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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사건을 일으키는 만남

by 한종호 2021. 4. 9.

“끝으로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고후 13:11)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을 지나면서 마치 오래 입은 상복을 벗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구별되게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삼감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순절 기간 동안 저를 사로잡았기 때문일 겁니다. 시편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입고 있는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신다고(시 30:11) 고백하지만, 아직 기쁨의 나들이옷은 준비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며칠 청명하더니 또 다시 미세먼지가 우리 시야를 가리고 있습니다. 그래도 명자나무 붉은꽃은 찬란하고 복사꽃은 화사합니다. 자주괴불주머니와 광대나물, 냉이꽃과 제비꽃도 저마다의 자태를 자랑합니다.

제게는 이 봄이 조금은 특별합니다. 지난 4월 5일은 제가 청파교회의 인연을 맺은 지 만 4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방황하고 있던 3월의 어느 날, 몇 년째 함께 조그마한 교회에서 동역하고 있던 목사님께서 함께 갈 데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온 곳이 바로 청파교회였습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풍채가 당당한 목사님이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우리를 맞아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박정오 목사님이셨습니다. 사실 나는 그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냥 선배 목사님께 인사를 여쭙는 자리에 저를 데려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두 분 목사님께서 한 동안 농담조의 이야기를 나누시더니, 한참 후에 생각났다는 듯이 박 목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전도사, 잘 왔어.”

최초로 들은 전도사라는 호칭입니다. 그 호칭이 매우 낯설게 들렸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김선생’으로 불리웠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목사님으로부터 ‘전도사’로 불리고 나니 뭔가 덫에 걸린 느낌이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목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내 목회는 말이야, 방목이야. 나는 울타리를 좁게 쳐서 양들이 옴짝달싹 못하게 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야. 사람들이 울타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게 하고 싶어. 그러니 김 전도사도 사람들을 동원할 생각하지 말아.”

그제서야 저는 제가 이 교회에 전도사로 초빙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건 제 의지와는 거의 무관하게 일어난 일입니다. 나중에 저는 그 목사님이 나를 청파교회에 팔아 넘겼다고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인생이란 스스로 길을 선택할 때도 있지만, 길에 의해 선택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일 때문일 겁니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저에게 목사님은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김 전도사, 내 눈치 보지 말고 소신껏 일해. 그러다가 나와 생각과 지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거든 깨끗하게 떠나.”

이 말이 제게는 아주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속으로 ‘그렇지, 내가 뭐 누구 눈치나 보고 살 사람은 아니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유보 없이 유쾌하고 호탕한 박 목사님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날이 어쩌면 제게는 운명과도 같은 날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그날이 제 운명의 지침이 바뀐 날입니다. 잠시 떠나 있을 때도 있었지만 저는 그날 이후 전도사로, 소속 목사로, 부목사로, 담임목사로 40년을 청파교회에 몸을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정말 많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분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많이 사랑받았습니다. 박 목사님은 맑고 깨끗하고 당당한 삶과 큰 울림이 있는 메시지로 제게 목회자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교우들은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저를 늘 넉넉한 사랑으로 감싸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저를 목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한 구심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시간이 우리 속에 새겨놓은 흔적 혹은 무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 여행을 하는 동안 만났던 많은 이들이 조형의 칼날이 되어 나의 인격과 태도와 믿음을 형성했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것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마커스 보그의 말을 좋아합니다. 믿음은 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가능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에 몸을 맡기면 물이 두둥실 우리 몸을 떠받쳐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돌보십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었던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쓰시는 부력의 도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김승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만남은 어떤 형태로든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 사건은 다른 말로 하면 변화입니다. 마음에 그리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 삶의 모든 가치들을 재배치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살던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물론 중요합니다. 우리들 속에는 그 동안 의미 있게 만나왔던 사람들의 숨결이 배어 있습니다.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 물론 부정적인 만남도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말았더라면 좋았을 만남 말입니다. 그와 만났기 때문에 내 삶이 복잡해지고, 더러워지고, 탐욕스럽게 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웃 사랑이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 맑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흔적을 남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공자께서 노나라 환공의 사당을 구경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의기欹器, 즉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운 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공자는 묘지기에게 이게 무슨 그릇이냐고 물었습니다. “자기 곁에 놓아두었던 그릇[유좌지기宥坐之器]입니다. 비면 기울고, 중간쯤 차면 바르게 서고, 가득 차면 엎어집니다. 이것으로 경계를 삼으셨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 그 그릇에 물을 붓게 했습니다. 그러자 묘지기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는 가득 차고도 엎어지지 않을 물건이 어디 있겠느냐고 탄식하듯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자 자로子路가 물었습니다. “지만持滿, 즉 가득 참을 유지하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따라내어 덜면 된다.” “더는 방법은요?” “높아지면 내려오고 가득 차면 비우며 부유하면 검약하고 귀해지면 낮추는 것이지. 지혜로워도 어리석은 듯이 굴고, 용감하나 겁먹은 듯이 한다. 말을 잘해도 어눌한 듯하고, 많이 알더라도 조금밖에 모르는 듯이 해야지. 이를 두고 덜어내어 끝까지 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방법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지덕至德을 갖춘 사람뿐이다.”(정민, <조심操心>, 김영사, p.30-31에서 재인용)

여기서 나온 말이 지만계영持滿戒盈입니다. 차면 덜어내고 가득 참을 경계하라는 뜻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가득 채워지는 순간 자기의 실상을 잊기 쉽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화덕은 금을 단련하듯이, 칭찬은 사람됨을 달아 볼 수 있다”(잠 27:21)고 했습니다. 칭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영혼의 전락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덜어내고 비우라는 말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충만한 은혜’, ‘충만한 복’,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표현을 심심찮게 듣기 때문입니다. 충만의 뜻은 ‘가득하게 참’입니다. 사람들은 ‘가득 참’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충만이라는 뜻의 헬라어 ‘플레로마pleroma’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다 채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 문자적 의미는 ‘가득하다’는 뜻이지만 신약에서 그 단어는 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현존, 능력, 풍요로움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이들은 스스로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누군가의 선물로 내놓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몸에 있는 가시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괴로웠기 때문에 그것이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했지만 하나님은 그 청을 들어주시지 않았습니다. 응답의 거절도 때로는 응답입니다. 거절된 응답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바울이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교만하게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고후 12:7a)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의 4차 대유행이 진행되는 것 같은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계심이 풀어졌기 때문일 겁니다. 또 다시 비대면 예배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깊이 고심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매개로 한 집단 감염이 또 다시 여기저기서 발생하면서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사뭇 날카롭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친밀한 교제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잠시 멈춰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복의 매개가 아니라 감염병의 매개가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하는 말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함께 써가야 할 신앙의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지체들은 다닌 연수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우리 신앙 이야기의 공동 저자입니다. 사실 저자는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손에 들린 필기구라고 말하는 게 합당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과 동행할 수 있음이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서로 영혼의 숫돌이 되어 모난 부분이 갈려나가고, 무디어진 부분은 예리하게 바뀌어 그분의 쓰임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빕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4월 8월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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