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연장이 되어

의의 연장이 되어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6:13)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기쁘게 즐겁게 한 주를 지내고 계신지요? 서늘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만 뜻하지 않은 황사가 푸른 하늘을 가리고 있네요. 한 동안 미세먼지 걱정을 잊은 채 지냈는데, 우리가 처한 현실의 엄중함을 다시 자각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시드럭부드럭 꽃들이 스러지고 있지만 개망초 쑥부쟁이 바늘꽃은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장하고 예쁩니다. 말은 통하지 않으니 따뜻한 눈빛을 보내 그 명랑한 버팀을 응원합니다.

며칠 전 우리교회 청년의 사진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 인도의 갠지스 강이 보고 싶어 문득 찾아간 바라나시에 40일간 머물며 찍은 사진과 자기 마음의 풍경을 그린 글로 구성된 전시회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 빛과 어둠을 나누는 일에 익숙하지만 이 둘은 나눌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하나입니다. 사진을 보면서 그의 시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풍경을 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풍경 속에 깃든 삶의 본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진을 둘러보다가 작가에게 어느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드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가리킨 사진은 온갖 오물이 떠밀려오는 얕은 강물에 쪼그리고 앉은 상태로 조야한 낚시 바늘을 강에 던져둔 채 집중하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을 담고 있었습니다. 깨끗함과 더러움의 구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재를 실은 강물을 더럽다, 불쾌하다 여기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그 광경을 통해 젊은 작가는 성스러움을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해질녘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며 주변에 있는 식물들을 살피고 있는데 바지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습니다. 모니터에는 연세가 많으신 권사님의 이름이 떠있었습니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권사님의 음성은 맑고 또렷했습니다. “목사님, 많이 망설이다 전화를 올렸습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 00로 삶의 터전을 옮겼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목사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괴질 때문에 만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음성이라도 듣고 싶었어요.” 피차 안부를 주고받으며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함께 걸어온 세월의 무게가 고마움으로, 안쓰러움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쇠락의 징조가 드러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헬렌 니어링이 엮은 <인생의 황혼에서>라는 책을 찾아 읽다가 한 문장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남아 있는 힘이 줄어들수록 내게 그것은 더욱 소중해집니다. 나는 한쪽 귀를 잃었지만, 지금처럼 감미로운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 눈이 너무 나빠져서 젊은 시절 자연이 보여주었던 그 빛이 희미해지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순수한 기쁨으로 자연을 마주한 적이 없습니다. 내 수족은 이내 지치겠지만, 무한한 창조의 섭리가 드러나는 이 활짝 열린 공간에서 내 수족을 움직일 수 있는 특권을 지금 이 순간처럼 소중하게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매일 꼬박꼬박 먹는 이 소박한 음식을 이렇듯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비록 삐걱거리고 흔들리기는 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의 움막집에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헬렌 니어링 엮음, <인생의 황혼에서>, 전병재·박정희 옮김, 민음사, 2002, p.30-31/윌리엄 엘러리 채닝이 ‘루시 에이킨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40)

연세 드신 분들의 마음이 이 글 그대로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누리고 있는 생을 한껏 기뻐하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결핍에만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잘 누릴 줄 아는 것이 생의 지혜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잘 익어 땅에 떨어지는 열매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홀가분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 여정 마치는 그날이 새로운 여정의 출발임을 압니다. 무명의 시인은 땅의 길이 끝나는 순간 하늘의 길이 열린다고 노래했습니다.

지난 주부터 교회당 수용 인원의 1/3이 모여 예배드리는 일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교회는 이번 주일부터 대면예배와 영상 예배를 병행합니다. 정말 오랜만에 교우들을 만날 생각에 설렙니다. 한 동안 사람들이 전혀 머물지 않았던 지하 친교실 공간도 깨끗하게 쓸고 닦았습니다. 아직 식사를 나눌 수는 없지만 행여 교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시면 그곳 공간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송실을 담당하는 교우들도 예배가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1,2부 예배 리허설을 했습니다. 초봄부터 시작된 팬데믹 상황이 늦가을에 이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힘겨운 시간을 뚫고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김광규 시인의 ‘춘추春秋‘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한 줄 쓴 다음/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이며/병술년 봄을 보냈다”. 산수유 꽃 피는 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지만 시인은 ‘꽃망울을 터뜨린다’라는 표현을 연상했던 것일까요? 그렇기에 ‘들린다고 할까 말까’ 망설였던 것입니다. 시인은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조사 하나를 바꾸는 순간 문장의 뉘앙스가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고심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아내는 허튼소리 말라는 눈치였습니다. 물난리가 지나가고, 열대야로 밤을 지새던 여름이 지나고 나서야 시인은 마침내 한 줄을 시에 더 보탰습니다.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 “창밖에서 산수유 꽃 피는 소리”라고 적고 “뒤뜰에서 후박나무 잎 지는 소리”를 적기까지 세 계절이 지나갔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형상화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춘추’라는 시 제목이 참 적실하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시간도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시간을 우리는 그리움으로 채웠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지냈냐고 안부를 물으며,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밀린 이야기를 다 나누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차분하게 그 시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번 주일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사실 개혁되어야 하는 것이 ‘종교’ 일반이라기보다는 ‘기독교신앙’ 전반이기에 상투적으로 쓰는 이 말이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면벌부 판매를 반박하는 ‘95개조의 신학 논문’을 비텐베르그 성교회 문에 게시한 날을 사람들은 종교개혁기념일로 삼고 있습니다. 개혁 정신은 낡은 것, 변질된 것, 권력으로 변한 것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예수 정신이라는 알짬이 사라진 교회와 제도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만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안타깝게도 지금의 교회는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각 교단들이 보이는 행태는 개혁 정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이들이 희망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희망은 품는 것이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먼저 위로부터의 은총이 주어져야 합니다. 잘못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조롱, 냉소와 비난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무너지는 교회를 바로 세우는 것은 기우뚱한 벽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밀어넣는 이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한 달음에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더디다 하여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칠 뿐입니다. 잔뜩 찌푸린 날입니다. 그러나 저 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가끔은 어둠에 잠기지만 본래는 청정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지내십시오. 주위에 명랑의 기운을 불어넣으십시오.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기쁨 한껏 누리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10월 2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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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롬11:29)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조석 기운이 제법 시원합니다. 건강한 즐거움을 한껏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활 속 거리두기 단계가 조정되어서 다행입니다. 안심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래도 막혔던 통로가 조금은 열린 것 같아 좋습니다. 그렇지만 더욱 조심스럽게 이 시간을 살아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본 방역 수칙을 잘 지켜가면서 일상을 살아내는 성실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아침 저녁 공원을 산책하면서 색깔이 변해가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조락의 계절이 다가옴을 실감합니다. 조금은 쓸쓸한 듯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싫지만도 않습니다. 피어남과 스러짐은 생명의 자연스런 흐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변화 속에서 꼬물거리며 자기에게 부여된 시간을 살아갑니다. 저마다의 슬픔과 아픔을 짊어진 채.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낯선 이들조차 정겨워 보입니다.

