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

 

유승준의 ‘말바꾸기’와 차인표의 ‘당당함’

- 신앙양심을 내세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처신 -

 

연예인들의 병역문제는 언제나 세간의 관심이 된다. 인기와 병역은 당사자에게는 중대한 도전이 되기 때문이다. 한참 인기를 모으고 있는 중에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게 되면, 당사자는 대중들의 뇌리에서 자신이 잊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연예인의 병역문제는 병역이 젊은이들에게 가하는 현실적 압박과 제약을 가장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연예인들이 병역문제를 어떻게 대하는가는 상당히 비중 있는 영향을 미친다. 다 같은 젊은 놈들이 누군들 시간이 아깝지 않고, 누군들 자신의 꿈이 소중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그 만큼의 시간을 희생한다, 이것이 병역의무를 감당하는 논리가 된다. 그러기에 이 논리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사람취급 받기 어렵다.

 

유승준의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이 이토록 신랄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까닭도 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승준은 자신의 인기를 철저하게 사적 영역의 문제로 받아들여, 공적 의무를 저버렸고 더욱이 병역의무 준수에 대한 공적 발언을 결국 스스로 깬 셈이 되어서 그 비난의 정도가 더 심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방송 매체와 잡지에서 공개적으로 신앙을 표현해 왔던 그는 “당당한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의 출발”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해 왔기에 그에 대한 실망은 크나큰 실망으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한편, 차인표의 경우, 국제적인 스타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관점에서 007 시리즈 물에 출연할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기문제를 사적인 차원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 소화해낸 모범을 보였다. 사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라고 할 수 있는 메가톤 급 인기의 기회를 민족적 양심을 기준으로 결정한 그의 모습은 돈과 인기를 연계하여 살아가는 연예가의 세계에서 특별한 존재로 부각될 만한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기독교 신앙인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대조적 처신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병역 의무를 당연히 감당하겠다고 강조했던 사람이 막상 그 병역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순간이 오자 말을 바꾸고 자신의 사적 이해를 쫓아간 것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실망시킨 사례였다. 신앙과 신조가 어긋나고 만 것이었다. 반면에, 국제적 수준의 스타급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거부하고 자신의 평소 신앙과 신조에 충실하게 행동한 차인표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인에 대한 사회적 공신력이 추락한 현실에서 매우 귀중한 본이 되었다.

 

 

 

 

병역문제는 최근, 양심적 병역거부의 논란으로 사실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유승준이나 차인표나 모두 결과적으로는 냉전형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논리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유승준의 경우 그가 이러한 논리를 세워 병역의무를 거부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민권 신청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병역의무 대신 다른 방식의 의무를 감당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대체 의무도 없는 유승준의 경우는 차이를 보인다. 그럼에도, 병역문제는 누구나 다 의무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논리는 오늘날 보다 심층적이고도 반성적인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여기는 병역 의무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논의를 하려는 장은 아니다.

 

유승준의 경우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바는 병역의무가 날이 갈수록 비특권 계층의 의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아들이 병역문제로 이후 정치, 사회적 홍역을 치른 것도 다 특권층의 병역 의무 기피에 의한 문제제기였다. 병역의 의무는 신성한 국가적 과제인 것처럼 교육되고 있지만 실상은 너나 할 것 없이 특권적 지위가 없으면 할 수 없이 감당해야하는 고역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권층들의 병역 기피는 한국사회의 권력질서가 가지고 있는 부당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군대는 이른바 빽 없는 놈들만 가는 곳이 된다면 그런 군대의 심리적 지위는 날이 갈수록 열등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병역 문제가 한국사회에서 권력질서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권력 질서의 불평등은 반드시 병역비리를 낳게 된다는 것과 통한다. 유승준의 경우, 시민권자의 병역의무 면제는 당연한 법적 현실이지만, 한국사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이를 사회적 특권의 요소로 사용하는 것은 실로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이는 다른 무수한 시민권 취득자들에게 엉뚱한 비난이 돌아가게 하는 사건이 되기도 한다.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함께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본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자기만 빠져나가서 특권적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신앙양심을 내세울 수 없는 경우가 된다. 긴 안목에서 볼 때 유승준이 잠시의 특혜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신앙인의 위상을 당당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상실해버린 것은 그래서 안타깝다.

 

차인표의 경우, 그가 톱스타이면서도 평소 겸손하고 또 이번에는 냉전체제 해체를 추구하는 민족의식까지 분명하게 나타내어 그를 기르고 있는 신앙적 토양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도자적 지위에 오르면 자신의 신앙적 의지를 매우 가볍게 버리고 현실적 이익을 추종하는 것과 그는 대조적인 선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유승준과 차인표, 같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렇듯 대조되는 신앙의 결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유승준이 차라리 양심적 병역 거부자라면, 그래서 평소 자신의 병역의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설파했다면 이번 사태는 다른 방향으로 전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보통 때에는 병역의무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다가, 하루아침에 병역 의무 거부의 논리를 세운다면 그것은 진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 유승준이 군대를 다녀오겠다고 한 것도 인기논리요, 병역 기피를 위한 시민권 신청도 인기논리라는 점에서 그 인기논리의 막강한 힘을 거부한 차인표는 그의 정신적 내면이 얼마나 강고한가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우리는, 병역 의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논의가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유승준에 대한 돌팔매를 던지는 방식이 아니라 오늘날 재능 있는 무수한 젊은이들을 병영의 소품으로 몰아놓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다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승준은 물론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한 선택이긴 했으나, 그러한 현실의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했다는 차원도 있다는 점을 주목하면, 한국의 젊은이들이 처한 고뇌의 일단을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선 이후에, 우리는 병역의무의 특권적 기피와 냉전체제의 현실을 하나로 엮어 새롭게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될 것이다. 유승준이나 차인표 모두, 이 냉전체제의 군사시스템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대중들 앞에 공개했다는 점에서 그 선택의 의미를 보다 심화시켜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이번 사건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민족사와 함께 한 ‘떠돌이 신학자’의 생애

 

문동환(87세)은 1921년 만주 북간도 명동 출생이다. 서로 인접해있던 명동이나 용정 모두 구한말, 일단의 유학자들이 새로운 교육현장을 일구어나가겠다는 대단히 이례적인 개혁적 열정을 가지고 떠나 정착했던 곳이었다. 고종은 이 지역의 선비들에게 교육재정까지 지원해줄 정도로 관심이 높았다. 나라 안은 어지럽고 힘들었으니, 밖에서라도 새로운 동량을 길러내라는 조선조 마지막에 해당하는 왕의 애처로운 심사였다.

 

1921년이라면 이미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가 극에 달해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조선반도에서 벌어졌던 시기였다. 나라가 망하고 만주지역에 떠도는 이들이 넘치기 시작하고 장래를 제대로 도모하기 막막했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문동환이 태어나 자란 북간도 명동이나 용정은 좀 달랐다. 정세도 그랬고, 그가 자라나던 명동과 용정의 기운은 민족주의적 기상이 드높았기 때문에 그곳은 걸출한 인물들을 꽤나 많이 키워냈다. 온 마을이 교육, 교육 하고 있었으니 이곳에 정착했던 이들의 2세들이 그저 아무렇게나 자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시인 윤동주는 단연 용정의 아름다운 별이었고, 문익환, 안병무 등 이후 한국의 민중신학에 토대를 닦은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문동환 역시 이러한 기운을 타고 태어났는지, 일찍이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의 혁신적 변화에 기여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목사가 될 것인가, 교사가 될 것인가 했던 그는 결국 두 가지 모두를 하게 되는데, 이러한 소년시절의 꿈과 이상은 그의 평생을 걸쳐 일관되게 이어져나갔다. 그래서 문동환은 훗날, 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었으며 대학 강단에서 가르치게 된다. 꿈을 잃지 않은 청년은 어지러운 현실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감수성이 뛰어난 자애로운 형님 문익환과 함께 민족 사랑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형님은 아주 어진 분이셨어. 어학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 구약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번역했는데, 번역이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 장준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해. 그 때 긴급조치 9호가 떨어지고 형님 마음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와 악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던 거지. 그러면서 서슬퍼런 독재권력에 맞서기 시작했지. 어려서부터 형님과 나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은 헛된 삶이라는 것을 배우면서 자랐어. 형님은 그 가르침을 죽을 때까지 온몸으로 실천하면서 사셨지.”

 

한편, 문동환이 자라나던 시절 용정학교 학생들은 “일본(日本)말”을 “왈본(曰本)말”이라고 해서, 일(日)자를 발로 밟아 넓적하게 한 왈(曰)자로 부르면서 놀리기도 했다는데, 그만큼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위한 교육의 가치를 몸에 익히면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안에서는 일본의 등살과 위세에 눌려 자칫 주눅이 들기 쉬운 형편에 있었다면, 이들 북간도의 청년들은 드셌다. 좀체 기가 죽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문재린과 어머니 김신묵 역시 문동환에게 일생을 통해 영향을 끼치는 일상의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뿌리 뽑힌 채 떠돌이처럼 살아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민족목회의 현장에서, 고난 받는 조선백성들에게 펼쳐진 복음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었던 곳이었지만 명동이나 용정은, 근대교육에 열을 올렸고 좋은 선생님이라고 소문이 나면 어떻게든 모셔오는 열성을 보였다. 아버지 문재린도 이러한 환경에서 민족교육과 목회를 했으니 이곳의 신학적 관점이라는 것이 구태의연하기란 어려웠다.

 

“나의 아버지는 고지식할 정도로 순수하고 지극히 겸손하신 분이었어. 민족애와 독립정신으로 불타 있는 명동이라는 민족공동체에 살면서 그의 마음은 민족애로 불타고 있었지.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북경에 유학 보내면서 정치를 공부하라고 권했지만 자기는 정치를 할 자질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셨어. 고지식하고 정직하기만 한 그가 어떻게 정치를 할 수 있었겠어? 그래서 생각한 끝에 민족의 건강에 이바지하려고 청도에 있는 독일 계통의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을 했었거든. 그러나 일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학교가 문을 닫자 아버지는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하셨지.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신 아버지를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귀하게 써주셨어. 아버지가 당시 김약연 목사를 위시한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은 이유는 그분의 순수함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머리가 그지없이 총명하셨지. 새로 창립된 YWCA 회장이 되어 동네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세우시고 밤마다 부녀자 교육에 전념하셨지. 그 동안 남편은 유학을 가고 시아버지는 일찍 사별하셔서 가정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되셨지. 과부가 된 두 시어머니, 시할머니를 모시고 자녀를 기르면서도 야학에서 가르치셨거든. 그리고 여자 결사대에도 참여해서 민족운동에 기여하셨지. 그리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경학원에 가서 배우는 일에 등한시하지 않으셨지. 해방 후 남한에 와서도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일에 심혈을 기울이셨고 두 아들이 감옥에 간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셨지. 우리 아버님이 세상 떠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원산은 지났다. 아직 평양은 멀었지.’였어.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마지막 한 말씀은 ‘통일은 다됐다.’였어. 어머니는 감옥에 가 있는 나와 형님의 몫까지 감당하신 분이야. 참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지.”

