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당신 옆에 앉을 은총을 구합니다. 지금 하던 일은 뒷날 마치겠습니다. (중략) 지금은 말없이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 조용하며 넘치는 안일 속에서 생명의 헌사를 노래할 시간입니다.”(타고르, <기탄잘리>, 김병익 옮김, 민음사, p.18)
긴장된 시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지뢰밭 위를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합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아도 긴장된 표정이 역력합니다.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보면 불편합니다. 함부로 지적했다가 시비에 휘말릴 것 같아 얼굴만 찌푸리고 재빨리 지나칩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마주 선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 일을 삼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자유는 위험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한 밤중에 등불을 밝혀 들고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분별하지 못하는 당신이 등불을 들고 가는 까닭이 뭐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등불을 밝혀든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이 배려의 마음일 겁니다. 배려는 우리 일상에서 꼭 드러나야 할 사람됨의 드레입니다.
교회 예배도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갔습니다. 겨우 석 주 대면 예배를 드리고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가자니 속이 쓰렸습니다. 허탈한 느낌도 들었구요. 학교나 유치원, 어린이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난감해 합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비상한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다면 좀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 역시 벼랑 끝에 내몰린듯 위태로운 나날입니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만, 심리적인 압박감 역시 큽니다. 다들 어떻게들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친밀한 이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긴장도 좀 풀어지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도 좀 덜어지련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 무더위 한복판을 통과하며 겨울을 떠올리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가끔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칼바람을 피하며 겨울을 견디는 로제트 식물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민들레, 질경이, 냉이, 꽃다지, 달맞이꽃, 개망초 등이 여기에 속한다지요? 로제트 식물은 아니지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잘 자란다는 인동덩굴도 떠오릅니다. 가끔은 식물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곧잘 비애에 빠지는 것은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만, 고통은 피하려고 할수록 고통의 장악력은 점점 커집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인생은 본디 고달픈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가지런하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을 풀어야 할 과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살아내야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향이 분명하다면 명백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순간순간 성실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한 걸음만 나아가도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먼 미래를 그려볼 것 없이 지금 당장 절실한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박지성은 세계적인 축구 선수였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도 슬럼프로 위기를 겪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플레이가 좋지 않으니 홈 관중들도 그가 공을 잡기만 하면 야유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들어가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공을 받고 그 공을 다시 동료에게 패스하는 것은 축구 선수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는 패스를 연결시킬 때마다 자기 스스로를 칭찬했다고 말했습니다. ‘잘했어.’ 어처구니없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런 자기 긍정이야말로 남들의 평가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집중할 수 있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기를 향할 때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로 귀결되고, 타자를 향할 때는 ‘선망’이나 ‘원망’을 낳습니다. 어느 것도 건강한 감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루 중에 몇 번이라도 자기 마음을 살피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을 살피노라면 별 것도 아닌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자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들어보셨지요?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런저런 말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 오롯이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이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금방 다른 생각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맙니다. 그것을 일러 분심이라 합니다. 나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떠돌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다시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기도에 몰입하기 전에 단어 하나를 선택하고, 분심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 단어를 조용히 떠올림으로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평화, 자유, 하나님, 고요…’ 등 어떤 단어라도 괜찮습니다. 그 단어를 일러 ‘거룩한 단어’(sacred word)라 합니다. 흙탕물을 가만히 놔두면 흙이 가라앉듯 우리 마음도 고요함 속에 머물 때 가지런해집니다. 마음이 가지런해졌다는 말은 단순함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닐까요?
화가인 장욱진 선생은 ‘나는 심플하다’라는 말이 자신의 단골말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속뜻은 ‘나는 깨끗이 살려고 고집하고 있노라’입니다. 그 마음을 찾으려 했기에 그의 그림이 순박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지러운 시대일수록 들뜨고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고 진리라는 중심에 연결되어야 합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질문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진리를 찾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매일 매일의 삶에서 단순함과 정직함을 실천합니까?” “함께 예배드리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조화를 잘 나누고 있습니까?”(로버트 L. 스미스, <퀘이커 지혜의 책>, 박기환 옮김, 사월의 책, p.67) 질문은 우리를 성찰로 이끕니다. 스스로 묻지 않을 때 삶은 더러워집니다. 단순함을 실천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세상 안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욕구, 최상의 상태로 나아가려는 욕구를 좇을 자유를 허락하는 것을 말합니다.”(로버트 L. 스미스, 같은 책, p.88)
삶은 복잡하고 모호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욕망의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며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 삶은 늘 뿌리가 없기에 늘 흔들리고, 중심이 없기에 늘 고단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욕구야말로 단순한 삶의 요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삶을 순례로 이해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단순함에 이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박이약지(博而約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폭넓게 섭렵하되 하나의 초점에 집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빌 3:8b-9a)
이런 목표가 있었기에 바울은 어떤 난관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팬데믹 상황은 부산하기만 한 우리 삶을 단순하게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님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탈리아에 있는 산타 치아라 채플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한 유물 가운데 하나는 프란체스코 성인과 그의 형제들이 읽던 성무 일과서입니다. 그 책의 앞 페이지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평생의 동료였던 레오 수사가 적어놓은 글이 있습니다.
“복되신 프란체스코는 그의 동료인 안젤로 형제, 레오 형제를 위해 이 성무 일과서(breviary)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늘 이 성무 일과서를 가지고 수도 규칙에 따라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병 때문에 성무일도(聖務日禱 *시편, 찬송, 기도, 낭독으로 구성되어 하루에 여러 번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수도자들의 공동 기도)를 드리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그분은 누군가 낭독하는 음성이라도 들으려고 하셨습니다. 일평생 동안 그는 그 직무에 신실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복음서 사본도 가지고 계셨는데 병이나 다른 사유로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면 누군가 그날의 복음서 말씀을 낭독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 죽는 날까지 그 신실함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사부님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을 때면 나는 예배 중에 늘 그러했던 것처럼 기도 중에 내 영혼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경배하곤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프란체스코 사부께서는 복음서의 말씀을 읽거나 경청하고 나면 늘 주님에 대한 존숭의 표시로 그 성경에 입을 맞추셨습니다.(하략)”(Theophile Desbonnets, , Porziuncola, p.103)
이런 태도와 마음이 있었기에 그는 그리스도 이후에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분으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저 자신도 이 마음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힘겨운 나날입니다. 며칠 후부터는 한반도가 열섬에 갇힐 거라는 보도도 접했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때야말로 우리 믿는 이들의 아름다움이 드러나야 할 때입니다. 주변에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허위단심으로 올라간 산마루에서 만나는 서늘한 바람이 지친 몸과 마음을 소생시키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시원한 바람이 되려고 노력하십시오. 주님이 주는 평안이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7월 1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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