큰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댄 채 몸을 좌우로 흔들며 몸에 자극을 주는 분들을 봅니다. 투정 부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빙그레 웃게 됩니다. 엉거주춤한 기마자세를 한 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두 팔을 맹렬하게 앞으로 내뻗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싯지싯 다가오는 세월을 밀어내려는 것일까요? 눈을 감은 채 배를 퉁퉁 두드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떠날 생각이 없는 뱃살을 달래 어떻게든 돌려보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붉은 볏을 세운 맨드라미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겨운 풍경들입니다.

생활 속 거리두기 단계가 낮아지면서 공원 곳곳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느라 둘러쳐져 있던 끈들이 말끔히 제거되었습니다. 배드민턴 치는 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아침 대기를 뒤흔들더군요. 운동 기구가 있는 곳마다 늙수그레해 보이는 분들이 모여 분주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줄이 쳐졌는데도 굳이 그 안에 들어가 운동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유난히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그분들을 보면서 ‘죄의 사회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죄책감이라는 무게를 홀로 감당하기 어려울 때 자기들의 죄에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의 부담을 경감하려는 일종의 전략일 겁니다. 하와가 아담에게 선악과를 준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청소년들이 유난히 욕을 많이 하고 위악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동료들로부터 소외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른이라고 하여 다를 것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에 포도밭 근처에 서 있던 배나무에서 주인 몰래 배를 훔쳤던 기억을 떠올립니다. 그는 자기가 도둑질을 했던 까닭은 “조금이라도 어쩔 수 없는 궁색에서가 아니오라, 정의가 없고, 싫고, 불의에 배불러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결함 자체를 사랑했단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해서는 안될 일을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닌, 다만 해서는 안될 일인 그 때문에 한다는 것이 그토록 즐거울 수가 있었겠나이까?”(성아구스띤, <고백록>, 최민순 옮김, 성바오로출판사, 1992, p.65) 생각해보면 혼자서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그 일을 행했던 까닭은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싫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 갈림길에 설 때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인들에게 준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우상 앞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를 두고 고린도교회가 불필요한 논쟁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시장에 나오는 질 좋은 고기가 우상 앞에 바쳐졌던 것이 많았다는 데 있습니다. 신자들 가운데서는 그 고기는 그저 고기일 뿐이라며 서슴없이 구매하여 소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걸 먹는 순간 우상과 연루된다고 생각하여 한사코 거부하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그 문제는 교회를 뒤흔드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가르침은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합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일을 두고 말하면,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신이 없습니다”(고전8:4). 그러니까 우상 앞에 바쳐졌던 고기라 하여 못 먹을 이유는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나의 자유로운 선택이 누군가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은 매우 단호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고전8:13)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상 앞에 바쳐진 고기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 사도가 전제했던 말이 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b) 나의 행동이 다른 이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무입니다. 

공원의 금지된 공간에서 운동을 하던 분들 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왔네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문득 나뭇잎 사이에 떨어진 모과를 보았습니다. 채 익지 못한 채 떨어져 한쪽이 이미 검게 변하고 있었습니다. 주워올까 말까 하다가 그냥 버려두었습니다. 교회 사무실에 들어오니 고진하 시인이 이번에 출간한 시집 <야생의 위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목차에 ‘모과’라는 시가 있어 먼저 찾아 읽었습니다.

“아직 덜 익은 채 떨어진
황달 기 느껴지는 노란 연민을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고
하루 몇 번씩 킁킁 코를 대봅니다”(‘모과‘ 부분)

역시 시인은 시인이지요? 그는 덜 익은 채 떨어진 모과를 가리켜 ‘노란 연민’이라 말합니다. ‘노란 연민’이라니요? 그것은 사실 무르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모과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혹은 마음일 겁니다. 아무의 눈길도 받지 못하는 그 모과를 그는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았습니다. ‘모서리‘라는 시어가 바닥에 떨어진 모과의 운명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킁킁 냄새를 맡음으로 시인은 모과의 존재를 되살려내고 있습니다. 이 마음이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버림받은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차마 자기 안의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세월을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택배 노동자 한 분이 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오늘은 더 늦을 거예요’라는 아들의 마지막 말이 자꾸 떠올라 울고 또 울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 상황은 모든 이들에게 힘들지만, 특히 생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이들에게 참 가혹합니다. 쉼 없는 노동, 소외된 노동 속에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지만 그런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정치인들에게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제정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일 또한 시민의 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현장 예배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일단 이번 주일은 영상예배를 기본으로 합니다만 그래도 꼭 나오시고 싶은 분들은 사무실에 먼저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는 말씀을 꼭 붙들고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십시오. 금주의 남은 시간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지금 곁에 있는 이들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와 청량한 기쁨을 안겨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가슴 가득 하늘의 숨결을 받아 안고, 사랑의 여정을 계속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0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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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의 순환 속에서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이번 주에는 며칠 앞서 편지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일 직전보다는 주중에 소식을 나누는 것이 더 좋겠다는 제안 때문입니다. 별고 없이 잘 지내시는지요? 함께 시간의 흐름을 타고 지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격절의 시간이 길어지니 그리움이 깊어갑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가을빛이 왠지 너누룩해 보입니다. 오늘이 한로寒露네요. 찬 이슬이 내리는 때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인지 바람이 서늘합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때의 풍경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제비는 돌아가고 떼기러기 언제 왔노. 벽공碧空(푸른 하늘)에 우는 소리 찬 이슬 재촉는다. 만산滿山 풍엽楓葉(산에 가득 찬 단풍잎)은 연지臙脂(화장할 때 두 볼에 찍어 바르는 붉은 색)를 물들이고, 울 밑에 황국화黃菊花는 추광秋光(가을 빛)을 자랑한다.”

