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은총이 스며드는 통로

 

“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 3:12-13) 

 

환자를 대동하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병원 문을 나서니 눈이 퐁퐁 내리고 있었습니다. 시야를 가릴 정도로 내리는 눈이 시원의 세계로 저를 안내하는 듯했습니다. 갑자기 열린 흰 세계를 보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이 아마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그 내용도 가물가물하지만 첫 문장만은 잊을 수 업습니다. “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 삶의 무거움을 조금쯤 짐작하며 현실과는 아주 다른 세계를 꿈꾸었던 터라, 이 문장은 그야말로 주술처럼 제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흰 눈으로 덮인 세상은 분명히 사람을 낭만적으로 만듭니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 나오는 한 두 구절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란 이름이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던 백석에게는 외롭고 쓸쓸한 자기 마음을 의탁하기에 적절한 이름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 시구가 유난히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과 눈이 내리는 것을 인과 관계로 연결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요. 마치 황지우 시인이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설렘 가운데 기다리는 이의 심정을 드러내기 위해 ‘바스락 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고 노래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파트 앞은 눈밭으로 변했고,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것 같은 아이 둘이 엄마와 함께 나와 썰매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미리 마련해 놓았던 것일까요? 그런데 저만치에서 나무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경비 아저씨였습니다. 아저씨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썰매를 타느라 빙판이 만들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겠지요. ‘에이, 잠깐이라도 눈 감아 주시지.’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내리는 눈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 같습니다.

 


‘위대한 침묵’(Die Große Stille)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무려 168분짜리이니 짧다고 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해발 1,300미터의 알프스 산자락에 있는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삶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이 카르투지오 수도원은 규율이 엄격한 봉쇄 수도원입니다. 대사도 별로 없고, 자연의 소리 이외의 인위적인 음악도 일체 배제하고, 자연 조명만으로 제작한 다큐입니다. 수도원의 삶이라는 게 단순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기도하고 찬양하고 노동하고 침묵하는 것이 다입니다. 침묵 속에서 농사를 짓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옷을 다림질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참 거룩해 보입니다. 단순한 일상입니다. 한 가지 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계절뿐입니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는 이들이 유일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산골에 눈이 내리자 하얀 수도복을 입은 수사들이 열을 지어 언덕을 올랐습니다. 울력이라도 하려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은 언덕 아래로 미끄럼을 타며 내려왔습니다. 그 근엄하던 수사들의 입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아름다움을 향유할 수 있는 능력과 놀이야말로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쉴러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들 속에는 너나없이 아이들이 숨어 있습니다. 역할과 지위와 나이라는 의상에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 아이가 잠시 깨어날 때 우리는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유머가 사람들 사이의 긴장을 풀어준다면 웃음은 우울을 해독하는 명약입니다.

 

예수님의 초상을 그린 화가들은 한결같이 그분의 거룩하신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맑고 고요한 관상의 깊이 속에 머물고 계신 주님을 그린 그림도 있고, 적대자들 앞에서도 한없이 평온한 모습을 보이는 그림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 또한 비장합니다. 십자가 처형 장면을 형상화한 그림은 숭고한 아픔으로 우리를 압도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 베다니 마을에 살던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5). 평화를 알지 못하는 도성 예루살렘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주님은 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눅 19:41). 이 말씀 앞에 설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집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히 5:7a)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은 주님을 거역하고 역사의 주권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을 보시며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시2:4)고 말합니다. 이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웃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1980년대 초반에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던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던 예수님의 초상이 있습니다. 그 그림 속에서 주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계십니다. 억압과 두려움이 먹장구름처럼 우리를 짓누를 때 주님의 그런 표정은 우리를 적잖이 가볍게 만들어 줍니다. 스스로 경건하다 자부하던 이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 붙여진 별명이 있습니다. ‘마구 먹어대는 자’, ‘포도주를 마시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 11:19)입니다. 이런 별명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적어도 사람들의 목을 조르듯 답답하게 만드는 분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흔쾌하게 초대에 응하고, 낯선 이들과의 잔치를 즐기셨던 주님은 분명히 젠체하는 태도로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유쾌하게 만드는 열쇠와도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요? 영혼이 맑은 사람, 깊은 곳에 잇대어 사는 사람은 강박적일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힘들더라도 자꾸 유쾌하게 현실을 대하자고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행복’이라는 시는 역설적 진실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헤세는 그 바람이 절박할수록 행복은 우리에게서 더 멀어질 뿐이라고 말합니다.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 목표나 목적을 정해놓고 맹렬히 돌진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붙잡으려고 쫓아다닌다면,

너는 아직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는 거야,

사랑스런 모든 것이 네 것이 된다 해도.

 

잃어버린 것을 네가 안타까워하고

목표를 정해 놓고 초조해한다면,

너는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모든 갈망을 단념하고

목표나 욕망 따위를 더 이상 알지 못할 때,

행복이라는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을 때,

 

비로소 일상의 물결은 더 이상 네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네 영혼은 안식을 찾으리라.”

-헤르만 헤세, ‘행복’, <인생의 노래> 중에서

 

대충대충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행복을 위하여’라고 말하며 조바심치거나 안달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을 고문하지 말고 묵묵히 일상을 충실히 살아낼 때 사람은 비로소 영혼의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영원에 잇댄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나님의 값진 선물임을 자각하면서 한껏 기뻐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의무라는 단어가 조금 무겁지요? 그렇다면 영적 지혜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웃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이 많음을 잘 압니다. 벼랑 끝에 선 듯 삶이 위태로운 분들도 계십니다. 그럴수록 우울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 내가 깊은 물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시130:1-2) ‘깊은 물’ 속에 빠져들 듯 암담한 상황 속에 처해 있다 해도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잠시 쓰린 시간을 견디고 나면 새로운 희망의 날이 움터 올 것입니다. 희미한 빛, 미미한 희망이라 해도 꼭 붙드십시오. 그 작은 빛과 희망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스며드는 통로이니 말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리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명랑함을 감염시킬 수 있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1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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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사람들

 


누가 "나는 마음이 깨끗하다. 나는 죄를 말끔히 씻었다"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규격에 맞지 않은 저울추와 되는 모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비록 아이라 하여도 자기 행위로 사람됨을 드러낸다. 그가 하는 행실을 보면, 그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올바른지 그른지, 알 수 있다.(잠 20:9-11)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날이 제법 차갑습니다. 소한 절기를 맞이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안락함과 편안함에 길들여진 비루한 몸 탓인지 바람 앞에 우뚝 설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세월에 감기에 걸리면 큰일이라는 생각도 물론 그러한 나태함에 한몫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이 추위를 이겨낼 수 있기를 빕니다.

 

러시아 시골 마을인 야쿠티아의 오미야콘 초등학생들은 영하 50도에도 등교를 한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추운 마을이라는 그 마을 아이들의 빨간 볼이 떠오릅니다. 사람의 적응력은 정말 대단합니다. 얼음의 세계에서도, 사막의 열기 속에서도, 물 위에서도 삶을 일구니 말입니다. 혹독한 추위가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시절을 거쳐온 이들 모두가 겪은 일입니다. 웃풍이 심한 방에서 겨울을 나기란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리맡에 뭉쳐 두었던 걸레가 새벽이면 꽝꽝 얼었고, 이불 속에 들어가 있어도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습니다. 방바닥의 갈라진 틈으로 연탄가스가 스며들어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기에 창문을 빠끔히 열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틈으로 들어오는 황소바람이 어찌나 차가웠던지요. 아침이 되어 수돗가로 나가면 고무 다라이에 밤새 똑똑 떨어진 물이 꽁꽁 얼어 있기 일쑤였고 바가지로 그 얼음을 깨뜨린 후 그 아래 고여 있던 물로 세수를 했습니다. 얼굴이 마치 칼로 베는 것처럼 시렸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합니다.

