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03)

 

화여, 복이 네게 기대어 있구나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창세기 13:14-18)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람은 큰 부자가 되어 벧엘 인근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곳은 아브람이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곳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조카인 롯도 역시 재산이 늘어서, 삼촌과 조카가 함께 거주하기에는 그 땅이 비좁았던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추수를 끝낸 여름 들판에서 방목을 하는 유목민들이었는데, 풀밭을 확보하고 가축에게 먹일 물을 확보하는 것은 각 집단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에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브람은 해결책을 모색한다. 문제가 있는 것을 없는 양 덮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갈등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악화될 수 있는 갈등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당사자들이 힘들더라도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그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아브람은 목자들 사이의 다툼이 자칫하면 숙질(叔姪)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조카 롯을 부른다. 그리고 ‘혈육 간에는 다투면 안 된다’는 대전제 아래, 둘 사이의 갈등을 피하는 길은 서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준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사람들은 여기서 아브람의 인간성을 보지만 사실은 가속을 책임진 사람이 취해야 할 책임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롯은 삼촌의 말이 합당하다고 여겨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하여 마침 주님의 동산 같아 보였고, 이집트 땅과도 같아 보였다. 그는 주저없이 그곳을 택한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식의 미담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롯의 선택은 매우 유감스럽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단 들을 바라보는 롯의 시선을 선악과를 바라보는 하와의 시선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성서 기자는 롯의 선택이 그다지 현명한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노자는 “화여, 복이 너에게 기대어 있구나. 복이여, 화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리요?”〔禍兮(화혜)여 福所倚(복소여)요 福兮(복혜)여 禍所伏(화소복)이니 孰知其極(숙지기극)이리요, 『도덕경』 58章〕 하고 탄식했다. 복과 화가 뿌리부터 뒤엉켜 있는 것이라면 복을 구하는 것도 화를 피하는 것도 어찌 보면 부질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눈길이 닿는 모든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아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이 머물러 살게 된 그 땅은 ‘헤브론’이었다. 헤브론은 ‘하나님의 친구의 도시’라는 뜻이다.

 

*기도*

 

하나님,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 등을 돌리는 일이 많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마음이 인간관계를 규정지을 때 우정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맙니다. 롯은 철부지였을지 모르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일쑤 그런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면서도 원망에 빠지지 않는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음을 압니다. 주님, 우리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꿈이 소멸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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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02)

 

날이 갈수록 근사해지는 삶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20).

 

이 견결한 희망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죽음의 공포조차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망한다. ‘떠난다’(analyo)는 헬라어 단어는 배가 묶여 있던 줄을 풀고 항해에 나서다, 죄수가 석방되어 감옥을 떠나다, 소가 멍에에서 풀려난다 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죽음은 해방인 셈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세상에서의 그의 소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소명이란 성도들을 더욱 발전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과 믿음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빌립보서 1:24)

 

‘나의 있음’이 그의 유익이 되도록 사는 것! 성도의 삶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는다. 남 좋을 대로 살려고 애쓴다.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고, 웃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신다. 도종환 시인의 <가죽나무>는 언어로 그린 시인의 자화상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대들보로 쓰이지도 못하고, 좋은 재목도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있는 자리에서 아름답게 살려고 애써온 시인의 살뜰한 정성이 귀하게 생각된다. 위대한 첼리스트인 카잘스의 전기를 읽다가 아름다운 고백과 만났다.

 

“지난 생일(1969년 12월 29일)에 나는 아흔 세 살이 되었어요. 물론 젊은 나이는 아니지요. 사실 아흔 살보다는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나이란 상대적인 문제잖아요. 만약 여러분이 계속 일을 하면서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을 계속 느낄 수 있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반드시 늙는다는 뜻만은 아니라는 걸 여러분도 알게 될 겁니다. 적어도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그래요. 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감동하고, 삶은 갈수록 더 근사해지니까요.”(앨버트 칸 엮음,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중에서) 날이 갈수록 삶이 근사해진다는 것, 멋지지 않은가.

