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라는 것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1. 1. 4. 09:32


 신앙이라는 것

 


인생을 살면서 신앙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 가령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삶을 목표로 삼아야 되는가등등 간단치 않은 주제들과의 씨름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라고 설득하면 그로써 우리의 고뇌는 더 이상의 의문의 여지없는 상태로 안정되는 일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의 생활과 분리되어 따로 종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또는 사사로운 문제와는 관련이 없이 보다 심오하고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들하고만 상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모두가 다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믿음이 없는 삶, 삶이 없는 믿음 모두가 다 허무하거나 혹은 껍질뿐인 앙상한 관념의 놀이에 그치기 십상이다. 신앙이란 삶 그 자체의 절박한 주제이고, 그 삶을 펼쳐나가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성서>는 매우 솔직하고 구체적이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 첫 발을 들여 놓거나 또는 그저 주변에서 맴도는 경우에도 성서를 읽게 되노라면 성서가 최상으로 경건한 책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과도 같은 생각들이 들어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하게 된다. 인간들의 일상의 고뇌를 비롯해서 전쟁, 파괴, 속임수, 간음, 질투, 투쟁, 사랑, 근친상간, 타락 등등 무수한 드라마가 그 안에 담겨 있어서 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사와 그리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하나님의 존재도 그 속에 그려져 있다. 아니 때로는 더욱 잔혹하고 편협하며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요구를 인간에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다.

 

 

그래서 혹자는 성서를 문학으로 이해하고, 혹자는 역사서로 이해하며 혹자는 이스라엘 민족종교의 경전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친다. 성서에 대한 이런 이해가 반드시 틀리지만은 않다. 성서는 그런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성서가 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다가올 수 있는 길을 보게 된다. 무수한 세월 속에서 인간이 겪은 무수한 사건들을 삭이고 삭여서 그 오랜 시간의 풍파(風波)에 마모되지 않은 평생의 고백들이 정수(精髓)처럼 하나로 묶여진 책이기 때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런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통과해오면서도 그 삶에 깊숙한 연륜과 지혜가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인생의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 그 마음과 영혼이 온통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그 삶에 아름다운 품위가 있고, 경청할 만한 진리가 번뜩일 때에 우리는 그가 치른 고난이 도리어 보석이 되어 빛나는 것을 경험하고 감격해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과 그로써 얻은 진실에 대한 눈뜸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살면서 별로 고생도 해보지 않고, 인생 보는 눈이 가볍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은 자에게 우리는 인생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성서는 이런 온갖 고난의 골짜기를 힘겹게 통과한 연후, 자신의 영혼에 길러진 귀중한 생명의 진액을 인류에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생사의 갖가지 곡절과 시비 앞에서 성서는 그 모든 문제들을 종국적으로 풀어나가는 힘의 원천이 결국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마음과 고백을 만날 수 있는 현장이 성서 속에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 또는 종교적 교리든지 아니면 신학적 가르침에 좌우되지 말고 자신의 인생살이와 성서속의 세계가 하나로 만날 수 있는지를 물으면서 읽어나가야 한다.

 


요한복음에는 나사렛 예수와 한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른 예수께서 물을 길러 나온, 유태인들과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그것도 아무도 없는 호젓한 우물가에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종교지도자의 스캔들로 문제 삼을 만한 현장이었다.

 

물을 한잔 청하자 여인은 별로 친절하지 않게 대꾸한다.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를 알았다면 거꾸로 예수에게 여인이 물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여인은 두레박도 없는 주제에 무슨 소리냐하면서 핀잔을 준다. 이에 예수는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라고 답한다. 매일 물을 길러오는 고된 노동에 시달려 있던 여인은 귀가 번쩍 뜨인다. 팩팩 거리던 여인이 자신의 힘든 지경을 짚어나가는 예수 앞에서 마음이 한결 열린 것이다. 게다가 예수는 여인의 삶, 그 본질적인 고뇌 즉,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며 이미 몇 사람의 남자를 거치면서 살아온 역경의 현실을 언급한다. 이렇게 저렇게 전전하면서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마음과 몸이 지쳐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있는 여인의 영혼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아픔을 어루만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의 삶은 전격적으로 예수를 향해 열렸다. 그리고는 물을 긷기 위해 가져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버려두고 동네를 향해 달려간다. 예수를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여인이 우물에 온 것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이 여인의 삶에 지금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물동이를 버리고 간다. 홀연 정작 중요한 것이 깨달아 지는 순간, 지금껏 집착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신앙의 세계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을 준다. 우리의 삶, 그 처지를 바로 보고 짚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껏 매달려 있던 욕망이라든가 좌절감이라든가 또는 허망한 생각에서 단숨에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 그 깊숙한 곳까지 부드럽게 육박해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 생명의 힘을 길어 올릴 두레박을 얻은 여인이다. 바로 그런 얻음이 있었기에 물동이는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영혼의 두레박’, 그것을 우리가 얻게 되면 우리는 인생의 갈증을 새롭게 축이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오늘날, 무수히 방황하는 심령들은 모두 바로 이 두레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올 한 해, 부디 그런 두레박을 얻어 삶의 새 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리영희 선생이 그리운 시절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12. 5. 10:08

리영희 선생이 그리운 시절

- 리영희 선생의 <대화> -

  

시대의 의로운 길잡이

 

오늘은 엄혹한 시절, 불의가 판을 치고 거짓이 난무할 때 그러한 권력에 맞서 자유와 진실을 추구한 언론인이자 지식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10주기이다. 한 시대를 사상적으로 교육시킬 수 있는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영광이 무수한 고초와 핍박 그리고 고난이 전제된 것이라면 아무나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리영희 선생은 지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그 격동의 시기에, 진실에 대한 깊은 갈구를 해온 세대에게 마치 샘물처럼 솟아오른 존재였다. 그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는 냉전 의식으로 눈이 가려진 시대를 뚫고 진실의 정체를 보여준 위력적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세대를 길러낸 사상의 은사또는 시대의 교사라는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사상의 은사

 

이보다 더 이상의 기쁨은 없다. 그가 낳은 사상의 자식들이 이제 이 사회 곳곳에서 일전의 지휘관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영희 학교출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분야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지경이다. 정치는 물론이고 언론계, 학계, 문화계, 시민운동 등 그의 지적 파장이 도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격인 대화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대화자로 등장해서 리영희의 어린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개인이 하나로 엉켜 이루어내는 일대 드라마를 장쾌하면서도 섬세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그리하여, 리영희라는 개인에 대한 이해와 지식만이 아니라 그가 마주했던 시대의 의미까지 파악하도록 해준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오늘은 어떤 지점에 와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자서전 대화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세대만이 아니라,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도 절실한 일독을 권하게 되는 책이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그와 같은 시점과 현장에 서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라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했을지 돌아보게 된다. 그건 역사의 중심에 서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교육이자 훈련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하여, 이 시대에 대화를 읽지 않는다면 그는 대화에 끼일 자격을 잃게 될 것이다. 지난 시대가 겪어온 고통과 우여곡절, 거기에서 탄생한 역사에 대한 열정과 의로운 힘들의 집결, 이를 주목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늘의 시간을 내용 없이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빛나는 어리석음진솔하고도 뜨거운 육성

 

첫 장을 펴는 순간 독자들은 아마도 근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 결코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리영희의 다른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구어체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야기이다. 한 의지가 바른 지식인의 삶의 기록이다. 그 기록이 열어가는 길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참으로 줄기차게도 그리고 고집스럽게도 자신의 뜻에 충실해온 지식인의 빛나는 어리석음진솔하고도 뜨거운 육성을 만나게 된다.

  

리영희가 전환시대의 논리를 내놓았을 때, 세상은 여전히 중세였다. 권력의 신학이 지배하고 사상의 종교재판이 당연시되었다. 언론은 세상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왜곡해서 보여주는 임무가 본연의 역할인 듯했던 때였다. 바로 그 시점에서 리영희는 권력자, 기득권 세력에게 악역을 맡은 자가 된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세대에게는 복음의 전령자가 된다.

 

베트남을 위해 한국군이 파병되었다는 월남전의 진상이 무엇인지, 권력과 언론의 관계가 도대체 어때야 하는지, 그리고 일본의 군사대국화 전략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일체의 서술은 그때까지 진리라고 여겨졌던 상식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그것은 단지 주장이 아니었고, 명확한 논거와 입증 그리고 논박하기 어려운 논리로 무장된, 거짓에 대한 철저한 해부였다. 당대의 젊은이들은 놀라움에 휩싸였고 권력자들은 분노했다.

 

 세계는 전환의 고비를 맞고 있는데, 이 땅은 옛 질서의 철옹성 속에서 흘러간 노래를 군가처럼 부르게 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책을 읽은 젊은이들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건 여리고 성을 일곱 바퀴나 도는 행렬을 닮아 있었다. 냉전의 성채야 무너져라, 반공의 무덤은 사라져라, 권력의 기만은 이제 끝이다, 라는 외침이 그 안에서 솟구쳐 나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권력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리영희는 여차하면 수인(囚人)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얼굴은 더더욱 빛났고 그의 명성은 이 시대의 영혼 깊숙이 뿌리내렸다. 권력은 강했지만 악했고, 힘 있는 듯 했지만 역사의 정의 앞에서 점점 무력해져 갔다. 리영희는 그러면서 살아있는 신화가 되어 갔고 리영희 학교는 날로 번성해져 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그의 책 우상과 이성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마치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를 연상하게 하는 자세로 거짓과 우상의 기만을 쳐부수었다. 온 시대가 우상의 속임수에 끌려가고 진실과 멀어지는 것을 못 견뎌 했다. 그리고 참지 못한 채, 그의 손에 들린 펜을 이 시대의 우상을 파괴하는 망치로 사용했으며 그로써 사상의 해방구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리영희는 사상적 자폐증은 곧 자살에 이르는 길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화적 편협성은 우리 남한 사회가 해방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광적인 반공주의와 극우 폐쇄사상의 결과로 얼마나 많은 문명적, 문화적 후퇴를 겪어야 했던가 하는 사회 경험의 본보기가 되지요. 공산주의 국가들도 지식, 사상, 문물의 차원에서 마찬가지였지. 사상적 자폐증은 곧 자살이요. 공산주의나 반공주의나 다 자살주의임에는 다름이 없어요.”

 

그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언론의 거짓 선전이 난무할 때, 온갖 자료를 통해서 진실의 면모를 파헤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미국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의 자서전 대화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베트남 전쟁 끝에 하나의 확고한 의견을 갖게 됩니다. 미국 자본주의는 그 본성으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잔인무도할 수밖에 없다, 약소민족에 대한 전쟁 없이는 그 제국주의적 경제, 정치, 군사, 과학기술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확신이예요. 베트남 전쟁이 그 노골적인 본보기이지만, 이미 그때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10여개 약소국을 잇달아 군사적으로 침범, 점령했고 약소 후진국들이 조금이라도 민주적 복지와 자립적 경제정의를 추구하려고 하면 그런 정권들은 미국이 뒷받침하는 반동적이며 미국에 예속된 군부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켜서 전복시켜 왔어요.”

 

미국의 허상을 이렇게 짚은 그는 그 허상의 파악을 넘어서서 미국 자본주의가 저지르는 범죄를 폭로하고 이에 속지 않도록 경계한다. 미국과 관련한 사상적, 정치적, 역사적 우상을 일거에 깨어버린 것이다.

