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혀가시는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7)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8 잡혀가시는 예수


 

마태수난곡 132b~33

마태복음 26:47~50

음악듣기 : https://youtu.be/yCuB137wZKA

32(2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7. Und als er noch redete, siehe, da kam Judas, der Zwälfen Einer, und mit ihm eine große Schar, mit Schwerten und mit Stangen, von den Hohenpriestern und Ältesten des Volks. 48. Und der Verräter hatte ihnen ein Zeichen gegeben und gesagt: Welchen ich küssen werde, der ist's, den greifet. 49. Und alsbald trat er zu Jesum und sprach:

47.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가

대사

유다

49. Gegrüßet sei seist du, Rabbi!

49.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9. Und küssete ihn. 50. Jesus aber sprach zu ihm:

49. 하며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대사

예수

50. Mein Freund, warum bist du kommen!

50.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50. Da traten sie hinzu, und legten die Hände an Jesum, und griffen ihn.

50.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33(27)

코멘트

듀엣

(소프라노 알토) & 합창

SOLI

So ist mein Jesus nun gefangen.

CHOR

Laßt ihn! haltet! bindet nicht!

SOLI

Mond und Licht Ist vor Schmerzen untergangen, Weil mein Jesus ist gefangen.

CHOR

Laßt ihn! haltet! bindet nicht!

SOLI

Sie fuhren ihn, er ist gebunden.

CHOR

Sind Blitze, sind Donner in Wolken verschwunden? Eröffne den feurigen Abgrund, o Hölle; Zertrümmre, verderbe, verschlinge, zerschelle Mit plötzlicher Wut Den falschen Verräter, das mördrische Blut!

솔로들

오 그렇게 나의 예수가 지금 붙잡히셨네.

합창

그를 놔 줘라! 멈추어라! 그를 풀어줘라!

솔로들

달과 그 빛도 슬픔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는구나.

나의 예수가 붙잡히는 모습에

합창

그를 놔 줘라! 멈추어라! 그를 묶지 마라!

솔로들

그를 끌고 가네. 그는 묶이셨네.

합창

번개여, 천둥이여,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는가!

, 지옥이여! 불 구덩이를 열어라

당장 분노를 터뜨려 저들을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삼켜버리고 박살내어라

저 거짓된 배반자들을, 살인자의 피를!

 

거기 너 있었는가?

 

유다가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들과 함께 나타납니다. 에반겔리스트가 이 장면을 이끌어가는 것을 대본과 함께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에반겔리스트는 마치 청중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변사처럼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성경원문 뿐만 아니라 루터도 한편의 이야기로서 십자가 사건을 번역했고 바흐도 루터의 의도를 파악하여 음악적으로 이 이야기를 극대화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한 편의 이야기로서 들어야 합니다. 찬송가 147거기 너 있었는가/Were you there’의 가사처럼 우리는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일의 목격자요 증인이 될 때 십자가의 은혜를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로 만나는 십자가 사건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복음서의 초기 형태는 예수의 어록이었습니다. 예수 어록으로 전해진 복음서에는 십자가 사건이 없었습니다. 이후에 십자가 사건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야기의 형식이 필요했고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위해서 내러티브가 복음서 전체를 이끌게 된 것이지요. 아무튼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한 편의 이야기로서 들을 때 가장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장의 목격자로서 참여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그런 면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십자가 사건에 코멘트와 기도가 추가 되어 그 위에 음악이 입혀진 마태수난곡은 십자가 사건을 마치 그곳에서 만나는 듯한 감상을 전해 줍니다.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 오버암머가우/Oberammergau’에서는 1634년 이래 거의 4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 10년 마다 수난극(Passionsspiel)이 펼쳐집니다. 온 마을이 수난극의 무대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증인으로 참여합니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5월에 열려야 하지만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2022년으로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제 소원이 있다면 그때 까지 이 연재를 마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 바흐가 살았던 도시들을 순례하고 오버암머가우의 수난극에 십자가 수난의 증인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독일 오버암머가우 수난극(Oberammergau Passionsspiel)


오늘 이야기의 바로 전 부분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끝내신 예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하심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예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매우 급하게 이어진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에반겔리스트는 왜 그렇게도 급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유다와 무리들이 들이닥쳤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살기등등하게 서둘러 왔거나 워낙 급박한 순간이라 그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되지는 않았지만 독일어 성경에는 ‘noch/아직'라는 부사가 쓰여 급박감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도 에티/라는 단어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새번역은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라고 원문대로 번역하여 이야기의 느낌을 더욱 살려 긴장감을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47절을 보면 ‘Siehe!/보라!’라는 표현이 나와서 독자들을 장면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음반을 통해 에반겔리스트의 음성으로 들어보면 훨씬 더 명확하게 들리실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두/ 그림입니다. 라는 단어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 어떤 번역에도 이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은 공통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의 측면보다는 기록의 측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보라와 같은 표현이 들어가는 것은 번역 상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표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부언컨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한 편의 이야기로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순례에 동참하는 여러분들은 마태수난곡을 통해 우리말 성경의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 중에서 “und mit ihm eine große Schar/그와 함께 큰 무리가 왔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Schar/무리/[~]’라는 단어를 외칠 때 굉장히 높은 고음이 나옵니다. 그동안 이야기꾼으로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에반겔리스트도 예수 한 사람을 잡으려고 검과(Schwerten)과 몽둥이를(Stangen)를 들고 온 무리들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거짓의 입맞춤

 

유다는 드디어 거짓의 입맞춤, 죽음의 입맞춤을 합니다. 다른 신호의 방법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입맞춤이었을까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거짓되고 위선적일 수 있는지를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랑마저 거짓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또 하나, 수난 이야기에 왜 제자 유다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요? 당시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던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고 예수께서 숨어 다니신 것도 아니기에 굳이 유다가 배신하지 않아도 예수를 잡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인 유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성경은 주목하고 있을까요?



유다의 입맞춤/The Kiss of Judas, 제임스 티소/James Tissot(1836-1902), Brooklyn Museum.


슬프게도 저는 이 대목에서 어떤 목사님들의 군상이 떠오릅니다. 제자였던 유다처럼 예수의 꿈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선택 받았고 설교단상에서는 눈물과 감성적인 노래들 섞어가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단상 아래에서는 끼리끼리 모여 자기의 자리나 물질적 이익과 욕망과 명예를 더욱 탐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결과적으로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버리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목회의 현장에 있다 보니 교회와 목회 자리를 사고팔며 일반인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고액의 사례비와 각종 수당, 퇴직금을 받는 분들을 보아왔습니다. 제가 셈에 밝아서 돈 문제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다의 문제도 결국 돈으로 귀결되었듯이 오늘날과 같은 물질주의 시대에 목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일만 악의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도 배신을 당하시고 팔림을 당하시고 잡혀가십니다.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 보다 예수를 알았던 사람들의 배반이 주님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그들의 책임이 더욱 큽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 사건에서 유다의 역할을 크게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 예수는 이마저 다 받아주고 참아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마태수난곡의 대본인 루터성경은 “Mein Freund, warum bist du kommen/친구여, 왜 여기에 왔느냐?”라고 원문에 가깝게 번역합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듯이 한치 앞의 자기 운명을 모른 채 기어이 배신하고 파멸과 죽음으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제자 유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잡혀가시는 예수

 

유다의 신호를 확인한 무리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습니다. 이어 이중창과 합창이 함께 하는 곡을 위한 긴 전주가 시작됩니다. 하나의 멜로디 라인이 끝나갈 즈음 다른 음높이에서 비슷한 멜로디 라인이 다시 시작되면서 주고받는 형식을 대위법이라고 하는데 이 곡은 대위법적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장면에 숨어 있습니다. 예수를 붙잡기 위해 큰 무리가 왔었고 이제 예수를 묶어 끌고 가고 있습니다. 좁은 산길을 내려가느라 긴 행렬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바흐는 대위법을 통해 그 기나긴 행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이 정도의 극적 표현은 50~100년 뒤에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나 당시 오페라가 성행했던 영국에 가보지도 못한 바흐가 이렇게 놀라운 전위음악을 펼쳐 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이 곡을 계속 들어 보겠습니다. 전주에 이어 소프라노와 알토의 이중창이 시작 되고 중간 중간에 합창이 등장하여 그 비극적인 행렬에 코멘트를 합니다. 합창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여(56) 숲 속에 숨어들어 몰래 그 장면을 지켜보는 제자들일수도 있고 그곳에 증인으로 참여하여 그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소프라노와 알토 솔로는 열한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안에 있는 여성적인 감성을 상징합니다. 소프라노는 순수한 여성적 사랑을, 알토는 공감과 모성적 사랑을 노래하는데 지금, 그 두 사랑 모두가 하나의 노래를 이중창으로 부르며 함께 슬퍼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힘없이 끌려가는 예수의 모습에 집중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지요.

 

반면 합창은 그 장면 속으로는 들어가 있지 못하지만 최대한 가까이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며 그 감정을 좀 더 외부적이고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합창은 이중창의 중간 중간 마다 예수를 끌고 가는 무리를 향해 애원하듯 소리치고 있습니다. ‘Laßt ihn! haltet! bindet nicht/그를 놔 줘라! 멈추어라! 그를 왜 묶느냐!’ 십자가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그곳에서 목격하고 반응하고 있는 우리들의 외침입니다. 그 애원은 점점 요청으로, 더 나아가 명령으로, 급기야 저주로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분노하는 신앙

 

그를 풀어달라는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무리들은 예수를 죄인처럼 끌고 갑니다. 도대체 지금 자신들이 어떤 분을 끌고 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로부터 명받은 일을 성공했기에 그 사실만 기뻐하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지하고 미련한 앞잡이들입니다. 이를 보고 참다못한 합창단은 예수를 끌고 가는 무리와 예수를 배반하고 죽이려는 무리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늘에 이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토로합니다. 베이스 파트부터 시작하여 테너 알토 소프라노 순으로 한 파트씩 ‘Sind Blitze, sind Donner in Wolken verschwunden?/번개여, 천둥이여,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는가!’라고 하늘에 울부짖다가 종국에는 모든 소리가 섞여지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며 하늘이 응답하여 진노하는 소리로 변합니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지옥문이 열리는 듯 새로운 전개가 다시 시작됩니다.

 

Eröffne den feurigen Abgrund, o Hölle;

Zertrümmre, verderbe, verschlinge,

zerschelle Mit plötzlicher Wut

Den falschen Verräter, das mördrische Blut!

 

, 지옥이여! 불 구덩이를 열어라

당장 분노를 터뜨려 저들을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삼켜버리고 박살내어라

저 거짓된 배반자들을, 살인자의 피를!

 

거룩한 분노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솔직한 맘으로, 시원합니다. 기독교인은 무조건 참아야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배반하고 죽이고 그가 품은 고귀한 뜻을 폄훼하는 자들에게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 자신을 향할 수도 있지만, 예수를 묶어버리고 배신하고 죽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특히 이 시대의 유다들에게 분노하고 울분을 쏟아 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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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함께 가자!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6)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17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태수난곡 1부 30번~32번

마태복음 26:40~46

음악듣기 : https://youtu.be/sAKUNyWOkc0

30(24)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0. Und er kam zu seinen Jüngern, und fand sie schlafend. und sprach zu ihnen:

40.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40. Könnet ihr denn nicht eine Stunde mit mir wachen? 41. Wachet und betet, daß ihr nicht in Anfechtung fallet. Der Geist ist willig, aber das Fleisch ist schwach

40.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2. Zum andern Mal ging er hin, betete und sprach:

42.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대사

예수

42. Mein Vater, ist's nicht möglich, daß dieser Kelch von mir gehe, ich trinke ihn denn; so geschehe dein Wille.

42.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31(25)

코멘트

코랄

Was mein Gott will, das g'scheh' allzeit,

Sein Will', der ist der beste,

Zu helfen den'n er ist bereit,

Die an ihn glauben feste,

Er hilft aus Not, der fromme Gott,

Und züchtiget mit Maßen.

Wer Gott vertraut, fest auf ihn baut,

Den will er nicht verlassen.