 

빙판길로 변해버린 가파른 마을길은 간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줍니다. 늦은 저녁에 온 물차에서 물을 받은 주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비틀비틀 언덕을 오르다가 쏟아놓은 물이 빙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내놓은 연탄재를 깨뜨려 길을 만들곤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면서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묻던 안도현 시인의 시가 그대로 피부로 와 닿는 것은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몇 해 전 남극의 황제 펭귄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펭귄들의 모습이 생명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알을 낳고 그 알이 얼지 않게 하려고 발 위에 올려놓고 아랫배로 눌러 그것을 보호하는 펭귄의 모성애 혹은 부성애를 보며 생명 경외를 가르쳤던 알버트 슈바이쳐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잊을 수 없는 것은 펭귄 허들링이었습니다. 남극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펭귄들은 서로 몸을 기댄 채 거대한 집단을 이루어 바람과 맞섰습니다. 원의 중심부에는 상당한 온기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맨 바깥에 있는 펭귄들은 온몸으로 바람을 막아내야 했고 체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금씩 움직이며 안쪽에 있던 펭귄들은 바깥쪽으로 이동하고, 바깥쪽에 있던 펭귄들은 안쪽으로 이동하는 허들링을 한다고 합니다. 따뜻한 안쪽을 독차지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 세상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건강해지려면 바로 이런 원리가 작동되어야 합니다.

 

이번 주간의 뜨거운 이슈는 양부모의 학대를 받다가 숨진 정인이 이야기입니다. 너무 끔찍하여 보도를 보기 어려웠습니다. ‘사람이 어찌 이럴 수가 있나!’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불쌍한 사람이 억눌림 당하고, 가련한 사람이 폭력에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실이지만, 그 대상이 여리고 여린 아이라는 사실에 말문이 막힐 따름입니다. 게다가 그 양부모란 사람들이 둘 다 목사의 자녀이고 유명한 기독교 대학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습니다. 이 세상에 와서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학대받다가 죽어간 아이를 하나님께서 선하신 능력으로 안아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잘 믿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중에도 실천적 무신론자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시편 시인의 고백과 기도가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주님께서는 학대하는 자의 포악함과 학대받는 자의 억울함을 살피시고 손수 갚아 주려 하시니 가련한 사람이 주님께 의지합니다. 주님께서는 일찍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분이셨습니다”(시 10:14). ‘그런데 왜?’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정인이가 그렇게 지속적인 학대를 당할 때 하나님은 왜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셨는지요? 우리는 참담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이런 질문 앞에 서곤 합니다. 누구도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증언자로 일생을 산 엘리 위젤의 희곡 <샴고로드의 재판>은 17세기의 유럽에서 벌어진 유대인 집단학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은 우리를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그런 일을 방관하셨느냐는 질문 앞에 세웁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힌 채 하나님에 대한 모의재판을 엽니다. 재판을 하려면 원고와 피고, 재판장과 변호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나서서 변호인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습니다. 나중에 한 나그네가 등장하여 변호사를 자처하면서 그럴듯한 논리를 동원하지만 그는 사실 사탄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신이 없는 증거, 혹은 신의 무능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런 걸까요? 신정론의 문제는 이처럼 언제나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안타깝게도 ‘기계 장치로서의 하나님’(Deus ex Machina)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하여 악인들을 처벌하고 선인들을 구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역사는 그래서 악인들의 독무대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릅니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와 같습니다. 우리는 당장 눈앞의 현실을 바라보며 조급해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은 더디게만 흐릅니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주의 윤리적 포물선은 길지만, 그 방향은 정의 쪽으로 굽어 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역사를 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 참담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투덜거리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동학대 방지 법안 90여 건이 국회에 계류 중이랍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아직 처리되지 않았습니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 낭비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꿈이지만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꿈입니다.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만 다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교회는 매우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을 품고 광야로 들어갔던 탈출 공동체는 거듭되는 시련과 난관 앞에서 회의에 빠졌습니다. 영롱했던 꿈은 어느새 퇴색되고 고생스러움만 도드라지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의 끓는 가마솥을 그리워했습니다. 노예처럼 부림을 받았던 시절, 자기 삶의 주체로 설 수 없었던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처럼 안쓰러운 일이 또 있을까요? 지향해야 할 목표가 흐릿하면 현실은 중력처럼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많은 이들이 순례자로서의 삶을 포기합니다.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은 많지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믿음 안에 머물려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게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겉으로는 좋은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어둠의 영에 속한 이들이 있습니다. 열정적이지만 그 열정의 방향이 잘못되면 자기도 해치고 남도 해치게 됩니다. 끝없는 성찰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믿음이 때로는 자기를 속이는 허위의식일 수 있음을 늘 자각해야 합니다.

 

옛 선비들은 자기 닦음에 철저했습니다. 대학의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입니다. 큰 배움을 통해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덕들입니다. 선비들은 아홉 가지 바른 생각(九思)과 아홉 가지 바른 몸가짐(九容)을 유지하려고 늘 경계했습니다. 발걸음을 가벼이 하지 않기, 손을 공손하게 맞잡기, 눈을 단정하게 뜨기, 입을 다물고 있기, 말소리를 고요하게 하기, 머리를 곧게 들고 몸을 바르게 하기, 호흡을 가지런하게 하기, 의젓하고 품위 있게 서기, 얼굴빛을 명랑하고 점잖게 유지하기 등이 그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수련 혹은 수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허위의식일 따름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하고(끊음), 더러운 것을 닦아내야 하고(씻음), 지향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지향은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아낌과 존중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가 빛에 속한 사람인지 어둠에 속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우리의 관계 속에 하늘의 빛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새해 두 번째 주일을 앞두고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로 빚어지기 위해 더욱 정성스럽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어, 생명과 평화의 파종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

 

2021년 1월 7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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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의 신비 속으로