 


리영희 선생이 그리운 시절

 

그런데 책 대화는 그의 지적 형성사만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겪은 인간적 고초와 고뇌가 가감 없이 서술되어 있다. 그가 한때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어느날 집에 누워 있는데, 옆에서 놀던 소학교 1학년의 큰놈이, 아버지가 자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여동생 미정이에게 말하더군.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이 없을 것 같아라고 하니까, 동생이 왜 없어?’ 하고 물어요. ‘아버지가 실업자래. 돈을 못 번대하더군요. 아이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참 가슴이 아팠어요. 몇 푼이라도 벌어야겠다 싶어서 그 길로 이병주를 찾아갔지요. 마침 그때 그이가 중편소설 소설 알렉산드리아(1965)마술사(1968) 등 몇 권을 쓴 뒤라 그걸 출판하려고 스스로 아폴로라는 출판사를 냈어요. 결국 내가 그 책 외판을 한 거야. 새끼로 묶어서 들고 다녔어요. 중고등학교 국어 선생들에게 안기고 월급날에 값을 받아오고 했지요. 그래서 서울의 웬만한 남녀 중학교는 어디 있는지 다 알아요. 제일 고약했던 것이 한성여중이었어. 언덕 위에 있는데 어찌나 가파른지. 거기에다가 눈까지 쌓여 미끄러운 길을 레닌의 말대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로 오르는데 그 짓을 엄동설한 내내 했어요그 뒤 이병주가 동양방송 라디오에서 7분짜리 칼럼을 했는데, 그 양반이 자기는 술 먹고 여성사업 하느라고 바쁘다며 나보고 대신 쓰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대신 썼는데, 원고료가 적지 않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1년 남짓을 몇 푼씩 벌어가면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어.

 

무척 춥던 겨울 어느 날, 오버를 입고 양쪽 손을 각각 이병주 소설을 열 권씩 새끼로 묶은 책 뭉치를 들고 이화여고 국어 선생들을 찾아가느라고 덕수궁 길을 걷고 있었어. 눈이 얼어서 미끄러운 길에서 간신히 발길을 옮기고 있는데, 누가 옆에서 갑자기 이 부장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어. 보니까 법조계 출신인 합동 통신사의 젊은 기자더라구, 그는 나의 모습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의아스러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더군. 그의 뜻을 알아차린 내가 출판사를 차렸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직 사람을 두지 못해서 직접 책을 배달하고 있다고, 진실 반 거짓 반으로 적당히 얼버무렸어.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합동 통신사에서 외신부장으로 와달라는 연락이 있었어요그것이 1969년 겨울의 일이었지.”

 

한 위대한 지식인이 감옥에 갇힌 일만이 아니라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어려운 고비를 넘는 과정을 그는 담담하게 토로한다. 그렇게 그는 우여곡절을 통과하면서 진실의 필봉을 놓지 않았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는 더욱 단단해졌고, 더욱 내공이 달라진 존재로 변화해온 것이다.

 

 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최대한 강화하는 자들이 민낮을 드러내고 온갖 거짓과 진실을 뒤섞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언론 권력이 기세등등한 혼란의 시대에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끝까지 지조를 변치 않고 참 언론인으로 아무리 때가 어둡다 해도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 주어 시대의 의로운 길잡이가 되어 온 리영희 선생이 그리운 시절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전도서 기자는(3)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10. 25. 07:00

전도서 기자는(3)


인간은 누구나 늙어가고 또 기력이 쇠하여 어쩌지 못하는 때가 반드시 오기 마련이다. 그 어느 누구도 한때의 젊은 시절의 힘이 늙어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간다고 장담할 수 없으며, 그 자랑으로 한 평생을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권좌의 영광에 취해 교만해지고, 자신의 간교한 지혜에 자만하여 구덩이를 파다가 자신이 그 구덩이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전도서의 기자는 책은 아무리 읽어도 끝이 없으며 공부만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한다.”(12:12)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널려 있고, 그걸 쫓아다니면서 사는 것은 피곤한 일이라는 것이다. 최고의 지혜자라고 알려진 전도서의 기자는 지식에 의한 명성을 도리어 거부하고 있으며 그것에 사로잡혀 사는 인생을 택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백성에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잠언을 찾아내어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전도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고 힘썼으며, 참되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말을 찾으면, 그걸 바르게 적어 놓았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채찍 같고, 수집된 잠언은 잘 박힌 못과 같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한 목자가 준 것이다.”(12:9-11)라고 자신의 지혜의 근원을 밝히고 자신이 살면서 애써온 바를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모두 자칫 12절의 말씀에서 밝혔듯이 끝이 없고 곤고한 삶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가장 중요한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말하고 있다. 그 한 목자가 자신에게 준 말씀의 결론적 취지에 속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를 심판하신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모든 은밀한 일을 다 심판하신다.”(12:13-14)

 

전도서 기자는 세상이 자신의 영광을 칭송하고, 자신 역시 자랑했던 그 모든 것을 이면에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생각, 소행, 사건들을 떠올린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무리 잘 났고 아무리 높고 아무리 강성해도, 그래서 남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칭찬하며 감탄할 지라도 이들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일”, 그것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든은밀한 일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만이 알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을 결국 하나님께서 일일이 다 아시고 기억하시며 또한 판단하신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산다면, 우리 인간이 세상에서 구하려는 영광과 성취, 그리고 부와 명성 이 모든 것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겠는가, 돌아보라는 것이다. 자신과 세상에는 영광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이고, 자신과 세상에서는 성취와 명성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과 위선이라면 어찌하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자신과 세상 앞에서는 부와 권력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악행이자 죄라면, 그 모든 것은 결국 다 헛되고 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도서는 과연 인생의 덧없음과 헛됨을 일깨우고 말하는 책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도리어 인생이 헛되지 않고 덧없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길에 대한 성찰,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보니 사는 것이 별 볼일 없고 아무것도 아니더라,가 아니라 진실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따로 있더라, 라는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길을 가지 말고 지혜로운 길로 가라는 것이다. 세상의 평판과 칭찬, 저주와 비난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바로 서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비로소 세상의 유혹과 칭송, 세상의 무시와 외면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보람 있고 뜻있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posted by

1517년 10월 비텐베르크, 2020년 10월 서울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10. 24. 10:17

151710월 비텐베르크, 202010월 서울

 

비텐베르크


흑곰호텔의 아침 식사용 식당에서 곰이 으르렁거린다. 벨기에의 관광객 한 그룹이 뷔페 식당으로 들어왔다. 함부르크에서 온 운동복 차림의 부부는 엘베 강변의 자전거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서둘렀다. 네덜란드에서 온 한 교회의 교인들은 먼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조언한다. 도시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르틴 루터를 보기 위해서다.


비텐베르크의 슐로스키르헤(Schlosskirche)교회는 온통 다가오는 만성절(할로윈데이) 준비에 여념이 없다. 수많은 성인들의 유적이 제단 위에 흩어져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한 조각, 저기에는 피 한 방울 혹은 순교자들의 뼈.



루터는 요새화된 탑의 고요한 골방에서 통찰을 얻는다. 인간은 업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 사상은 개신교회에 해방의 복음이 되었다. 신생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 마르틴 루터가 그의 95개조 명제를 성안의 교회 북문에 쇠망치로 못을 박아 걸었을 때, 순례자들과 쿠어작센 군주의 수도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확증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수 없다.”

연보궤에 동전이 쨍그랑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교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이처럼 당시 가톨릭 교회가 자행하던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교황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95개 항목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95개조는 활발한 면죄부 거래와 천박한 경건에 대항한 개혁의 깃발이었다.


‘95개조 반박문은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루터의 행동에 대해 교황은 처음에 술 취한 독일인의 주정정도로 치부했으나 사태가 확산되자 강경 대응하기로 결정한다.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에게 내린 파문 교서는 루터를 비하하는 인신공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어나소서, 오 주여! 당신의 소송사건을 심판하소서. 멧돼지 한 마리가 당신의 포도원에 침입하였나이다.” 파문 교서를 받은 저돌적인 멧돼지 루터는 보기 좋게 이를 불태워버렸다.

 

2020년 10, 서울


서울 광화문 광장이 난리도 아니었다. 성조기의 물결과 함께 기도 소리와 찬송, 그리고 목사들의 외침은 이곳이 도대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하고 있었다. 여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을 치고 있었고 남자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종교집회인지 아니면 정치집회인지 또는 외국의 명절이나 국경일을 위한 모임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성조기와 십자가가 어떻게 어울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여자들의 울음 섞인 기도와 남자들의 분에 찬 아우성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단에 오른 한 목사는 강한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는 완전히 빨갱이 천지가 되고 있어요.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청와대에는 빨갱이가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뿐인 줄 압니까? 언론, 방송, 말할 것도 없이 죄다 빨갱이가 접수했어요. 이러다가 이 나라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나라 정부, 문재인이가 다 말아먹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예언자적 사명을 가지고 이 나라가 직면한 위험을 알려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이 나라가 교회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보세요, 오늘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이야. 아마도 저 빨갱이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아멘 소리가 도처에서 우렁차게 쏟아져 나왔다. 그 아멘 소리가 매우 위협적이라고 예수는 느꼈다. 아멘 소리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전투를 준비하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들이 적으로 삼는 이들은 누구인가? 십자군 전쟁을 하려는 이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예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 저 성조기가 십자군 깃발인가 싶었다. 연단의 목사는 계속 자신의 말을 자기도취적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교회가 이런 때에 침묵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구국의 대열에 나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입니다. 저 바알을 따르는 자들이 이 나라를 사탄에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 정보에 훤하게 밝은,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말씀해주시기를, 김정은이 보내고 훈련시킨 자들이 지금 이 어지러운 때를 이용하여 김정은이가 명령을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고 난 목사는 그러니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려는 자들은 모두 빨갱이에다가 김정은이 부대라고 힘주어 말한 후, 지리한 기도를 시작했다. 예수는 하도 지겨워져서 자리를 떠나려 하다가 어느 나이 든 목사가 뒤이어 연단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하였다. 저이는 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하려나, 예수는 새로이 등단한 노년의 목사를 주시했다매우 묵직하고 다소 쉰 음성이었다.


, 이 나라가 참으로 통탄할 지경에 처해 있어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깊이 회개하고 믿음대로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아직 뭐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 늙은 목사의 음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보세요, 이 성조기의 아름다움을! 보세요, 이 성조기의 물결을! 미국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이 지상에서 최고로 축복하신 나라 아닙니까? 누가 그 나라를 당해냅니까? 저 이라크의 후세인 꼴 좀 보세요.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그만 지금은 저렇게 초라한 몰골이 되지 않았습니까? 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 그대로 증명한 사태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도구가 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보여주는 예입니다. 미국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는 이 대목에서 기가 막혔다. 본질은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서 계신가 하는 것인데 말이다. 자신들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서 이처럼 온갖 폭력을 휘두른다는 말인가목사의 말은 이어졌다.


“6·25 때 우리가 누구 덕분에 살아났습니까? 저 남쪽 한 뼘 남은 땅 말고 다 물에 빠져 죽을 뻔 했는데 미국이 천사처럼 나타나서 우리가 이렇게 오늘날 그런대로 살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저 철모르는 자들이 날뛰면서 반미 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그러니까 미국이 미군 빼간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제 바지가랑이 붙잡아도 기분이 영 잡쳐서 그냥 가겠다는 것 아닙니까? 이 안보 불안, 누구 짓입니까? 바로 저 빨갱이들 때문이 아닙니까?”


성조기가 한껏 흔들리고 있었다. 집회에 참석한 이들이 모두 감격한 표정으로 성조기를 하늘 높이 들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러분, 우리의 이 믿음을 또한 누가 전해주었습니까? 바로 미국 아닙니까? 그 미국을 대적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저 빨갱이 무리들이 원하는 것은 미국을 우리 땅에서 몰아내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입니까? 뻔하잖아요? 김정일이가 인민군을 앞세워 남침하는 것 아닙니까? 불바다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미군 나가게 하고 그 틈에 서울을 제 것으로 만들겠다는 거죠. 이거 우리 그대로 눈뜨고 당해야 합니까?”


사람들이 아니오하고 합창했다. 갑자기 분기탱천하는 모습들이었다. 차마 입에 담지 말아야 말을 쏟아내고 있는 목사의 말은 가관이었다. 



“000이가 죽으니깐요, 국민들의 얼굴 색깔이 달라졌어요. (아멘) 국민들이 훤해졌어요, 훤해졌어요. (아멘) 앞으로 몇 명만 더 죽으면 아마, 하하하. 주여, 000 절대로 자살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감방만 갔다가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하하. 000 너 눈에 만만하게 보이냐? 교회가? 그러면 너도 000 같이 돼버려.”