나의 하나님의 뜻이 항상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최선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굳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도우시기 위해

항상 예비하고 계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시고

알맞게 바로잡아 주시는 분이시니.

하나님을 믿고 그 위에 굳건히 서는 이를

그는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32(2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43. Und er kam und fand sie aber schlafend, und ihre Augen waren voll Schlaf's. 44. Und er ließ sie, und ging abermals hin und betete zum drittenmal, und redete dieselbigen Worte. 45. Da kam er zu seinen Jüngern und sprach zu ihnen:

43.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대사

예수

45. Ach! wollt ihr nun schlafen und ruhen! Siehe, die Stunde ist hier, daß des Menschen Sohn in der Sünder Hände überantwortet wird. 46. Stehet auf, lasset uns gehen; siehe, er ist da, der mich verrät.

45.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Wachet und betet/깨어 기도해다오!

 

예수는 기도를 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나아가사 같은 내용으로 또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이러기를 세 번 하셨는데 왜 그러셨을까 궁금합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정답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정답이 아닌 상황들을 먼저 추려내어 보면 어떨까요? 그러다 보면 예수께서 왜 그러셨는지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기도하는지 자는지 제자들을 감시하고 지적하기 위함은 아니셨을 것입니다. 선한 목자 예수께서 마치 야간 자율학습을 감사하는 당직 선생님처럼 행동하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다음은 보다 일반적인 해석인데, 바로 제자들의 영적 안일함을 일깨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는 기도의 능력을 덧입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예전의 저였다면 이것이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거니와 이와 같은 권위자들의 해석에 대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마태 수난곡을 통해 예수를 보다 가까이 알게 되었을 때 저는 예수의 마음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이런 해석 역시 틀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참 이기적인 것이, 그는 지금 고난의 수렁으로 던져지며 땀이 피처럼 흐르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그 순간에서 조차 우리는 예수를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는 분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지금 예수 앞에 놓인 십자가와 쓴 잔이 그가 감당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던가요.

 

예수의 마음

 

어제 현역 군인이신 권사님의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하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설교를 하신 부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어머니를 항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시고 희생하는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한 때 온 가족의 기쁨이 되는 아기였고, 꿈에 부풀어 올라 늘 설레 했던 십대 소녀였으며, 아름다운 사랑과 행복을 꿈꾸던 아가씨였으며, 곱게 차려입고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고 싶어 했던 중년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당연한 사실을 잘 모릅니다...” 평소 강직하기 그지없는 천상 군인이요 충성된 청지기의 모습으로만 보였던 권사님은 설교 후에 어머니의 관 위에 흙 한줌을 뿌리면서 ‘엄마’라고 부르며 어린 아이처럼 울먹이셨습니다. 그 모습에 저 또한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주시기만 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왜 그의 마음에는 그토록 관심이 없단 말입니까? 우리는 교리에 얽매여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만 붙드느라 ‘한 사람’ 나사렛 예수를 외면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우리는 이 물음을 신학적으로 분석하느라 단순하게 예수께서 사랑하는 베드로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서 물어 보셨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예수의 마음, 예수께서 지금 당하고 있는 고민과 슬픔, 그리고 십자가의 수난이 임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제자들의 영적 안일함을 일깨워 주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하는 기도의 능력을 덧입게 하려고 세 번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는 것 역시 가능성이 적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으로 좁혀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기도하는 도중에 제자들을 찾아 다시 오셨다고 말입니다.

 

완전한 사랑이신 예수

 

영적으로 무지했고 육신은 연약했지만 함께 한 제자들은 예수께서 깊이 사랑하신 사람들이었고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 앞에 놓인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동역자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기도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기도의 사람 예수는 그 누구보다 더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고난의 길에서 함께 해 주기를(Compassion)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기도는 가장 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소망’을 현실로 초대하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함께 하는 ‘사랑’입니다. 십자를 앞에 두고 예수는 너무나 외로우셨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할 것이 예수의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배신감 때문이 아니라 사랑의 단절 때문에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는 사랑이셨습니다. 완전히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주는 것도 사랑이요 받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완전한 사랑의 일부로서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은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두 번이나 찾아오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마지막 외침도 육신의 아픔에 의한 절규가 아니라 사랑하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향한 절규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셨음에도 완전한 사랑이셨던 그분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단절은 너무나도 큰 괴로움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사랑하는 이들이 가장 깊은 사랑의 대화인 기도의 방식으로 당신과 함께 해 주길 원하셨고 그래서 두 번 씩이나 제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사랑을 모릅니다. 너무나 모릅니다. 고난당하신 예수의 마음도 우린 너무나 모릅니다. 그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목숨 다해 사랑하셨고, 그래서 사랑 받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사랑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알 만큼 안다고,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여러분의 신앙은 멈추고 퇴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모든 사랑을 끌어들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와 함께 계십시오. 사랑한다고 속삭이십시오. 늘 예수와 연결되어 사십시오. 그것이 그의 고난과 함께하는 길, 그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함께 부르는 코랄

 

두 번째 기도가 끝나고 코랄이 울려 퍼집니다. 이 코랄은 바흐의 시대에 많이 불렸던 것으로 원곡의 텍스트 1절이 그대로 마태수난곡에 실렸습니다. 아마 모든 청중들이 함께 이 익숙한 코랄을 부르면서 겟세마네 기도의 깊은 의미를 감격적으로 되새겼을 것입니다. 이역만리 외국에서 함께 아리랑 부른다거나 독도에서 홀로아리랑을 부를 때처럼 같은 노래도 부르는 곳에 따라 느낌이 달라집니다. 아마 마태수난곡을 듣는 중에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에서 부르는 이 코랄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매우 특별한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 코랄은 루터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작곡가 클로뎅 드 세르미시(Claudin de Sermisy; 1490~1562)의 선율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이 곡이 루터교에서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곡의 찬송시를 쓴 알브레히트 공작 때문입니다.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 공작(Albrecht Herzog von Preußen, 1490-1568)은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었습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공식적으로 지지했으며 1525년 로마 가톨릭에서 루터교로 개종하였고 결국 루터교를 국교로 삼은 최초의 국가 군주가 되었습니다. 루터와 종교개혁의 수호자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루터교 신자들은 루터만큼이나 알브레히트 공작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가 쓴 찬송시를 코랄로 노래하면서 그를 기억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났고 루터교는 이제 독일 전역에서 뿌리를 내려 종교, 문화적인 황금기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흐라는 위대한 음악가가 그 전통 속에서 등장하였고 신앙의 선조들이 깔아 놓은 신앙적 문화적 토양 위에 서양 음악사의 가장 위대했던 순간들을 펼쳐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바로 마태수난곡이 놓여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코랄은 모든 청중들이 함께 불렀습니다. 그래서 저와 이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 모두 잠간 읽기를 멈추고 우리말로 코랄을 불러 보겠습니다. 최대한 내용을 살리되 음악과 어우러지고 라임을 맞춰 번역해 보았습니다. 자 이제 맨 처음 표에 있는 유튜브 링크로 들어가셔서 코랄이 시작할 때 함께 우리말로 불러 보시겠습니다. 코랄은 1분 40초부터 시작합니다.

 

 

어떠신가요? 아마 음반을 들으면서 직접 불러보신 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리히터 음반에서 소년들을 비롯한 모든 합창 단원들이 얼마나 깊은 감격과 정성과 열심으로 찬송을 부르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축구도 국가대표 경기를 TV로 볼 때는 그렇게 선수들을 욕하다가 막상 조기축구회서라도 직접 공을 차보면 국가대표급 선수라면 무조건 그 실력을 존중 아니, 존경해야 함을 깨닫게 되지요. 부디 여러분들의 예배 가운데서도 그렇게 힘차고 정성스러운 찬송가가 늘 울려 퍼지기를 원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여러분들에게 그런 마음이 드셨다면 성경과 따로 구분된 찬송가 한 권을 꼭 마련하시기를 권합니다. 성경과 합본된 찬송가는 무거워서라도 들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발성적으로나 마음가짐으로서나 찬송가는 손에 들고 목을 세운 자세로 가슴과 입을 활짝 열고 불러야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빛으로 찬송을 부를 수 있어야합니다. 구원의 감격과, 예배의 기쁨이 어린 눈빛,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예수와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들과 나의 생명과 나의 삶을 향한 ‘사랑의 눈빛’ 말입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43절입니다. 두 번째 기도를 마치고 다시 오셨는데 그들이 또다시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는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굳이 변명을 하지 않아도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셨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두시고 다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예수는 다시 오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을 바로 깨우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셔서 제자들을 깨우신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던 것 같습니다. 잠 잘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놓고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시진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앞으로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생각하시며 사랑과 애잔함과 슬픈 눈으로 잠들어 있는 세 제자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파울 들라로슈(1797-1856)作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종이에 연필)

 

 

얼마나 지났을까요? 비비적거리며 제자들이 하나둘씩 눈을 뜨고 일어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Ach! wollt ihr nun schlafen und ruhen!” 독일어를 아시는 분들은 눈치를 채셨겠지만 우리말 개역개정과 루터성경은 이 구절을 정 반대로 읽고 있습니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은 ‘이제는 자고 쉬라’로, 루터번역 독일어 성경은 ‘아! 너희가 지금 자고 싶고 쉬고 싶더냐!’로 번역했습니다. 작은 차이도 아니고 완전히 다른 뜻의 문장입니다. 이는 격변화로 인해 어순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헬라어의 특징과 여러 원문에 딸린 문장부호가 통일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성경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말 새번역과, 킹제임스 성경은 전자와 맥을 같이하고 있으며 공동번역과 NIV, NASB, CEV, MSG 등은 독일어 루터번역과 같은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체적인 문맥이나 바로 이어지는 46절에서 “일어나라”는 명령이 45절의 “자고 쉬라”는 명령과 모순됨을 들어 그들의 해석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굳이 저의 생각을 고집할 마음은 없습니다만, 성서학적인 해석이 아니라 마태수난곡을 통해 새로이 알게 되었고 지금가지 이 순례의 여정을 통해 함께 해 온 예수의 마음을 통해서 해석하자면, ‘이제는 자고 쉬라’가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

 

기도를 마치시고 다시 오신 예수는 안타까움과 사랑의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셨습니다. 이미 그의 기도는 끝났습니다. 그는 수없이 자신을 굴복시키는 기도와 하나님과 인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품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그의 기도와 그 마침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하나님과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 앞에서 그토록 몸부림 쳤던 것이지 결코 자신을 팔고 잡고 죽이려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담대하고 평안하게, 자고 쉬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맞이하고 계십니다.

 

또 하나, 인지상정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면 보통 ‘좀 더 자’라고 속삭이며 이불을 다시 덮어 줍니다. 저는 요즘 사랑하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지내고 있습니다. 365일 5시 새벽기도를 지키는 전통 있는 교회에서 사역하는데 기도 시간의 은혜가 너무나도 귀합니다. 월요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올라가 쉬는 날을 보내고 화요일 새벽 3시 30분에는 다시 교회로 출발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가족과 있고 싶고 고속도로 통행료를 절약하고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함이지요. 그 시간이 되면 맞벌이를 하는 아내가 피곤함을 무릅쓰고 알람을 맞추고 함께 일어나 저를 배웅합니다. 처음 몇 주를 그렇게 하다가 늘 잠이 모자란 아내를 깨우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해서 울리기가 무섭게 알람을 얼른 꺼 주고 조용히 나갑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기도할 때와 기도를 살아낼 때

 

이미 예수는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육신으로는 여전히 두려웠지만 영으로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셨습니다. 깨어 기도할 시간은 지금이 아니라 아까 함께 깨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실 때였습니다. 기도는 그런 것입니다. 기도를 간절히 해야 할 때가 있고 마음과 영으로 품어서 삶 가운데로 나갈 때가 있습니다. 기도가 끝났고 영접이 되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들고 다시금 기도를 마음에 녹여내어 삶으로 행동으로 의연하게 나아가야합니다.