은총의 신비 속으로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시 90:14-15)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한 해의 끝에 당도했습니다. 험한 파도에 시달리며 항해한 배처럼 우리 몸과 마음에 새겨진 흔적이 깊습니다. 상처도 많고 달라붙은 것들도 참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 이렇게 견뎠습니다. 아슬아슬한 희망을 가슴에 품고 고단한 시간을 건너왔습니다. 아직 평안의 포구에 당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한 해를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후회와 자책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스스로 자기 손을 끌어 머리에 얹고 장하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엊그제 TV를 보다가 가슴 찡한 광경과 만났습니다. 어촌 마을에 사는 할머니 한 분이 며칠 동안 어민들의 일상을 취재했던 이들이 작별인사를 건네자 그 시선을 외면한 채 ‘잘 가라’고 하시다가 문득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잠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고에서 스티로폼에 포장한 뭔가를 들고 나왔습니다. 가재미라며 어촌에서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며 취재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 치는 이들에게 할머니는 “따뜻한 밥 한 끼라도 정성껏 대접해 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산하기 이를 데 없는 시절에 할머니의 그런 마음 씀은 제 속에 온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저는 혼잣소리로 ‘저 마음 하나면 그만인데.’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따뜻함과 배려야말로 세상의 어떤 이론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요? 저물어 가는 한 해를 돌아보며 우리 마음의 풍경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가 처음 번져갈 즈음 저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예배를 비대면으로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두 주만 잘 넘기면 상황이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근거 없는 낙관론이었습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을 예배당에서 함께 경축하지 못한 것은 아마 우리 생애의 첫 경험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팬데믹의 한복판에 처해 있기에 이 시간의 의미를 온전히 가늠할 수 없지만, 먼 훗날 우리는 이 암담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요?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되기만을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제3차 웨이브를 지나고 있습니다. 두 차례 경험했던 것보다 그 파고가 높고 또 장기화되고 있습니다. 큰일 없이 이런 상황이 지나가도 제4, 제5의 웨이브가 올 가능성도 있다고 하니 더욱 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많은 분들이 난감한 시간을 견디고 계십니다. 코로나19만 우리를 괴롭힌 건 아닙니다. 기후 위기가 빚은 홍수 피해가 자못 심각했고, 도처에서 일어난 산불 피해도 막심했습니다. 자영업자들이나 소상공인들도 생존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거리를 조금만 걸어보아도 문을 닫은 가게들이 즐비합니다. 인파에 떠밀려 다녀야 했던 명동 거리도 한산하기만 합니다. 소득은 줄고, 두려움은 증대되고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불확실성은 심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자가 되었습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분을 보면 눈살을 찌푸리고,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큰 목소리로 전화하는 이들을 보면 눈총을 주기도 했습니다. 행여 감염의 매개가 될까 무서워 사람들을 만나기를 꺼립니다. 낯선 외로움이 우리 삶을 휩쓸고 있습니다. 

 

유대교 랍비인 나오미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70대 중반에 이른 외할아버지께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실 뿐 아무 일에도 의욕을 보이질 않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평생을 함께 했고, 아들딸과 손자손녀들로 대가족을 이루고 있었고, 사업 또한 번창했고, 건강 또한 좋았습니다. 우울에 빠질 이유가 없다고 느낀 엄마가 할아버지께 여쭈었습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잠자코 계시던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다!” 그리고 “키비츠(kibbitz) 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그에게 결핍된 키비츠란 무엇일까요?

 

“‘키비츠’는 이디쉬어로 친구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모든 것을 두루 일컫는 단어다. 몰려다니며, 농담하고, 수다피우고, 놀리고, 이야기하고, 마음을 짐을 풀어놓고, 귀 기울여 들어주고, 킬킬거리는 등등...”(나오미 레비, <아인슈타인과 랍비>, 최순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213)

 

때로는 하찮아 보이고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일들이 어쩌면 우리 삶을 지탱하는 토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런 시간을 그 어느 때보다 그리워합니다. 날이 갈수록 우정 공동체가 그립습니다. 이런 상황이 너무 길어지면 줌(zoom)으로라도 잡담회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창의적인 제안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올 한 해 무엇보다도 속상했던 것은 개신교회가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입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유난히 개신교회발 감염에 대한 보도가 많다 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더 차가워졌습니다. 목회 데이터 연구소의 발표를 보니 불교와 가톨릭에 대한 호감은 커졌지만 개신교회에 대한 호감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거리를 두고 싶은’, ‘이중적인’, ‘사기꾼 같은’이라는 대답이 많았다고 합니다. 성내고, 소리 지르고, 비꼬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시민적 상식으로부터 멀어진 교회에 대한 냉정한 평가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 일상적 삶의 자리에 하늘의 통치를 가져가는 것이건만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배타적인 동시에 편협한 믿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소설가이며 평화운동가인 아모스 오즈는 “광신주의의 씨앗은 언제나 결코 타협하지 않는 정당성에 기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협하지 않음은 물론 신앙적 확신이라는 외피를 입고 등장합니다. 아모스는 모든 광신자들에게는 특별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저속함(kitsch)을 몹시도 좋아하고, 그런 취미에 매달립니다. 대체로 광신자의 머릿속에는 ‘하나’라는 숫자밖에 없고 ‘둘’ 이상의 복수(複數)는 너무나 큰 숫자라 흡사 머릿속으로 집어넣지 못하는 듯한 형국이기까지 합니다. 동시에 광신자들은 대책 없이 감상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성보다 감정을 좋아하고, 자신의 죽음에 지나치게 매혹되어 있습니다.”(아모스 오즈, <광신자 치유>, 노만수 옮김, 세종서적, p.61-62)

 

광신자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억지로라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로 여깁니다. 삶은 본래 모호하고 복잡한 것인데 그들은 스스로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모스는 광신자들에게 결핍된 것은 유머 감각이라고 말합니다. 유머란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능력에서 발현됩니다. 냉소주의자들은 유머를 모릅니다.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명랑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명랑한 이들과 만나면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삶의 무게가 조금 줄어드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 좋겠습니다. 

 

송구영신예배에도 우리는 직접 얼굴을 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떼제 찬양을 함께 부르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성찬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시간을 통해 깊이 결속되기를 바랍니다. 여러 해 전 제가 미국의 버몬트 주에 있는 작은 수도원에 잠시 머물 때 한 수사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 수도원은 남미에서 정치적 박해를 피해 망명한 이들을 가족으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 늘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지냈고, 할 수 있는 한 외부인들과 접촉하지 않으려 했답니다. 그 가족들이 첫 번째 성찬에 참여했을 때, 수사들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한 어머니가 성찬 떡을 그 갓난아기의 입에 조심스레 넣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사님은 그 광경을 보며 성찬의 신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성찬은 딱딱한 교회 의례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의식이었던 셈입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음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도 성찬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이 계셔서 참 든든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가족이 되었지만 아직 깊은 친교를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올 한 해를 주님 안에서 잘 마무리 하시고, 가슴 벅찬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바라봅니다. 괴로움의 시간은 결국 지나갈 겁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2월 3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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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찢는 사람들

어둠을 찢는 사람들

 