목사가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여! 하는 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저 사탄의 무리들에게 불 심판을 내리소서. 미국을 축복하여주시고 청와대에 들어가 있는 주사파들을 몰아내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소리에 지축이 울리는 듯하였다.


예수는 너무나 슬펐다. 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이 부끄러웠고, 게다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주장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통탄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예수는 10월 마지막 주가 종교개혁주일인 것을 떠올렸다. 그의 시야에는 저 500년 전 독일의 한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개혁의 신호탄은 쏘아 올려졌으나 이 나라의 교회는 개혁의 포장만 하고 있을 뿐 내용은 수구 보수였던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이 땅에 오면 과연 무엇이라고 할까? 예수는 심히 착잡했다.

 

15171031일 비텐베르크


예수의 마음은 50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15171031. 독일 비텐베르크에는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를 대상으로 하여 당시 가톨릭 교회를 정면으로 치고 나오는 중대한 선언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저 유명한 ‘95조항이다. 당시 로마 교회는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그곳은 이미 신앙의 성지가 아니라 장사하는 자들의 집단이 되어가고 있었고 권력투쟁에 몰두한 자들의 서식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는 1510년 로마를 여행하면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하여 깊은 실망과 회의를 느꼈다. 그의 머리와 가슴에는, 아 이것은 아닌데 하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자라면서 그는 점차 로마 교회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자가 되어갔는데, 애초에 그는 로마 교회 안에서의 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나 그러한 믿음은 그의 이상론에 불과했음을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그는 교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동으로 가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파문이라는 직격탄을 맞지만 루터는 더 이상 교황과 가톨릭 교회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나서서 개혁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그의 주장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교회는 성서로 돌아가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라는 것이었다. 교회가 하나님을 내세워 권력의 성채로 변질된 것에 대한 격렬한 투쟁이었다. 예수의 상념이 여기까지 미치면서 그는 당시 루터의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는 글을 하나 발견하고 집어들었다.


루터는 더 이상 로마가 아닌 당시 황제 카를 5세에게 자신의 입장과 주장하는 바를 알리고, 그의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이해시키는 동시에 그의 동의를 구하려 하였다. 물론 여기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뻔했던 선제후 현인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청과 취소를 거듭한 우여곡절 끝에 결국 카를 5세는 루터를 1521417일 보름스 의회에 초청한다. 그곳에서 루터는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수 있는 발언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독일인이었던 루터는 당시 제국헌법에 있던 독일인은 그 직위를 막론하고 독일 밖에서 심문을 받을 수 없다는 조항에 따라 로마가 아닌 독일, 그것도 보름스에서 재판 아닌 재판을 받았다.


416일 도착한 루터는 다음날인 417일 제국의회 앞에 선다. 그곳에서 루터는 가톨릭 황제들의 대를 이은,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부르군드, 스페인 그리고 나폴리의 주인이던 황제 카알 5세 앞에 섰다. 그에 비하면 루터는 자신의 믿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보잘것없는 한 수도사였던 것이다.


루터는 17일과 18일 황제와 선제후 그리고 다른 여러 제후들 앞에서, 그리고 23-24일의 의회 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세 번에 걸쳐 심문을 받고 변호를 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심문하는 심문자(Johann Eck von Trier)와 그곳에 참석한 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고 단호하게 알리게 된다.


417일 첫 날의 심문에서, 에크는 루터가 쓴 책들을 모아놓고 루터에게 그것들이 모두 루터 자신의 책인지를 묻는다. 루터는 그것을 인정한다. 두 번째로 그것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지를 물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당시의 황제 앞에서 무모할 정도로 당당하게 황제에게 생각 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을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앞에서 한 수도사가 자신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다행히 카를 5세는 그에게 하루의 여유를 주었다. 그뿐 아니라 다음 날 계속된 심문에서 루터는 자신의 변호를 먼저는 독일어로 다음에는 라틴어로 행하였는데, 황제인 카를 5세가 독일어를 하지 못하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는 황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루터에게는 세속의 황제보다도 더 두려운 분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 심문은 그대로 기록되어져서 인쇄물로 나왔는데, 첫 인쇄물에 루터의 마지막 말,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이라는 유명한 말이 등장한다.


루터는 로마의 거대한 교회 앞에서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일개 수도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 장대한 권세와 맞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 이것 하나였다.


그리하여 마르틴 루터는 나는 여기에 확고부동하게 서 있습니다.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했던 것이 아닌가? 그에게 의지처가 있었다면 오직 하나, 하나님뿐이었고, 그로써 그는 현실의 교회 권력을 변화시키는 개혁의 놀라운 힘을 뿜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명제>


그 마르틴 루터가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예수는 루터가 보게 될 것은 그가 로마에서 보았던 것과 다를 바 없는 거대한 성채가 된 교회, 그리고 현세의 축복을 모두 독점하려는 탐욕, 거기에 덧붙여 성서가 아닌 자신들의 주장을 신앙으로, 교리로 만들고 있는 신성모독의 죄를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이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주일에 무엇을 기념하게 될까? 다만 루터의 이름을 따라 개혁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일 뿐이지 않을까? 더욱이 이들이 주장하는 북한에게 나라를 통채로 넘긴다는 가짜 뉴스와 빨갱이 운운, 미국에 대한 찬양과 숭배에 가까운 옹호란 결국 그들의 숨겨진 탐욕과 기득권을 지켜내려는 것 아닌가? ,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내세워 자신들의 속셈을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는 두려웠다. 그 심판의 결과가 실로 무섭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그 옛날,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던 말을 떠올리면서 지금 그 초라한 나사렛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화려함과 웅장함으로 무장한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라는 탄식소리를 듣는다. 개혁의 걸림돌로 교회가 등장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수구적 기득권의 대변자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오늘 한국교회는 어떤 자리에 있는가? 예수는 역사의 과거 유산을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와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 개혁 과제를 안고 있는 교회가 어느새 기득권 세력의 일부가 되어 서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저자거리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자신이 오래 전 갈릴리를 주유하면서 일깨웠던 사랑과 정의, 그리고 예언자적 사명은 이들 교회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 이들은 실로 깨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강대국에 대한 자신들의 굴종을 교리로 치장하여 뭇신도들을 속이는 것은 무엇으로 심판되어야 하는가?


예수는 10월의 가을 하늘을 보면서, 교회는 저렇게 맑아야 하는데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둠이 깊지만, 그것은 결국 새벽이 곧 올 것이라는 징조가 아니겠는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개혁, 그것을 위한 성령의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도 모르게 불어올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마음에서 외쳐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밤이 이슥해진 골목길을 지나 산등성이의 작은 교회당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 교회의 문 앞에는 “교회가 미안합니다라는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posted by

순례의 길을 나서는 이들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9. 23. 08:03

한종호의 너른마당(64)


순례의 길을 나서는 이들

 

코로나에 길고 긴 장마와 태풍, 유례없었던 무더위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분다. 계절의 변화를 그 누구도 거스를 수는 법. 어느 누구도 태양을 바닷속으로 집어넣었다가 산 위로 꺼내 올릴 수 없다. 하늘의 별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다시 나오게 할 방법도 없다. 우주의 흐름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궤도를 정해놓으셨고, 그에 따라 인간의 삶도 그 변화의 흐름과 궤도, 그 길 위에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은 이미 있기도 하고 아직 없기도 하다. 기존의 궤도를 돌아 움직이는 길이 있는가 하면, 아직 그 위에 서 보지 않아 길은 있으나 그 길이 아직 자신이 걸어갈 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길이지만, 그 길 위를 걷는 이에 따라 그 길의 의미가 달라지기도 한다. 결국 도달해서 얻게 되는 종국적인 뜻이 같을지라도 그 여정의 내용과 과정은 사뭇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인간의 운명과 그 길은 이미 있는 것이지만, 그 길을 처음 가는 이에게는 이미 있으나 아직 없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무수히 오간 길도 그 길을 처음 밟는 이에게는 낯선 길이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길이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가다 보면 우리는 오랜 옛날 그 길 위에 있던 사람들의 영혼, 숨결, 그리고 인생과 역사를 만나게 된다. 그들이 겪었던 고뇌, 슬픔, 좌절과 갈망 그런 것들이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된다. <순례>는 바로 그러한 여정을 우리에게 준비시킨다.

 

순례는 다만 성지를 다녀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의 고뇌와 절망, 그리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의지의 꿈이 존재하는 곳이면 그 어디든 우리에게 순례의 현장이 되는 것이다. 그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영성과 깨우침이 일어나면 그 순례는 성공적이 될 것이다. 그건 무언가를 찾아 나선 길이 결국 그 무언가를 찾았다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두가 바쁘게 뛰어가면서 살아가는 때에 순례는 그 속도가 너무 느리게 보인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세월에 이 숨차게 돌아가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을까 염려하기도 한다. 모두가 정신없이 자기 일에 몰두하는 때에, 긴 시간을 뚝 떼어내서 그 어디론가 순례의 길을 떠난다고 하면 그건 세월의 낭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다가 낙오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모두가 실생활에 결국 도움이 되는 것을 구하는 때에, 그보다는 고답적이고 정신적이며 생활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 같은 순례자의 삶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빠르게 달리기만 했다가 그 여정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과 깨우쳐야 할 것을 놓치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속도는 있지만 방향은 없고, 빠르기는 하지만 결국 도달할 곳에 도달하는 것은 아닌 기이한 인생의 모순에 직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 같지만 큰 맥락을 놓치고 살아가기에 자신의 삶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래서 우리 인생사의 커다란 지도를 갖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가기만 하면 되는 줄로 아는 어리석음이 우리를 삼켜버릴 수 있다. 이에 더하여, 현실의 삶이란 그 정신적 능력에 의해 그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세끼 밥 먹고 자기 욕심 채우고 살면 다 되는 줄로 아는 자기 삶의 품격을 스스로 저버리고 마는 지경에 빠져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순례의 길로 떠나는 것은 사실 먼 곳을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도 하다. 사랑하는 남편이 갑자기 자신에게 말도 하지 않고 베트남 전쟁 최일선으로 떠나자 아내는 엉터리 위문단의 일원이 되어 가수로 베트남에 가게 된다. <님은 먼 곳에>라는 영화의 줄거리 대략이다. 그런데 주인공은 남편인 님을 김추자의 노래처럼 늦기 전에만나지만 그곳에서 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도 만나게 된다. 님은 먼 곳에 있으나 그녀의 순례는 그 먼 곳을 마다하지 않고 떠남으로써 님과 자신 모두를 동시에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순례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인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을 만난 자신을 만나는 그런 여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님은 먼 곳에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신의 가슴, 영혼, 삶 속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이 순례의 여정은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자기 안의 순례로 귀결된다. 길을 가면서 순례자는 끊임없이 자신과 대치해야 하고 자신과 긴장해야 하며 자신과 새롭게 조우하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자신을 만나고 이루어나가게 된다.

 

사실 우리는 순례의 의미를 역사 속에서 갖지 못한 민족이다. 정신적 성지가 없는 민족의 모습을 여기서 보게 된다. 그건 우리에게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나라가 힘들고 사회가 어지럽고 정치가 파행을 겪을 때, 우리에게 순례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긴 호흡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미래를 예견하는 그런 정신적 순결의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당장의 이해에만 휘둘리는 그런 저열함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고 만다.

