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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의 현자, 그들의 진실

by 한종호 2019. 12. 24.

동방의 현자, 그들의 진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그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리고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자기 나라에 돌아갔다. (마태복음 2장 11절-12절)

 

어린 시절 성탄절의 시기가 돌아오면 우리는 동화 또는 전설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아이들에게 예수 탄생의 이야기는 일차적으로 역사나 신앙의 세계에 속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목자와 구유, 그리고 동방 박사들은 모두 이 동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은 학벌이나 가문이나 또는 지위가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면, 동방 박사는 무언가 모르게 신비함과 권위를 지니고 있었고 알 수 없는 먼 곳에서 온 지체 높은 인물들이라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예수 탄생을 최초로 증언하는 이들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양극단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서 있는 자리만이 아니라, 이들의 가슴속에 무엇이 담겨 있는가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그것까지는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가슴속에 있는 꿈과 간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에는 현실에 대한 경험이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의 경우, 이들은 다만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낙타를 탄 채 손에는 귀중한 보물을 한가지씩 들고 아기 예수를 찾는 기이한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동화에 전설적 요소를 추가하고 있는 것은 <큰 별>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들은 이 동방의 현자들이 밤낮으로 별을 연구하며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성술가 아니면 좀더 격상해서 우주의 운행을 짚어내려는 천문학자들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실로 별을 볼일이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으나 여전히 밤하늘의 별이 꿈과 운명과 사연을 간직하고 있던 시절, 그런 상상은 동방박사의 전설적 후광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조금 더 자라서는, 이들이 박사의 호칭을 받는 까닭이란 당시 최고 지식을 자랑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정상에 있는 일류 지식인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지적 권위를 누구도 감히 가볍게 볼 수 없어서 예수 탄생에 대한 증언은 권위를 더하게 되었다, 하는 식으로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려 하기도 했습니다. 밑바닥의 민중들인 목자들만이 아니라, 당대의 존경받는 최고 지식인들인 이들에게조차 예수 탄생은 이때까지 비밀로 닫혀 있던 천기의 드러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지요.

 

 

 

겸허한 영혼의 소유자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마태복음의 예수 탄생 증언의 이야기는 이렇게 지적으로 탁월한 이들마저 그 먼 곳에서부터 우주적 변화를 감지하고 예수 탄생을 목격하고 아기 예수에게 경배했으니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식이 될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높은 권위로 예수 탄생에 대한 의혹을 압도해버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마태복음의 예수 선교 전략, 즉 예수를 전하는 방식은 자칫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고 맙니다.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것이 이렇게 누군가의 높은 명성이나 지체를 디딤돌로 해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선교전략상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본질은 아닙니다. 본질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시대적 고뇌와,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이 사건이 답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동방의 현자들은 바로 이 답을 찾아 나선 사람들을 대변해주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무리 먼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며, 현실의 권세에 굴하거나 아부하지 않고 그 마음에 담긴 곧은 뜻을 그대로 지켜내면서 하늘의 뜻을 따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명 화려한 궁성의 침상에 있는 왕자가 아닐 진 데도, 하여 남루한 집안에 누워있었을 아기에게 시대의 희망과 꿈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이는 겸허한 영혼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방의 현자들이 유대 땅에 와 던진 질문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 이 한마디에 유대 땅과 당시 지배자였던 헤롯 가문은 온통 난리가 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만일 이들 동방의 현자들 말대로 된다면 헤롯 가문의 왕통이 이제 끊어진다는 것이 되며, 그것도 하늘의 큰 기운을 받아 태어난 왕이라는 것이니 보통 심각한 사태가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이들이 새롭게 출현한 왕에게 경배하겠다고 하니 이 소문이 퍼지면 유대 땅의 정신적 중심이 바뀌고 말 형편이 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따져보면, 헤롯 왕가 모르게 그 어디에선가 헤롯 체제에 도전하고 이를 전복시킬 움직임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니 그대로 놓아 둘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전의 기미가 보이면 그 싹을 애초부터 완전히 잘라버려야 후환이 없다고 여길 만한 처지가 된 것입니다. 결국, 헤롯은 당시 자신의 권세에 아부하고 빌붙어 지내던 지식인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만한 때와 장소를 파악하고 예수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을 죽여버리는 ‘유아학살’이라는 무서운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헤롯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씨를 모조리 말리겠다는 것이었으니, 당대의 백성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고 고난에 지쳐있었을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절절하게 그리는 새로운 왕의 모습

 

