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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서 만난 듯 소탈한 시골약사 이야기

나는 세 번째 일요일마다 목욕탕에 간다

by 한종호 2021. 4. 28.


살아오면서 나는 여러 사람에게 많은 빚을 지었다. 내가 머물 곳이 없을 때  어떤 이는 자신의 작은 방에 나를 재워 주었고, 어떤 이들은 얼굴도 모르는 내게 장학금을 주었으며, 학창시절 선생님들은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주셨다. 가난했던 나는 여러 사람들의 돌봄과 배려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세상을 향해 빚을 지고 있다는 마음의 부담이 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렸다면 이자를 포함해서 그 돈을 갚으면 그만이지만 나를 도왔던 많은 이들은 내게 돌려받고자 빌려준 것이 아니기에 내가 갚을 수 있는 형편이 되어도 나는 갚을 수가 없다. 그들 중 어떤 분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기에 어떤 식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와 빚이 있다. 나는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지고 살아왔고, 이제는 가능하면 살면서 조금씩이라도 그 빚을 탕감해 가고 싶다. 그래야 내 마음이 조금은 홀가분해질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고 또 지금도 생각한다. 내가 받았던 방식대로 되갚기도 하고, 때론 다른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갚는 방식중 하나로 택한 것이 장애인 목욕봉사였다. 

오래전 내게도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소여물을 자르는 작두에 손이 잘려서 오른손이 없는 장애를 가지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어떤 경우에도 장애를 핑계 삼지 않으셨다. 왼손 하나로 모든 집안일을 해내셨고, 농한기엔 봇짐장사도 하셨다. 


할머니가 삶의 고통들을 참아내며 그리 억척스럽게 사신 이유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 손주들 때문이었다. 손주들을 잘 먹이고 싶어서 한 손으로 음식을 만들고, 텃밭을 가꾸셨으며, 손주들 손에 약간의 용돈이라도 쥐어주고 싶어서 봇짐장사를 나가셨을 게다. 나는 그 할머니의 네 번째 손녀였다.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서 시골집을 떠나던 날 할머니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집 앞 골목길에 서서 손을 흔드셨다. 내 나이 20살에 할머니는 78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언젠가 내가 어른이 되어 돈을 벌면 할머니에게 시장에서 파는 꽃무늬 덧버선이나 몸빼가 아닌 고운 빛깔의 좋은 옷을 선물해드리고 싶었는데 할머니는 그날을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 그 할머니 때문에 나는 손이 없는 분을 만나면 ‘손이 많이 시리시죠? 라고 물으며 잘린 손끝을 만져 보게 되고,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장애인 목욕봉사를 참여했던 첫날, 목욕탕에는 대체로 나이가 많으면서 장애나 기력저하로 인해 혼자서 목욕하기 어려우신 분들이 와 계셨다. 나는 그날 왼손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왼손과 팔을 스스로 닦을 수 없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왼팔을 어찌 닦으셨을까?’ 난 한 번도 할머니를 닦아 드린 적이 없었다. 같이 목욕을 한 적도, 때를 밀어 드린 적도 없고 그 왼손을 씻어 드린 적도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처음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할머니의 왼손을 생각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나의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에 대한 나의 미안함과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한 번의 목욕봉사는 열두 번이 되었고, 그 열두 번의 반복이 16년이 되었다. 

목욕봉사는 그냥 맘 편하게 그 시간만 채우면 될 것 같아서 별 생각 없이 시작했던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서 장애를 가진 분들의 때를 밀어드리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봉사를 하되 어떤 책임도 의무도 가지지 않고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고 싶을 때 쉽게 빠져나오고 싶어서 가능한 매달 참석하지만 절대 앞에 나서지 않았고 말없이 맡겨진 일만 했다. 개선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그 일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여러 의견을 내놓다 보면 종국엔 일에 대한 책임을 맡게 되는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면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다. 언제든 맘이 바뀌면 도망칠 수 있게 적당히 한발 뺀  모습이 처음 목욕봉사에  임하는 나의 태도였다. 그 당시 어린 자녀들과 근무시간이 긴 약국은 나의 이런 태도에 대한 적절한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태도는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겉으로 드러난 내 모습은 성실해 보였지만 나만 알고 있는 나의 내면은 언제든 힘들어지면 발 뺄 생각을 하는 불성실함 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런 나의 마음과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비에 옷이 젖듯 봉사활동을 함께하는 다른 봉사자들을 지켜보면서 내 태도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목욕봉사는 내게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목욕봉사는 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대중탕에서 벌거벗은 채 장애를 가진 분들을 씻기고 때를 밀어 드리는 일은 여러모로 힘든 일이다. 몸으로 때우면 되는 봉사라고 생각하고 시작했지만 이 일은 결코 몸으로만 때울 수 있는 봉사가 아니었다. 장애인 목욕봉사가 육체적으로 힘든 건 두말할게 없는 사실이다. 밖에서 남녀가 같이 하는 봉사는 힘든 일은 남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여성 목욕탕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온전히 목욕탕 안에 있는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거기다 장애를 가진 분들은 육체적 장애뿐만 아니라 불편한 몸으로 인한 피해의식과 정신적 장애를 동반하는 경우도 있어서 그분들이 가진 모순적인 면도 함께 겪어야 했으며, 장애인을 전염병을 옮기거나 더러운 사람처럼 생각하는 이들의 따가운 시선과 차가운 말을 들어야 할 때도 있어서 종종 마음이 상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최현진 목사 작품(<그래서 하는 말이에요> 중에서)


나도 피하고 싶은 분이 있었다. 우리는 이분을 투덜이 여사님이라고 부른다. 투덜이 여사님을 뵌 지는 9년 정도 된 것 같다. 긴 머리를 하고 긴 부츠를 신고 전동 휄체어를 타시는 하반신 장애를 가지신 분이다. 처음 뵈었을 때 이분은 다른 분들과 떨어진 곳에서 홀로 목욕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개인용 목욕세트를 갖고 다니셨고, 자신은 몸에 열이 많아 온탕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하시며, 샤워부스 근처에 따로 앉아서 나중에 등이나 밀어달라고 하셨다. 그 뒤로 나는 이분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혼자 씻기를 좋아하시는 분으로 생각하고 혼자 씻기 좋은 자리를 잡아 드린 후, 다른 분들의 때를 미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이 분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비난을 듣게 되었다. 
 