 

그런 점에서 보자면 문동환은 훗날 자신이 전개해나간 민중교육신학이나 이민자들의 삶에서 압축해낸 떠돌이 신학의 모태를 여기서 이미 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용정 초등학교와 은진중학교를 나온 뒤,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오로지 민족 교육의 내일을 어떻게 일구어날 것인가를 위해 선택했던 길이며 그로서 교사의 삶은 그에게 천직이 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왔던 그는 용정의 만보산 초등학교나 명신여자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지만, 해방이 된 이후 그는 다시 신학의 길에 몸을 묻게 된다. 김재준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신학교(한국 신학대의 전신)에서 그는 신학수업을 받았으나 결국 민중의 바다로 내려가지 않으면 진정한 구원은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전쟁 중에 미국으로 유학 갔던 그는 프린스턴에서 신학석사를 마치고 이후 하트포트 신학대에서 종교 교육박사를 마친 뒤 한신대 초빙으로 귀국하게 된다.

 

문동환의 귀국은 한국 신학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신학교의 권위주의적 삶을 타파하면서 철저하게 민주주의적 환경을 만들어나가는 노력을 했고, 이후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미국 진보신학의 요람인 유니온 신학대에서 잠시 객원교수로 있으면서 흑인신학, 남미 해방신학을 접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억눌리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하나님에 새롭게 눈을 뜨면서 민중신학의 교육적 차원을 열어나간다.

 

민족교육의 세례를 받았던 문동환이 제1기의 문동환이었다면, 일본과 미국 유학 이후의 문동환은 첨단신학의 문동환이었다. 그러다가 제3기 문동환은 억압과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오늘까지의 문동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앞의 시기에 형성된 문동환이 있었기에 그 이후의 문동환이 가능했겠지만, 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당시 한국사회의 억압적 현실과 신학이 어떻게 만나야 할 것인지를 그는 매우 명백하게 깨우쳤던 것이다.

 

 

 

                                   사진/김승범

 

문동환이 나이 40이 되어 돌아간 고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위급한 시기에 처해 있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민주주의를 질식시키고 있었고 민중의 한은 급기야 전태일의 분신에서 목격하게 되듯이 극에 달했다. 신학은 더 이상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신학은 현장에 달려가야 했고, 행동해야 했으며 이러한 신학의 주체들은 민중과 함께 고난 받아야 했다. 키 크고 잘 생긴 미남 교수 문동환은 이러한 역사의 와중에서 이 땅의 문동환으로 성장해나갔다.

 

문동환은 학교에서 내어 쫓기고 거리로 몰렸으나 그의 신학은 더더욱 깊어져 갔다. 고난의 현장이 관념적 성찰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문동환은 인간이 어떤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의식에 도달하게 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에게 어떤 일깨움을 주시는지 각성해가게 된다. 교육과 신학이 일치했고, 신학과 역사가 일치했으며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현장이 곧 신학의 출생지가 되었던 것이다.

 

책상에 앉아 서적에 둘러싸인 신학자가 아니라, 현장의 요구에 절실하게 대답하는 그런 실천신학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문동환의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그의 형 문익환, 그의 벗 안병무와 함께 민중신학이 이 나라 역사 속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변화의 힘을 뿜어낼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민중들은 끊임없이 자본과 권력의 술수에 걸려들어 세뇌당하고, 본래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바를 망각한 채 이를 위해 노력하는 자신의 벗들을 도리어 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모순된 현실과 문동환은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옥에 갇히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다. 고난의 밑바닥에 처해 있는 민중의 실체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은 이러한 밑바닥의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감옥은 그에게 또 하나의 교육 현장이었고, 선교신학의 모태가 되었다. 옥중서신으로 성장해간 바울의 모습이 문동환에게서도 어리는 그런 지점이었다.

 

이렇게 문동환의 발자취를 읽어나가노라면, 우리는 그가 자신의 만주 명동과 용정시절을 결코 잊지 않고 있으며 서구신학에 지배당한 한국 신학과 교회가 자신의 역사적 현실, 자신의 언어로 자기를 말할 수 있는 신학의 태동에 열정적인 기대를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단지 신학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달리 말해서, 제도 기독교의 틀에 담아낼 수 없는 역사의 숨결을 말하고 노래하며 주장했다. 그래서 그의 기독교 이해는 기존의 기독교 이해와 충돌한다. 인간의 생명과 자유, 해방에 기여하지 않는 기독교는 본래의 예수 운동과 다르다는 줄기찬 주장으로 문동환은 기성 교회로부터 배척받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배척이 문동환을 위축시키지 못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의 물신적 지배와, 시장의 힘과 결합한 교회에 대해 싸움의 기세를 낮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부단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교회는 교인들에게 다만 당장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의 역할밖에 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세계화라는 것이 크게 화두에 오르고 있는데, 한 때는 이 세계화가 인류를 빈곤에서 구한다고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거든. 제1세계의 대 자본가들이 제3세계에 자본을 대주어 산업화를 도와주면 제3세계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였어. 말하자면 다국적 기업이 제3세계에 자본을 나누어주고 산업화하는 기술을 제공해서 도와주면 온 세계가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지. 그 결과 제3세계에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고 공장들이 돌아가 무엇인가 이룩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러나 지나고 보니 이것은 다 속임수였음이 드러난 거지. WTO 나 IMF을 통해서 모든 법을 다 다국적 기업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서 이윤을 흡수해가거든. 뿐만 아니라 기업을 위한 그 나라의 법과 조건들이 자기들에게 불리할 때는 언제나 자금을 다른 곳을 빼 돌려 그 나라의 경제에 일대 혼란을 일으켜. 결국 날이 갈수록 제1세계와 3 세계 사이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빈부 격차가 늘어나게 돼.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이 주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이 섬기는 것이 아니야. 모두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지.”

 

그는 자본의 물신적 지배를 유지하게 하는 자본주의체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질서에 반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의 지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 내어 쫓아 떠돌이 유랑자로 만들고 있는가를 고발한다. 그렇게 해서 도달하게 된 그의 신학이 “떠돌이 신학”이다.

 

“미국에 가봤더니 한국에서의 민중이란 말이 전 세계적인 시야에서는 ‘떠돌이’란 말로 써야한다, 그렇게 느껴졌어. 산업문화와 신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떠돌이들을 양산하고 있거든. 한국에도 동남아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오잖아. 중국만 해도 2억이야.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많은 수거든. 아! 이 사람들이 떠돌이구나, 이젠 민중신학을 인류사적인 각도에서 봐야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떠돌이들인 민중을 살펴봤더니 엄청난 게 미국이었어. 전 세계적인 떠돌이들의 참상을 생각해보고 왜 그렇게 떠돌이를 양산됐는가 생각해보고 성서를 봤더니 성서에도 떠돌이 천지더라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 세 가지는 사실, 모든 떠돌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야 먼저, ‘네게 땅을 주마’했잖아. 그건 ‘당신 없으면 아무도 존명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창성하는 후손을 주마’는 서로 위하고 아끼는 공동체가 있어야 삶의 기쁨이 있다는 거야. ‘네 후손을 통해서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하리라.’는 민족이 서로 축복하면서 살아야 땅도 공동체도 보존될 수 있다는 것이지.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이룩하시려는 역사 경륜이야. 그런데 이 약속은 쉽게 이루어 지지 않았어. 이 떠돌이들은 애굽 바로 왕의 노예가 되어 쓰라린 고생살이를 해. 남자들은 애굽 군병들의 채찍 밑에서 쓰러지고, 태어난 남자 아이들은 나일 강에 던저져. 남은 과부와 고아들의 삶이란 비참하기 그지없었지.

 

그 후 모세라고 하는 한 청년이 머리를 들고 일어서. 이런 악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마음에 단(斷)을 하고 일어섰어. 주먹을 휘둘러 포악한 애굽 군병을 쳐 죽이잖아. 그리고 싸우는 동족을 깨우치려고 했어. 그러나 존명하기에 급급한 떠돌이들은 모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에게 항거했지. 다급해진 모새는 미디안 광야로 도주해갈 수밖에 없었지 무려 40년 동안 말이야. 미디안 광야에서의 칩거 후 모세는 다시 가서 떠돌이들을 구출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지.

 

떠돌이들은 애굽을 떠난 길고 긴 고생살이가 그들을 깨우쳐 악을 악으로 보고 새로운 내일을 갈망하게 되는 데 십계명이 바로 그들이 깨닫고 단을 내린 내용이지. 결국 저들은 홍해를 건너 과부, 고아 등 떠돌이가 안심하고 사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새 내일을 창출한 것이야. 어두움이 빛에 패배를 당하고 만 것이지. 그러나 어둠의 세력은 다시 격하게 다가 왔거든.

 

다윗 왕에게서 시작한 힘의 철학에 노예가 된 왕들이 야웨의 이름까지 도용하면서 민중들을 수탈하여 세상은 다시 어둠에 뒤덮인 캄캄한 밤이 되었지. 이렇게 되자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예언자들은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고 결국 저들은 주전 4-500년에 남북조가 다 망하여 정처 없는 떠돌이가 되어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지.

 

예수님은 30년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수많은 떠돌이들의 한을 껴안고 아파하시다가 어두움의 사자인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나눔과 용서, 섬김과 화해의 삶으로 가는 곳마다 새로운 생명공동체의 횃불을 밝히셨잖아. 그리고 이 횃불이 지중해 연변으로 확산되니까 당황해진 어둠의 세력은 서둘러 이 횃불을 끄려고 했거든. 예수를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비방을 하는가 하면 그는 악마의 괴수 바알세불의 힘으로 악령을 추방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를 확산시켰지. 이것을 본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채찍을 들고 악마의 소굴인 성전을 숙청하셨지. 이와 같은 도전에 놀란 어둠의 괴수들은 당황한 나머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하고 그 시체를 무덤 속에 가두어 버려. 그리고 그들은 어둠이 빛을 이긴 줄로 착각하고 환호성을 올렸지만,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가 없었어.

 

사흘 후에 무덤은 깨어지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야. 부활하심으로 모두의 눈에 악의 정체가 밝혀져 하루에 3천 명씩이나 빛의 공동체에 들어오거든. 이것을 본 요한복음서 기자는 목소리를 높여 외쳐.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고.

 

그 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이 빛의 승리를 보아왔잖아. 세계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해방운동에서도 그렇고 우리 한국에서도 이 빛은 동학혁명으로 의병항쟁으로, 독립운동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통일운동으로 어둠의 세력들을 밀어냈거든. 이 생명의 빛은 역사의 긴 안목에서 보자면 과정 과정에서 패배와 후퇴 같은 우여곡절이 있긴 하지만 결코 꺼지는 법이 없거든.”

