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세력, 반민특위를 짓밟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22일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협력하여 민족배반 행위를 했던 친일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공포했다. 헌법 제101조에 의거한 특별법의 제정이었다.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고, 국회는 독립운동가 출신 김상덕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데 이어 특별 재판부ㆍ특별 검찰부ㆍ사무국 등을 구성하고, 각 시ㆍ도에 지부가 설치하였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화신재벌 박흥식에 대한 검거를 시작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는 최인ㆍ이종형ㆍ이승우ㆍ노덕술ㆍ박종양ㆍ김연수ㆍ문명기ㆍ최남선ㆍ이광수ㆍ배정자 등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집권에 성공한 이승만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세력, 특히 친일경찰 출신의 경찰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 친일경찰은 이승만에 구명을 기대하는 한편 반민특위 해체 음모를 꾸몄다.
반민자 공판이 진행되고 있을 때 친일세력은 3.1운동의 성지 탑골공원과 반민특위본부에까지 몰려와서 특위의 해체를 주장하고 반민특위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고래고래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6월 2일에는 친일세력의 사주를 받은 유령 단체들이 국회 앞에 몰려와 특위요원들을 온갖 욕설로 헐뜯고 체포된 반민자들의 석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반민특위는 6월 3일 시위자들이 특위본부를 습격한다는 정보를 듣고 경찰에 경비를 의뢰했지만 경찰은 이를 외면하였다. 경찰의 방치 속에서 동원된 시위대는 특위본부를 포위하고 사무실까지 습격할 기세를 보였다. 특위 특경대들이 공포를 쏘면서 간신히 데모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그제서야 경찰이 나타났다.
특위의 특경대는 친일경찰 출신인 시경 사찰 과장 최운하가 반민특위활동 저지 데모의 주동자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한 데 이어 선동자 20여 명을 연행하였다. 최운하가 구속되자 각 경찰서의 사찰 경찰 150여 명이 집단 사표를 내는 소동을 벌였다. 국회프락치사건으로 반민특위가 크게 위축된 상태에서 사찰 경찰의 집단 사퇴가 이루어진 것이다. 특위활동을 제약시키고 이에 대항하려는 친일경찰의 조직적인 계략이었다.
서울시경 산하 전사법경찰이 반민특위 특경대해산 등을 요구하며 집단 사직서를 내놓고 있을 때인 6월 5일, 중부서장 윤기병, 종로서장 윤명운, 치안국 보안과장 이계무 등은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하자”는 데 뜻을 같이하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밤늦게 시경국장 김태선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전하고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를 얻어냈다. 장경근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터니 특경대를 무장해제시켜라, 웃어른께서도 말씀이 계셨다”라고 이승만의 사전 양해가 있었음을 암시하였다.
6월 6일 심야에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와 ‘윗어른’의 양해를 받은 이들은 반민특위 습격의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짰다. 행동 책임자는 반민특위의 관할 서장인 중부서장 윤기병이 맡기로 하였다. 윤기병은 새벽 일찍 중부경찰서 뒷마당에 전서원을 비상소집하여 차출한 서원 40명을 2대의 스리쿼터에 태워 중구 남대문로의 특위본부로 출동시켰다.
윤기병이 직접 지휘한 습격대는 특위본부 뒷골목(현 한전빌딩)에 도착하여 20명은 주변경계에, 나머지 반은 정문과 비상구, 각층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윤기병은 장탄한 권총을 꺼내들고 오전 8시경에 출근하는 특위직원들을 모조리 붙잡아 스리쿼터에 싣도록 명령하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검찰관 차장 노일환 의원과 검찰관 서용길 의원도 이들에 의해 무장해제 되었다. 뒤늦게 출근하다 사태를 목견한 김상덕 위원장과 김상돈 부위원장이 “국립경찰이 불법으로 헌법기관인 특위를 강점하고 직원을 불법체포하니 이게 무슨 행패냐”고 분노를 터뜨렸으나 경찰은 들은 체도 아니했다. 특위사무실의 점거사실을 전해들은 검찰총장 겸 특별 검찰관인 권승렬이 현장에 달려왔지만 오히려 경찰에 의해 몸수색을 당하고 출입조차 저지되었다.
