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을 일으키는 만남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고후 13:11)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을 지나면서 마치 오래 입은 상복을 벗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별되게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삼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순절 기간 동안 저를 사로잡았기 때문일 겁니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입고 있는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신다고(시 30:11) 고백하지만, 아직 기쁨의 나들이옷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며칠 청명하더니 또 다시 미세먼지가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명자나무 붉은꽃은 찬란하고 복사꽃은 화사합니다. 자주괴불주머니와 광대나물, 냉이꽃과 제비꽃도 저마다의 자태를 자랑합니다.

제게는 이 봄이 조금은 특별합니다. 지난 4월 5일은 제가 청파교회의 인연을 맺은 지 만 4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방황하고 있던 3월의 어느 날, 몇 년째 함께 조그마한 교회에서 동역하고 있던 목사님께서 함께 갈 데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온 곳이 바로 청파교회였습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풍채가 당당한 목사님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박정오 목사님이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선배 목사님께 인사를 여쭙는 자리에 저를 데려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분 목사님께서 한 동안 농담조의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한참 후에 생각났다는 듯이 박 목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전도사, 잘 왔어.”

최초로 들은 전도사라는 호칭입니다. 그 호칭이 매우 낯설게 들렸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김선생’으로 불리웠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목사님으로부터 ‘전도사’로 불리고 나니 뭔가 덫에 걸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목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내 목회는 말이야, 방목이야. 나는 울타리를 좁게 쳐서 양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야. 사람들이 울타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하고 싶어. 그러니 김 전도사도 사람들을 동원할 생각하지 말아.”

그제서야 저는 제가 이 교회에 전도사로 초빙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건 제 의지와는 거의 무관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나중에 저는 그 목사님이 나를 청파교회에 팔아 넘겼다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인생이란 스스로 길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길에 의해 선택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일 때문일 겁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저에게 목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김 전도사, 내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일해. 그러다가 나와 생각과 지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거든 깨끗하게 떠나.”

이 말이 제게는 아주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속으로 ‘그렇지, 내가 뭐 누구 눈치나 보고 살 사람은 아니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유보 없이 유쾌하고 호탕한 박 목사님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날이 어쩌면 제게는 운명과도 같은 날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그날이 제 운명의 지침이 바뀐 날입니다. 잠시 떠나 있을 때도 있었지만 저는 그날 이후 전도사로, 소속 목사로, 부목사로, 담임목사로 40년을 청파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많이 사랑받았습니다. 박 목사님은 맑고 깨끗하고 당당한 삶과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로 제게 목회자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교우들은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저를 늘 넉넉한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저를 목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 구심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시간이 우리 속에 새겨놓은 흔적 혹은 무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났던 많은 이들이 조형의 칼날이 되어 나의 인격과 태도와 믿음을 형성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마커스 보그의 말을 좋아합니다. 믿음은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에 몸을 맡기면 물이 두둥실 우리 몸을 떠받쳐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돌보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쓰시는 부력의 도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김승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만남은 어떤 형태로든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 사건은 다른 말로 하면 변화입니다. 마음에 그리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 삶의 모든 가치들을 재배치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살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들 속에는 그 동안 의미 있게 만나왔던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 물론 부정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만남 말입니다. 그와 만났기 때문에 내 삶이 복잡해지고, 더러워지고, 탐욕스럽게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웃 사랑이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맑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흔적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공자께서 노나라 환공의 사당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의기欹器, 즉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공자는 묘지기에게 이게 무슨 그릇이냐고 물었습니다. “자기 곁에 놓아두었던 그릇[유좌지기宥坐之器]입니다. 비면 기울고, 중간쯤 차면 바르게 서고, 가득 차면 엎어집니다. 이것으로 경계를 삼으셨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 그 그릇에 물을 붓게 했습니다. 그러자 묘지기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는 가득 차고도 엎어지지 않을 물건이 어디 있겠느냐고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자 자로子路가 물었습니다. “지만持滿, 즉 가득 참을 유지하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따라내어 덜면 된다.” “더는 방법은요?” “높아지면 내려오고 가득 차면 비우며 부유하면 검약하고 귀해지면 낮추는 것이지. 지혜로워도 어리석은 듯이 굴고, 용감하나 겁먹은 듯이 한다. 말을 잘해도 어눌한 듯하고, 많이 알더라도 조금밖에 모르는 듯이 해야지. 이를 두고 덜어내어 끝까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방법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지덕至德을 갖춘 사람뿐이다.”(정민, <조심操心>, 김영사, p.30-31에서 재인용)

여기서 나온 말이 지만계영持滿戒盈입니다. 차면 덜어내고 가득 참을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득 채워지는 순간 자기의 실상을 잊기 쉽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은 사람됨을 달아 볼 수 있다”(잠 27:21)고 했습니다. 칭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의 전락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덜어내고 비우라는 말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충만한 은혜’, ‘충만한 복’,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듣기 때문입니다. 충만의 뜻은 ‘가득하게 참’입니다. 사람들은 ‘가득 참’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충만이라는 뜻의 헬라어 ‘플레로마pleroma’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다 채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 문자적 의미는 ‘가득하다’는 뜻이지만 신약에서 그 단어는 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존, 능력, 풍요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이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누군가의 선물로 내놓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몸에 있는 가시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그것이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하나님은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응답의 거절도 때로는 응답입니다. 거절된 응답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바울이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a)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의 4차 대유행이 진행되는 것 같은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계심이 풀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또 다시 비대면 예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깊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매개로 한 집단 감염이 또 다시 여기저기서 발생하면서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사뭇 날카롭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친밀한 교제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잠시 멈춰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복의 매개가 아니라 감염병의 매개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함께 써가야 할 신앙의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다닌 연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우리 신앙 이야기의 공동 저자입니다. 사실 저자는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손에 들린 필기구라고 말하는 게 합당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과 동행할 수 있음이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서로 영혼의 숫돌이 되어 모난 부분이 갈려나가고, 무디어진 부분은 예리하게 바뀌어 그분의 쓰임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빕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4월 8월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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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행복의 꿈을 내려놓고


“내적 자유와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 땅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잡으십시오.”-브루더호프 공동체 설립자 하인리히 아놀드

그리스도의 자비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우리는 사순절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늦추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하여 잿빛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계절의 흐름은 이렇게 유장하건만 사람 홀로 유정하여 희망과 절망 사이를 분주하게 오갑니다. 가만히 꽃 앞에 멈추어 서면 우리 속에서 들끓던 소리가 비로소 잠잠해지고 결삭은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듭니다.

지난 40일 동안 늘 책상머리에 두었던 사순절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실천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위 아래 두 줄로 되어 있는 실천 과제 가운데 밑에 기술된 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장바구니 사용하기’, ‘냉장고에 빈 자리 만들기’, ‘컴퓨터 시간 줄이기, ‘텀블러 가지고 다니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기술된 내용을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나의 목마름 살피기’, ‘희생의 사람’, ‘무관심 버리기’ ‘비교하는 마음 버리기’, ‘조급함 버리기’, ‘무책임한 태도 버리기’, ‘어리석음 깨닫기’, ‘편견 벗어나기’ 등의 내용은 깊은 자기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차분하게 자기를 돌아볼 수 있어 좋았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절감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벼락치기 숙제를 하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있어 다행이다 싶습니다.

느긋하고 한갓진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현실은 늘 우리를 극한의 긴장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세상 풍경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군경에 의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와 폭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히스테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커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삶의 조건이 점점 악화될 때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타자들에 대한 배제와 폭력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러니 인종 범죄를 인정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선택할 용기를 발휘하자는 말입니다. 푸접없는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 주는 것보다 더 보람찬 일이 또 있을까요.