 

 

모든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헬라어 원문에도 ‘이제는’라는 의미의 ‘로이폰’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제는(nun)’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함께 깨어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셨다면 ‘이제는’ ‘기도가 끝났으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의연함과 평안함 가운데 잠자고 쉬듯 십자가의 길, 인간 구원의 길로 나아가자’ 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를 통해 저는 루터나 공동번역의 번역보다는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을 지지합니다. 이는 물론 성서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한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루터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번역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마다 루터성경으로 본문을 비교하고 특히 공동번역 성경의 시가서 부분을 너무나 사랑하지요. 감히 훌륭한 성서학자들과 루터의 뜻을 반박하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지만 마태수난곡을 통해 알게 된 나의 예수는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지금 어떻게 말씀하고 계시느냐가 중요한 것이겠지요.

 

Stehet auf, lasset uns gehen! 일어나라, 함께 가자!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마 저 멀리 아래에서 횃불 여러 개가 줄지어, 마치 한 마리 커다란 뱀이 꿈틀대듯 올라오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십니다.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치 전쟁터에 선봉으로 서는 장수처럼 예수는 일어나 말씀하십니다. 이는 십자가와 구원의 길의 동행자요 증인으로서 제자들을 초청하신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나도 고단하여 지치고 쓰러질 때, 내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지켜 내기가 너무나도 버거울 때, 하나님과 인간을 향한 예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한 채 폄훼하고 죽이려하는 무리들의 행렬을 마주할 때, 예수의 이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Stehet auf, lasset uns ge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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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잔을 받겠나이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16)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16 기꺼이 잔을 받겠나이다

 

마태수난곡 1부 27번~29번

마태복음 26:39

음악듣기 : https://youtu.be/ulO8S1ZrMcU

27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9. Und ging hin ein wenig, fiel nieder auf sein Angesicht, und betete und sprach: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대:

27

대사

예수

39. Mein Vater, ist's möglich, so gehe dieser Kelch von mir; doch nicht wie ich will, sondern wie du willst.

39.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28

코멘트

베이스

레치타티보

Der Heiland fällt vor seinem Vater nieder.

Dadurch erhebt er mich und alle

Von unserm Falle

Hinauf zu Gottes Gnade wieder.

Er ist bereit,

Den Kelch, des Todes Bitterkeit

Zu trinken.

In welchen Sünden dieser Welt

Gegossen sind und häßlich stinken,

Weil es dem lieben Gott gefällt.

구주께서 아버지 앞에 엎드리심으로

나와 모든 사람들을 세워 올려주시네

죄에 넘어진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 세워주시네

그는 이제, 그 잔을,

죽음의 쓰디쓴 잔을 마시려 하시네.

그 잔에는 세상의 온갖 죄악이 그득하고

악취를 내뿜고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기에.

29

기도

베이스

아리아

Gerne will ich mich bequemen

Kreuz und Becher anzunehmen.

Trink ich doch dem Heiland nach.

Denn sein Mund,

Der mit Milch und Honig fließet

Hat den Grund

Und des Leidens herbe Schmach

Durch den ersten Trunk versüßet.

기꺼이 나는 순종하여

십자가와 잔을 받으리라.

주님을 따라서 나도 마시리라.

그의 입이 닿아

젖과 꿀이 흐르는 잔이 되었기에

고난과 쓰디쓴 치욕의 잔이

그의 들이킴으로 인해

달콤하게 되었다네.

 

 

기꺼이 잔을 받겠나이다

 

예수 수난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겟세마네의 기도 장면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의 겟세마네 기도문은 마치 원래 그 기도가 부드럽고 강한 이 음악에 얹혀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성경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도이기에 이 부분 만큼은 예수의 음성에 실린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들어 보면 좋겠습니다. 아직 독일어 실력이 부족할 때 독일가곡을 공부하며 썼던 방법인데 여러분도 이 방법을 통해 만나보시면 보면 더욱 깊은 감동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흐 또한 마태수난곡을 작곡함에 있어 문장 전체를 음악으로 옮기기 보다는 단어 하나하나에 음악을 덧입히는 방식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단어 하나하나를 따로 번역하고 그 조합은 해석자에게 맡기는 'Word by Word'의 방식으로 해석할 때 더 깊이 있게 마태 수난곡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데 고야 作 ‘감람산의 그리스도’(1819)

 

Mein(나의) Vater,(아버지여) ist's(그것이) möglich(가능하다면), so(그렇게) gehe(가다<명령>) dieser(지시대명사 '이') Kelch(잔을) von(~로 부터 )mir;(나)

doch(그러나) nicht(not) wie (like ) ich(내가) will, (원하다) sondern(대신에) wie(like) du(당신이) willst(원하다, 2인칭).

 

나의 아버지여,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이 잔을 나로부터 떠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옵소서.

 

쓰러지신 예수

 

쓰러지듯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는 예수의 모습은 베이스 서창의 오케스트라 반주로 표현되고 있는데 바이올린과 비올라 파트는 철퍼덕 쓰러지는 것과 같은 악상을 이 곡이 끝날 때까지 반복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의 예수는 끝까지 쉬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쓰러뜨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28번곡의 시작 부분. 맨 위로부터 세 번째 줄까지가 현악파트인데 예수께서 기도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쓰러트리고 있음을 지속해서 표현하고 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는 지금 얼굴이 땅에 닿아 있어 몸이 더 이상 낮춰지지 않게 보일 뿐 이 노래의 반주처럼 그의 마음과 뜻을 하염없이 내려놓으며 스스로 쓰러뜨려지기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연주에서 지휘자들은 작곡가의 의도가 너무나도 명확하게 드러나 보이는 이 부분을 매우 강렬한 활 긋기와 빠른 템포를 사용하여 매우 드라마틱하게 표현합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표현에 강한 칼 리히터는 유독 이 부분을 사뭇 부드럽고 깊이 있게 터치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의 표면적인 면만 부각시켜 격정적으로 그려내기 보다는 이 부분을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영적 에너지 사이의 긴장 상태로, 피 말리는 영적 샅바싸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 또한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이렇게 기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태수난곡을 통해 알게 된, 내가 아는 예수는 그렇게 기도하셨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 기도가 외적으로 그렇게 강렬했다면 돌맹이 하나 던질 수 있는 지척의 거리에 있는 제자들이 아무리 피곤하다한들 그렇게 단잠을 잘 수는 없었겠지요.

 

반면,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가만히 있다가도 시작 신호만 나면 어떤 고양됨의 과정도 없이 엄청난 소리를 질러가며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는 교회를 더 뜨겁고 살아 있는 교회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기도가 끝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평범한 상태로 돌아갑니다. 부르짖는 기도, 뜨거운 기도 모두 좋습니다. 모두 필요합니다. 특히 요즘, 저도 그런 기도를 자주합니다. 그러나 어떤 고양됨의 과정도, 어떤 갈무리의 과정도 없는 외적으로만 뜨거운 기도는 진정 강렬한 기도가 아니라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은 집단적이고 감정적인 히스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겟사마네기도 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는 기도가 아니라 무언가를 더 얻어내기만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뜻에 하나님을 가져다 붙이며 자기의 뜻을 관철해 내려는 기도는 예수께서 몸소 가르치신 기도와 전혀 상관없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

 

레치타티보의 가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베이스 솔로는 예수의 엎드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 일으킴 받았다고 노래합니다. 바로크 시대는 렘브란트의 그림의 빛과 어둠처럼 ‘대조의 미학’이 지배했던 시대입니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로 크레센도와 디미누엔도는 존재조차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며 오케스트라에서 독주 파트그룹(리피에노/Ripieno)과 전체합주(뚜띠/Tutti)가 늘 구분되어 있어 점점 커지거나 작아지는 효과 대신 갑자기 작아지고 갑자기 커지는 표현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서 마태수난곡의 대본 곳곳에는 ‘엎드리심으로 높이 신다’, ‘그가 쓴 잔을 마심으로 우리가 단 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시간의 내용 중에서 ‘예수께서 깨어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쉼을 누린다’ 등의 대조적인 문학기법이 자주 쓰이고 있습니다.

 

Der Heiland fällt vor seinem Vater nieder.

Dadurch erhebt er mich und alle

Von unserm Falle hinauf zu Gottes Gnade wieder.

구주께서 아버지 앞에 엎드리심으로

나와 모든 사람들을 세워 올려주시네

죄에 쓰러진 우리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금 세워주시네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기도의 가운데에는 죄악에 쓰러져버린 우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예수는 우리 인간의 운명을 놓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가사 내용 그대로 예수는 죄악에 쓰러진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를 향해 다시 세워주시기 위해 자신을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베이스는 계속해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영적으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Er ist bereit, den Kelch, des Todes Bitterkeit zu trinken.

In welchen Sünden dieser Welt Gegossen sind und häßlich stinken,

그는 이제, 그 잔을, 죽음의 쓰디쓴 잔을 마시려 하시네.

세상의 온갖 죄악이 그득하고 악취를 내뿜고 있는 그 잔을.

 

그가 마셔야 할 잔은 죽음의 쓰디쓴 잔이었고 세상의 죄악으로 가득한 악취가 나는 잔이었지만 예수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 앞에 엎드림과 스스로를 쓰러뜨림으로 순종합니다. 그 이유를 이 서창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해 줍니다.

 

Weil es dem lieben Gott gefällt

그것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이기에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간편하게 생각합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이 39절에서 ‘나의 원’, ‘아버지의 원’ 대신에 ‘나의 뜻’, ‘하나님의 뜻’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교리는 매우 중요하지만 때로는 우리의 신앙을 건조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원함’과 ‘뜻함’사이에는 사뭇 큰 차이가 있습니다. ‘뜻함’이 ‘원함’보다 더 강하고 경직된 표현입니다. ‘뜻함’은 이미 정해진 느낌이 드는 반면 ‘원함’에는 우리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마태수난곡에 쓰인 루터 번역 성경은 의도적으로 ‘뜻함’이라는 표현을 피했습니다.

 

‘Gottes Willen'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해당하는 관용적 표현이 있음에도 루터는 ‘하나님의 원하심대로/Wie du willst' 혹은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Dem Gott gefallen'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 없으며 반대로 ‘하나님의 뜻’만큼 쉽게 아는 것처럼 여기며 오용되는 것 또한 없습니다. 루터가 그러했듯이 하나님께 가까운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 않습니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는 방법이 되기도 하지요. 한국 정치에서 ‘종북’프레임을 씌우면 모든 정치적 논쟁이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듯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카드를 내밀게 되면 모든 신앙적 프로세스가 정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계적인 정답을 내어 놓기 전에 그 앞에 놓인 ‘lieben/사랑하는’ 이라는 표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표현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공식대로, 우리가 믿는 교리대로 이루어 진 일이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그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며 우리를 사랑했기에 그토록 고민했던 것이지 무조건 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하나님의 뜻’ 운운하는 사람 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있거나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바로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이 십자가의 잔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명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 안에서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통해 펼쳐지는 것입니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이어지는 베이스 아리아는 예수처럼 십자가와 잔을 기꺼이 받겠다는 다짐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58년 칼리히터 음반에서는 베이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고 있습니다. 디스카우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성악가로서 레퍼토리가 무궁무진해서 현존하는 거의 모든 독일 가곡을 녹음으로 남겼는데 그의 음반은 지금까지도 독일가곡 연주의 경전으로 여겨집니다. 그는 가사의 문학적 해석과 성악적 표현의 거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가가 그러하듯이 그에게도 역시 죽음의 경험이 진지한 음악가의 삶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그는 전쟁 포로로서 2차 대전의 참상을 몸소 겪으며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이 음반을 녹음할 때 서른세 살, 즉 수난곡의 예수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누군가가 마태 수난곡을 일컬어 ‘제 5복음서’라고 이야기 했는데 서른 세 살의 디스카우가 참여한 이 음반은 ‘가장 아름답게 번역된 제5복음서’로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Dietrich Fischer-Dieskau (1925~2012)

 

겟세마네에서 우리의 기도로

 

레치타티보에 이어지는 베이스의 아리아는 마태수난곡의 내용분류상 ‘기도’에 속합니다. 마태수난곡의 내용 분류는 이 연재 글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 아리아는 ‘기도’로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를 바라본 한 신앙인의 영적인 결단을 노래하고 있지요.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Gerne will ich mich bequemen

Kreuz und Becher anzunehmen.