“천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참 힘겨운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있었던 당회는 zoom이라는 툴(tool)을 통해 진행했습니다. 모일 수 없었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습니다. 낯선 소통의 창구였지만 많은 분이 동참해주셨습니다. 이렇게라도 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하겠습니다. 모처럼 보이는 얼굴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한 결정 사항은 없었지만,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만날 시간이 자꾸 미뤄지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새벽 기도회조차 할 수 없기에 새벽 묵상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의 계획은 대림절에 한시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그 영상을 보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반응을 보여주셔서, 아침 묵상 자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습니다. 보다 많은 이가 동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묵상의 시간 끝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열 시면 중대본이 발표하는 확진자 현황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만 여전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어지간하면 외출조차 삼간 채 지내고 있지만, 마치 불길한 안개가 스멀스멀 마을을 휘감듯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은밀한 적이 어디에서든 출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깊어갑니다. 최근 한 두 주 사이에 교회발 확진자 수가 5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조심하는 이 시기에 몇 주 연속으로 부흥회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시민적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는 그들의 오도된 열정으로 인해 교회는 또 다시 질타를 당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전래 초기에 교회는 민족사의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중들의 삶에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반 시민 사회의 상식과 자꾸 동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절망의 노래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정진규 시인은 ‘다시 별’이라는 시에서 “누가 어둠을 조금씩 찢어내고 있다/빛이 샌다/내가 찢은 어둠,/어둠도 몇 개는 될 터인데/그것들도 별이 되었을까 빛이 되었을까” 스스로 물었습니다. 어둠을 조금씩 찢어내는 사람들, 그래서 별들을 탄생시키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나찌 시대를 겪은 후에 ‘탄생성 nat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죽음과 절망의 심연에서조차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드는 인간의 끈질긴 희망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고 간결한 표현을 복음서에서 찾습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성탄절을 내다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청년이 되어서야 처음 교회에 나간 제게는 성탄절의 추억이 많지 않습니다. 목회실 식구들에게 성탄절 추억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더니, ‘문학의 밤‘을 준비하던 기억과 새벽송을 돌던 기억을 떠올리더군요.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과 짝이 되기를 소망하던 그 애틋하고 순수한 기억 또한 새로운 듯 보였습니다. 이맘때면 잊을 수 없는 것이 찬양대의 칸타타 연습일 겁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고단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김밥이나 호빵 같은 것으로 요기를 하고 밤늦도록 찬양을 하던 그 모습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의 귀여운 노래와 율동 또한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무대 가까이까지 몰려와 카메라를 들고 자기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던 젊은 부모들의 모습 또한 새록새록 다가옵니다. 올해는 보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일까요? 문득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떠올랐습니다. 대림절과 성탄 무렵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부분을 차분하게 읽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성탄절은 꼭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냅니다.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는 애틋하지만 부모님께 보낸 편지는 의연한 태도를 보입니다. 1943년 12월 17일 자로 아버지 칼과 어머니 파울라 본회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트리히는 아들이 의기소침해질까봐 염려하실 부모님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성탄절을 맞이할 아들 생각으로 인해 부모님의 시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질까 걱정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성탄절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곤 하시던 두 분의 그 웅숭깊은 마음을 감사함으로 회상합니다. 그 따뜻하고 행복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과도기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성탄절을 감옥에서 맞이하는 것이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단지 이 축제의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의미 있고 참된 성탄절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난, 고통, 빈곤, 고독, 곤궁, 죄책 등이 인간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통상 고개를 돌리곤 하는 곳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달리 계실 곳이 없었기 때문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 ─ 이러한 사실들을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랍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편입되며, 감옥의 벽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손규태·정지련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p.315-6)

 

격절된 장소에 있기에 성탄절의 의미를 더 오롯이 새길 수 있다는 말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이 말을 달리 이해하자면 우리가 성탄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분들 곁에 다가서야 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25장은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병자를 돌보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참으로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올해 우리 교회의 성탄 헌금은 그런 분들을 위해 사용하려 합니다.

 

불편하고 불쾌한 일들이 많은 나날이지만 우리는 그 척박한 현실 속에 기쁨과 희망을 파종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형편이 어떠하든 주위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선택의 시간 앞에 서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천사가 말하는 기쁨은 하늘에 접속된 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쁨은 멀리 서서 관망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운명을 내던진 이들만 맛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점점 깊어가고 있지만 그만큼 빛이 도래하는 시간 또한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 희망을 꼭 붙잡고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누리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평안이 우리 모두 가운데 함께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2020년 12월 17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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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개역성경)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안함이 우리 마음을 시시각각 괴롭히기에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걸어온 한 해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기획해야 하는 당회조차 비대면으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비감스럽기만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처한 현실이니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지에 흩어져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던 초기 감리교도들은 모일 때마다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찬송을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애썼다고, 고맙다고 등을 토닥여 주며 격려하고 격려받고 싶습니다. 찰스 웨슬리가 쓴 찬송시가 지금도 가슴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1절. 생전에 우리가 또 다시 모였네 예수의 보호하심을 다 찬송하리라

2절. 주 예수 은혜 힘입어 살 동안 싸움터 같은 세상에 두려움 없었네

3절. 주 예수 변찮는 큰 사랑 베푸사 이때껏 인도하셨고 늘 인도하시리

4절. 구주의 권능을 힘입고 살았네 그 은혜 찬송하려고 이곳에 모였네


통일찬송가에 들어있던 이 곡이 지금 찬송가에 빠져 있어 유감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곡조는 찬221장(주 믿는 형제들)과 동일합니다. 위의 가사를 음미하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저는 감사의 심정에 사로잡힙니다. 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한 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고, 우리가 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신앙생활에 큰 도전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마치 신앙의 중심이 해체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는 습관이 무뎌진 것은 아닌지,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습니다. 실제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우리 믿음은 흐릿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교우들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대로 살고 계심을 알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우리 신앙의 진실함은 일상생활 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이 말은 일상의 자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자리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방역당국의 지침보다 선제적으로 대처해왔던 것은 교우들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 혹은 성경공부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평생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이 느끼는 격절감과 소외감이 참 큽니다. 어떤 형태로든 접속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주중에 가끔 본당에 올라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문득 그 자리에 앉으시곤 하던 교우들의 얼굴이 떠오르면 함께 지냈던 시간을 반추하는 동시에 그분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곤 했습니다. 교우들이 식탁 친교를 나누던 친교실도 거의 일 년째 쓸쓸한 고요만을 품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잦아든 교육관이 무척 스산합니다. 그나마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할 영상 자료를 만들거나 꾸러미를 싸기 위해 교사들이 찾아올 때면 공간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속회와 선교회 모임을 거의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소모임을 통해 경험하던 따뜻한 우애와 연대의 끈이 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어떤 선교회 혹은 부서들은 SNS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신앙적 경험을 나누기도 하고, 성경 읽기 모임을 꾸려가기도 했습니다. 새해에는 여건이 어렵더라도 선교회와 속회가 어떤 형태로든 모임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비대면 상황에서 양질의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방송 미디어부원들이 보여준 사랑의 섬김과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매주 자체 평가를 해가면서 개선 방향을 논의하는 과정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기 위해 노력해준 찬양대원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노력을 귀히 보셨을 것입니다.


한 해가 흘러가는 동안 교우들 가운데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옮겨간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감염병에 대한 우려로 가족 중심으로 슬픔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다른 한편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들도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처럼 여겨지기에 우리는 그 아기들을 하늘에서 온 메신저로 여기며 환영해야 합니다. 태어난 아기들이 부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다운 존재로 클 수 있기를 빕니다. 올해에도 많은 새로운 신앙의 길벗들이 우리의 순례 여정에 동행이 되었습니다. 온라인 세상은 공간적 거리를 뛰어넘는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새로운 길벗들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경험을 함께 나눌 때 우리의 구원 이야기는 더욱더 풍성하게 변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아픈 데 신앙인이라고 하여 무탈할 수만은 없습니다. 백척간두 끝에 선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미래의 전망조차 불투명하기에 더욱 절망의 어둠 속으로 내몰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혼돈과 공허에 포획되려는 순간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삶의 용기를 되찾았다는 증언을 들었을 때 그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촉수를 내밀어 물기를 찾는 실뿌리처럼 희망은 그렇게 조금씩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움에 처한 미자립교회들의 설 땅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됩니다. 올해도 기존의 지출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예산을 그 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작은 개체교회들이 겪는 어려움의 크기에 비하면 우리의 나눔은 너무 미약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의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축적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그 나눔의 신비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출 16:18). 