 

사진/김승범



지난 주중에 강릉에 잠시 다녀왔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려는 길벗들의 모임에서 저를 초대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조금 내서 안목항 근처 솔숲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카이트 서핑(kite surfing)을 하는 이들을 한참 지켜봤습니다. 보드 위에 올라 연이 이끄는 대로 파도 위를 스치듯 질주하는 이들의 모습이 역동적이었습니다. 활기찬 육체를 보는 것은 언제나 흥분되는 일입니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허난설헌 기념관이 있습니다. 매우 뛰어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를 소개할 때 사람들은 대개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이라고 소개하곤 합니다. 난설헌은 호이고 본명은 허초희(1563-1589)입니다. 이 땅에 겨우 27년 간 머물다 갔지만 그가 남긴 시는 지금도 남아 우리 가슴을 울립니다. 1577년에 김성립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과거시험 공부보다는 기생집에 출입하는 것을 더 즐기던 한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차마 뭐라 말할 수도 없던 시대였던지라 그 애태움이 컸을 겁니다. 허난설헌은 딸과 아들을 낳아 길렀는데, 그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 때문인지 그도 또한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비운의 천재인 셈입니다.

기념관 바깥뜰에는 그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다리(가체)를 다하여 얹은머리를 높게 한 모양이었는데, 왠지 허난설헌의 쓸쓸했던 삶과 연결이 되지 않아 씁쓸했습니다. 그 동상 앞에는 시 한 편이 적혀 있습니다. ‘아들 무덤 앞에서 우노라’(‘哭子’)라는 시입니다.

지난해에는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에는 하나 남은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마주 보고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에는 쓸쓸히 바람 불고
솔숲에선 도깨비불 반짝이는데,
지전을 날리며 너의 혼을 부르고
너의 무덤 위에다 술잔을 붓노라
너희들 남매의 가여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라.
비록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어찌, 제대로 자라날 수 있으랴.
하염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피눈물 울음을 속으로 삼키리라.
(<허난설헌 시선許蘭雪軒 詩選>, 허경진 엮음, 평민사,p.20)

마주보고 있는 아들과 딸의 무덤을 보는 엄마의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자식이나 후손을 앞세우는 것을 일러 참척(慘慽)이라 합니다. 참혹하고 무자비한 경험이라는 뜻일 겁니다. 옛말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청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습니다. 사시나무에 부는 바람이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시나무 떨듯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허난설헌은 스산할 뿐 아니라 속절없이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그 나무에 빗대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를 날리며 남매의 혼을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남매의 무덤 위에 술잔을 붓습니다. 여기서 술잔이라 번역된 한자는 ‘현주(玄酒)’인데 술 대신 쓰는 맑은 찬물(무술)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린 자식들의 무덤에 술을 올릴 수는 없지만 무술을 부어준 것입니다. 허난설헌은 앞서 떠난 남매가 저승에서도 의좋게 노는 광경을 그림으로 절망을 밀어내려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 깃든 속울음조차 몰아낼 수는 없어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이 시를 굳이 소개하는 까닭은 주님의 십자가 아래 섰던 여인들의 아픔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과 고통은 말할 것도 없겠거니와 마음을 다해 사랑하던 분이 그렇게도 큰 고통을 겪으며 생과 사의 경계선을 건너는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들의 아픔을 우리는 차마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평범한 행복을 바라던 분이었을 겁니다.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겪고, 석양 무렵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얼굴을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고, 새들이 즐겁게 재재대는 소리를 듣고 싶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평범한 행복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큰 아픔과 슬픔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의 생태를 보여주는 영상을 볼 때마다 생명의 신비와 장엄함을 절감합니다. 동물들도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긴장한 채 살아갑니다. 악어에게 다리를 물린 누 한 마리가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온 몸의 힘을 다리에 모아 그는 밖으로 솟구쳐 오르려 하지만 악어는 완강한 이빨로 그는 물고 놓아줄 생각이 없습니다. 힘과 힘의 팽팽한 균형, 기진할 때마다 누는 잠시 쉬지만 다음 순간 또 다시 벗어날 길을 찾아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그 옆으로 새 한 마리가 마치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와 그 광경을 보다가 별일 아니라는 듯 겅중겅중 그 곁을 스쳐지나갑니다. 그렇지요. 그것이 동물세계의 문법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런 광경에 감정을 이입하곤 합니다. 어쩌면 그게 인간다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가리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라 고백합니다. 주님은 당신 눈앞에 펼쳐지는 인간세계의 참극을 무심하게 지나치실 수 없었습니다. 사투를 벌이는 악어와 누 곁을 유유히 지나쳤던 그 새처럼 사셨다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서러움, 고통과 모순, 더러움과 추함을 당신의 온 몸으로 받아들여 정화시키려 하셨기에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십자가로 귀결된 삶과 무관하게 살면서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공의와 정의를 저버린 채 종교의식에만 골몰하는 이들을 향해 하나님은 호통을 치십니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암 5:23). 십자가의 길을 온전하게 가지는 못한다 해도 우리 지향만큼은 분명해야 합니다. 힘들다 하여 지향조차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련한 존재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었던 여인들을 사로잡은 것은 예수님이 행하셨던 기적이나 가르침뿐이었던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라는 존재 그 자체를 그들은 차마 떠나보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던 분, 쓸쓸한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 주셨던 분과 헤어진다는 것은 마치 벼랑 끝으로의 추락처럼 여겨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 간절한 사랑은 결코 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비밀을 조금은 압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게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부활절에도 온 교우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어 유감입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든지 우리는 한 몸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번 부활절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는 분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 속에 들어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평강의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2021년 4월 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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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넓히십시오

“그러자 우리 주님이 내게 한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난당한 그것이 너를 만족케 하였느냐? 내가 말했다. 예, 선하신 주님, 제 모든 고마움을, 선하신 주님, 당신께 드립니다. 복되소서. 우리 선하신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만족이면 나도 만족이다. 너를 위해 당한 고난이 내게는 기쁨이요, 지복이요, 한없는 즐거움이다.“(<노리치의 줄리안>, 이현주 옮김, 말씀과밥의집, p.149)