기꺼이 나는 순종하여

십자가와 잔을 받으리라.

 

독일어 ‘'sich(mich) bequemen’은 ‘순종(순응)하다’와 ‘편히 쉬다’의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가 다 포함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즉,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할 때(마태복음 16:24) 오히려 그 십자가와 잔이 우리로 하여금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그 잔이 지나가도록(gehen) 간구했지만 우리는 그의 십자가 승리로 인하여 그 잔을 받아들겠노라(annehmen)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와 쓴 잔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잔은 예수의 거룩하신 입술이 닿은 잔이며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달콤하게 되었기에 더 이상 쓴잔이 아닙니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를 귀하게 여긴다면 우리 또한 우리의 십자가와 잔을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이며 우리가 받아 들이켜야 할 쓴 잔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십자가와 잔을 분별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모른채 하느냐 아니면 진지하게 그 앞에서 기도하느냐 일 것입니다. 우리가 때마다 우리의 십자가와 잔을 받아들이며 예수를 따를 때 그 때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시는(Dem Gott gefallen)때요 ‘하나님의 뜻’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오늘도 새롭게 펼쳐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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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수 곁에 깨어 있겠습니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15)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5 나의 예수 곁에 깨어 있겠습니다

 

마태 수난곡 1부 25번~26번

음악듣기 : https://youtu.be/l9ko3aqSusg

코멘트

&

코멘트

19(25)

테너 레치타티보

&

코랄

SOLO

O Schmerz!

Hier zittert das gequälte Herz!

Wie sinkt es hin, wie bleich sein Angesicht!

 

CHORAL

Was ist die Ursach' aller solcher Plagen!

 

SOLO

Der Richter führt ihn vor Gericht,

da ist kein Trost, kein Helfer nicht.

 

CHORAL

Ach, meine Sünden haben dich geschlagen!

 

SOLO

Er leidet alle Höllenqualen,

Er soll vür fremden Raub bezahlen.

 

CHORAL

Ich, ach Herr Jesu, habe dies verschuldet,

Was du erduldet!

 

SOLO

Ach! könnte meine Liebe dir,

Mein Heil dein Zittern und dein Zagen

Vermindern oder helfen tragen,

Wie gerne blieb' ich hier!

 

솔로

오 그 고통이여!

괴로움에 떨고 있는 당신의 마음!

쓰러져 버린 당신, 창백해진 당신의 얼굴!

 

코랄

그 모든 괴로움은 무엇 때문입니까?

 

솔로

심판자가 그를 법정으로 끌고 가네.

아무 위로도 없고 돕는 자 아무도 없네.

 

코랄

아! 그것은 나의 죄, 내 죄가 당신을 매질했습니다.

 

솔로

그 홀로 외로이 지옥의 모든 고통을 견디시니

이 이름 모를 강도 위해 죄 값을 치루고 계십니다.

 

코랄

오! 주 예수여, 당신이 짊어지신 그 고통,

나의 죄 때문입니다.

 

솔로

아아! 나의 구원이여, 만일 나의 사랑이

당신의 떨림과 두려움을 사그라들게 할 수 있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기꺼이,

기꺼이 여기에 머무르겠나이다.

기도

&

코멘트

20(26)

테너 아리아

&

합창

SOLO

Ich will bei meinem Jesu wachen

 

CHOR

So schlafen unsre Sünden ein

 

SOLO

Meinen Tod büßet seiner Seelen Not

Sein Trauren machet mich voll Freuden.

 

CHOR

Drum muß uns sein verdienstlich Leiden

recht bitter und doch süße sein.

솔로

나의 예수 곁에 깨어있겠습니다.

 

합창

그리하면 우리 죄가 잠들어 버릴 것이라네.

 

솔로

예수의 마음의 괴로움이 나의 죽음을 대신하고

예수의 슬픔으로 인해 내게 기쁨이 채워집니다.

 

합창

그러므로 그의 수난의 공로가

우리의 슬픔과 동시에 기쁨이 되어줍니다.

 

 

겟세마네로

 

지난 시간에 만나 보았던 마지막 부분은 예수의 대사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부터 현악 모든 파트가 8분 음표 연음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이 8분 음표 연음들은 고민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요동치기 시작하는 예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만나게 될 테너의 레치타티보 ‘O schmerz!/오 그 고통이여!’로 이어지면서 8분 음표 연음은 ‘둥둥둥둥’과 같은 소리로 16분 음표로 바뀌어 두 배 의 속도로 빨라집니다. 우리도 모르게 점점 격하게 박동하는 심장소리처럼 이 리듬들은 그렇게 우리 모두를 주님의 고민과 슬픔으로, 겟세마네의 기도로 끌어들입니다.

 

마태 수난곡과의 첫 만남

 

겟세마네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신 예수의 모습에 이어지는 테너 레치타티보&아리아와 코랄은 마태수난곡의 명곡 중 하나입니다. 또한 저와 마태수난곡을 처음 만나게 해 주었던 매우 의미 깊은 곡입니다. 음대 성악과 학부시절 2학년 즈음에 선택과목으로 종교가곡을 수강했습니다. 원래 목회자의 길을 꿈꾸던 사람이 음악대학에 입학한 후 신앙과 삶과 노래의 완벽한 조화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어느덧 조화가 아닌 그 세 가지의 화해를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발버둥의 일환으로 연습실만큼이나 중앙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종교학과 수업이나 종교가곡 등 특이한 수업을 수강했었습니다. 특히 종교학과에서 개설된 수업에서는 저의 신앙이 낱낱이 해부되는, 당시로서는 매우 끔찍한 경험을 하기도 했지요.

 

그런 와중에 이 곡이 종교가곡 수업 시간에 저의 과제 곡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바흐 그리고 마태수난곡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구레네 시몬처럼 말입니다. 당시 음대에서는 화려한 오페라 아리아나 선율이 유려한 가곡이 성악과 내에서 유행가처럼 불리어졌고 상대적으로 난해하고 엄숙하며 가사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부르기 힘든 바흐의 음악에 관심을 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 낯선 과제곡이 불만이었지만 이 노래를 연습하면 할수록 묘한 이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마태수난곡 전곡 악보를 구했고 전곡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훨씬 나중이 되었지만 바흐와 마태수난곡은 신앙과 삶과 음악이 본디 하나였음을 저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아무튼 그 뒤로부터 지금까지 그 인연이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 그 고통이여

 

레치타티보의 반주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저음부의 현악파트는 전점 빠르게 고동치는 예수의 마음, 그리고 그 기도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주의 상성부를 들어 보시면 목관악기 소리를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기 2개의 플롯과 오보에들이 내는 스산하고 불편한 화음은 긴장과 떨림이 응축된 겟세마네의 새벽 공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이 곡의 성악파트는 특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테너 솔로와 합창이 번갈아 나옵니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파트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겟세마네의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예수입니다. 테너 솔로는 보다 가까이에서 그 기도를 바라보며 감성적으로 동참하고 있고 합창은 그 뒤에서 그 둘을 바라보며 추임새를 넣고 있습니다. 테너 솔로가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에 대한 코멘트라면 합창은 이 코멘트에 대한 또 한 번의 코멘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세 명의 제자들은 예수의 괴로움을 모른 채 곁에서 잠들었지만 테너 솔로는 최대한 그의 곁에서 그의 괴로움과 슬픔을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 때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습니다. 마음으로 아파하고 회개하고 안타까워 할 뿐이지요.

 

테너의 노래 사이사이에는 코랄합창이 ‘그 모든 괴로움은 무엇 때문입니까?-그 것은 나의 죄 때문입니다.-나의 죄가 당신을 매질했습니다.’라고 세 번에 걸쳐 코멘트를 하고 있습니다. 장면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앙적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테너는 ‘기꺼이’라는 의미의 ‘gerne/게르네'를 세 번 반복하면서 이제는 졸지 않고 예수 곁에 머무르겠노라고 다짐함으로 레치타티보를 마무리 합니다.

 

 

 

독일 엘트빌레(Eltville) 성 페터와 파울 교회의 외부 조각

 

나의 예수 곁에 깨어 있겠습니다

 

레치타티보에 이어 애절한 음색의 오보에 솔로와 함께 테너 아리아가 시작합니다. 오보에의 노래는 테너 아리아의 주위를 맴돌며 그의 기도에 공감하고 동참하고 위로하는 한 마리 검은 나비의 윤무와도 같아 보입니다.

 

아리아의 내용은 ‘나는 나의 예수 곁에 깨어 있겠습니다/Ich will bei meinem Jesu wachen’라는 기도와 다짐의 노래입니다. 테너 노래의 사이에서 들리는 합창은 ‘그리하면 우리의 죄는 잠들어 버릴 것이네/So schlafen unsre Sünden ein’라고 대답합니다. 테너 솔로는 깨어 있겠노라고 노래하는데 합창의 선율은 마치 자장가와 같이 들립니다. ‘예수 곁에 깨어 있을 때 우리의 죄가 잠들게 된다’는 역설적 메시지입니다. 바흐와 피칸더의 신앙적, 문학적 구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 아리아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은 ‘Sein Trauren machet mich voll Freuden/예수의 슬픔으로 인해 나에게 기쁨이 채워집니다.’라고 노래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슬픔을 뜻하는 ‘Trauren’과 기쁨을 뜻하는 ‘Freuden’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바흐는 이 가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Trauren’은 고음으로 짧고 굵게 처리한 반면 ‘Freuden’은 활발하게 움직이는 악절을 사용해서 그 의미를 음악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Trauren/슬픔’을 표현한 부분

 

         ‘Freuden/기쁨’을 표현한 부분

 

 

예수께서 첫 번째 베푸신 기적이 갈릴리 가나에서 망쳐질 수밖에 없었던 혼인 잔치를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이었는데 그는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의 슬픔을 겪으심으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켜 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 아픔과 그 사랑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잠이 옵니다. 그처럼 교회에서 값싼 은혜가 남발되는 동안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인 양 무감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한복음 13:1)

 

그는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통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에 깊이 머무르며 늘 깨어서 그의 곁에서 그의 마음과 함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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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 음악듣기https://youtu.be/R-AEzm3v630

    JINOJO 2020.03.05 09:47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4 겟세마네

 

마태 수난곡 1부 24번

마태복음 26:36~38

음악듣기 : https://youtu.be/R-AEzm3v630

내러티브

18(24)

에반겔리스트

36. Da kam Jesus mit ihnen zu einem Hofe, der hieß Gethsemane, und sprach zu seinen Jüngern:

36.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사

예수

Setzet euch hier, bis daß ich dorthin gehe und bete.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7. Und nahm zu sich Petrum und die zween Söhne Zebedäi,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 38. Da sprach Jesus zu ihnen:

37.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이에 말씀하시되

대사

예수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 bleibet hie, und wachet mit mir.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겟세마네와 아인잠카이트(Einsamkeit)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렀습니다. 특별한 날 특별한 목적으로 그곳에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머무르실 때면 습관처럼 매일 밤 그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누가복음 22:39)

 

왜 예수께서는 그곳을 그렇게 자주 찾아가셨을까요?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무가 우거지고 조용한 그 곳을 좋아하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라는 강렬한 사건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열광주의적 선입관 때문에 우리는 예수께서 매일 그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뜨거운 철야 산기도를 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겟세마네는 예수께 있어 쉼과 평화와 고요함의 장소였습니다. 복음서, 특히 예수 수난 이야기는 사건의 나열입니다. 예수의 말씀과 성경의 기록을 통해 사건과 사건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그 사이의 일상을 읽을 수 있어야 우리는 예수를 제대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누가복음 21:37)

 