우리 교회가 출애굽 공동체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똑같이 다 나눌 수는 없다 해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만 기후 변화에 신앙적으로 응답하는 일은 정말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커다란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해에는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도 더욱더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해 우리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실로 다양합니다. 은사들은 다 달라도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소속감과 정서적 연대입니다. 물론 그 연대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중심에 연결될 때 우리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갈라져 다투는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진영 간의 싸움이 시작되면 진실은 간데없고 맹목적 투쟁만 남습니다. 이런 시기이기에 교회는 더욱 생명과 평화의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혐오와 배제와 분열의 많은 부분이 교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힙니다. 새로운 교회 운동이 벌어져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과제 앞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제게 함민복 시인의 ‘산’이라는 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이 시에서 ‘당신’은 물론 ‘산’이지만, 그 산은 ‘누군가의 품’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품에 안겼다가 떠나가는 것들을 배웅하는 산, 봄이면 피었다 지는 진달래꽃도 순순하게 배웅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조차 붙잡지 않습니다. 시간 속을 흘러가다가 문득 그리우면 먼발치로 바라보고, 그리우면 찾아가 안길 수 있는 그런 산, 품, 교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 1:6). 


저는 이 확신을 붙들고 나아가려 합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의 여정에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걷는 그 길 위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들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모든 이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20년 12월 11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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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젤의 지혜

가젤의 지혜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께 구하오니,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뜨겁게 원하고, 사려 깊게 탐구하고, 진실하게 인식하고, 온전하게 설명하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아멘”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마음과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오늘 수학능력 시험을 보고 있는 모든 수험생의 마음도 굳게 붙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집니다. 저는 차가운 음료는 좋아하지 않지만 대기의 서늘함은 좋아합니다. 찬 기운을 느끼며 걸을 때 왠지 살아있다는 느낌이 강렬해지기 때문일 겁니다. 가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댄 채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강인한 모습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우게 됩니다. 사막을 배경으로 사는 이들이나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사소한 불편조차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한 삶이 떠올라 부끄럽습니다.

 

지금도 몸을 눕힐 한 평의 땅도 방도 없어 거리를 떠도는 분들이 계십니다. 추워하며 살게 해달라고, 이불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헤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어느 시인의 마음이 참 거룩하게 다가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도 세상에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외양간 말구유에 오신 분을 우리는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서 바로 비대면 예배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지만, 교회 2층 로비에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구유가 놓여 있습니다. 바람막이조차 없는 외양간에 눕혀진 아기 예수, 동방박사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와 나귀와 양도 보입니다. 

 

구유에 소와 나귀를 꼭 등장시키는 까닭은 알고 계시지요? 그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한 구절과 연결됩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짐승도 제 주인의 은덕을 아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들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소’와 ‘나귀’는 우리의 부덕함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거울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구절은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슬프다! 죄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사1: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한 것이 되는 법입니다.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로 호명되는 것은 하나님을 등진 이스라엘이지만, 우리라고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구유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흉악한 종자’라고 부르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곱다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투미하기만 한 우리 영혼을 닦아 주실 분은 하나님뿐임을 알기에 그 은총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유 만들기 전통이 시작된 것은 13세기 프란체스코 성인을 통해서였습니다. 1223년 성탄절을 보름 앞두고 그는 로마에서 돌아와 폰테 콜롬보에 있는 은둔소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상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성탄절을 뜻깊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마침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과 함께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그들은 구유를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그는 지인인 죠반니 벨리타의 소유인 그레치오(Greccio)의 동굴에 구유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죠반니에게 서신을 보내 주님의 축일을 잘 지내기 위해 구유를 준비해달라고 말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필요한 것 하나 갖추지 못한 그 갓난아기가 겪은 불편함을 최대한 생생하게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 그리고 황소와 나귀 옆에서 그 갓난아기가 어떻게 건초더미 위에 누워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죠반니는 성인의 말을 따라 구유를 만들었고, 성탄절이 다가오자 많은 수사와 신자들이 그 구유 앞에 모여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를 경험하고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동일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허물이 많은 우리조차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그 한결같은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세상 물결에 따라 흘러가 버리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영혼의 닻입니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가족들이 함께 그런 구유를 만들어보는 것도 신앙적으로 유익할 것 같습니다. 매년 행하는 전통으로 삼아도 좋겠구요.

 

그러나 구유의 참 의미는 가난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오셨기에 밑바닥 사람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실 수 있었고, 버림받음의 쓰라림을 견디셨기에 버림받은 이들의 신산스러움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으셨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이러한지라 예년과 같은 떠들썩한 성탄절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이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유에 오신 주님을 떠올릴 때마다 동화작가인 권정생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에서 쫓겨나 거지 생활도 했고, 병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가 1981년에 이오덕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다가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몸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p.232-3)

 

하나도 그른 것 없는 진실입니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겸허하게 그런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대림절 기간이 그런 경청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떠도는 말들, 우리 영혼을 어지럽히는 말들, 사람들을 갈라놓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느라 가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러 심신이 고달플 때면 카페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곤 했습니다. 이제는 당분간 카페에 머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참 답답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긴장을 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리아나 허핑턴이 들려주는 가젤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가젤은 위험을 감지하면, 예컨대 표범이나 사자가 접근하면 부리나케 달아난다. 그러나 위험이 지나가면 곧바로 멈춰서서 아무런 근심도 없이 평화롭게 풀을 뜯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실제 위험과 상상의 위험을 구분하지 못한다.”(아리아나 허핑턴, <제3의 성공>, p.81) 

가젤의 지혜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늘 긴장한 채 살 수는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평화를 기뻐하며 누려야 합니다. 느긋한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쌀쌀한 날씨에 감기 조심하십시오. 시간을 마련하여 외로운 벗들에게 손편지라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일랜드 축복기도로 여러분을 향한 제 마음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꼭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대의 발이 닿는 곳마다 길이 닦여 있기를

바람이 언제나 그대의 등 뒤에서 불어오기를

오늘도 햇살이 그대의 얼굴을 따뜻하게 비추기를

그리고 단비가 그대의 대지 위에 부드럽게 내리기를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크신 손으로 그대를 붙들어 주시기를

하나님께서 그 크신 손으로 그대를 붙들어 주시기를

아멘.”

 

2020년 12월 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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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소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 


“지혜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12:3)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의 새로운 시작인 대림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끝과 시작이 손을 잡고 시간의 한 사이클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합니다.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셨던 말씀이 새삼스럽게 다가옵니다.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8:22). 계절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리고, 그 시간의 갈피에 깃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소망을 품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아직 오지 않는 대상을 우리 삶 속에 모셔 들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가오는 대림절기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을 모실 준비를 착실히 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종말론적 미래를 앞당겨 살아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시간과 공간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뿌리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 또한 달라질 겁니다.