주님의 평안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사순절 순례의 여정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조금은 더 맑아지고 깊어지셨는지요? 엄벙덤벙 시간에 떠밀리며 살다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삶에 대한 질문은 잠시 멈춰 서라는 요청입니다. 우화 속의 토끼가 생각납니다. 토끼는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 아래 누워 낮잠을 자던 토끼는 사과 한 알이 떨어지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일어나 다짜고짜 달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무너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숲속에 있던 동물들도 토끼의 서슬에 놀라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왜 달리고 있는지 아는 동물은 없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달리기에 무작정 따라 달렸으니 그럴 수밖에요.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지 속에 있을 때 두려움은 이렇게 물결처럼 번져 가게 마련입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400여명 근처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수십 명만 돼도 화들짝 놀라곤 했는데, 이제는 조금 무덤덤해진 것 같습니다. 긴장들이 풀린 탓인지 공원이나 거리 혹은 식당이나 카페에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몰리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이 더디게나마 지속되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비록 20% 밖에는 허용되지 않지만 대면 예배가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나고 있습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속히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다가오는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성을 올렸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들뜬 표정의 사람들 속에서 주님 홀로 쓸쓸하셨을 것입니다. 당신 앞에 드리운 어둔 그늘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맘 때면 예수님이 감내하셔야 했던 고독과 쓸쓸함에 깊이 감응하는 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주님의 괴로움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허망한 기대에 들떠 건듯건듯 걷고 있었습니다.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의 활기로 인해 도성은 흥청거렸지만 주님의 마음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외롭게 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주중에 목사 안수식을 앞둔 젊은 후보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생명부지의 사람이었지만 꼭 제게 안수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간곡한 부탁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일단 만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자격 심사를 받는 과정 가운데서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절망감이라기보다는 굴욕감 혹은 염증이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그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를테면 차별 금지법이라든지 방역 지침을 위반하였다가 두 주간 교회 폐쇄 명령을 받았던 00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듣고 싶었던 말은 차별 금지법에 반대한다는 명백한 답변이었고,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논증이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대답을 망설이는 후보자를 꾸짖으며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진급에서 누락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설명은 필요 없으니 가타부타만 명확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보자는 마음으로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견해에 맞서기보다는 ‘알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그 순간을 모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 가득 비애가 차올랐을 겁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저는 젊은이들을 길들이려는 순간 역사는 퇴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깎인 채 기존 질서에 두루뭉수리로 적응하며 살도록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존 웨슬리는 ‘관용의 정신’이라는 설교에서 논쟁을 통해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이나 예배나 회중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라면, 죄를 피하여 애쓰고, 선한 일을 하는 데 열심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 3>, 대한기독교서회, p.77)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라는 실체를 찾기 위해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철학사 책에서 읽은 것이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레싱의 말이 떠오릅니다. 만일 신이 오른손에 모든 진리를 쥐고 왼손에는 살아 있는 진리를 향한 노력을 쥐고 계시면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레싱은 자기라면 공손하게 왼손을 택하면서 이렇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십시오. 순수한 진리는 오직 당신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젊은 시절 진리에 대한 목마름에 시달리던 제게 이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진리 그 자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속의 어둠을 밝히며 앞으로 나갈 뿐입니다.

자기 확신에 찬 언어가 횡행할 때 세상은 거칠어집니다. 내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와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사람은 비진리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가 위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근본주의는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재단합니다. ‘옳음’과 ‘그름’을 그렇게 두부모 자르듯 가를 수 있나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고 이질적입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섬세함이 곧 사랑이 아닐까요? 양극적 사고는 위험합니다. 우리가 위치를 나타낼 때 쓰는 지시대명사 ‘여기’와 ‘저기’ 혹은 ‘이것’과 ‘저것’은 그 내포하는 의미가 참 모호합니다. 도무지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반경 10미터 안에 있으면 ‘여기’고 더 멀면 ‘거기’인가요? 서울에 있으면 ‘여기’고 부산에 있으면 ‘거기’인가요?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은 이런 양극적 언어는 사람들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언어 하나를 예시합니다.

“시베리아 북동부의 추크치족의 경우는 화자와 관련해 대상의 위치를 표현하기 위해 무려 아홉 개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윤영호 김미선 옮김, 사이, p.155)

이 말 속에는 위치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 세분화될 때 우리 감정 또한 양극단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백이 있는 언어, 나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즉각적으로 배제하거나 동화시키려 하지 않는 언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절입니다. 요즘 토마스 베리 신부와 수리물리학자인 브라이언 스윔이 함께 쓴 <우주 이야기>(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 다른 존재들과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것, 상호 공존의 기쁨에 들어갈 수 없는 이런 상황들을 지옥의 본질the essence of damnation로 여겼다.”(p.133-4)

조그마한 차이를 용납할 수 없어 배제해 버리는 일이야말로 편협한 정신의 특색입니다.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더 깊은 이해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비로소 참을 찾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고난 주간 연속 강좌가 열립니다. 교회에 모일 수 없기에 유튜브 영상으로 송출할 예정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절기이지만 이번에는 목회자들이 한 권의 책을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로완 윌리엄스의 책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비아)을 읽어나갈 예정입니다. 각각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재판 이야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 이야기를 통해 복음서 기자들이 증언하려 했던 예수님은 누구인지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서계셨던 그 재판정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 자리는 예수님에 대한 심판 자리가 아니라 몰상식과 관행화된 신앙에 기댄 채 살아온 우리 삶에 대한 심판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번쯤은 점검해보아야 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의 남은 기간만이라도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라고 청했던 죄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변함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2021년 3월 2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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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산다는 것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슥10:9) 기독교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마치 씨앗처럼 ‘땅의 모든 나라 중에’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신 28:25). 이것은 그들에게 저주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머나먼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존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2)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미세먼지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만, 봄기운이 완연한 나날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건강에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 생긴 대형 백화점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공원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감염병에 대한 경계심이 어지간히 느슨해진 것 같습니다. 행여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무서워 가급적이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 시인 황동규  선생님의 <오늘 하루만이라도>라는 시집을 곁에 두고 한 편 두 편씩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연세가 80이 넘어서 쓰신 시인지라 관념적이지도 않고, 표현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고, 깨달음을 나누어주겠다는 은밀한 의도도 보이지 않아 아주 담백합니다. 쇠약해지는 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연세이기 때문일 겁니다. 수영을 배울 때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겨야 몸이 떠오르듯이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긴 이의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시인은 자기 몸의 변화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그것을 시적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처럼
가파른 언덕을 촛불 안 꺼뜨리듯 조심조심 내려와
맨땅에서 넘어졌다.”
(‘맨땅’ 부분)