반면, 우리들의 교회와 우리들의 삶에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위기 상황에는 목 놓아 부르짖어야 하고 영적 전쟁과도 같은 신앙 여정에서 긴장과 간절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 안에서 세상의 그 무엇도 침해 할 수 없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매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프로그램이 가득하고 우리는 저마다 맡은 일들과 인간관계와 표정관리로 분주합니다. 예배 중에도 말이 끊기거나 소리가 끊기면 불안함을 느낍니다. 통성기도, 방언기도만 제대로 된 기도처럼 느껴지고 기도를 할 때도 음악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언제든지 울부짖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울부짖는 기도가 끝나자마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대로 돌아갑니다. 고조됨과 여운이 없는 이러한 기도가 진정한 기도인지, 집단적 히스테리인지, 혹은 우리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만나는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세상의 모든 기도 중에서 가장 깊이 있고 가장 강렬한 기도였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3~44)

 

하지만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마태복음 26장 시작부터 준비되어 그 여운이 십자가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는 강렬한 기도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리 내어 외치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소리를 치시며 기도했다면 지척에 있던 세 제자들이 단잠에 빠져들 수 없었겠지요. 예수께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부르짖는 기도, 성대가 아닌 마음을 찢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홀로 기도하셨고 그러한 기도의 모범을 보이심으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쉼과 평화와 고요함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조됨과 여운이 있는 깊이 있고 강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을 얼마만큼 누리고 있을까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주일은 가장 피곤하고 가장 분주한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뜩이나 피곤하고 분주한 삶 속에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그렇게 우리와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매일 밤 누리셨듯이 우리의 신앙과 삶의 바탕이 되는 도화지는 쉼과 평화와 고요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신뢰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그러므로 쉼과 평화와 고요함은 또 다른 강렬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소리들이 모여 음악이 되었다고 쉽게 생각하고 소리가 크거나 많을수록 멋진 음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리의 바탕은 침묵입니다. 음표가 없는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쉼표가 있어야 할 곳에 쉼표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우리는 음악을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심연의 고독과 연결되지 않고는 음악의 깊은 맛을 누릴 수 없습니다. 소리로서의 음악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이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연주자와 작곡자가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아무리 화려한 연주라 하더라도 그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홀로 고민하고 연습한 연주자의 고독과 투쟁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독일어 ‘Einsamkeit/아인잠카이트’는 ‘고독’이라고 번역하기에는 그 충만함과 지금 머물고 있는 배경이 소외되기에 부족하고, 누군가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홀로됨’이나 ‘외로움’이라고 번역하기도 어려운 묘한 단어입니다. ‘숲, 바다, 공간, 우주, 하나님의 품 등 커다란 실존 안에서 먼지만큼 작은 나를 발견하고 그런 나를 충만하게 느끼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인잠카이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셨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깊은 ‘아인잠카이트’를 누리셨습니다.

 

바흐의 음악도 그 바탕에는 침묵과 아인잠카이트가 서려 있습니다. 일전에도 마태수난곡의 곡과 곡사이의 침묵의 미학에 대해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언어가 없는 기악곡에서 ‘침묵의 소리’를 더 가까이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연주한 평균율 1권을 들어보시면 이 음악의 바탕이 차라리 우주의 침묵이며, 울려 퍼지는 소리는 바흐와 연주자의 대화요, 듣는 우리를 포함하여 이 음악과 연결된 모두가 ‘아인잠카이트’에 깊이 빠져들게 됨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youtu.be/Dkt75juxvxw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산에 오르는 또 다른 이유는 먼 곳을 바라보기 위함이기도 하지요. 예수께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사랑하셨고 감람산에서 조용히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제자들도 그분의 조용함에 압도 되어 ‘조용히’ 예수께 물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감람 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마가복음 13:3)

 

예수께서는 때로, 감람산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슬퍼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누가복음 13:34)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아직 예루살렘에 가 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예루살렘에 가게 된다면 감람산 올리브나무 우거진 동산에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있고 싶습니다. 평화롭게 쉬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마 그곳에서는 그 어떤 종교적인 것도 사족이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그가 쉼을 누렸던 그 곳에서 그와 함께이고 싶습니다.

 

                                            겟세마네, Walter Mittelholzer, 1934년

 

고민하고 슬퍼하신 예수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세베데의 두 아들인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나아가셨을 때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왜 다른 제자들은 앉아 기다리라고 하시고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을까요? 아마 예수께서는 최대한 자신이 당하실 고난을 숨기시고 홀로 감당하려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홀로 지고 가시기에는 십자가는 너무나도 큰 무게였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기에 위로가 필요했고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변화산 사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 등 보다 깊은 것을 나누었던 세 명의 제자들을 대동하셨습니다.

 

마태수난곡의 대본에 쓰인 루터 성경은 이 부분을 'und fing an zu trauern und zu zagen/고민하고 슬퍼하시기를 시작하셨다’라고 번역했는데 이 번역이 원문(에르사토/ἤρξατο/시작하다)에 더 가깝고 그렇게 읽을 때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가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앞에서는 간신히 참고 있었지만 한적한 곳에서 홀로 되어 기도하려니 고민과 슬픔이 엄습하듯 다가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된 상태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한 인성을 지녔던 예수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아야 하는 십자가는 고민과 슬픔이었습니다. 또한 완전한 하나님으로써 그의 유일한 연약함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되어 십자가에서 겪어야 할 완전한 외로움은 예수의 고민이었고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십자가의 순간이 다가오고 막상 홀로됨이 시작하게 되자 고민과 슬픔이 갑작스레 밀려오고 있습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구절은 베드로의 배신 장면과 함께 에반겔리스트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고민하고 슬퍼하다’라는 뜻의 ‘zu trauern und zu zagen'을 어떻게 노래하는지 유심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음악적으로 ’trauern‘은 고민과 슬픔의 감정을 쏟아 놓는 표현으로 ’zagen'은 그 감정을 다시금 누르고 참아내는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토록 애절하게 작곡한 바흐도 놀랍지만 그 오선지를 소리로 펼쳐낸 에반겔리스트의 노래는 임방울의 ’쑥대머리 구신형공‘에 비견될 서양 성악 예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듣고 계신 음반의 에른스트 해플리거는 마태 수난곡 녹음 역사상 최고의 에반겔리스트이며 제가 이 음반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합니다.

 

우리는 복음서의 내러티브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만, 마태 수난곡을 듣게 되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무성영화에서의 변사처럼, 판소리에서의 아니리처럼 에반겔리스트는 이 이야기의 흐름을 쥐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석하고 깨달으려는 의도를 내려놓고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에반겔리스트의 아니리’에 마음을 맡길 때 우리는 이야기에 빠져 들며 예수의 수난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장면에서 두 번 등장하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앞선 대사에서는 마지막 단어 ‘bete’에 주목해야합니다. 이 단어는 ‘기도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beten/베텐’의 2인칭 복수 명령형으로 ‘(너희는)기도하라’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가사로 표현되는 순간 모든 악기들은 엄숙하고 간절한 느낌으로 기도를 함께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사는 반주가 보다 적극적으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Meine Seele ist betrübt bis an den Tod/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시는 부분부터 현악 모든 파트가 8분 음표 연음을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이 8분 음표 연음들은 고민하고 슬퍼하는 가운데 요동치기 시작하는 예수의 마음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 만나게 될 테너의 레치타티보 ‘O schmerz!/오 그 고통이여!’로 이어지면서 8분 음표 연음은 16분 음표로 바뀌어 두 배 의 속도로 빨라집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를 주님의 고민과 슬픔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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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웃지 마소서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3)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3 나를 비웃지 마소서

 

마태수난곡 1부 22번~23번

마태복음 26:33~37

http://음악듣기 : https://youtu.be/i-1X8zrka8o

내러티브

16(22)

에반겔리스트

33. Petrus aber antwortete und sprach zu ihm: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대사

베드로

Wenn sie auch alle sich an dir ärgerten, so will ich doch mich nimmermehr ärgern.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4. Jesus sprach zu ihm: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대사

예수

Wahrlich, ich sage dir: In dieser Nacht, ehe der Hahn krähet,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35. Petrus sprach zu ihm:

35. 베드로가 이르되:

대사

베드로

Und wenn ich mit dir sterben müßte, so will ich dich nicht verleugnen.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Desgleichen sagten auch alle Jünger.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기도

17(23)

코랄

Ich will hier bei dir stehen,

Verachte mich doch nicht!

Von dir will ich nicht gehen,

Wenn dir dein Herze bricht.

Wann dein Herz wird erblassen

Im letzten Todesstoß,

Als dann will ich dich fassen

In meinen Arm und Schoß.

나 여기 당신 곁에 서 있습니다.

주여 나를 비웃지 마소서.

당신 곁을 결코 떠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산산이 부수어질 때,

마지막 죽음의 고통이 당신을 엄습할 때,

나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내 팔에, 내 품에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는 예수의 말씀에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항변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네가(du)’ ‘오늘 밤(In dieser Nacht)’, ‘닭이 울기 전(ehe der Hahn krähet)’, ‘세 번(dreimal)’, ‘부인하리라(wirst verleugnen)’ 라는 구체적인 표현을 쓰시며 베드로가 자신을 버릴 것을 다시금 확인시키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두 가지 상반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마주 보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토록 분명한 표현으로 베드로의 부인을 미리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를 부인 한 후 베드로는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의 행위를 변명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역시 예수를 따르지 못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의 뜻을 저버리게 될 때 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처럼, 우리는 말로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스스로를 꽤나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예수를 팔고, 예수를 잡아들이고,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죽인 사람들을 우리와 거리가 먼 사람들로 여기고 우습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연약함 그리고 절망적인 죄인인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이와 상반된 다른 이유는, 그렇게 생기게 된 자신을 향한 절망에 함몰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그가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과 앞서 유다에게 그가 팔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특별한 예언의 능력을 선보이려 하심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에 대한 절망과 죄책감과 후회에 함몰되지 않고 회개하고 다시 일어서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있단다. 나는 괜찮단다. 내가 다 이해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의 연약함을 함께 감당할테니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구나.’라는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고 유다는 결국 죄에 함몰되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

 

리히터의 58년 음반에서 베드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막스 프룁스톨입니다. 생각 보다 몸이 앞서고, 몸 보다 마음이 앞선 사람 베드로, 갈릴리 어부 출신의 거친 사람 베드로를 잘 표현하는 목소리입니다. 마태수난곡 모든 음반을 통 털어 가장 인상 깊은 베드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태수난곡에서는 대부분 한명의 베이스 가수가 유다와 베드로, 빌라도와 대제사장 역할을 도맡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마다 한 두 마디 대사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가수가 여러 배역을 맡는 것은 오페라처럼 의상이나 분장이 필요 없는 수난곡이나 오라토리오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간혹 합창단원 중에서 한 사람씩 맡기도 하지만 수난의 이야기에서 이들은 결코 작은 배역들이 아니기에 실력 있는 솔리스트를 한 사람 세우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한 사람의 가수일지라도 배역마다 다르게 부르려고 노력하겠지만 유다나 베드로, 빌라도나 대제사장 한 가지 역할에 특화 될 수밖에 없겠지요. 막스 프룁스톨은 베드로에 특화된 가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유다의 경우에서 프룁스톨의 목소리가 비열하고 똑똑한 사람 유다를 표현하기에는 조금 아쉽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지휘자 칼 리히터는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의 수난 이야기와 마태수난곡에서 베드로의 중요성을 생각했을 때, 탁월한 선택이 아닐까 싶습니다. 2부에서 만나게 될 베드로의 부인 장면에서 세 번째에 이르러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Ich kenne des Menschen nicht.”라고 지쳐버린 채 오열하듯 말하는 장면은 압권입니다.