아직 본격적인 단풍철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절이 깊어가고 있음을 날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공원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던 꽃무릇이 다 시들었습니다. 꽃대 위에는 마치 사위어버린 불꽃같은 꽃의 잔해가 남아 허망한 열정의 시간을 돌아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꽃대 아래도 잎들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소박하고 조촐하게 피어나는 여뀌는 자기를 도드라지게 보일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갑니다. 공원 곳곳에 서양등골나물 흰꽃이 만발입니다. 외국에서 들어온 생태교란종이라지만 눈꽃을 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제법 그럴싸합니다.

식물들은 묵묵히 자기 시간을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만 홀로 유정하여 쓸쓸하다느니, 허망하다느니 요란을 떨 뿐입니다.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 1923-2012)는 ‘두 번은 없다’라는 시에서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고 노래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은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 시간입니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무리 힘겹고 공허해도 살아 있다는 것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소멸할 것임을 알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존재, 사라짐, 아름다움이 이렇게 아름답게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쓸데없는 불안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3:11)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맛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멋진 가을날 우리의 시간이 그런 아름다움으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행했던 성찬식의 후일담이 곳곳에서 들려옵니다. 낯선 경험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은혜로운 시간이었다고들 말씀하시더군요.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의례에 동참하는 일이 능동적으로 이루어졌기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느 부부는 ‘빵과 포도주’를 서로에게 건네며 “이는 당신을 위해 주시는 우리 주님의 몸입니다.” “이는 당신을 위해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라고 말할 때 가슴 깊이 뭔가가 들어온 것 같더라고 증언하시더군요. 한 공간에서 성례를 집행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주님은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은총으로 모두를 감싸주셨습니다. 공간적으로는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은혜의 자장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교회 야외예배를 준비하느라 분주했습니다. 기차를 전세 내서 갔던 것 기억나시지요? 어린 시절 수학여행을 가는 것처럼 설렜던 그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김유정 역 앞 식당에서 때 맞추어 익어가던 춘천닭갈비의 맛도 떠오릅니다.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나누었던 이야기의 내용은 다 잊었지만 그 장면만큼은 머리에 오래 남아 있습니다. 참 좋았던 시절입니다. 불광동 팀 수양관도 잊을 수 없습니다. 노천극장에서 드렸던 예배의 기억도 새롭습니다. 새들도 찾아와 즐겁게 노래를 불러주었었지요. 잔디밭에서 나누었던 커피 향이 그립기만 합니다.

저는 어제 오늘 아름다운 원로 분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가상의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함께 해 온 시간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기쁨과 슬픔의 시간을 함께 건넜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하루 나들이를 기획하고 있었을 테지요. 먼 곳을 찾아갈 수는 없었지만, 버스를 타고 오가며 보는 경치며, 차 안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코스모스와 갈대, 그리고 잔잔한 햇살이 고즈넉했습니다.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에도 우리 교회의 새 식구가 되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아름다운 공동체에 대한 목마름 때문일 겁니다. 아직 대면하여 사귈 수는 없더라도 그분들이 청파교회에 속한 지체임을 기쁘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새 교우들에게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교회생활을 안내하는 새교우 교육은 영상을 통해 시행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감리교회의 감독 선거가 열립니다. 각 연회의 감독과 4년 임기의 감독회장을 선출하는 중요한 모임입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감리교회는 오랫동안 감독선거로 인해 분열을 거듭해 왔습니다. 소송과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끄럽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올해도 감독회장 선거를 앞두고 아주 심각한 갈등 상황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교회의 지도력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습니다. 거룩한 영적 직무를 위임받은 이들이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올해는 어느 분들에게 감독의 직임이 맡겨지든 그분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으로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모세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 장인 이드로는 신실한 사람들을 뽑아 일을 나누라고 권고하면서 그 기준을 정해줍니다.

“또 자네는 백성 가운데서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참되어서 거짓이 없으며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을 뽑아서, 백성 위에 세우게.”(출18:21)

능력과 덕을 함께 갖춘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거짓이 없어 부정직한 소득을 싫어하는 사람이라야 사심 없이 백성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독의 직임은 명예로운 자리도 아니고, 높은 자리도 아닙니다. 섬김의 자리입니다. 우리의 전도된 현실을 놓고 비웃고 손가락질만 할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절실하게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 우리들 개인의 문제를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하지만,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감리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후에 재야로 물러가면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이런 약속을 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잘 되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일을 그친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당신들이 가장 선하고 가장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치겠습니다.”(삼상12:23)

이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전히 세상은 소란스럽지만 평화로운 세상의 꿈은 포기될 수 없습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0월 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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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량할 수 없는 사랑 속으로

측량할 수 없는 사랑 속으로





“하나님, 나를 지켜 주십시오. 내가 주님께로 피합니다. 나더러 주님에 대해 말하라면 ‘하나님은 나의 주님, 주님을 떠나서는 내게 행복이 없다’ 하겠습니다.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시16:1-3)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한가위 명절을 잘 보내셨는지요? 고향을 찾은 분들도 계시고, 집에 머무시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뵙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그 마음도 귀하고, 그리운 마음을 달래며 영상으로만 인사를 나누는 마음도 귀합니다. 구름이 걷혀 보름달을 볼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보름달 하나 둥덩실 떠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자동화된 이미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가위 보름달 하면 제게는 늘 시골집 초가지붕 위에 열렸던 둥근 박이 떠오릅니다. 보름달과 마주 보고 있는 희고 큰 둥근 박의 이미지는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제 마음을 적십니다. 그런 박을 바라보며 어른들이 들려주시던 흥부 놀부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던 시절이 그립습니다.

