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66)

 

‘아멘’이 된 사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튼튼히 서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1:20-22)

 

예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다. 어떤 경우에도 ‘아니오’ 한 적이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은 예수님을 ‘아멘이신 분’(요한게시록 3:14)이라고 말한다. 이 강력한 단어 앞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아멘’이라는 말을 우리는 그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으로 새긴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나는 신뢰한다’, ‘나는 굳건해졌다’는 뜻도 있다. 신뢰 없이는 ‘아멘’ 할 수 없다. 진심으로 ‘아멘’ 하는 순간 우리 정신은 굳건해진다.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의 권위에 눌려 ‘아멘’ 하셨다면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일치와 사랑 안에서 ‘아멘’ 하셨다. ‘아멘’ 함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굳건하게 만드셨다. 이런 되먹임의 관계를 일러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은 ‘입맞춤’이라고 표현했다. 아멘은 하늘과 땅의 입맞춤이고 포옹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믿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신앙이 먼저고 순종은 그 다음이라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신앙은 오직 순종의 행위 안에서만 자신의 참됨을 입증한다. 순종은 아주 구체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 또는 말씀을 통해 들려오는 소리에 순종하여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벗이 되어주고, 고통을 덜어주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설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우리 믿음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은 한사코 고통의 자리를 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통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늘 ‘아멘’으로 응답하셨다.

 

주님은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기를 원하신다. 믿음의 사람은 직립한 사람이다. 오직 주님 앞에서만 무릎을 꿇을 뿐 세상의 어떤 권세 앞에서도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서는 사람 말이다. 작고한 시인 김남주는 <자유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자유 좀 주세요 자유 좀 주세요/강자 앞에 허리 굽히고 애걸복걸하며/동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적어도 직립의 인간인 나는.” 작은 풀뿌리에 걸려도 자꾸만 비틀거리는 우리가 이런 오연한 고백을 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령께서 우리 속에 자꾸 생기를 불어넣어주셔야 한다. 성령은 우리를 일어서게 하는 힘이다. 봄이 되어 초목이 깨어나듯 성령은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참 사람을 일깨우는 힘이다. 그 힘을 덧입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아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조각가 자코메티는 ‘직립하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자꾸 끌어내리는 세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하늘을 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 삼아 우리 마음을 조율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게 해주시고, 힘겹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 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든 우리 마음에 성령의 신바람을 채워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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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7)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시몬은 사도들이 손을 얹어서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돈을 내고서, 말하기를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하니,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 그러므로 그대는 이 악한 생각을 회개하고, 주님께 기도하시오. 그러면 행여나 그대는 그대 마음속의 나쁜 생각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내가 보니, 그대는 악의가 가득하며, 불의에 얽매여 있소.” 시몬이 대답하였다. “여러분들이 말한 것이 조금도 내게 미치지 않도록, 나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뒤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의 여러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사도행전 8:18-25)

 

박해를 인해 흩어진 사람들 가운데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를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그 성에 있던 마술사 시몬은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이 놀라운 사건을 목격하고는 넋이 나갔다. 그는 빌립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자기도 그런 능력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그곳에 와서 사람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니 성령이 임했다. 시몬은 사도들에게 돈을 건네며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에게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돈을 가져온 것이다. 그 철부지를 향한 베드로의 질책은 자못 준엄하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그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 그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우리의 일에 그대가 차지할 자리도 몫도 없소.”(사도행전 8:20-21)

 

시몬의 영혼을 내리치는 베드로의 채찍질이 혹독하다. 마치 얼음을 깨는 도끼 같다. 이렇게까지 반응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한다. 그릇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한 충격이 필요한 법이다.

 

 

 

돈은 어느 시대에나 매력적이다. 현실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가게에서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정말 소중한 것은 시간을 들일 때 얻어지기 때문이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사람들의 삶과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든다.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다 숨이 가쁘다. 사회학자인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돈은 사물의 모든 다양성을 균등한 척도로 재고, 모든 질적 차이를 양적 차이로 표현하며, 무미건조하고 무관심한 태도로 모든 가치의 공통분모임을 자처함으로써 아주 가공할 만한 평준화 기계가 된다. 돈은 이로써 사물의 핵심과 고유성, 특별한 가치, 비교 불가능성을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짐멜의 문화론> 중에서)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 왜 문제인지를 잘 지적해주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다양성을 특색으로 한다. 하나님의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 무가치한 것은 없다. 저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 조화로운 세상을 이룬다. 하지만 돈은 모든 사물을 균등한 척도로 잰다. 질적인 차이를 양적인 차이로 환산함으로써 그 고유한 아름다움이나 가치를 지워버린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은 폭력 세상이다. 기독교인은 돈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음을 삶으로 증언해야 한다.