날이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교회 현관 앞에 나란히 놓아두었던 국화 화분을 다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오늘 아침 교육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은은한 국화향이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가오는 모든 이에게 향기를 나눠주는 꽃의 너그러움이 참 고마웠습니다. 향기를 굳이 드러내려고 호들갑 떨지 않는 그 담담함이 더욱 귀하게 보입니다.

방역 단계가 올라가면서 교회 모임이 또다시 어려워졌습니다. 공간 수용 인원의 20% 정도의 출입만 허용한다고 합니다. 주기적으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럽습니다.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투덜거린다고 하여 상황이 좋아질 리 없으니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대림절 내내 비대면 예배를 진행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영혼이 불안의 물결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영혼의 닻을 단단히 내려야 할 때입니다.

교회를 그리워하는 마음, 교우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김소월의 시 ‘가는 길’은 그리워하는 마음의 풍경을 우련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 번”. 그립다고 말을 할까 망설이다가 그 말을 발설하는 순간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그냥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주저주저하다가 다시 돌아보는 그 미묘한 마음을 시인은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이런 것이겠지요?

얼마 전 좋은 벗들과 함께 읽었던 다산 정약용의 시가 떠오릅니다. 유배지에 머물면서 썼던 시인지라 그 고적함이 쓸쓸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가동귀家僮歸’라는 시입니다. 가동은 집안일을 돌보는 하인을 가리키는 말 같습니다. 그는 다산의 가족들이 보내는 편지를 간직한 채 천 리 길이 넘는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를 통해 건네진 편지를 읽으며 다산은 가족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가동이 돌아가고 난 후 더 큰 적막감과 쓸쓸함이 몰려와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았습니다.

“편지를 받으니 이야기 나누는 듯하였는데
사람이 떠나고 나니 다시금 적막하다
아무 일도 말도 없으니 하늘은 막막하고
길만은 변함없이 아득하겠구나
새재의 길은 일천 구비요
탄금대 물길은 두 줄기라네“

귀양살이하고 있어 그 땅을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은 ‘가동’을 따라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굽이굽이 휘돌며 이어지는 새재 길이며 두 줄기로 뻗어 나가는 탄금대의 물길도 눈에 선합니다. 그 재를 넘으면 한양길이 활짝 열릴 터이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저 한 쌍의 제비가 머물며
온종일 울어대니 사랑스럽구나
집소식 들어서 좋다 했는데
새로운 근심 갈래갈래 일어나네
못난 아내 날마다 운다고 하고
어린 자식 볼 날은 그 언제일까
박한 풍속 참으로 안타깝구나
뜬 말에도 아직은 불안하기만“

무심히 바라보니 금실 좋은 제비 한 쌍이 처마를 넘나들며 온종일 재재거립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니 그리움이 더욱더 깊어갑니다. 차라리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집안 소식 듣고 나니 오히려 근심이 더 깊어갑니다. 객지에서 고생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날마다 우는 아내며, 죄인의 아들인지라 앞길이 막막하기만 한 자식들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염량세태炎涼世態입니다. 좋은 시절에는 뻔질나게 드나들던 이들도 형편이 어려워지자 이러쿵저러쿵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야박한 세상에 눌려 행여 가족들의 마음에 그늘이라도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독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서라 이 또한 달게 받으리
세상살이 본래부터 괴로운 것을”

염려한다고 하여 상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니, 지금은 이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푸접없는 세상이라 하여 울분을 터트리다가는 자신이 먼저 망가질 수 있음을 그는 알아차린 것입니다. 삶은 본래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가끔은 견뎌야 할 만큼 괴로울 때도 있는 법입니다. 괴로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우리 내면을 허약하게 만듭니다. 괴로움은 회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뚫고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러합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에 접속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대림절은 영원한 생명의 회임기懷妊期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몸을 빌려 이 땅에 오려 하십니다. 불확실함과 혼돈과 공허가 가득한 세상이지만, 영혼이 맑고 따뜻한 사람들이 더욱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숨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병중에 계신 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치유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차가운 날이 당분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목도리도 꼭 두르고 다니시면 좋겠습니다. 몸은 멀리 있어도 우리가 한 몸 공동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맑고도 선선한 미소로 시대적 우울을 몰아내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2020년 11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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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우리가 함께 지어가는 삶의 이야기
 



“주님의 길은 바다에도 있고, 주님의 길은 큰 바다에도 있지만, 아무도 주님의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시편 77:19)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면서 방역단계가 1.5단계로 올라갔습니다. 교회는 좌석 수의 30%의 교인만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좌석 수보다 많은 교인이 참석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앞섭니다. 익숙해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시할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적응하며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필요하다”(계14:12)는 말씀을 날마다 곱씹고 있습니다. 화낼 일도 아니고, 한숨을 내쉴 일도 아닙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우리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입니다. 늘 대하던 얼굴을 대할 수 없는 아쉬움은 크지만 저기 어딘가에서 우리 교우들이 온몸으로 어둠과 맞서고 있음을 생각하며 힘을 내야 합니다.
 
지난 주중에는 모처럼 강화도에 다녀왔습니다. 바깥출입이 어려워 오랫동안 교회에 오실 수 없었던 원로 장로님을 찾아간 것입니다. 김포를 거쳐 초지대교를 건너서 목적지를 향하면서도 마음이 상쾌하지 않았던 것은 자욱한 미세 먼지 때문일 겁니다. 바깥 풍경이 사뭇 을씨년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건너편으로 석모도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어디선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꽤 오래전입니다만 교회 봉사자들과 함께 석모도를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모처럼의 나들이에 신이 난 교우들이 별것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꽃을 터뜨리던 그 날이 그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새우젓도 사고, 간장게장도 사고, 속노란 고구마도 사며 흥청거리던 그 시간이 떠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습니다. 결국 함께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비교적 최근에 우리 교인이 된 형제자매들과 그렇게 허물없이 어울리며 생의 한순간을 즐기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엮어갈 삶의 이야기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계단을 올라 집 현관 앞에 이르렀을 때 휠체어에 앉아 계신 장로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손을 잡은 우리를 장로님은 소리 없는 울음으로 반겨주셨습니다. 아이처럼 우시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잠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시편 77편을 읽었습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고난의 시간을 회상합니다. 삶이 고달파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하나님은 매정하게도 그 기도를 들으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참담한 경험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영원히 버리시는 것일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는 것일까? 한결같은 그분의 사랑도 이제는 끊기는 것일까? 그분의 약속도 이제는 영원히 끝나 버린 것일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잊으신 것일까? 그의 노여움이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이신 것일까?“(77:7-9)
 