저는 지금, 마치 전쟁을 치른 것 같은 온 집안을 정리하고 서재에 앉아 있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찾아와서 놀다 갔습니다. 집안 곳곳에 남은 아이들의 흔적이 사뭇 정겹습니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재잘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고 그것을 가위로 자르고 다른 곳에 이어 붙이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무한 체력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다 아시지요? 잠시라도 아이들 눈을 피해 쉬려 하면 ‘할아버지, 놀아줘야지!’ 하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또 놀이 현장으로 끌려나가곤 했습니다. 몸은 고단한데 마음은 흐뭇합니다. 놀다가 지치면 아이들은 제 무릎 위에 오도카니 앉아 제 얼굴을 살핍니다. 다섯 살배기 아이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에 있는 이 점은 누가 심어놓은 거예요?” 
“내가 기르는 거야.“ 
“뭐 하려구요?” 
“나중에 요리해 먹으려고.” 
“무슨 요리요?” 
“이게 버섯이거든. 나중에 할머니가 양념을 넣고 요리해 줄 거야.”
“아닌 것 같은데.”

낄낄 거리고 웃지만 아이는 따라 웃지 않습니다. 쇠락의 징조를 읽는 것일까요? 반칠환 시인의 <어머니5>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부제가 '검버섯'입니다.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다니던 산지기 아내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마루에 걸터앉아 먼산 바라보신다칠십 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반칠환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중에서, 시와시학사)

어떤 광경이 선하게 그려지지 않습니까? 시인은 산골짜기를 터전 삼아 일평생 노동하며 살아온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허리는 굽었고 눈도 약해져 자꾸 눈물이 굅니다. 마루에 걸터앉은 어머니는 하염없이 먼 산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무심한 눈길이 향하는 곳은 단순한 풍경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회한조차 없이 자기 생을 응시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어머니의 얼굴에는 검버섯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가 어머니 얼굴을 밭 삼아 뿌리내린 겁니다. 시인은 담담하게 그 광경을 그리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 담긴 애잔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생의 엄중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주어진 자리에서 견뎌야 할 생의 몫을 잘 살아내셨습니다.

이 어머니와 저를 견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지는 이 시대이지만 조금만 마음을 열고 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한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둘은 갈등을 거듭합니다. 꾀쟁이 야곱은 붉은 콩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삽니다.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에서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채기도 합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챈 에서는 아버지의 장례만 끝나면 야곱을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야곱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고 에서는 에돔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 두 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늘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오바댜서는 이스라엘이 침략군을 맞아 고군분투할 때 에돔은 형제 국가를 돕기는커녕 침략자들과 한패가 되었다고 꾸짖습니다. 심지어는 피란길에 나선 이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버리기까지 했다고 말합니다. 불구대천의 원수란 말이 실감 납니다.

이 두 나라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한배에서 나온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원으로 자꾸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의 갈등이 근원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상을 살면서도 자꾸 우리 삶의 뿌리를 돌아보며 산다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고백이 자연과학적 진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 속에 머문다는 것은 삶이 신비임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경외심을 품고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비와 경외심을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숨결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나라, 세대와 세대,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의 차이, 피부색과 종교의 차이는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귀향의 계절에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이러한 일치의 가능성이 아닐까요?

긴 연휴의 마지막 날이 마침 주일입니다. 매해 10월 첫 주는 전 세계의 교회가 ‘세계 성찬 주일’(World Communion Sunday)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 뿌리는 미국 장로교회가 1930년대에 제안한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된 것은 1982년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열린 세계 교회 협의회 모임부터입니다. 대회 참가자들은 이념과 분쟁으로 찢긴 세상을 그리스도의 식탁 앞에 함께 앉아 치유하자는 뜻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사실 세상 분쟁의 많은 부분이 종교 분쟁임을 생각할 때 ‘세계 성찬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비대면으로 예배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어떻게 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온라인으로라도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 웨슬리가 말하는 ‘은혜의 수단’ 가운데 매우 중요한 의식인 성찬식 없이 한 해를 보낼 수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우려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교우들의 성숙한 믿음과 태도를 신뢰합니다. 할 수 있으면 온 가족이 성찬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들이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의논하십시오. 성찬상을 정갈하게 마련하고 빵과 포도주 혹은 포도즙을 그 위에 올리십시오. 예배 중에는 깨끗한 천으로 덮어놓으십시오. 의복은 가급적이면 단정하면 좋겠습니다.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가족들이 함께 성찬의 은총을 비는 기도를 올리십시오. 참고로 신학자 칼 라너의 성만찬 기도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이 성만찬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을 되찾게 하소서. 몸과 영혼이 순수하고 진실한 사람, 당신의 은혜가 참으로 존재함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는 사람,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과 우리가 섬겨야 하는 이들을 위해 그 은혜의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당신을 그저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여기는 우리, 우리의 삶과 죽음 속에서 침묵하시는 하나님, 희생 제물로 드려지신 하나님으로만 바라보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어 주소서. 진리의 생명, 무한한 자유의 생명, 빛의 생명, 그림자 없는 밝음의 생명,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을 거룩하게 먹고 마시는 생명, 모든 피조물이 아버지께로, 모든 것 안에 계신 모든 것 되시는 아버지께로 넘어감을 끊임없이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생명, 바로 그 생명입니다.”(칼 라너, <칼 라너의 기도>,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19, p.188-9)

아직 어리거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성찬의 소중함을 미리 일깨워주는 게 좋겠습니다. 이 성찬을 통해 가족의 일치는 물론이고, 각지에 흩어져 사는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손길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이제 추석 연휴가 끝나고 상황이 좋아지면 우리가 다시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품습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10월에 우리 믿음이 더욱더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온 교우들이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좋으신 주님 앞에 기도 올립니다.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이 여러분을 감싸시기를 빕니다.

