삭발 출가를 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출발 당일 폭설이 내려 교통이 단절 되는 바람에 한 스님의 소개로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게 된 것이다. 


바로 그날 선학원에서 머리를 깎은 청년이 법정 스님이다. 상좌를 받지 않기로 유명한 효봉 스님이었기에 평생 단 두 명의 상좌를 두었다. 그 중 한 명이 법정 스님이고, 나중에 파계를 한 고은 시인이다. 효봉 스님은 불교정화운동과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화합, 후학 양성에 힘쓴다. 그리고 대한불교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 된다. 


내가 효봉 스님을 알게 된 것은 법정 스님을 통해서다. 법정 스님이 내겐 석간수라면 효봉 스님은 더 깊고 맑은 숨어 있는 샘이 된다. 효봉 스님이 살다간 시대는, 역사적으로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와 전쟁과 혼돈과 겪변기의 근현대이다. 그에 못지 않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0년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라는 적과의 전쟁터에서, 코로나19 팬덤으로 어둡고 무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슴을 조여오는 건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우리 사회를 어둠과 혼돈 속으로 휘저으며 정의의 맑은 하늘을 뒤덮으려는 죄를 짓고도 법복으로 벗지 않으려는 속까지 검은 법복의 구름이다.


    사진:법정 스님이 찍으신 강원도의 오두막



하지만 밤이 어두울 수록 별은 밝게 빛난다는 진리는 여전히 빛난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것이 우리가 배워온 교과서에선 별처럼 빛나는 효봉 스님과 법정 스님과 같은 훌륭한 분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 유년기의 그림책과 교과서에서부터, 어둔 시대에 별처럼 빛나는 효봉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랄 수 있었다면, 지금 법관 생활을 하는 많은 이들의 눈빛이 별처럼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꿈처럼 해 본다. 그리고 만약 법전 맨 앞 서문 자리에 효봉 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면, 법복을 입은 이들이 차마 국민들이 손에 쥐어준 천칭을 제 사리사욕 쪽으로 쉬 기울이지는 못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수 년간 검사가 꿈이었던 딸아이의 꿈을 엄마로써 그 싹을 자른 일이 있다. 왜 검사가 되고 싶은지 거듭 물었더니, 멋져보였단다. 웹툰과 만화책과 텔레비젼에서 본 법관들의 삶이 그렇게는 풍요롭게도 비춰졌다고 한다. 고전보다 손에 가까운 웹툰, 경전보다 손쉬운 텔레비젼이 우리들 자녀들 주변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그런 딸아이에게 효봉 스님의 이야기를 간간히 들려줬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딸아이는 자기는 검사가 되면 안될 거 같다며 스스로 꿈을 지웠다. 


딸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만 권이라고 하는 수는 한 단어 그림책까지 합한 허수이긴 하다. 뒤늦게 엄마로써 뼈저리게 후회하는 것은 사자소학과 사서삼경과 성경과 불경을 놓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부모로써 소치다. 옹알이와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딸아이를 데리고 집과 도서관과 서점을 돌면서 시간과 돈만 있으면 손쉽게 읽을 수 있었던 만 권이 넘는 책들의 경중을 따져보니, 한 권의 경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자녀의 유년기에 동양학문을 가르쳐 줄 서당을 이곳저곳 알아보고 대안학교를 열심히 알아보기도 했었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가르치기엔 스스로가 부족했다. 


학교에 입학 후 배운 학문은 먼저 읽은 만 권의 책들이 지닌 깊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인간이 나올 수 없다. 인간이 되는 길은 학교와 학원 밖에서 따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근본 진리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법관 시절 효봉 스님이 고민했던,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씨앗처럼 던질 수 있게 하는 학교 교과목과 학원이 우리 자녀들 곁에 어디 있던가?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묻는다.


나는 지금도 찾고 있다. 오늘도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어둠 속에 별을 찾듯이, 세상이 아무리 춥고 어두워도 한 점 별처럼 빛나는 눈 밝은 이를 찾는다. 사리사욕의 검은 법복을 훌훌 벗어던지고 우리에게 정의의 맑은 하늘을 보여줄 사람 하나를. 그렇지만 그런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으려면, 먼저 내 자신 안에서 그런 눈을 떠야한다. 결국은 '너'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참고 도서 :<효봉 스님 이야기>, 김용덕, 불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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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신동숙의 글밭(294)


몸이 불편한 자는 출가를 할 수 없는가?


이 글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적는다. 10년 전 가을 그때에 일을 떠올리는 마음이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뒷좌석에 두 자녀를 태우고, 남편이 운전을 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라디오 불교 방송, 고상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정목 스님의 유나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그때 라디오로 사연이 하나 올라왔다. 스님은 그 사연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연인 즉, 자신은 젊은 청년이라고 소개를 하며, 하반신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을 하고 있으며, 평소 불교 유나방송의 애청자라고 한다. 그러다가 발심이 생겨 출가를 해 부처님 법을 따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출가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 또한 20대 초반에 출가의 뜻을 세운 적이 있었기에, 출가의 발심을 세운 그 청년의 사연이 꼭 나의 일 같아 귀를 세웠다. 그가 출가의 발심을 세우기까지 숱한 어둔 밤을 보냈으리라. 나는 들었고, 청년의 사연을 다 읽은 스님은, 감정의 동요도 비치지 않은 채 결론부터 말씀 드리겠다며...