“저것들은 지들 몸 닦으러 목욕탕 왔나? 이렇게 내 팽개쳐두고 지들만 웃고 떠들고 난리야! 봉사하러 왔으면 봉사를 해야지!” 

뭐 대충 이런 불평이었는데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듣는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7-8명 정도 되는 봉사자가 12-3명 정도의 장애인이 목욕하는 것을 도우려면 정말 힘이 든다. 옷을 벗는 것부터 탕으로 옮겨드리고 나중에 때를 밀어드리고 옷을 입는 것까지 도우려면 정수리에서 흘러내리는 짠물이 눈에 들어가고 입에 들어가도 닦을 틈조차 없을 때가 있다. 목욕봉사를 한 날은 정말 온 몸이 노곤해지곤 한다. 나름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데 그 봉사를 받으시는 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나는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 뒤로 나는 이분을 더욱 피했다. 다행히 우리 팀엔 이해심 많고 헌신적인 봉사자들이 계셔서 내가 피한 자리를 누군가 항상 채우고 계셨다. 

몇 년쯤 지나 나이를 먹으니 마음이 조금 넓어졌는지 어느 날 나는 투덜이 여사님을 맡아서 최상의 서비스를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투덜이 여사님을 휄체어로 옮겨서 여사님이 원하시는 목욕자리를 골라 드리고 몸을 비누로 깨끗이 닦아 드렸다. 여사님의 몸에 비누칠을 하면서 나는 여사님의 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운 것에 깜작 놀랐다. “여사님, 다리가 너무 차요. 오늘은 온탕에 들어가서 몸을 좀 따뜻하게 하시면 어떨까요?” 투덜이 여사님은 그러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온탕으로 진입을 시도했다. 하반신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여사님은 상체를 들어 올리셔야 온탕으로 들어 갈수가 있는데 온탕은 생각보다 너무 높았다. 나는 “제가 안아서 올려 볼게요. 팔에 힘을 넣어서 엉덩이를 올려보세요!” 라고 말했다. 여사님은 힘들겠다고. 그러다 나도 다친다고 하셨지만 그 망설임에는 따뜻한 온탕에 몸을 담그고 심은 여사님의 마음이 보였다. 나는 다시 힘을 내었고 우리는 온탕으로 진입을 성공했다.  우리가 1초면 들어갈 수 있는 목욕탕 욕조가 이렇게 높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여사님이 그동안 왜 탕에 들어가지 않으셨는지 알았다. 여사님은 온탕이 싫은 게 아니라 탕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의 장애를 사람들이 보는 게 싫으셨던 거였다. 나는 투덜이 여사님의 얼음처럼 차가운 다리를 만지면서 그분의 차가운 아픔에 마음이 닿았고, 그분과 함께 온탕의 높이를 넘어서면서 그분이 만나는 세상의 벽을 만났다.

 

그제서야 나는 자존심 강한 그분의 투덜거림에 조금은 이해의 마음이 생기면서 온유해지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투덜이 여사님의 목욕이 끝나고 다시 밖으로 모시고 나올 때 여사님은 환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오늘 내가 호강했네! 몸도 마음도 따뜻해. 너무 고마워!” 투덜이 여사님도 차가운 벽 하나를 넘어서 몸에 온기가 스미니 따뜻한 미소를 지을 수 있고 감사의 말을 나눌 수 있는 분인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목욕봉사는 서로를 벌거벗고 만난다. 봉사를 받는 사람도 봉사를 하는 사람도 벌거벗은 채 자신의 취약한 몸을 드러낸다. 우리를 꾸미는 화려한 의상도 없고 지위와 이름이 새겨진 가슴팍의 명찰도 없다. 얇은 피부 속에 뼈밖에 남지 않아서 조금만 세게 문지르면 부서질 것 같은 나약한 육체를 만지기도 하고, 작은 발목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거대한 육체를 씻기기도 한다. 그분들의 몸을 구석구석 씻기면서 보게 되는 수술자국과 간신히 아문 욕창자국을 만지게 될 때 그들의 지나온 아픔과 현재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통감하게 된다.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마주한 벽을 같이 넘어보라. 같이 넘으려고 시도하는 순간 그 아픔을 이해할 것이고,  마침내 같이 넘는 순간, 둘은 같이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목욕봉사를 통해 배웠다.

딸이 고등학생이 된 이후, 나는 가끔씩 목욕봉사에 딸을 데려 가곤 했다. 딸이 일에 참여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서로 함께 나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더 늘어났다.  


우리는 투덜이 여사님과 뚱뚱이 할머니와 시각장애를 가진 복림할머니의 미소에 대해서 애기할 수 있었다. 목욕탕의 욕조가 보행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는 얼마나 높은 벽인지 애기할 수 있었고  휄체어를 조작하는 법에 대해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강한 육체와 그로인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 아이들과 함께 하는 목욕봉사는 내게 더 값진 시간이 되었다.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배운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느리게 성장한다. 내가 장애를 가진 분들과 목욕탕에 가는 것은 봉사의 시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배움의 시간이고 성장의 시간이고 사람을 이해하는 시간이었으며, 내가 세상에 진 빚을 갚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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