2020년 10월 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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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뭇거림으로 만드는 평화

머뭇거림으로 만드는 평화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고후13:11)

대대로 우리의 거처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평안하게 지내셨는지요? 맑고 청명한 대기가 우리 마음속 우울함을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는 아주 오랫동안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입니다. 잊고 계신 것은 아니지요? 그리스도인 됨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만 국한될 수 없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상기시키는 이들입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거룩의 세계를 가리켜 보여야 한다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욕에 길든 우리는 자신이 순례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욕망의 거리를 바장입니다.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려면 신앙의 길을 걷는 동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비대면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셨다는 사실이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나날입니다.

가을입니다.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 조금씩 물드는 모습을 지켜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쓸쓸함이 찾아옵니다. 열흘 붉은 꽃도 없고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이 실감 나는 나날입니다. 강둑에 앉아 반짝이는 윤슬을 보고 있노라면 아늑한 고요함이 물결처럼 번져옵니다. 문득 어린 시절에 부르곤 했던 동요들이 떠올라 가만히 불러봅니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사알살 떠다니겠지”. 평화롭지만 쓸쓸한 정경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즐겨 부르던 동요는 대체로 쓸쓸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섬 집 아기’, ‘겨울나무’, ‘엄마야 누나야’ 등이 다 그렇습니다. 아기를 혼자 놔두고 섬 그늘로 굴을 따라가야 하는 엄마의 마음,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에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부는 나무도 그렇지요.

동요는 아니지만, 이은상 선생님이 가사를 쓰고 현제명 선생님이 곡을 만드신 ‘그 집 앞’이라는 곡도 떠오릅니다.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이 머뭇거림, 망설임을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답답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습니다.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의지적인 행동이 아니라 비의지적인 행동입니다. 그 속에 애틋함이 있습니다. 서슴없이, 당당하게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대세처럼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이런 은근함에 마음이 더 가는 것은 나이 듦의 징조일까요? 어쩌면 너무나 난폭하게 흘러가는 세상에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몬느 베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서로를 대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가 있다고 말합니다. ‘머뭇거림’(hesitation)이 그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고, 응대하는 이들은 시원시원해 보일지는 몰라도 삶의 많은 부분을 놓치게 마련입니다. ‘달의 이면’이라는 말처럼 세상에는 우리가 파악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고, 그건 사람 살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며 살자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떤 사람을 아주 몹쓸 사람으로 몰아붙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 가을에 이런저런 동요가 떠오른 것은 우리의 거친 세태에 대한 피곤함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년 가을이면 각 교단 총회로 시끄럽습니다. 영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총회 때문에 설왕설래가 많습니다. 총회는 각 교파의 지향과 정책을 결정하고 교단을 이끌어갈 리더를 뽑는 것을 주된 소임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지향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이 시대의 문제들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심도 있게 논의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총회는 그 기본적인 직무를 내팽개친 채 정치꾼들의 무대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음성을 높이는 이들은 다 어떤 진영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영 논리에 가담하는 순간 참을 향한 순례는 중단되고 맙니다. 교권을 쥔 이들의 단일한 목소리가 다양한 소리를 압도할 때 진리는 잦아들게 마련입니다. 동일한 소리를 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사상 검증을 하려하고, 그들에게 불온의 딱지를 붙여 침묵시키려 할 때 교회는 퇴행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교리나 예배 방법의 차이가 우리들의 일치를 가로막을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꼭 갈라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묻습니다. 

“비록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비록 한 가지 의견으로 통일되지는 못한다 해도 한 마음이 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차이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연합되어 있습니다. 서로간의 차이들은 그대로 놓아두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행과 사랑에 있어서 서로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웨슬리 설교전집3>, 설교 ‘관용의 정신’중에서, 기독교서회, p.61)

누군가를 동화시키려는 것, 자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차이는 잠시 놓아두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선행을 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를 과잉 대표하는 정치 문제로 인해 교회는 분열되고 있습니다. 서로를 부정하는 거친 말이 오고 가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찢기고 있습니다. 각급 교단의 총회가 그런 대결을 해소하는 화해의 자리가 아니라 더 큰 분열의 자리가 되고 있으니 딱할 따름입니다. 감리교회도 10월 중순에 감독을 뽑는 선거를 하게 됩니다. 감리교회는 그간 감독회장 직무를 두고 오랫동안 다퉈왔습니다. 혼란이 감리교회에 큰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감리교회가 새로워져야 할 때입니다.

이제 추석이 다가옵니다. 감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에 맞이하는 명절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가급적이면 많은 이들이 접촉하는 자리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기억하시는지요? 명절이 되면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두레 밥상 앞에 앉습니다. 시인은 우리가 한 끼 밥 차지하기 위해 혹은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해 날카로운 발톱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은 모두가 귀히 여기는 사랑을 회복하라는 일종의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회복되는 자리라는 점에서 그 식탁은 성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올 추석에는 이런 밥상 앞에 둘러앉지는 못한다 해도, 서로를 귀히 여기는 마음만은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잠시 물러나 우리 생명의 본질을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은 ‘서로 기대어 있음’입니다. ‘네가 있어 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 때 곁에 있는 이들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이맘때면 저는 김종삼 시인의 시 ‘묵화墨畫’를 떠올리곤 합니다. 묵화는 물론 먹으로 그린 그림입니다. 화려하진 않기에 오히려 우리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그림입니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정경이 눈에 잡힐 듯 선합니다. 고단한 하루 일을 마치고 소가 물을 마십니다. 쟁기질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소도 힘겨웠을 것입니다. 할머니는 마치 자식을 돌보듯 소의 목덜미에 손을 얹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할머니의 마음을 소도 고스란히 느꼈겠지요? ‘고맙다’, ‘애썼다’, ‘너라도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니?’ 부은 발잔등이 안쓰럽습니다. 적막하지만 애상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시는 ‘마침표’로 끝나지 않고 ‘쉼표’로 끝납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족끼리도 이런 마음을 품고 서로를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가족뿐인가요? 우리가 인생길에서 마주치는 이들 하나하나를 이 마음으로 대할 수 있다면 세상이 조금은 따뜻해질 것 같습니다.