 

그런데 사실 이 떠돌이 신학은 그저 태어나지 않았다. 한국 정치의 격변기에 온 몸을 던졌던 문동환은 정계에 잠시 있다가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 훌쩍 떠난다. 그의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의 부인 페이 문은 미국인이다. 평생을 남편의 활동 속에서 격동의 시기를 거쳤던 그녀는 생애의 나머지는 자신의 고향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아직도 그의 할 일이 많은 조국이었지만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떠난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70이 넘은 그에게는 매우 새로운 인생여정이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생활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부인의 고향에서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이미 이방인, 또는 떠돌이의 서러움을 한껏 안고 살아가는 재미동포들의 삶을 그의 삶으로 살아낸다. 거기서 그는 오래 전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와 살아가는 떠돌이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서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한 존재이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고난과 기쁨에 눈뜨게 된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여전히 조국통일의 문제에 참여해온 까닭도 떠돌이의 삶에서 깨우친 바 크다. 그것은 그가 어디에 있든 생명의 길로 가려는 믿음의 의지를 지닌 존재라는 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그가 있는 자리는 무게를 가진다. 그의 목소리는 정정하고, 그의 주장은 선명하며 그의 논리는 정연하고 따스하다. 민족이 갈라져 살아가는 현실을 이겨내는 힘을 그의 목소리는 담고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광야에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실 때 사탄이 시험을 하잖아. 사실, 이 시험은 바르게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는 사탄의 시험이요 대부분의 경우 모두 이 시험에 빠지고 말아.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에 이기셨어.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로 잡으시어 생명을 살리시는 길에 들어서셨거든. 이렇게 하나님 나라 운동에 나선 그분의 심중에는 간절한 기원이 있으셨지.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이야.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즉석에서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은 이 기도문이 예수님의 삶을 지배하는 삶의 목표요 기도문임을 말해 주지. 그러기에 이 두 가지는 서로 상관관계가 있어.

 

시험의 첫째는 광야의 돌들이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야. 물질이 풍부해야 행복해 진다는 것이지. 사실 하나님이 창조해 주신 세계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이 풍부하게 있어. 문제는 강자들이 이를 독점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일용할 양식에 걱정할 것 없이 살게 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셨어. 물질이 많음으로 행복해 지지 않는다는 것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로 명확히 알 수 있잖아.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천하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게 하면서 사탄에게 절을 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을 해. 그러나 권죄에 앉은 자들은(제사장과 바리새 파 사람들을 포함해서) 자기들을 신격화하여 자기 배만 채우면서 수탈당하는 자들을 천시하고 죄인 취급하거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을 살벌한 도살장으로 만들어. 그래서 예수님은 아래로 내려가서 서로를 용서함으로 인정공동체를 이룩하라고 하시지.

 

셋째로 사탄은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고 했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돌이 발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속삭이잖아. 하나님을 자기 목적을 위해서 이용하라는 것이지.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야.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이용하는 것이지. 우리가 취할 바른 태도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야.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요 하나님에게 영광이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는 우리들의 삶에 언제나 이 세 가지 유혹이 온다는 거야. 오늘날에는 이것이 화려한 산업문화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이와 같은 유혹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이 세상의 물결에 역행하여 예수님의 뒤를 따를 때에는 우리에게 박해가 있게 마련이지. 그러기에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원하라고 하신 거야. 예수님은 이렇게 끈질기게 시험을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시다가 악의 세력에 사로 잡혀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지. 그러나 그의 고난은 패배가 아니라 빛나는 승리였어. 하나님 나라가 당시 온 세계라고 알려진 지중해 연변에 널리 확산이 된 것이지. 그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셔. 제자가 되어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말이야.”

 

그는 이제 87세를 넘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강건하고 힘차다. 그의 정신세계는 역동적이며 젊다. 90이 가까워져가는 나이에도 그의 지적 탐구력은 젊은이를 능가할 정도이다. 한번 터져 나오는 육성은 언제나 생명력 출렁이는 열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런 그를 만나 이야기하고 있자면, 그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는 영원히 젊은 청년이다. 문동환의 이야기는 그렇게 이 시대의 영혼에 울림을 준다.

 

“지금 일어난 촛불 시위에서 우리는 다시 의의 승리를 볼 수 있어야 해. 이 촛불 시위는 그냥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시위가 아니야. 그 이상의 의미가 있지. 나는 이 촛불 시위를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21세기의 악령에 대한 시위라고 봐.

 

그것은 가는 곳마다 생태계를 파괴하고 빈부 격차를 조장하여 수억의 떠돌이들을 산출하는 다국적 기업을 앞장세운 신자본주의에 대한 시위거든. 생태계를 살리고 모두가 나누어 먹으면서 평화롭게 살자는 생명문화를 갈망하는 자들의 시위요 외침이지. 빛의 승리를 염원하는 시위거든.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변 세력이란 신자유주의를 확산하려는 이들일 뿐이지. 일견 그 어둠의 세력은 감당할 수 없이 커 보일 수 있어.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 없어. 빛이 승리하기 때문이지. 한 처음부터 타오른 생명의 빛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해.”

 

문동환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다. 영원히 젊은 청년의 육성은 그런 기쁨을 주는 법인가 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루어내는가를 우리는 문동환에게서 너무나도 뚜렷이 본다. 그런 그를 가진 우리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훈련을 받은 존재의 아름다움이 그에게서 빛난다. 영원한 청년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한종호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https://fzari.com/1070?category=615535

posted by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늦봄 문익환, 그 이름 석 자는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이다. 퇴색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요, 늘 푸른 힘을 주는 생기이다. 책상물림으로 앉아 있던 구약성서학자가 들판에 나와 광야의 소리로 변신하자 역사는 꿈틀거렸고, 함께 춤을 추었다. 그리고 고난의 시대를 기운차게 뚫어내었다.


이 나라 신학과 운동과 역사에 박힌 빛나는 보석


그 문익환이 우리 곁을 떠난 지도 어언 20여 년이 지났다. 산천은 변했으나 그 맑은 미소와 청아한 꿈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에게 뜨거움으로 있다. 목사이면서 목사로만 머물지 않았으며, 시인이면서 시인으로 그치지 않았고 학자이면서 학자로 멈추지 않았다.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야욕이 없었고, 존경의 상석 위에서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내면에 쏟아져 내린 하나님의 영과 시대의 소리에 맞추어 자신을 던졌고, 그로써 역사로 존재하게 되었다. 모두가 지쳐 스러질 때에 우뚝 선 우리의 마음이 되었고, 막히지 않은 길이 되었으며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떠난 20년의 세월이 먼 듯 하지 않으며, 그는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 같기만 하다.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존재의 모습은 모두 그러한가 보다.


‘재야인사(在野人士)’라는 말이 주었던 무게가 시대를 울렸던 때가 있었다. 백발 휘날리며 포효하듯 민중의 마음을 흔들었던 그의 모습 한 자락이라도 보이면 권력이 긴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가 노년의 몸을 청년처럼 움직이면 모두가 어느새 일제히 일어나 오만과 독선, 그리고 독재의 성채를 향해 진군했던 역사가 있다.


손에 수갑을 차고 옥에 들어서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옥 밖에 있는 이들을 도리어 위로하던 그의 넉넉한 웃음이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던 시간이 있었다. 그가 두 팔을 벌리고 소리를 토해내면 그것이 곧 역사의 육성이 되고, 그가 훌쩍 발걸음을 옮기면 그것이 곧 역사의 한 걸음이 되었던 충격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익환은 시대의 선봉이었으며, 우리 모두의 횃불이었고 내면의 감격이었다.


1989년, 김일성 주석과의 전격적인 만남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으나 그 놀라움은 사실 그의 순수한 꿈의 연장이었다는 것, 그래서 김일성 주석과의 뜨거운 포옹이 그 어떤 외교적 제스처가 아니라 그의 몸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사랑과 삶의 모습이었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그에게 가해진 고통은 그에게 역설적으로 힘이 되었고, 달려갈 길을 줄기차게 달려가는 자로 만드는 동력이었다.


어찌 그 만남 하나로 통일이 되고 남북이 통하며 세상 천지가 바뀌겠는가 만은, 누군가 앞장서서 길을 내지 않으면 결국 길은 언제고 영영 생기지 않는 법. 문익환은 없는 길을 만들어 뚫었고, 그 뒤로 무수한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 길을 밟았으니 역시 선각자는 달리 있던 것이었다.


소년 문익환을 길러낸 자양분


1918년, 만주 북간도 명동에서 문재린, 김신묵의 첫아들로 태어난 문익환은 민족에 대한 사랑과 새로운 시대의 문명에 대한 깊은 일깨움이 있었던 그곳 이주 조선인촌에서 이미 장래의 문익환으로 자라난다. 북간도 명동은 일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곳으로 떠난 일군의 선비들이 모여 만든 동네.


그곳에서 교육과 기독교의 열정은 소년 문익환을 길러내는 자양분이었다. 목사인 아버지 문재린의 모습을 통해서 그는 평생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목사임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자신에 대하여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서를 통해서 만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소년 문익환에게 꿈을 불어넣었고, 그로써 그는 성서의 세계에 일찍 탐닉하게 된다. 무척이나 성숙한 소년이었다.


민족혼이 강렬했던 명동의 분위기에서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과 신앙의 세계가 하나가 되는 가장 기초적인 훈련을 그때 하게 된다.


그런 명동인지라 이후 이곳에서는 민중 신학 교육자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정치에 나섰던 그의 아우 문동환, 이후 민중신학의 태두가 되는 안병무 등이 배출된다. 명동은 아이들에게 민족의 존엄을 배우게 한 현장이었고, 기독교 신앙이 역사와 하나로 어울려야 함을 일깨운 자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가 처음 접한 기독교는 그가 이후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에 서서 외쳤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로 치면 보수적 신앙의 원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신앙의 틀에서 그의 뼈대는 굵었고, 웬만하면 물러서지 않는 강단이 생겨났다. 이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한눈팔지 않고 히브리 성서를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한 힘이었고, 결국 그런 예언자적 삶으로 살아가게 한 근력이 되었다.


일본 동경의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신학수업을 했고, 만주 북간도에서와는 다른 자유로운 사상적 흐름 속에 있게 되었다. 일본 동경시대의 그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보수적 신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그로써 한 단계 발전한 신학적 이론의 토대 위에 설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학병 소집을 거부, 만주 봉천 신학교로 이적하여 만보산 한인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게 된다. 아직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그러나 공부에 관심이 깊은 젊은 청년 신앙인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그는 평생의 가약을 맺은 박용길과의 삶이 시작되고, 해방 후 한국신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학구열은 중단되지 않아 목사 안수를 받고 난 이년 뒤인 1949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0년대의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프린스턴에서 수업하던 그는 6.25 전쟁이 터지자 귀국, 그가 배운 영어실력 탓으로 꼬박 3년을 판문점과 동경의 유엔 사령부에서 근무한다.


