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슥10:9) 기독교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마치 씨앗처럼 ‘땅의 모든 나라 중에’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신 28:25). 이것은 그들에게 저주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머나먼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존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2)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미세먼지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만, 봄기운이 완연한 나날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건강에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 생긴 대형 백화점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공원이나 카페에도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고 있습니다. 감염병에 대한 경계심이 어지간히 느슨해진 것 같습니다. 행여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무서워 가급적이면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마음에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요즘 들어 시인 황동규 선생님의 <오늘 하루만이라도>라는 시집을 곁에 두고 한 편 두 편씩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연세가 80이 넘어서 쓰신 시인지라 관념적이지도 않고, 표현에 대한 강박관념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고, 깨달음을 나누어주겠다는 은밀한 의도도 보이지 않아 아주 담백합니다. 쇠약해지는 몸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연세이기 때문일 겁니다. 수영을 배울 때 힘을 빼고 물에 몸을 맡겨야 몸이 떠오르듯이 시간의 강물에 몸을 맡긴 이의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시인은 자기 몸의 변화를 가만히 응시하면서 그것을 시적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입니다.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처럼
가파른 언덕을 촛불 안 꺼뜨리듯 조심조심 내려와
맨땅에서 넘어졌다.”
(‘맨땅’ 부분)
언덕길을 팔랑팔랑 가볍게 뛰어 내려가는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아, 저 생명 덩어리’라는 말이 목에 차오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매사가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꽃잎 괜히 건드릴까 조심하는 바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산수(傘壽, 80세를 이르는 말)를 넘긴 분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기탁하는 데는 그만한 이미지가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스쳐가는 바람에 그만 촛불이 꺼질까 싶어 조심조심 걷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평탄한 곳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방심하다가 허를 찔리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이런 경험 없으신가요? 월요일마다 산에 오르던 때 이런 경험이 드물지 않았습니다. 특히 겨울철 산행이 그랬습니다. 정말 조심스럽게 내려오다가 이제 다 왔다 싶어 방심하다 흙 속에 숨어 있던 얼음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던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다음 구절이 참 절묘합니다. “어이없지 않다.”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는데도 어이없지 않다고 말합니다. 달관도 아니고 체념도 아닙니다. 삶의 곡절과 부침을 많이 겪어본 이의 담담한 자기 수용입니다. 나이가 든다고 하여 다 이런 마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이런 고요한 자기 응시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부푼 욕망의 격전장에서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반칙을 합니다. 재산 증식이 인생의 목표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공적 자리에 있으면서 얻게 된 정보를 이용하여 부당한 이익을 추구한 이들의 행태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전투구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협잡과 폭력, 혐오와 불신은 우리 사회를 불신 사회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시편 수업’을 진행하기 전에 드린 기도에서 세상 현실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성서가 그리는 현실은 아주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생생합니다.
부가 늘어갈수록 교만해지는 사람들,
기술이 발전할수록 늘어나는 파괴들,
혐오를 낳는 압제, 폭력을 낳는 혐오...
어딜 가나 가득한 폭력,
그리고 그 폭력으로 인해 조각나고 불타고
짓이겨지고 사라지는 삶,
무질서와 혼돈, 끝을 모르는 불안....“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의 기도>, 박천규 옮김, 비아, p.149)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개 비슷한가 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왠지 암울한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편의 시인들은 그런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면서도, “폭력의 한가운데서도 뿌리 뽑히지 않는 꿈을,/분노가 사무쳐도 흔들리지 않는 정의를,/상실과 실패 속에서/마르지 않는 슬픔의 노래를,/혐오로 불타오르는 세상에/희망을 심는 법“을 노래합니다. 시인들은 그러니까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꿈꾸는 이들은 현실을 모르는 몽상가 취급을 받을 때가 많지만, 꿈이 없다면 인간은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 사회가 또다시 떠들썩합니다. 땅과 집이 예전부터 투기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처럼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가지는 때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정책과 재산을 일시에 증식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맞물려 빚어낸 현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 각축에 끼어들지도 못한 채, 속절없이 절망의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기회를 잡지 못한 사람들은 공정하지 않은 세상 현실에 분노합니다. 욕망의 물결에 떠밀리고, 분노의 파도에 휩쓸리다 보면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잊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표점’(빌3:14)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표점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 삶은 지리산가리산 엉망이 되고 맙니다. 가끔 흔들릴 수도 있고, 길에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바른길을 걷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인간 속에는 두 가지 욕망이 상존합니다. 하나는 비좁은 일상에서 벗어나 광활한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나면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대개 여행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여행은 우리를 소진시키는 반복적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거리가 멀수록 시간의 속박은 줄어듭니다. 백패킹이나 캠핑족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런 욕망의 반영일 겁니다. 다른 하나는 안전한 둥지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그곳에 들어가는 순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고, 다소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어도 괜찮은 곳 말입니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고, 세상에서 입은 상처들이 회복될 수 있을 때, 우리 숨이 가지런해집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낯선 곳에 가면 낯익은 곳이 그립고, 낯익은 곳에 오래 머물면 낯선 곳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비좁은 곳에 있으면 광활한 공간을 꿈꾸고, 모든 방향으로 개방된 광활한 공간에 서면 안온한 장소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삶에 간섭하거나, 누군가에게 관찰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면 누구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그런 시선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네요. 반면 천지간에 나 홀로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친밀한 접촉을 갈망합니다. 이 두 가지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3:8)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가나안 땅은 그렇게 아름답고 넓은 땅은 아닙니다. 오히려 척박한 곳이 많고,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에는 협소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그 땅을 ‘아름답고 넓은 땅’이라 칭하신 것은 공간적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닐 것 같습니다. 그곳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새 땅입니다. 주인이나 관료가 부과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노예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말입니다. 폭력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기에 그곳은 아름다운 땅입니다. 성경에서 ‘아름답고 넓은 땅’은 주님의 사랑이 끊이지 않는 땅입니다. 성도들은 이런 땅에서 살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마5: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땅은 바로 그런 땅이 아닐까요? 우정과 사랑으로 빚어지는 자유의 영토 말입니다. 가급적이면 다가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 마십시오. 마음이 스산하여 찾아온 사람들이 우리와 만나 더욱 상처를 받고 돌아서지 않도록 애쓰십시오. 아주 바쁜 시간이라 해도 그를 전심으로 환대해 보십시오. 말은 적게 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서둘러 해답을 주려 하지 말고 그의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이런 태도야말로 누군가에게 설 땅을 제공하는 일일 겁니다. 본회퍼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사는 삶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춘분이 다가옵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고 파종을 준비하는 농부처럼, 이 난감하고 어지러운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씨를 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3월 18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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