분주한 일상 가운데서도 더러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실천하는 범위 안에서 공원 산책이라도 하십시오. 텔레비전만 보시지 말고 문득 창문을 열어 밤하늘도 바라보십시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이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별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그리운 이름들을 떠올렸던 윤동주의 마음도 한번 느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 중에 수술을 받은 교우가 계십니다. 잘 회복 중이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연세 드신 교우들도 건강에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시니 고맙습니다. 점점 원만한 빛으로 무르익어가는 벼들이 우리 마음의 날카로운 것들을 녹여내고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도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면 좋겠습니다. 은총 안에서 걷는 길에 생명의 향기, 평화의 훈풍이 불어오기를 기대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9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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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빠져들기

 기꺼이 빠져들기



“온전함은 다른 사람과 연결된 느낌, 우리가 사는 장소에 속해있는 느낌이며 공동체에서 무언가를 공유한다는 무의식적 자각이다. 따라서 개인의 온전함과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이라는 두 가지 잣대로 우리는 우리의 건강을 가늠한다. 건강이란 분리되지 않은 상태임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웬델 베리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된 여러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의 지친 몸과 마음을 두루 감싸주시기를 청합니다. 또 한 주가 이렇게 흘렀습니다. 절서는 속일 수 없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백로 절기로 접어들면서 이제는 제법 시원합니다. 어떤 때는 창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기도 합니다. 어느 분이 여름에서 가을로의 이행을 헤비메탈의 시간에서 재즈의 시간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하더군요. 매미 울음소리 낭자하던 여름이 끝나고 벽 틈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노래가 고즈넉하게 들리는 계절이란 뜻일 겁니다.

다들 조금씩 지쳤지만 이럴 때일수록 소박한 기쁨을 많이 누려야 합니다. 나무에 내려앉는 햇살 한 줌에 눈길을 주고, 차 한 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물끄러미 바깥을 내다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 책상 옆에 놓인 리클라이너에 가만히 기댄 채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바흐의 ‘미뉴엣’부터 시작하여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습니다. 음악의 선율에 잠시 잠겨 들면 어수선하던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제가 생각났다며 좋은 벗이 보내준 ‘거울 속의 거울’이라는 곡도 즐겨 듣습니다. 어느 분이 정성껏 만들어 보내주신 다양한 아로마 향이 슬쩍 코끝을 스치면 잠시 행복하다는 생각에 잠기기도 합니다. 문득 어떤 분이 문자를 보내 ‘나른할 때는 팔굽혀펴기 20번을 하세요. 맨손체조도~그리고 복근 운동’ 하고 말씀하시면, 씩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명령에 순종합니다.

그러다가 문득 교우들의 얼굴을 마음에 그려봅니다. 말투, 표정, 웃음소리, 기쁨의 순간들, 슬픔의 순간들...함께 걸어온 시간이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밀려옵니다. 켜켜이 쌓인 기억의 갈피마다 기가 막힌 세월을 함께 했다는 고마운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격절의 세월은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말이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엄연한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교우들을 생각하며 화살기도를 올립니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 시간을 그저 한탄만 하며 지내면 안 됩니다. 얼마 전부터 제가 종종 떠올리는 유대인의 안식일 기도가 있습니다.

“하루씩 지나가고 한 해씩 사라지건만,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갑니다. 저희의 눈을 볼 것들로 채워주시고, 저희의 마음을 알 것들로 채우소서. 당신의 현존이 마치 번갯불처럼 저희가 걸어가는 어둠을 비추는 순간들이 있게 하소서. 저희가 어디를 바라보든, 떨기에 불이 붙었지만,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빚으신 흙덩이인 저희들이 거룩함에 닿게 하시고, 놀라움 가운데 ‘이 얼마나 경외로 가득한 곳인가’ 하고 외치게 하소서.”

지금 우리 앞에 당도한 시간은 ‘기적’입니다. 교회 화단에 심긴 붉은색 일일초가 파란 가을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쥐꼬리망초, 영아자도 그 작은 꽃을 내밀었습니다. 파란색 달개비꽃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대지를 응시합니다. 대추도 가을 햇살을 탐스럽게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기적의 시간을 교우들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한가한 소리 하고 있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어둠을 이길 힘은 빛을 향해 고개를 들 때 비로소 찾아옵니다.

세상을 방편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이용합니다.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입니다. 그는 늘 외롭습니다. 욕망 주위를 맴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경이의 마음으로 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어진 세상이 선물임을 늘 자각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이용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응답해야 할 부름입니다. 그는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하찮아 보이는 떨기나무 속에서 신성한 불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죄의 중력에 속절없이 이끌리지 않습니다.