 

    외젠 뷔르낭, 부활의 아침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1898)

 

십 오 년 전 파리 오르셰 미술관을 찾아 간 것은 순전히 이 그림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길을 헤매다 늦어서 결국 못 보게 될 것을 알면서도 찾아갔었는데 그날이 마침 단 하루 야간 개관을 하는 날이었었지요. 반 고흐의 유명한 작품도 많았지만 마치 운명의 작품을 마주한 떨림으로 이 그림 앞에 홀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참으로 많지만 오늘은 베드로의 얼굴만 바라보겠습니다. 리히터 음반의 막스 프룁스톨의 목소리와 외젠 뷔리낭의 그림 속 베드로의 얼굴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만약 뭔가 어울리지 않음이 느껴지신다면 아마 그것은 그림 속의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 한 후 자기 자신에 철저히 절망하고 십자가 사건을 겪은 후의 얼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예수

 

다시 예수를 바라봅시다. 베드로로 시작하여 모두가 하나 같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을 때 예수는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다시 한 번 빼도 박도 못할 예언을 하심으로 제자들을 끝까지 몰고 가셨을까요?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는 이 이야기가 제자들의 마지막 말에서 뚝 끊겨 버립니다. 저는 이 끊김이 예수의 침묵, 예수의 받아들임으로 들립니다.

 

예수께서는 다 알고 계셨지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말과 그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달리 제자들을 비웃지 않으셨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씀 없이 그들의 마음을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행동과 결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마음과 의도를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제자들을 비웃지 마십시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니, 우리는 제자들 보다 더 비웃음을 받아 마땅합니다. 제자들을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우리는 예수 수난의 의미와 십자가의 승리와 부활의 신비를 안다고 하면서도 삶의 곳곳에서 예수를, 그의 뜻과 그의 길을 배신하며 사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도 비웃지 않으시고 그 분을 향한 우리의 작은 마음도 다 받아 주십니다.

 

‘내가 너희의 모든 연약함을 알고 있단다. 나는 괜찮단다. 내가 다 이해하고 있단다. 내가 너희의 연약함을 함께 감당할테니 나와 함께 다시 시작하자꾸나!’

 

그 음성을 들은 우리는 이 장면에 이어지는 코랄을 우리말로 함께 부르며 진지하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도망하지 않겠습니다.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주님의 고통이 있는 곳에서, 당신 곁에서 당신을 껴안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난과 슬픔이 있는 곳에 당신이 계시니 그곳에서 저도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나 주님 곁에 서니

날 받아 주-소서

나 주와 함께 하며

그 아픔 함께하리

주님의 깨진 마음

주님의 찢긴 몸

나 주-와 함께 하며

내 품에 안으리.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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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목자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2)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2 사랑의 목자 예수

 

유월절 성찬을 마친 예수와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성경에는 감람산으로 나아갔다로 쓰여 있지만 마태 수난곡은 이 구절에 공간감과 움직임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에반겔리스트가 ‘gingen sie hinaus/그들은 나와서 갔다라고 노래하기 직전을 들어 보면 오르간과 콘티누오(통주저음)의 반주가 갑자기 스타카토로 한 음씩 옥타브 위까지 빠르게 상행하는 것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수난곡에서 이 부분을 들을 때 청중들은 그들이 서두르듯 산을 올라갔음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영화처럼, 살아 움직이는 성경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수난에 참여토록 독려하는 것이 수난곡의 목적입니.

 

 

 

악보 에반겔리스트가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노래하는 부분. 윗줄 맨 아래의 오르간&콘티누오 파트 마지막 마디에 산을 오르는 듯한 스타카토 옥타브 도약이 있다.

 

 

실제로 감람산은 예수살렘 성 동쪽에 있는 800미터 정도 높이의 산입니다. 하지만 예수살렘 성이 해발 7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보기에는 100미터 남짓의 언덕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공간을 좋아하셔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면 거의 매일 밤 오르셨습니다. 철야 산기도를 하러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는 쉼이 기도였고 기도가 쉼이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일하셨지만 밤에는 꼭 하나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누가복음 21:37

   

사랑의 목자 예수

 

감람산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배신할 제자들을 원망하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양으로 바라보셨다는 것 자체가 예수 스스로 목자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서 예수를 바라보지만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 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마태수난곡 120~21

마태복음 26:30~32

음악듣기 : https://youtu.be/BRaQm4M6r7g

내러티브

14(20)

에반겔리스트

30. Und da sie den Lobgesang gesprochen hatten, gingen sie hinaus an den Ölberg. 31. Da sprach Jesus zu ihnen:

30.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1.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사

예수

In dieser Nacht werdet ihr euch alle ärgern an mir, denn es stehet geschrieben: 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 32. Wann ich aber auferstehe, will ich vor euch hingehen in Galiläam.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코멘트

15(21)

코랄

Erkenne mich, mein Hüter,

Mein Hirte, nimm mich an!

Von dir, Quell aller Güter,

ist mir viel Gut's getan.

Dein Mund hat mich gelabet

Mit Milch und süßer Kost,

Dein Geist hat mich begabet

Mit mancher Himmelslust.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젖과 맛난 꼴이 되어

나를 위로하셨으며

당신의 영은 나를

천상의 만족으로 채우셨나이다.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부인당하여 끌려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마가복음 6:34)’라는 마가복음의 표현처럼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은 그 자체로 깊은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의 마음을 뜻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계신 그가, 그 양떼로부터 배신당할 것을 아셨던 그가, 목자 없는 양떼가 되어 유리하게 될 제자들을 걱정하여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라고 부활하시어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노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바흐 시대의 신앙도 이 사랑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흐와 대본을 쓴 피칸더는 예수의 말씀 뒤에 다음과 같은 코랄을 연결시켰습니다.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함께 부르는 마태 수난곡

 

이번 시간부터 새로운 시도를 해 볼까 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우리말로 부르면 어떨까요?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마태 수난곡에서 코랄은 주로 코멘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청중으로서 수난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코멘트에 동참하며 코랄을 함께 부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27411일 성금요일,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에서 마태 수난곡이 처음 연주 될 때에도 청중들은 코랄을 함께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을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른다는 것은 썩 권장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작품일수록 언어와 음악이 하나로 움직이며 바흐 또한 가사에 음악을 입혀 그림을 그려내듯 섬세하게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예수의 대사에 있습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는 치다라는 의미의 슐라겐(schlagen)’흩어지다라는 의미의 체어슈트로이엔(zerstreuen)’입니다.

 

우선, 음악적인 악센트가 이 두 개의 동사에 맞아 떨어지면서 이 동사들의 표현은 극대화합니다. 또한 이 두 동사를 시작과 끝으로 하여 음악이 갑자기 비바체(vivace)로 빨라지고 현악기들은 목자에게 채찍질을 하고 양떼를 흐트러트리듯이 스타카토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부른다면 독일어와 우리말의 어순 차이 때문에 바흐가 독일어 동사의 자리에 섬세하게 준비한 음악적 악센트의 자리에 우리말의 동사를 위치시키긴 힘들 것입니다.

 

바흐는 이렇게 가사에 음악을 그려 입히는 방식(Word painting)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 수난곡을 깊이 있게 듣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독일어와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매 시간마다 독일어 가사를 함께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코랄만큼은 우리말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코랄 자체에 그러한 DNA가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을 계속해서 함께 하고 계신다면, 마태 수난곡에서 몇 개의 코랄 멜로디가 반복되어 쓰이고 있음을 눈치 챈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태 수난곡에 쓰인 코랄 멜로디들의 작곡자는 바흐가 아닙니다.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면 표절에 돌려막기로 보일 수 있겠지만 루터교 전통에서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바흐 당시에는 음악을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기에 음악에 있어서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코랄과 콘트라팍툼

 

루터교 전통에서 코랄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성공에는 코랄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코랄은 루터교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교회음악으로 루터교 음악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린이 성가대원 출신의 미성 테너였고 류트와 플롯도 능숙하게 연주했었던 루터는 음악을 신학에 견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일반 신도들은 성가대가 부르는 라틴어 다성 음악이나 사제들이 부르는 라틴어 성가를 수동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본인의 음악성과 새로운 시대의 요청을 코랄이라는 새로운 교회음악을 통해 결합시켰습니다. 일반 신도들이 익숙한 멜로디에 신학적 신앙적 핵심 내용을 담아 독일어로 함께 부르는 코랄이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코랄을 직접 부름으로써 예배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신학적, 신앙적 핵심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코랄의 멜로디는 새롭게 작곡되기도 했지만, 이미 있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콘트라팍툼(contrafactum) 형태로 많이 만들이 졌습니다. 코랄의 선율은 그레고리오 성가, 비전례적 종교 노래, 세속 선율 또는 민요들로부터 다양하게 차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동해물과 백두산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오랫동안 사귀었던등의 가사로 불러진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의 코랄 선율 역시 원래는 세속적 사랑노래였습니다.

 

한스 레오 하슬러가 1600년 경 작곡하여 유명해진 내 마음 떨려오네/Mein G'müt ist mir verwirret’의 선율에 루터교 목사요 신학자인 파울 게르하르트가 오 피투성이 상하신 그 머리/O Haupt voll Blut und Wunden’라는 가사를 붙였고 1680년에는 바흐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디트리히 북스데후데가 우리 주님의 몸/Membra Jesu Nostri’이라는 작품에서 주님의 상하신 머리를 표현하는데 이 멜로디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이 멜로디를 마태 수난곡에서만 총 여섯 번 사용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메인 멜로디라고도 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바흐의 작곡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러한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고 그래서 찬송가 145장 오른편에는 이례적으로 작곡자 이름에 하슬러와 바흐의 이름이 함께 오르게 되었습니다.

 

, 그럼 오늘 소개해 드린 부분을 처음부터 들으시다가 이 코랄이 울려 퍼질 때 우리말로 함께 불러 보면 어떨까요? 코랄 멜로디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다듬어 보았습니다. 참고로, 음악은 윗부분에 있는 가사 해석표의 음악듣기링크를 통해 리히터 58년 녹음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합창단의 노래처럼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사무치도록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내 목자이신 주님 날 지켜 주-소서

날 먹여 주시시고- 날 채워 주-셨네

생명의 말씀으로 날 먹여주시고

하늘-의 기쁨으로 날 채워주셨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또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예수의 잡히심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위한 교리적 필연이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매우 협소하게 합니다.

 

예수는 눈앞에 놓인 사랑하는 양들의 위험을 두고 달아 날 수 없으셨습니다. 눈앞의 놓인 양들의 위험과 양을 향한 즉흥적 사랑을 위해 그는 죽음을 향하여 뛰어드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없기에 그 즉흥적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되었으며 영원하고 필연적인 사랑이 된 것이지요. 이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사랑의 목자’, ‘선한 목자라고 부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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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1)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1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성찬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너희 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말씀에 성찬의 자리가 시끄러워졌습니다. 제자들은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몹시 근심하는 목소리로 주여 나는 아니지요(Herr, bin ich's)?’라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수난곡 117~19

마태복음 26:23~29

음악듣기 : https://youtu.be/9IWgq3cTick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3. Er antwortete und sprach:

23.대답하여 이르시되

대사

예수

Der mit der Hand mit mir in die Schüssel tauchet, der wird mich verraten.

24. Des Menschen Sohn gehet zwar dahin, wie von ihm geschrieben stehet; doch wehe dem Menschen, durch welchen des Menschen Sohn verraten wird. Es wäre ihm besser, daß derselbige Mensch noch nie geboren wäre.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5. Da antwortete Judas, der ihn verriet, und sprach:

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대사

유다

Bin ich's, Rabbi?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Er sprach zu ihm:

대답하시되

대사

예수

Du sagtest's.

네가 말하였도다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6. Da sie aber aßen, nahm Jesus das Brot, dankete und brach's, und gab's den Jüngern und sprach: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대사

예수

26. Nehmet, esset, das ist mein Leib.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7. Und er nahm den Kelch, und dankete gab ihnen den, und sprach:

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대사

예수

Trinket alle daraus, 28. das ist mein Blut des neuen Testaments, welches vergossen wird für Viele, zur Vergebung der Sunden. 29. Ich sage euch: Ich werde von nun an nicht mehr von diesem Gewächs des Weinstocks trinken, bis an den Tag, da ich's neu trinken werde mit euch in meines Vaters Reich.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코멘트

소프라노 서창

Wiewohl mein Herz in Tränen schwimmt,

Daß Jesus von uns Abschied nimmt,

So macht mich doch sein Testament erfreut:

Sein Fleisch und Blut, o Kostbarkeit,

Vermacht er mir in meine Hände.