남북 대결과 전쟁, 그리고 분단의 현장에서 보았던 역사는 그가 이후 통일의 길을 향해 가게 되는데 중요한 밑거름의 경험이 된다. 3년간 계속된 전쟁이 휴전으로 미완성된 종결을 하자, 그는 마치지 못한 학업에 대한 열망을 주체치 못하고 다시 유학길에 올라 프린스턴에서 석사 학위를 끝낸다.


한국 기독교계에서 당시 “프린스턴 신학대”라는 이름이 차지했던 영광을 떠올려본다면 청년 문익환이 전란에 휩싸였던 조국에 돌아와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 처지가 어떤 것이었을까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한신대와 연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는 한편, 한빛교회의 목회자로서 어찌 보면 얌전한 길을 걸었던 그에게 1965년에서 1966년의 유니온 신학대 유학은 의미 있는 충격으로 남는다. 민권운동이 한참이었던 그 시기에 유니온 신학대학은 흑인 해방신학의 산실이었으며,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요람이기도 했다.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의 흐름과 이 해방신학의 만남은 그에게 역사의 지평을 열어주었고, 이후 실천의 능력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체험이 되었다.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이후 그는 십년간 신구교 공동 구약 번역 책임 위원으로 살면서 히브리어와, 그 언어의 세계를 통해서 성장했던 예언자들의 삶 속에 그대로 푹 파묻힌다. 시대의 중심에 살면서 소용돌이치듯 세월을 보냈던 윤동주, 장준하의 꿈속에서의 부름도 마다한 채, 그는 히브리 성서의 번역에 미친 듯 몰두했던 것이다.


그가 윤동주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열등감을 이후 고백하지만, 그의 구약 성서 번역 작업은 그러한 열등감의 극복을 넘어 그에게 새로운 시의 세계를 열어주게 된다. 아무튼, 그는 1976년에 이르기까지 일찍 일본과 미국에 유학을 하고 온 탁월한 성서학자였고, 히브리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예술적 재능을 가진 한 목회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는 그의 이러한 신학적 헌신의 세계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예언의 언어를 번역하고 있기만 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우시기나 하시려는 듯, 역사는 문익환을 성서번역의 외로운 밀실에서 시대의 광장으로 전격 불러낸다. 진정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이른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라고 불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연루된 그는 처음으로 영어(囹圄)의 몸이 된다. 애초에 이 사건은 그가 연루되지 않게 기획되어 있었다. 필력이 좋은 그가 구국선언문을 기초한 사실은 아무도 불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구약성서의 번역작업이 거의 다 마쳐가고 있다는 중대과제가 있기에, 이 일과 관련되었던 이들은 모두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우 문동환은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문익환 이름 석 자가 나오지 않도록 인내했던 동지들의 아픔이 더 이상 계속될 수는 없다고 판단, 형의 이름을 내놓는다.


다른 누가 그리했으면 동지들에 대한 배신이 되었겠지만, 아우가 동지들의 고통을 덜고자 형을 역사의 현장에 끌어들였으니 이를 어찌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만 해도 재야 민주화 투쟁의 지도급 인사는 오히려 그의 아우 문동환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졸지에 엮이게 된 문익환은 그간 히브리 성서 번역의 과정과, 해석의 훈련 속에서 다져온 믿음의 내공을 이른바 초식으로 펼쳐보이게 된다.


1977년 전주교도소에서의 24일간 옥중 단식은 약골로만 여겼던 문익환 목사에 대한 당국의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재야 민주화 운동을 그를 중심으로 하는 판으로 집결시켜 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가 재야인사로서 뒤늦게 입문하여 스스로를 늦봄이라고 불렀고, 그 사로잡힘의 자리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렸으니 그야말로 사도 바울의 모습대로 산 셈이다.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


1977년,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그를 더 이상 구속 수감할 수 없어, 박 정권은 그를 형 집행 정지로 석방시켰으나 이내 그는 유신 헌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형 집행 정치 취소로 재수감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감옥 생활의 긴 세월이 시작된다.


첫 투옥이 22개월, 형 집행 정지 취소로 재수감 되어 박정희 암살사건으로 유신체제 붕괴에 이르기까지 옥살이는 한 것이 15개월, 1980년 5월 광주 연루혐의로 이른바 “내란 예비음모죄”로 세 번째 투옥되어 31개월 만에 출옥하게 된다.


1985년에는 5.3 인천항쟁사건으로 네 번째 투옥되어 형 집행 정지로 26개월 만에 나오고 1989년 평양을 다녀왔다는 죄목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다섯 번째 투옥, 형 집행 정지로 19개월 만에 출옥한다.


1991년, 이른바 분신정국에서의 활동 혐의로 형 집행 정지로 여섯 번째 투옥되어 21개월 만에 옥에서 나오게 된다. 이렇게 1976년에서 1993년까지, 17년 세월 동안 그가 옥에서 보낸 세월은 도합 134개월, 그러니까 11년이 넘는 시간을 감옥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오랜 세월의 투옥 생활도 그의 총기와 열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아니, 도리어 그는 투옥의 고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 강한 존재가 되어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도무지 옥에 가둘 수 없는 영혼과, 민족에 대한 사랑이 펄펄 넘치는 “자유청년”이었다.


그러기에 그에게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힘겨운 영어(囹圄)의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어디에 갖다놓아도 불길이었고, 역사의 산 현장이 되었으며 곳곳에서 시대를 일깨우는 소리요, 무딘 마음을 깨는 타고난 교사였다.


그래서 그가 수감되면 그 자체로서 역사는 격동했다. 문익환을 감옥에 집어넣는 시대가 그냥 온전하게 자기보신을 하고 지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온 몸으로 부딪혀 깨려는 어둠의 장벽은 그렇게 하나하나 무너져내려갔다.


그를 가두는 횟수가 늘어나면 날수록 민중은 그로써 깨어났으며, 현실의 모순을 명확하게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몸으로 이 시대의 눈을 뜨게 했다. 눈 먼 시대를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개안(開眼)시키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익환의 명망(名望)은 민주주의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산이 되어갔다. 그의 명성은 개인적 출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시대의 고난을 뚫고 가려는 이들에게 자랑이요 용기가 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마치 열정의 암호처럼 사람들의 영혼에 와 박혔던 것이다.


문익환이 하는 일이라면, 문익환이 하는 말이라면, 문익환이 가는 곳이라면 문익환이 목숨을 거는 일이라면, 그것은 곧 이 시대가 반드시 해야 하고 귀 기울여야 하며 함께 가야하고 그로써 생명을 거는 사건이 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혼신을 다한 뜨거움과 그 어떤 위협과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소신대로 사는 모습은 이 시대의 예언자가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모두에게 성찰할 수 있는 재료를 주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삶을 껴안고 평생을 살아왔던 그가 어느새 그 자신의 형상을 예언자의 것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늦봄 문익환 기념사업 이사장 이재정 신부는 문익환의 발걸음을 “가나안땅을 향하여 모진 고난을 무릎 쓰고 걸었던 모세의 길이었으며, 마른 뼈로 뒹굴며 죽어 있던 동족을 살려내기 위하여 골짜기를 헤매던 에스겔의 길이었고, 정의를 위하여 권력에 맞서 몸을 던졌던 예레미야의 길이었으며, 살라진 민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어 남북을 통일하려고 설파하던 아모스와 호세아의 길이었다”고 회고한다.


민중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 한번 열지 않으며 거동조차 하지 않은 무수한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는 달리, 그는 하나님이 외치라는 소리만 있으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토해냈던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미 그 안에 십자가의 죽음과 삶을 품고 있는 그를 물러서게 할 수 없었으며 죽기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는데 무엇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많은 회유와 협박에도 그가 끝까지 자신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예언자 정신의 삶과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은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서 그 말씀을 대언할 뿐이라는데, 실로 무얼 가지고 그를 꺾을 수 있었겠는가?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


그렇게 살았던 그에게 1992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든다. 그건 그에게 감사였다. 노벨 평화상을 받고 안 받고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이 인류사회로부터 주목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역사의 한계를 밀어나가는 것이 인류에게 평화의 꿈을 나누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것이 그에게 감사의 이유였다. 1989년 그가 북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만났던 일도 다 이렇게 고난의 민족에게 살 길을 열겠다는 심정 하나로 이루어낸 일이었으며, 그로 인해 고초를 겪었어도 그것이 그에게 아무 상처와 좌절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것 자체로서 그는 기뻤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신다는 믿음이 더욱 깊어갔던 것이다.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나 마지막 투옥 생활을 마치고 난 1993년, 그는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운동을 제창하였다. 그에게 통일은 이미 온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맛보는 복”과도 같은 개념이었다.


기도하면 이미 주어진 것이니, 그와 마찬가지로 통일도 아직 오지 않았으나 이미 온 것으로 받아, 통일된 조국의 삶을 살아내는 연습과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언제나 앞서 있었다.


사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우리의 현대 민족사의 반성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1945년 해방은 왔으나, 그 해방을 맞이하는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우리는 혼란과 위기, 그리고 마침내 분단의 세월을 맞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느 때인가 통일의 역사가 열리면, 그것이 우리에게 혼란과 위기로 치닫는 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통일된 나라의 백성답게 성숙하고 힘 있게 현실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건너지 않은 요단강 저편의 가나안을 미리 보고 산 위에서 이미 기뻐한 모세처럼 그렇게 미래의 역사를 감격으로 전망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생의 사업으로 바로 이 일을 해야겠다고 팔을 걷어 부친다. 통일을 부르짖지만, 각기 방식과 노선이 달라 분열되어 있던 통일운동을 하나로 묶어내고, 그로써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정세(政勢)에 대한 인식도 서로 다르고, 운동방식에 대한 생각도 차이가 나며 인적 구성이나 조직의 내력도 틀린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어 가면서 통일 운동의 핵을 키워나간다는 일이 어찌 쉬운 것이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에스겔의 계시에서처럼 두개로 나뉘었던 막대기가 하나로 이어지는 그 통일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어 주변의 오해나 때로의 중상모략, 그리고 비난에도 마다하지 않고 한 길로 뚜벅 뚜벅 나간다.


그의 가슴에는 이미 가야 할 땅이 보였고, 그 땅을 가기 위한 대열만 정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일의 열매는 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후대가 맛볼 열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에게 상관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진심을 이 시대가 이해하고 그로써 통일의 기운이 대세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새로운 통일 운동체”를 꾸리는 것은 흩어졌던 통일운동의 기운을 견고한 하나의 힘으로 만드는 일이었고, 통일의 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준비였던 것이었다.