경외심이 사라진 곳에 깃드는 것이 불화입니다.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다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성난 얼굴들이 도처에서 출몰합니다. 사실과 상상력이 자리를 바꾸고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온통 혼돈입니다. 거짓, 편견, 그릇된 확신, 미움과 저주, 악다구니, 혐오, 분노, 폭력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이해와 소통을 위한 진득한 노력보다는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무모한 열정이 사람들을 마구 휘몰아 갑니다. 거친 말, 냉소, 선동의 말을 자주 듣다 보면 우리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정녕 믿는 사람이라면 잠시 멈추어 서야 합니다. 내 입장과 주장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편견에 찬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주체적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이들이 주입한 생각과 관점과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몽주의자들은 이런 상태를 일러 미성숙이라 했습니다. 미성숙은 자기가 되지 못한 것이기에 자기에게 빚진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이라는 책에서 “인간 세상의 모든 일들은 어리석음의 독무대”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음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타락입니다. 미망에 갇힐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임을 잊게 마련입니다.

특정한 입장에 갇힐 때 광대한 세계, 신비한 실재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신앙이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적 힘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 뜻에 조율된 존재가 되기 위해 엎드리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오만할 수 없습니다. 완고한 태도를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이 오류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거듭거듭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자기를 비울 때 비로소 은총이 우리 속에 유입됩니다. 가을의 초입에 접어들면서 헤르만 헤세의 ‘고백’이라는 시를 우리 마음의 길잡이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다정한 빛살이여, 너의 반짝임에
기꺼이 빠져드는 나를 보라.
남들은 목적과 목표가 있지만,
나는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지난날 내 마음을 흔들던 모든 것들은
언제나 내 가슴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무한하면서도 유일한 것에 대한
비유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러한 상형 문자를 읽는 것은
언제나 인생을 걸어볼 만한 일.
영원한 것, 본질적인 것은
바로 내 마음속에 살고 있으므로.”
(헤르만 헤세, <인생의 노래>, 김재혁 옮김, 이레, p.148)

주님의 부름 안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백로 절기, 흰 이슬로 내리는 주님의 은총이 우리 마음의 헛헛함을 씻어내 주시기를 청합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의 은총 가운데 당당하게 사십시오. 평안을 빕니다.

2020년 9월 12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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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마가복음 10:13-16)

 

어느 날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다. ‘쓰다듬다’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손으로 가볍게 쓸어 어루만지다’, ‘마음을 달래어 가라앉히다’이다. ‘쓰다듬음’ 혹은 ‘어루만짐’은 참 살가운 행동이다. 쓰다듬음은 상대에게 나의 사랑을 전달하거나 표현하는 행위이다.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등을 토닥여준다든지 어루만지는 행위는 얼마나 숭고한가? 그것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의 몸짓이다. 주님이 자기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던 이들은 예수와의 접촉을 통해 아이들의 삶도 아름다워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뜻밖의 장벽에 부딪혔다. 제자들이 그들을 가로막고 꾸짖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보기에는 아이들을 쓰다듬는 것은 시급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보고 노하셨다. 그리고 정색을 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가복음 10:14)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이’가 문자 그대로 어린이이든,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든, 예수님은 그들과의 접촉을 꺼리지 않으신다. 그들을 보듬어 안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어린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어린이의 어떤 점이 그러하냐고 묻는다. 


류연복 판화



몇 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천진난만(天眞爛漫), 경탄, 호기심…. 오늘 우리가 보는 현실 속의 아이들이 그러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이들’이라는 기호를 꾸밈없이 순수하고 참된 존재를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아이들은 근엄하지 않다. 젠체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켜야 할 자기가 없다. 그래서 늘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다. 우리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아 ‘어린이’를 잃어버린 채 산다. 삶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늘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다른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는 사람들, 배울 것은 없고 가르칠 것만 있는 사람들,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에 익숙한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먼 사람들이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어린이성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 설레느니,/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쉰 예순에도 그러지 못하다면/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유종호 번역). 부드러움은 생명의 징조이고 경직됨은 죽음의 징조이다. 워즈워스가 역설적으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기도*

 

하나님,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더께처럼 내려앉아 우리 영혼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경탄할 줄 모르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는 삶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이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은 우리 영혼에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십시오. 묵은 땅을 갈아엎고 기쁨의 씨를 뿌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가슴 설레는 일들이 많아지게 해주십시오. 아멘.


<<사랑의 레가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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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등뼈를 곧추 세우라

김기석의 새로봄(191)

 

삶의 등뼈를 곧추 세우라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신명기 29:29)

 

출애굽 공동체가 모압 땅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른바 호렙산에서 맺었던 언약에 덧붙여서 주어진 모압 언약이 그것이다. 모세는 출애굽의 긴 여정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간략하게 언급한다. 애굽 땅에서 베푸신 이적, 광야에서의 이적은 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권능의 행위였다. 백성들은 그런 놀라운 일을 보고 겪었지만 여전히 수동적 객체일 뿐 역사의 주체로 서지 못했다. 모세는 그런 현실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나 바로 오늘까지, 주님께서는 당신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신명기 29:4).

 

‘깨닫는 마음’, ‘보는 눈’, ‘듣는 귀’가 열리지 않으면 사람은 누구나 독립적 주체로 서지 못한다.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른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이들의 언어를 자기 말로 여기며 산다. 광야는 사람의 마음을 시험한다. 척박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인해져야 한다. 하지만 광야는 중첩되는 어려움으로 인해 마음이 물크러질 수도 있는 공간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필요한 것들을 다 얻을 수 있었고, 위기 때마다 구원을 경험했다. 모세는 그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그들은 새로운 언약관계 속으로 초대한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힘 있는 이들의 편익을 위해 동원되는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는 순간 평등공동체의 꿈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기쁨과 슬픔이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모호함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모호하다고 하여 모든 판단을 유보한 채 되는 대로 살자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것입니다.”(신명기 29:29a)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지도 삼아 시간 여행을 하면 된다.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 혹은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안내인이다. 그 말씀이 설사 우리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말씀을 척도로 삼아 우리 삶을 조율할 때 삶이 가지런해진다.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익숙해질 때 우리 삶의 등뼈가 곧게 세워진다. 광야를 헤매는 것처럼 삶이 고달프고,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어 어지러울 때면 말씀 한 자락을 붙들고 그 미로를 헤쳐가야 한다.