 

*기도*

 

하나님, 유대의 옛 전설은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합니다. 이 땅에 잠시 머물다가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 순간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을 잊고 말았습니다. 영혼은 남루해졌고, 시야는 좁아졌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드러나기를 바랐던 바울 사도의 진솔한 고백이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뒤흔듭니다. 주님, 우리도 그런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길 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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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01)

 

티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시편 103:8-14)

 

자식은 부모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걱정거리일 때도 많다. 어쩌면 자식은 세상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속상하다고 하여 내칠 수도 없는 것이 자식이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우리를 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잘 아신다. 온갖 지혜를 자랑하고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설레발치며 살지만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이다. 변화에 종속된 것이 인간의 실체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만한 푼수가 되지 못한다. 무지할 뿐만 아니라 욕망의 구슬아치 노릇을 하느라고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값도 못하고 사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 덕분이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편 103:13-14)

 

우리의 있음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하지만 자기를 실현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는 인간은 늘 흔들림 속에 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불화는 무겁게 우리 삶을 짓누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함부로 내치지 않으신다.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사랑으로 껴안으신다. 못난 자식의 슬픔과 아픔까지도 껴안는 부모의 마음처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수도자가 아무리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자기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수도원을 떠났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 그는 마지막이라면서 다시 수도원에 돌아왔다. 2주쯤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결국 숨어서 마약을 하고 말았다. 수도자가 그를 꾸짖었다. “자네는 사나이가 아니군. 하려면 정정당당히 하지 그게 뭔가?” 그러자 그는 당당하게 마약을 했다. 그때 그 남자와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울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 길로 그는 마약을 끊었다.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졌던 것이다. 

 

신비하구나, 주님의 사랑.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시편 103:8).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꾸짖기도 하시지만 무엇보다도 슬퍼하신다. 그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옛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기도*

 

하나님, 진흙에 불안을 더하면 인간이 되고, 인간에서 불안을 빼면 진흙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 삶의 비애가 무겁게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나의 있음이 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 선과 악, 기쁨과 슬픔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우리 인생을 빚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의 신비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영광을 오롯이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빛이 되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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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00)

 

오, 복된 약함이여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갈라디아서 4:12-14)

 

바울 사도가 처음 갈라디아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번째 선교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구브로(키프로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소아시아 지방 즉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 향했다. 바울 일행은 해안을 이용하지 않고 케스트루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지역의 번화한 도시인 버가에 상륙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조력자로 따라 나섰던 요한이라고 불리우는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던 것 같다. 바울은 이 일로 상심했다. 그도 또한 건강이 여의치 못했다. 그는 버가 선교를 포기하고 곧장 소아시아의 내륙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했다. 해안 풍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텐데, 그곳은 버가에서 약 16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몸이 성치 못한 이들이 걷기에는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갈라디아 지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안팎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낯선 곳이 주는 심리적 중압감과 더불어 건강도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지역민들은 바울 일행을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었다. 바울은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회고한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바울의 약함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선의 본능을 깨웠던 것이다. 사람은 강자나 빈틈없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저항감을 느끼지만 약자를 볼 때는 동정과 연민에 사로잡힌다. 

 

사람은 누구나 강하고 똑똑해서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충동과 경계심 때문에 세상은 경쟁의 마당이 되어 버렸다. 경쟁의 논리는 ‘너 죽고 나 살자’이다. 물론 모든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경쟁의식이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경쟁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다.