 

*기도*

 

하나님, 마술사 시몬은 악인이 아니라 약자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는 진리에 대해서는 청맹과니에 불과했습니다.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지만 그는 자기를 부정하는 데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신앙은 다만 자기 확장을 위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시몬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가장 귀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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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4)

 

바위처럼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임 당하심을 우리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예수로 말미암아 늘 몸을 죽음에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예수의 생명도 또한 우리의 죽을 육신에 나타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린도후서 4:7-11)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나무를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백합화를 품은 흙에서는 백합향이 나는 법이다. 비록 그 삶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예수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바울은 자기 생의 비밀을 이렇게 밝힌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4:6)

 

그 빛으로 인해 바울은 박해의 어두운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빛과 만났기에 바울은 빛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4:8-9) 

 

 

 

 

 

얼마나 당당한 말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이리도 크다. 살아갈 이유를 알고,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고난도 당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 다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가슴에 이미 빛이 밝혀진 사람은 세상이 어둡다 하여 낙심하지 않는다. 돈 좀 못 벌면 어떻고,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낙심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들은 불의와 싸우면서도 거칠어지지 않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 것 같다 하여 안달하지 않는다. 반대자들조차 우정으로 감싸 안는 넉넉함을 보인다. 모름지기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 때문일까?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한 것과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했다. 통나무처럼 투박한 이 고백 속에 바울이라는 거인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왜소해졌다. 나는 이게 너무 속상하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마음이 좁쌀보다 작은 사람들을 본다. 그들은 늘 자기 문제에만 골똘할 뿐,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지 못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다. 십자가는 죽음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니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겨운 길일 수 있다. 겁 많고, 비겁하고, 욕심 사납고, 냉소적인 우리 마음이 일대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런데 일단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예기치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이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우리는 외로운 참새처럼 두려움에 떨며 삽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고,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는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천둥소리처럼 울려옵니다.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라고 고백한 이가 누리는 홀가분함과 당당함입니다. 우리도 그런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신 주님의 선언이 우리 삶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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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5)

 

하나님을 모욕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잠언 14:31-32)

 

시인 최승호는 일찍이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 당신이 불쌍합니다”라고 탄식했다. 인간의 탐욕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 인간대접 받지 못하고 조롱당하는 이들의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고스란히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 신음하는 피조물의 탄식소리에 가슴이 타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믿음의 세계에 들어섰다 할 수 없다.

 

하버드 대학 교수인 새러 로이(Sara Roy)의 글을 보며 가슴이 아팠다. 그는 나찌의 수용소에서 생환한 아버지의 팔에 새겨진 푸른색 번호를 보며 자란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라 없이 떠도는 이들의 설움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여러 해 전 그는 팔레스타인 땅을 찾았다. 학자로서 ‘점령’의 현실이 점령지 사람들의 경제생활, 일상생활,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한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다. 어느 날 일단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나이 지긋한 팔레스타인 사람을 조롱하는 현장을 보았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3-4살 쯤 된 손자와 함께 당나귀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을 불러 세웠다. 군인들은 당나귀에 실린 짐을 검사한 후 당나귀의 입을 벌려보며 말했다. “이봐, 이 당나귀 이가 왜 누래? 날마다 닦아주지 않나보지?” 노인은 당황했고 아이는 겁에 질렸다. 노인이 침묵하자 군인들은 큰 소리로 대답하라고 윽박질렀다. 다른 군인들은 야비한 웃음을 지은 채 옆에 서 있었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고 노인은 굴욕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서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군인은 노인에게 당나귀 뒤에 서게 한 후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추라고 지시했다. 노인은 거절했지만 군인의 강압에 못 이겨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는 당나귀 엉덩이에 입을 맞췄다. 아이는 발작적인 울음을 터뜨렸다. 그 광경을 보며 군인들은 웃으며 사라졌다. 그 노인과 둘러선 사람들에게 모욕을 주려던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Sara Roy,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Vol 32, No. 1, Autumn 2002, Issue 125) 

 

 

 

새러 로이의 글을 읽으면서 떠오른 말씀이 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잠언 14:31) 힘 있는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이런 모욕과 폭력이 일상인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가슴은 멍이 들었다. 하나님의 그 멍을 풀어드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역사의 섭리자로 믿는 사람들은 동료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쉬지 않고 힘써야 한다.