 

*기도

 

하나님, 삶이 순탄치 않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버릇처럼 누군가를 원망합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고, 우리가 누려야 할 몫까지 독점한 것 같은 이들을 미워합니다. 강자들의 편을 드는 것 같은 사회 시스템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망한다고 하여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제는 원망하는 버릇을 내려놓고 성실하게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미로와 같은 세상을 통과하겠습니다. 우리의 동행이 되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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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김기석의 새로봄(190)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의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일뿐이지만, 악인이 기대할 것은 진노뿐이다. 남에게 나누어 주는데도 더욱 부유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이 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 곡식을 저장하여 두기만 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저주를 받고, 그것을 내어 파는 사람에게는 복이 돌아온다. 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받는다(잠언 11:23-27).

 

“의인이 바라는 것은 좋은 일뿐이지만, 악인이 기대할 것은 진노뿐이다.” 의인은 자기 분수를 알고 사는 사람이다. 남을 배려하기에 다른 이의 몫을 대신 차지하려 하지 않는다. 억지가 없기에 자유롭고, 자유롭기에 명랑하다. 그는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한다. 필요한 이에게 계산하지 않고 준다. 사람은 아끼지만 재물은 아끼지 않는다. 남에게 주는데도 그는 더욱 부유해진다. 그런데 마땅히 쓸 것까지 아끼는데도 가난해지는 사람도 있다. 움켜쥐지만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슬금슬금 줄어들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었다. 하나님은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대로 하자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으나,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출애굽기 16:17-18). 그 지시를 어기고 많이 거두어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땠나? 남겨둔 것에서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겼다.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부유해 지고, 남에게 마실 물을 주면, 자신도 갈증을 면한다고 말한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축복의 사람’(네페쉬 베라카)이다. 다른 이를 복되게 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구원사의 일부가 되라고 부르시면서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창세기 12:3b)이라고 약속하셨다. 바울 사도도 성도들에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면서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사도행전 20:35)라고 말했다.

 

꽃밭에 넉넉히 물을 주는 사람은 향기를 되돌려 받게 마련이다. 내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하여 목마른 이들을 외면할 때 또 다른 목마름이 찾아온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흘러야 하는 법이다. “좋은 일을 애써 찾으면 은총을 받지만, 나쁜 일을 애써 추구하면 나쁜 것을 되받는다”(잠언 11:27). 사람은 누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 땀 흘려 수고한 일에 결실이 없다고 낙심할 것 없다. 때가 이르면 결과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기도

 

하나님, 많은 이들이 선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을 품고 삽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합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겠습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누룩이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심는 사랑과 평화와 생명의 씨가 세상을 밝히는 꽃으로 피어날 날이 올 것임을 믿습니다. 이런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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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김기석의 새로봄(189)

 

직립한 사람의 아름다움

 

할렐루야. 내가 온 마음을 다 기울여,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서 주님께 감사를 드리겠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참으로 훌륭하시니, 그 일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모두 깊이 연구하는구나.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 그 하신 기이한 일들을 사람들에게 기억하게 하셨으니, 주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다(시편 111:1-4).

 

적대감에 가득 찬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달픈 일이다.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넋을 놓고 걷다가 느닷없는 크랙슨 소리에 놀라 질겁을 하듯이 언제 봉변을 당할지 몰라 우리는 전전긍긍하며 산다. 얼굴빛 환한 사람 만나기 어려운 것은 당연지사다. 함석헌 선생은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탄식하듯 말한다.

 

“영웅심에 들뜬 청년/욕심에 잔주름이 잡힌 노인,/실망한 얼굴,/병에 눌린 얼굴,/학대받아 쭈그러진 얼굴,/학대하고 독살이 박힌 얼굴,/얼굴, 얼굴, 그 많은 얼굴들 속에/참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구나”(<얼굴> 중에서).

 

참 아름다운 얼굴을 만나야 삶이 바로 선다. 히브리의 시인은 “정직한 사람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 있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정직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샤르yashar’는 ‘곧다’, ‘옳다’, ‘똑바로 서다’라는 뜻으로 두루 쓰인다. 정직한 이들은 바로 선 이들이다. 내면에 기둥 하나가 들어선 이들이라는 말이다. 기둥이 바로 서면 그 위에 어지간한 무게가 얹혀도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이 그러하다. 김흥호 목사님이 ‘믿음’을 ‘밑힘’이라 해석한 것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스위스의 조각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아주 길쭉하고 홀쭉한 인물상을 많이 만들었다. 불안과 고독과 취약함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궁핍한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인물들의 눈빛은 형형하다. 마치 자기 운명을 직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대개 직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큼성큼 걷는 그 인물들은 마치 무게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외롭고 고달프지만 불멸을 지향하는 사람의 존엄함을 본다. 직립한 사람은 아름답다.

 

시인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이들의 모임에 속한 즐거움이 크다고 고백한다. 그 모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꿈을 간직한 채 사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이 크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은 실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 경험을 함께 나눌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깊어진다. “주님이 하신 일은 장엄하고 영광스러우며, 주님의 의로우심은 영원하다”(시편 111:3).

 

장엄함에 대한 인식을 잃을 때 영혼은 남루해지고 삶은 왜소해진다. 장엄함 앞에 설 때 인간은 겸손해지고 심성은 확장된다. “주님 앞에는 위엄과 영광이 있고, 그의 처소에는 권능과 즐거움이 있다”(역대상 16:27). 주님 앞에 머물 때 푸석푸석하던 삶이 단단해진다.

 

*기도

 

하나님, 하루하루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숨돌릴 사이도 없이 밀려드는 일들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채 우리는 떠밀려 가듯 시간 속에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차갑고 냉랭한 시선, 적대적인 시선을 만날 때마다 우리 가슴에는 퍼런 멍이 들곤 합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하나님의 장엄한 위엄 앞에 서겠습니다. 내면에 흔들리지 않는 기둥 하나 세우고 살겠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삶의 꿈을 나눌 벗들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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