Wie er es auf der Welt mit denen Seinen

Nicht böse können meinen,

So liebt er sie bis an das Ende.

예수께서 떠나신다니 내 마음 눈물 속을 맴돕니다.

하지만 주님의 약속 기억하며

내 마음이 또한 기뻐합니다.

주님의 몸과 피,

그 고귀함을 내 손에 얹어 주셨으니

주께서 세상에서 당신의 자녀에게 베푸셨던 사랑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그 사랑은

세상 끝날 때까지 변함없을 것입니다.

기도

소프라노

아리아

Ich will dir mein Herze schenken,

Senke dich, mein Heil, hinein.

Ich will mich in dir versenken,

Ist dir gleich die Welt zu klein,

Ei, so sollst du mir allein

Mehr als Welt und Himmel sein.

내 마음 당신께 드리오니

나의 구세주시여, 내 마음에도 오시옵소서

나 자신을 당신께 바치오리니

당신께 비하면 세상 모든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온 세상과 하늘보다

당신은 내게 더욱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근심과 당황을 깊이 숨긴 채 잠잠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한창 시끄럽게 예수께 묻고 너니 내니하면서 소란스러울 때, 조용히 눈동자를 굴려가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엽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Bin ich's, Rabbi)?’

 

그가 선택한 계산의 결과는 다른 제자들과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자신을 숨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말 끝자락에 자기도 모르게 본심이 드러나 버렸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랍비여라는 호칭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이 부분을 놓치기 쉽습니다만, 우리말과는 달리 헬라어와 독어 성경에서는 랍비여라는 호칭이 질문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질문에 집중하다가 마지막의 호칭에서 본심이 튀어나온 것이지요. 22절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Herr)’로 부르고 있지만 유다는 랍비(선생)’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를 존경하기만 하고 따르지 않는 신앙인들을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듣자마자 즉흥적으로, 사뭇 거칠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달랐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는 신중했고 말과 행동보다 계산을 먼저 했습니다. 우리는 똑똑하고 신중한 것이 미덕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따름에 있어서 때로 우리는 투박하고 단순할 필요가 있습니다. 투박하고 단순할지언정 진실 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은 대부분 그런 부류였습니다. 예수께서 기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1958년 리히터 음반의 아쉬움 중의 하나는 유다의 목소리가 육중한 악당의 목소리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그 시대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1958년은 아직 선과 악이 명확하게 나뉘던 시대였습니다. 오히려 리히터의 1971년 영상에서 지그문트 님스게른이 들려준 간사하고 날렵한 유다나 1998년 녹음된 헤레베헤 음반(HARMONIA MUNDI 레이블)의 최대한 자신을 숨기고 있는 조심스런 유다도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앞선 예수의 말씀에서 기록된 대로(wie von ihm geschrieben stehet)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Es wäre ihm besser...)은 예수 자신과 유다, 두 사람의 운명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운명이란 것은 하나님에 의해 강제 된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를 통해 예수께서 그 운명을 받아들이고 선택했듯이 유다 역시 그의 가치관과 자잘한 삶의 일상들이 집약되어 예수를 팔아넘기는 일을 운명처럼선택 했던 것입니다.

 

에반겔리스트의 레치타티보로 장면이 이어집니다.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성찬은 이어집니다. 우리말 성경 26절은 그들이 먹을 때에라고만 기록하고 있지만 루터 성경은 여기에 접속사 'aber(그러나)'가 들어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aber'라는 접속사가 다시금 성찬의 식탁을 정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예수와의 거룩한 교제를 막을 수 없습니다. 성찬은 계속 되어야합니다! 

 

 

 

                최후의 만찬, 프릿츠 폰 우데(1886)

 

 

빵을 떼어 주시고 잔을 채우시며 성찬을 베푸시는 예수의 음성은 결연하게 들립니다. 바흐는 성찬의 은혜와 따스한 이미지를 음악에 담았고 지휘자 리히터는 성찬의 거룩함에 초점을 맞춰 이 부분을 굉장히 느리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전인적인 감성의 층을 채우기

 

성찬이 끝나고 코멘트와 기도의 역할을 하는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가 이어집니다. 둘째 시간에 성경 본문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고 기도는 말 그대로 그 반응을 응축시켜 외적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레치타티보는 예수께서 떠나신다는 말에 슬퍼하면서도 아버지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 함께 성찬을 나누겠다는 약속에 기뻐하는 내용의 코멘트 입니다. 또한 주님이 손에 얹어 주신 살과 피를 세상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으로 여기어 손바닥에 새기겠노라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아리아는 코멘트에 이은 기도입니다. 우리도 성찬을 받을 때 마다 이런 기도를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마태수난곡의 성찬 장면은 이렇게 우리에게 성찬식의 참된 의미와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내 마음 당신께 드리오니

나의 구세주시여, 내 마음에도 오시옵소서

나 자신을 당신께 바치오리니

당신께 비하면 세상 모든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온 세상과 하늘보다

당신은 내게 더욱 귀한 분입니다.

 

마태수난곡에서 모든 솔로 음악은 우리의 개인적 마음의 감정과 결단과 기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알토의 목소리로, 때로는 소프라노의 목소리로, 때로는 테너나 베이스의 목소리로 불러지는데 이 모든 목소리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자아의 여러 감성적 층을 의미합니다.

 

소프라노는 순수한 감성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알토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모성적 사랑을 상징하고, 남성파트인 테너와 베이스는 열정을 나타내는데 테너는 보다 감성적인 횡격막 위의 열정을, 베이스는 보다 본능적인 횡격막 아래의 열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여덟 번째 시간에 만났던 베다니 여인의 노래는 알토였고 곧 만나게 될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통에 반응하는 아리아는 테너가 부릅니다. 마태 수난곡 중반부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분노하며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Gebt mir meinen Jesum wieder!’를 부르는 파트는 베이스이며 순수한 감성과 사랑을 나타내는 오늘의 아리아는 소프라노를 위한 곡입니다.

 

남녀나 개인적 성향을 떠나 우리 안에는 이 모든 감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지능지수처럼 감성지수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고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다양한 층의 감성을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수난곡의 모든 솔로 음악을 여러분 자신의 노래로 부른다고 상상하시며 가사를 음미하며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음치여도 상관없습니다. 우리말로 하다가 박자가 틀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이 노래들을 여러분은 노래로 부를 수 있다면 전인적 영적 감수성이 깨어나 여러분들을 더 풍성한 신앙의 세계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고난을 묵상하면서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수난곡에서 이렇게 밝은 노래가 흘러나올 줄은 모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의 수난 속에서도 밝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에, 그 사랑이 지금 내게 있고 세상 무엇보다 귀하고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신실하신 주님께서 하신 다시 오시겠노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스런 소녀가 되어 이 밝은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Ich will dir mein Herze schenken!

내 마음을 당신께 드립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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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나는 아니지요? -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10)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0 주여 나는 아니지요? -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장면이 바뀌고 유월절 성찬이 준비 되고 있습니다. 지난 장면에서 그려진 유다의 배신과 예수의 피투성이가 된 마음도 유월절 성찬 앞에서 차분하게 바뀌며 거룩한 분위기가 다시금 감돕니다.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에반겔리스트입니다. 이 부분을 노래하는 에반겔리스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 내러티브를 노래하느냐가 아니라 두 장면 사이에 놓인 침묵을 어떻게 노래하느냐 입니다. 지휘자는 이 부분에서 에반겔리스트와 오르간 콘티누오에게 큐 사인을 주기 전에 침묵을 연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음반 녹음으로 마태수난곡을 들을 때의 아쉬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곡을 트랙별로 쪼개어 음반에 실어야하기 때문에 곡과 곡 사이의 간격이 일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에서 곡과 곡 사이에 있는 침묵의 순간을 지휘자가 의도한 대로 정확히 들을 수 없지요. 마태수난곡에서는 소리를 다루는 것만큼이나 침묵을 음악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침묵이 베이스 콘티누오처럼 계속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마태수난곡을 직접 듣거나 공연실황을 담은 동영상을 볼 때 이 침묵의 순간에 귀를 기울이신다면 색다르고 깊은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수난곡 113~16

마태복음 26:17~22

 음악듣기 : https://youtu.be/GKyWzMfuFjg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7. Aber am ersten Tage der süßen Brot traten die Jünger zu Jesu und sprachen zu ihm:

17.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대사

제자들(합창)

Wo willst du, daß wir dir bereiten, das Osterlamm zu essen!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8. Er sprach:

18.이르시되

대사

예수

Gehet hin in die Stadt zu einem, und sprecht zu ihm: Der Meister läßt dir sagen: Meine Zeit ist hie, ich will bei dir die Ostern halten mit meinen Jüngern.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9. Und die Jünger taten, wie ihnen Jesus befohlen hatte, und bereiteten das Osterlamm. 20. Und am Abend satzte er sich zu Tische mit den Zwölfen. 21. Und da sie aßen, sprach er:

 

19.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대사

예수

Wahrlich ich sage euch: Einer unter euch wird mich verraten.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22. Und sie wurden sehr betrübt, und huben an, ein jeglicher unter ihnen, und sagten zu ihm:

22.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대사

제자들(합창)

Herr, bin ich's?

주여 나는 아니지요?

코멘트

코랄(합창)

Ich bin's, ich sollte büßen,

An Händen und an Füßen

Gebunden in der Höll'!

Die Geißeln und die Banden,

Und was du ausgestanden,

Das hat verdienet meine Seel'.

그 사람은 바로 나,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지옥에서 손발을 묶이고

벌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채찍질과 멍에

당신께서 당하신 그 모든 것은

내 영혼이 짊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찬과 유월절 어린양

 

제자들이 예수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Wo willst du, daß wir dir bereiten das Osterlamm zu essen!’라고 묻는 합창은 영어의 ‘where/어디서에 해당하는 의문사 ‘wo’를 세 번 반복하면서 거룩하고 정성스럽게 성찬을 준비하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목관악기들이 하나의 소리로 아르페지오를 그려가며 부드럽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단순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임에도 이 합창은 음악적으로 매우 아름답습니다. 바흐는 왜 이 부분에 이토록 공을 들였을까요? 그 비밀은 독일어 가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태수난곡의 내러티브와 대사는 루터판 독일어 성경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말 개역개정 성경은 헬라어 원문에 맞게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이라고 번역했지만 루터가 번역한 바흐 시대의 성경은 ‘das Osterlamm zu essen’ 유월절 어린양을 잡수실 것이라고 읽고 있습니다. ‘어린양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루터에 의해서 추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바흐는 단순히 먹을 장소를 물색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장면을 생각하며 음악을 입힌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에는 유월절과 무교절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해의 첫 달인 니산월 열흘날에 새끼 양을 취하여 간직하고 있다가 열나흗날 해 질 때 양을 잡아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양은 불에 구워 쓴나물, 무교병과 함께 먹었습니다. 손질된 고기를 사는 것은 쉬어도 살아 있을 때 함께 지낸 생명을 죽이고 먹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양을 사흘 동안 집에 두는 이유는 생명과 피의 희생이 얼마나 어렵고 귀한 것인가를 깊이 새기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먼저 떠올리지만 성찬에서 유월절 양의 이미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마태복음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마가복음 병행구절에는 무교절 첫날다음에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라는 설명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마가복음 1412)

 

루터는 아마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마태복음을 번역할 때, ‘유월절 양/das Osterlamm’이라는 표현을 추가했고, 바흐 역시 그 표현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우리말 성경으로 읽었을 때는 별로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던 이 부분에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적 표현을 정성스레 덧입힌 것입니다.