 

경쟁의 창날이 부딪치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거칠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다. 물론 연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화도 잘 내고, 욕심 사납고, 때로는 폭력적인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람됨은 연약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연약함은 갈라디아 사람들과 복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돌봄을 받은 자가 돌보아 준 이들에게 복음이라는 선물을 내놓았다. 연약함을 돌보는 일을 통해 부드러워진 사람들의 마음은 옥토가 되어 복음을 받아들였다. 바울의 증언을 들은 이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기적과 표징이 나타났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약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상처를 드러냈다가 그 상처가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냉혹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연약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라 이르십니다. 그런 이들의 벗이 되려고 마음을 낮출 때 주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 유입됨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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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9)

 

사랑의 레가토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에베소서 4:16)

 

레가토(legato)라는 단어는 매력적인 음악용어이다. 끊지 않고 부드럽고 매끄럽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음표 위나 밑에 높이가 다른 두 음표를 서로 이어주고 있는 초승달 모양의 표가 레가토이다이 기호를 슬러slur라고도 부르는데 두 개 이상의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기호이다. 인간은 어쩌면 레가토로 창조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본질은 연결이다. 어느 누구도 홀로는 살아갈 수 없다. '탯줄'을 가리켜 생명의 레가토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어머니와 아이가 한 생명에서 비롯되었음을 나타내는 기호인 셈이다. 이러한 육체적 탯줄을 있게 한 정신이나 사랑 역시 레가토이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그리워하며 살았다. 둘 사이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근원적인 그리움과 기다림을 우리에게 환기시켜준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서 정작 아름다운 것은 까막까치가 놓아주는 오작교(烏鵲橋)가 아닌가 싶다. 둘의 공간적 격절을 이어주는 사랑의 다리, 바로 이것이 만남에 대한 갈구가 낳은 하늘의 레가토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이음줄이다. 죄로 말미암아 나뉘었던 하늘과 땅을 당신의 사랑으로 이어주셨으니 말이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만남의 현장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서 죄인도 원수도 하나가 되었다.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앉아 음식을 나누며 삶을 경축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일한 부류가 아니었다. 독립운동가인 시몬과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받던 세리 마태가 함께 있다. 예수가 아니라면 절대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품은 용광로와 같다. 그 품 안에서 '작은 차이'(小異)는 녹아내리고 '큰 같음'(大同)으로 거듭났다. 바울은 교회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한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몸에 갖추어져 있는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됩니다. 각 지체가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몸이 건설됩니다”(에베소서 4:16)

 

'연결'(fitted)'결합'(joined together)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개별적 존재로 살던 이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 연결되고 결합되는 것은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까막까치는 견우와 직녀가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아픔에 깊이 공감했기에 다리가 되어 주었다. 지금 세상은 '까막까치'가 되어줄 사람을 찾고 있다. 삶의 높낮이가 다른 사람들이 불신과 미움을 담아 서로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사람들의 강팍한 마음을 녹여 부드럽게 만드는 사랑의 일꾼들이야말로 까막까치가 아니겠는가.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는 사랑의 화살을 쏘아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발생하도록 만든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몸이 된다.

 

*기도*

 

하나님, 혐오와 선동의 말들이 넘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조차 그런 말로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몸으로 불화와 오해와 멸시의 담을 허무셨지만,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은 오히려 그런 담을 쌓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결속 감정을 보란 듯이 비웃고, 외줄처럼 위태롭게 이어진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이들을 벌하여 주십시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임을 한 순간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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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8)

 

상처를 무늬로 바꾸라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편 107:23-30)

 

예기치 않은 풍랑이 우리 인생의 항해를 힘들게 만들곤 한다.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순간, 우리는 부르짖지 않을 수 없다. 비통한 울음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향한 악다구니일 수도 있고, 넋을 잃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압도적 시련을 겪는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말씀으로 큰 폭풍을 일으키시고, 물결을 산더미처럼 쌓으신다. 배들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깊은 바다로 떨어진다. 그런 위기에서 그들은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다. 그들이 모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흔들리니, 그들의 지혜가 모두 쓸모 없이 된다.”(시편 107:25-27)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 것 같은 상황, 지금까지의 경험과 지혜가 모두 쓸모없게 되는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체념하고, 어떤 이는 생을 저주하고, 어떤 이는 파괴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 곤경의 순간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질병, 고통, 유한함의 자각, 죽음’ 등의 한계상황은 우리 실존의 비약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비본래적인 것에 팔렸던 마음을 되찾고, 본래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고통은 ‘복된 고통’이 된다. 