현직 검찰총장의 휴대용 권총까지 빼앗는 경찰의 무지막지한 행동은 법질서나 위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만행이었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불법의 이유로 댔다. 검찰총장의 상부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의 배경은 이승만이 직접 김상덕이 거처하는 관사를 두 차례나 찾아와 악질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 등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듣지 않자 물리력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국회로 비화되어 이날 오후 열린 제13차 본회의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국회내무치안위원장 라용균 의원은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보고하면서 “특경대 무장해제는 국무회의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이 친히 명령한 것”이라는 대통령의 전언을 공개하였다.
특위습격사건이 이승만의 직접 명령이라는 발표에 의원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에다 사건 경위보고에 나선 장경근이 “특경대는 내무부가 인정한 국가경찰관이 아닌데도 특위가 임의로 임명하여 경찰관 호칭을 사용, 신분증명서까지 소지하고 경찰관 임무를 불법적으로 행사했다”고 말하고, “내무부가 누차 그 불법성을 지적, 해산을 중용했으나 특경대의 경찰권 행사가 더욱 늘어나 부득이 강제해산시켰다”고 변명하였다.
반민특위 간부들의 일괄사퇴서를 받은 국회는 새로운 후임 위원을 선출하여 김상덕은 조국남 · 조규갑 의원과 함께 특위위원으로 재선출되었으나 재차 사임하였다.
<1949년 반민특위 재판 광경 - 미디어스 >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에 놀란 국회는 다음날 내각 총사퇴와 압수한 반민특위의 무기와 문서의 원상회복, 내무차관과 치안국장의 파면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상정, 찬성 89, 반대 59로 통과시켜서 분노의 일단을 표시하고, 정치적인 수습 방안을 모색하였다. 협상 결과 특위가 구속한 최운하 · 조응선 등 친일경찰과 연행된 특경대원들을 교환 석방키로 하였다. 석방된 특경대원 중 부상자 22명은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참으로 어이없는 ‘협상’으로 상징적인 친일경찰이 석방되고 반민특위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까지 발생하여 국회부의장 김약수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섰던 노일환 의원 등이 체포됨으로써 특위활동이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곽상훈 의원에 의해 반민법 공소시효를 단축하자는 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었다.
반민특위 검찰관인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지지부진하니 반민법 제29조 중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토록 하자는 개정안을 내놓았다. 곽상훈은 “반민특위의 모든 공소시효를 중단해도 좋을 만큼 업무수행을 거의 끝냈다”고 엉뚱한 이유를 댔다. 1950년 6월 20일로 규정된 시효기간을 크게 단축시킨 내용이었다. 이 개정안은 표결에 부쳐져 74대 9로 쉽게 가결되었다.
후임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법무장관 시절부터 반민법의 모순을 지적하며 반민특위활동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겨온 이인이 맡게 되었다. 이인은 특위직원을 새로 임명하고 결원된 특별검찰관 및 재판관들을 보강하여 7월부터 잔무처리에 들어갔지만 특위는 이미 사양길에 들어섰다. 새 진용의 반민특위는 반민행위자들의 자수기간을 설정하여 체면치레라도 하고자 한 것이 예상외로 13명이 자수하여 체면유지를 시켜주었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민족정기는 굴절되었으며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친일반민 세력의 장기독재 구축의 전기가 되었다. 반민특위는 해방된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기대를 모으며 1949년 1월 8일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6.6사태 전날까지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쥔 이승만과 이에 기생하는 친일세력의 조직적인 도발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국회프락치사건, 김구 암살사건 등 정치적 외압과 “반민특위는 빨갱이”라는 친일세력의 반격과 음해를 견디지 못하고, 공소시효 기간이 단축되는 등 반신불수의 상태를 겪은 끝에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곧 민족양심과 사회정의, 나아가서는 민족정기의 패배였다. 바른 역사의 붕괴를 불러오는 서곡이기도 하였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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