 

*기도*

 

하나님, 세상에는 모욕을 당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갑질하는 이들 앞에서도 변변히 자기를 지켜낼 수 없는 을들의 비애가 어둠이 되어 이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살겠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다 하여 비존재 취급을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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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3)

 

오늘을 충실하게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3:12-14)

 

잘 산다는 것은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은 오늘의 점철(點綴)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뿐이다. 어제도 내일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지나가 버려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기억에 사로잡힌 채 살거나, 아직 오지도 않은 시간을 내다보며 미리 불안해한다. 행복은 늘 저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며 오늘을 헛되이 흘려보낸다.

 

“앉은 자리가/꽃자리니라//네가 시방/가시방석처럼 여기는//너의 앉은/그 자리가//바로/꽃자리니라”(구상, ‘꽃자리’).

 

사실 삶이 너무 힘들면 이런 이야기가 다 한가로운 사람의 말처럼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선 자리가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자리임을 자각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성경은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살다가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하라며 이렇게 가르친다.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히브리서 3:13)

 

 

 

 

 

사람은 누구나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불안의 해독제로 공동체를 주셨다. 신앙 공동체는 우리가 세상 물결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 믿음대로 살기 위해 애쓰다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 속에는 든든한 기둥이 들어선다. 내가 넘어져도 다가와 일으켜 세워줄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또 있을까? 무거운 짐을 지고 비틀거릴 때도 선뜻 다가와 짐을 대신 져 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다. 죄의 유혹에 흔들릴 때면 다가와 부드럽게 혹은 준엄하게 꾸짖어 바른 길 가도록 해 줄 사람이 있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는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의 가슴에 봄 햇살로 다가가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겨울 삭풍처럼 다가가는 사람들인가? 사람들의 마음이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끄는 사람인가, 악을 향해 나아가도록 유인하는 사람인가? 성도는 이웃들 속에 잠든 생명을 깨우는 ‘봄 햇살’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졌던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히브리서 3:14). 인내하는 믿음이 절실하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실히 누리지 못합니다. 행복은 늘 저만치에 있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시방 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시인의 고백은 삶의 곤고함을 모르는 이의 한가한 노래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지금을 가장 귀히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는 늘 불만과 불안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시간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인생의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삶을 맡긴 채, 즐겁게 사랑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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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652)

 

낙담의 마귀

 

 

내가 너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지 않았느냐! 너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주, 나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여호수아 1:9)

 

모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여호수아는 중대한 책무를 떠맡았다. 요단강을 건너(cross over)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백성들을 이끄는 것 말이다. 젊은 시절부터 모세를 모셔왔던 그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다. 요단강은 옛 삶과 새 삶의 경계이다.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여호수아를 격려하셨다. “네가 사는 날 동안 아무도 너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겠다”(여호수아 1:5). 여호수아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늘 율법을 읽고 그 말씀을 성심껏 실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또한 두려워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낙담의 사전적 정의는 바라거나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실망하고 맥이 풀리는 것이다. 지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직면해야 했던 문제가 많았을 것이다. 홀로 결단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몰이해로 인해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성숙하지 않은 대중은 비전보다는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걸 아시기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낙담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주후 360년 경 로마의 스키타이(Scythia)에서 태어난 존 카시안(John Cassian)은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탐식, 부정, 탐욕, , 낙심, 태만, 자만심, 교만이라는 악덕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낙담에 맞서야 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낙담의 마귀는 영혼의 영적 관상 능력을 흐리게 하고,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아 완전히 어둡게 만들고, 기쁜 마음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어 유익을 얻지 못하게 하고, 형제들을 온유하고 긍휼하게 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는 온갖 종류의 일에 대한 미움, 심지어 수도 서원 자체에 대한 미움을 주입합니다. 그는 영혼의 유익한 결단을 손상시키고 인내와 끈기를 약하게 만들며, 영혼을 무감각하고 마비되게 하고, 낙심되는 생각들의 속박을 받게 만듭니다.”(<필로칼리아1>, 엄성옥 옮김112)

 