 

세상은 한없이 변하는 것 같지만 인간이 사는 본질은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행복해하고 싶고 자유와 기쁨과 감사를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건 그저 오지 않는다. 정신적 성지를 향한 순례로 순결해지는 영성을 가진 개인과 사회가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그것이다. 빠르기만 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집중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현실적이기만 하면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다. 깊고 깊은 영성의 힘이 솟구칠 때, 이 혼란의 시대를 뚫고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가을바람이 불면, 순례의 길을 떠나는 이의 머리 위 하늘에서 별들이 반짝일 것이다. 숲은 춤추며 노래하고 강은 우리보다 앞서서 달려갈 것이다. 우리는 이미 길 떠난 자이며 아직 그곳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벌써부터 축복을 누리는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posted by

2020년,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 그리고 성서의 시선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0. 5. 20. 06:00

한종호의 너른마당(63)


2020,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 그리고 성서의 시선

 

우리에게 2020년은 한일합병과 식민지로서의 전락이 이루어졌던 1910년에서 110년이요, 한반도 분단의 결과인 19506·25 전쟁으로부터 70,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일으켜 세운 19604·19 혁명 60주년, 그리고 군사정권에 맞서 싸운 19805·18 민주항쟁 40주년이다. 실로 파란만장한 역사의 점철이다.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이라는 전쟁 체제의 연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희생되었는가를 증언한다. 우리 역시 그런 극단의 시대를 통과하면서 근현대사를 이어왔고, 21세기는 그런 극단의 시대를 초극할 수 있는 역사를 갈망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조명은 그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고 성찰하면서 그 교훈을 되씹어 미래의 자산으로 삼는가에 달려 있다. 성서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의 기반이 된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아주 오래 전 겪었던 역사의 고투를 두고두고 되돌아보면서 현실의 힘으로 삼는 것을 보여준다. 유랑과 추방, 망명과 노예적 삶, 탈출과 해방, 무수한 전쟁과 평화, 분단과 통일, 패망과 재건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성서는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읽도록 일깨운다. 함석헌 선생이 오래 전 뜻으로 본 조선 역사를 펴냈던 것도 우리의 과거를 그런 하나님의 시선으로 통찰하자는 의미였다.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유대 역사에서 유월절이 갖는 의미는 결정적이다. 이는 억압되어 있던 피압박 족속이 하나님의 해방 사건으로 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서는 길에 대해 신념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다. 달리 말해, 영구 혁명적 신앙의 반복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출애굽 사건은 역사와 믿음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 까닭에 역사를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과 마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며, 그것은 현실을 감당하는 능력에 대한 갈망이자 미래에 대한 전망이기도 하다.

 

성서는 사실 거듭해서 역사의 교훈, , 역사 속에 드러난 하나님, 역사의 실체로 육화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으라고 말하고 있다. 이걸 깨우치지 못하거나 망각한 자들의 비극과 패배를 또한 함께 조명하고 있다. 왕들의 역사는 이걸 각성했는가 아닌가로 판명되고 평가되고 있다.

 

이미 오래 전 과거에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뜻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한 채 있다면 그건 어리석게도 패망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한 자가 된다. 역사는 그런 뜻에서 보자면, 과거라는 시간을 통해서 미래를 위해 개봉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껏 서구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독일 역사철학의 대가 헤겔은 서구의 역사만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아시아의 역사를 열등하게 보았다는 오류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역사에서 자기를 드러내고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정신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한 인물이다. 절대정신의 근본에는 자유가 있고, 이 자유가 어떤 역사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이루어나가는가를 본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대로, 역사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절대정신 하나님의 실체와 그 뜻을 헤겔은 추적해나간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적 방법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나, 그에게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역사를 현상으로 기억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뜻으로 푼 것이다. 이는 역사철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성서의 역사관을 철학적 용어로 재정리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함석헌 선생의 역사관도 그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 역사에 대한 헤겔적 풀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와 다른 것은 서구 중심의 사관이 아닌, 우리 자신의 내면을 존엄하게 바라보면서 다가갔다는데 있다.

 

헤겔이나 함석헌 선생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사의 깊은 심연에 흐르는 보편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성서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나 현상을 그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본질적 차원의 깨우침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서는 역사이해와 역사철학적 시선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의 근현대사

 

이러한 성서적 시선을 전제로 하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총괄적으로 보자면, 19세기 중후반 조선조는 봉건체제의 모순을 경험하면서 숱한 농민들의 봉기와 사상적 전환기를 맞이했고 이 과정에서 주체적인 근대화 전략이라는 선택을 밀고 나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의 중심에 인간에 대한 존엄한 권리의 존중이라는 생각보다는, 신분과 계급적 차별의 심화로 역사의 동력을 상실했고 이기적 기득권의 방어에 치우치면서 세계적 흐름에서 동떨어져나가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다.

 

물론 그런 과정에서도 기회는 있었다.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등 시대의 모순을 뚫고 주체적 근대화의 길을 갈 수 있었던 역동적인 시기가 있었다. 일본의 경우에는 1853년 미국 페리호의 위협 아래 식민지로 전락할 상황을 결국 1868년 명치유신을 통해서 극복해내고 동아시아에서 근대전략의 수행에 일정하게 성공한다. 반면에 조선은 여전히 중화적 세계질서에 복속된 채 시선을 밖으로 돌리지 못하고 만다. 역사의 거대한 바다가 출렁거리고 있는데, 조각배를 타고 샛강에서 아귀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세계사라는 맥락에서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보다는 이미 쌓아온 기득권, 그것도 사실은 손가락 사이에서 빠져나가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계속 움켜쥐려다가 망하는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바로 세우지 못한 채 마주한 세계사의 대세는 조선을 황망하게 만들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게 했으며, 그런 혼란의 와중에 일부는 저항하고 일부는 투항하면서 나라는 식민지의 늪에 빠져들어갔던 것이다.

 

조선의 20세기는 그렇게 해서 비탄과 비극으로 시작되었다.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는 조선반도에서 일본의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시켰고,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의 패권을 쥐는 일에 보다 본격적인 능력을 얻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협력, 지원을 기초로 조선반도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것에 성공했던 것이다. 1868년 명치유신 이후 40년 만에 이룬 일이었고 아시아 최초의 근대국가 성립이라는 자신감에 넘친 일본은 제국주의 체제로 질주했고 그 첫 희생자는 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조선의 근대사는 제국주의와의 접전이었으며, 이는 이후 조선 근대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했다. 식민지가 된 나라의 최대 과제는 당연히 독립이었고 그 독립투쟁의 대상은 그냥 일본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이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인식이 얼마나 철저한가에 따라 역사의 시대적 극복이 이루어질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히브리 민족에게 출애굽이 핵심적 사건이라면 그것은 고대 이집트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일이며 따라서 이는 제국주의의 굴레와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면 제국주의는 하나님과 대적하는 일이자 체제이며 이를 분쇄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바인 것이다.

 

그러나 한일합병 110주년이 다가오는 때 이 나라는 반일, 또는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제국주의문제는 철저한 역사적 성찰의 내용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의 적대적 긴장은 우리와 일본 사이의 종족적 모순이 아니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만들어진 제국주의와 과거 식민지체제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인데 이에 대한 역사적 투시는 부족하기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국주의 지배종식을 위한 역사의식이나 세계관은 성장할 사이가 없었고 그것은 강대국에 대한 의존, 종속, 굴복을 역사 속에서 체질화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성서는 히브리 민족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바로 서는 것보다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는 것을 질타한다. 이는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말씀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부족한 결과로도 민족 분단에 대한 극복 의지는 견고하지 못하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두 개로 갈라놓았고 이는 결과적으로 남과 북 양 쪽에 분단정권을 세워 전쟁의 시작을 만들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남과 북에 각기 독자적인 분단정권이 성립하면 전쟁이 필연적이라며 이를 치열하게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1950년 한국전쟁은 북의 남침이 그 직접적인 시작이었으나 보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1945년 이후 우리의 역사를 자주적으로 관리하고 해결하지 못한 결과였으며, 일본 제국주의 잔재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들 일본 제국주의 잔재 세력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움켜쥐고 유지하기 위해 분단정권 성립에 광분했으며 이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을 거의 모두 빨갱이로 몰아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후 제국주의 청산이나 민족 분단의 극복을 위해 일어나야 할 남쪽의 민족적 역량은 결정적으로 소멸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어난 한국 전쟁은 전쟁의 끔찍한 비극을 낳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함을 아직도 낫지 않는 상처와 응어리로 남겨놓았다.

 

70년이 되는 오늘날에도 한국전쟁은 남과 북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내는데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당시 만들어진 휴전체제는 평화체제로 전환되고 있지 못하다. 전쟁이 한참인 때에는 휴전이 평화지만, 이 휴전이 길어지면서 그것은 전쟁을 다시 할 수 있는 역량의 비축기간이 되었고 남과 북 사이에 군사적 대치를 결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평화는 성서의 근본사상인데, 한국전쟁 70주년은 그런 차원에서 생명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일깨우는 기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한국전쟁은 여전히 대북 적대감을 고취시키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으며 특히 교회에서는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것보다는 북한 붕괴론에 기여하는 소재가 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패망했던 히브리 역사를 돌아봐도 민족분단과 상호 적대감의 지속이 얼마나 민족 전체에 비운을 가져다주는지 분명한데, 한국전쟁 70년의 역사는 이런 점에서 그 의미를 재정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9604·19 혁명은 이러한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제국주의 잔재 청산의 실패가 축적한 민주주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역사의 에너지였다. 이승만 독재는 제국주의 잔재 존속과 전쟁의 논리가 만들어낸 기득권 체제였고, 이로 인해 억압당한 민중의 저항이었다. 가난과 정치적 부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 억압 등 당대의 현실은 민중 전체에게 숨 막히는 사태의 연속이었다. 쌓이고 쌓인 불만과 모순의 심화는 결국 발화지점을 만들어냈고 4·19 혁명은 그 발화의 현장이 된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의 정통성 논란에서 이승만 체제를 합리화하고 미화하려는 세력이 있는데 이는 4·19혁명으로 극복하려 한 역사의 과제를 모멸하는 것이며 역사의 역주행을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바로 이러한 역주행은 곧바로 이어졌다. 19615·16 군사쿠데타는 정치적 혼란, 경제적 빈곤을 돌파하면서 새로운 독자적 근대화 전략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에서는 고강도의 억압과 역사의 후퇴를 가져왔다. 4·19 혁명이 만들어낸 공간은 이로써 사라졌고, 군사 쿠데타 주역이 일본 관동군 소속의 친일분자였다는 점에서도 역사에 대한 올바른 성찰은 더더욱 어려워졌다.

 

그렇게 이어진 역사의 퇴행적 전개는 18년간 이 나라를 괴롭히다가 무너져 내렸고 새로운 역사의 공간이 열렸다고 기대했지만 여전히 강력했던 군사주의 세력의 반격으로 19805월 광주는 피로 물들게 된다. 80년 광주의 역사적 경험은, 이 나라가 여전히 분단, 지역주의, 빨갱이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걸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역사의 발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한데 광주의 5월이 벌써 40년이라니 세월의 흐름도 무상할 따름이나, 문제는 이 사건의 의미가 우리 대중 전체의 역사의식에 분명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는 광주지역의 문제라는 식의 시선이 많이 해소되긴 했지만, 이를 전국적 차원의 고뇌와 역사인식의 성찰적 단계로 밀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수준의 지점에 놓여 있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는 셈이다.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는 역사를

 

하지만 이런 역사의 단계가 다 비관적 결론을 내리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토록 암울했던 식민지의 역사도 막을 내렸고, 전쟁의 참화를 이겨내고 남과 북의 평화체제 성립을 위한 노력도 그간 적지 않게 축적되어 왔으며 민주주의의 문제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루어내려는 의지 역시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이 나라에서 다시는 군사주의자들이 정치를 지배할 수 있는 시대는 불가능하도록 하는 역사의 기반도 단단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진화해왔고 발전해왔다. 중요한 단계 하나하나를 거쳐 오면서 우리는 역사가 가야 할 길에 대하여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경험을 우리의 역사적 혈관 속에 기억하고 살아온 것이다. 이제 실로, 지난 110년의 역사를 깊이 성찰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을 힘차게 펼쳐야 할 때가 왔다. 나라는 자주해야 하며, 정치는 민주주의가 바로 서야 하고 민족은 하나가 되어야 하며 이제 국민의 의지를 거스르는 친일세력은 붕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의 격동 그 밑바닥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 쉬고 있음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역사의 무수한 격랑 속에서 하늘의 뜻을 믿고 자신을 던져 희생한 이들의 피가 흐르고 있음도 아울러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십자가 위에서 새로운 희망의 부활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권력자의 영원한 친구 김장환 목사

  • 천국에서 볼수 있을런지 모르겠네

    2020.06.22 18:29

한종호의 너른마당(62)

 

권력자의 영원한 친구 김장환 목사

"그를 만나면 권력이 보인다"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이자 극동방송 사장일 뿐만 아니라,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이었던 김장환 목사의 성장기는 흥밋거리가 아닐 수 없다. 전쟁의 화마(火魔) 속에서 헤매고 있던 가난한 나라의 한 소년이 당시에는 꿈꾸기 어려웠던 미국에 건너가 중·고등학교와 신학대학원까지 마치고 돌아와 이제는 세계적인 기독교 지도자로 큰 것은 실로 입지전적인 이야기이다. 아무런 신앙적 배경도 없던 소년이, 이역(異域)에서 난관을 뚫고 실력을 쌓아 고국에 돌아온 후 영적 사역에 힘쓰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감격적인 간증이 된다.