해서, 우리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라는 말 한마디에 헤롯이 보인 대응에서 당시 이들 백성들이 겪고 있던 고통과 어려움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란 그래서 결국, 이러한 고난의 시대를 생명의 시대로 변화시킬 희망과 능력을 압축해서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이 계속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언가 새로운 길이 열려야겠다, 모두가 마음으로 감복하여 뒤따를 수 있는 존재가 나와야겠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이 되는 역사가 펼쳐져야 한다, 이런 마음과 간구들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속에 담겨 있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추가하여 생각해야 할 바는 <유대인>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나라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점령지의 백성으로 고난받고 있는 팔레스타인들을 억압하는 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과 동일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권력과 재력과 언론을 장악하고 강자의 폭력을 휘두르면서 시오니즘의 인종주의를 내세우는 포악스러운 세력과 관련이 없습니다. 성서의 <유대인>은 도리어 오늘날 팔레스타인들과 같은 처지의 삶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로마제국의 압제에 시달리고, 내부적으로는 폭압적인 정치에다가 종교적 독선과 정죄에 그 마음과 육신이 한시라도 편할 순간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성서의 <유대인>입니다. 빼앗기고 짓밟히고 업신여김을 당하며 강자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그런 사람들이 이 성서의 유대인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왕>이란 이후 나사렛 예수의 모습에서 구체화되지만, 높은 자리에서 누리는 권력자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목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힘없는 백성들의 생명은 파리목숨처럼 여기고, 그 들의 삶은 언제 어떻게 짓밟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지체 낮은 사람들은 인간 대접할 필요 없다고 믿는 그런 야만의 시대, 야만의 정신과 용기 있게 맞서서 생명과 사랑을 자기 희생적으로 실현해내는 그런 존재, 그것이 이들 유대인들이 꿈에도 절절하게 그리는 새로운 왕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난에 처한 사람들의 아픔을 진정 자기 아픔으로 여기고, 생명과 삶을 유린당하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든 새롭게 회복시키며 악한 마음을 품고 이들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과는 자기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상대를 권위의식으로 눌러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화시키고, 폭력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설득하고 지위로 떠받들림을 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온유와 겸손으로 상대의 마음에 진심으로 다가가려는 이인 것입니다. 그는 외모로 상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 사람과 사귀려 하며 정죄가 아니라 관대함과 용서로 문제를 풀며 거짓으로 자기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세상에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그의 품은 뜻과 그의 삶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또한 그 무엇보다도 사랑과 생명에 자신의 전 존재를 겁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온 몸으로 뜨겁게 증언해나갑니다. 세상에서 그 무엇을 이룬다해도, 그 무슨 능력이 있다해도, 그 무슨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에게 사랑과 생명의 참된 기운이 없으면 그 성취와 그 능력과 그 배경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쓰여지는 독이 되는 것을 꿰뚫어보십니다.

 

그리하여 그는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겸허하며 그 영혼이 넓고도 넓습니다. 그 마음이 인간에 대한 다함 없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에게 우리의 마음이 진실로 열리고, 이런 존재에게 우리의 영혼이 평화를 느끼며 이런 존재에게서 우리는 용기 있는 희망과 능력 있는 꿈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존재처럼 되어 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 그 과정과 목표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성장의 여정

 

거듭 거듭 강조하지만 신앙은 바로 이 우리의 자아를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선택하고 길러나가는 아름다운 성장의 여정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되어갈 때, 세상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영혼과 마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자기 일상의 삶도 모두 그러합니다. 그런 마음과 영혼으로 성장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꾸준한 의지 없이 잘 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우리의 영혼에 왕, 그 중심이 되어서 우리가 살아가려 할 때에 우리 자신과 세상은 고난과 죄, 그리고 악과 결별하고 희망과 생명, 선과 의의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동방의 현자들, 그 가슴속에 담겨 있는 것은 그래서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을 진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삶을 밤하늘의 별처럼 진실로 아름답고 빛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의 출현이었습니다. 그런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면 그가 어린아이이건 이미 나이 들어 늙은 노인이건 가난한 자이건 부한 자이건 아니면 이름 없는 자이건 이름 있는 자이건 먼길 마다하지 않고 만나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다해 그 존재의 빛이 세상에 비추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이들의 마음에 있는 꿈이었습니다. 거대한 제국이 이를 이루지 못하며, 강성한 권력이 이를 성취할 수 없으며 높은 학식이나 막대한 재력이 이를 또한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작고 가난한 나라나 동네라고 우습지 않으며,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집안이라고 멸시할 만 한 것이 아니며 이제 갓 태어난 아기라고 뭐 볼게 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본 큰 별은 하나님의 마음이 인도하시는 바이었고, 그들은 그 하나님의 마음이 이끄시는 길이라면 그 어떤 희생이나 고난이라도 무릅쓰고 따르기를 결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혜, 그들의 현명함은 결코 그들의 학식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결한 따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백성들이 겪는 고난을 남들의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거대한 제국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인간에 대한 사랑에 차있었고 하나님의 뜻에 겸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동방의 현자,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바이며 우리가 그 뒤를 따를 길입니다.

 

하여 오늘날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의 삶에 눈뜨고 가슴아파해야겠습니다.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희망과 격려, 용기와 생명이 왕이 되는 그런 역사를 간구해야겠습니다. 그로써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태어나는 그런 기쁨을 우리의 기도제목으로, 우리의 신앙행위로 삼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미덕이요, 결단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과 삶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순결하게 따라 사는 아름다움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정작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는 일의 열매가 진정 달고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앞장서는 시대가 세상을 고귀하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시대에 진정한 답이 되는 기쁨과 축복을 얻습니다. 그의 삶과 영혼에 그리스도 예수의 영과 마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으로 우리가 살아갈 때 우리는 더 이상 동화와 전설의 세계가 아니라, 꿈이 현실이 되는 즐거움을 은총으로 체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김민웅/목사,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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