언덕길을 팔랑팔랑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아, 저 생명 덩어리’라는 말이 목에 차오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매사가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산수(傘壽, 80세를 이르는 말)를 넘긴 분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기탁하는 데는 그만한 이미지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스쳐가는 바람에 그만 촛불이 꺼질까 싶어 조심조심 걷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평탄한 곳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이런 경험 없으신가요? 월요일마다 산에 오르던 때 이런 경험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특히 겨울철 산행이 그랬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내려오다가 이제 다 왔다 싶어 방심하다 흙 속에 숨어 있던 얼음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 구절이 참 절묘합니다. “어이없지 않다.”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어이없지 않다고 말합니다. 달관도 아니고 체념도 아닙니다. 삶의 곡절과 부침을 많이 겪어본 이의 담담한 자기 수용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하여 다 이런 마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런 고요한 자기 응시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푼 욕망의 격전장에서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칙을 합니다. 재산 증식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공적 자리에 있으면서 얻게 된 정보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추구한 이들의 행태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협잡과 폭력, 혐오와 불신은 우리 사회를 불신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드린 기도에서 세상 현실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그리는 현실은 아주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합니다.
부가 늘어갈수록 교만해지는 사람들,
기술이 발전할수록 늘어나는 파괴들,
혐오를 낳는 압제, 폭력을 낳는 혐오...
어딜 가나 가득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으로 인해 조각나고 불타고
짓이겨지고 사라지는 삶,
무질서와 혼돈, 끝을 모르는 불안....“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의 기도>, 박천규 옮김, 비아, p.149)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개 비슷한가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왠지 암울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편의 시인들은 그런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도, “폭력의 한가운데서도 뿌리 뽑히지 않는 꿈을,/분노가 사무쳐도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상실과 실패 속에서/마르지 않는 슬픔의 노래를,/혐오로 불타오르는 세상에/희망을 심는 법“을 노래합니다. 시인들은 그러니까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꿈꾸는 이들은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 취급을 받을 때가 많지만, 꿈이 없다면 인간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또다시 떠들썩합니다. 땅과 집이 예전부터 투기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처럼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정책과 재산을 일시에 증식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맞물려 빚어낸 현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각축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은 세상 현실에 분노합니다. 욕망의 물결에 떠밀리고,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다 보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잊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표점’(빌3:14)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표점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 삶은 지리산가리산 엉망이 되고 맙니다. 가끔 흔들릴 수도 있고, 길에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바른길을 걷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인간 속에는 두 가지 욕망이 상존합니다. 하나는 비좁은 일상에서 벗어나 광활한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여행은 우리를 소진시키는 반복적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거리가 멀수록 시간의 속박은 줄어듭니다. 백패킹이나 캠핑족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욕망의 반영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안전한 둥지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어도 괜찮은 곳 말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고, 세상에서 입은 상처들이 회복될 수 있을 때, 우리 숨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낯선 곳에 가면 낯익은 곳이 그립고, 낯익은 곳에 오래 머물면 낯선 곳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비좁은 곳에 있으면 광활한 공간을 꿈꾸고, 모든 방향으로 개방된 광활한 공간에 서면 안온한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에 간섭하거나, 누군가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그런 시선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네요. 반면 천지간에 나 홀로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친밀한 접촉을 갈망합니다.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3:8)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가나안 땅은 그렇게 아름답고 넓은 땅은 아닙니다. 오히려 척박한 곳이 많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협소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 땅을 ‘아름답고 넓은 땅’이라 칭하신 것은 공간적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곳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새 땅입니다. 주인이나 관료가 부과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노예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말입니다.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기에 그곳은 아름다운 땅입니다. 성경에서 ‘아름답고 넓은 땅’은 주님의 사랑이 끊이지 않는 땅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땅에서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마5: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땅은 바로 그런 땅이 아닐까요? 우정과 사랑으로 빚어지는 자유의 영토 말입니다. 가급적이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마음이 스산하여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와 만나 더욱 상처를 받고 돌아서지 않도록 애쓰십시오. 아주 바쁜 시간이라 해도 그를 전심으로 환대해 보십시오. 말은 적게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서둘러 해답을 주려 하지 말고 그의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태도야말로 누군가에게 설 땅을 제공하는 일일 겁니다. 본회퍼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사는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춘분이 다가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파종을 준비하는 농부처럼, 이 난감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3월 1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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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사람들



“주님,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내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나를 달래 줍니다.”(시 94:18-19)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매화꽃은 벌써 만개했고, 산수유도 한창입니다. 공원에는 노란색 히어리가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히어리의 꽃말은 ‘봄의 노래’라지요? 미처 떨구지 못한 겨울눈 껍질이 마치 모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춘화도 막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선화, 히아신스, 크로커스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바야흐로 꽃 시절의 시작입니다. 20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루이스 글뤽은 눈풀꽃(snowdrop)이라는 시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은 눈풀꽃의 은밀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략)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후략)”

축축한 흙 속에서 자기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낀다는 것, 그래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낸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눈풀꽃을 설강화(雪降花)라고도 하더군요. 눈 내린 땅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일 겁니다. 이 놀라운 시를 읽고 있으면 왠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도 봄볕이 스며들어 새로운 삶의 용기를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아주 반가운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잠시 머물렀던 학교의 졸업생들이었습니다. 졸업한 지 벌써 31년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커피를 마시려고 마스크를 벗자 여고시절의 얼굴들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시간이 스쳐간 흔적이야 숨길 수 없지만 익숙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찾아온 까닭은 한 친구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교목실에 찾아와 제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사뭇 진지하게 생의 의미를 탐색하던 친구여서 특별히 기억에 남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커리어 우먼으로 열심히 일하던 중 몇 년 전 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는 영상을 통해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들어왔습니다.

그렇게도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병이 점점 악화되어,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면회조차 할 수 없기에 친구들의 안타까움이 더 커졌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생명 불꽃이 다 스러지기 전에 나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만들어 그에게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문득 그가 내게 보냈던 편지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저마다 치열하게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3학년 2학기 끝자락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교목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학생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공부에 대한 후회는 없다면서도 이상한 헛헛함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면서 편지를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3년만 참으라고, 3년만 앞만 보고 달리라고 모두가 말하기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외로운 생각에 질주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제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장은 학교 교육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하며 살던 한 사람의 생명 불꽃이 가물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없다더니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희떠운 소리를 한마디 한 후에, 더듬더듬 몇 마디 말을 건넸습니다만 이런 때일수록 말의 부질없음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며칠 후 의식이 깨어난 그 친구는 제 메시지를 듣고 아주 행복해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자기를 여는 법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김승범


이 봄에 미얀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전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방패를 들고 벽처럼 서 있는 경찰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수녀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왠지 익숙한 광경입니다. 사람들은 손가락 세 개를 세우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연결하는 몸짓을 통해 미얀마 사람들의 민주화 투쟁에 연대한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금 활동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그러나 흉포한 권력은 그런 평화의 꿈을 총과 칼로 막으려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광장에 나가 자기들의 민주화 의지를 드러내는 미얀마 사람들의 숭고한 용기에 감동합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한다는 것,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동의할 수 없는 현실과 만나도 속으로만 투덜거릴 뿐 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떤 장벽을 돌파하는 일입니다. 그 장벽이 그의 몸과 마음을 조각낼 수도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돌파를 감행하는 이들 덕분에 인류는 조금씩 진보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서곡을 여는 이들은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브아입니다. 그들은 바로의 지엄한 명령 앞에 서 있었습니다. 히브리 여인이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주다가, 낳은 아기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은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명령보다 더 높은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십브라와 브아는 시민불복종 운동의 원조입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가 제우스의 노여움을 산 그리스 신화의 인물 프로메테우스도 저항의 상징입니다. 비극작가인 아이스퀼로스의 희곡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그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제우스의 적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선택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되도록 가볍게 견디려 합니다.

“나는 인간들에게 명예의 선물을 주었던 까닭에
이런 고통의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회향풀 줄기에 싸서
불의 원천을 몰래 훔쳐냈는데, 그것이 인간들에게
온갖 기술의 교사(敎師)가 되고 큰 도움이 되었지.
그러한 죄를 지은 까닭에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노천(露天)에서 사슬에 꼭꼭 묶인 채.”
(아이스퀼로스, <아이스퀼로스 비극> 중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 출판부, p.208-9)

장엄하지요? 교황과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글을 쓴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되었습니다. 자기의 신학적 입장을 밝히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국회의는 루터에게 그동안의 모든 신학적 주장을 취소하고 펴낸 책들을 폐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 명령을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에 매여 있으며 제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저는 취소할 수도 없고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양심을 거스름은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술 끝에 루터는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오니, 하나님,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린들 로퍼, <마르틴 루터-인간, 예언자, 변절자>, 박규태 옮김, 복 있는 사람, p.288-9에서 재인용)

이들이 아니라 해도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 수많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로마의 평화라는 허구가 지중해 세계를 억압하고 있을 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이끌어내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는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고 종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성육신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가장 높은 분이 자발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선다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혁명은 피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가는 혁명이야말로 가장 급진적 혁명이 아닐까요?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점잖음이 아니라 비겁입니다. 주님은 대놓고 누군가를 비판하지는 않으셨지만 불의에 맥없이 끌려가지도 않으셨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새로운 비전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이게 바로 용기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미얀마의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숨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제 사순절 순례 여정도 중반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팥죽에 앉는 더께처럼 우리 마음을 뒤덮고 있는 둔감함을 조금씩 덜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자는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기게 마련’(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 도덕경 36장)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봄의 신비가 그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도 또한 그러합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의 난감함을 돌파할 수 있기를 빕니다. 우리가 어둠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한껏 누리실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3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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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창 18:19)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빕니다.