 

이와 함께 그가 오늘날 정계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교계 지도자로서 굳건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목사 김장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전기 <김장환 목사 이야기-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 출판 기념식에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운집한 것도 김장환 목사의 정치사회적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영향력이 막대한 개신교 목사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랑이요, 또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현실에서 소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과 위상이 과연 우리 사회를 위해서 바람직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김장환 목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개인적 성장사에 담겨 있는 고난과 노력 그리고 이후 그가 괄목할 만한 지위를 가지고 여러 일을 해온 것은 결코 가볍게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의 삶과 그의 가치관과 그의 행적, 그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의 성격은 이 나라 이 사회의 불의한 기득권과 깊이 얽혀 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는 중대한 질문이 된다. 

출세지향적 처세관으로 일관한 인생

 

 

침례교세계연맹의 총회장이 될 정도라면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그 대단함이 담고 있는 진정한 내용을 보자면 우리는 그의 인생 전체에 걸쳐 일관된 출세지향적 처세관과 이를 이루기 위한 '야망의 열정'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에게는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한 역사관에 투철한 자세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언제나 힘이 있는 곳에 그의 자리를 정하며, 그러한 일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권력자와의 교분을 통해 그가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하는 과정은 뒤집어보자면 그 권력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희생을 치르는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과 연결된다. 그의 전기 <김장환 목사 이야기-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온다>를 읽어보면, 역사의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이라든가 이 땅의 백성들이 겪는 고난에 대한 아픔과 관련한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그러한 것들은 그에게 관심 밖의 사안들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이 겪고 있는 불의와 고난의 현실에서, 그는 다소 신랄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골프가 싱글인 목사요, 권력자들과 교분을 나누면서 유명세를 누리는 상류층 인사일 따름이다. 세상은 상류층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지만 목사는 상류층에 속하는 순간부터 낮은 자리의 섬김과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이런 그가 우리에게 있어서 귀감의 모형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가 가난한 나라의 소년으로 전쟁의 과정에서 미군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어렵게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목회 현장에 자신의 삶을 투신한 것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교회와 방송국을 키우고, 선교 영역을 계속 확대해온 것에 대해 역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보였던 그의 삶과 행적이 불의한 권력자들에게 기울어 역사의 정의를 외면하고 백성들의 고난과는 거리가 있는 방향으로 치달아왔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우리는 그가 오늘날 맺고 있는 인간관계의 기본 성격, 특히 권력자들과의 연결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유념해서 보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그의 목사로서의 정치사회적 위상은 그가 살아온 삶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해주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절, 미국 순회하며 반한 여론 잠재우는데 앞장

 

그의 책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특별히 자서전 출판기념회 서평을 맡아주신 존경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20년 전 우리의 5월은 바로 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인물이 중심이 된 폭력으로 온 나라가 깊은 질고를 겪었으며, 그로써 역사의 진전은 가로막혔다. 또한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 이 나라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잃었고, 막강한 폭력 체제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은 좌절되었다. 그런 현실에서는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던 김장환 목사가 권력자가 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정치적 요청을 받아들여 움직였던 행적은 그의 오늘이 누리는 사회적 영광의 배경에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불의한 권력의 죄를 고발하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백성들의 삶을 위로하며 용기와 희망을 북돋게 하는 대신, 그 권력과 친밀한 것을 과시하는 목사에게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전기는 그가 '각계각층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서 당사자인 김장환 목사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전도 대상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얼핏 옳은 이야기로 들린다. 그런데 김장환 목사는 전도 대상인 권력자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전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과의 친분 쌓기에 주력하는 전도 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것은 결코 전도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권력자의 벗이 되려는 출세지향적 자세이며, 그로써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가지려는 야망의 표출 외에 다름 아니다.

 

각계각층의 실력자들과 교분을 쌓는 것이 전도가 되려면, 불의한 정치사회 지도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삭개오처럼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주겠습니다"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권력자들의 불의를 불의로 인식하게 하는 대신, 자신에 대한 이들의 인정을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으로 삼는 일에 골몰했다.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시절, 미주 전역을 순회하면서 당시 이른바 반한(反韓) 여론을 잠재우는 일을 맡는다. 이때의 반한 여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박정희 독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반한 여론 잠재우기란 결국 박정희 독재 체제에 대한 옹호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여 당시 박정희 정부의 관리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김영광 전 의원은 "이들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대통령 특사'나 다름없었다"라고 한다. 당시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나 박정희 정권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사람들의 저항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을 때, 김장환 목사는 불의한 권력자의 편에 서서 폭력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실로 역사의 정의라든가, 폭력과 독선을 거부하는 하나님의 선함과 평화에 대한 신앙적 신념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5월 폭력'에도 침묵으로 방관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교분은 그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서 차장보로 있을 때 예배에 참석한 후였다는 것이다.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5월의 폭력을 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과의 만남을 가진다. 그의 책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적고 있다. '5월 초 신록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김장환 목사의 인계동 집 정원에서 전두환 위원장은 실로 오랜만에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보안사 요원들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어 바깥 분위기는 긴장이 감돌았지만 식사하는 동안 참석자들은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이때가 어떤 때인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기로에 서 있고, 군부의 폭력이 역사를 짓밟고 있을 때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김장환 목사는 박정희 정권이 끝나자 이제 새로운 독재자로 등장한 전두환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김장환 목사가 가진 화기애애한 시간에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이 나라 백성들은 피를 묻힌 군홧발에 숨죽여야 했다는 사실을 그가 오늘날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5월 광주항쟁이 발생하자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김 목사에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김 목사는 군목을 광주로 내려보내 정확한 사태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이야기했다.' 이후 군목과 광주 현지에 내려가 현장의 소리를 듣고도 그는 전두환에게 이를 직접 알리지 않고 군목에게 떠넘긴다. 폭력 진압을 중지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나 그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광주 현장이 "한마디로 무법천지였어요"라는 식으로 규정될 뿐이었다. 불의한 권력자의 폭력에 대해 침묵했던 것이다. 

 

"어떻게 대처할까요" 하는 권력자의 물음에 침묵한 것은, 그가 그의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조한 것과 다름이 없고 따라서 그는 전두환 체제 성립에 협력한 셈이었다. 그가 이후 전두환 체제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정치 활동을 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정권 당시 수원 지역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이를 거절하면서, 시애틀 총영사로 있던 죽마고우 안세훈을 대신 천거한다. 전두환 폭력 체제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죽마고우를 활용한 셈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이어지는 권력 교체기인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를 옹호하는 선거관련 강연을 하고 다닌다. 그는 대선 후보의 자격을 이렇게 말한다. "첫째로 미국 우방이 믿어주는 후보, 둘째로 군대가 믿어주는 후보, 셋째로 북한이 무서워하는 후보, 넷째로 가정이 건전한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지요." 여기서 우리는 그의 국가관이나 역사관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김장환 목사는 이 나라의 대권이 미국이 신뢰하고 인정하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얼마나 사대친미적 식민지 근성을 가진 인물인가를 자인하고 있다. 이 나라 대통령이 되어야 할 사람의 제1 조건은 이 나라 백성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여야지, 어찌해서 미국이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김장환 목사가 얼마나 미국에 대한 정치적 사대근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의 생각과 신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대적하는 삶…청산할 구시대의 유산

 

또한 그는 군부의 정치적 개입을 공식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군대가 믿어주는 후보란 군부가 지원하는 인물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군부독재 체제를 청산해야 할 시대적 과제는 그에게 아랑곳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가 건강한 민주적 시민의식과는 완전히 거리가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 아니라 북한에 대해 적대적 공포를 주는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냉전 체제의 존속을 바라는 자세를 보였다. 결국 김장환 목사는 전두환 체제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 것이었고, 미국의 지배와 냉전시대의 유지 그리고 군부의 통치에 복종하는 사회를 갈망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의와 평화, 선한 다스림과는 전면으로 대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짓밟고, 나라의 자존은 생각도 아니하며 대국에 머리를 굽히는 자를 지도자로 내세워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김장환 목사가 누려왔던 불의한 기득권을 지켜줄 사람과 질서,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첫째 역사의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도 바칠 사람, 둘째 백성들의 고난과 아픔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면서 섬김의 헌신을 할 사람, 셋째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고 나라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 넷째 가정의 물질적·영적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 등을 내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장환 목사에게는 미국의 관심과 군부의 관심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 나라 백성들의 고난과 절박한 현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그가 이 나라 교계의 지도자연 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불행이며 수치이다. 그는 우리에게 귀감의 모델이 아니라, 극복의 모델이며 구시대의 유산으로 청산해야 할 유형인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사렛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일갈하시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고 질타하셨다. 김장환 목사가 불의한 권력자들과 상류층의 교분을 맺으면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과시하려는 한 그의 삶은 하나님의 의와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올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불의한 기득권층의 벗이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시피 한 김장환 목사의 그간의 행적은 그의 살아온 인생사를 보면 매우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권력과 출세의 정상을 향한 끊임없는 야망, 그것을 위해서라면 주변의 희생을 아랑곳하지 않고 강요하는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 처신 등은 그가 한국 사회에서 상류층의 권력적 실세가 되기 위한 이기적인 줄달음이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하여 그의 입지전적 삶이란, 그가 한국 사회에서 낮고 천한 이들의 삶에 다가가려는 목자보다는 높고 강한 자들의 우군이 되려는 과정이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책제목처럼 “그를 만나면 마음에 평안이 오는" 사람들은 불의한 삶을 살면서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이 김장환 목사를 통해서 얻게 되는 자기 자신의 "위선적 은폐"라는 점을 주시해야 하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자들을 전도의 대상으로 삼아 친교 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역사적 죄악에 대한 회개를 촉구한 바 없으며 그들의 삶에서 이 땅의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의 인생을 위해 무언가 해보겠다는 결단을 끌어 낸 바도 없다는 것은 김장환 목사가 무엇을 지향하면서 이들과 어울리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실례들인 것이다. 이런 그가 침례교 세계연맹의 총회장까지 된 것은 사실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헌신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이 깊기 때문이다. 

 

‘하우스보이’ 빌리

 

우리는 앞에서 그가 맺어온 권력자들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주목해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성장사에서 중요한 대목을 짚어 김장환 목사의 처세관의 기반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첫 대목은 아무래도 그가 미군부대의 하우스보이 '빌리'로 그의 삶이 바뀐 그 역정이 경계선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는 미국 유학이라는 길이 열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군 부대 하우스보이란 이 나라가 겪은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와중에서 가난한 백성들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던 일종의 별천지의 축복이기도 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주둔군의 하인'이 되는 일이었지만, 당사자에게는 일종의 권력이었고 주변에게 물질적인 은택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초콜릿과 껌, 그리고 그밖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건이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시절, 하우스보이는 그런 선망의 대열에 낀 존재이기도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김장환 목사는 소년 시절, 수원교도소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들어가 가난한 소년 시절의 삶을 지탱하게 된다. 그 후 그곳에서 '빌리 김'이 된 그는 미국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된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건, 잡지의 상품들은 모두 빌리 김에게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열망의 재료가 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만이 아니라, 당시 한국인들이라면 거의 누구에게나 있었던 공통의 사회심리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빌리 김은 '선택된 소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선택된 처지는 마침내 미국 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평생 그에게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에게 어떤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지를 결정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그에게 어디까지나 은혜의 나라요, 기회의 땅이었으며 그를 가난에서 구출해준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면서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하우스보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절박하게 깨우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과 그의 정신은 미국인의 마음과 정신으로 물들어가고 있었으며, 밥존스라는 극우적 학교의 유학은 이러한 성장사의 가치관을 더욱 굳어지게 만들고 만다.