그는 이 일에 밤낮으로 매달렸다. 주변에서는 그의 건강을 걱정했고, 때로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모략과 중상을 걱정했다.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그러던 중, 1994년 1월 그는 갑자기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을 한 바탕 겪더니, 잠을 자고 있던 중 심장마비로 인해 그가 그렇게 사랑하고 뜨겁게 열정을 쏟았던 이 세상을 홀연히 떠난다. 모두에게 놀라운 충격이었고, 한 시대의 통곡이 그의 죽음을 향해 쏟아 부어졌다.


님이 가신 것이었다. 어두운 역사의 밤을 지새우며 예수의 길을 따라, 좁은 길만 찾아다니고 그로써 형극(荊棘)의 삶을 마다하지 않던 그가 졸지에 우리 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 떠난다고 떠나지는가? 문익환은 그저 떠나고 만 것이 아니라, 이 분단의 시대에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였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주시는가를 보도록 하였다. 민족의 현실과 만난 신앙이 어떤 불꽃을 피워내는가를 목격하게 하였다. 그로써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웠던 것이다.


한반도의 정세가 새로운 고비를 맞이하고 있는 이 때에 , 문익환의 목소리가 그리운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적 야망, 또는 출세의 자랑을 모두 접고 한 시대의 절절한 요구 앞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을 던질 줄 아는 “아름다운 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그의 삶이 이 땅에 뿌린 그 무수한 씨앗이 보이지 않게 여기저기서 싹을 틔우며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 그래서 민중의 거대한 함성이 그날 그때에 울리면 “역사의 여리고성”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믿는다.


문익환, 그는 바로 그렇게 그 날을 준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전령(傳令)이자, 그리스도의 날을 예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였던 것이다. 그가 흔든 깃발, 우리도 뒤따라 흔들어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고자 하니, 한 시대의 스승으로 그를 가진 우리는 정녕 복 받은 존재들이 아닌가?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소외의 섬, 끝자락에서 일구는 가없는 사랑

- 40평생 누워 있는 아들 돌보는 한 노모의 애절한 사연


전남 여수 앞 바다의 거문도(巨文島). 이름하여 “큰 글을 닦은 섬.” 옛날 중국인들이 이 섬에 우연히 상륙하여 필담(筆談)을 나누다가 의외의 지식수준에 놀라 부른 이름이 내려오게 되었다는데 글 잘하는 것이 못하는 것보다야 자랑스럽기는 하겠지만 다른 말로 뒤집자면 중국 문화의 영향이 이 섬에까지 파고들은 것이라고나 할까? 남의 나라 글을 아무리 잘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글이요,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것은 아니니 만큼 그 거문도라는 이름은 어떻게 보면 이 섬의 ‘소외된 운명’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 찾아볼 이 섬의 한 늙은 어머니와 그 늙은 어머니 못지 않게 늙어버리고 병든 아들의 기막힌 사연은 그 운명의 실타래 속에 버려진 채 우리의 마음에 뼈아픈 질문을 던지고 있다.


거문도는 우리의 근대사에서 19세기 후반, 중국을 집어삼키고 있던 영국이 아시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강점한 역사로 유명한 섬이다. 하고 많은 섬 가운데서 그 조그만 섬을 우리의 허락도 없이 차고앉아서 러시아가 내려올 뱃길을 가로막겠다고 수를 둔 저 멀리 서양(西洋)의 섬나라 영국과 이 동방의 작은 섬이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는 것은 이 섬사람들의 삶의 간단(間斷)없는 풍파를 말해준다. 역사에 등장할 정도로 주목되었던 땅이었으나 정작 그곳에 사는 이들은 역사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그저 이름 없는 백성들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해타산을 위해 자신의 운명이 잠시 볼모로 잡혔던 그 섬은 여수에서 뱃길로 2시간, 한려수도(閑麗水道)를 펼쳐내는 복잡한 곡선의 남해(南海), 그 언저리에 외롭게 떠있다. 그리고 그 섬 안에 살고 있는 조경백이라는 60이 넘은 아들은 꿈쩍도 못한 채 2평 짜리 비좁은 방에서 오늘도 몸을 한 치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40년 이상 누운 그 자세로 80대 중반에 접어든 노모의 눈물겨운 수발을 받으며 지내고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매어있는 사랑의 볼모일까? 누구도 상대를 포기하지 못한 채 살아온 세월은 어찌 보면 기한 없는 형벌이고 인고(忍苦)의 슬픔이다.


이춘덕, 조경배 씨 모자의 기구한


어머니 이춘덕(85세, 거문교회 집사)씨가 아들에게 ‘꽁꽁 묶이게’ 된 것은 46년 전, 스물 셋의 아들이 류마티스성 관절염이라는 진단을 받으면서부터. 병균을 막아야 할 항체가 제 몸의 관절 세포를 나쁜 세균으로 인식해 공격하고 파괴하는 질병이 닥쳤다. 엉덩이뼈와 다리뼈를 잇는 고관절에 처음 증세가 나타난 아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후 병마는 계속 퍼져서 지금은 목 아래 모든 뼈마디가 오그라들고 비틀어진 채 굳어버렸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아들에게 밥을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나날을 보내왔다. 그렇게 46년… 전신마비로 46년 동안 문밖을 나서보지 못한 아들. 어머닌 그 아들의 손발이 되어 반평생을 사셨다. “진작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한국 전쟁이 막 끝난 당시 2남 4녀를 둔 이 씨 부부는 “끼니 때울 일을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했다. 남편은 조각배로 고기잡이를 하고 자신은 떡을 빚어다 팔았다. 거문도에는 지금처럼 보건지소도 없었고, 1000km 남짓 떨어진 여수항까지 여객선도 없었던 때여서 아들 치료에 도저히 엄두를 못냈다고 했다.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아들은 16살 때 발병했다. 반년쯤 누워 있다 일어났지만 3년 뒤 더 심하게 재발했고, 쑥뜸을 여러 날 맞고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세번째 병이 닥치자 아들은 하늘을 원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이 무렵 떡방아에 머리를 부딪혀, 지금까지도 이마에 파스를 붙이고 산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어머니를 괴롭히는 두통. 약도 소용없다며 어머닌 늘 이마에 파스를 붙이고 산다. 외진 섬에서 어머니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이마에 훈장처럼 파스를 오려붙이는 일뿐이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아들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이제 아들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대나무 꼬챙이를 움직여 공중에 매달아 놓은 성경을 보는 일이다. 책을 읽는 것 보다 책장을 넘기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아들. 그래도 조경백 씨는 신구약 성경을 여덟 번이나 읽었다. 요즘은 하루에 20장씩의 성경을 읽으며 보낸다. 욕창 방지한답시고, 10cm 높이의 간이침대에 누워 천장에 매달려있는 성경책을 읽고 있는 조 씨와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늙은 어머니. 훅하고 바람이 불면, 두 분 다 그대로 재가 되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조경백 씨는 요즘 아침, 저녁 하루 두 번만 식사를 한다. 한 끼 식사에 걸리는 시간은 30분.그건 허리 아픈 어머니에겐 너무나 큰 무리이다. 그래서 아들은 배가 고프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점심을 거르기로 했다. 어머닌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흰머리가 나지 않는다. 당신이 늙지 않아야 자식을 건사할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는 어머니. 머리가 허연 아들은 어머니의 검은 머리가 그래서 또 가슴 아프다. 좋은 일도 많고 나쁜 일도 많은 넓디넓은 세상. 그러나 아들은 그 세상을 바라만 볼 뿐 만질 수가 없다. 그래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아들은 버릴 수가 없다. 두 평도 채 안 되는 비좁은 방안. 그 속에 갇혀 사는 아들에게 어머닌 유일한 말동무고, 아들은 어머니에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다.


조경백 씨는 새벽 4시면 하루를 맞이한다. 첫 아침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일까. “세상이 눈을 뜨면 처음 맞아주는 것이 샛별의 반짝거림입니다.” 그렇게 시리도록 별을 보고 눈이 맑아져서 밝아오는 아침, 한밤 내 긋던 별똥별만큼 많아진 어머니 얼굴의 주름살과 커다란 광주리 하나 가득 세월 이시고 홀로 서신 어머니를 바라본다. 우리는 누구나 엄마의 풍 안에서 늘 세상이 따뜻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늘 바람 부는 쪽으로 등을 돌리고 계셨던 어머니의 세월은 늘 등이 시리지 않았을까. 외딴 섬 거문도, 그 속에서 또 다른 섬처럼 외롭게 살아온 모자의 방에 불이 꺼지면 또 하루가 지나간다.


어머니는 당신 것보다 먼저 아들의 수의를 마련해 놓으셨다. 당신께서 먼저 가면 돌봐줄 이 없는 아들 생각만 하면 어머니는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저 사람이 먼저 가야 내가 마음놓고 갈텐데… 내가 먼저 가면 어떡하나. 그 생각하면 내가 잠이 안오요.” “또 나가 만일 어쩌고 보면… 너가 나 앞에 가야 할 것인데…” “불쌍한 말로 나 앞에 가면 좋겠다... 그래야 내가 눈을 감고 간다.” 아들을 앞서 보내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는 어머니. 그러나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게 말을 듣지 않는 몸. 어머닌 자꾸 자신이 없어진다. 어머니의 마음이 아들의 마음일까. “어머니가 먼저 가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불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 자식에 대한 동물적인 사랑으로 평생을 살아온 어머니. 어머니가 아프시면 성경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어머니가 건강하시고 밝은 모습이면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아들에게 늙고 초라한 어머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모진 세파 속에서 잡초처럼 질긴 생명력으로 아들을 지켜온 어머니. 46년! 세상은 참 무섭게 변했는데, 모자의 46년은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어머닌 또 내일 아들을 위해 정성껏 밥상을 차리실 거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비탈거미는 일생에 단 한번 40개의 알을 낳는다고 한다. 초여름,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온다. 어미는 커다란 곤충들을 잡아먹어 스스로의 몸을 살찌운다. 추운 겨울이 되고 먹이가 줄어들면, 어미 거미는 수 십 마리의 새끼들에게 자신의 몸을 뜯어먹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배 밑에 새끼를 놓고 톡톡 두드리면서 주위를 환기하는 것이다. 굶주린 새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어미 위에 올라타고, 어미의 몸을 뚫어 독액과 소화액을 주입한다. 어미는, 어미는, 순식간에 우글거리는 새끼들의 밥이 된다. 비탈거미는 더 이상 생식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비정한 운명을 잘 알고 있다. 하여 의미 없는 육체를 새끼들의 자양분으로 헌납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다. 극한의 사랑이다. 거문도의 사연은 ‘비탈거미’를 생각나게 한다. 어머니가 감당한 두터운 세월의 무게에 한숨을 몰아쉬며, 지독한 사랑이라 생각했다.