 

 

 

 

감나무 가지는 유난히 잘 부러진다. 감을 딸 때 가지를 꺾게 되는 데, 가지마다 입은 상처로 빗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가면 검게 뭉쳐진 듯한 무늬가 만들어진다.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먹감나무의 무늬이다. 사람들은 그걸 귀하게 여겨 목공예 재료로 쓰기도 하고 고급 가구를 만들기도 한다. 상처를 무늬로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이 아니겠는가.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아름다운 무늬로 만드는데 우리도 상처로 좌절하지 말고 상처를 딛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민족이 되어야겠다고 여겨요."

 

삶은 본래 힘들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삶이 힘겹다 하여 주저앉아 버리면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없다. 고통을 아름다운 노래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직간접적으로 우리를 보살피실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힘을 불어 넣어 상처를 무늬로 만들 수 있게 하신다. 흙을 빚어 아름다운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고통과 슬픔의 재료를 가지고 아름다운 인격을 빚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고통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그들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 폭풍이 잠잠해지고, 물결도 잔잔해진다. 사방이 조용해지니 모두들 기뻐하고, 주님은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신다.”(시편 107:28-30)

 

*기도*

 

하나님, 얼이 빠지고 간담이 녹는 것 같은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참 작구나’ 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도 든든하게 우리를 지켜줄 줄 알았던 것들이 다 지푸라기 인형처럼 변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듭니다.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우리 삶을 맡길 때, 우리 마음은 잔잔해집니다. 풍랑이 지나갔다 하여 이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소원의 항구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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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7)

 

사랑할 자유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갈라디아서 5:13-15)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자유이다. '자유'의 사전적 정의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제 마음대로 행동함" 혹은 "남으로부터 규정·구속·강제·지배를 받지 않는 일"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난 바울은 자신의 삶이 율법의 강제와 지배 속에서 살아온 삶이었음을 절감했다. 그는 율법 너머의 세계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주님이 눈에서 비늘을 벗겨내시자 그의 눈앞에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무엇을 해도 늘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이 툭 터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늘 율법의 감시 아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던 그가 이제는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는다. 배려 혹은 돌봄이야말로 그리스도인됨의 핵심이다. 그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지만,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 자유를 기꺼이 유보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는 사랑의 빛깔로 채색되게 마련이다. 힘이 없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뜻을 따라야 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굴욕감이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스스로 종노릇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쁨이다. 칭얼대는 손자를 업어주기 위해 무릎을 굽히는 할머니는 굴욕감을 느끼지 않는다. 만해 한용운은 <복종服從>이라는 시에서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라고 노래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의 실체이다. 바울은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라디아서 5:14)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613개 조문으로 분류한다. 그 중에서 “∼ 하라”의 형태로 된 계명이 248개이고, “∼ 하지 말라”"의 형태로 된 것이 365개이다. 248이라는 수는 사람 몸을 이루고 있는 부분의 합이고, 365는 일년을 뜻한다. 그러니까 613개의 율법 조문은 하루하루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을 실천하라는 요구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우리 속에 있는 사랑의 샘물이 말라 버린다면 사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음성가의 노랫말처럼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 저절로 되는 사랑이 가장 좋겠지만,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는 사랑'을 해야 한다. 노력한다 하여 싫은 사람을 좋아할 수는 없겠지만 사랑할 수는 있다. 사랑은 의지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싣고 험한 길을 달린 수레보다 세워둔 수레가 더 빨리 망가진다 한다. 사랑도 훈련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늘의 샘을 우리 마음에 모시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음이야말로 마르지 않는 하늘 샘이 아니던가.

