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떠서 생각한다. 나는 그동안 받기만 했다고, 받은 것들을 쌓아놓기만 했다고, 쌓인 것들이 너무 많다고, 그것들이 모두 다시 주어지고 갚아져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살아야겠다고……”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 일기,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p.94)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수신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이라고 칭했습니다. 그리고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고전 1:2)라고 말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구절을 많이 묵상했습니다. 특히 ‘각처’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간간이 기도를 부탁하러 교회에 들르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여럿이 모일 수는 없지만 제 사무실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혼잣소리로 여러분께 인사를 건넵니다. “거기 다 잘 계시지요?”
처서 절기인데도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늦장마처럼 흐린 날이 많습니다. 남녘에는 태풍 오마이스가 스쳐 지나가면서 많은 비를 뿌렸습니다. 건물이 침수되고 도로가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매해 반복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자연 재해를 겪을 때마다 인간의 작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 효창 공원을 천천히 걷다가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가 얕아서인지, 그 자리에 노박이로 서 있는 것이 지루했는지 나무는 뿌리를 드러낸 채 벌렁 누워 버렸습니다. 소나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텅 비었습니다. 조금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그 광경에 또 익숙해지겠지요? 세상 사는 이치가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사별한 교우들이 차마 그가 머물던 공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치 그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겁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그의 부재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겠지요?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삶의 다양한 풍경들이 빚어집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부재하는 현존? 하나님을 우리는 그렇게 경험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도쿄에서는 패럴림픽이 진행 중입니다. 하계 올림픽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하지만 ‘스포츠는 세계와 미래를 바꾸는 힘이 있다’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이 대회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평화의 제전입니다. 신체장애, 지적장애, 시각장애, 뇌성마비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 자기들이 갈고 닦은 기량을 마음껏 펼치는 현장은 그 자체로 감동입니다. 장애를 안고 산다는 것은 참 힘겨운 일입니다. 몸에 조그만 고통이 찾아와도 우리는 전전긍긍합니다. 당연하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음을 알 때 우리는 아주 조금 겸손해집니다. 그런데 장애를 안고 태어나거나, 중도 장애를 입은 이들의 고통과 어둠을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깊은 좌절의 늪에 빠져들 수도 있고, 원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애를 자기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그 가운데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발휘하려는 이들은 얼마나 귀한 존재들입니까?
저는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로부터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이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철학적 우회를 거쳐야 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존재의 용기란 우리를 공허와 무의미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려는 현실을 경험하면서도 기어코 자기 존재를 지속하고 또한 긍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용기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고백하든 고백하지 않든, 자기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이들은 위대합니다. 많은 이들이 패럴림픽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아내와 길을 걷다가 본 광경이 떠오릅니다. 비둘기 몇 마리가 오졸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도시의 풍경입니다만 어느 순간 아내가 ‘어머, 저기 좀 봐요’ 하고 말했습니다. 비둘기의 가슴께에 광고 전단지 테이프가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어쩌다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비둘기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걷는 방향을 이러저리 바꿔보고, 깃털도 움직거려 보지만 테이프가 떨어질 리가 없었습니다. 도와주고 싶어 조금 다가서면 위협으로 느꼈는지 비둘기는 다른 방향으로 황급하게 달아났습니다. “한번 날아봐. 그러면 떨어질지도 몰라.” 얼마 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아픈 새끼를 입에 물고 동물 병원을 찾아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살다보면 정말 암담한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당사자에게는 한계상황처럼 여겨지는 일들 말입니다.
주님은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고는 물으셨습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눅 10:36) 주님은 ‘누가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을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는 질문으로 바꾸셨습니다. 이웃은 지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보복의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처지가 더욱 딱하게 되었습니다. SNS를 통해 탈레반이 기독교 선교사들을 처형하려고 하니 기도해 달라는 요청이 유포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대개 가짜 뉴스로 드러났습니다. 이슬람 신자들을 테러리스트로 특정하려는 의도 때문일 겁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받아들일지의 문제가 국제사회의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일단 우리 정부는 탈레반의 보복 위협 아래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 400명을 군용기로 데려오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프간 재건에 협력한 대사관, 병원, 직업 훈련원 직원 및 가족들입니다. 잘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설 땅이 없는 이들에게 설 땅을 제공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피렌체 대성당 건너편에 있는 산 조반니 세례당 건물은 청동문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물과 내부의 정교한 모자이크로 유명합니다. 안드레아 피사노가 남쪽문에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관련된 부조물을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희망’(Spes)입니다. 날개 달린 천사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희망을 잡으려고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치 나비나 잠자리를 잡으려고 발 끝을 세운 채 조심조심 걷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등 뒤로는 날개가 달려있지만 천사는 다만 손을 뻗고 있을 뿐입니다. 희망은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피사노는 희망이란 본래 희박한 것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런데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는 이 작품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천사가 잡으려 하는 공중에 있는 어떤 주머니가 희망인 줄 알았지만, 실은 날개를 가진 저 존재가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발터 벤야민의 말, 즉 “희망은 날개를 갖고 있다”는 말을 힌트 삼아 그 천사가 희망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왜 희망일까? 무엇인가 ‘곁으로’ 다가가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이 되려면 ‘곁으로’ 움직여야 한다. 손에 닿지 않더라도 ‘곁으로’ 움직이는 순간, 날개 달린 존재는 희망이 된다. ‘곁으로’ 움직이는 순간, 거기에 진실이 있다.”(김응교, <곁으로>, 새물결플러스, p.27)
‘곁으로’ 다가서는 움직임이 곧 희망이라는 말은 많은 것을 암시합니다. 다가섬으로 내게 유익이 될 만한 사람 곁으로 가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다가섬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때로는 위험할 수도 있을 때, 그 다가섬은 희망이 됩니다. 누군가의 곁에 다가가 그의 설 땅이 되어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교우들 가운데 이렇게 힘들고 지친 사람들 곁으로 다가서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인정의 황무지인 이 세상에 희망을 파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현재라는 시간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채우는 이들입니다. 온몸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돌보는 분들은 치열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갈 6:2)라고 말했습니다. 남의 짐을 지는 행위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물론 믿음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견디기 어려울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8월 마지막 주일이 다가옵니다. 환절기 건강에 유의하시고,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려고 애쓰십시오. 그분의 현존이 느껴지지 않더라도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늘 우리를 감싸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손이 되어 가슴 시린 이들을 감싸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8월 2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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