낙담을 이겨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도,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기, 성경 묵상,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 등이다. 낙담의 마귀가 횡행할 때일수록 함께 기운을 북돋워주는 이들이 필요하다. 주님은 우리에게 지치고 낙심한 이들 곁에 다가가라고 명하신다. 어디에 가든지 함께 있겠다 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불화와 갈등의 세계를 건너 화해와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기도*

 

하나님,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한눈을 파는 순간 패배자로 전락할 거라는 생각이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경쟁에서 이길 때는 우쭐하지만 패했을 때는 주눅이 들고 맙니다. 패배의 기억은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고, 그 응어리는 돌덩이가 되어 우리를 짓누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꿈조차 잃고 맙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낙담을 떨쳐버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하신 주님의 손을 붙잡고 저 진리의 싸움터에서 용감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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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취를 경계하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십시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베소서 5:15-20)

 

 

가장 열심히, 가장 분주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이들도 영적인 잠에 빠지기 쉽다. 분별력 없는 열심은 언제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에베소서 5:15) ‘살피라는 단어는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우리가 영적인 잠에 빠졌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지 여부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기에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주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고 신신당부한다. 늘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아래 놓여있던 초대교인들은 이 말을 아주 강력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여쭙고 또 여쭈어야 한다. 서양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인 베네딕도 성인의 규칙서의 첫 마디는 들어라’(obsculta)이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귀로만 들으면 안 된다. 먼저 머리로 다음에는 온몸으로 들어야 한다. 라틴어로 순명을 뜻하는 ‘oboedientia’듣다라는 뜻의 ‘audire’와 어원이 같다. 들음은 순명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도취를 경계해야 한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에베소서 5:18) 여기서 말하는 은 좁은 의미로는 알코올 음료를 가리키는 말이겠지만, 모든 종류의 도취를 일컫는 환유換喩로 보아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아 버리는 일체의 것들 곧 술, 쾌락, 마약, 오락, 권력, 소유 등이 바로 변형된 이다.

 

 

 

 

신앙이란 깨어남이다. 지금 우리 삶이 뭔가에 도취된삶인 것을 깨달을 때 자유로운 삶이 시작된다. 자유로운 삶이 생기를 얻으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가슴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에베소서 5:18b-19)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그 눈으로 보면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세상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세상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은 타인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며 산다. 자기를 열고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기쁨을 맛본다. 신앙의 신비이다.

 

*기도*

 

하나님, 누구에게나 삶은 힘겹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겪는 일은 한편으로는 진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늘 낯섭니다. 모든 순간에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정답이 없음을 알기에 우리는 늘 고민하며 길을 모색합니다. 삶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뭔가에 도취함으로 현실을 잊으려 합니다. 그것은 자학일 뿐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꿈에 사로잡혀 살도록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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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불화를 넘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로마서 7:24-25)

 

오랜 세월 몸과 마음에 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불화의 쓰라림을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로마서 7:15) 자각과 삶의 불일치, 이것은 바울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경험이다. 바울은 자기 불화라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철저한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속절없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고백한다. 자기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고도 말한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실행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는 악한 것에 대한 본능적 끌림도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도 있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번번이 패배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의 뜻을 일깨워주는 율법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이것이었다. 이런 깊은 자각이 있었기에 그는 ",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24절)라고 탄식했다.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사이의 분열 혹은 불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기를 사로잡아 버리는 죄를 힘차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무능함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왜 무능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렇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왜곡되어(voluntas perversa) 육욕(libido)이 생겼고, 육육을 계속 따름으로 버릇(consuetudo)이 생겼으며, 그 버릇을 저항하지 못해 필연(necessitas)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쇠사슬의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쇠사슬이라고 불렀습니다-나를 노예의 상태에 강하게 붙들어 매어 놓았습니다."(성 어거스틴, <고백록>, 선한용 역254)

의지의 왜곡-->육욕-->버릇-->필연-->노예 상태로 이어지는 이 흐름을 어떻게 해야 끊을 수 있을까? 이것을 끊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종이 되어 살 수 밖에 없다. 굳게 결심을 해보아도 우리는 마치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 같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욕에 이끌려 가곤 한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납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도 애써서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지만, 그와 대면하는 순간 마음속에 똬리 틀고 있던 화가 불쑥 튀어나와 또 다른 불화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감정이 이성에 통합되지 못한 결과이다. 이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가 분열되어 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이성으로도 의지로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습기習氣, 죄의 지배를 벗어버리고 싶어 절규하던 바울의 어조가 바뀐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로마서 7:25a). 일렁이던 바다가 일시에 고요해진 것 같다. 돌풍이 몰아치던 하늘에서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하다. 이 느닷없는 전환 속에 은총의 신비가 있다.