 

*기도*

 

하나님, 우리를 자유의 길로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지만,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공포를 주입하기에 우리는 주저주저하며 옛 생활에 묶인 채 살아갑니다. 이제는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명랑하고 천진하게 생을 대하고, 맑고 깊은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싶습니다. 이런 우리의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속에서 사랑의 샘물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늘의 숨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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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소명이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바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요한복음 12:44-50)

 

마틴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이 입구와 출구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존재 망각'이라 한다. 자기를 잃고도 잃은 줄을 모르고 살기에, 자기를 되찾으려는 절박함 또한 없다.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몰두할 따름이다. 기독교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고백한다. 그렇기에 생명을 가진 것들은 다 소중하다. 그 중에서도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래서 생명은 '소명召命'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할 일을 주셨다. '할 일'이 뭔가 멀리서 찾을 것 없다.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하면 된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돌보고, 북돋워주고,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 말이다. 어려운 일도 많겠지만 할 일이 있는 한 우리는 살 수 있다. 

 

쌍둥이 남매를 낳은 엄마가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견딜 수 없는 통증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드레싱을 끝낸 간호사 선생이 병실을 나서면서 내일 아침에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니까 수유실로 내려오세요하고 말했다. 그 엄마는 다소 당황스러운 어조로 내려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간호사 선생은 단호하고도 분명하게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엄마니까.” 기가 막힌 말 아닌가? 사람은 누군가에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그런 일을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생은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는 열망 하나로 점철되었다.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뜻을 꺾은 이의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순종의 표상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이다. 예수의 죽음은 무력한 자의 패배가 아니라, 소명을 온전히 이룬 자의 귀환인 셈이다. 우리는 삶의 입구와 출구를 잘 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인생들이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 한 마디는 예수님의 존재의 중핵이다초가 자기 몸을 태움으로 빛을 발하듯이 주님은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영원의 등불을 밝히셨다. 세상 길에서 방황하다가 삶의 지향을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시며 그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충분히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을 치유하고 힘을 북돋워주셨다. 그 은총을 경험한 사람은 더 이상 어둠 가운데 머물 수 없다.

 

*기도*

 

하나님, ‘나는 누구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성 어거스틴이 바쳤던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하루하루 분주한 일상에 치이며 살다보니 우리는 존재-망각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넘치지만 정작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왔는지 잊고 말았습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하신 주님의 말씀이 죽비처럼 우리 마음을 뒤흔듭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삶으로 빛을 밝혀야 함을 깨닫습니다. 주님, 세상이 어둡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작은 등불이나마 밝혀드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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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5)

 

주님의 위엄에 눈 뜨다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시편 8:1-3)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거듭해서 이 구절을 되뇌이다 보면 우리는 일상의 잗다란 일들로부터 벗어나 우주에 가득찬 신비 앞에 서게 된다. 뭔가를 보며 !’ 하고 경탄할 줄 안다는 것, 그것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없다. 놀랄 줄 모르는 것이 타락한 영혼의 특색이라지 않던가. 뭘 봐도 그저 심드렁한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진 사람 혹은 영혼의 샘물이 말라버린 사람이다.

 

앤터니 플루(Anthony Flew)라는 영국 철학자가 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그가 쓴 책은 무신론의 교과서로 통했다. “신은 너무 모호한 개념이라며 신을 부인했던 그가 82세에 <신은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그가 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논거는 자연의 법칙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3) 하고 노래했던 히브리 시인의 마음을 그도 느꼈던 것일까? 앤터니 플루의 전향에 가장 실망한 것은 역시 과학적 합리성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던 무신론자들이다. 하지만 여든 두 살 노인의 이런 변화는 합리성으로부터의 후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해야 할까

 

 

 

 

구상 선생님은 마음의 눈을 뜨니라는 시에서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마음의 눈을 뜬다.//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다고 노래했다사물들을 실용성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총총한 별처럼 빛나더라는 시인의 고백이 아름답다. 이런 눈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 위해서는 우러러보는 법, 놀라고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아브라함 조수아 헤셸). 장엄함 앞에 멈추어 설 줄 아는 능력, 인간 영혼의 보이지 않는 위대함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발현될 때 우리는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는다시인은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압도적이다. 그는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한다고 말한다

