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젤의 지혜
“자비하신 하나님, 주님께 구하오니, 주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뜨겁게 원하고, 사려 깊게 탐구하고, 진실하게 인식하고, 온전하게 설명하여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아멘”
-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도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마음과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오늘 수학능력 시험을 보고 있는 모든 수험생의 마음도 굳게 붙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날이 많이 쌀쌀해졌습니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집니다. 저는 차가운 음료는 좋아하지 않지만 대기의 서늘함은 좋아합니다. 찬 기운을 느끼며 걸을 때 왠지 살아있다는 느낌이 강렬해지기 때문일 겁니다. 가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댄 채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강인한 모습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몸을 곧추세우게 됩니다. 사막을 배경으로 사는 이들이나 혹한의 추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 사소한 불편조차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나약한 삶이 떠올라 부끄럽습니다.
지금도 몸을 눕힐 한 평의 땅도 방도 없어 거리를 떠도는 분들이 계십니다. 추워하며 살게 해달라고, 이불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헤아리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어느 시인의 마음이 참 거룩하게 다가옵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도 세상에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외양간 말구유에 오신 분을 우리는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대림절이 시작되면서 바로 비대면 예배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지만, 교회 2층 로비에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구유가 놓여 있습니다. 바람막이조차 없는 외양간에 눕혀진 아기 예수, 동방박사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와 나귀와 양도 보입니다.
구유에 소와 나귀를 꼭 등장시키는 까닭은 알고 계시지요? 그것은 이사야서에 나오는 한 구절과 연결됩니다.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짐승도 제 주인의 은덕을 아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들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소’와 ‘나귀’는 우리의 부덕함을 상기시키는 일종의 거울입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구절은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슬프다! 죄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사1: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타락하면 가장 추한 것이 되는 법입니다.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로 호명되는 것은 하나님을 등진 이스라엘이지만, 우리라고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구유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흉악한 종자’라고 부르셨던 하나님의 마음이 곱다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투미하기만 한 우리 영혼을 닦아 주실 분은 하나님뿐임을 알기에 그 은총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유 만들기 전통이 시작된 것은 13세기 프란체스코 성인을 통해서였습니다. 1223년 성탄절을 보름 앞두고 그는 로마에서 돌아와 폰테 콜롬보에 있는 은둔소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상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성탄절을 뜻깊게 보내고 싶었습니다. 마침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의 기억과 함께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왜 그들은 구유를 만들어 놓지 않았을까?‘ 그는 지인인 죠반니 벨리타의 소유인 그레치오(Greccio)의 동굴에 구유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죠반니에게 서신을 보내 주님의 축일을 잘 지내기 위해 구유를 준비해달라고 말합니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합니다. 필요한 것 하나 갖추지 못한 그 갓난아기가 겪은 불편함을 최대한 생생하게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습니다. 아기가 어떻게 구유에 누워 있었는지, 그리고 황소와 나귀 옆에서 그 갓난아기가 어떻게 건초더미 위에 누워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고 싶습니다.”
죠반니는 성인의 말을 따라 구유를 만들었고, 성탄절이 다가오자 많은 수사와 신자들이 그 구유 앞에 모여 그리스도 탄생의 신비를 경험하고 기쁨을 누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동일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허물이 많은 우리조차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시는 그 한결같은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세상 물결에 따라 흘러가 버리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영혼의 닻입니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가족들이 함께 그런 구유를 만들어보는 것도 신앙적으로 유익할 것 같습니다. 매년 행하는 전통으로 삼아도 좋겠구요.
그러나 구유의 참 의미는 가난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낮은 자리에 오셨기에 밑바닥 사람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느끼실 수 있었고, 버림받음의 쓰라림을 견디셨기에 버림받은 이들의 신산스러움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으셨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이러한지라 예년과 같은 떠들썩한 성탄절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성탄절의 의미를 더 깊이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싶습니다. 구유에 오신 주님을 떠올릴 때마다 동화작가인 권정생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집에서 쫓겨나 거지 생활도 했고, 병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가 1981년에 이오덕 선생에게 보낸 편지를 보다가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몸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면서 그가 생각한 것은 이런 것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아름다운 편지,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p.232-3)
하나도 그른 것 없는 진실입니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겸허하게 그런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대림절 기간이 그런 경청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떠도는 말들, 우리 영혼을 어지럽히는 말들, 사람들을 갈라놓는 말들에 귀를 기울이느라 가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러 심신이 고달플 때면 카페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곤 했습니다. 이제는 당분간 카페에 머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 참 답답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긴장을 푸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리아나 허핑턴이 들려주는 가젤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가젤은 위험을 감지하면, 예컨대 표범이나 사자가 접근하면 부리나케 달아난다. 그러나 위험이 지나가면 곧바로 멈춰서서 아무런 근심도 없이 평화롭게 풀을 뜯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실제 위험과 상상의 위험을 구분하지 못한다.”(아리아나 허핑턴, <제3의 성공>, p.81)
가젤의 지혜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늘 긴장한 채 살 수는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평화를 기뻐하며 누려야 합니다. 느긋한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쌀쌀한 날씨에 감기 조심하십시오. 시간을 마련하여 외로운 벗들에게 손편지라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일랜드 축복기도로 여러분을 향한 제 마음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꼭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대의 발이 닿는 곳마다 길이 닦여 있기를
바람이 언제나 그대의 등 뒤에서 불어오기를
오늘도 햇살이 그대의 얼굴을 따뜻하게 비추기를
그리고 단비가 그대의 대지 위에 부드럽게 내리기를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그 크신 손으로 그대를 붙들어 주시기를
하나님께서 그 크신 손으로 그대를 붙들어 주시기를
아멘.”
2020년 12월 3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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