큰비가 내리더니 대기가 며칠 청명합니다. 영동 지역에는 폭설이 내려 사람들의 발이 묶였더군요.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폭설로 불편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눈 덮인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은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동화 속의 나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헬(1525-1569)의 ‘눈 속의 사냥꾼’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화가는 사냥꾼들이 사냥개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사냥의 수확물이라고는 여우 한 마리뿐입니다. 지쳤는지 그들의 허리는 구부정합니다. 개들도 지쳐 보입니다. 눈을 핥아먹는 녀석도 있습니다. 곧게 솟은 나무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습니다. 사냥꾼들 옆에 있는 선술집에서는 사람들이 짚불을 피우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따뜻하게 보이는 광경입니다. 저 멀리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가 인상적인 높은 산이 보입니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가고 있는 곳은 가족들과 따끈한 차가 기다리는 각자의 집일 것입니다. 마을 앞에 형성된 얼음판 위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팽이를 치는 아이도 있고, 썰매를 타는 이들도 보입니다. 기차놀이 하듯 열을 지어 미끄럼을 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키 채 비슷한 것도 보입니다. 놀이는 현실의 곤고함을 잊게 만듭니다. 놀이는 지나치게 경직되기 쉬운 우리 정신을 환기시키는 창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보러 나갈 짬을 내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겨울 풍경을 즐기는 것입니다.

 


학생이 아니라 해도 각급 학교가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는 3월 2일은 왠지 모를 설렘을 안겨줍니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학교로 향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그렇고, 처음 입는 교복이 어색한지 조금은 자기 모습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학교 입학생,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누가 봐도 신입생인 대학생들의 모습까지, 그 풋풋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교회학교를 담당하는 선생님들과 줌 미팅을 했습니다. 교육의 근본 목표는 ‘유능한 인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의 신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자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죄의식을 주입하거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상과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심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섣부른 죄의식은 우리에게서 경탄의 능력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이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인간의 죄성과 참상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하지 않더라도 삶의 과정을 통해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34)

그날 시간이 없어서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습니다. 교사들이 일상 속에서 꼭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동과 청소년 교육 전문가인 얀-우베 로게(Jan-Uwe Rogge)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네 가지로 요약하여 들려줍니다(안젤름 그륀/얀-우베 로게,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p. 9-11 참조).

첫째, 교육에 관여하는 이들은 아이들이 자기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도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행복과 기쁨,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느낍니다. ‘어린 게 뭘 안다고…’라며 윽박지르거나,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감정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아이들은 다른 이들을 신뢰하게 됩니다.

둘째,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몰아대지 말고 천천히 그와 동행해야 합니다. 야곱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20년 만에 귀향한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했습니다.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한감정이 풀어진 에서가 ‘갈 길을 서두르자’고 말하자 야곱은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돌보아야 할 양 떼와 소 떼가 많다며, 하루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창33:13). 사람마다 속도가 다 다릅니다. 사랑은 그 속도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요?

셋째,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불완전해질 수 있는 용기를 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에게 답을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워야 합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이들과 지내다 보면,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됩니다. 실패를 해도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알 때 아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보다 실패가 우리를 더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넷째, 경계를 정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만사가 자신의 의도나 계획 혹은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욕망의 성취가 지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욕망이 발생하는 순간 즉각 해소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부모나 어른들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게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녀가 둘 있습니다. ‘잘 적응하겠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 여린 감정을 다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닙니다. 소극적이어서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이의 경우가 더 그렇습니다. ‘손녀 바보’ 소리 들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 아이가 더 크지 않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나중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교회에 올 수 있게 되면 어느 교우가 제게 보내준 그림 동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읽어주고 싶습니다. 조금 느리고 빠를 수는 있지만, 모든 삶은 저마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더듬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은 매일 아침 낱말들의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지만 그 소리를 발음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맨 뒤에 앉았습니다. 온종일 말을 할 일이 없기만 바랐습니다. 어쩌다 선생님의 지목을 받아 이야기를 하려면 입술이 뒤틀리고 일그러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키득거리며 웃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겠지요? 어느 날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온 아빠가 소년을 강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알록달록한 바위와 물벌레를 살펴보면서 강을 따라 걷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습니다. 편안했습니다.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아이는 물끄러미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치는 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강은 지체할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 소년은 나중에 울고 싶을 때마다 아빠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 울음도 삼킬 수 있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요. 나중에 소년은 친구들 앞에 서서 강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김지은 옮김, 책읽는 곰).

우리는 어쩌면 너 나 할 것 없이 ‘강물처럼 말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영원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면 그뿐입니다. 앞섰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뒤쳐졌다고 주눅들 것도 없습니다. 지향이 바르면 언젠가 우리는 그 바다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가끔 그 물살 위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나요? 뭔가를 붙잡으려던 마음도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차이를 만들려는 조바심도 내려놓고, 우리가 전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 편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28일) 미얀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군대와 경찰이 발포를 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우리 또한 역사의 격동기를 거쳐왔기에 미얀마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습니다. 미얀마에서 더 이상 폭력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평화롭게 살고 싶은 대중들의 소박한 꿈이 짓밟히지 않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벌써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조금은 의식적으로 사순절기에 맞갖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순절 달력에 제시된 실천 사항들을 잘 지켜보십시오. 잘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깨어 있음입니다. 성공담이든 실패담이든 우리 영혼을 밝히는 좋은 재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길든 짧든 그런 경험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삶이 더 따뜻하고 밝고 견실해지기를 빕니다. 모든 이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넘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3월 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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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답게 산다는 것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시 122:1-2)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하루하루 기적 같은 날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벌써 2월의 마지막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심히 눈을 들어 바라본 달력 위에서 날들은 가지런하지만 그 행간 속에 깃든 삶의 무게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지혜자들의 말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만 잘 분별해도 삶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목회실에서 이번 주 찬양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단하지만 전통적인 곡을 선정해 녹음을 했습니다. 교우들에게 교회의 여러 장소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제안에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녹화도 진행했습니다. 그 일이 꽤 의미 있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비대면 예배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장소들을 소거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깃든 곳입니다. 텅 빈 예배당에 올라갈 때마다 외롭지 않은 것은 그곳에 스며있는 교우들의 삶의 이야기와 기도 그리고 찬양 소리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 사무실에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대부분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살핍니다. 책들이 켜켜이 쌓인 책무더기를 보며 어떤 분들은 “이 책 다 읽으셨어요?”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를 내는 법’이라는 책을 썼던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 대답합니다. “내일부터 읽을 책이에요.” 그러면 더는 묻지 않고 웃고 맙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상을 통해 많이 봤던 곳이라 낯설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낯선 곳도 아는 누군가가 머물던 장소임을 알면 돌연 친숙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비대면 예배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 약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번 주에 화면에 비쳐지는 공간들을 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달력을 잘 활용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달력의 지시사항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전구 한 개를 빼지도 못했고, 계단을 자주 이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별로 이동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답게 살기’와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실천 사항을 두고는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답다’라는 접미사는 체언에 붙어서 체언의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명확히 한정할 수 있어야 ‘자기다운’ 삶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참 어렵지요? ‘자기’라는 말 속에는 타자와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체적인 존재로 살고 싶어하지만 늘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삽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행여 다른 이들과 나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삽니다. 앞서가는 이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뒤따라오는 이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늘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 제게는 그런 삶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참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성적, 사회적 지위, 재산, 외모’ 등이 우리의 인간적 가치를 재는 척도처럼 변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다 보니 나보다 나은 이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의 감정에 시달리고, 나보다 못한 이들은 낮춰보는 버릇이 들기도 합니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 수는 없을까요? 18세기 유대교 하시딤 지도자인 주시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어째서 너는 모세가 되지 못했느냐?고 묻지 않고, 어째서 주시아가 되지 못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는 마음만 버려도 삶은 한결 가벼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실하게, 기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한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미움, 질투, 원한 감정, 복수심, 밑도 끝도 없는 분노, 심술궂음, 절망...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삶의 부산물들입니다. 그것을 제때에 분리하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해와 바람과 흙의 도움으로 그것을 분해하여 흙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꼭 붙들려 하고, 오히려 남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전시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생의 부산물에 묶어 두기에 우리 삶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처리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춰 서는 시간입니다. 일상을 중단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던 인습적 과거에서 자꾸 벗어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머물다가도 때가 되면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곤 하셨습니다. 나아감과 물러섬이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삶은 건강해집니다. 지금은 물러서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숨결을 맞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봄볕이 잠시 머문 화단에서 푸른 움이 터 오르듯 하나님의 숨과 만날 때 척박해진 우리 영혼이 소생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야말로 바벨의 소음이 오관을 뚫고 쳐들어오는 판에 듣기는 무슨 음성을 듣겠습니까. 온갖 소리와 빛깔과 모습과 느낌과 생각이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을 뒤덮고, 열두 살짜리면 이미 자동차 이름, 자전거 선수 이름, 축구 선수 이름, 영화 배우 이름, 모르는 게 없는 판인데 들리기는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이 북새통 속에서 어찌 내심의 노래가 들려 오겠습니까. 마음의 노래란 휜 가지 끝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 떨리면서 시작되는 것, 새 소리와 트는 새싹으로 시작되는 것, 그것이 차츰 커지고 깊어져 마침내는 우리 안에서 이름할 수 없는 분의 목소리로 화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러끌레르끄, <게으름의 찬양>,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1988, p.45-46)

