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9)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9 가룟 유다
오늘 만나게 될 장면은 마태수난곡 1부 11번~12번 곡으로 마태복음 26:14~16에서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넘기기로 한 장면입니다. 내러티브와 가룟 유다의 대사 그리고 마태 수난곡의 유명한 독창곡 중의 하나인 소프라노의 아리아 ‘Blute nur/피투성이가 되는구나’가 이어집니다.
마태수난곡 1부 11번, 12번 마태복음 26: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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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14. Da ging hin der Zwölfen einer, mit Namen Judas Isharioth, zu den Hohenpriestern und sprach: |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
대사 |
유다 |
15.Was wollt ihr mir geben? Ich will ihn euch verraten. |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15.Und sie boten ihm dreißig Silberlinge. Und von dem an suchte er Gelegenheit, daß er ihn verriete. |
15.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
코멘트 |
소프라노 아리아 |
Blute nur, du liebes Herz! Ach, 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 Droht den Pfleger zu ermorden, Denn es ist zur Schlange worde |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사랑했던 주님의 마음이여! 아! 당신이 키우시고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 그 양육자를 죽이려 하다니 그 아이가 뱀이 된 것입니다. |
유다는 악인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뭔가 아쉬운 매우 복잡하고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그는 열 두 제자의 하나였고 스승을 배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배신은 십자가 구원의 길을 위한 길의 연결고리가 되었지요. 그는 이토록 야릇한 운명을 지고 있습니다. 그는 뱀과 비견되는 배신자, 돈 때문에 예수를 판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그는 타고난 악마였을까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였다
우리 모두 익숙한 관점을 내려놓고 다시금 유다를 만나봅시다. 제게 유다를 향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준 것은 다름 아닌 마태수난곡이었습니다. 오늘의 장면 중 유다의 배신 후에 이어지는 알토 아리아에서는 유다를 일컬어 ‘당신이 젖 먹여 키운 아이/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습니다. EBS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모든 개의 문제들이 개들의 타고난 성향 때문이 아니라 주인과 주변 환경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누군가가 정말 밉고 미울 때, ‘그래, 이 사람도 한 때 아이였었지! 티 없이 맑았던, 존재 자체로 누군가의 기쁨이 되었던, 사랑 받았던 누군가의 아이였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마태 수난곡은 유다를 ‘아이/das Kind’라고 부르고 있었고 그 한마디가 저로 하여금 가룟 유다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습니다.
가룟 유다, 그는 한때 나름의 부푼 꿈을 안고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돈을 벌거나 출세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면 예수를 따르는 것 말고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역시 한 때 아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소프라노 아리아의 가사처럼 그 역시 예수의 사랑하는 아이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나름의 부푼 이상을 품고 예수를 따랐을 것입니다. 돈 관리를 맡았을 정도로 그는 머리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스승을 배신하고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그리고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돈을 던져 버리고 자살했습니다. 예수를 배신하는 것이나 돈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자살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무언가 꼬인 것입니다. 무언가 그의 생각과 달리 흘러 버렸던 것입니다. 한 아이 유다! 그는 왜 그런 일을 벌였을까요? 갑자기 그가 측은해 집니다.
유다,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
한 마디로 유다는 ‘똑똑하고 비열한 개인’이었습니다. 똑똑하다는 것은 머리가 좋아 계산과 판단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비열하다는 것은 단순한 욕지거리가 아닙니다. 계산하고 판단하되 자신의 이익과 이용가치에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개인이었습니다. 그는 제자 공동체인 교회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했지 자신이 그 공동체의 일부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에 수긍했기에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옆에서 예수의 기적을 수 없이 목도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왜 예수를 팔았을까요? 그는 똑똑했기에 스스로 예수와 그의 가르침과 그의 길에 대해서 이만하며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가 유다가 보기에 스승 예수가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기적의 능력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큰 교회를 이루고 예루살렘을 접수하고 자기 이름도 높아지면 좋겠는데 스승은 계속하여 낮은 곳의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세상의 지혜와 계산에 서투르기만 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돈 때문만은 아닌듯합니다. 유다를 대할 때, 너무 은 삼십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돈을 남긴 것은 기회가 될 때마다 돈이 생기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다는 나중에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돈을 돌려주려 합니다. 조심스런 상상이지만, 어쩌면 유다는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데려가면 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예수가 자기 앞에서 행했던 놀라운 말씀과 기적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바램을 이루기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제일 빠르고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뒤틀어져버렸습니다. 예수는 잡혀가는 순간부터 무력했고 도살장의 어린 양 같이 잠잠했습니다.