고개조차 마음대로 돌릴 수 없이 꼼짝 못하고 누운 그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동물과 구별되는, 일어설 직립 능력을 박탈당한 식물인간적 상태이다. 이런 식으로라면, 인간으로서 계속해서 살아갈 의미가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처지는 비극적이다.


건장하고 활기 넘치는 시기를 보냈어야 했을 그는 이 병마의 시련 속에서 40년의 광야 생활을 통과한다. 누구도 그의 삶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지팡이 하나를 갖고 하나님에 의존해서 홍해를 가르고 바위의 물을 낸 모세와 다를 바 없이 오로지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인생을 살아낸다. 모세와 그가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세는 히브리 노예들의 삶을 해방시키는 일에 부름 받았다면 조경배, 그는 무엇보다 그 자신의 병든 육신에 갇힌 영혼의 자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 쳤다.


그의 광야의 삶은 처절했고 그 처절함이 그를 성서와 신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육신의 지독한 질고(疾苦)가 끝나는 날, 그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유일한 소망으로 견디고 있다. 그런데 그 견딤은 좌절의 종점에서 피할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견딤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의 85세의 늙은 어머니 이춘복 집사의 사랑과 헌신의 삶이다.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


자신의 고통도 심하건만 어머니는 아들의 삶을 지켜내는 것을 스스로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이들 노모자(老母子)의 삶은 그래서 마치 섬 가운데 또 하나의 섬처럼 외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 섬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의 바다이다. 그 바다의 깊이만큼 생긴 부력(浮力)은 그 섬을 가라앉지 않게 하고 있다. 그로써,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은가 라는 세상의 판단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어떤 생명도 그 생명이 끝나기 전에 먼저 저버림을 당하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의 마음이 이 바다를 출렁이게 하는 파도이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파도와 만나고 있는 것일까? 이들 두 노모자의 모습은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밝고 편안했다. 이들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평안이 있었다. 세상은 이들의 삶을 외면하고 소외시켰지만, 이들 노(老)모자는 그 소외의 섬, 끝자락에서 생명의 시간을 일구어 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까? 아파하는 자의 삶의 자리에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들 두 노(老)모자는 바로 그런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 고난은 이들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의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렇게 말하기는 쉬워 보여도 얼마나 간단치 않은 일인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들의 장래를 소망스럽게 기원하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 있겠는가? 날벼락이 떨어진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어머니는 자신의 생명과 자신의 육신, 그리고 자신의 영혼까지 아들의 삶에 쏟아 부어 왔다. 세상이 보기에는 도저히 가망이 없고, 그래서 그 사랑의 헌신이 결과적으로 무의미하게만 느껴지는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 어머니의 병든 아들에 대한 사랑은 꺾일 줄 모른다. 자신의 생애 절반을 송두리째 바친 지난 세월이 그녀에게 한과 억울함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이 어머니는 아들의 안위를 먼저 걱정한다. 방 한 켠에 덩그라니, 마치 오래된 짐처럼 놓여 있는 아들의 육신은 이춘복 집사에게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전체의 무게로 존재한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그 무게를 능히 지고도 아무런 불평과 탄식이 없다. 세상에 진정한 강자가 있다면, 바로 이런 어머니가 아닐까? 이 어머니의 사랑을 무너뜨리게 할 것이라고는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어떤 좌절스러운 현실이 맞닥뜨린다 해도 어머니는 그러한 일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달 두 달도 아닌 무려 46년의 세월을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는 성인이 된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온갖 시중을 들면서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해내는 늙은 어머니가 현실에서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자신의 인생에 제기되는 모든 하찮은 불평과 불만을 잠재우고 만다. 평범한 시골 아낙네에 불과했던 이 어머니에게서 그렇게 강한 힘이 솟아 나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가누지 못하는 몸을 건지는 생명줄


자신의 이러한 신세를 한탄하고 눈물을 쏟을 듯 한데 어머니는 이 모든 것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결국 그 아들에게 영원히 평안한 자리로 가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세상사는 것이 잠시의 고난이나, 그 고난의 강을 건너면 이제까지의 고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감사가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시점에 이르기까지 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런 육신으로 사는 아들의 하루하루가 감사한 것이 되도록 하는 것뿐이다. 어머니가 손을 놓는 순간, 그 아들은 지옥을 경험할 것을 아는 어머니는 혼신을 다해 그 아들의 삶에 더 이상의 고통과 아픔이 가해지지 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의 몸이 곧 자신의 몸이요, 아들의 아픔이 곧 자신의 아픔인 이 어머니에게 하여, 사랑은 가누지 못하는 몸을 건지는 생명줄이다. 생명줄을 놓아버리면 그 결과가 무엇이 될 것인지 아는 어머니는 세상의 동정이나 세상의 어쭙잖은 조언에 대하여 조용히 눈과 귀를 닫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 가닥이라도 남은 생명의 힘이 있다면 그 힘을 어떻게든 지켜내고 그로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인 것을 그녀는 은연중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들 자신에게 이 고통은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비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의 생명과 삶은 지상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상의 삶은 하나님 나라의 영원함에 이어지는 잠시의 통로이다. 그 통로로 들어가는 길이 힘겹다 해서 하나님의 처사에 비난을 더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와 멀어지는 첩경일 뿐이다. 세상의 눈으로는 사는 의미가 어디에도 없는 듯 하지만, 이러한 육신을 지니고 이러한 고난을 겪는다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들은 안다. 그 앎이 이들에게 믿음의 뿌리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하늘에 닿아 있는 감격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버리셨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지경에 있는 자신들에게조차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앞서는 것이다. 실로, 온전한 육신을 지니고 있어도 그 영혼이 병들고 하나님 나라와는 인연이 없이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이들에게 이들 두 노 모자는 생명의 가치를 일깨우는 하나님의 사자(使者)이다.


그 어떤 생명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버림받지 않는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이들의 삶이 이 절망과 좌절의 시대에 희망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게 하는 힘이 되는 이유이다. 하여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선교를 감당하고 있는 셈이다. 세상의 외면과 방치 가운데 외딴 섬에 갇혀 지내는 상황일지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믿음과 평안의 힘을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신앙에서 본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한다.


이들 두 모자는 서로에게 볼모가 아니라, 서로의 생명을 건지는 은혜의 터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소외시키나 하나님은 품으시는 이 놀라운 사랑의 현장은 끝없는 하나님의 바다를 보여준다. 모든 아픔과 고난을 품으시고 그것을 생명의 힘으로 나누어주시는 하나님 말이다.


거문도의 밤은 바닷바람이 차가 왔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에 끝까지 의지하는 이들 두 모자의 존재로 하여 마치 별이 빛나는 느낌이었다. 아, 누가 인생에서 실망할 것인가? 아, 누가 자신의 삶을 저주할 것인가? 거문도에 가보라.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사랑의 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끈에 매어 있는 배는 인생 어디에서도 표류하지 않을 것을….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영화 <밀양>, 그리고 서지현 검사

- 어디서 구원은 올꼬?


최근 ‘미투’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가 된 서지현 검사의 지난 1월 29일 JTBC 뉴스룸에서  “가해자가 최근 종교를 통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간증하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회개는 피해자들에게 직접 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한 비판은 새삼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밀양>은 절망의 끝자락에 선 한 여인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려 하는가를 보여준다. 주연 배우 전도연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래 새삼 주목받은 작품이라는 점을 빼놓고, 이 영화는 사실 영화적 재미나 흥행의 기대를 갖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이 대체로 어두운 삶을 드러내면서 관객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희망의 출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쪽은 아니기에 영화를 보고나서도 사실 답답함을 숨기기 어렵다. 영화 <밀양>도 태양이 빛나는 하늘에서 시작해서, 쓰레기가 뒹구는 땅으로 카메라 앵글을 옮기지만, 그것이 반드시 명쾌한 돌파구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적어도 기독교에 보내는 메시지만큼은 그저 지나칠 수 없다.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온 주인공은 그곳에서 다시 자식을 유괴당하고 자식의 죽음 앞에서 혼이 나간다. 밀양에 왔을 때만 해도 그녀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있었고, 그녀에게 교회는 (겉으로는) 전혀 다른 인생의 출구가 된다. 하지만 자식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찾아간 자리에서 편안한 얼굴로 이미 자신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에 그녀는 절대자에게 항거하는 존재로 뒤바껴 버린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청춘의 소설로, 광주 학살 이후 이 시대가 과연 이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아야 하는가라는 고뇌가 담겨 있는 글이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그런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고 다만, 한 인간이 좌절의 극점에 서서 어떻게 다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또한 영화 <밀양>은 그런 고통에 휩싸인 존재에게 교회가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인 면모로 들어가자면 다소 유치하고 이해가 너무 일반적으로 편향된 바가 있긴 하지만, 영화는 교회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의 고통 보다는 기독교인으로 만드는 일에 더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밀양>에서 교회가, 기독교가 직시해야 할 자신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밀양>은 보는 이에 따라 다층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교인들은 주인공의 고통과 슬픔에 동정적이다. 그러나 상대의 고난을 불행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가 하면, 그 고통의 깊이에 함께 스며들어가는 방식보다는 교회에 나오면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리고는 교인이 되어 변모한 모습에 열광한다. 이 세상 도처에 깔린 고통과 슬픔의 정체에 그대로 다가서기보다는, 예수를 믿으면 그런 고통과는 결별하게 되고 그저 행복한 감정에 푹 빠지게 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교인으로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상대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상대가 교회를 나오든 아니 나오든 관계없이 같이 있어주려는 마음이 보다 더 소중한 것이다. 영화는 그러나 이보다는, 교인 하나가 생겨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교회의 실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영화적 서술은 사실과 백 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기에는 오늘날의 교회는 너무도 냉랭해졌다.


교인의 수를 늘리는 총동원 체제가 여전히 가동하고 있고, 그 안에서 각종 프로그램으로 정신없이 밀어붙이는 현실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교회는 현실과 발을 붙이며 함께 가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가 아니라, 천상의 조직이 되어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 천상의 조직에 속한 장로는 여인의 유혹에 위선의 가면을 쉽게 벗어버린다. 이 장면은 논란거리가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점에서 적당히 타협해버린 인상을 주지만 어쨌든 간에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통 그 내면에 진실하게 자신의 몸과 영혼을 스며들게 하는 존재는 목격하지 못한다.


도리어 어찌 보면 껄렁패처럼 여겨지는 카센터 주인이 주인공의 아픔에 동참한다. 물론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이 이러한 상황을 주도하지만, 교회는 이 사나이가 보이는 사랑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해력과 감성으로 고통의 문제를 대면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자식의 유괴와 살해라는 충격적인 사태 앞에서 교회는 아무런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슬금슬금 눈치나 보면서 뒤로 물러나고 만다.


