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87 세상에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 바울이 쓴 네 편의 옥중 서신에 대한 김 목사의 설교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보인다. 그 키워드들을 꿰어 보면, 한 신앙인으로서 그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그의 설교에는 “이웃”, “사회” 혹은 “세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서 은폐된 거짓을 드러내는 한편 따뜻한 눈길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한다. 그는 믿음의 본질이 이 세상 안에서 어떻 게 사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본다. 젊은 시절에 귀에 따갑도록 들었던 루돌프 불트만의 유명한 명제 즉 “신학은 곧 인간학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김 목사는 “일상의 자리야말로 우리 신앙의 진실함을 입증하는 유일한 자리입니다.”(「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용기」)라고 말한다. 이 말은 바울 사도가 로.. 2025. 3. 31. 탁류가 넘치는 강을 뚫고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 「겨자씨처럼」이라는 설교는 오늘날, 힘없이 현실의 위력에 무너지고 있는 이들에게 무한한 용기와 격려가 된다. 그는 “백향목 세상의 전복”이라는 개념을 통해, “겨자씨의 미래”를 꿈 꾼다. “백향목 세상은 몇몇 특권적인 사람에게만 천국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인 세상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런 세상에 눈뜨기 원하셨습니다.… 지배와 피지배가 아니라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몫을 살아내는 세상을 꿈꾸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척박한 땅에서도 억센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겨자씨의 예를 들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나님 나라는 잘난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잡초와 같은 사람들이 열어가는 현재 시제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앞에.. 2025. 3. 11. 예수 없는 예수교회 김기석 목사는 「절대 신뢰」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인간의 비열한 욕망을 감싸주는 망토 역할을 하는 아모스의 예언을 이렇게 인용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고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한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음성이 되기보다는 기득권자.. 2025. 3. 8. 울타리 밖의 새로운 하나님 나라 「마음의 눈」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김기석 목사는 예수로부터 눈 고침을 받은 이가 회당에서 축출 당한 이후 예수와 다시 만난 장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어려운 진실과 만나게 됩니다. 그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자리는 기득권자들에게 쫓겨난 자리였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한 평생 교회에 출입하면서도 주님을 깊이 체험하지 못하는 까닭은 안주의 울타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삶의 관성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의해 울타리 밖으로 쫓겨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 2025. 2. 25. 맑고 경건한 울림으로 세상을 일깨우는 소리 김기석 목사에게 설교자의 길은 한마디로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 이의 발걸음이다. 그러기에 그의 설교는 오늘날 한국사 회와 지구촌이 겪고 있는 고통을 마주하며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자세로 실천의 길에 들어설 것인지 일깨우고 있다. 예수를 따 르는 이의 순결한 마음과 진지한 성찰, 그리고 의로움을 저버리지 않는 외로운 결연함이 스며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김기석 목사의 설교는 대다수 교회의 대중들에 게 사실상 환영받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그 일의 윤리적 평가는 도외시한 채 만사에 축복을 기대하고, 자기 욕심을 꿈으로 치장하며 예수라는 이름을 동원해서 욕망의 충족과 출세로 치닫도록 유혹하고 있는 교회들의 세뇌에 길들여진 마음이 이런 설교를 반기는 것은 쉽지 않다. 그저 기도하고 할렐루야만 외.. 2025. 2. 24. 하나님의 마음, 그 여성의 힘 여성 신학자, 목회자들의 성경 읽기는 무엇이 다를까? 그것은 단지 젠더의 차이를 묻는 질문이 아니라 그 차이에 담긴 시선, 사회적 경험, 해석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같은 성서 텍스트라도 그 서 있는 자리, 사회적 존재로서 겪게 되는 일상은 다른 관점, 전망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을 《새 시대 새 설교》라고 붙인 까닭 또한 그런 의미를 담는다. 오랜 세월 동안 남성 위주의 강단이 쏟아내는 설교, 메시지가 하나의 교리, 교조 내지는 정식처럼 여겨지는 현실은 여성적 관점의 배제, 여성이라는 젠더가 포괄하는 기존질서로부터 변두리화된 존재의 육성을 지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억압된 목소리, 경험, 관점의 복구를 열망하게 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복구의 지점에 서 있다. 물론 이로.. 2024. 11. 19. 설교 표절은 스스로 함정을 파는 행위 표절 이후의 문제를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 설교표절이 미치는 문제에서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바는 개신교 정신의 근간이 '말씀으로 돌아가자'라는 점이다. 개신교의 전통은 '강단의 중심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씀이 예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중심을 어떻게 세워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는 중요한 동력인데, 그 동력을 교회가 공동체 안에서 길러주고 쏟아내고 배우고 얻어내는 과정과 본질에 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가? 말씀의 기본이 무너지는 것을 뜻하지 않겠는가? 표절을 정당화하는 입장에서는 설교의 여러 가지 내용들을 그 .. 2024. 11. 13. 말로 꽂는 비수(匕首)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다.”(잠언 12:18) 말의 역할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인가? 그렇다면 어떤 의사도 다 소통되면 말의 역할은 다 한 것인가? 악한 의사를 소통해도 말은 중립적이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 성서는 말의 역할을 의사소통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말은 언제나 생명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하여,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상처를 내는가, 아니면 앓던 병도 낫게 하는 능력인가로 판별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말들로 인간의 생명에 상처를 내고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뿐인가? 잘 나아가던 상처도 덧나게 함으로써 병통을 더욱 도지게 하고 만다. 그래서 신앙은 이 말의 훈련을 제일 중요한.. 2024. 10. 30. 예수는 밀실에 가둬 두고 광장으로 나서는 목사와 교인들 10월 27일, 그것도 종교개혁주일에 “악법을 저지하고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 2백만 명이 모인단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벌이고 있는 한국교회는 예수가 길거리에 다니면서 세상을 둘러보는 것을 반가워할까? 또는 교회에 와서 목사들의 설교 듣기를 원하기는 할까? 예수께서 교회에 들어오시면, 거 누구요, 당장에 나가시오, 하지는 않을까? 왜 그런가 하면,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예수께서는 틀림없이 아니 이런 강도들의 소굴을 봤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내 아비지의 집,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곳으로 타락시키고 말았구나, 하시면서 크게 역정을 내시지 않겠는가? 도대체가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교회의 목사들은 많은 경우 예수님을.. 2024. 10. 22. 이전 1 2 3 4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