러끌레르끄 신부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처리해야 할 일에 골몰하고, 다른 이들과의 친교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데 몰두하느라,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비는 외면하고 삽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그 신비 앞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멈춰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새 소리, 새싹이 움트는 소리, 눈석임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화성탐사선인 퍼시비어런스 호가 보내온 화성의 바람 소리를 들어 보셨는지요? 그 소리는 우리를 저 광활하고 아득한 우주의 신비 앞으로 이끌어 갑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투덜거린다고 하여 누가 대신하여 살아주지도 않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내야 합니다. 더 큰 세계와 접속된 사람은 현실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을 겁니다.

예년 같으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입니다. 한 자리에 다 모여 졸업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지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하는 식의 감격스러운 졸업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한 과정을 마치는 의례를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각급 학교를 졸업한 이들, 그리고 새로운 학년을 맞이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학교도 학생들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님들께서는 서슴없이 학생들과 교회학교가 연결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생명과 평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백신 접종이 드디어 시작된다지요?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가 기회가 되면 백신 접종에 응하시면 좋겠습니다. 백신이 만능은 아니어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의 기본 방역 지침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백신 접종 기사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미움과 혐오, 냉소, 분열증을 예방해주는 백신은 없을까?’ 올바른 신앙이야말로 그런 백신이 아닐까요?

꽃샘추위가 남아 있다고는 하더라도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새로운 날을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봄을 단순히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의 봄소식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2월 2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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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순례 여정을 시작하며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 사십 일 동안 광야에 계셨는데, 거기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막 1:12-13)

주님이 은총과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사순절 순례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긴 여정이지만 차분하고 꾸준한 발걸음으로 십자가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과 함께 우수 절기가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날이 매우 차갑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추위를 염려하지 않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얼음 사이로 눈석임물이 흐르고, 나뭇가지에 연록빛이 어른거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책상 위 성경 옆에 김영래 시인의 <사순절>이라는 시집을 가까이 두고 마흔 편의 시를 하나씩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진 않지만 세상의 순환과 거듭남을 노래하는 멋진 시입니다. 그 두 번째 시에서 시인은 봄의 설렘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굴레를 씌우지 않은 망아지가 껑충껑충 뜀을 뛰다가
기쁨에 겨워 방귀를 뀐다.
성급한 봄.
망아지 같은 봄.”


봄을 망아지에 빗대는 이 놀라운 상상력을 따라가 보십시오. 봄을 처음 경험하는 망아지는 풀이 자라 오르는 속도에 놀라고, 꽃이 지는 기척에도 화들짝 놀라 머리를 흔들며 발길질을 합니다. 이때의 놀람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명 혹은 활기를 동반하는 감정입니다. 시인은 모든 것을 새롭게 느끼는 망아지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차라리 내가/저 벌룽거리는 젖은 콧구멍으로 들고나는/바람이었으면.” 이 마음 알 것 같지 않습니까? 모든 게 낡아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어쩌면 늙음의 징후인지 모르겠습니다.


봄의 활기는 우리 시선을 밖으로 향하게 만들지만, 사순절은 우리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시선은 서로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대로 볼 수 있다면 밖에서도 안으로 난 길을 볼 수 있고, 안에서도 밖으로 난 길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은총처럼 주어진 삼감의 시간을 통해 우리 눈이 더욱 맑아지고 깊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은 우리 삶을 뿌리에서부터 성찰하라는 일종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참 열심히 삽니다. 요구되는 일도 많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들’이 우리 삶을 이끌어갑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부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 유능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무능하다는 말, 불성실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몸과 마음에 피로가 켜켜이 쌓입니다. 누적된 피로는 우리에게서 타인을 위한 여백을 앗아갑니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냅니다. 열심히 살면서도 산만한 것이 우리 실상입니다. 산만한 이들은 늘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핍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 합니다. 타인들의 반응에 따라 감정의 부침을 겪기에 늘 불안해합니다. 


물론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스스로 강자라 여기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건 당당함이 아니라 무례함입니다. 자기가 누리고 있는 특권이 곧 자기의 인격이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침묵해야 할 때도 말하고, 배워야 할 때도 가르치려 합니다. 그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만함의 포로일 뿐입니다. 자기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공한 듯 보여도 실패자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타인이란─당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형제가 됨으로써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사람, 당신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보편적 구원의 행진에 참가하고자 한다면, 사랑으로 결합해야 할 사람. (중략) 타인이란─창조 사업을 완성시키려는 노력에 당신이 협조해야 할 사람, (중략) 타인이란─아버지께로부터 보내어진 사람, 또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요청, 타인이란─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사람”(미쉘 꽈스트, <참 삶의 길>, 조철웅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p.127)


사순절을 지나는 동안 이웃과 생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근본으로부터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경쟁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번 넘어지면 영원히 뒤떨어질지 모른다는 조바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실패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은 사람은 자기의 능력으로 얻은 과실을 한껏 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패배자들의 서러움과 눈물은 보려 하지 않습니다. 


1966년에 가수 김용만 씨가 불러 히트했던 ‘회전의자’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 회전의자에/임자가 따로 있나 앉으면 주인인데/사람 없어 비워둔 의자는 없더라/사랑도 젊음도 마음까지도/가는 길이 험하다고 밟아버렸다/아~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 지금도 환청처럼 ‘억울하면 출세하라 출세를 하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위 능력주의가 당연한 공리처럼 여겨지는 살벌한 세상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그러한 능력주의 신화가 우리에게 앗아가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감사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다른 이들을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샌델은 성공에 집착하는 이들의 마음의 풍경을 이렇게 그립니다.