 

*기도*

 

하나님, 인간의 자기 불화는 극복할 수 없는 운명인지요? ‘되고 싶은 나현실의 나의 불일치는 우리 속에 깊은 자괴감을 자아냅니다. 대개는 그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체념하고 살지만, 바울은 그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화는 오직 주님의 은총 안에서만 극복될 뿐입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 깊이 잠길 때, 그래서 우리의 옛사람이 녹을 때 우리는 죄의 법에서 놓여나게 됩니다. 그 은총으로 육욕의 노예살이를 하는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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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을 사는 사람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사도행전 2:43-47)

 

초대교회의 모습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놀랍다. 성령 강림절 이후의 교회 공동체는 이 땅에 실현된 천국과 다를 바 없었다. 누가는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다고 전하지만,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고,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그 모습 자체가 기적이 아닐까? 저들의 삶은 사람들이 차이를 넘어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표징이다.

 

초대교회는 사랑, 일치, 거룩함이 온전히 드러나는 교회였다. 낯선 이들이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는 것은 모두가 가족이 되었다는 말이다.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그들을 가르던 사회적 장벽이 무너졌다는 말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기뻐하는 사람과 사심 없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참 놀라운 일이다.

 

 

 

 

오늘의 교회는 어떠한가? 많은 이들이 익명성 속에 머물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누군가와의 친밀한 교제를 소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과 연루되는 번거로움을 귀찮아한다. 프라이버시를 침해받고 싶지 않기에 서로를 깊이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스스로를 알리려 하지 않는다.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이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사귐을 소홀히 하는 순간, 우리는 삶의 가장 값진 은총을 잃어버릴 수 있다. 낯섦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생을 경축하는 잔치를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만으로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삶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한달음에 그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해도, 노둣돌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땀 흘리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우고, 함께 성찬을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독점과 지배와 풍요가 아니라 나눔과 섬김과 청빈함이 오히려 삶을 축제로 만든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그것을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2:47)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 정체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기도*

 

하나님,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자못 따갑습니다. 경멸의 언사와 눈빛을 만날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았다면 이런 난감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진실과 진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게 도와주시고, 이익이 아니라 의를 검질지게 추구함으로 세상의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싸늘한 세상에 봄소식처럼 다가가는 이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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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나누기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쓰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십시오. 성경에도 기록하기를 "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였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그렇게 하는 것은, 네가 그의 머리 위에다가 숯불을 쌓는 셈이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17-21)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 꼭 붙들어야 할 삶의 지침을 간결하게 요약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로마서 12:21).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이다. 기도 가운데 마음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이를 데려오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말이 아니다. 솔직하게 마음의 생각을 아뢰라. 왜 그를 용납하기 어려운지를 말이다.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내려놓는 순간 치유가 시작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오래도록 귀를 기울이여야 한다. 말씀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어떤 힘이 유입됨을 느낄 것이다.

 

또한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었던 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야 한다.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율법의 가르침이 매우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율법은 원수의 소나 나귀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보거든, 반드시 그것을 임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눌려서 쓰러진 것을 보거든,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말고, 반드시 임자가 나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 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3:4-5).

 

삶의 곤경이 오히려 원수와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어려움을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들도 자신과 똑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된다. 교회는 평화를 배우고 익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평화의 표징이 될 수 없다. 박노해 시인은 <평화 나누기>라는 시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의 과제를 이렇게 밝힌다.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남과 북, 노동자와 사용자, 여당과 야당, 부자와 가난한 사람,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낯선 시대이다. 하지만 평화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 믿는 이들은 이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사랑에 근거한 삶이 가능함을 실증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기도*

 

하나님, 거친 세상에 지친 히브리의 시인은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편 55:21) 하고 탄식했습니다. 그의 마음이 실감이 되는 나날입니다. 한 번 두 번 상처를 입는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 마음은 갑각류처럼 굳게 닫혔습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결과는 쓸쓸함입니다. 주님, 선으로 악을 이길 힘을 주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를 포기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우리 속에 심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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