 

분명, 그날 최후의 만찬 자리에는 빵과 포도주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양고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초기 기독교 전통을 비롯한 몇몇 그림들은 성찬의 식탁에 빵과 포도주만 놓여 있습니다. 이는 유월절 어린양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강조하기 위한 배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빵과 포도주를 먹을 때 마다 유월절 어린양 예수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셨고 빵은 양의 고기를, 포도주는 문설주에 발라진 양의 피가 되어 우리가 이것을 먹고 마실 때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성찬, 온 마음과 온 몸에 되새기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기억

 

최근 교계 여기저기에서 예전적인 성찬식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예전과 성찬을 구교의 폐습으로 여겼던 교회가 변해가는 모습이 반갑기도 하지만 이것이 유행처럼 지나가거나 영적 허영이나 또 다른 형식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연회의 한 행사에서 열린 성찬에 참석하신 한 분이 빵을 받을 때 오른 손과 왼손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성찬 집례목사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받고 뒷줄로 다시 돌아갔다며 뭐가 잘못된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저는 잘못된 것은 그 목사님이며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머무는 마음으로 편안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찬은 형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를 기억하는 성찬으로 인해 유월절 전통의 율법적 형식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성찬이 또 다른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은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벌이는 모든 행위를 통해 우리를 살리신 예수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씻고 기도하고 노래하고 나누고 쉬는 행위를 통해 예수를 기억하는 것이 성찬입니다. 사랑하는 예수와 함께 했던 아름답고 소중했던 기억들을 소환하여 정성스레 되새기는 것이 성찬입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대로 유월절 성찬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최후의 만찬, 첫 성찬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먹을 때에 예수께서는 담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제자들에게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Einer unter euch wird mich verraten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합창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불쑥불쑥 몹시 근심하는 목소리로 주여 나는 아니지요(Herr, bin ich's?)?’라고 예수께 묻습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자리 한쪽 벽에 그려 있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마치 그림 속에서 제자들의 합창 소리가 들러오는 듯합니다.

 

 

 

 

자기의 일인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예수께 묻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제자들의 자리에 있다 한들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진리 위에 굳건히 서 있지 못하기에 이리 저리 흔들리느라 자기가 무슨 일을 할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을 믿지 못하여 몹시 근심하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적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그대로 예수께 고백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코랄에 참된 신자들이 가져야 할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센스 있는 지휘자라면 제자들의 합창이 끝난 뒤 긴 텀을 두지 않고 바로 코랄을 시작할 것입니다. 첫 시간에 코랄은 주님의 수난의 장면을 바라보는 극 밖의 사람들의 반응을 담은 코멘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십자가 죽음을 앞둔 예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나는 아니지요?’라고 떠들어 대는 제자들을 본 신자들은 제자들에 대한 답답함과, 예수에 대한 애련함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 차올랐을 것입니다. 그 마음이 코랄을 통해 갑자기 터져 나오듯 표출되는 것이지요.

 

참된 신자라면 이 코랄의 가사처럼 주님을 판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라고 고백 할 수 있어야 합니다. ‘bin ich es/나는 아니지요?’ ‘Ich bin es/나 입니다!’로 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고작해야 단어 위치 하나 바뀌는 쉬운 일 같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요하고 주입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며, 말로 그렇게 고백했다고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과 십자를 깨닫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죄인 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존재의 근원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죄 없는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한 마디 변명 없이 다 받으셨건만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명백한 죄마저 부인하고, 잘못을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만큼은 하지 않으려했는데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하는데, 말 하지 않으려했으면 끝까지 안하면 된다.” “마지막 말은 하지마라! 안고 살아라! 주님을 통해 풀어라! 그게 신앙인이다

 

세상에서는 어지간해서는 절대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발뺌을 하고 봅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진정 회개하고 시인하는 것이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세상에는 죄에 따른 징벌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우리 죄 값을 대신 지신 예수님과 자비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척, 거룩한 척 하지 마십시오. 진짜로 십자가의 은혜를 믿으신다면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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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수난곡 No. 9 가룟 유다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9)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9 가룟 유다

 

오늘 만나게 될 장면은 마태수난곡 111~12번 곡으로 마태복음 26:14~16에서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넘기기로 한 장면입니다. 내러티브와 가룟 유다의 대사 그리고 마태 수난곡의 유명한 독창곡 중의 하나인 소프라노의 아리아 ‘Blute nur/피투성이가 되는구나가 이어집니다.

 

 

마태수난곡 111, 12

마태복음 26:14~16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4. Da ging hin der Zwölfen einer, mit Namen Judas Isharioth, zu den Hohenpriestern und sprach: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대사

유다

15.Was wollt ihr mir geben? Ich will ihn euch verraten.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5.Und sie boten ihm dreißig Silberlinge. Und von dem an suchte er Gelegenheit, daß er ihn verriete.

15.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코멘트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

Ach, 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

Droht den Pfleger zu ermorden,

Denn es ist zur Schlange worde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사랑했던 주님의 마음이여!

! 당신이 키우시고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그 양육자를 죽이려 하다니

그 아이가 뱀이 된 것입니다.

 

유다는 악인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운 매우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열 두 제자의 하나였고 스승을 배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배신은 십자가 구원의 길을 위한 길의 연결고리가 되었지요. 그는 이토록 야릇한 운명을 지고 있습니다. 그는 뱀과 비견되는 배신자, 돈 때문에 예수를 판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는 타고난 악마였을까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였다

 

우리 모두 익숙한 관점을 내려놓고 다시금 유다를 만나봅시다. 제게 유다를 향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마태수난곡이었습니다. 오늘의 장면 중 유다의 배신 후에 이어지는 알토 아리아에서는 유다를 일컬어 당신이 젖 먹여 키운 아이/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EBS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모든 개의 문제들이 개들의 타고난 성향 때문이 아니라 주인과 주변 환경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누군가가 정말 밉고 미울 때, ‘그래, 이 사람도 한 때 아이였었지! 티 없이 맑았던, 존재 자체로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던, 사랑 받았던 누군가의 아이였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마태 수난곡은 유다를 아이/das Kind’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 한마디가 저로 하여금 가룟 유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습니다.

 

가룟 유다, 그는 한때 나름의 부푼 꿈을 안고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돈을 벌거나 출세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면 예수를 따르는 것 말고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역시 한 때 아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소프라노 아리아의 가사처럼 그 역시 예수의 사랑하는 아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나름의 부푼 이상을 품고 예수를 따랐을 것입니다. 돈 관리를 맡았을 정도로 그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스승을 배신하고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돈을 던져 버리고 자살했습니다. 예수를 배신하는 것이나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자살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무언가 꼬인 것입니다. 무언가 그의 생각과 달리 흘러 버렸던 것입니다. 한 아이 유다! 그는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갑자기 그가 측은해 집니다.

  

유다,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

 

한 마디로 유다는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이었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머리가 좋아 계산과 판단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비열하다는 것은 단순한 욕지거리가 아닙니다. 계산하고 판단하되 자신의 이익과 이용가치에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개인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공동체인 교회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했지 자신이 그 공동체의 일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수긍했기에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옆에서 예수의 기적을 수 없이 목도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왜 예수를 팔았을까요? 그는 똑똑했기에 스스로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그의 길에 대해서 이만하며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유다가 보기에 스승 예수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기적의 능력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교회를 이루고 예루살렘을 접수하고 자기 이름도 높아지면 좋겠는데 스승은 계속하여 낮은 곳의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세상의 지혜와 계산에 서투르기만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만은 아닌듯합니다. 유다를 대할 때, 너무 은 삼십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돈을 남긴 것은 기회가 될 때마다 돈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다는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돈을 돌려주려 합니다. 조심스런 상상이지만, 어쩌면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예수가 자기 앞에서 행했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바램을 이루기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 빠르고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뒤틀어져버렸습니다. 예수는 잡혀가는 순간부터 무력했고 도살장의 어린 양 같이 잠잠했습니다.

 

 

우리 모습 속의 유다

 

이만하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들의 교회 안에 흔히 있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유다는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들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끝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하지 않으면, 예수를 이용해 교회를 키우고 유명해 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의 유다가 고개를 들고 우리도 모르게 말과 행동과 삶으로 또다시 예수를 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몸입니다. 교회를 파는 자는 예수를 파는 자입니다. 교회를 파는 자가 바로 유다입니다. 목사가 되고 후회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평신도 시절에는 잘 몰랐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법한, 교단과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듣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인맥과 돈으로 교회를 사고파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중개업자처럼 교회를 소개하고 소개비를 받는 목사들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대부분 계산이 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벌입니다. 그리고 절대 스스로를 비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교회건 교인이건 신앙이건 예수건 간에 자신의 이익과 이용가치에 따라 값을 매기고 사고파는 비열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될지언정 스스로를 절대로 교회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철저한 개인들입니다.

 

예수를 판 유다나 예수의 몸 된 교회를 파는 자들이나 제가 보기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 시절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지금 모든 것이 뒤틀려 버렸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죄를 전가할 좋은 재료로 그토록 유다를, 아니 스스로의 그림자를 저주하고 있는 그들이 더욱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예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유다입니다. 그런 욕망, 그런 모습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예수를 바라 봐야합니다.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나중에는 예수를 배신했습니다. 예수를 외면하여 도망치거나 그를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금 예수를 바라보고 돌아왔습니다. 죄에 있어서는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대신 제물이 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차이였습니다. 이어지는 곡을 만나게 되면 우리 주님이 그런 우리 모두를 안타까워하시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주님의 마음이여

 

이어지는 유명한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사랑했던 주님의 마음이여!’는 유다의 모습과 유다를 향한 예수의 마음을 바라보는 소프라노의 코멘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난 번역들은 대부분 이 곡의 가사를 유다를 향한 피의 징벌로 해석하는데 이는 크나큰 오해입니다. 아마 이 아리아가 유다의 배신 장면 다음에 이어지기 때문에 /Blut’라는 단어의 강렬함이 그런 해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오역은 우리의 본성이 사랑과 용서보다는 분노와 복수에 더 가깝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제대로 해석된 가사는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본성과 달리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유다에 대한 분노와 저주는 여기에 없습니다. 이 피는 예수의 피 입니다. 유다가 흘렸어야 할 피를 예수께서 대신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자살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용서와 사랑을 믿지 못하여 거부하고 스스로 징벌한 것입니다. 이 아리아는 사랑하는 아이의 배신과 그의 타락을 슬퍼하며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으로 연결됩니다. 이 아리아의 도입부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뿐만 아니라 절뚝절뚝 피를 흘려가며 외롭게 십자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을 연상케 합니다. 플롯과 바이올린의 스타카토는 흘러내리는 피의 열기와 끈적끈적함까지 표현 하고 있으며 저음에서 들리는 묵직한 현의 소리는 십자가의 무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악보1).

 

 

악보 1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의 도입 부분. 플롯과 바이올린의 스타카토는 피투성이의 모습을, 비올라의 묵직한 선율은 십자가의 무게를 표현한다.

 

 

  가사가 바뀌어 ‘Ach, 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 당신이 키우시고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라고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반주의 분위기도 완전히 바뀝니다. 모든 현 파트는 사라지고 통주저음과 플롯만이 남아 푸른 언덕을 거니는 듯 아이의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던 그 시절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 중간 중간에 현악이 끼어들어 피투성이의 테마를 이어갑니다(악보2). 마지막으로, 다카포 형식인 이 아리아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피투성이가 된 주님의 마음과 몸을 노래 한 후 마무리됩니다. 처음과 똑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만 피투성이 주님의 마음과 몸은 이런 음성으로 들려옵니다. “그래도 너는 내 아이며,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악보 2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의 두 번째 주제. 풀루트와 소프라노와 통주저음만이 어우러져 주 님의 아이의 모습을 노래하지만 셋째 마디에서 현악 파트가 끼어들어 피투성이 테마를 연주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였고 주님의 품에서 자란 주님의 아이입니다. 한 때 우리는 순수한 삶과 순수한 신앙과 순수한 교회와 순수한 목회를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유다를 정죄하고 때때로 자신 안에 꿈틀대고 있는 유다의 모습에 몸서리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유다를 저주하고 우리 안의 유다를 미워하며 정죄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변함없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절망한 자리 바로 옆에 주님의 사랑이 놓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절과 2절을 보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과 유다의 배신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 어떤 문학적 표현 보다 강렬한 대비가 이렇게 무심한 듯 가장 가까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그리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 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복음 13:1-2)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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