“우리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는 저항하는 한편, 우리는 스스로 성공했고 따라서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의 노력과 재능에 대해 사회체제가 부여하는 보상이 아무리 크든 문제 될 게 없다는 생각에는 환호하는 일은 놀랍지 않다.”(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p.109)


이런 마음이기에 그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의 사정에 둔감합니다.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 혹은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이 그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외부로부터 주어진 가능성, 기회, 행운, 재능 혹은 천분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걸 알아차리는 사람이라야 성숙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사순절은 애초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려는 이들을 위한 교육을 위해 구별된 시간이었습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옛 삶에 대해 죽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의식입니다. 그렇기에 엄격하고 신중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다양한 준비가 필요하지만 경건생활에 매우 소중한 세 가지를 몸과 마음에 새기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기도, 금식, 자선이 그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청하여 얻어내는 과정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음으로 삼고 우리 마음을 조율하는 과정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기도는 세상의 인력에 속절없이 이끌리던 우리 마음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금식은 일단 음식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 전통은 사순절 기간 동안 육식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의미의 금식은 우리 영혼의 허깃증을 끊임없이 뭔가로 채우려는 갈망에 저항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침묵은 말의 금식입니다. 친절함은 지배하려는 마음의 금식입니다. 외적인 금식을 하면서도 남들과 다투고, 자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을 빙자한 위선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당신이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사58:6)


그뿐이 아닙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떠돌이를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입혀주는 것이 진정한 금식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도 이런 금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선은 이웃들과 좋은 것을 나누며 삶을 함께 경축하려는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시혜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혜자 연하는 순간 도움을 받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굴욕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좋은 것을 나눠주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잘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정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이런 삶을 연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 중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경험한 기쁨과 깨달음을 함께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곤고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모든 분의 앞길을 은총의 빛으로 환히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21년 2월 1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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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대로 따스하게 맞는 시간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것을 행하라(Ama! et quod vis fac)! 입을 다물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라.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대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사랑의 뿌리가 드리우게 하라. 이 뿌리에서는 선 외에 무엇이 나올 수 없거니….”(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주해 7.8)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설 연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권고 때문에 조금은 쓸쓸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명절입니다. 저도 그냥 집에만 머물고 있을 예정입니다. 어느 댁은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줌(zoom)으로 새해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세배하는 영상을 찍어서 제게 보내준 분들도 계시네요. 덕담을 건넬 수도 없고, 세뱃돈을 줄 수도 없으니 그저 ‘허허’ 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설’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낯설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간은 사실 ‘낯선‘ 시간이지요. 낯섦 앞에 설 때 우리는 머뭇거리게 마련입니다. 머뭇거림 혹은 삼가는 것이 새로움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설을 신일(愼日)이라고도 하지요? 새로울 신(新)이 아니라 삼갈 신(愼) 자를 쓰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허겁지겁 살다가 잠시 멈춰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연휴의 첫날인데도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집에 앉아 있자니, 어린 시절의 설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지게에 쌀 부대와 함지를 짊어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방앗간에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신명났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는 상상을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른들이 윗목에 가래떡을 가지런히 펼쳐 놓으면 굳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안달을 했습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와 누나들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두부를 만들 때도 있었고, 엿을 고느라 밤새 불을 때기도 했습니다. 찹쌀가루로 반죽을 하고 말린 후 꿀이나 조청을 발라 기름에 튀겨낸 강정에 눈독을 들이다가 부지깽이로 맞기도 했습니다. 늦은 시간 설핏 잠이 들었다가 방구들이 너무 뜨거워 깨보면 아버지는 가래떡 써는 작두로 떡을 썰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명절이면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리는 집도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예전만은 못한 것 같습니다.

 



작고한 김남주 시인은 ‘설날 아침에’라는 시에서 텅 비어 가는 농촌 마을의 스산한 설날 풍경을 조금은 쓸쓸하게 노래했습니다. 싸락눈이 밤새 내린 설날 아침 풍경을 시인은 아주 적막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무심코 내리는 싸락눈은 ‘뿌리 뽑혀 이제는 바짝 마른 댓잎’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립니다.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도 설이라고 까치가 날아와 지저귑니다. 시인은 까치에게라도 말을 걸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없고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

 


그런데 김종길 시인은 똑같은 제목의 ‘설날 아침에’라는 시에서 사뭇 다른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시인은 무심히 오고 가는 세월이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보낼 일’이라고 말합니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시인은 아침에 한 잔 술과 따뜻한 국을 대했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하자고 말합니다. 세상이 험하고 각박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래도 세상은 여전히 살 만한 곳임을 잊지 말자고 신신당부합니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다 보니 시인의 이런 당부가 어르신의 다독거림 같아 마음이 말랑해집니다.

살다 보면 속상한 일이 참 많지요? 로빈손 크루소가 아닌 바에야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많은 이들을 만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도 사실은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빚어질 때가 많습니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일이 우리 삶 전체를 뒤흔들곤 합니다. 그만큼 우리 감정의 토대가 부실하다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가끔 희떠운 태도로 자기 감정을 숨길 때가 있습니다. 누가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애써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는 감정들 말입니다. 부끄러움일 수도 있고, 상처의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관심이랍시고 우리들의 감정의 경계를 함부로 침범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우리를 휘어잡기도 합니다. 누구를 대하든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악의 없는 관심이라 해도 다른 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베드로의 가르침이 적실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더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벧후 1:5-7)

앞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훈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입을 다물든, 말을 하든, 남을 바로잡아 주려 하든, 용서하려 하든 그 모든 일을 사랑의 바탕 위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늘 떠올려야 할 가르침입니다. 이번 명절이 가족이나 친지들 사이에 이런 사랑을 연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2월 10일은 스콜라스티카 축일입니다. 낯선 이름이지요? 스콜라스티카는 서방 수도원 운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베네딕도(480-543) 성인의 쌍둥이 누이동생입니다. 어릴 때부터 경건한 삶을 살았던 스콜라스티카는 오빠가 이탈리아의 중앙에 있는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설립하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피우마롤라(Piumarola) 수도원을 설립하여 수녀들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그레고리오 대종이 쓴 <베네딕도 전기>에는 성인을 통해 나타난 많은 기적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스콜라스티카와 관련된 기적도 하나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동생은 오빠를 만나러 갔습니다. 베네딕도는 제자들을 대동하고 수도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 동생과 한 나절을 보냈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찬미하고 성스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식탁에 앉아 거룩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도에게 청합니다. “오빠께 부탁드립니다. 이 밤에 저에게서 떠나가지 마시고 아침까지 천상 삶의 기쁨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눕시다“. 스콜라스티카는 진리의 향연이 펼쳐지던 그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네딕도는 수도원 밖에서 밤을 지샐 순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제정한 수도규칙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마침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날이었습니다. 낙심한 스콜라스티카는 식탁에 머리를 수그린 채 전능하신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잠시 후 갑자기 번개가 치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그 세찬 비 때문에 아무도 문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콜라스티카의 청을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베네딕도와 제자들은 할 수 없이 그곳에 머물며 온 밤을 지새우며 영적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그레고리오 대종, <베네딕도 전기>, 이형우 역주, 분도출판사, p.219-221). 그레고리오 대종은 더 많이 사랑한 동생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것이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규칙을 깨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설 명절 기간 누구를 만나든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의 만남이 그러했듯 기쁨과 감사의 시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모든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21년 2월 1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 추신: 먼저 이 편지를 읽어본 아내는 스콜라스티카 이야기가 집합금지 권고를 어겨도 된다는 사인으로 받아들여지면 어떡하냐며 웃네요. 그럴 일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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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 15:13)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별고 없이 다들 잘 지내시는지요? 며칠 동안 제법 날이 추웠습니다. 건물 사이를 휘돌아 나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내곤 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입춘지절입니다. 24절기상으로는 입춘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대문이나 주련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등의 입춘첩立春帖을 써붙여 놓고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빕니다. 미신처럼 보일지 몰라도 각박하고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여러분의 가정마다 기쁜 일이 넘치시기를 빕니다.