 

하우스보이 빌리가 아무런 기독교적 이해와 경험도 없이, 미국의 극우적 정신세계에 곧바로 끌려들어가, 진정한 인간의 내면적 자유보다는 율법적 권위주의와 미국의 패권적 정치관을 배우게 된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장환 목사의 미국 유학이 그의 개인사에 있어서 출세의 길을 열어주었는지는 모르나, 그 자신과 이 나라를 위해서는 하우스보이의 굴종적 민족관과 극우적 신학의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극우적인 신학교에서 극우적인 가치관 심어져

 

밥존스는 미국에서 가장 극우적인 신학을 지향하는 학교이다. 김장환 목사가 다닌 시절에는 그러한 극우적 성향에 대한 사회적, 신학적 비판과 견제가 더 더욱이나 약했던 때였기에 김장환 목사가 그런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돌아볼 기회가 없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교회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던 그가 밥존스에 가서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는 것은 그에게 일종의 고통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는 학교생활에 곧 적응하기 시작했으며 발군의 실력을 나타냈다고 그의 자서전은 적고 있다. 그런데 밥존스가 어떤 학교인지를 보여주는 보기를 책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죽었을 때 당시 존슨 대통령이 한 달 동안 조기를 달 것을 지시했다. 그러자 당시 총장이었던 밥존스 2세가 목사 한 사람이 죽었는데 미국 국기를 한 달 동안 달 필요는 없다며 하루만 게양했다. 그러자 흑인들이 밥존스 재단에 성조기를 계속 달지 않으면 보일러실을 폭파하겠다고 위협했다. 학교에서 주 정부에 보호 요청을 하면서 군대를 파견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자 주 정부에서 '공립학교도 다 못 지키는데, 어떻게 사립학교를 지키느냐'며 거절했다. 그러자 밥존스 재단에서는 성조기를 게양하는 대신 기관총을 사들여 방어에 나섰다."

 

밥존스 대학은 애초부터 마틴 루터 킹의 민권운동에 적대적이었으며,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들의 입학은 아예 봉쇄하고 있다. 이후 김장환 목사가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해서 졸업자 명단에서 제명이 될 정도로, 교단적 폐쇄성이 강한 학교인데다가 위에서 보듯이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겠다는 식의 극우적 백인주의의 가치관이 가득한 학교이다. 이 학교 출신들의 극우적 성향은 미국 사회에서 종종 논란이 되고 있는데, 그런 학교에서 교육받은 김장환 목사의 가치관이 어떠할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 가는 일이다. 

 

그가 이후 한국 사회에서 가장 극우적인 군사주의 세력과 아무런 갈등 없이 어울리게 되는 것도 이러한 그의 성장사를 보면, 하등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김장환 목사의 유학과 그의 귀국은 한국 사회에 미국의 극우적 가치관을 심어나가고 그것을 확산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극우세력이 극우적 종교관을 기반으로 성장한 세력이라는 점을 주시하면, 김장환 목사와 전두환·노태우 등 이 땅에서 극우적 폭력을 휘두른 세력 간의 친교와 연대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미국이 이 땅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김장환 목사는 하우스보이 빌리 시절의 역할을 계속해서 톡톡히 수행해나간 셈이라고 하겠다.

 

권위주의적 품성, 혁대로 자식을 때려 순종을 가르치다

 

부인의 입에서 나온 남편의 단점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목사님은 성격이 급해요." 대담자가 이것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하자 그녀는 하나의 예를 들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불평하는 것을 조금도 못 참아요." 이것은 사실 그의 권위주의적 품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밥존스에서 받은 엄격한 규율 교육, 그리고 어려운 시절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행운의 청년, 자신의 성취에 대한 넘치는 자신감 등등이 이러한 권위주의적 자세를 길러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자신의 결정이나 권위에 대한 이견을 용납하지 않으며, 이러한 그의 자세는 다른 인간에 대한 따뜻한 배려나 격려의 결여로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수나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보다는 정죄와 질책을 매우 강력하게 드러내는 품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두 아들 요셉과 요한은 물론 딸 애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김장환 목사에게 혁대로 맞았다고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교육관은 순종에 대한 훈련이었다고 한다. 즉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순종에 어긋나면 가만히 두지 않는 것이었다. 순종을 폭력으로 가르쳤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은 여전히 극우적이며, 억압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그렇게 자란 아들 김요셉 목사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에게 자신이 받은 교육과 마찬가지로 혁대로 체벌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혁대로 맞은 경험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손으로 때리지 않고 꼭 혁대로 때리셨어요. 어떻게 아이를 혁대로 때리느냐고 놀라는 분들이 있지만, 사실은 대단히 좋은 기능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버지가 무섭기보다는 혁대가 무서웠어요. 아버지가 혁대를 매지 않는 날은 굉장히 기쁜 날이었어요. 야단 안 맞을지도 모르니까요." 

 

과연, 혁대로 때리면 아이는 그 두려움을 아버지보다는 혁대에게 돌릴까? 사람을 가죽 띠로 때리는 전통은 주인이 노예를 때리는 역사에서 연유한다. 노예는 자신을 가죽 띠로 잔혹하게 때리는 주인보다는 그 가죽 띠에게 두려움과 적대감을 느끼게 될까? 사람을 때려서 순종을 가르치겠다는 발상 자체도 문제거니와, 그 체벌의 수단을 자신이 차고 있는 혁대를 선택하는 품성의 냉혹함은 실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폭력적 권위에 저항하는 민중에게 자신이 차고 있던 총을 휘두른 세력과, 자신이 차고 있던 혁대를 휘두르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들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아버님의 성격이 급하십니다. 그래서 말실수를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에 잘못을 나무라고 꾸짖는 반면 격려나 칭찬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와 함께 일을 한 직원들의 공통된 이야기도 그가 격려나 칭찬보다는 질책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우적 교육의 가학적(加虐的) 인간관의 결과이다. 따뜻하고 자상하며, 격려가 풍요한 말을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을 어떤 목표를 위해 짓누르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권력 지향적 권위주의자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권세가 강한 이에게는 도리어 매우 따뜻하고 자상한 듯이 군다. 인간에 대한 이중적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장환 목사보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가 매우 엄격하고 질책이 우선되는 사람이자, 두려운 존재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반면에 권력자들은 그로부터 마음 평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 이 모순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김장환 목사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지거나 약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반면에, 자신의 권세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이에게는 굴종적 처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자에겐 군림으로, 강자에겐 굴종으로 일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의 이러한 자세가 주변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신의 출세와 권위를 도모하는 삶을 살아오게 한 동력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일일까? 극동방송 내부에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에 대한 깊은 불만과 인간적 적대감까지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 있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느낄까?

 

그의 경영관이 이른바 공격적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의 이러한 공격적 자세는 아들 요셉 목사가 말했듯, "관계 중심보다는 업무 중심"으로 말하자면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그 목표를 향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동원하는 일에 열중하는 가치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해서 성과를 달성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인간의 고유한 가치 자체를 파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김장환 목사는 깨우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권력자들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고 있다는 점, 바로 이러한 면모를 혹 김장환 목사는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김장환 목사의 삶을 짧은 지면을 통해서 분석한다는 것은 물론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이러한 출세와 명성은 그가 이 땅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헌신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권력자들의 교분을 깊게 하고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온 사람이라는 점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이 한국 교계의 지도적 인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가 자신이 받은 은사와 기회를 다시 새롭게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기도한다. 권세자들과의 교분이 아니라, 진정 이 땅에서 아우성치고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위해 새로운 헌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생은 완전히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한국 교회에 중대한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생은 이후 그가 바라는 대로 평가를 받기에는 아마도 참으로 힘들 것이다.

posted by

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9. 9. 28. 09:48

한종호의 너른마당

 

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

 

난폭한 시대다. 검찰은 죄를 찾는 게 아니라 죄를 발명해내고 있는 것만 같고 언론은 받아쓰기 외에는 하지 못한다. 교육에서 받아쓰기를 아예 없애야 할 판이고, 발명은 과학과목에서 폐기해야 하는 걸까?

 

한 나라의 법무부장관 임명과 관련해서 온통 이런 난리를 겪은 적이 있을까? 대선급 소용돌이다. 그만큼 검찰개혁이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생결판이 나야 끝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이다.

 

적폐지속인가, 개혁추진인가?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물러서는 순간, 개혁세력의 몰살이 닥친다. 강력해진 검찰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우리 사회를 관리하려 들 것이다. 어찌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어디 정치판만 그런가? 대형교회 세습에 한 교단이 아예 몰빵을 했다. 기막힌 일이다. 무얼 더 가져야 속이 시원하다는 말일까? 주구장창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세력의 권세가 추하다. 이미 그곳은 성전이 아니다. “강도의 소굴”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선교역정에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의 위선을 매우 강렬하게 미워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더욱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신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닌 사회적 위치와 종교적 권위가 폭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구도 감히 그러한 작업을 할 용기나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지도자적 권위에 순종하는 일종의 종교적 세뇌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이 자신들의 종교적 선행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다. 이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선전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장해주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종교생활의 기준을 거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이유는 낙타를 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그 대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낙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순수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정직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학식이 높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희생해 왔습니다, 나는 이만큼 선행을 베풀어 왔습니다.” 등등은 사실은 전부다 낙타를 삼켜먹기 위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 욕심이 없으시군요. 아,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희생해 오셨습니까?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오로지 높은 지혜에만 관심을 보이고 살아오셨군요.” 등의 평가를 얻어내어 낙타를 먹어치우기 위해 위장하는 자들은 도처에 있다.

 

가령, 정치판이 벌어지면 이렇게 ‘나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발전의 선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표와 자리가 주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의 위 속에 수 십 마리 낙타가 들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소위 기독교 인사들이(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지만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위선과 탐욕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교단선거뿐만 아니라 연합기관이나 자신의 교단과 기관에서 자리를 보전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실은 낙타를 겨냥하면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덕을 선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마음은 낙타에 가 있고 하루살이는 그걸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지금 우리는 나라의 운명을 감당하겠다는 이들의 말과 삶 속에서도 하루살이가 낙타를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바가 하루살이를 걸러내며 살아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욕없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만을 위해 나섰다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과 재물과 삶의 스타일, 그 자손들의 행실은 낙타를 삼킬만한 위가 있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발견한다.

 

조국 장관의 자녀 문제로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정치인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이미 뱃속에 낙타 몇 마리는 너끈히 집어삼키고는 하루살이조차 걸러낸 듯 재고 있다. 참으로 두꺼운 낯짝이다. 그걸 벗기려면 보다 예리한 칼이 필요할 것이다.

 

당대의 현실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시면서 ‘눈먼 인도자’라고 공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게 된다. 그가 낙타, 즉 거부하기 어려운 크기와 강도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포기하는가, 아닌가이다.

 

아, 이 어리석음여, 하나님 나라를 낙타에 비길까? 정작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면서 낙타를 삼키겠다는 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뱃속을 해부해야 하는 임무까지 맡았다. 참으로 고단하구나. 그래도 해야겠다. 욕심에 눈먼 자들이 인도하는 세상을 종치기 위해서.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유승준의 ‘말바꾸기’와 차인표의 ‘당당함’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9. 7. 16. 11:25

한종호의 너른마당

 

유승준의 ‘말바꾸기’와 차인표의 ‘당당함’

- 신앙양심을 내세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처신 -

 

연예인들의 병역문제는 언제나 세간의 관심이 된다. 인기와 병역은 당사자에게는 중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한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중에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게 되면, 당사자는 대중들의 뇌리에서 자신이 잊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연예인의 병역문제는 병역이 젊은이들에게 가하는 현실적 압박과 제약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연예인들이 병역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상당히 비중 있는 영향을 미친다. 다 같은 젊은 놈들이 누군들 시간이 아깝지 않고, 누군들 자신의 꿈이 소중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그 만큼의 시간을 희생한다, 이것이 병역의무를 감당하는 논리가 된다. 그러기에 이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사람취급 받기 어렵다.