 

시인의 눈에 하늘에 무심히 떠 있는 해와 달, 그것은 그저 우연히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다. 이런 눈이 열릴 때 세상은 욕망이 진창이 아니라 신비가 깃든 땅이 된다

 

*기도*

 

하나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허둥대다 보면 알 수 없는 비애감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아름답고 멋지게 살고 싶은 바람이 크지만 현실은 잿빛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도 문득 올려다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면 마음조차 환해집니다. 잊고 있었던 맑음의 세계와 아름다움이 우리의 지친 영혼을 치유해줍니다. 세상 만물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게 도와주십시오. 그 신비 앞에서 경탄하고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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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94)

 

절실함과 신뢰가 만날 때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다가와서, 그에게 간청하여 말하였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백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셔서,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과 서에서 와서,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시민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마태복음 8:5-13)

 

어느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그 앞에 나아와서 간곡하게 말한다. “주님, 내 종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서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 상황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절제하면서 예수님의 반응을 간결하게 드러낸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성은 우리에게 다음에 전개될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이어지는 백부장의 말은 다소 장황하다 싶을 정도이다. 자신은 주님을 집으로 모실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셔도 종이 나을 거라고 말한다. 자기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고, 부하들이 자기 명령에 복종하는 것처럼, 주님의 명령이 떨어지면 종의 병이 물러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신앙의 전범으로 소개한다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첫째그는 공감(sympathy, 동정)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공감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자기를 열어놓은 상태를 말한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서보는 감정이입(empathy)과는 다르다. 공감이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는 점에서는 감정이입과 비슷하지만,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감정이입은 쉽지만 공감은 쉽지 않다백부장은 종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 떠돌이 유랑 설교자 앞에 나아와 간청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둘째, 백부장은 단순하고 소박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무한히 신뢰한다. 예수님이라면 종의 병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는 주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다. 종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의 절실함과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결합하여 기적을 일으켰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초겨울 저녁, 술 한 잔을 걸쳐 약간 취기에 찬 그는 제자와 쌀쌀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어느 한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군고구마를 파는 포장마차였다. 제자는 선생께 고구마를 자시겠냐고 묻자 무위당은 뜻밖의 말을 했다. “저기 군고구마라고 쓰인 글을 보게. 초롱불에 쓰여진 저 글씨를 보게. 저 글씨를 보면 고구마가 머리에 떠오르고, 손에는 따신 고구마를 쥐고 싶어지고, 가슴에는 따뜻한 사람의 정감이 느껴지지 않나. 결국 저 글씨는 어설프게 보이지만 저게 진짜고 내가 쓴 것은 죽어있는 글씨야. 즉 가짜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글씨는 장난친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중에 나오는 김종철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서 재인용)

 

절실한 마음에서 진실이 나온다.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이가 절박한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간 글씨에서 장 선생님은 삶의 진실을 보고 있다. 온갖 필법을 연마한 끝에 써내려간 일필휘지보다도 군고구마 장사의 글씨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나님은 신학자들의 정교한 이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정직하고 절실한 이들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나는 주님을 내 집으로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마디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적의 모태는 이런 자기 겸비와 절대적 신뢰이다. 주님은 백부장의 그런 신뢰에 대해 명쾌한 말씀으로 응답하신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 시각에 그 종이 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마무리도 간결하다

 

*기도*

 

하나님, 부정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가슴은 돌가슴으로 변했습니다. 이웃들이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도 그저 혀를 찰 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릅니다. 외로운 이들은 홀로 외로움을 견디고, 괴로운 이들은 홀로 그 고통의 심연을 건너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종, 종교, 문화, 계급, 민족 등 사람을 갈라놓는 인위적 장벽을 넘나들며 아픔을 치유하셨습니다. 종의 아픔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백부장의 마음이 주님의 사랑과 만나자 치유의 빛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도 그 빛 안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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