정신 요양원에서 나온 주인공이 머리를 자르러 갔다가 미장원에서 만난 미용사, 그러니까 유괴범의 딸과 만나는 장면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긴 하다. 주인공이 이 유괴범의 딸을 만났을 때 그렇게 독기를 품고 뛰쳐나오게 하기보다는, 그 딸도 소년원에서 나와 기술을 배우고 생존의 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은 아픔의 공유가 최소한 가능한 대목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영화 <밀양>은 영어 제목이 Secret Sunshine으로 되어 있다. ‘밀양’ 의 한자풀이로는 ‘빽빽한 볕’이라고 할까. 어느 쪽이든, 햇빛이 스며들지 않는 어두운 인생과 대조되는 역설적 반어법으로 다가온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는 자신의 출발점을 다시 점검해봐야 할 필요성 앞에 직면한다. 천상의 조직이 아닌, 지상의 공동체로서, 그리고 가장 아프고 험난한 삶의 자리에서 교회는 자기가 서 있어야 할 곳을 찾는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상처 받아 신음하고 있는 자를 위해 얼마나 위로와 치유의 능력이 있는지, 절망의 나락에 빠진 이에게 뜨겁고도 실질적인 희망을 제시할 수 있는 힘이 있는지, 앞을 가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빛이 되는 지혜를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미움과 대결의 현실에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사랑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로서 여러 가지 비평과 함께 아쉬운 점을 지적하기는 쉬우나, 오늘날 교회가 고난에 처한 이에게 비밀스러운 햇볕으로 다가가 그 인생에 빽빽한 광명을 채우는 힘을 갖지 못하면 영화 <밀양>의 비극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영화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현실에서 되풀이 되는 슬픔이다. 교회는 그 자신이 곧 이 세상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햇볕 또는 빽빽한 빛, “밀양(密陽)”이 되어야 한다는 걸 망각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posted by

한종호의 너른마당(62)


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


예수께서는 그의 선교역정에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의 위선을 매우 강렬하게 미워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더욱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신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닌 사회적 위치와 종교적 권위가 폭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구도 감히 그러한 작업을 할 용기나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지도자적 권위에 순종하는 일종의 종교적 세뇌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이 자신들의 종교적 선행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다. 이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선전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장해주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종교생활의 기준을 거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이유는 낙타를 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그 대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낙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순수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정직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학식이 높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희생해 왔습니다, 나는 이만큼 선행을 베풀어 왔습니다.” 등등은 사실은 전부다 낙타를 삼켜먹기 위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 욕심이 없으시군요. 아,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희생해 오셨습니까?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오로지 높은 지혜에만 관심을 보이고 살아오셨군요.” 등의 평가를 얻어내어 낙타를 먹어치우기 위해 위장하는 자들은 도처에 있다.


가령, 정치판이 벌어지면 이렇게 ‘나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발전의 선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표와 자리가 주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의 위 속에 수 십 마리 낙타가 들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소위 기독교 인사들이(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교단선거뿐만 아니라 연합기관이나 자신의 교단과 기관에서 자리를 보전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실은 낙타를 겨냥하면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덕을 선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마음은 낙타에 가 있고 하루살이는 그걸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우리는 나라의 운명을 감당하겠다는 이들의 말과 삶 속에서도 하루살이가 낙타를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바가 하루살이를 걸러내며 살아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욕없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만을 위해 나섰다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과 재물과 삶의 스타일, 그 자손들의 행실은 낙타를 삼킬만한 위가 있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발견한다.


예수께서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시면서 ‘눈먼 인도자’라고 공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게 된다. 그가 낙타, 즉 거부하기 어려운 크기와 강도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포기하는가, 아닌가이다. 아, 이 어리석음여, 하나님 나라를 낙타에 비길까?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한종호의 너른마당(61)


문제는 ‘어떤 성품이 주도하는가’이다


그런데 사라가 보니,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저 여종과 그 아들을 내보내십시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창세기 21:9-10)


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모계사회의 종식과 더불어 부차적 지위에 머물게 되었다. 여성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들을 생산하는 존재였고, 인간이라기보다는 남자에게 종속된 재산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었다. 여기서 여성에 대한 억압은 구조화되었고 문명의 생리처럼 되어갔다.


이스라엘의 고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사렛 예수의 선교는 그러한 이스라엘 문명의 여성관에 대한 놀라운 도전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주변에는 여자들이 들끓었다. 여인들의 고난과 천대에 대한 그의 따뜻한 다가섬이 그런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의 선교가 그토록 힘 있게 전개되었던 것도 짓눌림 당했던 여성들의 신앙적 각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늘날 여성들은 새로운 자아상을 구성해 가면서 잃었던 자신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교회에도 중대한 도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온갖 굳은 일들은 여성들이 떠맡으면서도 정작 교회의 진로와 책임있는 의사결정구조에서 여성들은 배제되고 있는 현실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남성들의 횡포가 아닐 수 없다.


여성운동은 그러한 의미에서 아무래도 현실타파적인 공격성이 전면에 조명되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이 때로 거칠어지는 점은 조심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면을 시비 걸어 여성운동 전체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위치 자체가 새로운 해방의 자격을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것일까? 핍박받는 상황 자체가 그에게 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수행하는 주체로서의 일체의 위상을 그대로 보장해주는 것일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사라와 하갈의 대립을 목격하게 된다.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약자인 여성 사라가 같은 여성인 하갈에게는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다 가혹한 결과로 나타난다. 하갈에게 최대의 적은 사라였고, 사라에게 최대의 적은 하갈이었다. 여성과 여성의 대립이 성차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사라는 철저하게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하갈의 존재를 주변부로 축출한다. “저 여종의 아들은 나의 아들 이삭과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습니다”라고 한 말에서도 보듯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모두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아들 이삭을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어머니 사라’는 여인 하갈에게 가혹한 종의 주인이며,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에게는 악랄한 원수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존재하고 있는 여인들의 닮은꼴을 보게 된다.


“저 가난한 자들의 자식과 내 아이와는 이 시대의 유산을 나누어 가질 수 없소, 저 공부 못하고 지지리도 못난 놈들과 내 아이와는 이 사회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저 출신이 미미한 여자와 내 아이와는 결혼하여 우리 집안의 유산을 나누어가질 수 없소, 우리가 어떤 집안인데 감히 우리와 어깨를 함께하려고 하는가? 내 자식만큼은 이 사회에서 가장 높고, 크고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 하오.”


그렇게 해서 명문학교와 부촌 근처에는 장애인을 위한 학교가 세워질 수 없고,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은 계산 앞에서 깨지기 일쑤이며, 출신이 낮은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돈 없는 가정에서 시집 온 며느리는 구박덩이가 되고, 그 반대는 며느리가 상전이 되고 만다.


이 문제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구도가 해결되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세계관이 바뀌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는다. 자신을 지배자로 설정하고 자신의 자식도 지배자로만 키우려하는 여성이 어머니인 한, 우리 사회는 그런 ‘모성’에 기대어 자란 인간들로 계속 채워지게 될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광야로 쫓겨나는 이들이 양산된다.


남성은 언제나 지배자이며 여성은 언제나 피지배자인가? 대체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어떤 성품이 그 사람을 주도하고 있는가’에 있다. 그리고 어떤 성품이 그 사회의 구조적 중추를 지배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내정자에 대해 ‘외교부 장관은 남자가 해야한다’고 언급한 국민의당 이언주 원내수석부대표의 ‘성차별적인 발언’에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도 그런 차원의 인식이 아닐까.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함께하려는 사랑과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가 남자이건 여자이건 상관없이 부당한 지배는 지속될 것이며, 억울하게 쫓겨나는 이들은 늘어만 갈 것이다. 하갈에 대한 사라의 비정함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사라와 그 사라에게 축출 당하고 있는 하갈, 이스마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안철수와 역사의식

만일 유대교에서 이들의 해방절인 유월절을 과거 회고적이라고 지우자고 하면 어찌 될까? 당연히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일이 민주당과 통합하는 안철수의 새정치연합 쪽에서 일어났다. 4·19와, 5·18을 비롯해서 6·15와 10·4선언을 과거 회고적인데다가 소모적인 이념논쟁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정강정책에서 삭제하기를 요구한 것이다. 당장 민주당 쪽은 강하게 반발했고, 에스엔에스(SNS)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어떤 민족이든 그 민족의 역사에는 중대한 전환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전환점은 민족 구성원 모두가 현재와 미래를 위해 지속적으로 되새기면서 그 정신을 되살리려 노력한다. 역사는 단지 과거를 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걸 토대로 앞으로 나갈 방향을 바로 세우는 초석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와 일본 사이에는 이른바 “과거사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사실 이 명칭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과거사로 멈추지 않고 지금의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현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일 일본이 우리에게 1910년의 일본에 의한 합병과 1919년의 3·1운동에 대해 과거 회고적인 일이니 자꾸 되새기지 말고, 외교적 껄끄러움이 있으니 대충 잊고 미래를 지향하며 나가자고 한다면, 그 후안무치에 우리는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특별히 민주당한테 6·15와 10·4는 역사적 정통성의 근간이며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지향점을 일깨우는 기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정신을 가진 당과 통합한다면서 그 기둥을 송두리째 뽑자고 요구했으니 그것은 기본적인 역사의식의 부재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이 소식을 접한 이들 상당수는 경악하고 있다. 여당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통합 야당의 출현에 기대를 걸고 있던 이들은, 극도의 실망감과 좌절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일은 안철수와 그의 세력에게 쉽게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통합 야당의 위력을 스스로 위축시키는 자충수가 되었다고 본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 역사에 대한 냉철한 의식과 역사적 책임과 자세가 없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 쪽은 6·15와 10·4를 정강정책에서 삭제하자고 했다가 반발을 사자, 기껏 한다는 말이 7·4와의 형평성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그게 그렇게 둘러댄다고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 있는가?

정강정책은 정당의 소신과 신념을 밝히는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그걸 형평성 논리를 대며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해 보겠다? 누가 이걸 곧이곧대로 들을 것이며, 이해하고 받아줄 것이라 여기는가? ‘새 정치’를 하겠다면서, 이처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등 부끄러운 역사의식의 부재를 날것으로 보여준다면 새 정치라는 말 자체는 우리 모두에게 재난이 될 뿐이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를 썼고 희생된 역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삭제하자는 것은, 이들의 의식 속에는 역사에 대한 존중이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김한길, 안철수는 부랴부랴 심야회동을 통해 이 역사적 사건들을 모두 반영하기로 했다지만, 이미 드러난 의식의 공동(空洞)상태는 어찌할 것인가?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단지 먹고사는 문제로 격하시킴으로써 민족적 자존감과 역사의식을 폐기하려는 자세는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훼손한다. 오래전 히브리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고 살겠다는 믿음 하나로, 배고픔과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떠났다. 그것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역사적 존엄성을 되찾는 데 성공한다.