휠체어 생활을 하는 청년의 발심에 대한 스님의 답변은, 스님의 그 대답을 다시금 떠올려서 지금 이렇게 글로 옮기는 일이 슬프고 아프다. "장애인은 출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이어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를 되살려서 내 손으로 적어야 하는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은 분노한다. 십 년 전 그 일이 되살아나 여전히 분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잠시 글을 내려놓고 호흡을 보고 있다가 다시금 글을 이어간다. 이어지는 문장은 내 입으로 차마 재생 시키고 싶지 않은 한 비구니 스님의 출가에 대한 생각이다. '멀쩡한 사람이 출가를 해도 세상 사람들을 제도하기가  힘든데, 장애를 가진 사람이 스님이 되면 부처님 법을 포교하는데 어려움이 따릅니다.' 내 기억의 편집으로는 장애인이 출가를 하면 포교가 안 된다는 결론이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내 귀를 의심했고, 운전하는 남편에게도 똑같이 들었느냐고 물으니, 앞만 보고 있던 남편은 대답 대신 고개만 한 번 끄덕했다. 


정말로 그럴까? 설령 비구니 스님의 그 답변이 반듯한 답변이었다고 해도, 그때처럼 여전히 내 가슴이 왜 이렇게 무겁고 아플까. 생방송으로 전국적으로 전파되던 그 공개된 자리에서 그런 대답을 들었을 그 젊은 청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청년이 '너'가 아니라 '나'였다면 어땠을까? 그 청년의 일은 '너'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인 것이다. 그가 내 곁에 있었다면, 그게 아니라고 얘기해 주고 싶다. 아니, 바로 그때 차를 세워서 유나방송으로 항의 전화라도 했어야 했다. 지금도 그 일을 두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나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에 분노한다. 나는 왜 이렇게 여전히 그 일로 아파하고 분노하는가? 이런 나를 돌아본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통도사의 금강계단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된 두 형제가 있었다. 형 마하반타카는 곧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외우고 익혔으나, 동생 주리반타카는 머리가 나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도 외우지도 못하고 돌아서면 까먹는 바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을 부끄럽게 여기던 형은 동생에게 '너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려우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낙심을 하고 담 밑에 앉아 있던 동생 주리반타카에게 다가간 부처님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그를 데리고 들어가신다. 그리고 그에게 아주 간단한 게송 하나를 가르쳐 주시며, 마당을 쓸면서 외우도록 하셨다. 주리반타카는 부처님이 시키는데로 먼지를 쓸면서, '이 먼지와 함께 나의 번뇌와 마음도 씻겨지길'이라는 게송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세월이 흘러 바보 주리반타카가 설법을 한다는 소식에 다들 호기심이 생겼다. 뜻밖에 주리반타카가 성공적으로 설법을 마치자 모두가 놀라며 축하하였다. 단순한 염불을 거듭해도 수행이 된 주리반타카는 열심히 정진하여 어느새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각자의 근기에 맞는 가르침으로 살인마도 배신자도 바보도 가리지 않고, 제도를 하시고 깨달음으로 이끄신 것이다.


이것이 부처의 마음이고 예수의 마음이고 부모가 되는 창조주의 마음이 아닐까? 타인이 '너'가 아니고 '나'가 된다면 세상의 모든 답은 풀리게 되어 있다. 어제 한 비구 스님의 글을 읽다가 그때 그 비구니 스님의 덕담을 읽게 된 것이다. 반듯한 일주문이 되어서 많은 이들이 그 반듯한 일주문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반듯한 승려가 되시라는 후배 승려에 대한 선배 승려의 덕담이 그 글의 내용이었다.


부처님의 정법에는 팔정도와 중도 연기법, 참선이 있다. 부처님의 행적과 정법에 따라서, 육체적으로 하반신 장애를 가진 그 청년도 얼마든지 출가 수행을 할 수 있다.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처럼, 휠체어에 앉아서 참선 수행을 하면 된다. 


확철대오를 하신 성철 스님이나 무문관 시절부터 한 번 앉으면 꼼짝을 안하셔서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붙여진 효봉 스님이나 한 소식을 이루신 스님들은 다들 무엇보다 오래 앉았는 참선 수행을 첫째 가는 수행 정진으로 삼으셨다. 부처님의 정법 수행이 바로 오래 앉았는 참선 수행이 아니던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휠체어는 최적의 좌복이 될 수 있는 이치다. 나머지 부수적인 문제는 하나씩 풀어가면 된다. 


석가모니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보이신 마음은  자비와 긍휼이다. 자비의 사랑이 없다면,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이 없다면, 그런 출가자가 걷는 구도의 순례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늘도 나는 묻고 또 묻는다. '너'가 아닌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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