어쩌면 우리 가운데 이런 상황에 처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일식(日蝕) 체험은 우리 쪽에서 보자면 ‘어두운 밤’의 경험입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다가오면 확실하던 것은 불확실하게 변하고, 맛있었던 것은 맛없는 것으로 변합니다.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갑니다. 그러나 이때 시인은 스스로에게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우울감에서 벗어날 처방을 내립니다. 그것은 주님이 해주신 일을 하나하나 되뇌고, 깊이깊이 되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마음자리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분심에 시달려야 했겠지만 시인은 그 마음을 다잡아 하나님께 가져간 것입니다. 되뇌고 되새기는 동안 들끓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마침내 빛이 그의 내면의 뜨락에 내려앉았습니다. 마침내 시인은 “하나님, 주님의 길은 거룩합니다. 하나님만큼 위대하신 신이 누구입니까?“(77:13)라고 고백합니다. 고백이지만 사실은 찬양입니다. 장로님은 그 말씀을 들으며 또 우셨습니다. 그 울음 속에 담긴 염원과 진실함을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차가운 이론에 대한 관심이 적어집니다. 젊은 날에는 비논리적인 언술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지금은 그 언술 너머에 있는 마음을 읽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차가운 신학이론이나 교리를 가지고 누군가의 삶을 재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류를 제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임을 압니다. 하지만 이론은 복잡한 현실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냉정한 잣대를 들이대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차가운 신학보다는, 곁에 있는 사람의 숨죽인 울음소리를 듣고 그들을 소중하게 대하는 이들 속에서 거룩함을 발견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읽은 글이 제 마음에 참 따뜻하게 남아 있습니다. 동국대 입구에 있는 빵집 태극당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거대한 프랜차이즈점들의 등장으로 태극당은 거의 문을 닫을 지경에 처해 있었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창업자의 손자가 그 사업을 맡았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代)로 이어져 온 그 빵집의 전통을 잘 지켜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오래된 샹들리에도 손질만 하여 재사용하고, 옛날부터 벽에 부착되어 있던 벽화나 안내문도 그대로 살려두었습니다. 옛 감성의 빵도 그대로 담아 판매했습니다. 많은 이가 의구심을 품었습니다. 감성이 다른 세대에게 어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젊은이가 그 빵집을 찾기 시작했고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지금의 주인은 창업자인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가슴에 깊이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오래 걸려 기껏 하루 세 개밖에 못 만드는 빵이 있었어요. 할아버지한테 도대체 왜 이렇게 시간 뺏기면서 어느 날은 팔리지도 않는 빵을 만드시냐고 여쭤봤지요.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빵을 좋아하셔서 가끔 사러 오시는 할머니가 계신다. 이 빵만 좋아해서 드시는데 우리밖에 못 만드니 그 할머니를 위해서 만들어드리는 거다.’”
 
어쩌면 전통이란 이런 이야기들이 쌓여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해득실을 헤아리기보다는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려는 마음이 사랑이고 평화를 만드는 마음일 겁니다. 사람들은 새것을 좋아합니다. 낡은 것을 다 허물고 그 위에 새로운 것을 쌓아 올리는 것을 일러 발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새것 속에는 이야기가 깃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가 빈곤한 것은 사람들이 함께 살며 엮어가는 이야기가 사라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앙인들은 이 우울한 시대를 다양한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색의 마법사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영혼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중층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우리 삶을 긴 안목에서 조망하는 시선을 빼앗길 때 삶은 전장으로 바뀝니다. 숨을 돌리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멈추지도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분홍 구두를 신어서 계속 춤을 추어야 했던 안데르센 동화의 소녀처럼 우리는 휴식조차 없이 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가끔은 멈추어 서야 합니다. 멈추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잘 보아야 잘 살 수 있습니다.
 
또다시 힘겨운 시간이 우리 앞에 배달되었습니다. 한숨만 내쉴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고립된 단자가 아닙니다. 잠시 떨어져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은 교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이날은 왕 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서심으로 오히려 하나님 우편에 앉게 되신 주님을 깊이 묵상하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이 오롯이 드러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11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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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겹 줄처럼 든든하게

세 겹 줄처럼 든든하게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도서 4:12)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가을의 막바지인 지금 형형색색의 단풍이 참 아름답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다가 다양한 색이 어울려 꽃보다 화려한 자태를 자랑하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저절로 ‘야, 좋다’라는 감탄이 터져나왔습니다. 어쩌다 보니 올해는 가을 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붉나무를 보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도봉산 오르는 길에 만나곤 했던 나무들도 떠오릅니다. 계절을 낭비한 것 같아 속이 상합니다.

돌아가신 박 목사님께서 웃으며 하신 말씀이 가끔 떠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면 하나님이 이렇게 물으실 거랍니다. “그대는 어디에서 왔소?“ “예, 저는 한국에서 살다 왔습니다.“ “어떤 일을 했소?“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설악산 단풍을 보았소?“ “아니오, 너무 바빠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화를 내시면서 “그걸 보라고 그대를 거기로 보낸 건데, 보지 않았다니 실망이오”라고 책망하실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지만 그 말 속에는 생태신학의 멋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찬탄하고 기뻐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찬미가 아니겠습니까?

1930년에 제정된 감리교회 교리적선언 제1조는 “우리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지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라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칭하는 서술어 하나가 눈에 띕니다. 하나님을 ‘미’ 즉 아름다움의 근원이라 고백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을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아름다움을 빚는 이들은 그러니까 구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저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딱딱한 감이 홍시로 변하기를 기다리는 일입니다. 딱딱하던 조직이 풀어지면서 떫은 기가 가시고 단맛으로 변하는 그 과정을 화학적으로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그 결과를 누릴 때마다 왠지 모를 행복감이 몰려옵니다. 어린 시절 채 익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 퍼런 감을 소금물에 담가두거나 쌀독에 묻어두었다가 먹던 생각도 납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참 달달했습니다. 소소하지만 이런 행복한 기억을 되살리며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시는지요? 어떤 분들은 말씀을 반추하며 지내기도 하시지만 대개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무심하게 지내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설교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는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전도서의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서둘러 마무리 하느라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푸는 데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중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책 <신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을 꺼내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만난 한 대목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개인이 하나의 사슬을 잇는데 반드시 필요한 지체들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작은 지체라도 꼭 맞물려지면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법이다.“(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성서의 기도서>, 정지련·손규태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p.98)

공동체를 구성하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이들의 상호 신뢰입니다. 내가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때 우리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어지고 창조적인 삶이 시작됩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자기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비판하고 교정하려 할 때 우리도 방어태세를 갖추게 마련입니다. 율법주의의 문제가 바로 그런 데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생명을 낳지 못합니다. 온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아픔과 슬픔과 연약함을 헤아리려는 섬세한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총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섬기려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섬김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본회퍼는 “섬기는 것을 배우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앞의 책, 99쪽)고 말합니다.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뜻이 꺾이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야 진실로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빚지고 있음을 자각할 때 시작됩니다. 그가 말하는 섬김 몇 가지를 꼽아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섬김의 첫 단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되듯이, 형제에 대한 사랑도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을 배우는 데서부터 시작된다“(같은 책, 101쪽)는 것입니다. 적극적 경청은 치유의 시작인 동시에 평화의 시작입니다.

섬김의 둘째 단계는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것“(같은 책, 103쪽)입니다. 그것이 설사 사소한 일이라 해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마음은 있지만 몸이 굼뜰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의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섬겨야 할 때 손을 아끼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번거로울 수 있지만, 그 일에 동참할 때 우리 속의 무기력과 무의미도 스러집니다. 성도들 간에 도움을 주고받는 일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섬김의 셋째 단계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갈6:2). 남의 짐을 진다는 것은 그를 형제자매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눠질 때 비로소 사랑의 친교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랑의 친교를 빙자하여 무작정 자기 짐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이들은 친교의 걸림돌이 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섬김이 우리 가운데 자리잡을 때 교회는 든든하게 서고, 연대의 끈은 더욱 굳건해질 것입니다. 