우리를 배부른 돼지가 되려고 안달하는 존재로 취급하지 말라.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편집자 주/이 글은 2014년 3월 20일자 한겨레신문 [야! 한국사회]에 쓴 칼럼이다. 

posted by

*‘끙끙 앓는 하나님’과 한국교회,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돌아보며*


한 사회의 정신적 기준으로 존재해야 할 교회가 도리어 그 사회의 가장 악취가 나는 현장의 하나가 되고, 존경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정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다. 만일 이러한 상태가 아무런 교정의 과정도 없이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덩치는 크지만 정작 그 내용에 들어가 보면 탐욕의 소굴임이 판명되는 비극을 겪을 수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이는 내 아버지의 집이자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구나” 하는 일갈의 소리가 한국 개신교의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세간의 도마에 오르내리는 고질적인 목회자의 성윤리 문제는, 교회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게 되어간다는 처연한 비극이다. 이 뿐인가? ‘교회세습’이라는 교회의 지도적 인사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의 대부분은 ‘과연 기독교에 희망이 있는가’라는 자조적인 자기비하로까지 연결될 지경이다.


이렇게 교회는 어디를 가도 안심할 수 없는 상태로 달려가고 있고, 단지 무화과 나뭇잎으로 살짝 덮여있을 뿐, 한번 바람이 불면 그 치부(恥部)가 그대로 드러나고 마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니 개혁의 손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모든 교회의 방황과 정신적 실종 상태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신앙인들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대세가 잘못된 한쪽으로 쏠린다 해도 끝까지 외롭게 그 반대편에 서 있을 수 있는 참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에 의지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의 책임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조차 기대를 저버린 지 이미 오래라는 뼈아픈 현실은 우리 자신의 모습부터 깊이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당연한 요구 앞에 서게 된다. 이는 마치 소금이 맛을 잃으면 길에 버리워져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는 성서말씀이 응하는 현실이다.




1970년 이후 한국교회의 모토는 ‘성장’이었다. 이것은 박정희 시대 성장정책의 논리와 궤를 같이하면서, 전도의 열정과 함께 결합하여 대형교회의 출현을 가져왔다. 경제계의 재벌과 종교계의 대형교회는 성장주의 시대의 일란성 쌍생아처럼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형교회는 다른 무수한 교회의 선교적 모델이 되어 성장 자체가 곧 절대가치로 군림하는 환경을 만들어냈다. 성장하지 못하면 발언권이 없고, 성장하지 못하면 그것은 존재 이유가 없는 목회가 되고 말았다. 양적 성장이 곧 목회의 성공이었고, 양적 성장을 이루어내는 목회자가 곧 지도자가 되었다. 성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성장의 신앙적, 윤리적 기초는 성찰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회성장론은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현실과 맥을 같이하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를 철저하게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교회는 시장의 논리에 따른 경영방식과 지도력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성장 모델을 선택했고, 목회자는 정신적 지도력이 아니라 경영수완이 좋은 CEO와 구별이 되지 않게 되어갔다.


이러한 교회성장론의 최대 관심은 어떻게 보다 많은 교인들을 교회에 들어앉게 해서 그들의 돈으로 교회를 살찌우는가에 있었다. 결국 교회는 날로 융성해져 갔지만 한국사회는 그에 비례하여 정신적 감화를 받아 순결해진 것은 아니었다. 성장은 곧 성공이었고, 성공 스트레스는 모든 교회를 압박했고 이로써 교회는 세상의 성공사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니 자연 교회 안에 세상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품어안은 선교적 양식이 아니라, 세상의 시장논리가 교회를 점령한 양식이었다. 시장논리란 무엇인가? 그 논리의 핵심은 수용자의 요구에 맞추고 그 대가를 현금화하는 방식이다. 이로써 교회는 무수한 문제의 덫에 걸리기 시작한다.


이기적 탐욕을 종교적으로 승인해 주는 기복주의는 공식이 되었고, 교권주의는 당연하게 통했다. 권위주의적 CEO의 지휘 아래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통용되었던 것이다. 돈의 힘은 그야말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종교적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소멸되어 갔다. 이미 자신의 개인적 자산처럼 되어 버린 교회를 세습하려는 욕구는 그리하여 당연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사적 영역과 통하게 되었다. 재벌기업의 2세 상속과 다를 바가 없는 논리가 수용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미 돈의 힘과 교권적 권력에 맛을 들이게 된 교회 지도자들의 탐욕은 성(性)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개인적 차이가 있다 해도, 이렇게 한국교회의 속살은 깊이깊이 썩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교인들의 세속적 탐욕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면죄부를 받아 양심의 가책을 제거해 버리고, 기복의 대상이 되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교회는 이들 수용자들의 요구가 충족되는 대가로 헌납한 돈을 가지고 ‘성역(聖域)으로 둘러싸인 밀실에서 무한대의 윤리적 타락’을 자행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세월이 지나면서 일종의 특권이 되었고, 이 특권에 대한 의문을 품거나 도전하는 것은 종교적 불경이 되어 버렸다. 교회가 무엇을 위해 성장해야 하는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성장해야 하는가에 대한 보다 진지하고 본질적인 질문들은 억압되어 갔고, 목회자 후보생들은 이러한 굴레에 굴종하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배워 가면서 영적으로 탈진해 갔고 이들이 교회를 맡을 때쯤이면 윗세대와 그리 달라질 것이 없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현실이 이어지게 될 때, 한국교회의 장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 <끙끙 앓는 하나님> 북토크가 저자의 바람처럼 중첩된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에 희미한 불빛 아래서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중첩된 어둠이 우리를 삼키려 하는 이 시대에 예레미야를 읽는 것은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를 길들이려는 세상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이 눈물의 땅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노래하기 위함이다. 이 책이 그러한 길을 모색하는 이들 앞에 던져지는 희미한 불빛이라도 되면 참 좋겠다. 역사의 봄이 고샅길 저편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이제 우리가 겨울옷을 벗어던지고 봄을 향해 나아가야 할 때이다."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posted by

한종호의 너른마당(57)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

 

겨울이 난데없이 덮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겨울은 추워야 하고, 그러면서 봄을 준비하는 시간이 익어갈 겁니다. 여름에 자신을 한껏 자랑하던 초목도 겨울에는 겸손하게 몸을 털고 벌거벗은 존재의 본래 알몸으로 돌아가 하늘의 생명을 받아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겨울이 추운 것이 정상이라도 춥지 않은 겨울을 나고 싶은 것은 사람들 모두의 마음입니다. 길거리에 내버려진 채 겨울을 나보라고 하면 누가 그걸 기꺼워하겠습니까? 누구도 돌보는 이 없이 찬 바닥에서 홀로 두렵게 잠을 자야한다면 그 또한 겨울의 잔혹함을 더욱 깊게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

 

역사는 강자가 써나가는 것 같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강자의 편에 붙어사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치지만 성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습니다. 현실은 대세를 쥔 쪽에 서라고 하지만, 성서는 거기에서 빠져나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함께 앉지 아니하며,” 

 

세상을 약삭빠르게 사는 꾀가 많고, 강하고 부해져서 오만해진 자들이 모든 것을 쥔 것 같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길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현실대세로 보면 초라한 것 같고 대단할 것도 없는 자처럼 보이지만 그의 삶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하는 일 마다 잘 될 것이라는 겁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궁성의 부”를 비교해보면 시냇가의 나무는 아무 것도 아닌 듯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드러내 보이는 생명의 힘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 축복을 내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삶을 가난하다고 여기고, 힘없다고 생각하면서 내버리고 맙니다. 그건 착각이 아닐까요? 강하고 부한 것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세상에선 막강하게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갓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다.”

 

바람이 불면 그 운명의 실체가 폭로됩니다. 지금은 강성한 것 같지만 생명과 사랑의 바람이 불면 그 정체는 겨우 속이 빈껍데기 겨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면, 심판 받을 그 날에 고개를 들지 못하며 의인의 모임에 들 수 없는 비극에 처하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굳게 믿는 이들은 세상의 대세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강자나 부자들의 오만에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 적힌 바대로 그는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케 해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시편 35편에는 악한 권세를 향해 하나님의 질타가 있기를 이렇게 기원하고 있습니다.

 

 “까닭 없이 구덩이를 파고 그물을 쳐서, 이유 없이 내 생명을 묻으려는 저 사람들, 저 사람들에게 멸망이 순식간에 닥치게 하시고 자기가 친 그물에 자기가 걸려서 스스로 멸망하게 해주십시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기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당하고 힘없이 희생되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바라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시편 40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져주시고, 진흙 수렁에서 나를 건져 주셨네. 내가 반석을 딛고 서게 해주시고 내 걸음을 안전하게 해주셨네.”

 

 

 

 

특별시 사람들

 

2007년에 만들어졌으나 개봉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2009년 부산 국제 영화제와 서울에서 있었던 국제 가족 영화제에서 선을 보였던 박철웅 감독의 <특별시 사람들>입니다. 강남의 고급 고층 아파트 숲 속 한 편에 있는 달동네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전혀 거칠지 않게 이 현실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개발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 그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 이들의 모습, 그러면서 이들의 처지를 이용해먹는 자들의 악덕 등이 고발되어 있습니다. 특별시에 살고 있지만 전혀 특별하지 못한 이들의 슬픔과 아우성이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 무수한 사람들이 강하고 부한 것을 열망하면서 그 기회를 독점하려는 자들의 탐욕과 야망과 죄와 교만과 차별 등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그물망에 걸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그물망을 찢고 그로써 고난 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단한 영혼을 해방시켜야 하는데 그런 일에는 나서지 않고 있으니 그런 교회를 향해 회의가 생기지 않을 리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은 끼리끼리 잘 모이면서, 이웃을 위해 나서야 하는 궂은 자리에는 가지 않는 이기적 신자들의 모형이 한국사회의 비신자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뼈저리게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2016년 지난해도,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이 없는 이들은 여전히 힘이 없이 억울한 일들을 많이 당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들을 위한 희망의 거처가 과연 얼마나 되어주고 있는 것일까요? 거대 교회, 이른바 메가 처치가 되기 위한 야망에만 집중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자신의 이웃이 누구인지 돌아볼 겨를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교회는 시장이 되고, 권력이 되어가고 있으며 의로운 시인들을 추방하고 있지 않은가요?

 

악인의 삶은 아무리 유혹적이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악인의 삶일 뿐입니다. 성서의 시인들은 이 선과 악의 분별에 민감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는 한국교회는 시편의 마음을 읽어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이 땅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은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로 이 세상을 돌이키자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결국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영혼이 시들지 않으며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축복을 바랄 것인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추운 겨울, 봄을 맞이하는 이 생명의 마음이 매일 아름답게 자라났으면 좋겠습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