 

유승준의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이 이토록 신랄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까닭도 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준은 자신의 인기를 철저하게 사적 영역의 문제로 받아들여, 공적 의무를 저버렸고 더욱이 병역의무 준수에 대한 공적 발언을 결국 스스로 깬 셈이 되어서 그 비난의 정도가 더 심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방송 매체와 잡지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해 왔던 그는 “당당한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의 출발”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 왔기에 그에 대한 실망은 크나큰 실망으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한편, 차인표의 경우, 국제적인 스타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관점에서 007 시리즈 물에 출연할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기문제를 사적인 차원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소화해낸 모범을 보였다. 사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메가톤 급 인기의 기회를 민족적 양심을 기준으로 결정한 그의 모습은 돈과 인기를 연계하여 살아가는 연예가의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대조적 처신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병역 의무를 당연히 감당하겠다고 강조했던 사람이 막상 그 병역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자 말을 바꾸고 자신의 사적 이해를 쫓아간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실망시킨 사례였다. 신앙과 신조가 어긋나고 만 것이었다. 반면에, 국제적 수준의 스타급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거부하고 자신의 평소 신앙과 신조에 충실하게 행동한 차인표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한 현실에서 매우 귀중한 본이 되었다.

 

 

 

 

병역문제는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의 논란으로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냉전형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논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유승준의 경우 그가 이러한 논리를 세워 병역의무를 거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민권 신청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병역의무 대신 다른 방식의 의무를 감당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대체 의무도 없는 유승준의 경우는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병역문제는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오늘날 보다 심층적이고도 반성적인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는 병역 의무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논의를 하려는 장은 아니다.

 

유승준의 경우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는 병역의무가 날이 갈수록 비특권 계층의 의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아들이 병역문제로 이후 정치, 사회적 홍역을 치른 것도 다 특권층의 병역 의무 기피에 의한 문제제기였다. 병역의 의무는 신성한 국가적 과제인 것처럼 교육되고 있지만 실상은 너나 할 것 없이 특권적 지위가 없으면 할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고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권층들의 병역 기피는 한국사회의 권력질서가 가지고 있는 부당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군대는 이른바 빽 없는 놈들만 가는 곳이 된다면 그런 군대의 심리적 지위는 날이 갈수록 열등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병역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권력질서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권력 질서의 불평등은 반드시 병역비리를 낳게 된다는 것과 통한다. 유승준의 경우, 시민권자의 병역의무 면제는 당연한 법적 현실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이를 사회적 특권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은 실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이는 다른 무수한 시민권 취득자들에게 엉뚱한 비난이 돌아가게 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함께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본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자기만 빠져나가서 특권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신앙양심을 내세울 수 없는 경우가 된다. 긴 안목에서 볼 때 유승준이 잠시의 특혜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신앙인의 위상을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상실해버린 것은 그래서 안타깝다.

 

차인표의 경우, 그가 톱스타이면서도 평소 겸손하고 또 이번에는 냉전체제 해체를 추구하는 민족의식까지 분명하게 나타내어 그를 기르고 있는 신앙적 토양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적 지위에 오르면 자신의 신앙적 의지를 매우 가볍게 버리고 현실적 이익을 추종하는 것과 그는 대조적인 선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승준과 차인표,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렇듯 대조되는 신앙의 결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유승준이 차라리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면, 그래서 평소 자신의 병역의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설파했다면 이번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보통 때에는 병역의무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다가, 하루아침에 병역 의무 거부의 논리를 세운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유승준이 군대를 다녀오겠다고 한 것도 인기논리요,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도 인기논리라는 점에서 그 인기논리의 막강한 힘을 거부한 차인표는 그의 정신적 내면이 얼마나 강고한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병역 의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논의가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유승준에 대한 돌팔매를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날 재능 있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병영의 소품으로 몰아놓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다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승준은 물론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한 선택이긴 했으나,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차원도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처한 고뇌의 일단을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선 이후에, 우리는 병역의무의 특권적 기피와 냉전체제의 현실을 하나로 엮어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다. 유승준이나 차인표 모두, 이 냉전체제의 군사시스템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대중들 앞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그 선택의 의미를 보다 심화시켜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이번 사건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민족사와 함께 한 ‘떠돌이 신학자’의 생애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9. 3. 10. 10:04
  • 기사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문목사님 연세를 잘못 세셨는지 틀리게 쓰셨어요. 1921년생이시면 99세 아니면 98세로 쓰셔야 하는데 87세로 적혀 있습니다. 아직 아무도 수정 요청을 안 하신거 같아서 이 글 공유하면서 댓글 남깁니다.
    아...2008년에 작성하신 글이었군요.
    상단에 오늘 날짜가 있어서 헛갈렸습니다.

    참새 2019.03.10 16:22

민족사와 함께 한 ‘떠돌이 신학자’의 생애

 

문동환(87세)은 1921년 만주 북간도 명동 출생이다. 서로 인접해있던 명동이나 용정 모두 구한말, 일단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교육현장을 일구어나가겠다는 대단히 이례적인 개혁적 열정을 가지고 떠나 정착했던 곳이었다. 고종은 이 지역의 선비들에게 교육재정까지 지원해줄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나라 안은 어지럽고 힘들었으니, 밖에서라도 새로운 동량을 길러내라는 조선조 마지막에 해당하는 왕의 애처로운 심사였다.

 

1921년이라면 이미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가 극에 달해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조선반도에서 벌어졌던 시기였다. 나라가 망하고 만주지역에 떠도는 이들이 넘치기 시작하고 장래를 제대로 도모하기 막막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문동환이 태어나 자란 북간도 명동이나 용정은 좀 달랐다. 정세도 그랬고, 그가 자라나던 명동과 용정의 기운은 민족주의적 기상이 드높았기 때문에 그곳은 걸출한 인물들을 꽤나 많이 키워냈다. 온 마을이 교육, 교육 하고 있었으니 이곳에 정착했던 이들의 2세들이 그저 아무렇게나 자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시인 윤동주는 단연 용정의 아름다운 별이었고, 문익환, 안병무 등 이후 한국의 민중신학에 토대를 닦은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문동환 역시 이러한 기운을 타고 태어났는지, 일찍이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의 혁신적 변화에 기여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목사가 될 것인가, 교사가 될 것인가 했던 그는 결국 두 가지 모두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소년시절의 꿈과 이상은 그의 평생을 걸쳐 일관되게 이어져나갔다. 그래서 문동환은 훗날, 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으며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게 된다. 꿈을 잃지 않은 청년은 어지러운 현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감수성이 뛰어난 자애로운 형님 문익환과 함께 민족 사랑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형님은 아주 어진 분이셨어. 어학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 구약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번역했는데, 번역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 장준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 그 때 긴급조치 9호가 떨어지고 형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와 악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 그러면서 서슬퍼런 독재권력에 맞서기 시작했지. 어려서부터 형님과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헛된 삶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자랐어. 형님은 그 가르침을 죽을 때까지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사셨지.”

 

한편, 문동환이 자라나던 시절 용정학교 학생들은 “일본(日本)말”을 “왈본(曰本)말”이라고 해서, 일(日)자를 발로 밟아 넓적하게 한 왈(曰)자로 부르면서 놀리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교육의 가치를 몸에 익히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안에서는 일본의 등살과 위세에 눌려 자칫 주눅이 들기 쉬운 형편에 있었다면, 이들 북간도의 청년들은 드셌다. 좀체 기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역시 문동환에게 일생을 통해 영향을 끼치는 일상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뿌리 뽑힌 채 떠돌이처럼 살아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목회의 현장에서, 고난 받는 조선백성들에게 펼쳐진 복음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곳이었지만 명동이나 용정은, 근대교육에 열을 올렸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든 모셔오는 열성을 보였다. 아버지 문재린도 이러한 환경에서 민족교육과 목회를 했으니 이곳의 신학적 관점이라는 것이 구태의연하기란 어려웠다.

 

“나의 아버지는 고지식할 정도로 순수하고 지극히 겸손하신 분이었어. 민족애와 독립정신으로 불타 있는 명동이라는 민족공동체에 살면서 그의 마음은 민족애로 불타고 있었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북경에 유학 보내면서 정치를 공부하라고 권했지만 자기는 정치를 할 자질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셨어. 고지식하고 정직하기만 한 그가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었겠어? 그래서 생각한 끝에 민족의 건강에 이바지하려고 청도에 있는 독일 계통의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을 했었거든. 그러나 일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학교가 문을 닫자 아버지는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하셨지.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신 아버지를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귀하게 써주셨어. 아버지가 당시 김약연 목사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은 이유는 그분의 순수함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머리가 그지없이 총명하셨지. 새로 창립된 YWCA 회장이 되어 동네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세우시고 밤마다 부녀자 교육에 전념하셨지. 그 동안 남편은 유학을 가고 시아버지는 일찍 사별하셔서 가정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되셨지. 과부가 된 두 시어머니, 시할머니를 모시고 자녀를 기르면서도 야학에서 가르치셨거든. 그리고 여자 결사대에도 참여해서 민족운동에 기여하셨지.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학원에 가서 배우는 일에 등한시하지 않으셨지. 해방 후 남한에 와서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두 아들이 감옥에 간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지. 우리 아버님이 세상 떠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원산은 지났다. 아직 평양은 멀었지.’였어.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한 말씀은 ‘통일은 다됐다.’였어. 어머니는 감옥에 가 있는 나와 형님의 몫까지 감당하신 분이야.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문동환은 훗날 자신이 전개해나간 민중교육신학이나 이민자들의 삶에서 압축해낸 떠돌이 신학의 모태를 여기서 이미 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용정 초등학교와 은진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오로지 민족 교육의 내일을 어떻게 일구어날 것인가를 위해 선택했던 길이며 그로서 교사의 삶은 그에게 천직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왔던 그는 용정의 만보산 초등학교나 명신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지만, 해방이 된 이후 그는 다시 신학의 길에 몸을 묻게 된다.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신학교(한국 신학대의 전신)에서 그는 신학수업을 받았으나 결국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은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전쟁 중에 미국으로 유학 갔던 그는 프린스턴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이후 하트포트 신학대에서 종교 교육박사를 마친 뒤 한신대 초빙으로 귀국하게 된다.

 

문동환의 귀국은 한국 신학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신학교의 권위주의적 삶을 타파하면서 철저하게 민주주의적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했고, 이후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미국 진보신학의 요람인 유니온 신학대에서 잠시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흑인신학, 남미 해방신학을 접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억눌리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하나님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민중신학의 교육적 차원을 열어나간다.

 

민족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문동환이 제1기의 문동환이었다면, 일본과 미국 유학 이후의 문동환은 첨단신학의 문동환이었다. 그러다가 제3기 문동환은 억압과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오늘까지의 문동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앞의 시기에 형성된 문동환이 있었기에 그 이후의 문동환이 가능했겠지만, 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억압적 현실과 신학이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를 그는 매우 명백하게 깨우쳤던 것이다.

 

 

 

                                   사진/김승범

 

문동환이 나이 40이 되어 돌아간 고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급한 시기에 처해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었고 민중의 한은 급기야 전태일의 분신에서 목격하게 되듯이 극에 달했다. 신학은 더 이상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신학은 현장에 달려가야 했고, 행동해야 했으며 이러한 신학의 주체들은 민중과 함께 고난 받아야 했다. 키 크고 잘 생긴 미남 교수 문동환은 이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이 땅의 문동환으로 성장해나갔다.