여전히 코로나19가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모처럼 열린 교회 문이 다시 닫히는 일이 없기를 소망하고 기도할 뿐입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시는 분들은 가정에서 영상예배로 동참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선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계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수요일부터 ‘웨슬리 설교 읽기’를 대면으로 재개했습니다. 눈 앞에 이야기를 경청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칠판이 있으니 한결 마음이 수월했습니다. 작으나마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속히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온이 고르지 않습니다. 환절기에 컨디션 유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생각날 때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가급적이면 무리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계절에 맞는 은총을 한껏 누리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0년 11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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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의 성자들

세속의 성자들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창28:11-12)

주님의 평화가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별고없이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난 두 주 동안 교우들께서 보내주시는 메시지를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감염병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과 불편함이 있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 삶을 알차게 가꾸기 위해 애쓰신 교우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을 유지했기에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는 고백은 우리 가운데 신앙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일본인 오시다 시게또를 통해 ‘먼 빛의 눈길’이라는 표현과 만났습니다. 그는 신앙은 우리 일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일을 이해득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속상하기도 하고, 속이 타기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문제는 우리 인생의 수많은 계기 가운데 하나에 불과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다 보면 일상의 자잘한 일 때문에 감정이 격동하는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성공했다 하여 날뛰지 않고 실패했다 하여 세상이 무너진 듯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것을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가을을 가리켜 안으로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라 합니다. 바깥으로 향했던 우리 눈을 거둬들여 내면을 살펴야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거짓 자아를 만들어 사람들 앞에 내보이곤 합니다. 신앙인이라 하여 다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거짓 자아를 숨기기 위해 다양한 활동 속에 뛰어들기도 합니다. 예배, 성경 공부, 기도 모임, 친교 모임, 수양회 등에 참석하는 것으로 내가 꽤 괜찮은 신자라는 자부심을 품을 때도 있습니다. 마치 가인이 자기를 위한 도시를 만들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도성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자아는 끊임없이 자기 확장을 꾀합니다. 자기를 선의 범주에 넣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악마화하거나 무시합니다. 종교적 열심이 오히려 사람들을 상식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참 적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어떤 사람이 랍비 모쉐 라이브에게 물었다. “당신은 십이 년 동안이나 당신의 스승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얻었습니까? 십이 년은 긴 세월입니다. 그에게서 경전들의 어떤 의미를 배웠습니까?” 랍비 라이브는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토라(유대교의 경전)를 배우기 위해 스승과 함께 생활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스승을 관찰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가 어떻게 신발끈을 풀고, 어떻게 그것을 다시 매는가를 지켜보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그의 단순한 움직임들을 지켜보는 데에 십이 년이 걸렸던 것이다. 그가 숨쉬는 방식, 그가 서 있는 방식, 그가 잠자는 방식…이 모든 것이 하나의 명상이었다.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신비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토록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 자신의 생각이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 머리 속에서 비워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구름이 걷히고 나는 나의 스승을 볼 수가 있었다.”(마르틴 부버 원작, 미카엘 네프 편집, <성자가 되기를 거부한 수도승>, 류시화 옮김, 푸른숲, p.67)

일상을 거룩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이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참 스승은 가르치는 이가 아니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대화하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통해서도 거룩한 삶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 삶의 특징은 삼감과 존중 그리고 경외심일 것입니다. 거친 말과 눈빛이 횡행하는 세상에 살다 보니 그렇게 조심스럽게 살면서 하늘을 드러내는 이들을 만나면 행복합니다.

<전라도 닷컴>이라는 잡지는 제가 제일 재미있게 읽는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잊혀가는 시골 마을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일부분이었으나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생활용품이나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10월호 기획 특집 주제는 ‘고향 편지’였습니다. 흙과 더불어 살아온 노인들의 모습은 참 아름답습니다. 손은 주름투성이이고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맑은 미소는 욕심 없이 살아온 이들의 편안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담양에 사시는 90세의 할머니에게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당신을 찍지 말라 하십니다. 늙어 주름진 모습을 보이기 싫으셨던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싫지는 않으신 듯 활짝 웃고 계십니다. 기자가 담장 위에 있는 고양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나비야, 너 사진 찍는단다”라며 반기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식구가 없응께 나비가 식구맹키여. 이상 의지가 디야. 영리해. 말하문 이상 알아들어. 안 시캐서 글제, 머이든 갈치고 연십(연습)을 시키문 잘할 것이구만, 하하.” 할머니가 나비를 좋아하는 것은 당신을 보고 ‘알은 척’ 하기 때문입니다. “나비 소리가 테레비 떠드는 소리보다 좋제. 나는 우리 나비 보고 마당에 꽃 보고 살아. 꽃도 나비도 애기 키우대끼 키우고 보제. 사람은 자기 공력 들이고 쳐다보고 살 것이 있어야써. 다 정성이여. 건성으로 되는 것은 이 시상에 없제.”(<전라도닷컴>, 2020.10.222호,p.19)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경세가는 아닐지라도 이런 마음을 품고 산다면 세속성자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속 성자란 우리의 비근한 일상 속에서 거룩한 세계를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런 분들은 자기들이 그런 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꽃도 나비도 애기 키우대끼 키우’는 사람, 생명 돌봄을 자기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우리 영혼은 저절로 맑아집니다.

야곱이 꿈에 본 층계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달아나다가 광야에서 밤을 맞은 야곱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그가 베고 잤다고 하는 돌베개가 그의 신산스러운 처지를 오롯이 드러냅니다. 그는 매우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든든한 울타리였던 가족으로부터 멀어졌고, 설상가상으로 낯선 곳에서 맞이한 밤은 또한 들짐승들의 시간이었습니다. 잠을 청해보지만, 비몽사몽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층계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베델’이라 일컫습니다. 성경의 베델은 특정한 장소의 이름이지만, 우리 삶의 베델은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가 다 베델입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를 만나 취약해질 때 우리가 선 자리가 곧 하나님이 계신 자리임을 알게 됩니다. 일상을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땅은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입니다(민35:34).

며칠 전 어느 개신교 신자가 사찰에 불을 지르며 ‘할렐루야’를 외쳤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광신자들의 행태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허물고 있습니다. 타자를 악마화하는 일체의 종교적 신념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예수 정신과 무관합니다. 믿음은 시민적 덕성과 유리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종교적 열심이 지식과 덕성과 결합하지 않을 때 폭력으로 귀착되기 쉽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취약한 상황에 내몰린 이들 곁에 다가서야 할 때입니다. 개그우먼 한 분이 세상을 등졌다고 하지요? 참 가슴이 아픕니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다가 마침내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그 마음이 얼마나 가엾은지요. 우리 주변에 그런 분들이 없나 잘 살펴야겠습니다. 에너지 빈곤층에게는 다가오는 겨울이 공포스러울 수 있습니다. 유난히 올해는 후원자들의 발길이 뜸하다고 하네요. 마종기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겨울 기도’ 부분)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이라는 표현이 늘 제 마음에 걸려 있습니다. 다음 주 토요일(14일)에 2남선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연탄배달 봉사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작은 실천이지만 귀한 일입니다. 스산한 날씨에 지치지 마시고, 늘 감사해야 할 일들을 기억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0년 11월 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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