우리 모습 속의 유다
이만하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유다는 우리들의 교회 안에 흔히 있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유다는 우리들 자신이며 우리들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으면, 끝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하지 않으면, 예수를 이용해 교회를 키우고 유명해 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 안의 유다가 고개를 들고 우리도 모르게 말과 행동과 삶으로 또다시 예수를 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몸입니다. 교회를 파는 자는 예수를 파는 자입니다. 교회를 파는 자가 바로 유다입니다. 목사가 되고 후회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평신도 시절에는 잘 몰랐던,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법한, 교단과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악한 모습들을 가까이에서 듣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인맥과 돈으로 교회를 사고파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중개업자처럼 교회를 소개하고 소개비를 받는 목사들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대부분 계산이 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이 그런 일을 벌입니다. 그리고 절대 스스로를 비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교회건 교인이건 신앙이건 예수건 간에 자신의 이익과 이용가치에 따라 값을 매기고 사고파는 비열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될지언정 스스로를 절대로 교회 공동체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철저한 개인들입니다.
예수를 판 유다나 예수의 몸 된 교회를 파는 자들이나 제가 보기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 시절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고 지금 모든 것이 뒤틀려 버렸음을 깨닫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죄를 전가할 좋은 재료로 그토록 유다를, 아니 스스로의 그림자를 저주하고 있는 그들이 더욱 안쓰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예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유다입니다. 그런 욕망, 그런 모습은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절망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끝까지 예수를 바라 봐야합니다.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나중에는 예수를 배신했습니다. 예수를 외면하여 도망치거나 그를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금 예수를 바라보고 돌아왔습니다. 죄에 있어서는 유다나 다른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를 위해 대신 제물이 되시고 끝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차이였습니다. 이어지는 곡을 만나게 되면 우리 주님이 그런 우리 모두를 안타까워하시며 십자가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주님의 마음이여
이어지는 유명한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사랑했던 주님의 마음이여!’는 유다의 모습과 유다를 향한 예수의 마음을 바라보는 소프라노의 코멘트를 담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만난 번역들은 대부분 이 곡의 가사를 유다를 향한 피의 징벌로 해석하는데 이는 크나큰 오해입니다. 아마 이 아리아가 유다의 배신 장면 다음에 이어지기 때문에 ‘피/Blut’라는 단어의 강렬함이 그런 해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오역은 우리의 본성이 사랑과 용서보다는 분노와 복수에 더 가깝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이와 반대로, 제대로 해석된 가사는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본성과 달리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유다에 대한 분노와 저주는 여기에 없습니다. 이 피는 예수의 피 입니다. 유다가 흘렸어야 할 피를 예수께서 대신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자살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용서와 사랑을 믿지 못하여 거부하고 스스로 징벌한 것입니다. 이 아리아는 사랑하는 아이의 배신과 그의 타락을 슬퍼하며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은 피투성이가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으로 연결됩니다. 이 아리아의 도입부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오케스트라의 반주는 피투성이가 된 예수의 마음뿐만 아니라 절뚝절뚝 피를 흘려가며 외롭게 십자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을 연상케 합니다. 플롯과 바이올린의 스타카토는 흘러내리는 피의 열기와 끈적끈적함까지 표현 하고 있으며 저음에서 들리는 묵직한 현의 소리는 십자가의 무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악보1).
악보 1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의 도입 부분. 플롯과 바이올린의 스타카토는 피투성이의 모습을, 비올라의 묵직한 선율은 십자가의 무게를 표현한다.
가사가 바뀌어 ‘Ach, ein Kind, das du erzogen, Das an deiner Brust gesogen.../아! 당신이 키우시고 당신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가...’라고 노래하는 부분에서는 반주의 분위기도 완전히 바뀝니다. 모든 현 파트는 사라지고 통주저음과 플롯만이 남아 푸른 언덕을 거니는 듯 아이의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던 그 시절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그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순간들 중간 중간에 현악이 끼어들어 피투성이의 테마를 이어갑니다(악보2). 마지막으로, 다카포 형식인 이 아리아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피투성이가 된 주님의 마음과 몸을 노래 한 후 마무리됩니다. 처음과 똑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만 피투성이 주님의 마음과 몸은 이런 음성으로 들려옵니다. “그래도 너는 내 아이며,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아이였고 주님의 품에서 자란 주님의 아이입니다. 한 때 우리는 순수한 삶과 순수한 신앙과 순수한 교회와 순수한 목회를 꿈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로의 모습에서 유다를 정죄하고 때때로 자신 안에 꿈틀대고 있는 유다의 모습에 몸서리 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유다를 저주하고 우리 안의 유다를 미워하며 정죄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에 달리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변함없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절망한 자리 바로 옆에 주님의 사랑이 놓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과 2절을 보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과 유다의 배신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 어떤 문학적 표현 보다 강렬한 대비가 이렇게 무심한 듯 가장 가까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 그리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 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한복음 13:1-2)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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