이런 풍습은 서양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올해 주현절에도 사람들은 자기 집 현관문에 하얀 분필로 ‘20+C+M+B+21’라고 썼을 겁니다. 앞뒤에 나오는 숫자는 ‘연도’를 나타냅니다. 보통은 약자인 C,M,B가 예수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의 이름의 첫 글자라고 말합니다. 카스파르(Caspar), 멜키올(Melchior) 발타사(Balthasa)가 그것입니다. 자기 집에 그런 귀한 손님들이 오기를 구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사실 C, M, B는 라틴어 문장인 ‘Christus Mansionem Benedicat’을 축약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여, 이 집을 축복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축원의 말과 동방박사 이야기가 결합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입춘 무렵이면 사람들은 오신채五辛菜를 먹지 않으면 몸에 귀신이 들어온다며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 등의 자극성 있는 채소를 먹었다고 합니다. 위와 장이 연동작용을 돕기 위해서일 겁니다. 그런데 그 오신채가 인의예지신의 다섯 가지 덕목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하는 일은 동서를 막론하고 대개 비슷합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무교병과 더불어 쓴나물을 먹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이라는 역사적 기억과 농경문화권의 봄맞이 의식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것입니다. 감염병으로 인해 모든 집합 활동이 제한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 속에 잠들어 있던 신명을 깨워야 할 때입니다. 우울과 어둠을 떨쳐버리고 다시금 삶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아직 진짜 봄이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합니다. 엊그제 효창공원을 걷다가 산수유 노란 꽃망울이 터진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계절의 봄도 봄이려니와 우리는 역사의 봄 또한 기다립니다. 이 맘 때가 되면 늘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이성부 시인의 ‘봄’입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봄’ 부분)

절창입니다. 봄은 꼭 산뜻한 바람과 함께 오는 것은 아닙니다. 봄은 ‘뻘밭 구석’이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느라 우리가 기대하는 시간에 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봄조차 해찰하는 버릇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봄은 기어코 옵니다. 기다림에 지쳤던 사람들은 봄과 만나는 순간 두 팔을 벌려 껴안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시인은 봄을 의인화하여 말합니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역사의 봄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고 진창 같은 세상과 맞서 싸운 사람들을 통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 시를 암송하며 가슴 설렜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릅니다.

 


세상에는 정말 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슴의 얼음을 녹여주는 사람들 말입니다. 지난 주 중에 택배 하나를 받았습니다. 일 년에 한 두어 차례 거창에 있는 목사님 댁에서 보내오는 그 택배를 제가 반기는 것은 그 안에 담겨있는 물품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노란 종이에 인쇄된 사모님의 편지 때문입니다. 택배 상자 안에는 수십 개의 종이봉투 안에 갖가지 곡물과 가공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시래기, 들깨, 계피, 생들기름, 토란대, 현미차, 현미찹쌀, 쌀 뻥튀기 과자, 떡국 떡, 먹는 가래떡, 수수, 곶감, 호두, 토종 재팥, 토종 흰팥, 토종 붉은팥, 토종 콩나물 콩, 메주콩, 서리태, 쥐눈이콩, 강남콩, 토종쌀, 손바느질로 만든 컵 받침. 사모님은 각각의 물품을 어떻게 재배하고 수확했는지, 그 종자들을 어떻게 입수했는지, 조리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려내곤 합니다. 그 작물들을 심고 가꾸는 과정에서 경험한 자연과의 교감 이야기는 덤입니다. 종이봉투 겉면에 작물 이름을 적을까 했지만, 보물찾기하듯 열어보시라고 일부러 적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읽고는 빙그레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사모님의 선선하고 따뜻하고 푸근한 마음과 표정이 읽혔기 때문입니다.

이 얄궂고 험난하고 난폭한 세상을 염려하며 비분강개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세상의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나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끔은 과도한 열정 때문에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혐오하고 냉소하기도 합니다. 그분들도 다 소중한 이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잠들어 있는 선의 열정을 조용히 깨우는 이들은 스스로 봄이 된 사람들입니다. 마음 씀이 따뜻한 사람, 누구를 만나든 정성스럽게 대하는 사람들과 자꾸 만나다보면 그들의 선함이 우리 속에 스며들지 않을까요? 이런 사람들과 자꾸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에 골똘하다보니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나와 만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가슴에 나는 어떤 흔적을 남겼나?’ 이 질문 앞에 설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는 이들을 가리켜 “우리는 구원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나,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라고 말했습니다. 꽃들은 다가오는 이들에게 강제로 자기 향을 맡게 하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이들이 자기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자기를 개방할 뿐입니다. 다가오는 이를 밀어내지 않고, 멀어지는 이를 붙잡지 않습니다. 이런 홀가분함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집착하는 순간 향기는 썩은 냄새로 바뀌기 쉽습니다.

주중에 철학자 김진영 선생의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진중한 철학 강의도 있었고, 묵직한 에세이도 있었고, 짧은 단상도 있었습니다. 그는 몇 해 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그는 문장을 통해 생의 의미를 묻고 또 물었습니다. 절제된 언어의 행간에 깃든 절실함에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습니다. 암과 사투를 벌이며 적었던 글 가운데 두 대목을 함께 읽고 싶습니다.

“바울은 옥중 편지에 썼다. ‘내 마음을 고백하자면 저는 죽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 소망을 뒤로 미룹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젠가 강의에서 말했었다. 나를 위해 쓰려고 하면 나 자신은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그러나 남을 위해 쓰려고 할 때 나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된다고.”(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p.40)

김진영 선생이 자유스럽게 인용하고 있는 대목은 빌립보서 1장 20절 이하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자기의 바람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지만, 성도들을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인도하는 것을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군가의 삶에 응답할 때 인간다워집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다른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고 싶어한 철학자의 마음과 바울의 마음이 오롯이 일치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의지가 굳어도 질병의 고통은 떨쳐버리기 어렵습니다. 김진영 선생은 흔들리는 자기 마음을 살핍니다.

“지금 나의 삶이 위기에 처한 건 의사가 말하듯 소화기관 하나가 큰 병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내 몸속에 살고 있는 또 하나의 장기, 즐거움의 장기, 생의 기쁨만을 알고 있는 철없는 나의 장기가 그만 병들었기 때문이다. 이 병에는 근거도 없다. 소화기관은 병들어 사라져도 기쁨의 장기는 생의 마지막까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김진영, 앞의 책, p.73)

그는 기쁨의 장기가 병든 것이 아닌지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기쁨의 장기가 건강하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기쁨의 장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 삶을 초월하는 하나님에게 접속되어야 합니다.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깃들기를 빕니다. 서 있는 자리가 어디든 그곳에서 봄을 선구하는 이들이 되십시오. ‘그대, 겨울을 이기고 돌아온 이들이여’, 여전히 겨울 한기에 갇혀 있는 누군가에게 봄소식이 되어 다가서십시오. 주님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우리도 일을 해야 합니다. 샬롬!

2021년 2월 4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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