 

문동환은 학교에서 내어 쫓기고 거리로 몰렸으나 그의 신학은 더더욱 깊어져 갔다. 고난의 현장이 관념적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문동환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깨움을 주시는지 각성해가게 된다. 교육과 신학이 일치했고, 신학과 역사가 일치했으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현장이 곧 신학의 출생지가 되었던 것이다.

 

책상에 앉아 서적에 둘러싸인 신학자가 아니라, 현장의 요구에 절실하게 대답하는 그런 실천신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문동환의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의 형 문익환, 그의 벗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이 이 나라 역사 속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변화의 힘을 뿜어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민중들은 끊임없이 자본과 권력의 술수에 걸려들어 세뇌당하고, 본래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바를 망각한 채 이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벗들을 도리어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모순된 현실과 문동환은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옥에 갇히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고난의 밑바닥에 처해 있는 민중의 실체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이러한 밑바닥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감옥은 그에게 또 하나의 교육 현장이었고, 선교신학의 모태가 되었다. 옥중서신으로 성장해간 바울의 모습이 문동환에게서도 어리는 그런 지점이었다.

 

이렇게 문동환의 발자취를 읽어나가노라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만주 명동과 용정시절을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서구신학에 지배당한 한국 신학과 교회가 자신의 역사적 현실, 자신의 언어로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신학의 태동에 열정적인 기대를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지 신학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제도 기독교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역사의 숨결을 말하고 노래하며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 이해는 기존의 기독교 이해와 충돌한다. 인간의 생명과 자유, 해방에 기여하지 않는 기독교는 본래의 예수 운동과 다르다는 줄기찬 주장으로 문동환은 기성 교회로부터 배척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배척이 문동환을 위축시키지 못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물신적 지배와, 시장의 힘과 결합한 교회에 대해 싸움의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교회는 교인들에게 다만 당장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의 역할밖에 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세계화라는 것이 크게 화두에 오르고 있는데, 한 때는 이 세계화가 인류를 빈곤에서 구한다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거든. 제1세계의 대 자본가들이 제3세계에 자본을 대주어 산업화를 도와주면 제3세계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였어. 말하자면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 자본을 나누어주고 산업화하는 기술을 제공해서 도와주면 온 세계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지. 그 결과 제3세계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공장들이 돌아가 무엇인가 이룩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이것은 다 속임수였음이 드러난 거지. WTO 나 IMF을 통해서 모든 법을 다 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서 이윤을 흡수해가거든. 뿐만 아니라 기업을 위한 그 나라의 법과 조건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할 때는 언제나 자금을 다른 곳을 빼 돌려 그 나라의 경제에 일대 혼란을 일으켜. 결국 날이 갈수록 제1세계와 3 세계 사이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빈부 격차가 늘어나게 돼.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이 주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야. 모두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지.”

 

그는 자본의 물신적 지배를 유지하게 하는 자본주의체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질서에 반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의 지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내어 쫓아 떠돌이 유랑자로 만들고 있는가를 고발한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게 된 그의 신학이 “떠돌이 신학”이다.

 

“미국에 가봤더니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말이 전 세계적인 시야에서는 ‘떠돌이’란 말로 써야한다, 그렇게 느껴졌어. 산업문화와 신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떠돌이들을 양산하고 있거든. 한국에도 동남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잖아. 중국만 해도 2억이야.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거든. 아! 이 사람들이 떠돌이구나, 이젠 민중신학을 인류사적인 각도에서 봐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떠돌이들인 민중을 살펴봤더니 엄청난 게 미국이었어. 전 세계적인 떠돌이들의 참상을 생각해보고 왜 그렇게 떠돌이를 양산됐는가 생각해보고 성서를 봤더니 성서에도 떠돌이 천지더라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세 가지는 사실, 모든 떠돌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야 먼저, ‘네게 땅을 주마’했잖아. 그건 ‘당신 없으면 아무도 존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창성하는 후손을 주마’는 서로 위하고 아끼는 공동체가 있어야 삶의 기쁨이 있다는 거야. ‘네 후손을 통해서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하리라.’는 민족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아야 땅도 공동체도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이룩하시려는 역사 경륜이야. 그런데 이 약속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어. 이 떠돌이들은 애굽 바로 왕의 노예가 되어 쓰라린 고생살이를 해. 남자들은 애굽 군병들의 채찍 밑에서 쓰러지고, 태어난 남자 아이들은 나일 강에 던저져. 남은 과부와 고아들의 삶이란 비참하기 그지없었지.

 

그 후 모세라고 하는 한 청년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 이런 악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마음에 단(斷)을 하고 일어섰어. 주먹을 휘둘러 포악한 애굽 군병을 쳐 죽이잖아. 그리고 싸우는 동족을 깨우치려고 했어. 그러나 존명하기에 급급한 떠돌이들은 모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항거했지. 다급해진 모새는 미디안 광야로 도주해갈 수밖에 없었지 무려 40년 동안 말이야. 미디안 광야에서의 칩거 후 모세는 다시 가서 떠돌이들을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떠돌이들은 애굽을 떠난 길고 긴 고생살이가 그들을 깨우쳐 악을 악으로 보고 새로운 내일을 갈망하게 되는 데 십계명이 바로 그들이 깨닫고 단을 내린 내용이지. 결국 저들은 홍해를 건너 과부, 고아 등 떠돌이가 안심하고 사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새 내일을 창출한 것이야. 어두움이 빛에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지. 그러나 어둠의 세력은 다시 격하게 다가 왔거든.

 

다윗 왕에게서 시작한 힘의 철학에 노예가 된 왕들이 야웨의 이름까지 도용하면서 민중들을 수탈하여 세상은 다시 어둠에 뒤덮인 캄캄한 밤이 되었지. 이렇게 되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예언자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고 결국 저들은 주전 4-500년에 남북조가 다 망하여 정처 없는 떠돌이가 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지.

 

예수님은 30년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떠돌이들의 한을 껴안고 아파하시다가 어두움의 사자인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나눔과 용서, 섬김과 화해의 삶으로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공동체의 횃불을 밝히셨잖아. 그리고 이 횃불이 지중해 연변으로 확산되니까 당황해진 어둠의 세력은 서둘러 이 횃불을 끄려고 했거든. 예수를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비방을 하는가 하면 그는 악마의 괴수 바알세불의 힘으로 악령을 추방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를 확산시켰지. 이것을 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채찍을 들고 악마의 소굴인 성전을 숙청하셨지. 이와 같은 도전에 놀란 어둠의 괴수들은 당황한 나머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무덤 속에 가두어 버려. 그리고 그들은 어둠이 빛을 이긴 줄로 착각하고 환호성을 올렸지만,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가 없었어.

 

사흘 후에 무덤은 깨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야. 부활하심으로 모두의 눈에 악의 정체가 밝혀져 하루에 3천 명씩이나 빛의 공동체에 들어오거든. 이것을 본 요한복음서 기자는 목소리를 높여 외쳐.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그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 빛의 승리를 보아왔잖아. 세계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해방운동에서도 그렇고 우리 한국에서도 이 빛은 동학혁명으로 의병항쟁으로, 독립운동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통일운동으로 어둠의 세력들을 밀어냈거든. 이 생명의 빛은 역사의 긴 안목에서 보자면 과정 과정에서 패배와 후퇴 같은 우여곡절이 있긴 하지만 결코 꺼지는 법이 없거든.”

 

그런데 사실 이 떠돌이 신학은 그저 태어나지 않았다. 한국 정치의 격변기에 온 몸을 던졌던 문동환은 정계에 잠시 있다가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 그의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의 부인 페이 문은 미국인이다. 평생을 남편의 활동 속에서 격동의 시기를 거쳤던 그녀는 생애의 나머지는 자신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아직도 그의 할 일이 많은 조국이었지만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70이 넘은 그에게는 매우 새로운 인생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생활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부인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이미 이방인, 또는 떠돌이의 서러움을 한껏 안고 살아가는 재미동포들의 삶을 그의 삶으로 살아낸다. 거기서 그는 오래 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와 살아가는 떠돌이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한 존재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고난과 기쁨에 눈뜨게 된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여전히 조국통일의 문제에 참여해온 까닭도 떠돌이의 삶에서 깨우친 바 크다. 그것은 그가 어디에 있든 생명의 길로 가려는 믿음의 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그가 있는 자리는 무게를 가진다. 그의 목소리는 정정하고, 그의 주장은 선명하며 그의 논리는 정연하고 따스하다. 민족이 갈라져 살아가는 현실을 이겨내는 힘을 그의 목소리는 담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실 때 사탄이 시험을 하잖아. 사실, 이 시험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사탄의 시험이요 대부분의 경우 모두 이 시험에 빠지고 말아.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에 이기셨어.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로 잡으시어 생명을 살리시는 길에 들어서셨거든. 이렇게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선 그분의 심중에는 간절한 기원이 있으셨지.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야.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은 이 기도문이 예수님의 삶을 지배하는 삶의 목표요 기도문임을 말해 주지. 그러기에 이 두 가지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어.

 

시험의 첫째는 광야의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야. 물질이 풍부해야 행복해 진다는 것이지. 사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세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이 풍부하게 있어. 문제는 강자들이 이를 독점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일용할 양식에 걱정할 것 없이 살게 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셨어. 물질이 많음으로 행복해 지지 않는다는 것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 명확히 알 수 있잖아.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천하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게 하면서 사탄에게 절을 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을 해. 그러나 권죄에 앉은 자들은(제사장과 바리새 파 사람들을 포함해서) 자기들을 신격화하여 자기 배만 채우면서 수탈당하는 자들을 천시하고 죄인 취급하거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을 살벌한 도살장으로 만들어. 그래서 예수님은 아래로 내려가서 서로를 용서함으로 인정공동체를 이룩하라고 하시지.

 

셋째로 사탄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했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돌이 발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속삭이잖아.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라는 것이지.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야.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이용하는 것이지. 우리가 취할 바른 태도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요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는 우리들의 삶에 언제나 이 세 가지 유혹이 온다는 거야. 오늘날에는 이것이 화려한 산업문화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은 유혹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이 세상의 물결에 역행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를 때에는 우리에게 박해가 있게 마련이지. 그러기에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신 거야. 예수님은 이렇게 끈질기게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시다가 악의 세력에 사로 잡혀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그러나 그의 고난은 패배가 아니라 빛나는 승리였어. 하나님 나라가 당시 온 세계라고 알려진 지중해 연변에 널리 확산이 된 것이지.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셔. 제자가 되어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이야.”

 

그는 이제 87세를 넘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강건하고 힘차다. 그의 정신세계는 역동적이며 젊다. 90이 가까워져가는 나이에도 그의 지적 탐구력은 젊은이를 능가할 정도이다. 한번 터져 나오는 육성은 언제나 생명력 출렁이는 열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 그를 만나 이야기하고 있자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는 영원히 젊은 청년이다. 문동환의 이야기는 그렇게 이 시대의 영혼에 울림을 준다.

 

“지금 일어난 촛불 시위에서 우리는 다시 의의 승리를 볼 수 있어야 해. 이 촛불 시위는 그냥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시위가 아니야.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 나는 이 촛불 시위를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21세기의 악령에 대한 시위라고 봐.

 

그것은 가는 곳마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빈부 격차를 조장하여 수억의 떠돌이들을 산출하는 다국적 기업을 앞장세운 신자본주의에 대한 시위거든. 생태계를 살리고 모두가 나누어 먹으면서 평화롭게 살자는 생명문화를 갈망하는 자들의 시위요 외침이지. 빛의 승리를 염원하는 시위거든.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이란 신자유주의를 확산하려는 이들일 뿐이지. 일견 그 어둠의 세력은 감당할 수 없이 커 보일 수 있어.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어. 빛이 승리하기 때문이지. 한 처음부터 타오른 생명의 빛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해.”

 

문동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다. 영원히 젊은 청년의 육성은 그런 기쁨을 주는 법인가 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루어내는가를 우리는 문동환에게서 너무나도 뚜렷이 본다. 그런 그를 가진 우리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존재의 아름다움이 그에게서 빛난다. 영원한 청년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한종호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https://fzari.com/1070?category=615535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