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타작 마당
“하나님의 말씀이 한껏 펼쳐지고 그렇게 풍성하게 전개되는 축복의 만찬에 대한 인간의 가장 깊은 그리고 적절한 반응은 무엇일까요? 가장 깊은 감사의 기도가 아닐까요? 감사 그리고 은총을 알아차리는 것 말입니다.“(Matthew Fox, Original Blessing, Bear & Co, p.1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며칠 동안 날이 참 포근했습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 저도 모르게 교회 화단을 기웃거렸습니다. 시퍼렇게 언 채 겨울을 버틴 화초에 약간 생기가 도는 것 같았습니다. 기분 탓이겠지요. 지난 주일에는 모처럼 방송팀과 목회자들 이외에 10여 분의 교우들이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왠지 예배당에 생기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상하지요? 이전에 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때는 빈 자리에 마음이 쓰였는데, 이제는 몇 사람이 앉아 계신 것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물을 뜨러 지하 친교실에 내려갑니다. 내려갈 때마다 주방 칠판에 적힌 메뉴에 눈길이 갑니다. ‘육개장, 어묵볶음, 김치’. 주방은 지난 해 1월에 마지막으로 공동 식사를 하던 그 시간에 딱 멈춰 있습니다. 쓸쓸합니다. 잠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두런두런 교우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소란스러움이 그립습니다. 샤를 페로의 동화집에 수록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떠오릅니다. 물레바늘에 찔려 공주가 깊은 잠에 빠지자 성 안의 시간도 따라서 멈춰버리고 맙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기 직전에 동작을 멈췄고,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일렁이던 그대로 멈춰버렸습니다. 시간이 다시 흐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왕자의 입맞춤, 곧 사랑입니다. 우리 주방과 친교실의 시간도 깨어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사람이 그리울 때면 여러 사람들이 보내준 편지와 엽서를 꺼내 다시 읽곤 합니다. 철학자인 김용규 선생님이 저를 가리켜 ‘하나님의 꿀벌’이라고 지칭하신 것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기도 합니다. 정말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봅니다. 단정한 글씨도 있고 흘려 쓴 글씨도 있습니다. 필체는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한다지요? 오래 전 독일의 어느 고성 박물관에 갔다가 종교 개혁자들과 인문주의자들의 글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글씨는 단정하기 이를 데 없었고, 루터의 글씨는 호방하고 활달했습니다. 츠빙글리의 글씨도 아름다웠습니다. 편지의 내용을 다시 읽으면서 그 행간 사이에 깃든 발신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하고, 그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기도의 두 손을 모으게 됩니다.
많이 힘들고 답답하시지요? 그래도 잘 견디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하면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인터콥 상주 모임이 코로나 감염의 숙주 역할을 했다는 소식이 조금 잠잠해질 무렵 우리는 또 다른 단체인 IM선교회가 운영하는 IEM국제학교에서 발생한 집단 발병 소식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비인가 종교시설에서 대규모 감염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이들로 인해 기독교가 컬트 집단처럼 여겨지고 있는 현실이 참 괴롭습니다. 사도행전이 전하는 초대 교회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샀다”(행 2:46)는 말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호감을 사지는 못할망정 손가락질은 당하지 말아야지요. 몰상식을 신앙으로 포장하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이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코로나19는 가파른 성장을 자랑하던 개신교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하여 움츠러들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메시아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눅 3:17) 지금이 어쩌면 가름의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도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고전 3:11-13). 지금은 검증의 시간입니다. 우리 스스로 참된 믿음 위에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개신교의 현실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소설가 헤더 모리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서 같은 민족의 팔에 문신 새기는 일을 했던 랄레 소콜로프와 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여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박아람 옮김, 북로드)라는 책을 썼습니다. 거기 나오는 한 에피소드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수용소는 육체적인 학대가 일쑤 자행되는 곳이지만 동시에 수용자들에게 인간적 모멸감을 안겨주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인간적 존엄을 박탈당한 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곤 합니다. 질병, 영양실조, 추위, 모멸감, 고통을 견디다 못해 어떤 이들은 철조망으로 달려가다가 감시탑에서 쏜 총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지옥 같은 그곳에서도 사랑이 꽃 피어납니다. 랄레와 기타도 그렇게 연인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그들이 인간임을 일깨워주는 아주 소중한 감정이었습니다. 자유롭지 않았기에 그들은 간수들을 매수하여 살짝살짝 만났습니다. 어느 날 랄레는 기타의 친구인 실카가 오랫동안 보이질 않는다며 기타에게 혹시 소식을 알고 있냐고 묻습니다. 망설이던 기타는 실카가 독일군 간부의 노리개가 되었다고 실토합니다. 그 말은 들은 랄레는 실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며 그 말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기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서 발끈하며 말합니다.
“무슨 소리야, 영웅이라니? 실카는 영웅이 아니야..”
기타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냥 살고 싶은 것뿐이라고.”
“그래서 영웅이라는 거야. 자기도 영웅이야. 실카와 자기가 살아 남는 쪽을 택한 건 나치놈들에 대한 저항이야. 삶을 붙들고 있는 건 저항 행위라고. 영웅적인 행동이야.”(p.202)
살아 남기를 택하는 것이 바로 나치에 대한 저항이라는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이들은 이 말 속에 담긴 그 지극한 아픔과 결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굴욕을 감내하며 살아남으려 한 것은 가련한 생의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곳에서 벌어진 참상에 대한 증언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던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 경험을 기록한 책에서 니체의 말을 인용합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굳세게 만들 것이다.” 그는 자기들이 겪은 경험은 세상의 어떤 권력자도 빼앗아 갈 수 없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의 경험뿐이 아니었다. 우리가 행했던 모든 것, 우리가 가질 수 있었던 위대한 사색, 그리고 우리가 겪었던 모든 고통이 어떤 것이든간에 과거 속으로 흘러간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거로 흘러가 버린 모든 것을 실존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과거에 겪었던 일은 일종의 실존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확실한 실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김충선 역, 청아출판사, p.139. 일부 수정)
과거로 흘러가버린 모든 것을 실존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허비하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아름다운 삶의 계기로 삼는 것이 지혜입니다. 모든 실패와 고통과 시련이 곧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더 넓고 깊은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벌써 1월 한 달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새해 첫 시간에 품었던 꿈들이 이미 퇴색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은커녕 하루하루 버티기도 벅찬 이들도 있습니다. 안개처럼 스멀스멀 우리 삶을 파고드는 우울과 허무에 갇히지 말고,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처럼 당당하게 삶과 마주하십시오.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십니다.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끝까지 번져 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위로부터 오는 희망이 우리 속에 유입되리라 믿습니다.
모처럼 새 교우들과 줌zoom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렇게라도 우리가 연결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선교회, 속회, 각 부서, 동호회에서 저를 청해 주시면 기꺼이, 감사하게 그 대화 속에 끼어들겠습니다. 저뿐 아니라 목회실 식구들 모두 그런 초대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일도 비대면 예배를 원칙으로 하려 합니다. 그래도 사정상 꼭 현장 예배에 동참하고자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전화로 알려주십시오. 스태프들을 제외하면 서른 분 정도가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날이 차가워진다고 합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조심조심 이 세월을 견디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2021년 1월 28일
김기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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